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조지아주의 한 작은 도시 어거스타는 매년 4월,
간절한 희망처럼 봄이 오면 정확히 일주일간 열병을 앓는다.
그 열병의 주인공은 단지 그린재킷을 노리고
그 엄청난 샷의 전쟁터에 뛰어든 선수들만은 아니다.
골프라는 열병을 앓는 이 세상의 모든 골퍼들에게
어거스타는 꿈과 희망을 볼 수 있는 곳이며
내가 못이룬 샷의 완성을 타이거나 프레드를 통해 이룰 수 있는
순례의 목록 제일 상단에 자리잡을 화사한 봄날의 어느 도시인 것이다.
그래서 매년 아무 연고도 없는 그 작은 도시를 찾는 골퍼들에게
어거스타는 골프의 성지같은 곳이기도 하다.
어거스타 내셔널 골프클럽.
막상 가보면 그리 특별할 것도 없다.
별로 화려하지 않은 클럽하우스와 소박하지만 전통의 힘이 서려있는 가구들...
하지만 페어웨이를 보면 약간 마음이 달라진다.
잔디가 아니라 융단을 깔아놓은듯 하다.
디봇을 만들기가 죄송한 곳,
아무렇게나 스윙하기가 송구스런 곳이다.
이번 2018년 매스터즈 제일의 화제는 또다시 타이거이다.
올해 두번의 PGA 투어대회에서 모두 TOP10 안에 들었고
그의 숏게임은 다시 예전의 명성을 되찾은듯 하다.
그가 과연 다시 우승할 수 있을까?
전성기때만큼 가능성이 크지는 않지만 확률은 있다.
원래 어거스타는 고전적인 골프실력을 묻는 곳이다.
길게 쏘고 정확히 떨어뜨리는 골프가 응답 받을 수 있는...
브리티시 오픈이 거친 바람, 긴 러프, 변화무쌍한 날씨와 벌이는
원초적인 투쟁이라면 매스터즈는
예쁜 페어웨이, 빠른 그린, 브레이크, 언듈레이션과 싸우는 비교적 정돈된 싸움이다.
말하자면 브리티시는 원칙이 없는 전쟁이고
매스터즈는 룰안에서 치뤄지는 원칙있는 전쟁이다.
원초적 싸움은 변수가 많고 통계와 확률에 반하는 결과가 종종 나오지만
정돈된 싸움이라면 확률과 통계에 기반한 예상대로 결론이 나기 쉽다.
매스터즈는 굳이 몇달전 부터 러프를 깍지 않고 기르거나
코스의 컨디션을 최악으로 세팅하는 주접떨기를 거부한다.
대신 그린에서 결론을 내자는 철학을 가지고 있다.
참가선수들의 신출귀몰하는 샷 능력은 이미 검증할 필요 없다는 논리다.
대충 길게 때려야 유리하지만 US OPEN처럼 지옥의 러프를 만들어
티샷조차 pinpoint로 쏘지 못하면 러프로 처박혀
어이없이 무너지게하는 가혹한 요구는 하지 않는다.
아마추어라도 클럽깨나 만져본 사람이라면 동의할 것이라 믿는다.
골프란 게 갈때까지 가면 결국 퍼팅싸움이지 않은가?
어거스타는 퍼팅으로 승부를 가르자는 철학이 있는 곳이다.
브리티시 오픈을 먹고 싶다면 남성적인 전투정신이 있어야 한다.
궂은 비, 거센 바람, 황무지같은 러프를 이겨내는 창조력이 필요하다.
유에스 오픈을 먹고 싶다면 정확성과 인내심이 있어야 한다.
거친 러프를 천신만고끝에 벗어나 그린을 때린다한들
거북이 등짝같은 그린을 튕겨나가고 어프로치하면 반대로 벗어나는
어이없는 잔혹함을 인내할 수 없다면 유에스 오픈의 임자가 될 수 없다.
PGA Championship을 먹으려면 경쟁을 이기는 카리스마가 있어야 한다.
8월 한 여름의 뜨거운 날씨와
매스터즈, 유에스, 브리티시의 챔피언들이 모두 모이고
또 메이저의 바로 코앞에서 돌아서야 했던 아쉬움들이 떼거지로 모여
그 해가 가기 전 마지막 메이저타이틀을 걸고 박 터지게 싸우는 경쟁의 한판.
