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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어서 본 ‘상윳따니까야(Saṃyutta Nikāya)’ 19강
닛다딴디숫땅
Niddatandisuttaṃ
잠과 나태함 경(S1:16)
사왓티양
Sāvatthiyaṃ.~~ (생략)
데와따(Devatā)
천신
1. 닛다 딴디 위잠비까 아라띠 밧따삼마도,
Niddā tandi vijambhikā aratī bhattasammado,
에떼나 납빠까사띠 아리야막고 이다 빠니난띠
Etena nappakāsati ariyamaggo idha pāṇinanti.
1. 잠, 나태, 하품, 싫어함, 식곤증
이런 것들 때문에 이 세상 중생들에게
성스러운 도가 빛이 나지 않습니다.
바가와(Bhagavā)
세존
2. 닛당 딴딩 위잠비깡 아라띵 밧따삼마당
Niddaṃ tandiṃ vijambhikaṃ aratiṃ bhattasammadaṃ
위리예나 낭 빠나메뜨와 아리야막고 위숫자띠띠
Viriyena naṃ paṇāmetvā ariyamaggo visujjhatīti.
2. 잠, 나태, 하품, 싫어함, 식곤증
이런 것들을 정진으로 몰아낸 뒤에
성스러운 도는 실로 청정해진다.
본문 게송의 다섯 가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닛다(Niddā)는 ‘잠’, ‘수면’, ‘졸음’입니다. 딴디(tandi)는 ‘권태’, ‘나태’입니다. 위잠비까(vijambhikā)는 ‘하품’, ‘졸림’입니다. 아라띠(aratī)는 ‘싫어함’, ‘혐오’, ‘불만족’입니다. 밧따삼마도(bhattasammado)는 ‘식곤증’, ‘식사 후의 나른함’입니다. 그래서 수행을 하면 나타나는 ‘잠, 나태, 하품, 싫어함, 식곤증’이라는 다섯 가지 장애입니다.
다음에 에떼나(Etena)는 ‘이것’, ‘여기‘, ’그러므로‘입니다. 납빠까사띠(nappakāsati)는 ’빛이 나지 않는다‘입니다. 아리야막고(ariyamaggo)는 ’성스러운 도‘입니다. 그래서 ‘잠, 나태, 하품, 싫어함, 식곤증 이런 것들 때문에 이 세상 중생들에게 성스러운 도가 빛이 나지 않습니다.’입니다.
주석서에서 닛다(niddā)는 졸림이고 딴디(tandi)는 나른함인데 이는 서로 비슷한 의미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인도에서는 여름 마지막 8월이 되면 대단히 졸린다고 합니다. 8월에 방학이 끝나고 9월에 강원이 시작하는데 강의가 1시에 시작할 때면 많이 졸립니다. 경전에도 보면 수행자도 이 시간에 많이 졸린다고 합니다. 한국도 봄에 춘곤증처럼 그런 시기라고 보면 됩니다.
수행자는 명상을 할 때 졸리고 잠이 오면, 잠을 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부처님은 잠이 오면 일어나고, 그래도 잠이 오면 세수도 하고, 그래도 안 되면 가서 잠을 자라고 하셨습니다. 몸이 정말 피로하면 자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의 졸림 나른함은 환경적인 면에서 말한 것입니다. 다섯 가지 장애도 몸에 대한 게으름과 마음에 대한 게으름인데 윤회를 하게하고 번뇌를 계속하게 하는 한 가지 방법이 몸의 게으름과 마음의 게으름입니다.
딴디(tandi)는 잠, 수명이지만 원래의 뜻은 시원함입니다. 스리랑카에서는 큰 나무 밑에서 수행을 하면 시원해서 자기도 모르게 잠을 자게 됩니다. 명상을 하면 잠이 잘 오는데 잠이 수행을 방해한다는 것입니다. 때가 되지 않은 잠은 때가 되지 않은 밥과 같습니다. 그래서 해(害)가 되는 것입니다.
위잠비까(Vijambhika)는 하품, 졸림인데 무기력함을 말합니다. 배가 부르면 움직이기 싫고 나른해서 졸림이 오는 느낌을 말합니다. 아라띠(arati)는 싫어함, 혐오, 불만족인데 라띠(rati)의 반대로 선행을 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라띠(rati)는 좋아함, 사랑인데 앞에 부정하는 의미의 a를 붙여서 아라띠(arati)가 되면 싫어함입니다. 그래서 아라띠(arati)는 악행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취미로 낚시를 하는 것을 말합니다. 살생이란 개념은 없지만 선행 쪽으로 마음을 내는 것이 아니라 악행 쪽으로 마음을 내는 것을 말합니다.
