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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2]
화악산에서
생각은 누가 만들었나
포덕133년(1992) 월산 김승복 종법사의
종학대학원 강의 「교 비평설」입니다.
지면 관계 상
예시와 반복되는 부분은 대폭 줄였습니다./편집실
성사님께서
“교 비평설”에서 각 종교에 대한 비유를 했습니다.
역사적으로 제일 오래된 것이 유교,
그 다음이 불교, 기독교 이렇게 나옵니다.
성사님께서 유교에 대한 말씀을 하시면서
유교는
성심심 삼단으로 나눌 때에 주로 육신 쪽으로 흐르고,
불교는 성품으로 흐르고
기독교는 마음 쪽으로 볼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유교의 특징은
한울님도 믿고 개인 개인의 정령,
또 조상 영을 섬기기 때문에 제사를 지냅니다.
개벽이후에 이 유교뿐만 아니라
서양 사람들도 제사를 지낼 때에 신이다,
조상의 영이다, 또 한울님 영이다,
다 마음 바깥에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제물을 차려놓을 때 벽을 향해서 차려놓고
또 위폐를 써서 모셨습니다.
진리가 확명되기 전에는 동·서양 사람들이 모두
고조다, 증조다, 아버지다, 엄마다,
이렇게 쭉 위폐를 써서 향벽설위를 해왔습니다.
대신사님 때, 신사님 때 초에도 향벽설위를 했습니다.
대신사님, 해월신사님께서도 산에 기도 가실 때
제물을 차려 가지고서 천제를 지냈습니다.
그때 그 천제 지낸 상황이
옛날 『동경대전』 『용담유사』 간행할 때
그 뒷면에 전부 다 그려져 있었습니다.
오곡을 반드시 갖추고
여러 가지 생선, 육고기 종류를 사다가
요란하게 상을 차려서 천제를 지내고는 했습니다.
그런데 49일기도 중에
며칠에 한 번씩 천제를 지내는 게 아니라
매일 천제를 지냈습니다.
그래서 매일 장터에 출입하며
제물을 조달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기도도 아주 거창하고 복잡하게 했습니다.
대신사님이 몰라서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 당시에는 유생들도 대신사님을 많이 따랐기 때문에
갑자기 의식을 변화 시킬 수가 없었습니다.
어제까지 향벽설위를 해왔는데
갑자기 어떻게 향아설위로 바꾸겠습니까.
대신사님이 천의를 체행하신 연한이 4년입니다.
그 후 해월신사님도 그것을 받아서 내려가다가
의암성사님께 도를 전하게 될 즈음에
향아설위를 했습니다.
교사에 나타난 걸 보면 해월신사님이
천일기념식을 볼 때 향아설위를 하셨는데,
의암성사님이
그 자리에 참석지 못한 것을 아쉽게 생각했습니다.
성사님은 신사님과 거리가 퍽 먼 곳에 계셨는데,
신사님이 생각나서 혼자 천일기념일 제사를 지냈는데
향아설위를 했다는 것입니다.
그 후에 신사님하고 성사님이 만나셨는데,
신사님께서 내가 5만년 내려오도록 그 향벽설위 한 것을 향아설위로 고치는데 그대가 그 식에 참석하질 못해서 애석하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성사님이 본인도 4월 5일 제사를 지낼 때에
향아설위를 했다는 말씀을 신사님께 드립니다.
그때 신사님이 무슨 말씀을 하셨냐 하면,
천심이 상교가 됐다.
무슨 말인가 하면,
결국 하나의 성령이기 때문에
신사님이 그런 생각을 가지고 향아설위를 하니까,
그 생각이 염파를 타고서 성사님한테 전달이 돼서
성사님이 그 생각을 일으키게 됐고,
성사님 스스로 향아설위를 했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신사님 때 와서 비로소 향아설위가 됐는데,
이 향아설위가 됨으로 해서
진리가 그 만큼 더 밝아진 것입니다.
대신사님 시대는 향아설위를 하지 않고
시천주에 대한 것만 강조하고 내려왔는데,
결국 시천주이기 때문에 향아설위가 된 것입니다.
한울님이 바깥에 있는 게 아니고
한울님이 이 육신을 만들고 여기 와서 사신다.
한울님을 내가 모셨으니까
한울님이 벽에 있는 게 아니고 내게 있는 것이다.
