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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 노트 48 – 위빠사나 수행은 깨달음으로 가는 단 하나의 길이다
< 수행 노트는 1996년도부터 미얀마 마하시 명상원의 수행지도 스승과 한국인 수행자들의 수행면담을 기록한 내용입니다. 참고는 수행자를 돕기 위한 묘원의 글입니다. >
1997년 10월
질문 : 일어남과 꺼짐을 알아차리면서 바람이 부풀었다가 바람이 빠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답변 : 일어남과 꺼짐의 실재를 알아차리는 것은 대상의 빠라마타(paramaṭṭha, 최고의 의미)를 보는 것이다. 대상이 가지고 있는 그대로의 실재를 계속해서 알아차려라.
< 참고 >
깨달음의 세계에서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것을 최고의 의미라는 뜻으로 빠라마타(paramaṭṭha)라고 합니다. 더 이상 다다를 것이 없는 궁극의 진리를 빠라마타 사짜(paramaṭṭha sacca)라고 합니다. 이를 최고의 진리, 진제(眞諦)라고 합니다. 최고의 진리란 명칭이나 개념이 아닌 실재하는 진리를 말합니다. 또 최고의 법을 빠라마타 담마(paramaṭṭha Dhamma)라고 하는데 최승의법(最勝儀法), 최상의법(最上儀法)라고도 합니다. 이는 최고의 의미를 가진 법을 말합니다.
빠라마타 담마(paramaṭṭha Dhamma)라고 하는 최승의법(最勝儀法)은 네 가지가 있습니다. 마음, 마음의 작용[五蘊의 受蘊, 想蘊, 行蘊], 물질, 열반입니다. 최승의법은 이 네 가지의 관념이 아닌 실재를 말합니다. 예를 들면 사람의 손은 명칭, 모양. 개념, 관념으로 세속의 진리라는 뜻으로 속제(俗諦)라고 합니다. 하지만 손의 단단함, 부드러움, 축축함, 건조함, 따뜻함, 차가움, 진동 등은 실재하는 현상으로 출세간의 진리라는 뜻으로 진제(眞諦)라고 합니다. 이때 모양은 사마타 수행의 대상이고 실재는 위빠사나 수행의 대상입니다. 과연 왜 몸과 마음을 최고라고 하고, 실재를 최고라고 할까요?
제가 처음에 위빠사나 수행을 배울 때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은 수행이라는 사실에 큰 기대를 걸었습니다. 그리고 수행을 배우는 첫 날 좋은 체험을 하고 위빠사나 수행에 대해 무한한 신뢰를 했습니다. 하지만 위빠사나 수행에 대한 자료가 많지 않아 법에 목이 말랐습니다. 그러던 중에 주석서에서 최승의법(最勝儀法)이라고 하는 빠라마타 담마(paramaṭṭha Dhamma)라는 단어를 발견했습니다. 이것 하나면 위빠사나 수행을 관통하는 최고의 비밀을 밝힐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내 실망하고 말았습니다. 최고의 법이라는 것이 고작 마음, 마음의 작용, 물질, 열반이었기 때문입니다. 마음, 마음의 작용, 물질 이라는세 가지는 오온에 불과했고 마지막에 열반이 포함되어있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처음에 비밀의 문처럼 생각했는데 매우 실망했습니다.
그 뒤에 위빠사나 수행을 하면서 차츰 오온의 중요성에 대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인간이 몸과 마음을 가지고 살면서 생긴 문제는 오직 몸과 마음에 답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부처님께서 죽음 직전까지 가서 발견한 것이 연기법입니다. 연기법이란 인간의 정신과 물질에 관한 것입니다. 12연기란 정신과 물질이 원인과 결과로 진행되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몸과 마음을 알아차리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느낌이 발견되어 대상을 분리해서 알아차리는 위빠사나 수행이 처음 발견된 것입니다. 몸과 마음의 느낌을 알아차림으로써 관념이 아닌 실재를 본 것입니다. 이 실재가 오온의 빠라마타 담마입니다. 그러므로 깨달음과 해탈의 자유는 이 빠라마타 담마가 아니면 이룰 수 없습니다.