밧따삼마도(Bhattasammado)는 식사 후의 나른함으로 식곤증입니다. 봄, 여름에 많이 나오는데 익숙해지면 무조건 해야 되는 버릇이 됩니다. 아침을 6시에 먹는데 식곤증 와서 졸리면 부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식곤증인지 피곤해서인지 시험해봤습니다. 늦게 자고 일찍 일어나면 계속 졸렸는데 일찍 일어나지 않을 때는 식곤증이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식곤증인지 잠의 부족해서 오는 잠인지를 잘 알아차려서 대처해야 합니다. 수행자는 본인의 몸을 잘 알고 관리를 잘 해야 명상에 도움이 됩니다.
에떼나(Etena)는 ‘이런 것’이라는 뜻입니다. 어원은 에또(etto)인데 ‘이것으로부터’, ‘여기’, ‘여기로부터’, ‘그러므로’ 등의 뜻입니다. 여기서 이런 것이란 단어는 좀 전에 이야기한 다섯 가지 장애를 통틀어 이런 것들이라고 했습니다.
납빠까사띠(nappakasati)는 ‘빛이 나지 않는다’입니다. 빠까사띠(Pakasati)는 빛이 나는 것이고 앞에 부정을 의미하는 na와 p가 붙어서 납빠까사띠(nappakasati)가 되어 빛이 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아리야막가(ariyamagga)는 성스러운 도입니다. 또는 성자의 도라고도 합니다. 이 도는 성자가 되어야 아는 도라서 성자의 도라고 합니다. 성스러운 도와 성자의 도는 4성제와 8정도를 말하는데 출세간의 길을 얘기합니다. 여기서는 이런 다섯 가지 장애 때문에 출세간의 길이 전혀 빛이 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것은 마음관리도 중요한데 몸 관리도 중요함을 말합니다. 수행을 하거나 불교를 제대로 공부하려면 몸 관리도 중요하다는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아비담마에서도 찌따 라후따, 까야 라후따, 즉 마음의 편안함, 몸의 편안함도 중요하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천신이 부처님께 ‘잠, 나태, 하품, 싫어함, 식곤증 이런 것들 때문에 이 세상 중생들에게 성스러운 도가 빛이 나지 않습니다.’ 이렇게 말씀드리자 부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답변하셨습니다. ‘잠, 나태, 하품, 싫어함, 식곤증 이런 것들을 정진으로 몰아낸 뒤에 성스러운 도는 실로 청정해진다.’
이처럼 부처님께서는 ‘잠, 나태, 하품, 싫어함, 식곤증’ 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부처님의 답변은 ‘위리예나 낭 빠나메뜨와 아리야막고 위숫자띠띠(Viriyena naṃ paṇāmetvā ariyamaggo visujjhatīti)’입니다.
위리예나(Viriyena)는 ‘정진’, ‘노력’입니다. 빠나웨뜨와(Panavetva)는 ‘쫓아내다’입니다. 아리야막고(ariyamaggo)는 ‘성스러운 도’이고, 위숫자띠(visujjhatiti)는 ‘청정하다’입니다. 그래서 ‘
이런 것들 정진으로 몰아낸 뒤에 성스러운 도는 실로 청정해진다.’입니다.
두 문장을 합치면 ‘잠, 나태, 하품, 싫어함, 식곤증 이런 것들을 정진으로 몰아낸 뒤에 성스러운 도는 실로 청정해진다.’입니다.
정진으로 몰아낸다는 말은 성스러운 도와 함께 생긴 정진력으로 이런 다섯 가지 장애의 오염원을 몰아낸다는 것입니다. 성스러운 도는 세간적인 도와 출세간적인 도 두 가지를 모두 포함한 말입니다. 이처럼 오직 성스러운 도로써 오염원을 없앤 뒤에라야 비로소 성스러운 도가 청정해진다는 뜻입니다. 출세간의 도는 세간의 도조차도 하나의 알아차릴 대상으로 삼아서 극복합니다. 그래서 세속의 도인 속제(俗諦)와 출세간의 도인 진제(眞諦)가 비로소 완성됩니다.