하지만 매스터즈를 먹으려면 섬세해야 한다.
아주 쉽지도 않지만 그리 어렵지도 않은 코스 레이아웃과
전장 7400야드가 넘지만 도그렉이 많고 장비의 혁명적 개선으로 인해
밥먹고 공만 때리는 프로라면 그리 길다고 할 수 없는 코스 길이에서
자신의 골프를 뚜렷하게 차별화할 수 없으므로 결국 그들이 만나는 곳은
섬세하지 않으면 이겨낼 수 없는 엄청난 빠르기와 지옥같은 브레이크의 그린이다.
골프란 여러가지 샷이 종합된 게임이고
어느 한 가지만을 잘해서 완성되는 운동이 아니다.
하지만 감히 말하건대,
드라이버 샷의 호쾌함이 즐거우면 아직 갈 길이 많이 남은 것이고
그린에 쩍 들러붙는 아이언샷이 감미로우면 중간쯤 온 것이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퍼팅이 다이내믹해지고 희열마저 느끼게 될 것이니
이제 거의 다 왔다고 생각하면 된다.
퍼팅은 골프 샷의 종합이자 완성이다.
진실한 퍼팅을 하려면 드라이버의 스윙원리가 필요하고
아이언의 정확한 임팩이 필요하며
긴장과 압박을 견디는 멘탈과 배짱 그리고
그린의 굴곡을 인생의 굴곡처럼 읽는 지혜가 필요하다.
매스터즈가 요구하는 것이 바로 그런 완성을 보여달라는 것이다.
이번 2018 매스터즈에서 타이거가 우승할 확률이 높지는 않지만
그가 만일 진실로 전성기때의 칩샷과 퍼팅을 되찾았다면
쉽게 우승할 수도 있다.
타이거는 숏게임과 퍼팅의 섬세함으로 따져
현존 프로골퍼중 제 일인자라고 생각한다.
예전의 명장 브래드 팩슨을 그린읽기의 교과서라고 한다면
타이거는 자신이 읽은 그린을 손끝의 미묘한 감으로 퍼터에 전달하여
공을 홀컵에 떨어뜨리는 섬세함에 있어 지존이다.
여기서 섬세함이란 여러가지 단어가 복합적으로 축약된 정신이다.
말하자면 여러가지 외적인 압박과 경쟁의 부담을 이겨내고
거리, 굴곡, 바람, 습기, 잔디결 같은 기술적 어려움을 극복하며
힘의 세기와 자잘한 브레이크를 속속들이 인지한 후
평온한 마음으로 자신의 정신을 퍼터를 통해 공에 전달하는 상태를 말한다.
이런 섬세함에서 그를 당할 선수는 없다.
그런 타이거를 제압할 수 있는 선수중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게 더스틴 존슨과 로리 맥킬로이다.
그들이라면 타이거의 컴백을 잔혹하게 저지할 수 있다.
걸리는 게 있다면 더스틴의 퍼팅은 아직 어거스타의 그린과 융합되지 못했고
로리는 간혹 80타를 넘는 라운드가 불쑥 튀어나온다는 점이다.
그외 강호의 명단엔 조단 스피스와 제이슨 데이가 있고
저스틴 토마스와 리키 파울러를 꼽아본다.
존 람과 저스틴 로즈, 헨릭 스텐손은 언제나 무시할 수 없는 다크호스들이고
토니 피나우와 케빈 키스너 그리고 패트릭 리드도 이번엔 눈여겨 볼만하다.
혹시나 김시우가 큰 일 한번 저지르는 걸 보면 좋겠고
내가 좋아하는 프레드 커플스가 환갑의 나이에 우승하는 걸 보면
삼일 굶어도 배고프지 않을 것 같다.
지난 겨울, 춥고 황량한 계절의 한 복판을 가로질러
그래도 잊지 않고 간절한 희망처럼 봄이 화사하게 왔듯이
우리도 각자의 마음속의 매스터즈를 향해
봄날의 요시노 체리와 매그놀리아가 만발한
어거스타 내셔널의 싱그런 코스에서 힘차게 스윙해 보자.
