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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서원은 신라말의 고운 최치원과 조선 중종때 태인현감이었던
신잠(申潛)을 향사(享祀)하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전북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 500 이며 사적 제166호로 지정되어 있다.
원래는 태산서원(泰山書院)이라 하던 것을 숙종(肅宗) 22년(1696)에
사액(賜額) 됨으로서 무성서원(武城書院)이라 하게 되었다.
사우(祠宇)에는 최치원(崔致遠)을 비롯하여
신 잠(申 潛), 정극인(丁克仁), 송세림(宋世 琳), 정언충(鄭彦忠),
김약묵(金若默), 김관(金灌) 등의 향현(鄕賢)을 배향(配享)하였다.
무성서원은 신라(新羅)시대 대문호(大文豪)이며 정치가(政治家)였던
고운 최치원(孤雲 崔致遠)이 신라 정강왕(定康王) 1년에
태산군수(泰山郡守: 지금의 泰仁)로 와서 있는 동안
치적(治積)이 뛰어나서 군민의 칭송을 받다가 합천(陜川)군수로 떠나게 되니
그를 흠모하는 나머지 선생의 생전(生前)에
월연대(月延臺: 지금의 칠보면 무성리 성황산의 서쪽 능선)에
생사당(生祠堂: 생존하고 있는 사람을 모시는 사당)을 세우고 태산사(泰山祠)라 부른 것이 시초였다.
그 뒤 이조 중종 39년(1544)에 태인현감(泰仁縣監)이던 영천 신잠(靈川 申潛)이 부임하여
7년 동안 선정(善政)을 베풀다가 동 서 남 북 학당(東 西 南 北 學堂)을 세우는 등 많은 치적을 남기고
명종 4년(明宗 1549)에 강원도 간성(杆城)군수로 이임하니
역시 주민들이 그를 사모하여 생사당(生祠堂)을 세우게 되었다.
숙종 22년(肅宗 1696)에 무성(武城)이라는 사액(賜額)을 받아
이 두 사당(祠堂)을 병합하여 무성서원(武城書院)이라 했으며,
삼현(三賢)을 더 모시다가 뒤에 두 분을 더 모시니 칠현(七賢)을 더 배향(配享)하게 되었다.
배향된 분은 고운 최치원(孤雲 崔致遠), 영천 신잠(靈川 申潛), 불우헌 정극인(不憂軒 丁克仁),
눌암 송세림(訥菴 宋世琳), 묵재 정언충(默齋 鄭彦忠), 성재 김약묵(誠齋 金若默), 명천 김관(鳴川 金灌) 등이다.
그 뒤 정조(正祖) 8년(1784)에 쌍계사(雙溪寺)로부터 최치원의 영정(影幀)을 모시었다.
이 서원은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당시 전라도(全羅道)의 철폐령에서 제외된 세 개(三個)서원으로
필암(筆巖), 포충(褒忠), 무성(武城)서원 중 하나이다.
사우는 성종 15년에 지었으나 현재의 것은 1844년에 중수한 것이며
강당은 1825년에 불에 타 없어졌던 것을 1828년에 다시 지은 건물이다.
이 서원에는 성종(成宗) 17년(1486) 이후의 봉심안(奉審案), 강안(講案), 심원록(尋院錄), 원규(院規)등의
서원연구(書院硏究)의 자료가 보존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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