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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회]
혁련후의 죽음은 조용하던 무림에 거대한 파문을 일으켰다.
혁련후가 어떤 사람이던가? 비록 일선에서 은퇴한 지는 오래됐지만 그가 마도에서 가지는 영향력이란 거의 절대적이라 할 만했다.
그런데 그런 혁련후가 다른 곳도 아닌 무림맹 내부에서 죽었다.
즉각 마도의 문파들이 성명을 발표하고 물 끓듯 일어났다. 그들은 무림맹에 혁련후의 죽음에 대한 해명을 요구했다.
그리고 만일 그들의 요구가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무림맹과의 일전도 불사하겠다고 발표했다.
바야흐로 조용하던 무림에 한바탕 바람이 불기 시작한 것이다.
무림맹에서는 아직까지 공식적인 입장을 표명하지 않았다.
사실 백무(白霧)에 관한 일은 백무광과 제갈문밖에 모르기에 무림맹의 다른 사람들 역시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자체적인 내부조사 후에 마도에 해명을 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혁련후가 죽었음에도 신병쟁탈전은 계속 진행하기로 했다.
다만 이틀 동안 진행될 예정이었던 일정을 조정해 하루 미뤄 다음 날 하루 만에 모두 끝내는 것으로 결정했다.
혁련혜와 혁련후의 시신은 신황의 숙소에서 보호했다. 무림맹에서 자신들이 보호하겠다고 했으나 혁련혜는 그들의 호의를 단호히 거절했다.
그녀 역시 자신의 아버지의 죽음 이면에 무림맹이 관여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백용후는 사태가 매우 재밌게 돌아간다고 느꼈다. 자신이 관여하지 않았는데도 앞아서 혼란스런 정국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덕분에 자연스럽게 자신에게 몰려들던 주위의 관심어린 시선들도 많이 희석이 됐다.
"으음!"
갑자기 백용후가 나직한 신음을 흘려냈다.
"왜 그러십니까?"
백용후의 등 뒤에 있던 서종도가 걱정스런 얼굴로 물었다. 백용후같은 고수가 신음을 흘릴 일이란 흔치 않기 때문이다.
"아닙니다. 잠시 현기증이 나서......"
"현기증 말입니까?"
"아... 요즘 너무 신경 쓸 일이 많아서 그런 것 같습니다. 괜찮습니다."
백용후는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그러나 실상 그는 어젯밤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계속해 머릿속에서 울리는 환청 때문이었다.
무언가 심령을 자극하면서 울리는 듯한 환청, 그것은 밤새도록 백용후의 살심을 자극했다.
그러나 그것은 마치 한밤의 꿈처럼 아침에 일어났을 때는 거의 기억에 남아있지 않았다.
단지 불쾌한 느낌으로 남아있을 뿐이다.
서종도는 손을 흔드는 백용후를 묘한 눈으로 바라봤다.
그러나 백용후는 등 뒤에서 자신을 그런 눈길로 바라보는 서종도의 시선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백용후는 잠시 자신의 머리를 흔들고는 입을 열었다.
"무림맹의 움직임은 어떻습니까? 그들 역시 많이 당황스러워 할 텐데."
"제갈문의 지휘아래 별다른 동요는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물론 그 뒤에는 무림맹주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지금의 상황도 그가 의도한 것일지 모릅니다."
"그래서 흑우(黑雨)에게 암살은 그만두고 정보를 얻는 것에 집중하게 했습니다. 어차피 혼란은 무림맹이 스스로 자초했기 때문에 더 이상 필요 없을 것 같습니다."
"잘 하셨습니다."
서종도의 말에 백용후가 고개를 끄덕이며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후후! 원하던, 원하지 않던, 무림의 혼란은 시작되었군요. 정말 잘 되었습니다."
서종도는 아무러 대답을 하지 않았다. 백용후가 혼자 중얼거리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혼란이 시작되면 더 이상 음모가 필요치 않다.
적아(敵我)를 구별할 수 없는 상황에서 믿을 수 있는 것은 오직 본신의 힘뿐, 백용후는 철저하게 자신의 힘을 숭배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에게 작금의 상황은 오히려 반가울 뿐이었다.
그 마음을 알기에 서종도는 그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신황의 거처, 그곳에는 무당의 도사들과 팽가의 무인들로 외부와 찰저한 차단이 이뤄졌다.
혁련후가 죽었다는 소식에 제일 먼저 달려온 사람이 바로 적엽진인이었다. 그는 절친했던 친우의 죽음에 무너지는 가슴을 겨우 달랬다.
수십 년 동안 행해온 수련으로 인해 평정심을 유지하던 그의 가슴도 이 순간만큼은 찢어질 듯이 아파왔다.
하지만 그는 초인적인 인내력으로 자신의 감정을 추슬렀다. 어쩌면 친우의 죽음은 스스로 선택한 것이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울다 지쳐 방 안에 들어가 쉬고 있는 혁련혜를 제외하고 신황과, 신원, 무이와 홍염화, 그리고 마지막으로 적엽진인이 혁련후의 시신 앞에 앉아 있었다.
혁련후의 시신은 깨끗하게 염을 한 후 관에 곱게 모셔져 있었다. 그리고 그의 관 앞에는 향이 하얀 연기를 피워 올리고 있었다.
"참으로 멍청한 친구네. 그딴 자존심 때문에 죽음을 택하다니...무량수불."
적엽진인은 혁련후의 시신이 담긴 관을 바라보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수많은 적을 눈앞에 두고도 절대자라는 자부심에 물러서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 강한 자존심에 뒤로 물러선다는 것은 치욕적인 일이었으니까.
말은 그리 하지만 만약 적엽진인이 혁련후와 같은 상황이었더라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 역시 뿌리는 무인이었으니까.
적엽진인은 신황과 신원 형제를 보며 감사의 인사를 했다.
"고맙네! 자네들 둘 덕분에 저 친구의 복수를 할 수 있었고, 또한 시체라도 건질 수 있었네."
"원이 덕분입니다."
적엽진인의 말에 신황이 담담히 말했다.
그에 신원 역시 간단히 말했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너무나 짤막하게 대답하는 형제를 홍염화와 무이가 신기한 눈으로 지켜보았다.
그 중에서도 무이의 눈은 호기심으로 무척이나 반짝이고 있었다. 무이는 이 덩치 커다란 숙부가 무척이나 궁금한 것이다.
적엽진인이 그런 무이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이 무이가 원하는 질문을 했다.
"그런데 자네 형제는 전혀 닮지 않았군. 그리고 동생은 무슨 일로 이곳에 온 건가? 어지간한 일이 아니면 절대 움직일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데 말이야."
순간 신원이 신황을 쳐다봤다.
믿어도 되느냐는 눈빛이었다. 신황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러자 신원이 입을 열기 시작했다.
"저의 이름은 신원, 아시다시피 황이 형의 동생입니다. 제가 중원으로 온 것은 한 가지 확인할 일이 있어서입니다."
"음......"
"그것을 설명하자면 우리 가문의 일부터 설명을 해야 하는 데......"
순간 홍염화와 무이의 눈이 순간 별빛처럼 반짝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은 적엽진인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제까지 신황의 가문에 대해서 알려진 것은 하나도 없다. 단지 그가 조선에서 넘어왔고, 그의 본가가 장백산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밖에.
다시 신원의 눈이 신황을 향했다. 이들의 반응을 봐서 아직까지 신황이 이야기를 하지 않은 게 확실했다. 때문에 그에 앞서 신황의 허락을 구해야했다.
