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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충식의
' 아트 드라마의 향기 '
< 로마 비극 >
- 장장 6시간 가까이 펼쳐지는...
이보 반 호브(61)는 통찰력과 탁월한 인물 해석,
무대와 영상을 아우르는 세련된 미장센으로
각광받고 있는 명 감독이죠.
인터내셔널 씨어터 암스테르담 예술감독으로,
세계적인 연출가의 반열에 올라선 이후에도,
여전히 진취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그의 수많은
혁신적인 작품들 중 최고의 걸작으로 꼽히고 있는
< 로마 비극 >.
이보 반 호브는 2012년 동명의 영화를
원작으로 한 < 오프닝 나이트 > 와
2017년 동명 소설이 바탕인 < 파운틴헤드 > 를
LG아트센터 무대에 선보인 바 있습니다.
이번 세 차례 내한 공연을 마지막으로, 무대에서 완전히
종언을 고하게 될 < 로마 비극 > 은,
로마 시대를 배경으로 한 셰익스피어의 세 작품
< 코리올레이너스 > , < 줄리어스 시저 > ,
<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 > 를 엮어 직조해낸
5시간 40분짜리 대하 드라마이지요.
" God, I'm glad I'm not me "
2916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이자 미국 포크 록의 대부
밥 딜런(78)이 발언한,
"내가 아니라서 내가 기쁘다" 는,
지극히 밥 딜런 다운 문구를 대형 스크린에 띄우며,
연극 < 로마 비극 - Roman Tragedies > 은
그 장대한 막을 열어갑니다.
로마를 구하고 영웅이 됐지만 오만한 채,
타협할 줄 모르다 민중의 적으로 몰리게 된
'코리올라누스(Coriolanus)'.
제 1편 '코리올라누스의 비극' 은 위대한 제국의 탄생을
예견하고 있는데, 시민들과 정치인, 군인들이 어떻게
그들의 이념을 지켜내는지,
정치권력 확대를 꾀하는 귀족들이 국내 문제에 더 많은
관심이 집중되기를 원하는 호민관들에 의해 어떻게
저지되는지를 보여주지요.
그와 반대로 민중들의 열렬한 지지로 권력을 얻었지만,
공화정을 위협하고 독재자로 올라설 것을 두려워하는
이들에 의해 제거되고 마는 '줄리어스 시저
(Julius Caesar)'.
제 2편 '줄리어스 시저의 비극' 은 위대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리더 앞에서 민주주의가 약점을 드러낼 때
표출되는 것으로 그려집니다.
로마와 이집트를 둘러싼 급박한 정세 속에 나라의
운명을 뒤흔들 만큼 치명적인 사랑에 빠진 채,
공적인 책임감과 뜨거운 열정 사이에서 고뇌하는
두 연인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Antonius &
Cleopatra)'.
제 3편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의 비극' 에서
옥타비아누스는 로마대제국을 세우지만,
동시에 그렇게 세계화된 세상은 전쟁과 살인,
결혼의 파괴, 우정의 상실을 대가로 한다는 것을
드러내주지요.
이러한 셰익스피어 원작의 내러티브를 유지한 채,
각 작품당 시놉시스를 90~100여 분 분량으로 농축해,
로마 시대 인물들의 비극적인 이야기들을 심대한
스케일로 현대적이면서도 대담하게 풀어낸
< 로마 비극 >.
이 연극은 2007년 암스테르담에서 세계 초연된 이래,
아비뇽 페스티벌로부터 런던의 바비칸,
뉴욕의 BAM에 이르기까지,
20여 개 도시의 페스티벌과 공연장에서 절찬리
상영되며, 7만 명 이상의 관객을 만났습니다.
아쉽게도 지금 뉴욕에서 새로운 버전의
<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를 한창 작업 중에 있어
이번 공연에 함께 하지 못했던 이보 반 호브...
그는 복잡미묘한 정치적 함의의 < 로마 비극 > 이
이토록 롱런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지요.
" < 로마 비극 > 은 정치 비지니스에 관한
연극입니다.
이는 전세계 어디서나 똑같기도 하고 동시에
다르기도 하지요.
우리는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다시 새롭게 만든 것이
아닙니다.