생각이 내게 있고 한울님이 여기에 계시니까
향아설위하는 게 원칙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이것도
시천주가 창명이 됐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그 당시에 금방 고칠 수 있었는데, 고치지 않은 것은
그 시대의 환경 때문에 시일을 늦췄을 뿐입니다.
결국 그 뿌리는
시천주로 인해서 향아설위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의암성사님 때 와서
한울님도 내가 모시고
조상님도 내 성령과 융합되서
하나로 돼 있다는 것을 알게 되니까
성령출세설로 밝혀진 것입니다.
그래서 그 세 가지 설법이 다른 것 같지만
하나로 일이관지가 돼 있습니다.
시천주, 향아설위, 성령출세설
다 똑같이 천인합일의 경이 되니까
그와 같은 진리가 밝혀진 것입니다.
오늘 날에도 우리 천도교를 모르는 사람들은
다 향벽설위를 합니다.
산에 가더라도 묘소 앞에 음식을 차려놓고 절을 합니다.
그런데 우리 교인들도 아직 그 전대의 풍습으로 인해서
산에 갈 때 음식을 가져가는데
대체로는 다 향아설위를 합니다.
조상부모님 산소라 하더라도
조상부모님 제도 되고 한울님 제도 되니까
그 자리에서 향아설위를 하는 것을
잘 못 됐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무엇이든 하루아침에 다 고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실상은 산에 매장하는 문화부터 고쳐야 합니다.
우리의 매장문화는
오랫동안 유교에서 기독교에서
흘러내려온 전래 풍습이기 때문에
갑자기 변할 수가 없습니다.
기독교 하는 사람들은 화장을 잘 하지 않습니다.
신앙이 그렇게 돼 있기 때문입니다.
불교하는 사람들, 원래
높은 스님들은 옛날부터 다 화장을 했습니다.
지금 서울 장안의 사람들이 천만인데
이 천만을 어디다 다 갖다 묻겠습니까?
우리 남한의 인구가 5천만인데
5천만 장을 산에다 쓰면 산이 다 묘소가 될 것입니다.
이제는 사람들이 다 깨어났기 때문에
화장이 가능합니다.
성사님편 「수수명실록」에 보면
사후에 자기 아버지, 할아버지 제사를
살아있을 때보다도 갑절이나 정성을 들여서 하는데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이냐?
이것은 진리를 자각하지 못한 까닭이다 라고
분명히 표명을 했습니다.
우리 교회 실정을 보더라도
성사님이 지금 우이동에 묻혀있습니다.
성사님 재세 시에 인구가 1500만일 때,
300만이라는 사람이 천도교를 했는데,
천도교가 경제적으로도 풍부할 적에
성사님이 대신사님 산소, 신사님 산소,
그것을 살피지 않았습니다.
이미 다 성령출세가 되셨는데
굳이 옛날 사람들과 같이
비석을 세우고 산소를 세우느냐고 하질 않았습니다.
그랬는데 후에 결국
성사님 비, 상석이 제일 먼저 됐습니다.
주 사모님이 우이동에 살면서
삼청동에 있던 주 사모님 명의로 돼있던
한옥집을 팔아서 그 돈으로 비석도 세우고
산소도 세웠습니다. 전부 주 사모님 돈으로 했습니다.
교인들 성금으로 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성사님 비석도 세우고
상석도 세우고 묘소를 치장하게 되니까,
그 다음에 해월신사님 산소에도 비석을 세우고
상석도 세우고 치장을 하고,
대신사님 산소도 치장을 했습니다.
대신사님 산소를 치장할 때에
비석의 비문을 동학계열 사람들 때문에
‘천도교 제1세 교조 최제우 지 묘’ 라고 하질 않고
동학, 천도교라는 말도 들어가지 않고
동학이 맨 나중에 들어가서
교회에 말썽이 생겼었습니다.
이런 걸 보면 우리가 믿고 존경하는
신, 성사님 산소를 이렇게 치장을 한 것을
잘 못 됐다고는 말할 수가 없지만,
진리상으로 보면
성사님과 같은 그러한 태도
그러한 마음씨가 돼야 합니다.
지금 전체 교인들이 진리를 잘 이해 못하기 때문에
결국 거꾸로 가는 것입니다.
거꾸로 후퇴를 하는 것입니다.
진리보다도 후퇴하는 상황이 되어서
교회가 말썽이 일어나서 말이 많았던 것입니다.
