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허스님을 소개합니다.
경허스님은 서산의 자랑, 한국의 자랑이며 나아가 인류의 스승이 되시는 분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경허를 모르는 사람들은 과장되다고 말 할 수도 있겠지만 이것은 결코 과장이 아닙니다. 신라시대에 원효스님이 귀족불교를 벗어나서 ‘나무아미타불’을 외며 민중속으로 들어갔듯이 조선말엽의 경허스도 민중속으로 들어가 그들과 동고동락하며 사셨던 분입니다. 그래서 세상에는 경허스님과 관련된 일화가 많이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경허스님이 천장암에 머물때 어느날 갈산 김씨의 49재가 있었습니다. 주지인 태허 스님이 법당에 떡과 과일을 푸짐하게 잘 차려 놓았는데 김씨의 49재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동네 아이들과 거지들이 몰려와서 법당앞에서 제가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경허스님이 굶주린 아이들을 보자 차려놓은 떡과 과일을 전부 바구니에 담아 가지고 아이들과 거지들에게 주었습니다. 경허의 돌연한 행동에 주지 태허 스님은 "왜 제사가 끝나기도 전에 재공양물을 나누어 주느냐?"고 화를 내었습니다. 더구나 재를 지낼 갈산김씨 분들이 도착하여 이 광경을 보았다면 얼마나 황당하였겠습니까? 경허는 태허스님에게 차분하게 대답하였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제대로 49재를 지내는 것입니다"
태허스님의 말처럼 제를 지내고나서도 제사상에 올려졌던 공양물을 얼마든지 거지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경허스님은 배고픈 이들을 보고 즉각적으로 그들에게 떡과 과일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배고파하는 사람들에게 제사가 끝날 때까지 기다려라 하지않는 사람, 해야 할 일이라면 즉각적으로 하는 사람이 경허스님이었습니다. 이러한 자신의 행동으로 인해 경허스님은 평생 칭찬과비난을 온몸에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분은 다시 그 칭찬과 비난에 영향을 받지 않고 자신의 마음 가는데로 살아갔습니다.
한번은 경허스님이 지리산 마천이란 곳을 지날 때 그곳에 흉년이 들어 마을 주민들이 굶어죽게 되었습니다. 경허스님은 가던 길을 멈추고 80리길이나 되는 남원으로 가서 쌀을 탁발하여 굶주린 마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아무일이 없었다는 듯이 자신이 갈 길을 갔습니다.
또 한 가지, 이것은 매우 유명한 일화인데 경허스님이 해인사에 계실 때 길옆 눈속에 쓰러져 있던 여인을 방으로 업어 메고 와서 여인의 목숨을 살렸습니다. 이 여인은 몇날몇일을 경허스님 방에서 먹고 잤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시자인 만공스님이 살펴보니 이 여인은 코와 눈이 분간할 수 없을 만큼 썩고 고약한 악취가 풍겨나오는 한센병 환자였습니다. 제자 만공은 도저히 스승의 법력을 따를 수 없구나하는 절망감을 느꼈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경허의 행동이 이해가 되지 않아서 기행이라고 하고 좋게는 무애행이라고 말합니다. 경허의 행동으로 한쪽에 이익을 보는 사람이 생기는 반면, 다른 한쪽으로 손해를 보는 사람이 생긴다면 우리는 경허의 행동을 긍정적으로 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오히려 경허의 행동이 불쾌하게 다가오기도 하고 무례하게 다가오기도 합니다.
그러나 곰곰이 살펴보면 제사상에 음식을 허락없이 거지들에게 나누어 주고, 굶주린 사람들에게 쌀을 탁발하여다 주고,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문둥병 여인을 데려다 보호해주는 경허의 행동은 망설임 없이 즉각적으로 나온 것임을 알게 됩니다. 경허가 보여준 행위들은 사량을 하면 모순처럼 보이지만 순수한 마음에서 보면 단순합니다. 경허의 깨끗한 마음, 정직한 마음, 따듯한 마음은 마땅히 우리가 회복하고 키워나가야 할 마음입니다. 경허가 먹물 옷을 입은 스님이라고 해서 경허스님을 불교인, 경허스님의 행위를 종교적인 행위라고 한정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분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순수한 마음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얼마나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지를 보여주신 분입니다. 경허는 글을 모르는 사람들과 어린아이들을 위해 쉽게 외울 수 있는 한글 법문을 짓고, 늙거나 병들어 참선을 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도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서 마음에 평화를 얻게 했습니다. 폐쇄되었던 선원을 다시 일으켜 참선공부하는 수행가풍을 되살렸으며 수행자가 일상생활에서 지켜야할 청규를 제정하여 삶의 기준이 되게 하였습니다. 말년에는 모든 직책과 책임을 벗어던지고 작은 산속마을로 들어가 아이들에게 글을 깨우쳐주는 마을 훈장으로서 살다가 돌아가셨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유롭게 살고 싶어하고 따듯한 사랑을 나누며 살고 싶어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고 오히려 부자유와 불화속에서 살아갑니다. 그것은 경허와 같은 깨끗한 마음, 정직한 마음을 갖지 못해서 일 것입니다. 자유로운 바람과 같고, 포효하는 호랑이처럼 당당하며, 그러면서도 동네 할아버지처럼 푸근한 경허스님은 한국뿐만이 아니라 세계사에서도 유례를 찾기 힘든 성인이며 자유인이며 스승입니다. 이러한 스님이 우리지역 서산에 사셨다는 것은 서산시민이 마땅히 자랑하고 뿌듯해야 할 일이며 영원히 마르지 않을 ‘서산의 문화자산’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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