누구나 계속해서 노력하는 정진력이 없으면 반드시 앞서 밝힌 다섯 가지 장애가 나타납니다.
인도 사람들을 게으르다고 말하기도 하는데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명상하는 제자들은 게으르지 않다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천신은 잠, 나태, 하품, 싫어함, 식곤증의 단어들을 복수로 보고 있고 부처님은 단수로 보셨는데 문법적인 차이가 있지만 뜻은 같습니다. 그래서 서로 차이는 없습니다.
결국, 수행을 할 때 나타나는 다섯 가지 장애는 오직 정진으로만 해결할 수 있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정진은 노력입니다. 노력은 구도의 과정에서 가장 많이 강조되는 부분입니다. 특히 위빠사나 수행자가 노력을 하기 위해서는 경행을 할 것을 권장합니다. 좌선은 집중력을 키우고 경행은 정진력을 키웁니다. 그래서 걷는 수행을 하는 것으로 정진력을 키워야 합니다.
수행을 한다는 것은 노력을 하는 것입니다. 노력을 해서 알아차릴 수 있고, 이런 노력이 알아차림을 지속시켜 집중력을 키웁니다. 그래서 노력이 집중을 하게하고 이러한 집중이 지혜를 얻도록 합니다. 인내가 열반으로 이끈다고 할 때의 인내가 바로 노력입니다. 그래서 수행자는 물러서지 않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하지만 노력이 가장 중요하다고 해도 지나치면 들뜨고 산만해집니다. 반대로 노력이 부족하면 게으름에 빠져 수행을 계속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항상 균형에 맞는 적절한 노력을 해야 합니다. 노력도 오래 지속하는 노력을 해야지 한순간에 강한 힘을 쏟아 붓는 노력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몸이 긴장하고 상기의 위험이 있습니다.
이러한 노력을 현악기의 줄에 비유합니다. 현악기의 줄이 너무 느슨해서도 안 되고, 너무 팽팽해서도 안 됩니다. 너무 느슨하면 소리가 나지 않고, 너무 팽팽하면 줄이 끊어집니다. 그래서 현악기의 줄은 알맞게 조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위빠사나 수행의 노력은 적절해야 하는데 이것을 조율하는 것이 바로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가장 이상적인 노력은 네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이미 일어난 악한 마음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서 소멸시키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이때 악한 마음이 일어난 것을 알아차리는 방법이 있고, 사악한 마음을 대상으로 알아차리는 심념처 수행이 있습니다.
둘째, 아직 일어나지 않는 사악한 마음이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합니다. 이때 하나의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면 사악한 마음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호흡에 집중하면 마음이 청정해져 아만심이 사라지고 사악한 마음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셋째, 아직 일어나지 않은 선한 마음이 일어나게 하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경전을 보거나 법문을 듣고 가르침을 경청해야 합니다. 그리고 수행을 해서 집중이 되면 지혜가 나서 관용과 자애와 지혜라는 선한 마음이 일어납니다.
넷째, 이미 일어난 선한 마음을 더욱 증진시키기 위해서 노력을 해야 합니다. 이때 필요한 것이 오근입니다. 오근은 믿음, 노력, 알아차림, 집중, 지혜입니다. 오근의 힘을 키우면 오력이 되어 선한 마음이 더욱 증장됩니다.
다음 경전을 공부하시겠습니다.
둑까라숫땅
Dukkarasuttaṃ
실천하기 어려움 경(S1:17)
사왓티양
Sāvatthiyaṃ.~~ (생략)
데와따(Devatā)
천신
1. 둑까랑 꿋띠띡칸짜 아브얏떼나 히 사만냥.
Dukkaraṃ kuttitikkhañca abyattena hi samaññaṃ.
바후 띠 땃타 삼바다 얏타 바로 위시다띠띠.
Bahū ti tattha sambādhā yattha bālo vīsidatīti.
까띠항 짜레이야 사만냐 찟땅 쩨 나 니와라예
Katihaṃ careyya sāmañña cittaṃ ce na nivāraye
빠데 빠데 위시데이야 상깝빠낭 와사누고
Pade pade visideyya saṅkappānaṃ vasānugo
1. 능숙하지 못한 자에게 출가생활이란
실천하기 어렵고 견디기 어려우니
거기에 많은 압박이 있어서
새로운 자는 낙심합니다.
