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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성 서씨, 10대 國班 중 하나
“달성(達城) 서씨 집안을 꼽을 수 있다. 달성은 대구를 가리킨다. 달성 서씨는 우리나라 10대 국반(國班·양반 중의 양반)에 들어갈 만큼, 조선 후기에 벼슬을 한 인물을 많이 배출한 명문가다. 달성 서씨도 출발은 달성이지만, 이 집안 사람들이 전성기 때 거주하고 활동하던 지역은 역시 서울이다. 대구에서 산 게 아니라는 말이다. 조선 후기 영남 출신 노론 집안의 핵심이 장동 김씨라 한다면 다른 한 축을 담당한 파트너가 달성 서씨라 할 수 있다. 테니스에 비유하면 같은 복식조였다고 할 수 있다.
달성 서씨 중 약봉(藥峯) 서성(徐?·1558∼1631)이 유명하다. 약봉 선생의 후손만을 지칭할 때는 대구(大丘) 서씨라고 달리 부르기도 한다. 약봉 선생은 대제학을 지낸 서거정의 형님 고손이다. 약봉 선생의 아버지가 임청각의 외동딸과 결혼해 그를 낳았다. 아버지는 퇴계 선생의 수제자 중 한 명이지만, 그가 태어난 지 1년 만인 23세 때 사망했기 때문에 그는 다섯 살 때 서울로 올라갔다. 이후 율곡학파와 연결된다. 약봉 선생은 임진왜란 때 선조를 호종(扈從)했으며 정묘호란 때도 왕을 강화도까지 호종했다. 이후 판중추부사, 병조판서를 역임했다. 약봉 선생은 율곡과 송익필의 문인이었으므로 후손들은 이후로 노론에 속했다.
영남 출신이지만 노론이었기 때문에 조선 후기에도 벼슬이 끊이지 않았다. 자손 중 대과 급제자가 123명이다. 주로 서울에 거주했으므로 경파(京派)라 한다. 그래서 ‘서지약봉(徐之藥峯)이요 홍지모당(洪之慕堂)’이라는 말이 생겼다. ‘서씨 가운데는 약봉이 유명하고, 홍씨 가운데는 모당이 유명하다’는 뜻이다. 모당(慕堂)은 선조 때 대사간과 경상도 관찰사를 지내며 활약한 인물인 홍이상(洪履祥·1549∼1615)의 호다.
한나라당 대표를 지낸 서청원씨가 약봉 선생의 14대손이다. 자세하게 설명하면 약봉 선생의 넷째아들인 도위공(都尉公) 서경주의 후손이다. 도위공은 선조의 맏사위, 즉 부마였다. 보통 ‘도위공파’라 부른다. 도위공파인 서청원씨 집안은 대구 서씨 가운데서도 알아주는 1급 집안이다. 우리나라 정치인 중 집안이 가장 좋은 사람이 ‘삼한갑족(三韓甲族)’이라 부르던 소론 집안 이종찬씨와 서청원씨인데, 이종찬씨는 그래도 알려졌지만 서청원씨의 경우 윗대의 집안이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서청원씨의 직계 조상은 8대가 내리 연속해서 대과 합격자를 배출했다. 이중에서 2명은 수석 합격자다. 세간에서는 이 집안을 3정승 3대제학을 배출한 집안이라고 했다. 숙종대인 1680년 서경주의 고손인 서종태(徐宗泰)가 영의정을 지냈고, 그 다음 대에는 1710년 서명균(徐命均)이 좌의정, 영조대인 1740년 서지수(徐志修)가 영의정을 지냈다. 3대가 내리 재상을 지낸 것이다. 그 다음 1772년 서유신(徐有臣)이 대제학을 지냈고 정조대인 1789년 서영보(徐榮輔)가 대제학, 순조대인 1827년 서기순(徐箕淳)이 역시 대제학을 지냈다.
이 중 서영보는 ‘만기요람(萬機要覽)’의 저자로 유명하다. ‘만기요람’은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초 조선왕조의 재정과 군정에 관한 내용을 집약한 책이다. 서영보의 둘째아들이 역시 대제학을 지낸 서기순이고, 셋째아들 서사순도 충청도 온양군수를 지냈다. 온양군수를 지내면서 이 후손이 충남 천안에 살게 됐다. 서청원씨가 천안 출신인 것은 이 때문이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영남에 기원을 둔 집안 가운데 조선 후기에 가장 이름을 날린 두 집안은 장김인 청음 선생의 후손과 대구 서씨인 약봉 선생의 후손이다. 그리고 대구 서씨 가운데 가장 유명한 집안이 서청원씨 집안이다.”
