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葆光의 수요 시 산책 56)
바다는 잠깐 동안 비애가 아니다
바다에 갔다 왔으니
이제 모든 일이 잘 될 거야.
시가 잘 쓰여질 거야.
사랑도 잘 풀릴 거야.
푸른 녹색의 힘으로 끓어넘치며 파도는
나의 좌절과 우울과 소외, 그리고 헛된 전망을 씻어 빛냈느니
이제 모든 것들의 깊은 속으로 난 계단을
헛디디지 않고 잘 내려갈 거야.
바다에 바다에 하다가
바다에 갔다 오니
며칠 동안은 뭇 망상들도 퍼덕이는 소릴 내고
티브이에 나오는 바다도 비애의 빛깔이 아니다.
- 이하석(1948- ), 『우리 낯선 사람들』, 문학동네,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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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이런 “바다” 있을 겁니다. 만사 귀찮고 짜증이 나 미적거리다가 별 것 아닌 것들을 다 짐으로 만들어 세상 일들을 모두 “비애”로 쌓을 때, 쉽게 풀리리라 생각했던 문제들이 의외로 시간만 계속 늘리면서 박박 사람 속을 긁을 때, “비애”도 문제도 다 풀어주는 해결사, 이런 해결사가 누구에게나 있을 겁니다. 이 시의 화자에게는 이 해결사가 “바다”였던 모양인데, 서울살이하던 20-30대 때의 제게는 이 해결사가 산이었습니다. 그때 저는 몇 주에 한 번 무박 2일 정도의 산행을 즐겼었는데, 산에서 돌아오면 늘 날아갈 듯 몸도 마음도 가뿐해졌지요. 다만 이 가뿐함의 효력이 2주 정도 지나면 끝나는 “잠깐 동안”이기는 했지만, “바다에 갔다 왔으니/이제 모든 일이 잘 될 거야.//시가 잘 쓰여질 거야./사랑도 잘 풀릴 거야.” 하던 그대로 그 “잠깐 동안” 미뤘던 일들을 다 끝내고 안 풀렸던 문제들을 다 풀었으니 그 “잠깐 동안”은 제게 “잠깐 동안”을 넘어서 계속해서 삶을 꿋꿋하게 버텨나가는 한 힘이었습니다. 하니 그 “잠깐”이 결코 “잠깐”은 아니었던 셈이지요. 이런 “바다” 당신도 갖고 있으시지요. 갖고 있지 않다면 지금이라도 만들어 두세요. 효과 있습니다. 죽여 줍니다. 혹 갖고 있으시다면 “바다에 바다에”만 노래하지 마시고 “바다에 갔다 오”세요. 역시나 이미 알고 있으시겠지만 효과 있습니다. 죽여 줍니다. 다만 주객전도가 바뀌는 일만은 생기지 않도록 조심하면서요. 이 주의 수요시 「바다는 잠깐 동안 비애가 아니다」가 실린 시집 『우리 낯선 사람들』은 1989년에 출판사 ‘세계사’에서 나온 시인의 세 번째 시집으로 절판되었으나 2023년에 ‘문학동네’에서 복간했습니다. (20240724)
첫댓글 이하석 시인의 시도 잘 다가옵니다. 오늘도 보광님의 <수요 시 산책>과 함께 인문의 바다를 소요유했습니다.
포항에 사는 기쁨 중의 하나가 가끔 영일대 해수욕장을 끼고 스카이워크까지 드라이브를 하고, 빵과 차를 앞에 놓고 바다를 영일만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포항을 떠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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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에 갔다 왔으니
이제 모든 일이 잘 될 거야.
시가 잘 쓰여질 거야.
사랑도 잘 풀릴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