만약 마음을 단속하지 못하면 얼마나 많은 날 동안
수행자의 생활을 할 수 있겠습니까?
사유의 지배를 받아 헤매면
발걸음 걸음마다 낙심할 것입니다
바가와(bhagava)
세존
2. 꿈모와 앙가니 사께 까빠레 사모다항 빅쿠 마노위딱께
Kummova aṅgāni sake kapāle samodahaṃ bhikkhu manovitakke
아닛시또 안냐마헤타야노 빠리닙부또 나 우빠와데이야 깐찌띠
Anissito aññamaheṭhayāno parinibbuto na upavadeyya kañcīti.
2. 거북이가 자신의 등가죽 속으로 신체를 집어넣듯이
비구는 정신의 사유를 거두어들여
다른 것에 의지하지 않고 남을 해치지 않으며
완전한 열반을 얻으면 누구도 비난하지 않는다,
이 경의 제목 둑까라(Dukkara)는 ‘행하기 어려운’, ‘실천하기 어려운’이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행하기 어려운 것이 바로 몸과 마음을 계발하는 수행입니다. 그러나 이 경의 또 다른 제목은 꿈모(Kummo)라고도 합니다. 꿈모(Kummo)는 ‘거북이’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질문한 천신도 스님들의 출가 생활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래서 힘이 있는 천신들은 좋은 법문을 들으려고 인간계에 내려오기도 합니다.
게송 첫 문장에 ‘둑까랑 꿋띠띡칸짜(Dukkaraṃ kuttitikkhañca)’에서 둑까랑(Dukkaraṃ)은 ‘행하기 어렵고’, ‘실천하기 어렵고’입니다. 꿋띠띡칸짜(kuttitikkhañca)는 ‘견디기 어려운’입니다. 다음에 ‘아브얏떼나 히 사만냥(abyattena hi samaññaṃ)에서 아브얏따(abyatta)는 ‘명료하지 못한’, ‘어리석은’, ‘능숙하지 못한’, ‘서툰’입니다. 히(hi)는 ‘왜냐하면’, ‘정말로’, ‘확실히’라는 뜻입니다. 사만냥(samaññaṃ)은 원래 사문(沙門)이라는 뜻의 사마나(Samaṇa)인데 여기서는 ‘사문의 삶’, ‘사문의 생활’입니다. 사문은 인도에서 비구를 포함한 모든 종교의 수행자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그래서 첫 문장인 ‘둑까랑 꿋띠띡칸짜 아브얏떼나 히 사만냥(Dukkaraṃ kuttitikkhañca abyattena hi samaññaṃ)’은 ‘능숙하지 못한 자에게 출가생활이란 실천하기 어렵고 견디기 어려우니’라는 뜻입니다.
아브얏따(abyatta)는 명료하지 못하고, 어리석음이라는 뜻이지만 누구나 수행을 시작하면 처음에는 반드시 초보과정을 거쳐야 해서 능숙하지 못한 자를 말합니다. 더욱이 당시 인도에서는 고행이 유행을 하던 시기라서 모든 수행자가 목숨을 걸고 수행을 했습니다. 다음에 사만냥(samaññaṃ)은 사문의 삶이지만 모든 수행자를 일컫는 말이라서 출가생활이라고 했습니다.
사마나(Samaṇa)라는 뜻의 사문은 하루든 20년이든 이를 악물면서 하루에 한 끼만 먹으면서 본인이 계속 목숨 다할 때까지 출가생활을 합니다. 이렇게 고행을 하는 그 과정을 바보라거나, 안 좋은 것이라거나, 극단적인 것이라고 할 수도 있는데 부처님께서는 그런 상황에 대해서 뭐라고 말한 적은 없다고 주석서에서는 밝히고 있습니다. 부처님 자신이 고행을 했지만 마지막에 고행을 버리고 위빠사나 수행으로 깨달음을 얻으셨습니다. 그러나 당시 인도의 많은 수행자들이 고행을 하고 있는 현실에서 이것을 정면으로 비난하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다만 출세간이 길이 팔정도며 사념처 위빠사나 수행이라고 말씀하셨을 뿐입니다.
