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풍은 돌아보는 여자의 외모에 잠이 확 달아나는 것 같았다. 과장의 수족 노릇을 하는 비서가 새벽부터 차를 몬다고 생각하고 무신경해 있었던 그에게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녀는 자그마한 얼굴에 큰 눈과 오똑한 콧날과 도톰한 입술의 미인으로 이십 대 중반쯤의 나이에 아담한 키의 소유자였다.
“깜박하고 있었군. 소개하겠네. 자네의 파트너, 김제희 형사네!”
한 과장의 소개에 제희가 손을 내밀었다.
“얘기 많이 들었어요, 박원풍 형사님! 청량리 경찰서 강력반 소속으로 한 과장님의 호출을 받고 수사본부에 합류했어요. 잘 부탁드립니다.”
“부탁 같은 거 난 잘 못 들어주는데…….”
원풍은 그녀의 손을 살짝 잡았다 놓으며 시큰둥하게 말했다.
원풍은 여형사를 파트너로 붙여 준 한 과장의 저의가 무척이나 궁금했다. 그러나 과장은 제희를 소개해 놓고 홀연히 나가버렸다.
“그, 그럼, 한 수 배우겠습니다.”
난감한 표정을 거두고 미소 지으며 제희가 말했다. 원풍은 제희의 미소가 헤프다고 생각했다. 아무 대꾸도 없이 내린 원풍은 이슬에 젖어 축축한 숲에 발을 들여놓았다.
차를 세워 놓고 혼자서 사체를 운반할 수 있는 거리란 얼마나 될까. 원풍은 그리 멀지 않은 고층 아파트를 돌아보았다. 수상히 여길 시선들이 없다고 확신할 수 있는 장소가 아니었다. 그 시각대가 한밤중이라고 해도 말이다.
원풍은 요원들 사이를 걸어 안쪽으로 들어갔다. 안면이 있는 형사들이 더러 눈에 들어왔다. 원풍은 그들에게 눈인사를 건네며 시신 바로 옆까지 나아갔다. 시신은 짙은 색 시트에 덮여 있었다. 길 가에서 15m가령인 지점이었다. 하지만 산을 오르는 오솔길에서 볼 땐 채 3m도 안 된 거리에 불과했다. 시신을 목격한 사람으로 추정되는 60대 중반의 노인이 한 과장과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살인마 준은 시신이 되도록 쉽고 빨리 발견되기를 희망했다!
놈은 15m나 걸어들어와 사체를 유기한 것으로 보아 이 곳 지리와 지역 주민들의 동태를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목격자가 없을 거라고 확신한 것이다!
한 과장이 사체를 봐도 좋다고 손짓했다.
원풍이 시트를 걷기 전에 누군가 다가와 시트를 걷어냈다.
“오랜만이야, 박 형사!”
감식반 요원 김민규 형사였다. 원풍이와 동년배로 몇 번 술자리를 같이 한 적이 있었다.
“어, 김 형사! 잘 지냈어?”
“그럭저럭. 자넨 신수가 훤해진 것 같군.”
“내겐 반대 소리로 들리는데.”
원풍은 억지 웃음을 흘리고 시신으로 눈을 돌렸다.
끔찍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여자는 큰 대자로 사지가 쩍 벌어져 있었다. 사후 경직 정도로 봐서 살해된 지 몇 시간도 안 되 보였고, 시꺼먼 자국이 온 몸에 난무했다. 자국이 난 피부는 벗겨져 부풀어오르고 피가 맺혀 있었다. 젖가슴에도 가로지르는 피멍 자국이 있었는데, 가운데 부위가 심하게 훼손되었다.
“물어 뜯었어. 놈이 말이야!”
민규가 담담하게 감식 소견을 말해 주었다.
“이건 채찍인가?”
원풍은 끓어오르는 분을 억제하고 물었다.
“잘 봤어. 피부의 충격 정도로 봐서 딱딱한 질감에 의한 손상이야. 벨트나 채찍일 것으로 추정돼.”
원풍은 상체와 다름없이 피멍이 든 여자의 두 다리를 쳐다보았다. 기묘하게 벌려놓은 다리 사이는 별 손상이 없어 보였다.
“정액이 검출됐어. 격렬한 성교의 흔적으로 질 입구가 멍들고 찢어졌고.”
왜 살인마 준은 여자의 생식기에 어떤 가학적인 짓도 하지 않은 것일까. 흔적도 없이 사라진 유두에 비교하면 아이러니한 대목이었다.