신황이 고개를 끄덕여 허락을 하자 신원은 담담히 자신들의 가문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우리의 조상, 그러니까 우리의 칠대조로 이야기는 거슬러 올라 갑니다."
신원의 나직하면서 굵은 목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백팔십 년 전, 한참 시대가 어수선했을 무렵이었다. 그 당시 고려 땅은 무척이나 혼란스러웠다.
원의 지배에서 벗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사회의 혼란은 극에 달해 있었고, 또한 곳곳에서 약탈과 방화가 자행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때문에 민초들이 살아가기에 무척이나 혹독한 시대였다.
신황의 조상인 신우도 그런 시대에 살았다.
그는 평범한 집안의 가장이었다.
근동에서 벌어지는 씨름대회란 씨름대회는 모조리 휩쓸 만큼 그는 엄청난 힘과 덩치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평소에는 나무꾼으로 일하며 돈을 모았고, 또한 소가 걸린 씨름대회가 벌어지면 참석해 소를 상품으로 탔다.
그렇게 한 푼 두 푼 모은 돈으로 다섯이 넘는 동생들을 모두 혼인시키고, 이제 셋만 남은 상태였다.
그러나 모아놓은 돈이 적잖으니 그들을 혼인시키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신우는 늙은 부모를 대신해 고된 일을 하였지만 그는 결코 자신의 처지를 탓하지 않았다. 오히려 집안의 가장으로서 막중한 책임을 느끼고 무한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집 안에 들어갈 때마다 그를 왕처럼 떠받들어주는 어린 아내가 있어 일상이 행복했다.
운명의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산더미만큼이나 높게 지게에 가득 나무를 싣고 도성으로 나갔다. 그리고 도성에서 제일 큰 부자인 최 부잣집에 넘겨주고 돈을 받아 돼지고기를 몇 근 샀다.
동생들과 늙으신 부모가 좋아할 모습을 생각하며 말이다.
그러나 운명의 그날, 그는 처절한 절망을 하게 된다.
그의 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의 집 안은 온통 시뻘건 선혈과 그의 혈육의 시신으로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열이 넘는 그의 가족들 가운데 살아남은 자는 한 명도 없었다.
또한 그의 마을 사람들 역시 모두 떼로 몰살을 당했다.
그의 일가 피붙이들이 모두 죽은 상황. 신우는 분노했다.
그는 곧 헛간에 걸려 있던 도끼를 들고 흉수들을 추적했다. 그는 겨우 자신의 일가를 몰살시킨 흉수들을 찾아 도끼를 휘둘렀다.
천생의 신력을 타고난 신우, 하지만 흉수들은 그보다 훨씬 강했다. 비록 신우보다 형편없이 작고 비쩍 말랐지만 그들은 신우보다 훨씬 빠르고 강력했다.
결국 신우는 몇 번 도끼를 휘두르기도 전에 그들에게 당해서 길옆의 낭떠러지로 떨어지게 됐다.
낭떠러지로 떨어진 그는 마침 근처에 있던 은자(隱子)들에 의해서 구함을 받게 된다.
신우는 피눈물로 부탁했다. 자신에게 복수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하지만 은자들은 그의 요청을 단호히 거부했다. 그들은 같은 은자들의 일에는 절대 관여할 수 없다고 했다.
또한 신우의 일가를 몰살시킨 상대가 너무나 강력하니 포기하고 새 인생을 살라 했다.
그러나 신우는 그럴 수 없었다. 자신의 부모가, 자신의 아내가, 자신의 동생들이, 자신의 친척들이나 다름없는 마을 사람들이 모두 처참하게 죽었는데 어떻게 참고 산단 말인가?
어떤 은자들도 그에게 도움을 주지 않았다.
어떤 이들도 그에게 도움을 주지 않았다.
그날 이후 전쟁터에는 괴물이 등장했다.
그는 자신의 목숨을 도외시 했다. 그는 항상 전장의 제일 선두에 섰고, 결코 몸을 사리지 않았다.
그는 미친 듯이 광기를 표출하며 전장을 누볐다. 그의 눈에는 항상 귀화(鬼火)가 타올랐다.세상을 모두 태워버릴 듯한 귀화가.
"내가 안 된다면 내 자식이라도, 그게 안 된다면 내 손자라도 반드시 복수를 할 것이다. 몇 년이 걸리든, 몇 대가 걸리든 난 반드시 복수할 것이다.
그 대가로 지옥에 떨어져서 영원히 벗어나지 못하고, 영겁을 구천에서 내 영혼이 살을 태우는 고통을 받는다 해도, 난 반드시 복수를 할 것이다.
만약 선인(仙人)이 나를 막는다면 선인을 죽이고, 은자가 나를 막는다면 은자들을 모조리 죽일 것이다."
그는 그렇게 복수를 위해 스스로의 영혼을 악업(惡業)에 불태웠다.
명왕권(冥王拳)의 처절한 역사는 그렇게 시작됐다.
그날 이후로 전쟁터에는 대를 이어 괴물들이 나타났다.
병사들은 그들을 명왕(冥王)이라 불렀다.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는 전설처럼 전쟁터에 전해져 내려왔다.
세상의 운명이 걸린 싸움에는 반드시 명왕이 나타난다고.
신원의 이야기가 일단락되자 적엽진인은 자신도 모르게 참아왔던 숨을 터뜨렸다.
너무나 처절한 이야기였고, 너무나 살기가 짙은 이야기였다.
복수를 위해 대를 이어 전쟁터에 몸을 던지다니, 범인들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니 그 누가 복수를 위해 대를 이어올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그의 눈앞에 그런 가문의 후손들이 있었다.
그제야 그는 신황의 살기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의 처절한 살기, 제아무리 천살성(天殺星)을 타고 태어났다 하더라도 이해하기 힘들었는데, 그의 가문 자체가 피를 부르는 핏줄이었던 것이다.
무이와 홍염화 역시 담담하게 이야기 하는 신원을 보며 자신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감히 그녀들이 이제까지 상상해본 적이 없는 세계였다. 그렇게 처절한 살기로 점철된 가문이 있다는 것은 정말 믿기 힘든 일인 것이다.
적엽진인이 어렵게 말문을 열었다.
"도대체 자네의 가문을 멸문시켰던 흉수는 누구인가? 그리고 복수는 했는가?"
그의 말에 신원이 대답했다.
"그들은 귀원사(鬼元寺)라는 절의 승려들이었습니다."
"절의 승려들이 그런 짓을 한단 말인가?"
"그들은 삼십 년에 한 번씩 다음 세대를 떠받들 기재를 구하기 위해 세상에 나서는데 마침 그때가 그런 시기였습니다.
때문에 칠대조의 마을에도 기재를 구하기 위해 들렀던 것입니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이 순순히 아이를 내줄 리 만무했고, 몇몇 사람들이 그들을 꾸짖었던 모양입니다."
그 당시 마을의 훈장이 아이를 넘기라는 중들의 말에 분노해 그들을 격렬하게 성토했고, 결국 그들이 노하고 말았다.
한 번 일어나기 시작한 살심은 걷잡을 수 없어, 결국 그들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마을 사람들 중에 하나도 살아남은 사람이 없었다.
"허어~, 그래도 수도한다는 사람들이....."
"그들은 일반 중이 아니었습니다. 일반 중이 그럴 리가 없지요.
그들은 후천세상(後天世上)을 기다린다고 하였습니다. 세상이 멸망한 후 펼쳐질 또 하나의 세상, 그들은 곧 후천세상이 온다고 믿었습니다.
그런 맹목적인 믿음아래 무슨 일이든 서슴없이 저질렀던 것입니다. 그런 극단적인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 곳이 바로 귀원사였습니다."