하지만,
매스터즈를 먹고 싶다면 절대 잊지 말라...
매스터즈는 퍼팅이다.
부록: 매스터즈 그린의 비밀
어느 곳이나 그 곳이 많은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는 곳이면 알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난다.
예를들면 매스터즈가 열리는 어거스타 내셔널 골프 클럽엔
미신과 징크스, 물리학등이 어우러져 미스터리한 현상을 빚어내고
그 현상들이 승리와 좌절의 얇은 박막을 벗겨내곤 한다.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에 대해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지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fact 가 벌어지니까 그런거라고 이해할 뿐이었고 알 수 없는 힘이 있다고 생각했을 뿐.
오래 전부터 어거스타의 그린엔 보이지 않는 힘이 있어 퍼팅한 볼을 잡아 당기고 있었다.
선수들은 그 힘을 pull 이라고 표현했다.
무언가 잡아 당긴다는 뜻인데... 그 힘으로 말미암아 많은 선수들이
주먹을 불끈 쥐고 환호하거나 고개를 떨군채 눈물을 감추었다.
이야기를 시작한다.
어거스타 골프 클럽의 제일 높은 곳은 해발 355 feet 인데
그게 골프장 입구인 매그놀리아 레인이다.
거기부터 골프장의 레이아웃은 낮아지기 시작한다.
제일 낮은 곳은 해발 160 feet.
높이 차이가 175 feet 로 만만치 않은 높이다.
단, 전 골프장이 gradually 낮아지기 때문에 사람들은 좀체로 느끼지 못한다.
거기에 미스터리가 존재하고 있었다.
가장 낮은 곳을 Red Dot 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게
필 미클슨이 3번 우승할 때 계속 백을 멨던 짐 멕케이 인데
아멘코너의 가운데 홀이 파3, 12번홀 그린이고
그 앞을 흐르는 개울을 Rae's Creek 이라고 부른다.
그러니까 어거스타에서 가장 낮은 곳이 12번 홀의 그린에 있는 셈이다.
모든 그린의 브레이크가 그 곳을 향해 브레이킹하는 것이다.
눈으로 보기에 뚜렷히 직선이고 모든 캐디와 선수들이 그렇게 읽고 퍼팅하면
공은 12번 홀의 Red Dot을 향해 브레이크하는 것이다.
그렇게 놓치는 퍼팅이 각 홀의 그린마다 선수들을 울려왔다.
요는 그 pull을 믿고 퍼팅하는 배짱과 믿음이다.
그 Red Dot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선수가 타이거라고 한다.
분명히 직선인데 퍼팅하면 브레이크하고
분명히 브레이크 퍼팅인데 펏하면 스트레이트로 간다.
선수가 로컬 브레이크에 너무 현혹되면 제너럴 브레이크를 놓치는 우를 범하게 되는데
어거스타처럼 고도 차이가 많이 나고 점진적으로 낮아져 선수들이 그 차이를
피부로 확실히 느끼지 못하는 함정을 가지고 있는 코스라면
퍼팅에 헷갈리는 미스터리한 힘이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물리학적으로 설명이 되는 사실이지만
코스에 파묻힌 선수는 의아할 뿐이다.
이론보다 보이는 것에 현혹되는 게 인간이니까...
오늘날 선수들은 어거스타의 그린에 서면 일단 Rae's Creek
그러니까 12번 홀의 가장 낮은 곳인 Red Dot가 어느 쪽인지 먼저 살핀다.
앞에 놓인 퍼팅이 직선의 데드스트레이트라도
Red Dot쪽으로 미세한 브레이크를 보정해 주지 않으면
위스코프나 그렉 노먼 혹은 잭 니클러스나 닉 팔도가 겪은 좌절을 결코 피해갈 수 없다.
생각없이 그린에 덜렁 파묻히면 제너럴 브레이크를 놓친다.
그린에 오르기 전에 어느 쪽이 pull인지 살피는 건 골프를 어느 정도 하면 알게 되는 상식이지만
어거스타는 그 상식이 극명하게 적용되는 곳이다.
선수들은 그 현상을 여지껏 mysterious pull이라 불렀다고 한다.
앞으로도 그렇게 부를 것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