“이 전의 희생자들은 어땠어?”
“어느 부분 말인가?”
“성기.”
“성교 흔적만 발견됐어.”
희생자에게 가해진 무지막지한 채찍질은 섹스를 하기 위한 전희 단계가 아니였을까. 성도착자의 소행? 그렇다면 목을 잘라낸 것도 같은 맥락으로 봐야 할까. 여자의 사체엔 머리 부분이 없었다. 혹시나 싶어 출동한 형사들이 주변을 샅샅이 수색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전의 여섯 명의 희생자의 머리는 발견된 적이 없었다. 놈이 노획물의 증거로 소장하고 있을 공산이 컸다.
“목은 어떤가?”
“칼 자국과 톱 자국이 나 있어.”
“그게 사인이야?”
“이전 희생자들을 부검한 결과를 보자면 질식사 이외에 추정할 말한 특징은 전혀 발견되지 않았어. 놈은 경부를 압박해 살인한 후 목을 잘라냈어.”
희생자의 발을 들어올렸다. 발바닥엔 ‘JUN' 이라는 영문자 사인이 주홍글씨처럼 빨간 매직으로 휘갈겨져 있었다. 자신의 짓을 세상에 알린 것일까. 아니면 스스로의 만족으로 자기 사인을 한 것일까. 그 대답은 사라진 머리에 있을 것이 분명하다고 원풍은 생각했다. 놈은 여자의 얼굴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소장하기 위해 살인을 하는 것 같다. 무엇 때문일까. 여자의 예쁘장한 얼굴을 포르말린이 담긴 용기에 보관한다고 가정해 보자. 그것을 볼 때마다 희열과 쾌락에 사로잡힐만한 동기, 과연 그런 것이 존재할까. 여자 소유욕이 강한 작자라면?
원풍은 사체에 시트를 덮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언제 와 있었는지 제희가 따라 일어섰다. 그녀의 표정으로 봐서 그가 감식반 친구와 대화하는 것을 쭉 곁에서 경청한 것 같았다. 원풍은 그녀를 보자 무턱대고 화가 치미는 것을 느꼈다. 아내와 비슷한 키의 그녀는 신체의 볼륨마져 아내와 흡사했다.
“아까, 초안산의 내력과 범인 사이에 무슨 연관이 있지 않을까 라고 했죠? 근거가 될만한 사유라도 있어요?”
원풍은 죽은 아내를 연상시키는 제희의 신체 라인을 무시하려고 애쓰며 물었다.
“범인에 관해 어떤 단서도 나오지 않아 사체 유기 장소에 의미를 부여해 본 거예요. 놈은 살인을 한 후 채 몇 시간도 되지 않아 사체를 유기하죠. 그것도 발견되기 쉬운 장소만 골라서 말이에요. 우린 놈이 자신의 행위를 자랑하고 싶어 한다고 추정하고 있어요. 놈은 사체가 부패되기 전에 자신의 솜씨가 누군가의 눈에 띄기를 열망하고 있는 거라고요.”
“경찰에 말인가?”
“그렇죠.”
“왜지?”
“일종의 쾌감이죠. 자기가 희생자를 얼마나 학대했는지, 가능하면 생생하게 보여 주고 싶은 거에요. 우린 놈이 우리에게 사체를 선물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허태수처럼 말이죠.”
허태수 이름이 나오자 원풍은 피가 역류하는 것 같았다.
“근거 없는 소리는 아니죠?”
원풍은 피해의식에 사로잡히며 숨을 들이쉬었다. 제희가 고의적으로 허태수의 이름을 입에 담는 것 같았다. 왜 그런지 이유를 대라면 수없이 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가 그녀를 못마땅해 하는 데서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저거 보이지 않으세요?”
제희가 손가락으로 가르키는 곳은 사체를 덮고 있는 시트였다. 의아해 하는 그를 놔 두고 사체로 다가간 제희가 시트를 걷어냈다. 마술처럼 시트 아래에서 화려한 색상의 꽃무늬 포장지가 나왔다. 사체를 덮고 있는 포장지 중앙에는 허태수가 그랬던 것처럼 리본이 단단히 붙어 있었다. 아깐 시트와 포장지를 한꺼번에 걷어낸 모양이었다.