따지고 보면
한울님을 모시고 우리 조상부모님의 성령이
내 성령과 융합돼서 하나로 돼 있기 때문에
향아설위를 하는 게 마땅하고
또 돌아가신 다음에도
매장하는 것보다 화장하는 걸 장려해야 되는 것이
우리 천도교 교리상으로는 맞는 것입니다.
유교가 한울님도 믿고 또 자기 조상 정령도 믿는 것은
우리들이 다 알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노자에 대한 선교, 거기에 대한 얘기를 하는데
이건 여러분들이 다 아는 얘기입니다.
모든 것을 초월하고 초자연으로 무위자연으로
돌아가는 게 노자의 가르침입니다.
그것을 구체적으로 잘 아시려면
노자의 도덕경을 사서 읽으시면,
천도교를 아는 사람들은
쉽게 이렇게 이해를 할 수가 있습니다.
유교는 일일이 다 공부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니까 유교의 대표적인 책 사서삼경을
공자님 도가 무엇이냐
유교가 무엇이냐 하는 것을 알기 위해서
한 번쯤 쭉 읽어나가시면 좋겠습니다.
여러분들이 도를 닦는데 잘 생각해야 합니다.
이치를 헤아리고 참고로 종교 비교를 하는 것은
그것으로 인해서 아는 것만 자꾸 추구해 들어가면
도를 통하긴 어렵습니다.
도통하는 것 하고 아는 것 하고는 다릅니다.
그래서 우리 대신사님께서
가사에서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서책은 아주 폐코
수도하기 힘쓰기는 그도 또한 도덕이라,
문장이고 도덕이고 귀어허사 될까보다.’
그 말씀이 뭐냐 하면
마음을 닦아 나갈 때에는
아는 것, 글자 늘어나는 것, 하나 하나 더 얻어지는 것,
이런 것을 아주 덮어 놓고,
없는 데서 나타나는 한울님,
그것을 찾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공부하는 방법이 완전히 다릅니다.
여러분이 지금 이렇게
이치를 생각하고 배워서 알아가고,
아침저녁으로 기도도 하고 수련도 하니까
두 가지 공부를 다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공부해 나갈 때는
두 가지를 다 알아야 합니다.
주문 공부도 하고 이치 공부를 다 해야 됩니다.
이치 공부한다고 주문공부를 소홀히 하면 안 됩니다.
또 주문 공부 한다고 해서
이치공부를 소홀히 하면 안 되는데,
이치가 일단 헤아려지면,
주문공부를 열심히 해도 잘 못된 것은 아닙니다.
불교는
무신관(無神觀) 무아관(無我觀),
여러분들이 다 아는 얘기입니다.
불교는 실상 절에 가면
산신각도 있고 칠성각도 있어서
여러 신을 믿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건 우리나라에 와서
이렇게 배합이 된 상태이지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참선공부만 하는 선원에 가면
부처님 앞에 목불 금불 동불을 세워놓고
절도 안 하는 게 그 선사들입니다.
본래 불교는
신이 없다고 생각하고 나도 없다고 생각하고
성품 본자리를 깨치려고 공부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 본자리를
무유(無有), 유무(有無), 무무(無無)
우리 성사님 법경에서도 많이 나타난 얘깁니다.
다음에 불교의 중요한 가르침이
사체(四諦), 고체(苦諦), 집체(集諦), 멸체(滅諦),
도체(道諦)입니다.
사체는
모든 것이 고(苦)다. 살아있는 것도 고(苦)고
우리가 태어난 것도 전부 고(苦)다.
왜 고냐, 그 이유를 아는 것이 집체고
그 이유를 알았으면, 그 고를
멸하는 그것을 알아야 되고, 그래서
완전히 도를 깨달아라 하는 것이 사체입니다.
그 다음이 팔정도입니다.
정신(正信), 정사(正思),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 정진(正進), 정념(正念), 정정(正定)인데,
우리 천도교의 대신사님 편에
팔절, 전팔절, 후팔절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
믿어도 바르게 믿어라. 바른 생각을 해라,
바른 말을 해라, 바른 직업을 가져라, 바르게 명해라,
가르침을 바로 받아라, 바르게 정진해라,
바르게 생각해라, 바로 정해라.
우리가 도를 닦아 나가는데
마음을 정하고야 도를 닦지 않습니까.
정할 때에 바르게 정해라,
한 번 정하게 되면 변하지 않게 해라.