다음 문장은 ‘바후 띠 땃타 삼바다 얏타 바로 위시다띠띠(Bahū ti tattha sambādhā yattha bālo vīsidatīti)’입니다. 바후(Bahū)는 ‘많은’, ‘큰’, ‘풍부한’이고, 땃타(tattha)는 ‘거기에’이고, 삼바다(sambādhā)는 ‘압박’, ‘결박’, ‘올가미’, ‘번잡’입니다. 얏타(yattha)는 ‘~인 한곳에’, ‘~인 한 때에’이고, 바로(bālo)는 ‘무지한’, ‘어리석은’, ‘어린’, ‘새로운’, ‘어리석은 자’입니다. 마지막으로 위시다띠(vīsidatī)는 ‘가라앉다’, ‘낙심하다’입니다.
그래서 천신의 말을 정리하면 ‘능숙하지 못한 자에게 출가생활이란 실천하기 어렵고 견디기 어려우니 거기에 많은 압박이 있어서 새로운 자는 낙심합니다.’입니다.
아브얏따(abyatta)는 처음에 수행을 시작하면 초보자이기 때문에 모든 것이 서툴러서 수행이 능숙하지 못합니다. 이때 어리석다고 하기 보다는 수행이 능숙하지 못한 것을 말합니다. 삼바다(sambādhā)는 수행을 시작하면 여러 가지 장애가 나타나는데 이때 장애가 주는 것이 압박입니다. 수행자에게 압박과 속박을 주는 것이 장애입니다. 바로(bālo)는 무지하고 어리석음을 뜻하지만 수행을 처음 시작하기 때문에 새로운 자입니다. 위시다띠(vīsidatī)는 가라앉는다, 라는 뜻이지만 수행을 시작해서 장애가 생기면 낙심한다는 뜻입니다.
다음에 ‘까띠항 짜레이야 사만냐 찟땅 쩨 나 니와라예(Katihaṃ careyya sāmañña cittaṃ ce na nivāraye)입니다. 까띠항(Katihaṃ)은 ’얼마나 많은 날 동안‘이고, 짜레이야(careyya)는 ‘가다‘, ‘걷다’, ‘행하다’ 이고, 사만냐(sāmañña)는 ‘수행자의 지위’, ‘사문의 지위’, ‘수행자의 삶’입니다. 찟땅(cittaṃ)은 ‘마음’이고, 쩨(ce)는 ‘만약’, ‘만일’, ‘혹시’입니다. 나(na)는 ‘부정’이고, 니와라예(nivāraye)는 ‘보호하다’, ‘방어하다’, ‘막다’입니다. 그래서 ‘만약 마음을 단속하지 못하면 얼마나 많은 날 동안 수행자의 생활을 할 수 있겠습니까?’입니다.
다음은 ‘빠데 빠데 위시데이야 상깝빠낭 와사누고(Pade pade visideyya saṅkappānaṃ vasānugo)입니다. 빠데(pade)는 ‘발’, ‘발걸음’입니다. 위시데이야(visideyya)는 ‘가라앉다’, ‘낙심하다’입니다. 상깝빠낭(saṅkappānaṃ)은 ‘사유’, ‘의도’, ‘관념’, ‘감정’입니다. 와사(vasā)는 ‘지배’, ‘정복’입니다. 그래서 ‘사유의 지배를 받아 헤매면 발걸음 걸음마다 낙심할 것입니다.’입니다.
두 문장을 종합하면 ‘만약 마음을 단속하지 못하면 얼마나 많은 날 동안 수행자의 생활을 할 수 있겠습니까? 사유의 지배를 받아 헤매면 발걸음 걸음마다 낙심할 것입니다.’입니다.
만약 마음을 단속하지 못하면, 이라고 했을 때의 단속은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서 마음을 길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수행자는 자신의 마음을 자신이 단속해서 길들여야 합니다. 이렇게 길들이는 것이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만약 마음을 단속하지 못하면 얼마나 많은 날 동안 수행자의 생활을 할 수 있겠습니까? 라는 내용은 부처님말씀을 제대로 실천하지 못한다면 제대로 된 바른 출가자가 못 된다는 뜻입니다.