원풍은 아내의 자궁을 포장한 포장지를 본 것처럼 온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최 과장이 필요로해서 그를 부른 것이 아니라 살인마 준이 그를 부른 것이다. 원풍은 자신에게 검거된 수많은 범죄자들이 뇌리를 스치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들 중의 한 사람은 아닐 것이다. 희생자의 몸에서 정액이 검출됐으니 수사본부에서 범인의 DNA를 확보하고 있을 것이었다. 그것은 이미 용의자들의 DNA를 채취해 대조 작업을 마쳤다는 의미였다.
“박 형사님이 지금 무슨 생각하는지 알아요. 박 형사님이 체포한 범인들 중에 출소한 자를 모조리 조사했었어요. 물론 그들의 유전자를 수집해 검사도 했죠. 느끼신 대로 일치한 자는 없었어요. ”
“허태수를 추종한 자란 말인가. 아니면 사체 유기 시만 허태수를 모방한 거란 말인가. 물어볼 것도 없이 허태수는 조사했겠지?”
“예. 아무런 단서도 얻지 못했죠. 그래서 우린 살인마 준은 허태수와 관련 없는 자라고 잠정적으로 결론 내렸어요. 알다시피 허태수는 딱 한 번 포장지를 사용했어요. 그러나 살인마 준은 첫 번째 희생자부터 포장지를 사용하고 있어요. 영감이라고 하면 우습지만, 살인마 준이 허태수 관련 기사를 보고 그런 발상을 한 것이 아닐까 싶었죠. 그러나 희생자가 계속해서 나오자 우린 살인마 준이 다른 의도로 포장지를 사용할지 모른다고 생각하게 되었어요. 놈이 박 형사님을 자신의 살인 행각에 초대한 것이라고요. 이를테면 자신은 완전범죄를 표방하고 있으니 허태수라는 괴물을 잡은 박 형사님에게 어디 한 번 잡아 보시지 라는.”
“나의 수사력을 시험하는 계획적인 범죄란 소리는 설마 아니겠지?”
“물론이에요. 범죄를 저지르고 자기를 수사할 경찰로 박 형사님을 지목한 거라고 하면 말이 될까요.”
제희가 임무를 맡았든 아니든 최 과장을 대신해 그를 불러 들인 이유를 설명해 준 형국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추측이고 가정이었다. 수사가 답보 상태를 면하지 못하자 무리하게 맞춰 본, 가능성이 희박한 추정일지 모르는 것이다.
“가서 한숨 자고, 본부로 나오게.”
약수터에 오르던 노인이 사체를 발견했다고 전해 주며 최 과장이 말했다. 원풍은 살인마 준의 엽기적이고 분통을 자아내는 사체 유기 방법을 곱씹으며 제희가 모는 차를 타고 모텔로 돌아왔다. 그러나 중시할 것은 그가 왜 여자들을 살해하고 있는가 였다. 사체 유기 방법은 살인에 있어 부수적인 사인일 뿐인 것이었다. 하지만 놈이 수사관을 지목했다는 추정이 맞을 경우는 죽은 아내와 어떤 식으로든 관련이 있는 사건일 수도 있었다. 놈은 원풍에게 죽은 아내를 상기시키는 범죄의 모습을 취하고 있는 것이니까.
제희는 몇 시간 후에 만나자고 말하곤 돌아갔다. 그녀가 아내와 비슷한 신체를 지닌 것은 우연일 것이다. 원풍은 수사본부 초창기부터 근무한 제희를 최 과장이 특수한 의도로 파트너로 붙여 준 것이라는 생각을 버리려고 애썼다. 그녀는 아내와 유사한 신체였고, 살인마 준의 사냥감의 신체와 비슷했기 때문이었다.
4
헌영은 힘겹게 눈을 떴다.
머리가 깨질 듯한 통증에 절로 손이 뒷통수로 갔다. 그곳은 부어올랐지만 피를 흘리지는 않았다. 갑자기 뒷통수를 얻어맞은 아픈 기억이 떠올랐다. 짙은 선글라스를 낀 컴퓨터 배달원이 핸드폰을 주어 주려는 그녀를 공격했었다.
헌영은 무서운 생각이 밀려오자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순간 그녀는 흰 시트가 깔린 더블침대에 누워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손은 자유로워지만 발목에 사슬이 달린 족쇄가 채워져 있었다.
난 납치되었다!
헌영은 공포에 사로잡히며 심장이 무섭게 날뛰었다.