"사도(邪道)를 걷는 문파였군."
"하지만 그들이 가진 힘은 정말 놀라울 정도였습니다. 일반 은자들이나 선인들도 감히 그들에게 제재를 가하지 못할 정도였으니까요."
귀원사의 힘은 너무나 강력해 은자들이나 선인들도 그들의 존재를 알면서도 묵과했다.
가끔 세상에 피해를 입히지만 그렇다고 큰 혼란을 일으킨 것도 아니었기에 응징할 명분도 약했고, 무엇보다 은자들은 서로의 일에 참견을 하지 않는 묵계(默契)가 있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귀원사는 이제까지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고 급속히 세를 불려왔다. 또한 곧 닥쳐올 후천세상을 준비하기 위해 엄청난 무력(武力)을 키웠다.
그들의 힘은 실로 놀라워 이미 조선 땅에서 그들을 감당할 문파나 사람은 없었다.
"우리 가문이 복수를 할 힘을 얻기까지 육대가 걸렸습니다. 백팔십 년의 시간이 걸린 것이지요."
"그럼 복수를 했단 말인가?"
"저의 아버지께서 삼십 년 전에 귀원사를 멸망시켰습니다."
신황과 신원의 아버지 신권영은 천재였다.
명왕권의 창시자인 신우는 전쟁터에서 오직 하나, 지르기만을 익혔다. 너무 늦은 나이에 전쟁터에 뛰어든 그였다.
때문에 그는 단지 한 가지 기술만을 극대화시키기로 결심을 했다. 그래서 오직 지르기만을 익혔다. 온몸에 상처를 입고 만신창이가 되어도 그는 오직 지르기만을 갈고 닦았다.
내공이란 개념은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는 미친 듯이 주먹지르기 하나에만 매달렸을 뿐이다.
이대 전승자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 역시 지르기 하나에만 평생을 매달렸다. 그렇게 수십 년을 이대가 매달리다 보니 완벽한 자세가 만들어졌다.
완벽한 호흡과 완벽한 자세,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내공이 길러졌다. 이 현상에 이대 전승자는 고무되었다. 보다 강한 힘을 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대 전승자는 자신의 몸에 일어난 현상을 가지고 다시 오랜 시간동안 참오를 하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몸에 일어난 현상을 이해하고 이치를 깨닫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그의 평생 연구는 삼대 전승자에게 넘겨졌다.
삼대 전승자는 내공의 발현이란 화두를 가지고 평생을 보냈다.
그는 완벽한 자세와 일치하는 완벽한 호흡이 내공이란 힘을 쌓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과 자신의 아버지에게 일어난 현상을 체계적으로 몸에 익힐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역시 전쟁터에 참여한 몸, 한가롭게 앉아서 익힐 수 있는 무예를 만들 수 없었다. 그래서 격렬한 전투 중에도 익힐 수 있는 검법을 연구해야 했다.
그래서 만들어진 게 명왕심결이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 불완전한 미완의 심법이었다.
명왕심결을 더욱 가록 닦은 사라밍 바로 사대 전승자였다. 그는 일대와 이대 전승자가 평생을 붙들었던 지르기를 명왕심결에 접목시켰다.
그것이 바로 일전격(一電擊)의 탄생이었다. 그러나 아직은 여러모로 불완전했다.
명왕심결이나 일전격, 두 가지 모두 말이다. 때문에 그는 평생을 전쟁터에서 보내며 자신이 만들어낸 기술을 연구하고 보완했다.
오대 전승자에게서 만들어진 기술은 혈천주(血天柱)였다. 전쟁터에서 확실하게 적을 말살할 수 있는 기술을 연구하다 만들어진 것이다.
그렇게 명왕권은 만들어지고 보완되었다. 선대가 남긴 기술은 후대에 확실이 전승되고, 후대는 선대가 남긴 기술을 끊임없이 새로운 기술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육대 전승자인 신권영은 참공파(斬空破)와 금강두(金剛頭), 천패각(天覇脚)이란 기술을 만들어내고 명왕심결과 다른 기술들을 더욱 갈고 닦았다.
그리고 그것을 자신의 몸으로 체득했다. 신권영의 대에 이르러서 명왕권은 호가실한 형태를 갖춘 것이다.
그러나 그 절기들은 너무나도 신권영의 체형에 맞춰졌기 때문에 신 씨 가문에서 유일하게 평범한 체구를 타고 태어난 신황에게 맞지 않아, 그가 홀로 세상을 떠도는 빌미를 주기도 했다.
"본래 가문의 명왕심법은 전쟁터에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육대에 걸쳐 끊임없이 보완되고 다듬어진 것입니다. 하지만 아직도 모자란 점이 많다고 아버지는 이야기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의 보완을 형님을 통해 하시고 싶어 하십니다. 어쩌면 우리 가문의 무공을 완성시킬 수 있는 것은 형님뿐일지도 모릅니다.
때문에 형님의 무공이 아버지에게 인정을 받는다면 명왕(冥王)의 이름을 부여받을 겁니다. 공교롭게도 형님의 별호도 명왕이니 우리 가문의 운명이 그런가 봅니다."
신황이 명왕의 칭호를 얻을지는 신황 그 자신도 몰랐다. 하지만 운명처럼 강호인들은 그를 명왕이라 불렀다.
가문의 무공인 명왕권(冥王拳). 그리고 명왕인 신황. 만약 그의 무공이 완성될 때 진정한 명왕권이 탄생할 것이다.
"아! 이야기가 잠시 곁길로 빠졌군요. 여하튼 아버지는 홀로 귀원사가 있는 대각산(大覺山)을 찾아 처절할 혈투 끝에 그들을 모조리 제압했습니다."
제압했다는 말은 말이 되지 않는다. 제압했다면 그들을 살려뒀어야 하는데 신권영은 전혀 그렇게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가문을 형극(刑極)의 길을 걷게 만든 귀운사의 생명체 따위는 전혀 살려둘 생각이 없었다.
또한 그가 귀원사에 갔을 때 마침 천인공노할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에 신권영은 이성을 잃고 처절한 혈투 끝에 귀원사의 모든 생명체를 말살시켰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기에?"
신원의 말에 적엽진인이 자신도 모르게 반문했다.
"후후~ 어린 처녀들을 제물로 해서 무언가 만들고 있었다 하더군요. 그 일에 동원된 처녀들만 수백이 넘었다 들었습니다.
그녀들의 순음지기를 갈취하면서까지 무언가를 만들려고 했는데 마침 그 순간에 저희 아버지가 들이닥친 것입니다."
"음......!"
적엽진인은 자신도 모르게 침은성을 흘리고 말았다.
육대, 아니 신황까지 합하면 칠대에 걸쳐 전장에서 무공을 만든 가문, 과연 세상에 그런 가문이 존재할 수 있을까?
그는 새삼 신원과 신황이 두렵게 느껴졌다. 저들은 과연 어떤 감성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일까?
복수를 위해 칠대가 한 가지 일에 자신의 모든 생애를 바칠 수 있다면 그보다 무서운 게 무엇이 있을까?
만일 이들이 나쁜 마음을 먹는다면 과연 누가 이들을 막는단 말인가! 그는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그런 적엽진인의 생각을 알았는지 신원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진인께서는 너무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우리가 단지 복수를 위해 살아가는 살귀(殺鬼)였다면 백팔십 년이란 시간을 그렇게 한마음으로 보내지 못했을 겁니다.
하지만 우리에겐 복수보다 더 큰 의무가 있습니다. 아주 거대한......"
적엽진인의 얼굴에 곤혹스런 빛이 떠올랐다.