달성서씨 (達城徐氏)
달성서씨는 조선조에 영의정 7명, 좌의정과 우의정 각각 한명씩 총 9명의 상신(相臣)을 배출하였고 대제학 6명, 왕비 1명으로서 정승의 배출은 전주이씨가 22명으로 가장 많고 동래정씨(東萊鄭氏)가 17명으로 그 다음이며 신안동김씨가 15명, 청송심씨(靑松沈氏)가 13명, 청주한씨(淸州韓氏)가 12명, 여흥민씨 (驪興閔氏)가 12명, 파평윤씨(坡平尹氏)가 11명에 이어 남양홍씨(南陽洪氏)와 같이 제8위이다.
달성서씨의 대표적 인물은 사가정 서거정(四佳亭 徐居正)으로서 세종과 성종에 이르는 6대왕조를 섬긴 신하로서45년간 6조의 판서와 대제학을 지냈으며, 성리학자로서, 한문학과 천문.지리.의약 등에까지 통달하였으며 경국대전, 동국통감, 대동여지승람,동문선, 동인시화를 편찬하고 향약집성방을 국역하였다. 고려 성리학의 적통인 양촌 권근의 외손자이며 그의 종현손 약봉 서성이 달성서씨 가문을 명문의 반열에 오르게 하였다.
약봉 서성은 율곡 이이와 귀봉 송익필의 문인으로 공조판서와 판중추부사에 올랐으며 서인인 까닦에 인조반정을 계기로 그 일가는 전성기를 맞았다. 네아들 모두 출중하였고 특히 서경우(徐景雨)는 우상(右相)에 올랐으며 선조의 부마가 된 서경주(徐景주)의 가문이 가장 번성하였는데 문벌가로서 널리 알려졌다. 그의 손자 서문유(徐文裕)는 이조판서이고 서문중(徐文重)은 영의정, 문유의 아들 서종옥(徐宗玉)은 이조판서, 서종옥의 아들 서명선(徐命善)은 영의정, 서명응(徐命膺)은 대제학, 명응의 아들은 직제학, 손자 서명거 (徐有거)는 대제학에 올랐으며 병조참판 서문상(徐文尙)의 아들인 서종태(徐宗泰)는 영의정겸 대제학, 그의 두 아들인 서명균(徐命均)은 좌의정, 서명빈(徐命彬)은 이조판서에 올랐으며, 명균의 아들
서지수(徐志修)는 영의정, 지수의 아들인 서유신(徐有臣)은 대제학, 그의 아들 서영보(徐榮輔)도 대제학, 서영보의 아들 서기순(徐箕淳) 또한 대제학에 올라 3세를 이어 문형을 배출하였고, 서경보(徐耕輔)는 이조판서에, 서긍보(徐兢輔)는 참판. 그의 아들 서정순(徐正淳)은 예조판서, 서당보(徐堂輔)는 영의정을 지냈다. 따라서 서종태- 서명균 - 서지수는 3세 상신을 지냈고, 영의정 서지수의 아들 서유신이 대제학에 올라 서유신 - 서영보 - 서기순이 3세로 연이은 대제학을 배출하였다. 서종태로부터 직계 5대 가족이 3세 상신에 3세 문형을 배출한 명문인 것이다.
4대 최고 문형 가문, 대구서씨/세 가지 뛰어나고,네 가지 없어
한국명문 (2004-10-29 오후 9:57:58) Hit : 156 Vote : 11
조선조 중, 후기 4대 최고 문형가문, 대구서씨/약봉가"세 가지 뛰어나고,네 가지 없어"
약봉 서성은 다섯 아들을 두었다. 그 다섯 아들은 경우, 경수, 경빈, 경주, 경습(조졸)이다.
-------맏집[서경우] 상신 2명-----
첫째집 경우 집안에서는 2명의 상신을 배출했다.
서경우는 약봉의 맏아들로 1573년에 태어났다. 자는 시백, 호는 만사이다. 1612년 정주목사가 되었으나 광
해군의 혼정으로 벼슬을 10여년이나 은거했다. 1624년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왕을 호종하고
1627년 정묘호란을 당하여 어가가 강화도로 갈 때에 간관으로 시종을 하였다. 그 후 대사간, 경기감사, 대
사헌, 도승지에 이어 1643년 형조판서가 되었다. 1644년 약봉가에 첫 상신으로 우의정에 올랐다. 향년이 73
세로 1645년에 별세하였다.
