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동 별곡
이주옥
푸른 것이 그리운 즈음이다. 계절마다 자기만의 색을 지니고 뽐낸다고 하지만 겨울은 하얀 눈 말고는 대부분 색을 잃는다. 물기라고는 없어 바삭한 느낌이 나는 갈색 나뭇가지부터 화단이나 화분의 죽어버린 풀 섶의 누런빛도 딱히 색이라고 하기에는 볼품없고 애매하다.
이즈음 가장 먼저 색을 입는 것이 봄동이다. 마트의 황색 종이 상자 안에 다붓이 몸을 누인 채소가 별안간 눈 안에 생기롭게 다가든다. 총천연색 포장지를 입고 진열대에 누운 다른 상품에 비해 독보적인색감이다. 추위에 강한 봄동은 겨울철 노지에 파종하여 봄에 수확하는 배추로 냉이, 달래 등과 함께 대표적인 봄채소로 꼽힌다. 하지만 이중 보이는 계절감으로는 봄동이 압도적이다.
비가 내리다 금세 눈이 되며 아직도 길을 찾지 못한 날씨에 편승해 사람들도 아직 패딩을 벗지 못하고 있다. 어느 곳은 푸짐한 적설량으로 일상이 불편하다고 하고 또 어느 지역엔 얼음 녹은 들판에 실한 뿌리를 품고 어느새 얼굴을 내민 냉이를 캐는 아낙이 앉아있다. 이런 와중에 확실한 색으로 위용을 자랑하는 봄동이 다소 성급해 보이기는 해도 반가운 것이 사실이다.
2월 초에 입춘이 지나고 풀린 얼음이 비로 내린다. 는 우수도 지났다. 누가 뭐래도 분명 봄이다. 하지만 여전히 두꺼운 패딩 점퍼나 털옷을 입으면서 조금고민을 하는 건 사실이다. 부드러워진 바람결만 믿고 일단 얇은 코트를 걸치고 나서보지만 아차 싶다.
봄동은 겨울 언 땅에서 자란 녀석 답지 않게 짱짱한 기력을 뽐내며 사람들의 얼었던 마음을 풀어지게 한다. 차가운 물에 씻어 물기 털어내고 뜨거운 밥한 숟가락에 쌈장 한 점 얹어 먹으면 속 안이 연두 빛으로 가득할 것 같다. 하루 다르게 묵은 것이 돼가는 김장 김치도 적당히 물리는 즈음, 칼칼한 고춧가루와 고소한 젓갈에 버무린 겉절이로 상큼한 입맛을 찾고 싶기도 하다.
서너 달 계속되는 겨울에 눈과 찬바람을 맞고도 꿋꿋하게 생명력을 품은 저력은 무엇일까. 아마도 지루한 계절 속에서 운신의 폭이 좁아지고 그에 기운까지 잃은 사람들에게 몸을 깨우고 마음을 깨울수 있는 하나의 생명력으로 재탄생하고 싶다는 의지의 발현 아닐까.
봄동은 여린 잎을 켜켜이 매달고 둥그렇게 몸을 활짝 열어 맨 먼저 봄 안으로 걸어온다. 적당한 연두빛에 적당한 크기의 잎을 촘촘히 안은 봄동 한 포기를 저울에 올린다. 3천 원이 채 되지 않은 숫자가 찍힌다. 그램당 300원 남짓, 생명력이라는 막중한 무게감과는 달리 저울 위 숫자가 봄바람처럼 가볍다.
부담 없이 입안에 상큼하게 얹혀 볼우물 터지도록 이른 봄을 쌈싸먹을 수 있겠다. 봄이라는 계절이 주는 다정하고도 산뜻한 선물이다.
봄동은 봄~똥으로 발음된다. 봄의 가벼움으로부터 슬며시 밀려 나오는 똥은 혀 위에서 자연스럽게 굴려져 나온다. 봄이라는 어미에 가볍게 실린 똥의 어감은 아무런 거부감 없이 귀엽기까지 하다. 봄이 싸는 푸른 똥은 냄새마저도 고소할 듯하다. 3천원어치 봄을 사들고 집으로 걸어가는 길은 이미 초록이 가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