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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손톱의 낮잠 / 김미정
손가락 끝에도 길이 있을까
손톱이 길어졌다
기억나지 않던 기억이 살아났다
새벽이 오기 전에 깨어나는 새의 심장처럼
손금이 요동친다
제때 깍지 못한 손톱
어제 자라 난 길이보다 오늘 자라는 길이가
더 긴 사연을 찾아
내일을 자극한다
내 속에서 걸어 나온 손톱이
내 것이 아니라는 표정으로 떠 있는
낮달
물컹했던 통증의 내부
그때마다 만나는 눈물의 염도
길보다 더 길게 자라나 하늘을 단단하게 포장하는 시간
손가락 끝에서 심장이 뛴다
천천히 당신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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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분실물 보관함 / 김미정
억새꽃은 눈은 있지만 입술이 없다. 주인을 찾아주세요. 안내데스크에 맡기며 시락국밥집 앞에서 주웠다고 한다.
단축키 일 번을 꾸욱 눌렀다. 저장된 연락처가 없습니다. 전화가 오기만을 기다리는 순간이 가을 강처럼 깊어 간다. 접혀있는 시간을 열어본다. 시들어 버린 빈 하늘과 마른 햇볕에 닳아버린 애기동백 한 송이가 들어 있다.
소리가 들린다. 단풍나무 속에서 허리가 푹 꺾인 할머니가 걸어 나온다. 꽃 진 살구나무처럼 서있다.
누런 이를 보이며, 스러진 청춘이 숫자처럼 박혀있는 폰 속으로 더듬더듬 걸어온다. 사라진 기억보다 돌아온 기억 쪽으로 가까워 지려는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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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결빙의 습관 / 김미정
길을 잃었다
천장을 뚫고 흘러나왔다
열선은 싸늘해지고
통과하지 못한 예감은 멍이 들었다
바람의 나부낌도 무게로 다가와
눈물의 흔적을 씻어 내려야 하는
폭포가 생겼다
흥건한 바닥에 물고기는 아직 오지않았다
일단 잠그기로 하자
틈은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젖은 가슴을 닦는다
기다림이 시작되었다
서로를 관통하지 못하고 얼어버린
검은 공터가 넓어져 간다
오로지 너를 통해서만 읽혔던 세상일들이
깊이와 길이를 잴 수 없는
흐르지 않는 물의 길
조용히 다문 결빙은 습관으로 변질되었다
동파된 가슴을 동여맨다고
처음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잃어버렸던 표정을 하나씩 찾아 나서기로 하자
너의 혈관 안에
나의 맥박이 숨 쉴 수 있도록
얼음장 물꼬를 튼다
그의 공구 통에서 겨울이 부서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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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건반 속으로 / 김미정
해안도로를 끼고 그녀를 향해 달린다
법성포에서 따라온 파도가 팔십 여덟 번의
숨을 고르는 동안
모래미 횟집에서 나온
벌거숭이 갯벌이 길가에 나와 기다리고 있다
시폰원피스 살랑거릴 때 웃음소리 맞춰
건반을 두드리면
바닐라바람은 사구를 따라 흘러가고
모래는 소금을 굽는다
섬을 떠나온 사람을 실은 작은 배가 점점 작아지고
절벽이 벽을 보여주기 시작하면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기 전의 마음으로
단정해지기 시작하는 구름의 화음
붉어지려고 하는 피아노 소리에
가만히 눈길을 기대면
노을을 두 손에 옮겨 담은 그가
나를 켜기 시작한다
먼데서 가까운 곳으로 옮겨오기 시작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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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날씨의 예의 / 김미정
날씨 없는 날을 기대합니다
나는 모르고 너는 아는
오늘의 날씨입니다
오늘은 전국적으로 비 또는 눈