다만 지금 이 시대의 이야기로 만들었을 뿐이죠.
그 결과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곳에서
각기 다른 관객들이 셰익스피어의 캐릭터를 통해,
다양한 정치인들과 정치체제들을 반복적으로
인식할 수있게 된 것이 아닌가 하고 저는 깊이
확신하고 있습니다.
< 로마 비극 > 은 그것을 들여다 보는 사람들을
놀랍도록 다르게 보여주는 400년 묵은 오래된
거울이지요.
이는 바로 셰익스피어의 힘이자, 고전 레퍼토리가
지닌 힘입니다.
바로 이 포인트야말로 연극이 21세기에도 여전히
탁월한 예술 형식으로 존재하는 이유인 것이죠."
고전 텍스트에 현대성과 시의성을 가미한 드라마
< 로마 비극 > 은,
기존 인식과 전혀 색다른 결의 공연 관람 경험을
제공해주고 있습니다.
관객들은 극장 어디에 있든, 무엇을 하든 상관 없이,
자유롭게 무대와 객석을 옮겨가며 원하는 위치에서
공연을 관람할 수 있고, 극장 안팎을 마음대로
드나들 수도 있지요.
덕분에,
마치 로마 시대의 의사당이나 광장 한복판에
나와있는 시민들처럼 극 속에 온전히 녹아들 수 있게
됩니다.
그렇게,
< 로마 비극 > 은 가장 민주적인 분위기에서
가장 혁신적인 방식으로,
어떠한 선입견도 없이 관람할 수 있는 연극을 표방하며,
기존의 극장이 관습적으로 갖고 있던 많은 금기를 깨는
작품으로 자리하지요.
공연 중 휴대폰을 이용해 무대 장면 또는 연기하는
배우들의 사진을 촬영하거나,
사회 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실시간 공연 소감을
남기는 것도 가능했습니다.
공연장 로비 외에 무대 위에 추가로 바(bar)가 마련돼
객석 뿐만 아니라 무대에서도 음식과 음료를 즐기며
관람할 수 있었지요.
그리고, 무대나 객석에서 벗어나 있더라도
공연장 건물 안에만 있다면 무대 위의 스크린과
여러 모니터들을 통해,
무대 위에서 어떤 사건이 벌어지고 있는 지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해서, 관객들은 그 동안 익숙했던 방식에서 벗어나,
그것도 장장 6시간 가까이나,
정해진 타이밍마다 마치 로비 라운지처럼 꾸며진
무대와 객석 사이를 오가는,
자유스러우면서도 능동적인 관극 행위를 통해 전혀
새롭고도 파격적인 예술적 체험을 하게 됐지요.
연이어 휘몰아치는 사건과 파국을 향해 질주하는
역사를 현장에서 생생하게 목격하는 관객들은,
곧, '로마의 시민'이 돼 배우들과 함께 과거의
'로마 제국'을 완성하게 됩니다.
해서,
처음엔 ‘우리가 무대 위에 있다’는 새로운 경험이
신기하게만 느껴집니다만,
바로 옆에서 펼쳐지는 로마의 역사적 사건들을
경유하고 또한 공유하며,
21세기 현재를 살아가는 듯한 로마의 인물들과
더불어 쉴틈없이 전개되는 격정적인 정쟁의
소용돌이에 빠져들게 됐지요.
극은 고대 로마를 다루면서도 현대 사회를
정조준합니다.
배우들은 모두 우리가 현재 입는 양복이나 평상복을
입고 출연하지요.
아울러, 스테이지 상단에 있는 대형 스크린과 곳곳에
배치된 모니터는 눈 앞의 인물들이 처한 모습을
다양한 앵글을 통해 드라마틱하게 비추어내며,
오늘날 정치인들의 논쟁과 몸싸움을 생중계하는
느낌을 줍니다.
쉴새없이 떠오르는 전광판의 자막 또한 앞으로
다가올 격변을 마치 블룸버그 뉴스 속보처럼
예고하며 긴박감을 불러 일으키지요.
실제로 현대의 TV 뉴스를 모티브로 한 장면도
등장합니다.