서문중은 경우의 장손이다. 대구서씨의 족보를 처음 창간했다. 정리의 둘째 아들로 종가의 당숙 원리에
게 입양하였다. 1657년에 진사시에 합격하여 1680년 문과에 장원하고 다음 해에 광주부윤에 발탁된 후 경
상도관찰사를 거쳐서 어영대장이 되었다. 1687년에 형조판서에 올랐으며 1690년 동지부사로 청나라에 다
녀와 1694년에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에 등용되었다. 1696년에 훈련대장을 지내고 형조판서와 병조판서
에 이어서 우의정에 이르렀다.
1698년에 사은사로 또 다시 청나라에 다녀 온 후 1699년에 좌의정에 오르고 1700년에 약봉 가문에서는 최
초로 영의정이 되었다. 노년에 판중추부사로 옮겼으며 기로소에 들었다. 1709년에 별세하니 향년이 76세
다.
--------둘째 집,서종제[영조국구] 서광범[갑신정변 소장파 인물] 서재필[독립신문 창간]-----------
둘째 집 경수 집안에는 상신 1명을 비롯해 많은 고위 관리를 배출하였다. 정성왕후의 친정 집안이기도 하
다. 7대 문과 급제의 전통을 자랑하는 명문이다.
서종제는 경수의 증손으로 정성왕후의 친정 아버지[영조 국구]이다.달성 부원군에 봉해지고 영의정에 증
직이 되었다. 그 현손[용보]이 영의정에 올랐다.
또 서용보의 증손이 광범이다. 자는 서구, 호는 위산이다. 1859년 생이며 병조참의를 지내고 1884년에 김옥
균, 박영효, 서재필, 홍영식 등과 함께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나 청나라 군대의 개입으로 3일만에 실패를 했
다.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건너가서 머물렀다. 10년 뒤인 1894년 갑오경장으로 인한 제2차 김홍집 내각의
법무대신, 제4차 김홍집 내각의 학부대신을 역임하였다.
서재필은 광범의 열셋촌 조카이다. 1864년 생이다. 호는 송재이다. 1882년 문과하여 1884년 김옥균과 함께
갑신정변에 적극 참여했다. 그 때 병조참판에 임몀되었으며 갑신정변 후에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을
가서 1888년 의학공부를 하여 의학박사가 되었다. 갑오경장이 있었던 이듬 해인 1895년에 귀국을 하였다.
이 때에 국민 계몽이 시급함을 인식하고 우리나라 최초의 신문을 창간하였다. 이 신문이 바로 독립신문이
다.
서종신 집 7대 문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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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종제의 적은 집 [서종신 집]도 7대 문과 급제를 냈다. 서종신의 아들 명구[문과,대사헌]를 시작으로 서
효수, 유린,준보, 기순, 상조, 병찬에 이르는 직계 7명이 모두 문과에 급제하는 영광을 안았다.
셋째 집 첨추공 집안은 자손이 번창치 못하여 미미하였다.
------약봉가의 제1명문 서경주 집-------
넷째 집 경주 집안은 상신이 6명이요, 대제학이 5명을 배출하여 대구서씨를 명문거벌로 만들었다. 뿐만 아
니라 3대 석학을 낳아 더욱 빛을 발하였다.
서경주는 정리[남원공] 정리[파주공] 진리 3형제를 두었다.
서정리[남원공]가 문상, [문중<몽어상공>,큰 집으로 출계], 문하, 문징, 문유, 문복, 문일, 문행 등 9형제
를 낳았다. 9형제 중 서문상 집안이 3대 상신과 3대 대제학을 배출했다.
3대 상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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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종태는 3대 상신의 첫번째이다. 1675년 생원시에 장원한 후 1680년 문과하여 검열이 되었다. 1694년 승
지로 발탁되고 대사간,대제학, 공조판서를 역임했다. 1703년 동지사로 청나라에 다녀 와 한성판윤과 의금
부사를 거쳐 1703년에 우의정에 오르고 1706년에 좌의정, 1711년 영의정이 되었다. 3정승 6판서를 두루
다 역임하였다.