강대한 힘을 갖춘 두남자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지는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그 의무란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적엽진인은 신황 형제의 얼굴을 보며 물었다.
신원이 신황을 바라봤다. 잠시 생각을 하던 신황이 입을 열었다.
"진인께서는 천기(天氣)를 볼 줄 안다고 들었습니다. 맞습니까?"
"이 나이 먹도록 수행을 하다 보니 근자에 어느 정도 천기를 헤아릴 수 있게 되었네. 그런데 그것은 왜 묻는가?"
"진인께서는 얼마 후의 천기를 헤아릴 수 있는지 말해주실 수 있습니까? 진인을 무시해서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닙니다."
신황의 말에 적엽진인의 얼굴에 떠오른 궁금증이 더욱 증폭됐다. 항상 어떤 일에도 망설임이 없는 신황이 저런 말을 한다는 것 자체가 믿어지지 않기도 했다.
"괜찮네! 이 늙은이야 평생을 검에먄 신경쓰다보니 사실 천기를 헤아릴 수 있는 능력은 그리 큰 게 아니네. 기껏해야 며칠 앞, 몇 달 앞의 커다란 일을 읽을 수 있을 뿐 그 이상은 힘이 드네."
"그렇군요. 그렇다면 진인께서는 수백 년 앞을 내다보는 사람이 있다면 믿으시겠습니까?"
"수백 년을 말인가?"
신황의 말에 적엽진인의 얼굴에 경악의 빛이 떠올랐다. 신황의 말에서 그런 사람이 있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설마 조선에 그런 사람이 있다는 말인가?"
"있습니다, 분명히!"
"조선에 말인가?"
"그렇습니다."
믿어지지 않는다는 적엽진인의 반문에 신황은 단호히 대답했다.
중원 땅에서도 천기를 읽을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리고 그들 대부분은 적엽진인 자신과 비슷한 수준이다.
천기란 것이 따로 공부를 한다고 읽혀지는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 수행을 하다보면 절로 갖추게 되는 능력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수백 년 후의 미래를 읽을 수 있는 선인이 조선 땅에 존재한다는 말이 쉽게 믿기지 않는 것이다. 중원에도 그런 사람은 없기에.
적엽진인의 반응이야 어떻든 상관없이 신황은 계속해 말을 이었다.
"조선 땅에 있는 은자들 중에는 기문둔갑이나 주술을 활용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천기를 공부합니다.
그리고 그들 중에서 간혹 선인(仙人)의 반열에 오른 사람들이 나타나곤 합니다. 그들은 수백 년 후의 미래를 읽는다고 합니다."
실제로 조선 땅에는 예로부터 내려오는 예언서(豫言書)라든지 천기를 볼 줄 아는 선인들이 심심치 않게 나타났다.
단지 일반인들이나 권력자들 앞에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을 뿐이다. 그것이 은류(隱流)로 흐르는 조선 무맥(武脈)의 특징이었다.
"그들은 이 땅의 처참한 미래를 보았다 했습니다.
인간은 더 이상 인간으로서의 지위를 누리지 못하고, 인간이 아닌 존재와 인간의 존엄성을 포기한 존재들과 생존을 위한 싸움을 해야 한다 했습니다."
"으음......"
"인류 생존의 문제가 걸린 거대한 싸움, 그 싸움이 몇 백 년 후의 미래에 벌어진다고 합니다. 솔직히 저도 믿기지 않는 말입니다.
하지만 제 할아버지와 제 아버지가 직접 선인들을 만나서 들은 이야기라고 합니다."
"정말 믿기 힘든 말이로군. 수백 년 후의 미래에 그런 일이 벌어진다니 말이네."
적엽진인의 얼굴에는 불신의 빛이 떠올라 있었다.
수백 년 후의 미래를 볼 수 있는 사람들이라니. 중원에는 없는 인물이 조선 땅에 존재하는 것도 믿기지 않는데, 하물며 수백 년 후의 미래를 그리 확신할 수 있다니.
그것은 홍염화와 무이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들에게는 신황의 말이 마치 오랜 이야기책에서나 나옴직한 이야기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들이 아는 신황은 결코 허언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자신이 한말은 반드시 지키는 사람, 그런 사람이 헛소리를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신원이 신황의 말을 이었다.
"후후... 사실 그것은 저희와는 그리 상관은 없는 일입니다.
수백 년 후의 후손을 위해 준비를 하는 것도, 그리고 그에 목 메여 자신의 삶을 포기하는 것도... 때문에 저희 집안에선 그리 결정했습니다. 후대의 일은 후대에 맡긴다고."
"그럼 후대에 어떤 참화가 올지 알면서도 방조하겠다는 말인가?"
"후대의 일은 후대의 사람들이 해결해야 할 일입니다. 그에 대한 대비는 이미 천기를 읽은 선인들이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런 무책임한 말이 어디 있는가? 미래를 알았으면서도 그리 무정하게 어찌 말한단 말인가?"
적엽진인의 목소리가 커졌다.
사실 신황 형제의 말이 믿기지도 않았지만,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에 대한 대비를 하는 것이 옳다. 그것이 먼저 삶을 살다가는 사람의 사명이다.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강대한 힘을 가지고도 자신만을 위해 쓰는 것은 그야말로 이기적인 생각이었다. 때문에 신황 형제를 보는 그의 눈빛은 자연 험악해질 수밖에 없었다.
신황은 미소를 지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을 했다.
"후대의 일은 후대에 맡깁니다. 그때까지 선대가 할 수 있는 일은 가문의 무예를 더욱 갈고닦아 하나의 유실도 없이 후대에 온전히 물려주는 것, 그것이 명왕의 역사이자 사명입니다."
신황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다른 은자들처럼 호들갑을 떤다거나 말을 앞세우지 않았다.
명부의 권인 명왕권(冥王拳). 지상의 어떤 생명체라도, 어떠한 절대고수라도 죽일 수 있게 완벽하게 만드는 것, 오직 그것만이 지상과제다.
만일 후대에도 명왕권의 권사(拳士)가 남아 있다면 그의 앞길도 신황처럼 고되고 힘들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의 몫이다. 그가 헤쳐 나가야할 일이고 그가 해결해야할 문제다.
신황이 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권에 명왕의 이름을 받는 것, 그리고 명왕권을 뛰어넘는 것. 마지막으로 자신의 권을 후대에 완벽하게 물려주는 것이다.
귀원사(鬼元寺)라는 절대악(絶大惡)이 존재함으로써 또 다른 악(惡)인 명왕(冥王)을 찬생시켰다.
태생 자체가 정상적이지 못하고, 피에 의한 업보를 거듭했기에 정상적으로 조선 땅에 태어난 은자(隱者)들이나 선인(仙人)들과는 역할이 다르다.
은자들과 선인들이 활법(活法)으로 세상을 지키려 한다면 명왕은 살법(殺法)으로 세상을 정화시킨다. 그것이 명왕의 역할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사명이 있다면 귀원사의 완벽한 말살(抹殺),무림맹이 어떤 식으로든 귀원사와 연관이 있다는 것을 알았으니 이제는 더더욱 물러설 수 없습니다."
귀원사로 인해 명왕의 가문이 시작됐다. 만약 귀원사가 없었다면 명왕이란 괴물이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명왕은 자신을 탄생케 하는데 일조한 귀원사를 멸망시키고, 다시 귀원사는 이곳에서 형태를 바꿔 재기를 노리고 있다. 그야말로 지독한 악연(惡緣)의 순환이다.
"휴~, 자네의 가문도 정말 대단하구먼. 그렇게도 하나같이 집념이 강하니. 내 알겠네. 자네 가문의 일은 자네들이 알아서 하겠지.