팔정도에 대한 생각은
도를 닦는 스님들에게는 굉장히 좋은 얘깁니다.
우리는 참고로
팔절과 비교하면서 그것을 생각하면 됩니다.
이와 같은 내용이 또 성사님 법경에 있습니다.
그 다음이 파라문입니다.
이것은 인도에서 불교가 나타나기 전에 있었습니다.
여기서 파라문교, 불교, 미륵교로 갈라졌습니다.
그러니까 파라문교에서 불교로 넘어오면서
불교 하는 스님들도 고행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실상은 불교가 나오기 전에
파라문교에서부터 쭉 고행을 하고 금욕을 해 왔습니다.
이 일로 인해서 우리 천도교 하는 사람들도
육신을 괴롭혀야만
도를 깨달을 수 있고 터득할 수 있다는
그런 잘못된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일부로 49일기도 하는데
단식을 한다든가, 또 생식을 한다든가,
또 추울 때 굴속에 들어가서
추운 걸 참으며 억지로 기도를 한다든가,
그러니까 생리를 돌보지 않고
육신을 그냥 괴롭혀서
도를 터득하려고 하는 그런 생각을 하는데,
그건 잘못된 생각입니다.
이 육신이 한울님을 모셨으니까 육신이 괴로워하면
역시 한울님이 괴로워하는 것입니다.
괴로워하는 그것을 아는 것이 누구냐 하면
한울님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아는 것입니다.
결국 육신을 괴롭히는 것은
육신이 본래 내 것이면서 내 것 아닌
한울님 것이니까 육신이 괴로우면
한울님을 괴롭히는 것입니다.
먹을 것을 먹지 않는다.
이 역시 한울님을 굶주리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사님 “십무천”에
한울님을 굶주리게 하지 말라,
한울님을 싫어하게 하지 말라,
굴하게 하지 말라,
상하게 하지 말라,
열 가지 모두가 한울님과 관계를 기록해 놨는데
우리들이 지금 고행을 한다?
한울님을 괴롭히는 것입니다.
먹는데 너무 많이 먹어도 안 되고
적게 먹어도 안 됩니다.
불교에서 2천 5백년 동안 연구한 게 무엇인가 하면
하루에 삼홉밥을 먹는데
아침에 일홉밥 점심에 일홉밥,
저녁에 참선공부하는 사람들은 죽을 먹입니다.
밥을 먹게 되면 위장에 부담이 있어서
아침 새벽 기도할 때 졸게 되니까
저녁에 밥을 안 먹입니다.
하루 세끼 먹는 사람은
생리적으로 의학상으로는 밥 먹을 때에
제 시간을 딱 딱 지켜서 먹으라고 했습니다.
성사님께서는 우이동에 계실 때
식사하시는데 꼭 제 시간에 지켜서 하셨습니다.
아침에 일곱시 땡 하면
밥상을 딱 갖다 놔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시켜서 그대로 실행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식구들이 다 준비하고 있다가
일곱시면 딱 밥상을 갖다 놓고는
그 다음에 식구들이
음식을 차려서 먹고는 했다고 합니다.
그런 대 신인도 그와 같은 음식 먹는 시간을 지켰는데
범부들이야 말할 것도 없습니다.
성사님의 「위생장」에 보더라도
음식에 대한 수심정기를 설명하면서
수심은
마음을 잠깐도 혈맥정신에서 떠나지 않게 하는 것.
정기라는 것은
희로애락을 조절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다음에 음식에 대한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절대 과식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과식을 하게 되면 해롭다.
위가 적당히 늘어났다가 줄어드는 건 괜찮지만
너무 많이 먹어서
많이 늘어나면 좋지 않다는 얘기입니다.
자기 스스로가 육신을 잘 관리 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게 바로 도입니다.
엉뚱하게
바깥으로부터 무엇이 와서 깨달아진다는 것보다도
내게 있는 이 육신이
내가 아닌 한울님이 간섭을 하는데
한울님이 사람의 생각에 근거를 두고서
간섭을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천지만물이 이루어지는 것도
생각으로 인해서 이루어지는 것이고
사람이 나타나는 것도
전부 생각의 파동에 의해서 나타난 것입니다.
결국 영의 파동의 진동수로 인해서 나타난 것이
물체입니다.
우리 사람, 식물이나 동물이나 다 같습니다.