당신을 배려하는 설탕 52% 희석하여
날씨는 예보됩니다
믿거나 말거나
믿어도 날씨는 달고
믿지 않아도 그날의 날씨는 씁니다
화요일의 날씨는 아무리 맑아도 흐림
계절은 날씨를 전혀 닮지 않았다고 말하며
콧노래 산뜻한 아침 햇살이 출근합니다
당신이 품은 먹구름 냄새가 접수되었습니다
비바람을 오늘만은 결재하지 않겠습니다
예보하는 친절은 아홉 시를 지나갈 무렵 안개로 덮였습니다
건기에도 흐린 날씨가 반복되면
우산을 품고 사는 습성을 길러야 할까요
비를 피하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사라진 목소리 따윈 적당히 무시하는 온도
휘파람을 이기적으로 불어도 동요하지 않는
당신 또한 나
당신의 일기예보를 전해 드리겠습니다
내일은 대체로 맑으나 당도 차가 심하겠습니다
미세먼지의 농도는 알 수 없습니다
처방전을 이마에 붙이고 출근했나요
당신의 날씨는 3일간 안녕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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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아득한 풍경 / 김미정
사거리 빈터에 새 건물이 들어섰다
자동차 흠집 제거 외형복원
모서리에는 거울이 한쪽 발을 올려놓고
오가는 사람들을 포섭한다
오른손을 들어 인사하면 오른손이 대꾸하는
어제의 주인공이 오늘은 관객이 되기도 한다
나를 보고 있는 나
그런 나 뒤에서 내일에서 온 나를 만나기도 한다
나를 보고 있는 너
어쩌면 너이고 싶었던 나, 인지도 모른다
남겨진 빛 속에서 소란스러운 침묵이 들끓고
그 길을 따라가면 사라지는 순간들
순간으로 들어가면
거울 속의 거울을 만질 수 있을까
건널목 앞에서 신호대기 중
거울이 나를 읽는 시간은 삼분
그 안에 모든 것을 보여주고
뒤돌아 나간다
닦지 않은 거울 속에서
그대로인 자체로 아득하게 바래어 간다
흠집 제거 외형복원
나의 주저함을 자꾸만 받아 읽으려는 너
나의 변심을 변형으로 착각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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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장미의 뱀 / 김미정
안쪽 발목으로 찾아갔어요
노출되는 바깥쪽은 시들기 쉬워요
나만의 포인트가 필요했으니까요
고급스럽고 기품있는 분위기만을 좇아갈 수 없잖아요
가시부터 비늘까지
하나하나 정밀해지고 싶어요
섹시한 매력을 입혀요
줄리앙 아그리파를 데생하던 디테일한 터치감은
도발적인 감성으로 검게 돋아났어요
다리를 자주 꼬아 앉게 됩니다
걸을 때 은근슬쩍 보여 줄게요
걸어 다니는 거리가 한껏 빛나는 걸 보니
어제가 끝이 아니었군요
아직도 천진무구해지고 싶은
발목입니다
목덜미, 쇄골, 팔꿈치지나 손가락까지
다시 번역 합니다
망종입니다
청보리가 누레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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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슬도* / 김미정
바람이 심하게 불어오니 고래가 튀어 오른다
조개 불가사리 모양이 박혀있는 테트라포드가 출렁거린다
파란 하늘과 맞닿은 바위섬
사납게 파도가 밀어닥치면 왕 곰보 돌은 서로를 껴안는다
날리는 머리카락을 움켜잡으며
성끝마을 끝 깊숙이 파고들었다
물빛은 어릴 때 놀던 대청 계곡처럼 맑았다
돌과 물미역 사이로 물고기들이 숨바꼭질한다
속을 드러내는 일은 언제나 자신 없다
한쪽 발이 어딘가 빠진 기분으로 조약돌을 쌓는다
그때는 어떤 이유가 아팠을까
기억나지 않는 아픔을 버리지 못하고 차곡차곡 수집하는 그녀 얼굴이 비쳐
다시 외면하지
슬도명파는 곡비되어 토해낸다
당신 가실 때 퍼붓던 장대비 소리다
부서져도 다시 밀려오는 소리의 내력 속에
차마 울지도 못하고 서 있는 나를 만나는 일이다
귀 기울여 침묵하는데
대책 없이 유채꽃이 만발한다
* 슬도: 울산 방어진의 작은 바위섬, 갯바람과 파도가 바위에 부딪칠 때 거문고 소리가 난다고하여 ‘슬도’라 불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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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북집 / 김미정