뉴스 앵커가 로마에서 추방된 '코리올라누스'를
도와주는 적국 볼스키의 장군 '아우피디우스'를
인터뷰하는 설정으로,
이렇듯 시간을 뛰어넘는 은유적이면서도 기묘한 연출은
관객들의 웃음을 절로 터뜨리게 하지요.
흥미로운 점은 남자 8명에, 여자 6명으로 이뤄진
총 14명의 배우들이,
1편 '코리올라누스', 2편 '줄리어스 시저',
3편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 속의 인물들을 겹쳐가며
연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코미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 시저 역,
그리고 집정관과 카시우스 역을,
여배우인 마리아 크라크만과 마리커 헤이빙크가
맡아 열연하고 있는 점이 자못 특이하게 다가왔지요.
장면마다 쏟아지는 방대한 대사도 인상적으로,
‘말의 향연’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대사 분량이
압도적입니다.
이처럼, 연극 < 로마 비극 > 은 시대를 관통하는
정치적 담론을 진중한 톤으로 품어내며,
시민이자 주권자인 현 시대 관객들의 의식을 끊임없이
자극하고, 소환하지요.
'갑옷을 달라' 하며, 수트를 차려 입는 로마의 정치가들은
마치 현대의 정치인들처럼,
지금 이 시대의 언어로 책략을 세우고, 논쟁하며,
또한 협의합니다.
뉴스에 나와 자신의 견해를 직접 설파하다,
때로는 서로 치고 받는 육탄전을 벌이면서 극단적으로
대립하지요.
그렇게, < 로마 비극 > 은 셰익스피어에 대한
관객의 기대감을 장중내내 비틀어댑니다.
제 1편 '코리올라누스' 에서 전쟁에서 승리한
코리올라누스가 월계관을 받고 로마로 개선한 이후
첫 번째 장면 전환이 시작됩니다만....
< 로마 비극 > 에서 인상적인 점은 인물들의
죽음이 시(詩)적으로 처리된다는 점이죠.
무대 가운데 유리벽 사이에 마련된 공간에 누우면
'죽음'이 되고,
그것을 경찰이 찍어 놓은 사진처럼 스크린이 띄우면
죽음이 '확정'됩니다.
그리고 그 밑으로 인물이 살았던 시기를 자막으로
띄우는 식이지요.
마침내 < 로마 비극 > 은 '귀로 듣는 시' 처럼
풀어지는 밥 딜런의 포크 록 송과 함께,
안토니우스에 이어 클레오파트라가 숨을 거두며,
그 웅대한 서사의 막을 내리게 됩니다.
무대 위의 배우들이든, 객석의 관객들이든,
모두가 혼연일체로 치열하게 버텨냈고,
결국 '다 이루었다(?)'는 자부심, 그 뿌듯함으로 충만한
표정였지요.
' 이보 반 호브의 창조적인 마법을 통해, 엄청나게
현대적이면서 믿을 수 없이 고전적으로 재창조된
셰익스피어' 를 말입니다.
우리 시대 최고의 음유시인으로 노래에
'시의 숨결을 불어넣는' 가수 밥 딜런,
그는 "시대가 변하고 있으므로..." 라며,
< 로마 비극 > 의 피날레를 암유하지요.
- 밥 딜런의 'The Times They Are A-Changin'
https://youtu.be/TlPV4wtZ6HE
- 비치 보이스의 'The Times They Are A-Changin'
(remastered)
https://youtu.be/HEmJLAsYRgQ
1.< 로마 비극 - Roman Tragedies > 3막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Antonius & Cleopatra)'
장면
https://youtu.be/M7uB142Nogw
크리스 니트펠트가 연기한 클레오파트라 역은
< 로마 비극 > 의 여러 캐릭터들 중에서도 단연
도드라지지요.
클레오파트라의 문란한 생활은 강렬한 팝 문화로
대변됩니다.
미국 록 밴드 레드 핫 칠리 페퍼스가 2006년
발매한 9집 < 스타디움 아카디움 > 에
수록된 'Hump de Bump'.
"우리가 일으키는 혼란을 믿어"라고 노래하는
이 펑키한 곡의 뮤직비디오가 스크린에 말그대로
'혼란스레' 울려오지요.