빠데 빠데(pade pade)는 이리저리 걸을 때의 매 걸음, 걸음인데 이때의 걸음이 알아차릴 대상을 뜻합니다. 각주에도 나오는데 대상마다(arammana arammane)라는 뜻입니다. 여기서는 대상이 걸음으로 표현되었습니다. 어떤 대상이든지 거기서 오염원이 생기면 어리석은 자는 그곳에서 낙심해서 수행을 포기한다는 말입니다. 대상마다 마음이 집중이 안 되고 이리저리 헤매면 결국 수행을 그만 둡니다. 그래서 걸을 때 걸음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망상이 들어와서 수행을 계속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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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깝바낭(saṅkappānaṃ)은 사유, 생각이지만 오온에 대한 즐거움입니다. 이런 사유는 매우 오래 동안 잠재된 생각인데 이때 마음이 감각적 쾌락이라는 대상을 갖는 생각을 말합니다. 마음이 사유의 지배를 받으면 망상을 하느라 발걸음을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수행자는 무엇이나 할 때 하는 것을 알아차리면 생각이 끊어집니다. 그래서 수행은 생각 끊기입니다. 이러한 생각 속에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라는 번뇌가 있습니다.
천신의 이러한 게송에 부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답변하셨습니다.
‘꿈모와 앙가니 사께 까빠레 사모다항 빅쿠 마노위딱께
Kummova aṅgāni sake kapāle samodahaṃ bhikkhu manovitakke’
꿈마(Kumma)는 ‘거북이’입니다. 앙가(aṅgā)는 ‘사지’, ‘몸’, ‘신체’이고, 까빨레(kapāle)는 ‘거북이 등가죽’입니다. 사모다항(samodahaṃ)은 ‘함께 두기’이고, 마노위딱께(manovitakke)는 ‘정신의 사려’, ‘정신의 사유’입니다. 여기서 마노(mano)는 ‘정신’이고, 위딱까(vitakka)는 ‘겨냥’, ‘사유’라는 뜻으로 1선정에서 대상을 겨냥하는 것을 말합니다.
부처님께서 어떻게 감정을 다스렸는지 직접 설명하신 내용이 중요합니다. 여기서는 거북이를 비유해서 재미있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마노위딱께(Manovitakke)는 마음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논리적인 생각들을 말합니다. 논리적으로 봐야 하는데 어떻게 논리적으로 보는가를 예를 들었습니다. 거북이가 제일 싫어하는 동물이 여우라고 합니다. 여우를 무서워하고 싫어해서 여우를 보면 머리와 다리가 쏙 들어갑니다. 다른 동물과 달리 여우는 한 번에 그치지 않고 계속 괴롭혀서 거북이는 목을 계속해서 등가죽 안에 넣고 있어야 합니다. 길게는 하루도 간다고 합니다. 그래도 여우는 계속 떠나지 않고 거북이 주위를 맴돌면서 괴롭히고 먹을 기회를 살핀다고 합니다.
여기서 거북이는 비구이고 여우는 죽음이라는 뜻의 마라(mara)입니다. 비구는 마음에 일어난 사유를 안으로 거두어 들여야 합니다. 이것을 잘 알아차려서 나는 언젠가는 죽는 것이고 그래서 이런 감정에 매달릴 필요가 없다고 이해하면 되겠습니다. 이 문장은 ‘거북이가 자신의 등가죽 속으로 신체를 집어넣듯이 비구는 정신의 사유를 거두어들여야 한다’입니다.
그래서 수행자는 자기 마음에서 일어난 사유를 자신의 등가죽 안에 모두 거두어들이면 마음에서 일어난 생각들인 마라(mara)에게 기회를 주지 않아야 그가 나를 정복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오히려 내가 마라(mara)를 정복할 수 있습니다. 힌두교에서는 죽음의 신이 있는 것으로 믿기 때문에 단순한 죽음도 의인화해서 죽음을 관장하는 존재가 있는 것처럼 법문을 합니다.
다음 게송의 문장은 이와 같습니다.
‘아닛시또 안냐마헤타야노 빠리닙부또 나 우빠와데이야 깐찌띠
Anissito aññamaheṭhayāno parinibbuto na upavadeyya kañcīti.’
아닛시또(Anissito)는 ‘의지하지 않는다’입니다. 이때 갈애와 사견을 집착하지 않거나 의지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갈애와 사견을 줄여서 다른 것이라 하면 ‘다른 것에 의지하지 않는다’입니다. 안냐마헤타야노(aññamaheṭhayāno)는 ‘남을 해치지 않으며’이고, 빠리닙부또(parinibbuto)는 ‘완전한 열반’, ‘반열반’이고, 나 우빠데이야 깐찌띠(na upavadeyya kañcīti)는 ‘누구도 비난하지 않는다’입니다. 그래서 ‘다른 것에 의지하지 않고 남을 해치지 않으며
완전한 열반을 얻어 누구도 비난하지 않는다.’입니다.
