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에 와서 처음에는 교도관이 되려고 몇 달 동안 도서관에서 감옥에 관한 책들을 모두 빌려다 보면서 준비를 했다. 수리 테스트, 영어 테스트, 범죄 심리 테스트를 받았는데 수리 테스트는 한 번 떨어져서 주 1회 1개월 과정의 연수를 거친 후에 재수를 해서 붙었는데 정작 어려웠던 일이 범죄 심리 테스트였다.
점심 먹고 시작해서 소변도 뛰어 갔다 오면서 5시간 동안 꼼짝 않고 앉은 자리에서 치르는 시험은 내 생전에 처음이었다. 내가 영어가 짧아서 그런가 했더니 백인들도 마찬가지였다. 비슷비슷한 문제를 여러 각도에서 묻고 또 묻고 하는 문제라서 도저히 내숭을 떨래야 떨 수 없는 테스트였다. 한국에 살 때 경찰서에서 밤샘 취조를 당할 때도 그렇게 긴장하지는 않았었다. 하여간 이 테스트 하나만 해보면 사람의 본색을 완전히 파악 할 수 있는 내용이어서 결혼하기 전에 신랑 신부가 같이 해본다면 이혼율이 뚝 떨어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교도관 지원자 중에 백인들은 경찰을 하고 싶었는데 못 되어서 지원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나이 제한이 없어 나이 먹은 사람도 많았고 같은 지원자인 내가 보기에도 '저 사람이 뽑히면 과연 할 수 있을까?'라고 생각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아마 나도 다른 사람 눈에는 그렇게 보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마지막으로 교도소를 직접 가보고 나서 나이, 영어, 체격 등등 모든 것을 볼 때 도저히 안 되겠다는 판단을 해서 포기하고 말았다.
교도관을 단념하고 택시를 하겠다고 하자 식구들이 염려를 많이 했다. 나는 영어가 걱정이었는데 식구들은 한국에 있을 때 시험에 10 번을 떨어져서 운전면허도 못 땄던 내 운전 실력을 걱정했다. 택시 운전을 택했지만 택시 운전사가 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풀타임으로 5주간 교육을 받고도 지리, 거리 이름, 운행 코스, 호텔, 병원 공공시설 등등을 1,000개 가까이 외워야 시험을 볼 수 있었다. 막상 면허를 따고 거리로 차를 몰고 나간 후에도 어디로 가야할지를 몰랐다. 처음 몇 달은 그야말로 매일 매일이 '고난의 행군'이었다. 이민자인 택시 운전사가 오래 살아서 지리를 잘 아는 현지인을 태우고 한 번 가보기는커녕 들어 보지도 못한 곳을 가야 하니 어찌 문제가 생기지 않겠나? 멜번에는 인도인 택시운전사가 많은데 얼마나 길을 못 찾으면 '택시 운전은 인도인들이 길을 잘 모를 때 하는 직업'이라는 조크가 생겼다고 한다.
손님을 기다리는 시간이 많아 기다리면서 나는 항상 책을 읽었다. 그런데 이 책을 보는 버릇 때문에 낭패를 당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책을 보고 있다가 태워서는 안 될 놈을 태워서 곤욕을 치를 때가 많았던 것이다. 책을 보지 않고 앞을 보고 있으면 수상한 인간이 택시로 다가오면 출발을 해 버려서 위기를 모면할 수가 있을 터인데 그럴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택시운전사들처럼 마냥 언제 올지 모를 손님을 기다리며 앞만 쳐다보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비록 먹고 살기 위해서 택시운전을 하기는 하지만 나는 택시운전만 하기 위해서 '이 땅에 역사적 사명을 타고 태어난'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공항에서 기다릴 때가 많은데 기다리는 시간에 어김 없이 자기 나라 동포들끼리 모여서 이야기를 한다. 운전사 중에 제일 많은 인종이 아랍계이고 다음이 중국인이다. 공항 주차장에서 아랍인들이 구석에서 기도 담요를 깔고 경건하게 기도를 드리는 거룩한 모습을 매일 본다. 기도를 하고 난 그들에게 무엇을 기도했느냐고 물었더니 거의가 기복주의 기도였다. 그런가 하면 공산주의 체제에서 살아와서 종교성이란 것을 찾아보기 어려운 중국인들에게는 기복주의 모습을 찾아 볼 수가 없다. 그들의 관심은 오직 돈 뿐이고 그런 모습을 숨김 없이 드러낸다. 그러나 대단히 종교적인 아랍인들이나 철저히 유물론적인 중국인이나 시동을 걸고 나면 똑 같다. 불티나는 경쟁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