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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감상]
다시, 참여와 순수를 생각하다 / 박승류
모두가 인지하듯이 주변에 자폐적 시가 있는가 하면 불가해해서 무의미한 그러나 또한 그것을 의미로 내세우는 시도 있다. 왜 횡설수설 하듯 하는 시와 난해한 시들이 등장했는가 생각하면, 역시 무저항이나 무관심을 표면에 내세운 현실 참여에도 그 의지가 있지 않을까 싶다. 정면으로 맞받아치는 대응이 아니라 내면으로 숨어들어 자기세계를 구축하는 것. 이 역시 타의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포지션을 결정하는 것의 다름이 아니다. 발전된 사회 시스템이 인간의 모든 고민을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주변을 보면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이것은 타에 대한 동조와 공감을 외면하는 무기력한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부정부패에, 독재에, 노동착취에 드러내놓고 참여하거나 반기를 들지 않고 침묵으로 지켜보는, 일종의 생육신生六臣적 의사표현 방식이라 하겠다. 현 기성세대는 민주화운동과 개발독재를 직접 또는 간접경험한 세대들이다. 때문에 발표되는 문학예술 작품도 혼재된 양상이다. 아니 어쩌면 이제 혼재를 넘어 한 몸이 되는 진화를 꿈꾸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민주화가 마무리되고 개발독재를 바탕으로 하는 산업사회를 지났으니, 참여 문학의 설 자리가 좁아질 것이라는 대중적인 생각이 있다. 민주화가 마무리 되었는지 산업화 사회를 완전히 지났는지 여부와는 별개로, 최근 한국의 시문학도 순수로 분류할 수 있는 작품들이 주를 이룬다. 그러나 물론 앞에서의 언급처럼 참여가 사리진 것은 아니다. 참여는 순수의 몸에 의탁하여, 또는 숨어들어 가수면 상태에 들었을 뿐이다.
더불어서 몸집이 몹시 왜소해진 참여와는 다르게 몸집이 비대해진 순수는 식성과 출산력이 좋고 변화무쌍한 재주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시문학만 둘러보더라도 연일 발표되는 작품들에서 캥거루가족의 형태를 볼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어쩌면, 그것이 참여의 특성이거나 참모습인지도 모른다. 단도직입적으로 한 번 더 강조하면 순수와 참여는 문학이라는 매개를 통해 한 몸으로 진화하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뜻이다. 이를 의심한다면 ‘한용운’의 「님의 침묵」을 곰곰이 생각해 보라.
시대적 상황이 없었다면 「님의 침묵」은 연시戀詩나 다름없이 평가되었을 것이다.(종교라는 틀 속에서 이해하려는 경향도 있지만) 이에 대해 혹자는 시대적 상황이 아니었다면 발표(창작)되지 않았을 것이라 말하고 싶겠지만, 이는 논점을 우회하는 생각이다. 작품은 발표되었고 지금 우리는 그 작품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즘 발표되는 현대시도 마찬가지다. 현 시대상황을 무결점이라 말할 수 없다면, 누가 현실 비판적 작품이 나오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겠는가. 설령 무결점의 시대라 가정해도 완벽에 대한 답답함이 오히려 결점으로 인식되는 사고思考가 있을 터이니 말이다.
나무가 나무인 것은 서 있기 때문이다
섣달 칼바람 맞으며
외로운 나무들 서 있는 것이
어떤 나무는 창검처럼 곧추서고
어떤 나무는 이웃에게 기대고
각자 계절을 몸으로 견디며
주저앉거나
눕지도 않고
칼바람 맞으며 서 있는 것이
나무가 나무인 것이
나무 하나 외로움이
또 하나의 외로움이
여기저기 우뚝우뚝 어둑서니처럼
깨 홀딱 벗고 겨울숲을 이루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입술 깨물고
자세 허물지 않고
몸으로 맞서 무리를 이루었다
산등성이에서 바라보는 강
두꺼운 얼음장이 강물과 배를 맞대고
하얀 눈을 뒤집어쓴
죽음의 강
고요한 억압이 잠들고
숨골 터지는 소리마저 자자들어
음모까지 얼어버린 강
반란도
혁명도
누어 잠든 강
겨울이 일어선다
창끝에 찔리고
칼날에 베이며
내 안에서 터지는 균열이
죽창 들고 일어서는 함성이
모반이
혁명이
일어선다
그대, 서 있는 자의 고통이여
그대, 서 있는 자의 희열이여
나무가 나무다운 것은 서 있기 때문이다
- 임채우, 「겨울나무로부터」 전문 / 《우리詩》 7월호
화자는 지금 자책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가지 못한 길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은 것 같다. 화자의 자책에 공감하는 나 자신을 깨닫고 혹여 이것이 동료의식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또한, 세상에서 자책으로부터 해방된 중년을 찾기란 쉽지 않을 것이라는 자위적 생각도 한다.