빨간 조명이 켜진 실내는 족히 20평은 되어 보였다. 원룸 형태로 탁 트인 공간에 주방 기구와 식탁이 갖춰졌고, 사방의 벽은 고급스런 벽지로 도배되었다.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방금 전에 청소를 마친 것처럼 실내는 깨끗하고 완벽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대체 여기가 어디지? 헌영은 그녀 이외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조급해졌다. 여기를 빠져나가야 해. 헌영은 성급하게 침대에서 내려섰다. 발을 내딛으려는 순간 발목의 족쇄가 조여왔다. 헌영은 살갗을 파고드는 통증으로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걸을 수는 있었다. 사슬은 30센티미터 길이였고, 더디지만 그 보폭 내에선 자유로왔다.
어기적거리는 걸음을 옮겨 놓던 헌영은 무언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가 입고 있는 옷이 낯설었던 것이다. 베이지색 계열의 투피스는 세련된 디자인으로, 그녀에게 맞춤옷처럼 잘 맞았다. 헌영은 굳이 상표를 확인하지도 않아도 외국의 유명 디자이너 상표가 붙은 의상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런 류의 고가의 옷은 백화점의 한적한 층에 진열되어 특별한 손님들에게 팔려 나간다. 웬만한 월급쟁이들은 눈요기로만 족할 수백만원대를 호가하는 옷이었다.
헌영은 그녀가 입었던 옷의 행방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먼지 하나 없이 깔끔한 방의 어디에도 그녀의 옷은 보이지 않았다.
왜 옷을 갈아 입혔지?
헌영은 설마 하는 심정으로 스커트를 들춰 보았다. 수치심으로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그녀의 팬티는 사라지고 낯선 실크 팬티를 입고 있는 것이다. 실크 블라우스 안의 브래지어도 팬티와 궁합을 이루는 핑크색으로 바뀌어 있었다. 소름이 확 끼쳤다. 놈의 손길이 실오라기 하나 없는 알몸을 만진 것이다.
헌영은 의식을 잃고 있는 사이에 강간을 당한 것은 아닐까 두려웠다. 그러나 음부에선 그런 짓을 당했을 거라고 추정되는 어떤 통증도 느껴지지 않았다.
왜 이런 옷으로 갈아 입혔을까.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배달원으로 행세한 남자가 정상인은 아니라는 것은 납치당한 것만 봐도 명백했다. 등골이 오싹해지며 한기가 온 몸을 타고 흘렀다.
헌영은 서둘러야 했다. 족쇄가 조여오는 아픔도 무시하고 출입구를 찾아 해맸다. 놀라운 일이었다. 믿을 수도 없었다. 사방의 벽 어디에도 출입구가 없었다. 보통의 집이라면 하나쯤은 있을 창문조차 없는 이상한 집이었다.
숨 막히는 공포가 엄습했다. 밀폐된 공간일지 모른다는 공포는 곧바로 죽음과 연결되었다. 갑자기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나를 가두고 문을 봉쇄해 버린 것일까. 헌영은 빨간 빛으로 실내를 물들이고 있는 천장의 전등을 쳐다보았다. 어딘가에 스위치는 있을 것이다. 밝은 빛으로 빛을 바꾸고 벽지를 조사해 봐야 해. 순간 외부에서 집 안에 벽지를 바를 수 없다는 생각이 미쳤다. 그렇다면 출입구는 위장되어 있을 것이다.
헌영은 벽을 쾅쾅 두드리면서 출입문을 찾아 나섰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할 필요도 있었다. 어딘지는 모르지만, 사람의 출입이 전혀 없는 외딴곳이란 없을 것이다. 근처를 지나가는 누군가, 혹은 옆집의 누군가에게 구조를 요청해야 한다! 놈이 오기 전에.
“도와 주세요! 도와 주세요!”
헌영은 있는 힘껏 소리를 지르며 꼼꼼하게 벽을 점검해 나갔다. 그러던 어느 순간 무슨 소린가를 들은 것 같았다. 쇠붙이가 부딪히는 소리 같았다. 헌영은 행동을 중단하고 귀를 기울였다. 너무 가까운 곳에서 들려온 것 같던 그 소리는 삐걱거리는 소리로 바뀌어 그녀의 귓청을 얼어붙게 했다. 헌영은 그 소리의 정체를 짐작하고 얼어붙었다. 벽에 붙어 있던 책장과 책상이 통째로 밀려들어왔다. 손에 열쇠꾸러미를 쥐고 들어오는 남자는 얼굴에 밀가루를 바른 듯이 기이할 정도로 하앴다. 헌영은 그것이 가면이라는 것을 알았다.
첫댓글 잘봤습니다.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