生, 그 불가사의에 대하여
최희명
보통 사람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미루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이상야릇함. 사전에서 정의한 불가사의의 뜻이다. 중국의 만리장성은 달에서도 보인다니 불가사의 맞다. 이탈리아의 콜로세움은 아마도 노예들의 피의 흔적 때문이지 싶다. 인도의 타지마할은 사랑 때문일까. 페루의 잉카 유적지 마추픽추는 궁금해서, 브라질의 거대 예수상은 그 크기로 명함을 든 것 같다. 멕시코의 치첸이차피라미드, 그리고 요르단의 고대도시 페트라가 몇 해 전 새로운 세계7대불가사의에 선정됐다. 인간의 결과물에 신이 보여주신 것 같은 그 기적들은 엄밀히 기획의 소산이다. 그러나 만들어진 불가사의보다는 보통 사람들의 의지가 이루어낸 불가사의들이 더 불가사의하게 느껴질 때가 많다.
임신을 하고 육체의 변화를 겪으며 아이가 태동을 하는 것 자체가 작은 천지창조인 것같이 신비스럽기만 했었다. 세상에 목숨 하나로 태어나 또 하나의 목숨을 만드는 일이 아니던가. 불러오는 배만큼 커가는 태아의 성장에 날마다 숙연해져 갔다. 너무 고맙고 너무 벅찼다. 온 몸의 뼈마디가 물러났다가 다가오는 고통 끝에 품에 안긴 아이의 눈․코․입을 확인하고 손가락·발가락 수를 세어 봤다. 온전한 생명을 확인하는 순간 낯선 신을 찾아서라도 감사를 드릴 수밖에 없었다. 양수의 축축함이 마르고 이목구비가 점점 뚜렷해지면서 아빠를 닮고 엄마를 탁해가는 분신의 모습에 불가사의 말고는 어느 단어로도 표현이 안 돼는 기적을 느끼게 된다.
전쟁. 생인가 하면 주검이고 죽었다 싶으면 아찔한 외줄타기 삶이 계속되던 아수라장. 퍼붓는 포탄 속에서도 살아남아 무간지옥 같던 그 날들을 증언하는 사람들 또한 불가사의하다. 기절을 하며 맞았던 일행의 죽음, 그 품속에서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비상식품을 찾아내던 손길. 공포와 도덕성을 추월하는 본능의 질주에서 살아남은 절실함이 어찌 자신의 목숨에 대한 질긴 집착 때문만이었겠는가. 자식이나 부모, 또는 겨레와 조국 때문에라도 불사조처럼 살아남아야 했던 사람들이었다. 나의 부모도 그랬다.
생명만으로는 부족했다. 그 생명이 사선을 넘어 살아남는 게 기적이 되고 불가사의가 되는 것이었다. 전쟁 같은 사랑이니, 사는 게 전쟁이니 하면서 지금도 우리는 끔찍하거나 치열한 상황에 전쟁 같다는 수식어를 붙인다. 전쟁을 야기한 이데올로기는 죽었지만 살아남은 생명들은 전쟁 후에도 기적을 만들어 갔다.
사면초가로 조여 오던 제거의 공포 속에서 자체 파열되지 않고 보존한 목숨들. 교통위반 딱지처럼 참 쉽게 붙여진 사형선고의 문턱을 넘어 단두대를 면한 사람들이 있다. 질기디질긴 운명으로 죽음의 관문을 넘어온 사람들이다. 칼날이 목에 닿기 한순간 전에 어떤 큰 힘이 역사를 했다 하니 불가사의한 운명과 시간의 조합이다. 때로는 한 사람 살고 죽는 일에 역사가 바뀌기도 하기에.
천지 창조에 비유하며 얻었던 자식을 가슴에 묻은 강가에도 계절은 약속보다 확실하게 왔다 갈 것이다. 인당수 깊은 물 어디쯤에서 시시각각 숨이 멎어 갔을 우리의 푸른 아들들이 이제는 조금씩 잊혀져 간다. 팽목항의 꽃봉오리들은 살아 있는 사람들에 의해 어제도 오늘도 죽는 중이다. 생때같은 자식을 놓치고 반쯤 실성해서 뜨는 해를 보고 오는 어둠을 맞는 부모. 시간은 그 아픔에다 더께를 얹어서 고통을 중화시킨다. 남은 식구들을 위해서라도 살아가게 되는 힘을 얻게 한다. 오랜 눈물이 흐르던 자리에 소금 꽃이 허옇게 피고 가뭄 타는 대지처럼 슬픔이 갈라진 바닥을 보이면 세월은 약이 되어 불가사의의 소명을 완수할 수 있을까.
시린 역사를 뒤로하고 지금 우리는 한해 천 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해외여행을 하는 나라다. 보편적으로 보아도, 그 시절에 견주어도 풍요로운 삶이 분명한 시대이다. 혹자는 지금의 부를 일러 6·70년대의 누이와 형들이 그것뿐인 몸 하나로 산업전선에서 벌어들인 ‘딸라’의 공로라 한다. 그 은혜에 감읍해서 공부만을 파고들어 신분 상승을 이룬 아우들의 성공 때문이라고도 한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꾼 피땀의 의지가 불가사의하다.
내 주변의 불가사의는 옆집에 불이 나도 끄떡없는 이웃들의 무관심이다. 정의든 불의든 나와 상관없는 일에는 추호의 흔들림도 없이 제3자가 되고 철저하게 방관자가 되는 풍요로운 세상의 ‘느긋함’이다. 아주 평범하고 성실한 남자가 교통사고로 일찍 죽어 저승에 갔다. 심판관은 기록과 신분만 확인하고 그의 지옥행을 결정했다. 반신반의하며 성실한 남자가 물었다. ‘저는 술․담배도 안하고 퇴근하면 곧장 집으로 돌아가 처자식을 돌보았으며 바람을 피우거나 세금포탈 같은 건 더더욱 한 적이 없는 모범시민으로서 성실하게 살았는데 지옥행은 너무 억울합니다.’ 그에 심판관이 말했다. ‘너는 네 이웃을 유기한 죄로 심판 받았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