- 'Hump de Bump'
: 레드 핫 칠리 페퍼스(Red Hot Chili Peppers)
https://youtu.be/OM9uMJWtNww
절정을 향해 치닫는 플롯, 개성 넘치는 캐릭터들,
견줄 수 없는 탁월한 비유, 그리고 꽁꽁 베일에 감춰진
인생의 비밀을 파헤쳐 가는 섬뜩함...
400년 넘는 세월 동안 셰익스피어 드라마는 언제나
최고 자리를 차지한 예술계의 '성좌'였죠.
음악가, 영화감독, 연극 연출가, 화가 등
거의 전 영역에 있는 예술가들은,
셰익스피어를 탐욕스럽게 변용하며, 자신이 당대의
셰익스피어가 되길 열망했습니다.
벨기에 출신으로 유럽 연극계 최전선에 서 있는
이보 반 호브도 야심차게 셰익스피어 변주에 도전한
연출가 중 하나이지요.
셰익스피어 작품 중에서도 정치적인 성향이 강한
세 작품들을 연이어 구성한 < 로마 비극 > 은,
기존 공화국의 구도를 탈하여 제정 체제를 향해가는
로마의 험난한 역사와 그 과정에서 스러져간 별들의
이야기를 담아내고 있습니다.
힘은 자본처럼 축적되기 마련이고, 이 축적된 파워는
결국 한 사람에게로 수렴해 갈 터...
코리올라누스, 시저, 그리고 안토니우스는
모두 권능을 가진 인물이었으나,
독재를 염려했던 공화주의자들에 의해, 혹은 자신의
정치적 라이벌들에게 패하고 맙니다.
연극 < 로마 비극 > 은 그런 몰락과 좌절의 역사를
담은 이야기이고,
아울러,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역사적 전율의 순간에
주목하고 있지요.
스토리는 이미 익히 알려진 대로입니다만,
이보 반 호브는 셰익스피어가 만들어놓은,
이른바 '안전한 길'로만 가지는 않습니다.
느닷없이 뇌성병력처럼 폭발하는 퍼쿠션 연주와
함께 시작하는 대서사시 < 로마 비극 > 은,
장면이 바뀌어 무대 전환이 있을 때마다 관객들을
스테이지로 초대해 올리지요.
TV 스튜디오에서 벌어지는 집정관과 호민관 사이의
논쟁은 마치 '100분 토론'의 한 장면같이 풀어집니다.
'사느냐 죽느냐'를 놓고 등장인물들의 심각한 대사가
오가는 가운데,
무대 위에 설치된 TV 화면에선 난데없이
CNN 뉴스와 수영 중계 등을 교차편집으로
보여주기도 하지요.
2천 년 시간을 거슬러 오른 BC. 44년의
시저 암살 시퀀스에선,
1963년 댈러스에서의 케네디 대통령 피격 장면이
절묘하게 오버 랩되기도 합니다.
디지털 시대의 연출가 이보 반 호브는 카메라 또한
적극 활용하고 있지요.
역시 벨기에 출신인 다르덴 형제의 영화에서처럼,
< 로마 비극 > 의 카메라 감독은 핸드헬드 기법을
통해 인물들을 여과 없이 촬영하고,
이런 흔들리는 인물들의 화상은 무대 위 대형 스크린에
고스란히 투영됩니다.
인물에 대한 과장된 클로즈업과 사진 등의 이미지를
무대 위에서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게지요.
먼 시대 이야기지만 이 작품이 이토록 우리에게 가깝게
다가오는 이유는 이런 친숙한 장치와 기법들을
차용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유튜브, 넷플릭스 등 자신이 있는 자리에서 편하게 즐길
거리가 가득한 세상에,
연극의 무기 중 하나는 같은 공간에서 공동체적 경험을
선사한다는 것이죠.
그럼에도 번거로움과 지루함을 '참아내야 한다'는 인식
또한 어쩔 수 없이 박혀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로마 비극'은 5시간 35분의 기나긴 런닝타임을
쏜살같은 시간으로 만들며, 아울러 고전의 뼈대를
목도하게 만듭니다.
무대 위에 설치된 TV 속에서는 미국 트럼프 대통령의
연설, 일본 애니메이션 '에반게리온' 등의 장면이 스쳐
지나가며,
지금 이 시대의 정치, 문화적 풍경을 자연스럽게
녹여내고 있지요.