그러니까 근본을 어디다 두느냐 하면
생각하는데 두어야 하는데
그 생각이 어디서부터 나왔느냐,
내 성품 내 마음, 성심 양간에서 생각이 나왔습니다.
생각은 누가 만들었느냐.
인과관계로 인해서 생각이 좌우되지만,
그 인과를 조절하고 초월하는 것도
자기한테 있습니다.
결국 잘하고 못하고
내가 건강하고 건강치 못하고
편안하고 편안치 못하고,
모든 것을 내가 좌우한다는 얘깁니다.
그래서 늘 하는 얘기는
모든 운명이 인과관계로 이루어지는데,
그것도 내가 노력하게 되면 노력하는 만큼
수정을 해나갈 수 있습니다.
고쳐 나가야 합니다.
고쳐 나갈 수 있는 특권을
한울님이 사람들한테 다 준 것입니다.
그래서 이걸 고칠 수 있다, 없다 하는 것도
자기 마음에 있는 것입니다.
할 수 있다 하면 하는 것이고
못한다 하고 주저앉으면 못하는 것입니다.
공부도 그렇습니다.
에이 못 하겠다 주저앉으면 못 하는 것입니다.
또 한다 하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천리 길도 간다하고 출발해서 가면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지만,
어떻게 가나 못가겠다 하고 떠나지 않게 되면
영원히 못가는 것입니다.
도 닦는 것이
천리 길을 가는 것 하고 매 한가지입니다.
처음에는 잘 안 되는 것 같지만 계속 정진해 나가면
어느 날 가서는 마음을 깨닫고
성품을 볼 수 있는 그런 단계에 도달 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다 마음에 있습니다.
유교다 불교다 선교다 파라문교다 기독교다
여러 가지 종교를 비유했는데
이게 다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전부다 마음에서 나와졌습니다.
사람이 저 옛날 미개했을 때 하고,
이제 점점 지혜롭게 깨어서 달라지니까
이렇게 천도교가 생겨나서
결국 근본은 하나이니까 모든 것을 다 받아들여서
통일을 시키는 것입니다.
유교 불교 선교 기독교
모든 종교를 받아서 통일한다고 해서
비빔밥 식으로 이렇게 만드는 게 아닙니다.
옛날 사람들은 부분 부분 이해했는데,
우리는 그 전체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결국 시천주 인내천의 원리에 의해서
모든 것이 정화돼서
하나의 이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결코 유교 선교 불교가
그냥 무조건 합일돼서 천도교가 된 것이 아닙니다.
그전에 저도 학생시절 때 생각이
한국 사람들은 재주가 있으니까
누가 그 재주를 가지고
유교 불교 선교의 장점을 다 모아서
천도교를 만들어 놨는가 보다 라고 생각했습니다.
또 학자들이 천도교를 소개한 역사책을 보더라도
유교 불교 선교를 합한 것이 천도교다,
좀 더 세밀하게 쓴 것은
유교의 이런 점, 불교의 이런 점, 선교의 이런 점,
기독교의 이런 점, 이렇게
장점을 모은 게 천도교다 이렇게 표현이 돼서
그렇게 받아들였었습니다.
그런데 실상 천도교를 해보니까 그게 아닙니다.
모든 종교가 전부
그 한울님 성심 본자리에서부터 우러러 나왔는데
사람들이 그 성심 본자리 우주 본체를
얼마나 이해했느냐 하는 정도에 따라서
여러 가지 종교가 생겨났다는 것입니다.
그걸 어떤 분이 비유했는데
장님들이 코끼리를 평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배 있는 쪽에 가서 만져보더니 야 이거 벼랑 같구나,
다리를 만져보고 이거 큰 집의 기둥 같구나,
여러 가지 평을 했다는 것입니다.
본체는 본체대로 그냥 있었는데
사람들이 그 지혜의 정도, 깨달음의 정도,
이해하는 정도가 다 달라서
그 시대 시대에 따라서
표현들이 다 그렇게 달라진 것입니다.
이제 21세기에 와서
그 모든 것이 근본은 하나이다.
유교 불교 선교 기독교 모든 것이
하나로 돌아올 때가 왔다.
그 하나가 바로 사람이 곧 한울님이다.
식물 동물 천태만상이
무형한 한울님이 유형화 된 것이다.
그렇게 교육이 된 것입니다.
그것을 지금 「천도태원경」 마지막 구절에 와서
성사님이 다른 종교를 대충 소개하면서
마무리를 지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