오온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면 존재의 실재인 무상, 고, 무아의 지혜가 납니다. 그러면 집착이 끊어진 열반에 이르게 됩니다. 그래서 오온에 열반이 포함된 것을 최고의 법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깨달음이며, 지고의 행복이고, 윤회가 끝나는 해탈의 자유이기 때문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의 대상은 몸과 마음의 느낌입니다. 이 느낌이란 관념이 아닌 실재입니다. 이렇게 실재를 알아차릴 때만이 무상, 고, 무아의 지혜를 얻습니다. 이처럼 구도자의 수행대상은 오직 몸과 마음이며 이 몸과 마음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면 무상, 고, 무아의 지혜가 나서 열반에 이른 것이 바로 빠라마타 담마입니다.
오온인 몸, 마음의 작용, 물질은 유위법(有爲法)으로 원인과 결과가 있습니다. 그리고 열반은 무위법(無爲法)으로 원인과 결과가 없습니다. 몸, 마음의 작용, 물질만 있으면 원인과 결과가 지속되어 괴로움뿐인 윤회가 계속됩니다. 그러나 몸과 마음의 실재를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서 무상, 고, 무아의 지혜가 나면 집착이 끊어져 열반에 이릅니다. 그러면 다시 태어날 원인이 사라져 태어나는 결과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몸과 마음에 열반이 포함되어야 인생의 고단한 대장정이 비로소 막을 내립니다. 그래서 몸과 마음에 열반이 포함되어야 최고의 법에 등극합니다.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이 바로 위빠사나 수행에 특별한 비밀이 없다는 것입니다. 무엇에나 빠라마타만 붙으면 모든 것에서 최고로 치는 것은 오직 몸과 마음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야 누구나 가지고 있는 일반적 특성을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이 일반적 특성이 바로 무상, 고, 무아입니다. 그러므로 빠라마타 담마 안에는 이런 여러 가지의 요소들이 모두 포함되어 있습니다. 인간이 괴로움을 해결하기 위해서 반드시 얻어야 할 것이라서 네 가지를 통 털어서 최고의 법이라고 합니다.
제가 신비로운 비밀을 찾기는 찾았는데 그것이 바로 몸과 마음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매우 단순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위빠사나 수행의 몸과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은 비밀이 아닌 비밀입니다. 인간에게 이것 말고는 결코 다른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 길을 유일한 길이라고 합니다. 이처럼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은 위빠사나 수행은 상좌불교의 독단적 교리가 아닙니다. 인간이 깨달음을 얻어 윤회를 끝내려면 누구나 가야하는 단 하나의 길입니다. 그간 한국에 위빠사나 수행이 없었던 것은 단지 인연이 닿지 않아서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수행은 어느 종교인의 수행이 아니고, 어느 불교 종파의 수행이 아닙니다. 오직 괴로움을 해결하기를 원하는 인간의 것입니다.
2. 질문 : 걱정거리가 생긴 뒤부터 계속 그 생각이 나서 명상을 계속하기가 어렵습니다.
답변 : 수행을 하다 죽으면 천상에 태어난다.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수행을 해라. 걱정거리가 생기면 그 즉시 ‘걱정함’ ‘걱정함’하고 걱정하는 것을 알아차려라. 그렇지 않으면 ‘망상’ ‘망상’하고 망상하는 것을 알아차려라. 걱정을 시작할 때 걱정이 진행되기 시작할 때 즉시 알아차리면 쉽게 다스려진다. 그러나 걱정의 뿌리가 깊거나 가지가 길게 늘어지면 알아차리는 것으로 다스려지기가 힘들어진다. 문제가 생길 때 초기에 빨리 알아차려야한다.
수행 중에 생기는 위험을 두려워하지 마라. 까사빠 부처님 시절에 마지막 비구 일곱 분이 도를 얻기 전에는 절대 내려오지 말라는 결의를 하고 절벽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사다리를 아래로 밀어버렸다. 다음 날 한 분이 아라한의 도를 얻었다. 이 분이 신통으로 음식을 가져와 함께 먹기를 권했으나 그것을 먹으면 해태심이 생긴다고 모두 거절했다. 다음 날 다른 한 분이 아라한의 도를 얻었다. 그러나 나머지 다섯 분은 도를 얻지 못하고 모두 죽었다. 그러나 그분들은 모두 천상에 태어났고 그중에 한 분이 석가모니 부처님 시절에 태어나 7살에 아라한이 된 경우도 있다. 그러니 수행 중에 어떤 위험도 두려워하지 마라.