그런데 이것 한 가지만 묻겠네. 백무귀가 도대체 무엇인가? 그게 도대체 무엇이기에 자네들이 그런 말을 하는 것인가?"
"백무귀는 귀원사의 밀법승을 일컫는 말입니다. 그들은 귀원사의 야망을 위해 키워진 살귀들로 전쟁터에서의 암살을 위해 키워진 존재들입니다.
이미 저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전쟁터에서 몇 번 마주친 적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귀원사의 비전으로 키워져 살심만을 증폭시켰습니다.
또한 그들이 암살을 위해 움직일 때 기척이나 흔적이 전혀 없어 일반사람들은 도저히 그들을 막을 수 없습니다.
때문에 명왕권에서도 그들의 기척을 감지하기 위한 기술을 따로 만들었을 정도입니다."
명왕권과 백무귀는 전쟁터에서 몇 번의 만남이 있었다. 홀로 전쟁터를 떠돈 역대 명왕에 비해 백무귀는 항상 단체로 움직였다.
그리고 아침안개처럼 그렇게 흔적도 없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신원이 말했다.
"제가 세상에 나온 것도 백무귀의 흔적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흔적을 쫓아오다 보니 이곳까지 오게 된 겁니다.
그리고 생각지도 못하게 형님을 보게 되었구요. 후후후~ 처음에는 어느 놈이 감히 명왕의 이름을 쓰는지 가만두지 않을 작정이었습니다. 하지만 명왕이 형이란 사실을 알고 정말 놀랐습니다."
"후후! 나도 내가 명왕으로 불리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 했다."
"운명이야... 형의 운명이 명왕이기 때문에 그렇게 불리게 된거야."
신원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리고 신황의 얼굴에도 비슷한 웃음이 떠올랐다.
'이들의 손에 중원의 운명이 달렸다는 것인가? 허허~! 중원인으로서 부끄럽구나. 무량수불!'
수백 년 후의 미래를 읽고 대비하는 자들도 조선 땅에 숨어 있는 은자들이다. 그에 비해 자신은 단순히 눈앞의 미래만 보고 조바심을 냈다.
더구나 저들 형제의 무력은 이미 중원에서 최정점에 올라 있다는 자신에 비해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 것 같았다.
젊은 나이에 이 정도이니 나이가 들어 자신의 나이가 된다면 더욱 앞서가게 될 것이다.
나이가 든 도인이 이런 생각을 하면 안 되는 일이지만, 그는 솔직히 저들을 배출한 조선 땅과 조선 땅에 있는 그들의 가문에 은은한 질투심이 생겼다.
'허허~ 늦었지만 천기를 더욱 공부해야겠구나. 그리고 후대를 위해 조그만 준비라도 해야겠구나. 무량수불!'
누구의 귀에도 들리지 않는 적엽진인의 탄식이 바람에 흩날렸다. 그때 신원의 말이 적엽진인의 상념을 깨웠다.
"어떻게 할 거야? 분명 백무광이 귀원사와 연관이 있는 것 같은데."
"조금 더 기다린다. 그의 의도가 드러나면 그때 움직인다."
"꼭 그렇게 기다려야 할 필요가 있을까? 형과 나, 둘이라면 어떤 위험이 있어도 감당할 수 있을 텐데."
"후후! 이번에도 놓치면 또 다시 후환을 남기게 된다. 하나도 남김없이 완벽하게 처리하려면 그 정도의 시간은 감수해야지."
신황의 입가에 히미한 미소가 어렸다. 그에 신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왕 할 거면 완벽하게 해야지."
피로 일어선 가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일어나게 원인 제공을 한 곳이 바로 귀원사다.
귀원사도 자신들을 그렇게 생각하겠지만 신황 형제 역시 귀원사의 파편 하나까지도 세상에 남겨둘 생각이 전혀 없었다.
두 형제의 모습을 보며 적엽진인은 온몸에 오한이 드는 것을 느꼈다.
조용히 말을 하지만 그 속에 담긴 의미는 결코 단순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속에 숨어있는 광폭한 살기도 말이다.
백무광과 제갈문은 같은 공간에 있었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제갈문이 백무광의 방에 들어와 있었다. 어제 있었던 혁련후의 죽음은 그들에게도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백무위 백오십 명과 삼태상이 죽었다. 그 정도의 전력이라면 어지간한 중소문파 한둘 정도는 소리 없이 멸문시킬 수 있는 전력이었다.
그런데도 혁련후 하나만 죽이고 자신들은 모조리 몰살당했다.
"신황에 의해서 나머지 인원이 몰살당했다. 그리고 그 곁에는 처음보는 덩치 큰 남자가 있었단 말인가?"
"그렇습니다. 그리고 덩치 큰 남자가 신황을 보고 형이라 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형제인 것 같습니다."
"형제라... 형제란 말이지."
덩치 큰 남자, 그도 덩치 큰 남자를 알고 있었다.
그가 있던 곳을 멸문 시킨 자도 그렇게 덩치가 큰 남자였다.
어두운 밤이라 다른 것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의 커다란 덩치와 밤에도 활활 타오르는 것같이 빛나던 그의 눈동자만큼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삼십 년 전의 그날, 그리고 그날의 참화를 그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날의 참화는 아직도 악몽으로 그의 밤을 지배하고 있었다.
"혹시, 그자의 후예가 아닐까?"
백무상의 머리에 퍼뜩 한 가지 가설이 떠올랐다. 신황의 명호에서 그는 예전의 그를 떠올렸다.
그러나 나이와 외모가 너무나 틀려서 믿음이 가지 않았다. 그런데 그의 동생이 그렇게 덩치가 크고, 또한 강력한 무공을 소유했다면......
"누구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라니요."
"아니네. 그냥 혼잣말이네."
"예!"
제갈문이 의문을 표했지만 백무광은 얼버무리고 말았다. 대신 그는 다른 말을 했다.
"그것보다 그들은 모두 준비를 했는가?"
"그렇습니다. 그들은 이미 준비가 돼 있습니다. 그들은 이번에도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내놓을 것입니다."
"그래야지. 당연히 그래야지."
이미 대법은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백무광도 짐작하기 힘들었다.
"마도의 반발은?"
"예상 외로 심각합니다. 혁련후의 죽음이 그들을 움직이게 만든 것 같습니다."
"그렇겠지. 아무리 상징적인 의미라 해도 마도의 구심점이었으니."
혁련후의 죽음은 그들조차 예상하지 못했던 사항이었다.
하필 그가 혈뢰옥에 침투하고 백무와 삼태상과 격돌하게 되다니. 삼태상의 임무는 혈뢰옥을 지키는 것이다. 그리고 백무 역시 마찬가지였다.
때문에 허락 없이 침입한 혁련후의 죽음은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가 하필이면 밖에 나와서 죽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신황 형제에 의해서 삼태상과 백무가 깡그리 몰살당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증거를 인멸할 어떤 시간적 여유도 갖지 못했다는 것, 그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어쩌면 마도와 전면전이 벌어질지도 모릅니다."
"후후! 마도와의 전쟁이라. 그것도 그렇게 나쁘지 않을 것 같군. 한 번에 정리할 수 있을 테니."
"하지만 아직은 힘이 많이 부족합니다. 그리고 저희는 아직 내부의 문제도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그 점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과격한 백무광의 발언에 제갈문이 식은땀을 흘렸다.
천하대회의를 진행하기 때문에 무림맹에는 수많은 무림인들이 들어와 있다. 그들을 선동한다면 마도와 전쟁을 치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대업에 막대한 차질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그때 백무광이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그냥 한번 해본 말이네. 자네는 농담에도 너무 민감하게 반응하는군.
