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이틀 잠을 설쳤는데도 잠이 쉽게 올것 같지 않아서 근처 마트에서 생탁 3병과 새우깡을 샀다. 혼자서...그것도 집에서 마시는걸 좋아하는 편은 아니다. 어제도 그제도 술을 마셨다. 가정평화가 깨어지려는 상황에서이다. 내가 뭘 잘했다고...
그러나 그젯밤엔 집에서 막걸리를 계속 마셔댔고, 어젠 홀로 여행끝에 지인들에게 전화를 걸어 셋이서 일치된 감정으로 한잔하고, 홀로사는 지인의 거처에서 하룻방을 유했다. 딱히 기대할만한 남겨줄 재주가진 문객도 못되는 주제에 문득 삿갓님에 대한 노래 '열두대문 문간방에 걸식을 하며∼ 술한잔에 시한수로∼'가 생각났었다.
지인은 가족과 사이가 좋지않아 두어달전에 살던 아파트를 처분하고 각기 거처를 따로 마련해 사는데, 불편함보단 편하게 산다고 하였다. 백번 이해가 가지만 결코 듣고 이야기 전할 좋은 즐거운 뉴스는 아니었다.
유뷰브에서 흘러나오는 노래소리가 막걸리 잔에 어우러져 감성이 예민해졌다. 하필 오늘 어머님을 여동생이 자신의 집으로 모시고 갔다. 우리집 분위기가 좋지 않으니 마음을 풀어들이고, 다음 주에 작은 형이 서울로 모시고 가서 바람을 씌워 드릴 것이란 계획이란다. 이래저래 불효자인 나의 처신이 마음에 걸린다. 동생들에게 전화를 걸어 미안함을 전했고 어머님께도 죄송함을 대신 말씀 올리기를 부탁했다.
기독교식 원죄에다, 살아가며 쌓이는 죄가 누적됨으로, 나는 자신을 죄인이 아니라고는 절대 부인하지 않는다. 유튜브에서 '불효자는 웁니다'란 제목의 노래가 구슬프게 흘러나온다.
어제 바깥에 여행중인데 미국의 큰형에게서 톡이 왔다. 국내의 은행업무를 대행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바깥에 있었고, 마음도 불편하여 오늘 전화를 다시하기로 핑겨를 대고 톡을 끊었다. 나이 팔십에 가까운 시기에 왜 먼나라를 택하셨을까? 누구들 보기 싫다면 백번 이해는 간다만...나는 별난 놈이니 저쳐두고 다들 사는게 뭔하는 것인지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우리는 가까이 모여살지 못하는 것일까? 인접해 살면서 음식도 나누어 먹고, 세상사는 이야기도 나누며 좋은 정보를 나눔도 좋지 않을 것이가에 대하여 오랫동안 생각을 해오며 살았다.
결론은 가난하기 때문일 것이란 마음이 들었다. 뭔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나누어 먹을 것이 있으면 고향 가까이 모여 하이에나처럼? 기회를 엿볼텐데 말이다. 내가 너무 앞서갔나? 하여간 그런 애환이 있더라는 말이다.
그래서 젊은 시절엔 열심히 돈을 벌어 역사를 바꾸어야 한다는 다짐도 해보지만, 역사는 자신이 쓰는 것도 아닐 뿐더러, 타고난 체질이 어딜 감히 허용을 하겠는가?
남인수의 낭낭한 목소리 '이별의 부산정거장', 내가 좋아하는 '울며헤진 부산항'이 나온다. 기타반주에 겯들여 흘러나오는 음악, 막걸리 맛이 절정에 이르는 순간이다.
나는 기타곡목으론 '파이프라인'을 특히 좋아했다. 젊은시절 군대 문선대 공연에서 C(찰리)부대 소속 병사가 무대에 나와 그 곡을 쳐대는데 정말 듣기가 좋았었다. 그런데 요즘은 툭하면 저작권이니 뭐니하며 시비꺼리가 된다나. 아니 첨부터 혼자 즐기고 내놓지말지 뭔 낚시질일까 하는 의혹이 간다.
군대가기전 고향 마을에 석달 정도 머무를때, 우리마을이 주관하고 면에서 지원했던 면민노래자랑의 추억이 떠올랐다. 마을 입구 정자나무 아래에 터를 잡고 천막으로 가설무대를 만들어 면내를 다니며 홍보를 하였다.
처녀 총각들이 제대로 남녀상열의 의사표시를 제대로 할 수 없었던 그때는 다시없는 참 좋은 시절이었다. 모처럼 먼발치에서나마 상대방들의 모습들을 어렴풋이 보며, 조금이나마 그리움을 달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무대가 꾸려지고 초저녁엔 내가 임시 사회자가 되었다. 그 당시 메인 사회자는 대략 외부에서 섭외를 하기도 하였는데, 본게임이 시작되기 전에 1시간정도 임시 사회자가 활약을 하는 시간대였다. 임시사회자에겐 권한이 있었다. 내가 아는 사람들을 무대로 먼저 오르게 하는 기회를 주는 특권이었다.