자책은 의무감이나 책임감으로부터 비롯되고 모든 일의 과정이나 결말에 자리한다. 그렇다면 화자는 지금 어떤 과정 또는 결말에 위치하고 있을까. 그리고 무엇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을까. 보호자와 참여자 사이에서 머뭇거리다 참여라는 얼굴을 외면하고 현실에게로 깊숙이 도피행각을 벌인 것에 대한 자책은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가지 않은 길에서 발생되는 모든 사건은 화자의 양심을 저울질하기에 여념이 없었을 것이다. 때문에 침묵의 대가로 가족의 안위를 지킨 이 땅의 아버지들은 문득문득 외면한 과거로부터 죄의식을 느낄 것이다.
일단의 군락을 이룬 겨울나무와 역시 군락을 이룬 수많은 물방울들로 구성된 강을 본 화자의 내면의식이 순간적으로 꿈틀거린다. 상반된 두 집단의 모습은 여린 감성의 화자를 심판한다. 외부에 대응하는 방식이 다른 두 집단을 보여주는 자연은 그야말로 판관判官인 셈이다. 격동의 시기에 당신은 무엇을 했느냐고 묻는 것. 나무들의 방식이 아닌 강의 방식으로 대처한 당신은, 나무들이 꿋꿋한 의지와 결속으로 얻은 결과를 함께 향유할 생각은 말아야 한다는 말이 들리는 듯하다. “나무가 나무인 것은 서 있기 때문”이라는 도입부와 “나무가 나무다운 것은 서 있기 때문”이라는 결구는 家長인 가장과 가장다운 가장의 다른 표현이다.
가정의 안위와 사회 전반의 안위, 지향하는 방향은 같을지 몰라도 그 결과는 다르게 나타날 것이다. 공동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공동체 정신은 물질문명의 급속한 발달과 더불어 사라져가고 개인주의가 넘치는 사회로 들어서는 것에서, 화자는 또한 죄의식을 느끼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교직에서 학생을 지도하는 본연의 의무를 게을리 하고 개인의 무사안일을 위한 행적은 없었는지 반성하는 자세, 공무원으로서 국민의 혈세를 낭비하는 불필요한 업무태도는 보이지 않았는지 반성하는 자세 등등이 느낌으로 다가온다.
무조건 가족을 우선시하는 개인주의와 공동체 정신 중, 과연 어느 모습이 가장다운 가장의 모습일까? 한마디로 답하기에는 쉽지 않은 질문이다. 때문에 또한 일정 시점에는 선택에 대한 반성이 태어난다. 아무리 못난 사회인이라 해도 누구나 제 역할을 선택할 수 있는 것이고, 때문에 역할 선택에 대한 가부可否랄까, 정부正否는 있게 마련이다. 그런데 간과하기 쉬운 것은 잘못된 가치관을 바탕으로 하는 역할론이다. 바탕의 옳고 그름이 뒤바뀐 역할은 대부분 바람직한 결과를 기대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로인한 갈등은 사회발전의 원동력이 될 수도 있다.
당시의 특정 선택이 적절했는지, 또 그와 같이 유사한 기로에 서면 어떤 결정을 하게 될지에 대한 생각은, 사고思考의 충돌이랄까 갈등 끝에 완성된다. 그 완성이 설령 설익은 것이라 해도 처음 내린 결정이나 선택과는 다르게 좀 더 발전적인 방향으로 또는 공동체적인 방향으로 기울어져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화자에게서는 지금 농익은 중년의 향기가 물씬 풍길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어쩌면 불혹을 지나고 지천명도 마무리되는 시점이라 말하는 게 더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머플러가 흔들리며
바람이 흉터를
파고든다
깃발이 펄럭인다
서로 승부에 매달리는
벌판 복판에서
폭설에 대해서 알고 싶었어요 폭설이
내 몸을 덮고 있네요 폭설의
심성이 포악하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어요
신이나 폭설이나 한동안 다정하다가
별안간 등을 돌리는 습성은
둘 다 마찬가지라는 느낌이야 나는
당신은 옷깃을 여민다
겨울의 상흔을
감추기 위해
- 서 량, 「12월에 부는 바람」 전문 / 《우리詩》 7월호
이 시를 관심 있게 읽은 이유는 현재진행형과 과거회상형의 중간 형태를 취한 전개에 있다. 이 시에서 화자는 상대방과 함께하는 현재의 상황을 기록하는 듯한 전개 속과 과거의 회상을 재현하는 듯한 분위기 사이에 위치한다. 후자의 경우에 가까울수록 화자는 실연을 달래고 있을 것으로 판단되며, 현재 옆에 존재하지 않는 상대는 자신으로 대체되어 가상으로 존재한다.
자연은 참으로 오묘하다. 뿐만 아니라 인간의 감정도 오묘하다. 때문에 자연과 인간의 조화는 상상 이상으로 다양한 모습을 가지게 된다. 이 시에서도 그렇다. 자연의 헤르메스인 바람이 머플러로 감싼 상처를 파고드는 이유가 궁금하지 않은가. 그러나 그 이유는 많다. 이 시를 읽는 독자의 숫자만큼이나 그 이유는 각양각색으로 나타날 수 있다. 상처가 생긴 이유도 그렇다. 실연했다고? 그도 그럴 수 있다. 사별했다고? 그도 그럴 수 있다. 아니면 마음과는 달리 표현이 늘 엇갈리는 것으로 나타나는 결과에 대해 가슴이 아프다고? 그도 그럴 수 있다.