이처럼 다채로운 스펙트럼의 은유적 정경을 만들어낸
점도 특기할 만합니다.
개인 SNS 에서만 공유가 가능하다는 전제 하에
스마트폰으로 플래시 없이 사진·동영상 촬영이
가능한데,
이는 모든 관객을 시대의 증인으로 자리매김하게 만드는
효과도 낳게 해주지요.
연극을 통한 '연대의 희망'을 봤다고 할까요...
하여, 이보 반 호브의 < 로마 비극 > 은
고전적 스타일의 연극이라기보다는 한편의 실험적인
영화처럼 다가옵니다.
2. 3막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연설 장면
https://youtu.be/1q3d1RDFw_I
용기가 있기에 시저를 존경했으나,
야심을 품었기에 그를 죽여야만 했던
브루투스,
그는 시저를 살해한 정당성을 설파하면서도
고뇌어린 추모사 또한 토로하지요.
" 저는 시저를 덜 사랑한게 아니라,
로마를 더 사랑했을 뿐입니다..."
하지만 안토니우스의 시저를 향한 감성적인
추도 연설은 로마 시민을 깨우고, 또 선동하지요.
급기야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를 비롯한 암살파들은
로마에서 처절한 죽음을 맞이합니다.
고결함의 이름으로 시저의 가슴에 칼을 꽂았던
'브루투스, 그는' 통렬하게 부르짖지요.
"재앙아 너는 자유다.
가고 싶은 방향으로 가라!"
3. 3막 '에노바르부스의 절규' 장면
https://youtu.be/6f_vrli9-H8
< 로마 비극 > 의 파격은 끝이 없습니다.
지난 11월 10일 마지막 공연 하이라이트는 단연
'오미티우스 에노바르부스의 절규' 씬이었지요.
안토니우스의 친구이자 부하로,
늘 충성스럽고 헌신적이며 정직했던 그는,
안토니우스가 중대한 정치적, 군사적 실수를
저질렀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결과가 돌이킬 수 없는 것으로 판명될 때까지
충직한 자문관으로 자신의 자리를 변함없이 지킵니다.
하지만...
악티움 해전에서 안토니우스가 완전히 패배해
최후의 몰락에 직면케 되자,
그는 그만 옥타비아누스 시저 진영으로
건너가기에 이르지요.
안토니우스가 자결을 앞두고 에노바르부스에게
헌사했던 전리품들을 고스란히 되돌려 보내자,
그는 처절한 회한 속에 비통하게 절규합니다.
안토니우스를 배신하고 옥타비아누스에게
무릎 꿇은 에노바르부스가 자책감까지 내려둘 수는
없던 걸까요.
번뇌에 차 있던 그는 시공간을 가로질러
갑자기 공연장 밖을 뛰쳐나갑니다.
카메라가 급히 에노바르부스를 좇아가고...
LG아트센터 로비를 거쳐 건물 밖 길거리까지 나간
그는 그곳에 주저앉아 울부짖지요.
늦가을을 최촉하는 비는 흡사 연출한 것 처럼
줄기차게 흩뿌려 내리고...
맞은편 편의점에서 마침 나온 손님들, 길거리를
오가는 행인, 또한 오토바이 배달부, 택시기사들
모두가,
정말 뜻밖의 황당하기 이를 데 없다는 표정으로
이 상황을 지켜봅니다.
객석에서 스크린을 통해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는 관객들 또한 그저 웃을 뿐이지요.
" 나는 이 세상에서 제일 악한 놈이야...
아, 관대한 안토니우스 장군이시여!
제 배신에도 이토록 큰 보상을 주셨는데,
제가 더 성실히 모셨더라면 어떤 상을 내리셨을까요.
내 가슴이 고통을 견디지 못하는구나.
이 슬픔이 심장을 더이상 빨리 터뜨리지 못한다면
다른 방법을 찾아야겠어.
아니, 슬픔만으로도 충분할 것 같다.
내가 장군과 맞서 싸우다니?
차라리 빠져 죽을 도랑을 찾아야겠다.
남은 내 생애에 비하면 가장 더러운 하수구도 아깝다.
오! 밤이여, 달이여,
증인이 되어 주십시오.