어쩌다 늙어 버린 집이 있다
안방은 기웃거리지도 못하고 작은방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다
윗실이 아무리 좋아도 밑실이 없으면 안 되지
엉키거나 끊어져도 박을 수 없지
이것 좀 잡아 봐라
그래 살살 당겨야지
아이는 헝겊 잡은 손가락이 박음질 될까 봐 숨죽이고
엄마는 무심히 기도하듯 재봉틀을 돌린다
엄지와 검지 사이 침을 묻혀가며 실을 돌돌 말아 바늘귀에 끼우고
실패에서 한오라기 빼내어 북집에 걸고 딸깍 고정한다
윗실 될래 밑실 될래
밑실을 감싸 주는 북집이 되어라
바람을 휘저으며 노루발이 달려간다
자장가 들려주듯 한땀 한땀 박힌다
앉은뱅이 재봉틀을 부여잡고 있는 당신의 뒷모습이
정화수에 뜬 하현달 같이 휘어졌다
손의 물금처럼 닳아버린 북집에서
당신의 심장 소리 들린다
다르르 다르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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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늦은 안부 / 김미정
1
저녁을 여름제비꽃 속에 밀어 넣는다
어둠으로 반죽이 된 골목
어깨너머로 날마다 원조를 새긴 간판 앞에서
잠시 갈림길 위에 선다
나는 원조를 묻고 싶다
원조 갈빗집으로 들어간다
2
순간 온몸에 불길이 일었다
간밤에 퍼붓던 비를 고스란히 머금은
심장이 빠르게 쿵쿵거린다
굳게 봉인된 나무 옷만
빗물 같은 눈물에 잠기고 있다
자판기에서 콜라를 빼 마셨는지
누군가 트림하는 소리가 박하 향처럼 쓸려왔다
3
아버지, 불 들어갑니다
활활 타오르는 아궁이 속에서
잠잠하기만 하던 불길이 환호성을 지를 것 같다
햇살 좋은 봄날에 아버지 허리춤을 잡고
밭둑을 걷던 기억이 젖어온다
셋째 딸만큼 이쁘다던 제비꽃을
가슴에 꽂아주며 볼을 비비던 까칠한 수염
무심코 내려 본 신발 앞이 나란해져 있다
4
어둠이 여름제비꽃길 위에서
늦은 안부를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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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무심코 바라보는, 정물화 / 김미정
시간이 허기질 때 창가로 가요
아주 작은 창이 있는 날
초조한 빛이 통과하지 않도록
두통이 사라지지 않은,
자몽한 날은,
가느다란 습관으로 창밖을 바라봐요
흔들리는 먼지 낀 풍경 속에
텅 빈 운동장은 낙타의 사막입니다
각진 교실과 둥근 체육관을 둘러
햇살을 덩그러니 안고 있어요
우르르 학생들이 교문 안으로 들어오지만
마른 겨울 장미는 바람개비 타고 하나둘 빠져나가고
오늘도 운동장은 혼자입니다
그때는, 먼지 자욱한 신작로를 걸어서 운동장에 들어서면, 줄넘기 공기놀이에 철봉은 시소를 타고, 돼지 불알을 그리고, 오징어를 그려서 땅이 꺼질 듯 뛰어놀았죠,
흙먼지와 함께,
하얀빛으로 오염 가득한 세상에 켜켜이 쌓인
우울한 먼지를 털어냅니다
나는 왜 진실로 나를 볼 수 없을까요
나는 왜 휘날리는 깃발의 목소리를 제대로 들을 수 없을까요
아침마다 하루만큼 더 미워진 얼굴을 씻고 또 씻어내듯이
무엇인지 불안한 날은 손때 묻은 것을 찾아 자꾸 닦게 됩니다
긴 방학이 끝나면
꽃샘바람과 황사를 견디어
정지된 그곳에도 만국기가 왁자지껄 펄럭일 테죠
여중생들의 발뒤꿈치에서 흙먼지가 폴폴 피어나는 운동장에
헝클어져,
기세 떨치는 날이
저기 오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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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흔적에 고이는 소리 / 김미정
섬을 벗어날 때쯤 시작한 비가 다솔사에 도착할 무렵엔 제법 심란하다 겨울에서 산사로 드는 빗길, 대웅전 못미처 대양루 지나 안심료에 다다르면 똑- 똑- 신계에서 인간의 시간 속으로 떨어지는 낙숫물 소리가 절 마당을 들어올린다
대청마루 앞, 축담에 쪼그리고 앉아 처마 끝을 보던 어린 시절이 고스란히 펼쳐진다 소가 매여 있던 마당까지 시멘트를 덮고부터는 만날 수 없었던 낙숫물이 나를 부르는 손짓들