마음이 추우면 몸도 춥다. 마음의 한기가 몸의 한기를 배가시키는 현상은 누구나 쉽게 경험한다. 지금 시적화자는 그래서 몹시 춥다. 그럼에도 자신이 아닌 상대의 마음이 아픈 것으로 인식(또는 능청)하고 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착각인가? 아름다운 이유는 물론 화자가 사랑의 줄다리기를 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사랑은 그 어떤 경우에도 아름답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불륜(?)이라 해도 도덕적으로 지탄받을 일이기는 하나 사랑 그 자체는 아름답다. 부부간이나 부모자식 사이에는 아름다움을 넘어 숭고함으로 의미가 승격되기도 한다.
그런데 화자는 상대의 마음을 무너뜨렸을까? 사랑싸움의 승자가 자신이라고 믿으며 머플러를 깃발로 인식하는 시간, 둘은 싸움을 화해로 승화시킬 수 있을까? 그러나 아직은 줄다리기가 끝나지 않은 것 같다. 그런데 이쯤에서 시를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생각난다. 이들은 시적화자와 작가를 동일시하며 마치 시에 나타나는 그대로 매우 곤란한 상황에 처한 화자를 걱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작가 자신이 처한 상황의 재연이라 해도 그리 걱정할 필요는 없다. 시 쓰는 것을 통해 작가는 이미 초월의 단계로 들어섰을 것이기에 그런 걱정은 기우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3연의 합일되지 못한 둘의 주장에 대해서도 민감할 필요가 없다.
“폭설에 대해서 알고 싶었”기 때문에 바람이 세찬 “벌판 복판에” 나왔다는 말이나, “한동안 다정하다가 별안간 등을 돌리는 습성”은 “신”과 “폭설”이 다를 바 없다는 말이나, 모두 상대방에게 진심으로 하고 싶었던 말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무슨 말을 하고 싶었을까. 왜 하고 싶은 말이 아닌 엉뚱한 말로 상대의 심정을 냉동 요리했을까. 식어가는 상대방의 반응을 읽는 맛은 어땠을까. 양자 모두에게 이런 맛을 위해 실현된 줄다리기라면 그것이 이별로 이어진다고 해도 아름다운(?) 장면이다. 인간은 공포도 즐기고 슬픔도 즐기는 별종의 영장류가 아니던가. 대리만족을 위해 영화나 연극을 만들고 스포츠를 즐기지 않던가. 모든 것은 인간이기에 아름답다는 이유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위의 서로 다른 두 편의 시는 같은 지면에 나란히 소시집 작품으로 발표되었다. 그런데 참여의식 결여에 대한 죄의식을 드러낸 「겨울나무로부터」를, 앞부분의 감상과는 다르게 연시戀詩로 읽으면 안 되는 것일까? 너그럽게 생각하면, 특별한 경험이 있는 독자들이 연시로 받아들인다고 해서 크게 틀릴 것도 없을 것 같다. 가령, 이별하지 않고 힘을 합쳐 난간을 극복하는 지혜를 가지지 못한 회한으로 읽는다면 어떨까? 「12월에 부는 바람」도 그렇다. 심성이 포악한 것은 폭설뿐만이 아니다. 그리고 포악함을 감추고 포근함을 보여주는 빅브러더스의 행태를 상상해보는 것은 또 어떤가?
이상 두 편의 시에서도 보듯 순수와 참여는 대부분 한 몸이다. 양자 중 한쪽이 다른 한쪽에 의탁했거나 한쪽이 다른 한쪽을 숨긴 채 보듬고 있다. 작품에 작가의 생각이 투영되기는 하지만, 그 역시 작품作品과 작위作爲의 공통된 作을 생각해보면, 겉모습 그대로 이해해서는 곤란한 작품도 있다. 때문에 물론, 작품 하나를 읽고 당사자의 정신세계를 섣불리 재단하는 것은 지극히 위험한 일이다.
그러나 위험하다는 것에 동의하면서도 ‘시감상’을 쓰는 것은 시에 대한 욕구 때문이다. 좀 더 좋은 시를 쓰고 싶은 욕구가 이런저런 시들을 살펴보게 하고 그 결과를 ‘시감상’으로 겁 없이 쓰는 것이지만, 속된 말로 나도 간肝이 부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는 사실을 사족으로 덧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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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가볍게 읽고 스치던 저의 시 읽기, '시감상'으로 고쳐 고맙게 읽어 봅니다.
예쁜 닉네임이군요. ^^
아이구! 반갑다는 인사 먼저 올리구여
올려주신 자료들 잘 정독하면서
많이 배우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여름자연학교에서 반가웠습니다.^^
함께 공부하면 외롭지는 않을 겁니다.
이렇게 뵙게되어 정말! 반갑습니다. 자주 와도 되죠?
그럼요. 매일 와도 됩니다. 아니 아예 상주해도 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