미래의 사람들이 신의를 저버린 자,
즉, 나를 증오하게 되면,
이 가여운 에노바르부스는 그대 앞에서 뉘우쳤노라고.
독을 품은 밤의 습기를 내게 뿌려주십시오.
그래서 내 의지에 반하는 나의 생명이
더는 내게 머무르지 못하도록
내 심장을 꺼내 내가 저지른 과오의
차가운 돌 위로 내동댕이쳐 주십시오.
그것이 가루로 산산조각이 나서
모든 추악한 생각도 끝나게 해주십시오.
제 악행 앞에 더욱 고귀하신 안토니우스여!
부디 가능한만큼만 저를 용서해주십시오.
그러나 세상은 나를 주인을 버리고 도망간 배신자로
기억하게 내버려둬 주십시오.
안토니우스,
오! 안토니우스..."
에노바르부스 역의 배우 바트 슬레이허스
(1편 '코리올라누스' 의 아우디프스와
2편 '줄리어스 시저' 의 앵커 /시나 역을 겸함)는,
아트 센터 로비로 되돌아와 그곳에 걸려있는
포스터 상의 안토니우스를 애절하게 어루만집니다
(폭소가 터집니다만...).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무대로 다시 귀환(?)한
에노바르부스는 비감어린 최후를 맞이하지요.
(72 ~ 30 BC.)
실제 극을 보고 있는 관객과 등장인물 사이의 심리적인
거리를 두게 하는 이 '낯설게 하기'는,
아이러니하게도 현재 대한민국 풍경을 조명하고
있는 것처럼 그려지며,
결국 < 로마 비극 > 의 서사가 우리와 멀리 떨어진
이야기가 아님을 증명하는 마법을 펼쳐보여줍니다.
- 李 忠 植 -
첫댓글 진실의 정곡은 여러 갈래로 끊임없이
이동하고 있지요.
2919년 현재,
전세계의 연극계는 한 연출가가 펼쳐낸
'진실의 이동'과,
그 과정에서 드러난 '새로운 진실'에 대해
주목하고 있습니다.
텍스트의 침묵 속에서 유의미한 진실을
발견한 인물은 다름아닌 벨기에 출신의
이보 반 호브(Ivo van Hove)였지요.
" 텍스트에 충실한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른다. 진실이 하나도 없다. "
이보 반 호브가 영국 일간지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 한 말입니다.
그의 발언은 이론 텍스트의 권위 너머로
이동하겠다는 선언과도 같지요.
그리고 지금까지 그가 해온 작업은
다름아닌 '진실'로 향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동시대 관객들은 이보 반 호브의 작품
에 열렬히 호응했으며,
평단 또한 다양한 비평으로 응답했지요.
그가 말하고자 했던 '진실' 의 명제가
오늘날에도 유효한 가치임이 증명된
것입니다.
2016년 노벨문학상은 바로 미국의
가수이자 작곡가 밥 딜런이 수상했지요.
1960~70년대를 거치며 현재에
이르기까지,
정치적이면서도 시적인 가사의 음악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던 밥 딜런...
그는 미국 포크 음악에서 빼놓을 수 없는
가수이자, 세계 대중음악계에 큰 영향력을
끼친 인물 중 하나로 평가받습니다.
마틴 스코시즈 감독은 'BBC'의 의뢰로
그에 관한 내밀한 서사의 다큐멘터리
< 노 디렉션 홈, 밥 딜런 >(2005)을 만들었고,
토드 헤인즈 감독은 밥 딜런 특유의 시적인
가사를 줄기 삼아 그의 7가지 서로 다른
자아를 등장시킨 < 아임 낫 데어 - I'm not
there >(2007)를 연출하기도 했지요.
그처럼 그는 음악을 넘어 당대 대중문화의
거대한 아이콘이었습니다.
영화 < 아임 낫 데어> 에서 보여준 것처럼
사람들은 밥 딜런이라는 행성에 가닿기
위해 그에게 '민중의 대변자' 라는 왕관을
선사했지만,
정작 밥 딜런 자신은 “나는 거기에 없다”며
행성의 존재 자체를 부정해버렸죠.