두번째는 서명균이다. 생졸년;1680-1745. 자는 평보,호는 소고 혹은 보졸재이다. 그는 아버지,아들과 함께
3대가 상신이며 부인도 아버지 3대[김구 우의정, 김재로 영의정, 김치인 영의정]가 상신이다. 1710년 문과
하여 이조참의로 있을 때 희빈 장씨를 탄핵한 윤지술을 구하려다가 김일경 등의 공격을 받고 안악군수로
좌천되었다. 1727년 이조참판을 지내고 1728년 동지사로 청니라에 다녀와 호조판서가 되었다. 부제학으로
실록청도청당상을 겸하여 [경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1736년 세자책봉 주청사로 청나라에 다녀와 판
중추부사를 지냈다. 첨렴하기로 이름이 높았다.
세번째는 서지수이다. 생졸년;1714-1768. 자는 일지.호는 송옹 혹은 졸옹이다. 1740년 문과하여 양관 제
학, 대사헌, 이조판서를 거쳐 1766년 영의정에 이르렀다. 대사헌으로 김상로,홍계희 등이 장헌세자의 비행
을 조작, 허위 보고한 것을 탄핵하였다. 정조가 왕위에 오르는 데 크게 공헌하여 정조의 신임이 두터웠다.
청렴결백하기로 유명했다.
3대 대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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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대 대제학의 첫번째는 서유신이다. 생졸년;1735-1800년.자는 순오이다. 1772년 문과하여 양주심찰어사
가 되어 군기를 점검하고 승지, 충청도 관찰사 등을 지냈다. 1776년 세도가 홍국영의 중상으로 벼슬에서
쫓겨나 10여년동안 죄인 생활을 했다. 1794년 대제학, 이듬해 대사간, 대사헌 등을 지내고 봉조하가 되었
다. 인품이 고결하고 청렴하였으며 학문을 사랑했다. 경사에 능통했다.
두번째는 서영보이다. 생졸년;1759년-1816년. 자는 경세, 호는 죽석이다. 1789년 문과에 장원하여 규장각
직각, 승지, 대사간, 대사성, 부제학 등을 거쳐 1805년 예조판서가 되었다. 1808년 호조판서 겸 비국유사당
상으로 심상규와 함께 [만기요람]을 편찬했다. 그뒤 이조판서,대제학을 지냈다. 문장과 글씨에 뛰어났다.
세번째는 서기순이다. 생졸년;1791년-1854년. 자는 중구, 호는 매원이다. 1827년 문과하여 이조참판,전라
도 관찰사를 거쳐 한성부 판윤, 이조판서, 대제학 등을 지냈다. 집이 비바람을 가릴 수 없을 정도로 가난했
다. 순조 때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3대 석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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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정간공 집안의 서명응, 서호수, 서유구 세 명이 3대 석학으로 명성을 날려 약봉 가문의 위광을 더 높
였다.
첫번재 석학은 서명응이다. 생졸년;1716년-1787년. 1754년에 문과하여 부제학을 지내고 이조판서,대
제학을 거쳐 상신에 이르렀다. 정조가 동궁에 있을 때 빈객으로 초치되어 학문을 가르쳤다. 정조가 등극하
자 규장각을 세워 첫번째 규장각 제학이 되어 규장각의 기틀을 튼튼하게 잡아 놓았다. 농업에 대한 깊은 연
구 정신은 아들 호수, 손자 유구로 이어져 이용후생의 학문을 가학으로 뿌리 내리므로써 북학파의 비조로
일컬어지고 있다. 아들과 손자에 의해 정리된 그의 저술 [보만재 총서]는 정조로부터 "해동에서 일찍 이런
거편이 없었다."는 평을 들었다.
두번째는 서호수이다. 생졸년;1738년-1799년. 자는 양직이다. 명응의 아들로 명익에게 입양되었다. 1764
년 칠석제에 장원하고 이듬해 문과에 또 장원했다. 교리,도승지,대사성,대사헌 등을 지냈다. 당대 문화 사
업을 총괄하는 규장각의 직제학이 되어 여러 가지 편찬사업을 주도했다. 여러 조의 판서를 두루 역임하고
상신의 물망에 올랐으나 오로지 아버지로부터 내려오는 가학을 계승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북학파의 학
자로 이용후생에 관한 학문을 토대로 한 각종 편찬 사업에 큰 업적을 남겼다.
세번째는 서유구이다. 생졸년;1764년-1845년. 자는 준평, 호는 풍석이다. 아버지는 호수, 사촌 철수에게 출
계했다. 1790년 문과하여 군수, 관찰사, 부제학을 거쳐 이조판서, 대제학을 지냈다. 할아버지의 [고사신
서] 중 농포문, 아버지의 [해동농서]를 비롯하여 [북학의], [색경], [농가집성] 등 국내외 농서 800여 종
을 참조하여 [임원경제지] 113권을 저술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가학을 이어 받아 농학을 집대성시킨
북학파의 거봉이다.