< 참고 >
걱정은 자기가 걱정하는 것이 좋아서 합니다. 걱정하는 것이 싫으면 걱정을 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어리석어서 항상 좋지 않은 것을 좋아합니다. 걱정하는 것이나, 자기를 비하는 것이나, 남을 비난하는 것이나 모두 좋아서 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이러한 축적된 성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축적된 성향이 바로 업의 과보입니다. 그러므로 현재의 생각이나 습성도 모두 업의 과보입니다. 오랜 세월동안 쌓인 축적된 성향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여기에 단 한 가지 해결방법이 있습니다. 축적된 성향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오직 있는 그대로 알아차릴 때만이 축적된 성향이 점진적으로 개선될 수 있습니다.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면 마음이 청정해지고 지혜가 나서 축적된 성향이 개선될 수 있습니다. 이 길이 아니고서는 잠재의식이 개선되기 어렵습니다. 걱정도 팔자라고 하는 것은 걱정하는 것을 좋아서 습관적으로 하는 것을 말합니다. 인간의 고민은 바뀔 수 없는 축적된 성향을 바꾸려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전혀 길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릴 때만이 개선의 여지가 있습니다.
마하시 명상원에서는 명칭을 붙여서 걱정을 개념화합니다. 그래서 ‘걱정함’ ‘걱정함’을 두 번을 합니다. 그러면 걱정하는 마음에서 걱정하는 것을 알아차리는 마음으로 바뀝니다. 하지만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자는 명칭을 붙이지 않고 걱정을 할 때 먼저 걱정하는 마음을 알아차립니다. 그런 뒤에 걱정하는 마음으로 인해서 생긴 느낌을 가슴에서 알아차립니다. 이때 콩닥거리거나 무겁거나 현재 있는 느낌을 그대로 알아차립니다. 물론 이때 가슴에서 걱정으로 인해서 생긴 거친 호흡도 알아차릴 대상입니다.
가슴에서 일어난 느낌을 알아차릴 때 없애려고 알아차려서는 안 됩니다. 그냥 느낌이 있어서 알아차려야 합니다. 가슴에서 일어난 느낌이 기분이 좋지 않아도 피하지 말고 알아차려야 합니다. 가슴의 압박감이 강할 때는 피하고 싶은 마음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걱정하는 마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걱정하는 마음을 알아차리면 가슴의 느낌을 싫어하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가슴에서 일어난 느낌을 알아차릴 때 처음에는 거친 느낌을, 차츰 중간 느낌을, 나중에는 미세한 느낌이 될 때까지 계속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래서 가슴의 느낌이 고요해지면 걱정하는 마음이 사라집니다. 이때 다시 호흡을 알아차리면 됩니다. 걱정하는 마음을 알아차렸을 때 순간적으로 걱정하는 마음이 사라집니다. 그러나 완전하게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걱정하는 마음을 알아차린 새 마음이 일어났기 때문에 잠시 자리를 비운 것입니다. 그래서 지속적으로 가슴의 느낌을 알아차려야 걱정하는 마음이 일시적으로 소멸합니다.
걱정이 순간적 소멸에서 일시적으로 소멸한 것도 큰 효과입니다. 다시 걱정하는 마음이 일어났을 때 계속 똑같이 알아차려서 지혜가 나면 걱정이 완전하게 소멸합니다. 그러므로 걱정이 완전하게 소멸할 때까지 계속 알아차려야 합니다. 여기에 다른 조건이 붙어서는 안 됩니다. 오직 지혜가 날 때까지 계속 알아차리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걱정하고 살아온 습관이 걱정하지 않는 습관으로 바뀌려면 새로운 질서를 개편하는 지혜밖에 없습니다.
3. 질문 : 수행 중에 손과 발이 뜨겁게 느껴집니다.
답변 : 수행을 할 때 나타나는 현상은 위험한 것이 아니다. 계속 나타날 때마다 알아차려라.
< 참고 >
몸의 요소는 네 가지인데 지수화풍입니다. 이런 요소가 다양한 느낌으로 나타납니다. 원래 이런 현상은 몸이 가지고 있는 요소이므로 걱정하거나 두려워하거나 병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수행을 하면 항상 있던 것을 모르고 있다가 새로 알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이 집중의 효과입니다. 그러므로 뜨거움이 느껴지면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러면 뜨거움이 아닌 다른 대상이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뜨거움이 계속되더라도 그냥 계속 알아차리면 그만입니다. 이때 뜨거운 느낌의 변화가 있을 때는 느낌을 알아차리는 수행이 아닌 무상이라는 법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해도 됩니다. 뜨거운 느낌이 변할 때는 무상으로 알아차려도 좋습니다.
4. 질문 : 경행을 하는 것보다 좌선을 더 많이 하고 싶습니다.