그가 쓴 문장으로 대신 설명하자면,
'뭔가 일이 벌어졌는데, 넌 그게 뭔지를
모르지'('Because something is
happening here, But you don’t know
what it is')라고 노래하는 쪽을 택했던
것입니다.
밥 딜런의 걸작 <Highway 61, Revisited>
(1965)의 수록곡 'Ballad of a thin man'
의 가사이죠.
- 영화 < 아임 낫 데어 > 중
'Ballad of a thin man'
: 밥 딜런('쥬드') 역 케이트 블란쳇
https://youtu.be/9Ha1eqHDu_w
더욱 중요한 것은 그가 어떤 순간에도
확정된 정답을 제시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즉, 그는 사람들이 그토록 갈구했던
'진실의 수호자'라기보다는,
'진실을 의심하는 쪽’에 가까운 인물이었던
게죠.
그런 그에게 정답 따위란 있을 리가
만무했을 터,
비평가 밥 스탠리의 말마따나,
" 밥 딜런은 전적으로 친근하지 않은
목소리로 팬들과 평론가들의 마음속에서
빈둥거리면서,
그들이 구축해놓은 자신에 대한 신화를
방해하는 걸 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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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 밥 딜런은
'귀로 듣는 시’라는,
노벨문학상 위원회의 선정 이유가 무색하지
않는,
자기라는 수수께끼를 풀기보다는, 그냥
내버려두길 원하는 예술가로 자리합니다.
- 'Blowin' In The Wind'
https://youtu.be/G58XWF6B3AA
- 'Like a Rolling Stone'(Live)
https://youtu.be/4F0ytNzHDj8
- 'Knockin' on Heaven's Door'
https://youtu.be/rnKbImRPhTE
- One More Cup Of Coffee
https://youtu.be/CB1Yq4zVC70
- 'Don't Think Twice, It's All Right'
https://youtu.be/1iHhWh9Fts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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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보 반 호브는 연출 노트(Director's
Note)를 통해 얘기합니다.
" 휴식 시간 없이 논스톱으로 공연되는
이 작품은 24시간, 365일 돌아가는
이 세계의 정치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대신 극장의 문은 관객들 각자가 원할 때
휴식을 가질 수 있도록 계속 열려 있지요.
어쩌면 관객들은 역사를 바꿀 결정적인
독백이나 정치 살인의 현장을 놓치게
될 수도 있겠지만,
이런 일은 우리 삶에서도 실제로 일어나기
마련입니다.
로마 비극 은 끊임없는 논쟁과 결정의
산물로써 정치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지요. "
또한, 그는 강조합니다.
" 로마 비극 은 여러 의견과 관점,
사고방식이 공존하는 다층적인 작품이지요.
이 작품은 누가 옳은지 어느 방향을
따라야 하는지에 대한 판단을 거부합니다.
셰익스피어 역시 어느 한 편을 선택하지
않았죠.
셰익스피어는 정치적인 이상이나 행동을
믿는 사람들이 어떠한 편향성이나
편견 없이 서로를 마주하고,
그들이 어떻게 자신들의 정치적 목표를
달성하거나 실패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정치는 사람에 의해 만들어 진다는 것을
얘기해주는 것이지요.
이 작품은 로마 제국을 설립하기까지의
힘든 여정을 담고 있지만,
우리는 이번 작품에서 1차적인 역사적
서술보단 이야기의 이면에 숨겨진
정치적 메커니즘에 주목하고자 했습니다. "
아울러 '정치란 무엇인가?' 에 대해,
한나 아렌트의 단순하지만 명확한 표현을
인용하며, 나름의 답을 건네주고 있지요.
" 정치는 각 개인들이 세상에서 말하고
행동하며, 새로운 시작을 만들어가는
가능성을 결정해주는 것입니다.
정치란 어떤 명분을 위한 투쟁을 언제나
내포하고 있기에 오직 진실만을 말하고자
하는 사람은 정치적이 될 수 없지요. "
진실과 공적인 정책은 전혀 다른 영역으로,
정치는 합의(야합이더라도)에 의해
존재하는데 반해 진실은 타협을 용인하지
않는다는...
하여,
'정치와 절대적 진실은 언제나 서로
상충한다' 는 이보 반 호브의 명료한
해석은 찬탄할 수밖에 없는 공명으로
울려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