아닛시또(Anissito)는 갈애와 잘못된 견해에 의지해서 지내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갈애과 사견이 나의 견해와 섞이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는 모든 갈애과 사견을 집착하면 계속해서 윤회를 하기 때문에 핵심적인 내용입니다. 갈애와 사견에 의지하지 않으면 완전한 열반에 이르러 번뇌의 오염원이 완전하게 소멸합니다. 여기서의 아닛시또(Anissito)는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의 단계까지 가는 제자들의 이익을 위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다른 것에 의지하지 않고 남을 해치지 않으며 완전한 열반을 얻으면 누구도 비난하지 않는다. 라고 했습니다.
계율을 지키면서 남을 괴롭히는 사람이 많습니다. 부처님도 이런 것을 많이 보시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내가 완전한 열반을 얻었다고 착각하면서 남이 열등한 것처럼 비난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가끔 나는 아라한이고 저 사람은 아라한이 아니다, 라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진짜 아라한을 얻은 분은 남을 괴롭히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에게 관심을 가져 달라고 하면서 남을 해치는 것입니다. 계율을 지키면서도 내가 잘났다고 남에게 보여주려고 지키기도 합니다.
이런 것을 부처님은 거북이가 자기 등가죽 속에 머리를 집어넣듯이 그만큼 조심하고 단속하면서 살아가라고 말한 것입니다. 도과를 성취해서 열반에 이르려면 반드시 무상, 고, 무아의 지혜가 나서 마음이 청정해져야 합니다. 그러면 이때 나라고 하는 자아가 소멸합니다. 그럼에도 내가 누구라고 말하는 것은 아직 자아가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내가 도과를 얻었다고 한다면 그는 나의 제자가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빠리닙부또(parinibbuto)는 완전한 열반을 말합니다. 이것을 반열반이라고도 합니다. 구도자가 자비스럽고 알아차림이 완벽해서 해탈의 자유를 얻은 분인 아라한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이러한 아라한의 성격과 성향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하루에 한 끼만 먹고 수행하는 사람을 비난하지는 않았습니다. 아픈데 약을 먹지 않거나 몸을 괴롭히는 것은 나무라셨지만 본인 의지로 한 끼만 먹고 수행하는 것은 비난하지 않았습니다.
닙부또(Nibbuto)와 닙바나(nibbana)의 단어에 대한 해석은 불이 다해서 소멸한 것을 말합니다. 초가 다해서 불이 사라진 것을 말하지만 적멸, 열반, 해탈, 평화 등 여러 가지 해석을 붙이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불이 꺼졌다는 것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번뇌가 소멸했다는 뜻입니다. 닙부또(nibbuto)라는 말만 있으면 몸이 있는 상태고, 빠리닙부또(Parinibbuto)는 몸과 마음이 전부 사라진 상태를 말합니다. 부처님은 그것을 종합해서 비구는 욕하지 않고 비난하지 않고 열반할 때는 빠리닙부또(Parinibbuto)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부처님 당시에는 비구가 되어야만 그런 마음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명상하는 수행자의 태도에 대한 이 게송이 매우 중요합니다.
천신의 질문과 부처님의 답변은 다음과 같습니다.
천신의 질문
‘능숙하지 못한 자에게 출가생활이란 실천하기 어렵고 견디기 어려우니
거기에 많은 압박이 있어서 새로운 자는 낙심합니다.
만약 마음을 단속하지 못하면 얼마나 많은 날 동안 수행자의 생활을 할 수 있겠습니까?
사유의 지배를 받아 헤매면 발걸음 걸음마다 낙심할 것입니다.’
부처님의 답변
‘거북이가 자신의 등가죽 속으로 신체를 집어넣듯이
비구는 정신의 사유를 거두어들여
다른 것에 의지하지 않고 남을 해치지 않으며
완전한 열반을 얻으면 누구도 비난하지 않는다.’
이상의 부처님의 가르침은 거북이처럼 자신의 정신적 사유를 거두어 들여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다른 감각적 욕망과 삿된 견해에 의지하지 않고 또 남을 해치지 않는 공덕을 쌓아 열반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도 비난하지 않는 청정한 삶을 살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수행의 장애를 극복하여 원하는 만큼 오래 수행을 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설명하셔서 천신이 수행을 계속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해소하도록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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