--------맺는 말, " 세 가지 뛰어나고, 네 가지가 없어.----------
약봉가의 세 가지 뛰어 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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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3대 정승
둘째 3대 대제학
세째 3대 석학
앞에서 사계 김장생 가문의 부자 문묘 배향을 일컬어 "유림의 노망"이라 한 바 있다. 여기의 약봉 서성 가
문의 3대 상신과 3대 대제학에 3대 문장을 일컬어 "하늘의 실수"라 할만 하다. 하늘은 공평한 법이다. 결코
사가 없다.
가문을 연구해 보면 그것을 깨닫게 된다. 어느 가문도 하늘은 특히 이뻐하거나 특히 미워하는 일이 없다.
복이 쏟아진 집도 하늘이 편애한 탓이 아니며, 불행이 겹친 집도 하늘이 증오한 것은 더욱 아니다. 하늘은
소인 모양 편애하거나 증오하는 일이 없다. 천하 만물을 움직이는 대경대법에 [마이크로 마이크로 그램 혹
은 미리미터]의 실수도 없다. 영겁의 세월에 억조 주기로 가로 지르고 찰라마다 세로 질러 나타나는 현상
에 터럭만한 오차도 없다.
도대체 어떻게 약봉가에 이런 일이 생길 수 있을까? 이것은 해도 너무 한 일이다. 하늘은 분명 이 대경대
법의 천하 운영에 잠깐 실수가 있었던 듯하다. 하늘의 변고가 아니고는 어떻게 길한 일과 복된 일이 이 집
에 이렇게 쏟아질 수 있단 말인가?
끼리 끼리 밀어주고 당겨 주며 권력 잡아 멋대로 상신하고 대제학에 오르며 석학으로 떴는가? 그것은 아니
다. 그런 일이라면 무소불위의 문중 8강이 이 복을 차지하였을 것이다.
그렇다! 그런게 아니다. 하늘이 실수가 있을 수 없고 인간의 못된 머리로 그런 복을 지을 수 없다. 이것은
적선지여경이다. 하늘을 감동시킨 약봉가의 정성과 노력 덕이다.
하늘은 있는 집 복은 뺏아가고 없는 집 복은 만들어 준다. 약봉가에 복이 쏟아진 것은 없는 게 너무 많은
덕분이다. 약봉 집에 없는 것 중 가장 두드러진 것 네 가지만 손꼽으련다.
약봉가에 없는 것 네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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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는 세도가가 없다.
둘째는 역적이 없다.
세째는 흉간이 없다.
네째는 매국노가 없다.
위의 네 가지는 약봉 가문의 특성이다. 이 특성은 약봉 가문의 큰 자랑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특성이 어떻
게 생겼을까?
이 집의 가성[집가, 성품성]이 원만, 무욕, 청렴하기 때문이다. 가성의 원만함은 욕심이 없는 데서 싻튼
다. 무욕하면 생활이 검소해지고 청빈해 진다. 가성이 원만하고 욕심이 없는 데다가 청렴하면 세도가나 역
적, 흉간, 매국노가 생길 수 없다.
원만, 무욕, 청렴은 끊임 없는 인격 수양과 학문 연구, 덕행을 쌓는 데서 이루어 진다. 이것들이야이야 말
로 약봉가의 긍지이며 우리의 자랑이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국가나 가문이나 높은 자리에 있는 지도급 인사는 거의 이 세 가지가 부족하다. 약봉
가문은 그런 우려를 충분히 씻어 주고 남는다. 굶주리는 백성과 아픔을 같이 하느라 끼니를 건널까 염려하
여 임금이 쌀말을 보낸 약봉 집의 청렴한 기풍이 500년을 두고 쇠하지 않았다.
이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 3대 영의정 서종태, 서명균, 서지수의 인품과 덕망, 3대 대제학 서유신, 서영보,
서기순의 인품과 학문, 3대 석학 서명응, 서호수, 서유구의 학문이 그것을 입증하고 있다. 특히, 영화의 정
점에 올라 갖은 부귀공명을 누릴 수 있는 영의정이지만 오직 청렴으로 일관한 서종태와 서지수 두 상신, 화
려한 삶을 버리고 청렴한 학자로 보람된 삶을 선택한 서유신, 비가 오면 집이 셀까 걱정해야 하는 청백리
서기순의 원만, 무욕, 청렴함이 그것을 더욱 분명하게 말해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