답변 : 부처님께서도 경행을 하고 좌선을 하셨다. 경행과 좌선을 병행하는 방법보다 더 좋은 수행방법은 없다. 경행을 하거나 좌선을 하거나 일상의 알아차림을 하거나 모든 것을 밀착해서 알아차려야 한다. 수행자가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수행을 하면 오십 보를 가다가 다른 시간에 백 보 후퇴한다. 이런 상태에서는 수행의 발전이 없으며 집중력이 생기지 않는다.
부처님 법문의 요지는 사띠빠타나(satipaṭṭhāna, 알아차림의 확립)이다. 수행자는 언제나 모든 현상에 밀착하여 알아차리는 것 외에 다른 길이 없다. 이 세계 자체가 오욕락(五慾樂)을 즐기는 세계다. 이 오욕락에 마음이 쏠리지 않도록 하루 중의 모든 시간을 계속 알아차림으로 채워야 한다. 일상의 모든 동작을 놓치지 않고 알아차려서 끊어짐이 없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 오욕락에 빠지지 않고 집중력이 증가한다. 좌선과 경행의 중요성뿐만 아니라 일상의 모든 동작을 똑같이 알아차리는 것이 중요하다.
< 참고 >
좋아하는 것만 하는 것이 탐욕이며 싫어하는 것은 하지 않는 것이 성냄입니다.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을 하는 것이 어리석음입니다.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은 선하지 못한 마음입니다. 선하지 못한 마음 때문에 괴로움을 겪는데 이 마음으로 수행을 해서는 안 됩니다. 수행은 무엇이나 좋아하거나 싫어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해진 시간표를 그대로 따르는 것이 필요합니다. 명상원에서 수행을 하려면 모든 계획이 최적화되어 있는 시간표를 따르는 것이 좋습니다.
부처는 빨리어로 붓다(Buddha)라는 뜻인데 아는 자, 깨달은 자라는 뜻입니다. 무엇을 알았는가 하면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인 고집멸도를 알아 윤회를 끝낸 분입니다. 붓다는 인간이 가보지 못한 새로운 정신세계를 스스로 찾아서 깨달음을 얻습니다. 그리고 위없는 깨달음을 얻어 더 이상 다다를 것이 없는 사물의 이치를 알았습니다. 이것이 무상, 고, 무아입니다. 내가 없다는 무아를 알아 모든 집착을 여읜 것이 깨달음입니다.
부처님은 살아있는 생명 중에서 최고의 바라밀 공덕을 쌓은 과보로 태어납니다. 그래서 최고의 신분의 자제로 태어납니다. 그러나 부처로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부처로 태어났다고 해서 저절로 부처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6년 동안 목숨을 건 각고의 노력을 하다 실패한 뒤에 위빠사나 수행을 찾아내서 부처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모두 이 길로 오라고 45년 동안 설법을 하셨습니다. 이때 수행을 하는 방법이 바로 사띠빠타나(satipaṭṭhāna)입니다.
사띠빠타나(satipaṭṭhāna)는 알아차림을 확립한다는 뜻으로 수행을 하는 방법을 설한 경전입니다. 이때의 수행방법이 사마타와 위빠사나입니다. 사띠빠타나(satipaṭṭhāna)는 사띠(sati)와 빠타나(paṭṭhāna)의 합성어입니다. 사띠(sati)는 기억, 알아차림을 뜻합니다. 빠타나(paṭṭhāna)는 현존하는, 인식하고 있는, 확립하는 등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띠빠타나(satipaṭṭhāna)는 알아차림의 확립이라는 뜻 외에 알아차림이 튼튼하게 머무는 것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이것을 한문으로는 염처(念處)라고 합니다. 알아차림을 확립하려면 구체적으로 네 가지 대상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몸, 느낌, 마음, 법입니다. 이것을 한문으로 사념처(四念處)라고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알아차림의 확립만이 깨달음으로 가는 유일한 길이라서 하셨습니다.
이 세상은 오욕락(五慾樂)을 즐깁니다. 다섯 가지 감각적 욕망은 재산욕, 성욕, 음식욕, 명예욕, 수면욕입니다. 이상 다섯 가지를 오진(五塵)이라고 하는데 다섯 가지 번뇌의 티끌입니다.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면 다섯 가지 번뇌가 일어나지 않아 마음이 청정해집니다. 이러한 청정해진 마음에서 통찰지혜가 나 해탈의 자유를 얻습니다.
묘원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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