나도 지금이 어떤 시기인지 잘 알고 있다네.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자네는 어떻게 그들을 달랠 것인지 방법을 찾아보게나."
"이미 방법은 강구해 두었습니다. 밀사를 보내 이미 협상을 시작했으니 조만간 좋은 소식이 있을 겁니다."
"잘했네!"
지금은 들끓고 일어낫지만 잠시만 시간이 지나면 곧 언제 그랬냐는 듯이 가라앉을 것이다. 그것이 마도의 생리니까.
무림맹에서 할 일은 그들에게 적절한 보상을 해주는 일뿐이다.
그러면 그들끼리 알아서 새로운 질서를 잡아갈 것이다.
잠시의 대화가 끝난 후 백무광이 입을 다물었다. 그는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겼다.
백무광의 침묵이 이어지자 제갈문은 이제 자신이 물러갈 때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의 주인인 백무광은 심복이라고 할 수 있는 그에게 조차 결코 모든 것을 보여주지 않았다.
"그럼 전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음!"
제갈문은 그의 주군에게 포권을 취한 후 조용히 밖으로 물러갔다.
스르륵!
제갈문이 나간 후 그림자 하나가 소리도 없이 일어섰다.
은색의 귀면탈을 쓴 남자, 그는 소리 없이 백무광의 앞에 부복했다.
"이제부터 네가 그를 조사해라. 어쩌면 그들이 내가 찾는 자일지도 모른다."
"......"
"필요하다면 백무 전체를 움직여도 좋다."
"......"
"철저하게... 아주 철저하게 그들의 정체를 파헤쳐라. 그의 혈족, 조상, 그리고 사소한 것 하나까지 모든 것을 파헤쳐라.
만약 격돌할 상황이 된다면 최대한 잔인하게 죽여라. 필요하다면 무상에게 도움을 요청해도 된다. 그가 백팔철기군(百八鐵騎軍)을 지원해줄 것이다."
"......"
"물러가라."
"존명!"
그제야 은색 귀면탈을 쓴 남자의 입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나타날 때와 마찬가지로 그림자처럼 사라졌다.
홀로 남은 백무광은 앞에 있던 찻잔을 입으로 가져가며 중얼거렸다.
"만약... 정말 그자의 후손이라면 이곳에 들어온 것을 뼈저리게 후회하게 될 것이다. 그가 곧 이제 부활할지니... 남은 것은 파괴와 혼돈뿐일 것이다."
콰직!
그의 손에 들려 있던 차산이 산산이 부서져 나갔다.
신황과 신원은 같이 밤 후원을 거닐었다. 그들의 곁에는 적엽진인도 홈염화와 무이도 보이지 않았다.
오직 두 형제만 바라보는 밤하늘. 십오 년 만에 같이 보는 밤하늘이었다.
신황이 입을 열었다.
"아버지는?"
"후후! 아마 백 세도 너끈히 넘게 사실걸."
"그렇구나!"
신황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아버지는 그 누구보다 강하고 패도적인 인물이었다. 또한 육대를 이어 내려오던 원한을 자신의 손으로 끝낸 인물이었다.
그리고 그 전까지 내려오던 무예를 하나로 묶어 명왕권이란 체계를 만들어내기까지 했다. 거기에다 그의 몸은 바위보다 단단하고 강철보다 굳세다.
신황과 신원의 아버지, 신권영의 가장 큰 장점은 정신이 누구보다 굳세다는 것이다. 육체의 단단함과 그에 못지않은 굳건한 정신, 그런 존재가 바로 신권영이었다.
그리고 그는 반드시 신황이 넘어야할 존재였다. 그런 신황의 감정을 느꼈는지 신원이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정말 형은 대단해. 그 미완성의 무공을 완성시키다니......"
신원도 알고 있었다. 신황이 배운 무공이 그의 할아버지가 미완으로 남겨둔 무공이란 것을. 그리고 그의 할아버지는 신황이 자신의 무공을 완성하는 것을 염원하며 눈을 감았다.
신황은 훌륭히 그런 할아버지의 염원을 이뤄냈다. 솔직히 신원은 그것을 불가능하다 여겼는데, 그의 고집불통 형은 보란 듯이 그것을 해냈다.
자신은 명왕권을 배우고 익히는 것만으로 그간의 세월을 보냈는데 신황은 거의 새로운 무공을 창안해낸 것이다.
그러나 신황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아직 그는 스스로 부족하다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더 노력해야한다. 아직 많이 부족하다."
"하여간... 하긴 형은 예전부터 그랬지. 뭐든지 성이 차지 않으면 결코 쉬지 않았지."
신원에 비해 신황이 더 집요했다. 그런 신황의 근성이 오늘날의 그를 만들었을 것이다. 그때 신황이 말을 돌렸다.
"그런데 단순히 백무귀와 귀원사 때문에 산에서 내려온 것이냐? 그 정도의 일이라면 나에게만 맡겨도 될 텐데......"
"그렇지! 그런데 심상치 않아."
"무슨 말이냐?"
신황의 의문에 신원이 그의 얼굴을 보며 대답했다.
"지금 조선에 있는 은자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아."
"그들이?"
"무엇 때문인지 모르지만... 그들이 상당히 분주히 움직이고 있어."
"음!"
신황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조선에 있는 은자들은 결코 세상으로 나오지 않는다. 그것은 조선이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권력자들이 그들을 원치 않기 때문이다.
조선의 권력자들은 자신들을 암살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은자들을 결코 용납하지 않았다. 그것은 무인을 배척하는 당대의 풍토와 맞아떨어져서 이루어진 일이기도 했다.
때문에 은자들은 어지간한 일이 아니고서는 자신을 결코 드러내지 않는다.
나라가 위급에 처할 때 몇몇 뜻있는 은자들은 세상에서 아이들을 거둬들여 자신의 절예를 전한다. 그러면서도 절대 사승(師承)은 알려주지 않는다.
때문에 세상에 나온 그들의 제자 중에는 스승의 연원을 알지 못하는 자들도 수두룩했다.
그렇게, 나라를 구하는 일에까지 철저하게 자신을 숨기던 그들이 움직이다니.
"언제부터냐?"
"조금 됐어. 처음엔 그냥 그러려니 했는데 아무래도 심상치 않은 것 같아서 말이야."
"누구, 누구야?"
"금강산 쪽과 계룡산 쪽이야."
"전부 우리에게 적대적인 곳이군."
금강산과 계룡산은 조선 땅에서도 지기(地氣)가 좋기로 으뜸인 곳들이다.
때문에 두 산에서는 예로부터 수많은 은자들과 선인들이 나타났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은연중에 파벌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중원처럼 특별히 무슨 파(派)라고 이름을 붙인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수도한 산에 대한 동질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 때문에 그들은 같은 곳에서 수도를 했다는 이유로 무척이나 단결이 잘됐다.
그리고 그들은 신황의 가문에 별로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들은 홀로 독보하는 신황의 가문과 그리고 자비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잔혹한 손속에 눈을 찌푸리고 천하게 봤다.
때문에 은연중 신황의 가문을 눈 아래로 보는 경향이 있었다.
"그들 중 몇 명이 은밀히 중원을 드나든 흔적이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어. 딴에는 은밀하게 움직인다고 하지만, 애당초 그런 일에 서툰 인간들이야.
때문에 결국 우리에게 종적이 드러난 거지. 그리고 그들을 따라오다 보니 백무귀의 흔적까지 발견하게 된 거야."
"백무광과 어떤 식으로든 연관이 있겠군."