처마가 있다고 낙수 흔이 생겨나는 것은 아니다 끊임없이 내리는 빗방울만으로 파문을 만들 수는 없다 떨어져 바닥을 차고 오르는 작은 물방울들은 어린 나의 눈과 가슴으로 번져 생의 저 안쪽으로 파문을 밀어간다 두 손바닥을 펼치면 그때 움켜쥔 물무늬들을 따라 걷는 내가 보인다
또록-또록-, 안심료 마루에 걸터앉아 가지런히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낙숫물 소리를 바라본다 또로록- 똑-, 둥글게 퍼지는 동그라미를 홀린 듯 따라 걷는다 풍경을 스치며 다솔사 차밭을 깨우는 죽비소리, 내 안의 빗방울들이 떨어진 속도로 튀어오른다 나를 깨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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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밤의 지문 / 김미정
아가미가 뻐끔거린다
이불 밖으로 빠져나온 발 한 짝
푸드덕 날아오를 듯하다가
잠잠하다
몇 개인지 알 수 없는 둥근 세계 속
남자의 왼쪽 손바닥은 굳은살로 소용돌이친다
수평선 아래보다 더 궁금한 나머지 손
지구 반 바퀴를 마저 돌아야 겨우 만져질 것 같다
굳은살을 풀어 부드럽게 동심원을 그린다
물금 속으로 사라진 지문을 찾아 헤맬 때
물고기 등에 단단한 가시가 자라고
매의 눈빛 같은 푸른 꿈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파도치는 밤을 당겨
물고기의 무늬를 세긴다
멈춰진 시계의 태엽을 감고
빠져나온 발 한 짝 가지런히 걸어두면
물살이 부딪히며 내는 소리는 점점 작아지고
가시가 찌르는 밤도 얕아진다
돌아누우면 왼쪽 어깨뼈가 뚝 소리를 내는 시간
잠들 수 없는 물고기는
밤의 지문을 닿도록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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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클래식과 부침개 / 김미정
그 남자가 영화 보고 싶어 하는 날에는
비가 내린다
비가 내리는 날이면
그 여자는 부침개를 떠올린다
누런 호박을 반으로 갈라 씨를 덜어내고
숟가락으로 쓱쓱 긁어내어
어제와 오늘을 아니 오늘과 내일을 반죽하여
주머니마다 넣어둔다
부침개 재료 고르듯 영화를 고르고
영화는 빗소리에 맞춰 흥얼흥얼,
첫사랑 편지를 읽으며 시작된다
여자는 빗소리에 맞춰 클래식을 지휘한다
남자는 클래식을 들으며 늘어지게 막걸리를 마신다
어디서 왔는지 모르는
비는 계속 내리고
수십 번을 본 영화의 결말은
기억을 지운 채 비를 향한다
슬픈 인연이 비를 부르는 것일까
비 오는 날 영화는 부침개를 부른다
클래식은 그 남자를 감싸 안고
부침개는 비처럼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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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공극 / 김미정
너는 바람을 안고 걸었고
나는 사람을 안고 걸었다
기장 해안 길은 어제보다 낯설었다
바람이 불었고 갯바위 냄새가 밀려왔다
어촌 체험 마을에 들어서기 전
창이 넓은 카페에 들렀다
나란히 앉아 봄빛이 파도치는 바다를 바라보았다
바람이 불었고 어디선가 한 아이가 자전거를 타고 지나갔다
마르고 있는 미역 냄새가 따라 지나갔다
시시때때로 달라지는 파도의 간극은 알 수 없다
넘어져도 괜찮습니다 카페 문구가 마음에 든다
당신과 나의 거리는 얼마가 적당할까
사랑하다가 한날 한시에 같이 묻혀도 간극은 있다
방파제는 어떤 이름을 간직하기 위해
남기고 지우고 철썩거리며 자기 자신을 다듬고 있다
오래 응시한 눈이 당신의 머리카락 사이로 숨어든다
다시 걷기 시작했을 때 바람이 분다
당신 눈썹 수평선이 출렁거리고
마을 어디선가 풍랑주의보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아무리 넘어져도 괜찮습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물결은 해안을 다듬기 위해 발을 맞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