어릴적 그때만해도 면내에서 제일 큰 우리마을에는 동갑내기가 열 두어명이 있었다. 그런데 그중에서 내가 문화유입에는 선봉장 역활을 하였다. 장기며 바둑, 기타치기 그런 것들을 내가 먼저 배워 친구들에게 전수를 하였다.
그러나 나는 정작 그런 문화에 동화되지 못하고, 이내 싫증을 느끼고 말았다. 끈질기게 했으면 뭔가 남았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나이들고 쬐끔 후회는 있었다. 그거라도 계속해둘걸...
이야기가 옆구리로 흘러갔네. 그때 임시 사회에다 젊은이들 대표로 심사위원까지...ㅋㅋㅋ 뭘안다고? 아무튼 '자기동네에선 X개도 한수 먹고든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뒷날 읍내에서 빌려 온 방송장비만 너무 챙기다보니, 정작 내 가방은 버스에 실려보내 경찰서에 전화를 하고 먼 종점지역까지 가서야 찾아야 하는 소동이 있었다.
메들리 노래가 나왔다. 남인수(남강수?), 진주가 낳은 천재가수이다. 울며헤진 부산항, 이별의 부산정거장, 애수의 소야곡....그런데 역사는 가끔 헷소리를 해댄다. 가수는 노래만 잘하면 되었지 앞뒤 옆구리까지 먼지털이를 즐기는게 우리들의 물려받은 위대한 국민성이다.
왜 신라가 외세인 당나라를 끌여들여 삼국통일을 완성 하였는지에 대하여는 아직 시비를 안하더라만, 언젠가 다음엔 기회에 누군가가 애기를 꺼낼 것만 같다.
남을 까야 자신이 위대해 진다는 주목받기를 탐내는 찌질이도 못난 인사들의 심술 때문이다. 기껏해야 표절이나 하고, 미투의 대상이 되는 주제에 잘난척은 가문에 욕만 안긴다. 남들이 발견하지 못한 것들을 조금 발견해 보길 바란다.
나는 솔직히 사는데 흥미가 별로다. 사람들이 오래 살려고 기를 쓰는 것도 이해가 가질 않는다. 어느 인간들이 정치를 잘못하고 하는 것들도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하면 과장이고, 하여간 되돌아볼 가치가 없는 것들이라면 삶이란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래서 모처럼 오늘밤 유튜브 영상보며 흘러간 옛노래에 마음 풀어놓고 막걸리를 마시는 순간이 일생의 행복함이 아닌가 하는 마음이 들었다.
특유의 낮은 톤, 따라불렀던 구수한 목소리의 주인공 배호는 애국의 혼 윤동주처럼, 이해 어려운 시를 남겼던 이상처럼 젊은 나이로 요절을 했다. 애석한 일이었다. 그의 톤 낮은 노래가 텁텁한 막걸리 술잔에 담기며 방안에 흘러퍼진다. '.....원점으로 돌아가는 명시처럼 사랑아 안녕∼'
그렇게 우리들의 이야기는 종말을 향해 간다. 역사는 흐르기 마련이다. 오랜 천년이 지나면 빙하기가 다시오듯 말이다. 그리고 그리움은 슬픔이 되어 우리들의 가슴에 오래남아 모질게 기억된다.
첫댓글 저도 집사람이랑 가끔 다투는 편인데 ㅋ전에 다투다 지가 안된께 파출소에 신고를 헐,,,젊은 남녀 순경 출동해서,,아버님 그라모 안되지예,잎으로 안그럴 꺼지예? 헐,,,예, 알았어요 카고, 저는 센나꼽찌나 받는 직장이라도 다니니 사람 같이 보이지 안그랬음 말썽쟁이 중늙은이 취급 받을뻔,,매일이다 시피 동네 한바꾸 뛰니 저녁 물때 반주로 생탁 한두잔은 기본이고 형님 울적할때 듣는다늗 울며헤진 부산항등 모다 저에 18번이네예,,전대미문 코로나 와중에 생활패턴,가치관까지 변질,일부 무너진 현실로 깝깝하더라도 성질 좋은 형님이 참으이소~~나 들어도 꼰대 소리 안들으모 참 좋으낀데 저도 영락없는
꼰대 체질로 완성중,,식사 도중 폰으로 잠깐 쓰는 참이라 횡설수설입니다,늘 평온,건강하셨음 좋겠고 깝깝할때 함 내려오이소, 같이 욕하며 막걸리 한잔 하입시다
글 읽으니 가슴이 뭉클합니다. 뭔가 생활패턴을 바꾸지 않으면 망가질 것 같아요.
글 너무 고맙고 같은 마음 느낍니다. 언제 한번 만나고 싶어요. 건강 잘 챙기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