"내 생각도 마찬가지야. 분명 그들과 백무광과 모종의 거래가 있을 거야."
"우리를 노린 것일 확률이 높군."
"어떻게 할 거야?"
"당연한 것을 묻는구나."
신황의 말에 신원의 입가에 떠오른 웃음이 더욱 진해졌다.
"먼저 걸어온 싸움이야."
"후후......!"
그들의 입가에 비슷한 종류의 웃음이 떠올랐다. 그들의 웃음은 무척 닮아 있었다.
스르륵!
그때 그들의 등 뒤로 누군가의 인기척이 들렸다.
두 사람은 곧 웃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그러자 수척한 모습으로 서있는 혁련혜가 보였다.
졸지에 아버지를 잃은 혁련혜는 몇 번이나 졸도를 했다. 그때마다 초관염이 보살펴주지 않았다면 이렇게나마 일어서 있지도 못했을 것이다.
"조금 더 쉬지 않고......"
"아니에요. 충분히 쉬었어요. 그보다는 할 말이 있어서 이렇게 나왔어요."
신황의 말에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그녀는 무척이나 굳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무엇이냐?"
"일단 고맙다는 인사를 드릴게요. 아버지의 복수를 해주셔서 고마워요."
"......"
"그리고 한 가지 부탁을 하고 싶어요. 만약 아버지를 죽인 자들 뒤에 누군가 더 남아있다면 그들을......"
혁련혜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나 신황은 충분히 그녀의 말뜻을 알아들었다. 그는 단호히 대답했다.
"그들은 반드시 후회를 하게 될 것이다. 약속해도 좋다."
"고마워요! 그 말이 듣고 싶었어요."
"앞으로 어떻게 할 작정이냐?"
"일단 아버지의 제자들이 이곳으로 들어올 거예요. 그리고 그분들과 아버지의 시신을 수습할 거예요. 그때 같이 돌아갈 거예요. 아버지와 살았던 집으로......"
신황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은 매우 복잡한 감정을 담고 있었다.
한때... 아니 지금도 마음을 주고 있는 사람, 하지만 상황은 그녀가 마음을 고백할 만한 여건이 되지 못했다.
그리고 그녀는 지금 그런 개인적인 감정에 신경을 쓸 여유조차 없었다. 때문에 조용히 자신의 감정을 숨겨야했다.
"모든 것이 잘될 것이다."
"그렇게 되길 빌어요. 나중에 다시 뵙길 빌게요."
"음!"
"그리고... 동생분도 고마워요. 도움을 주셔서."
혁련혜는 신원에게도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신원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혁련혜가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여 보인 후 쓸쓸히 후원을 벗어났다.
그녀의 쓸쓸한 모습을 보며 신원이 입을 열었다.
"안됐군. 아버지를 잃다니....."
"앞으로도 이곳에 그런 사람들이 많이 늘어날 것이다."
"음!"
더 이상 두 형제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다음 날, 무림맹의 아침이 밝았다.
무림맹의 분위기는 무척이나 뒤숭숭했다. 무림맹 내부에서 혁련후가 죽었다. 더구나 그와 함께 동귀어진한 수많은 시신.
그러나 그 누구도 그들의 정체를 알아보지 못했다. 워낙 얼굴이 알려지지 않은 탓도 있지만, 신황 형제가 너무나 처참하게 손을 써 시신이 많이 훼손되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무림맹에서는 신병쟁탈전을 감행하기로 했다. 어차피 치러지는 행사, 중간에서 그만둘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마도의 문파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이야기가 알려지면서 군웅들의 마음은 더욱 뒤숭숭해졌다.
만약 전면전으로 치닫게 된다면 마교와의 전쟁 이후 또다시 마도와 전쟁을 치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혁련후의 죽음, 그것은 매우 위험한 불씨를 무림맹에 남기고 만 것이다.
그러나 미뤄졌던 신병쟁탈전은 변함없이 열리게 됐다. 비록 불안한 시기지만 지금 미루면 또다시 언제 열릴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게 신병쟁탈전이 다시 재개되었다.
군웅들이 비무대 주위로 몰려들었다. 비록 마음은 뒤숭숭했지만 그래도 비무를 관전하는 순간만큼은 행복한 그들이었다.
하루 만에 준결승과 결승까지 치르기로 결정한 만큼 일정은 굉장히 빡빡했다.
맨 처음은 서문수와 하무위의 대결이었다.
서문수야 무당의 대제자로 이제까지 거침없이 파죽의 연승을 거둔 인물이었기에 사람들도 잘 알고 있었지만,
하무위는 혁련혜를 이기기까지 그 누구도 신경을 쓰지 않던 인물이었기에 그에 대한 궁금증은 더욱 증폭 되어 갔다.
하지만 그에 대해 알려진 것이라고는 오직 그가 눈부실 정도로 엄청난 쾌검(快劍)을 쓴다는 사실뿐이었다.
"흠! 하무위라......"
적엽진인이 침중한 얼굴을 하였다. 그 역시 하무위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별일이야 있겠습니까? 그래도 문수 정도면 어지간한 문파의 장로급 이상 되는 실력입니다. 더구나 무당의 절학인 양의검을 익힌 아이이니 기대해도 좋을 겁니다."
적엽진인의 옆에 앉아있던 백우진인이 사숙의 근심어린 걱정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러자 적엽진인이 백우진인을 한심하단듯이 쳐다봤다.
"쯧쯧! 네 눈엔 문수만 보이고 그 앞에 있는 하무위는 보이지 않는단 말이냐? 하무위는 결코 범상한 사람이 아니다.
내 눈으로도 그의 본질이 무엇인지 알아보기 힘들다. 그런데도 너는 그런 태평한 말을 하다니... 에잉!"
"그... 정도입니까?"
"어쩌면 문수가 큰 곤경에 처할지도 모른다.
하긴 한 번쯤 꺾이는 것도 그리 나쁘진 않을 게다. 이제까지 문수는 한 번도 패배를 당해보지 않아 은연중 자만심에 물들어 있으니....."
"무량수불."
가혹한 말일 수도 있지만 적엽진인은 단호했다.
패배를 모르는 인간은 자만심에 빠지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것은 무공의 퇴보를 의미했다.
차후 무당이란 거대한 공룡을 이끌어가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자신을 연마하고 채찍질해야 한다.
때문에 적엽진인은 이번 기회에 서문수가 패배를 당하길 바랐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서문수와 하무위가 비무대 위에 입장했다. 그들은 서로를 향해 포권을 취했다.
"무당의 서문수요."
"하무위요. 서형처럼 잘난 사문은 없으니 그다지 부담 가지실 필요는 없소이다."
꿈틀!
하무위의 도발적인 말에 서문수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어떻게 보면 그를 조롱하는 듯한 말투이기 때문이다.
서문수는 끓어오르는 노화를 억지로 가라앉히며 냉정히 말했다.
"난 최선을 다할 것이오. 그러니 하형도 최선을 다하길 빌겠소."
"흐흐~. 서형이 말하지 않더라도 난 분명히 그럴 것이오."
스릉!
끝까지 조롱하는 듯한 하무위의 말투에 서문수가 검을 꺼내들었다. 그러나 그런 서문수의 모습에도 하무위의 태도에는 그다지 변화가 없었다.
"검을 뽑는 게 좋을 것이오. 내 마음은 그렇지 않으나 내 검은 무정할지니....."
"흐흐! 난 쾌검을 쓴다오. 내가 일단 검을 뽑으면 서형은 미처 검을 휘두를 기회가 없을 테니."
"후회하지 마시오."
결국 참지 못하고 서문수가 먼저 움직였다.
쉬익ㅡ!
신형이 길게 늘어나는 착각이 들만큼 표표한 걸음걸이, 바로 무당의 절학인 유운신법(流雲身法)이었다.
서문수는 유운신법을 펼쳐 하무위를 압박해나갔다.
마치 구름이 흐르는 듯한 신법을 펼치며 양의검을 펼치는 서문수. 그의 검은 무척이나 사납고 기세가 날카로워 하무위도 일시지간 어찌할 방도를 찾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은 군웅들의 착각일 뿐이었다.
하무위가 몇 번 몸을 요동치자 그의 몸은 어느새 서문수의 전권을 벗어나 있었다.
'이런!'
서문수는 혀를 찼다. 미처 양의검이 펼쳐지기도 전에 일어난 일이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대단하단 생각도 들었다. 자신의 유은보법의 압박을 그리 쉽게 빠져나갈 수 있다는 것이 놀랍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문수는 당황하지 않고 다시 하무위를 향해 보법을 펼치며 양의검을 풀어냈다.
음과 양의 기운을 동시에 풀어내며 조화를 꾀하는 것이 양의검이다. 때문에 파괴력보다는 광명정대한 기운으로 상대를 압박하는 경향이 강했다.
알아서 상대가 스스로의 부족함을 느끼게 하는 검. 그것이 바로 양의검이었다. 굳이 살검(殺劍)과 활검(活劍)으로 분류를 한다면 양의검은 활검이라 부를 수있을 것이다.
"아우~. 저 양반 또 병 도졌군."
비무대 바로 밑에서 서문수를 응원하던 초풍영은 서문수의 검을 보며 탄식을 터뜨렸다.
도무지 실전에서는 어울리지 않는 저 풍모라니.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멋있고 탈속해 보일지 모르지만, 초풍영이 보기에는 그저 겉멋만 든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솔직히 이번 신병쟁탈전에 나오기 위해 서문수와 비무할 때 그는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 만약 그가 최선을 다했다면 결과는 달라졌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무당의 대제자인 사형의 체면을 살려주기 위해서 그는 최선을 다할 수 없었다.
"젠장!"
자신의 처지만 아니었다면 저기 비무대 위에 당장이라도 뛰어 올라가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수가 없는 자신의 처지가 원망스러웠다.
초풍영이 그렇게 고민을 하고 잇는 동안에도 비무는 계속 진행됐다. 조금 전과 별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다.
서문수는 유운신법을 펼치며 하무위를 압박하고 있었고, 하무위는 예의 그 괴이한 신법으로 서문수의 공격을 교묘히 피하고 있었다.
"백무귀가 확실하군."
"그것도 상당한 수준에 오른......"
신황과 신원은 두 사람의 대결을 보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분명 하무위의 움직임은 백무귀들의 그것이었다.
전쟁터란 난장판 속에서도 흔적도 없이 은밀히 움직이는 그들이었다. 때문에 일반 무인들이 그들의 움직임을 감지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백무귀를 이용해서 무슨 짓일까?"
"글쎄... 두고 보면 알겠지."
그들은 다시 비무대에 집중했다.
싸움은 절정을 향해 치달았다.
"흐흐! 이제 지친 것 같은데 끝을 내자구."
하무위가 비웃음을 흘렸다. 그동안 그는 검집에서 검을 뽑지도 않고 있었다. 단지 그 괴이한 보법으로 서문수의 공격을 흘려냈을 뿐이다.
때문에 이제까지 헛손질을 한 서문수의 얼굴에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그에 비해 하무위는 여전히 멀쩡한 모습이었다.
"놈!"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눈 한 번 깜빡이면, 그 순간 목숨이 날아갈지도 모를 테니까."
하무위가 말과 함께 발도자세를 했다.
이제까지 한 번도 뽑지 않았던 검이다. 그런데 막상 그가 발도자세를 잡으니 묘한 박력이 느껴졌다. 그에 서문수는 긴장을 하며 검을 들었다.
'상대는 쾌검수, 처음의 공격만 피하면 된다.'
쾌검을 쓰는 자들의 특징은 바로 첫 공격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건다는 데 있다. 첫 공격에 모든 것을 걸다보니 두 번째 공격에는 자연 파탄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서문수가 노리는 것은 바로 그 파탄이었다. 이제까지는 그 괴이한 신법에 당할 수밖에 없었지만 직접 부딪친다면 자신 있었다.
"오너라! 네놈에게 무당의 절학을 보여주마."
화르륵!
서문수의 검에 환한 빛이 타올랐다. 양의검을 극성으로 운용했을 때 일어나는 현상이었다. 그와 동시에 하무위의 몸이 더욱 움츠러들었다.
그러나 그에 반비례해 그의 위압감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꿀꺽!"
군웅들이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그만큼 비무대 위에서 느껴지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기 때문이었다.
"챠앗!"
번쩍!
순간 하무위의 입에서 힘찬 기합이 터져 나오며 그의 검이 눈부신 속도로 출수되었다. 그와 함께 서문수의 눈부신 회피동작이 이루어졌다.
스거억!
서문수의 앞가슴 섶이 그대로 베어져 나갔다. 그리고 점점이 튀는 핏방울.
그러나 움직임에 방해를 받을 만큼 큰 상처는 아니었다.
"내 차례다."
서문수는 대갈을 터뜨리며 검을 출수했다. 이미 하무위의 검이 지나간 상황, 상대의 정면은 온통 허점투성이였다. 자신의 예상대로였다.
서문수의 입에 득의의 웃음이 떠올랐다. 자신의 승리가 확정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문수는 보지 못했다. 하무위의 입가에 떠올라 있는 차가운 미소를.
푸욱!
예고도 없이 옆구리에서 느껴지는 불같은 통증, 서문수의 입이 자신도 모르게 떡 벌어졌다.
"어...어떻게?"
자신도 모르게 의문이 쏟아졌다. 분명 하무위의 검을 흘려보냈는데 어떻게 다시 그의 검이 자신의 옆구리에 박혔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다.
그때 하무위가 서문수에게 비웃음을 던졌다.
"흐흐흐! 쾌검이 꼭 첫 번째 공격이 진짜라는 법은 없지. 고지식한 도련님."
사람들은 쾌검수가 꼭 첫 번째 초식에 목숨을 건다는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다. 때문에 첫 번째 공격을 피한 후 안도를 하는 버릇이 있었다.
하무위의 공격은 그런 사람들의 고정관념을 철저히 깨버리는 공격방식이었다.
그는 첫 번째 공격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건 듯한 모습으로 서문수를 현혹시키고 이어 두 번째 초식으로 서문수의 옆구리에 바람구멍을 낸 것이다.
만약 서문수의 경험이 조금 더 풍부했더라면 충분히 하무우의 공격을 방어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당장 눈앞의 현상에만 정신이 팔려 그만 방심을 하고 마는 치명적인 실수를 범했다. 그것이 그의 패인이었다.
콰당!
서문수가 뒤로 넘어갔다.
하무위는 그런 서문수의 모습을 바라보다 백용후가 있는 곳을 슬쩍 바라봤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그를 가리키다 곧 자신의 목을 스윽 그었다.
그러나 노골적으로 도발하는 그의 모습에도 백용후는 별다른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이 녀석!"
급히 비무대 위로 올라온 초풍영이 하무위의 모습을 보며 이를 갈았다. 그러나 이미 대결은 모두 끝난 후였다.
다행히 서문수의 목숨엔 지장이 없지만, 족히 한 달 이상은 요양해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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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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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읽었습니다.감사...
건강하세요 잘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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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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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게 잘보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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