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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니 회고록
그 때 그 7년
(1961년~1968년 평택중앙 초등학교 교사 시절)
박 승 일
一 유혹 1.
평택과 안성 사이
안성천
그 근처 집에서
자전거 타고
출근하던
키 작고 눈 커다란
김 문환 선생
“내 상답
30마지기에서
10마지기
뚝 떼서 줄게
내 딸과...
그거면
다섯 식구
쌀 걱정 안해도 될꺼요.“
“저 아직
결혼 생각 전혀 없어요.“
二 유혹 2.
미군부대 다니는
용 윤화 아버지
“영화배우 최 은히 똑 닮은
윤화 고모
내 막내 여동생....“
“종교는?”
“박 태선 전도관.”
“아, 그래요?
그럼 안되겠네요.“
일언지하 거절
三 유혹 3.
옆 반
변 남지 선생 반
옥 시은 이복 누나
통복교 건너
<옥내과> 원장의
전처 딸
해군 군의관 중령 출신
내과 병원 원장
원장의 후처
변 남지 선생에게
청 넣어
전처 딸과 나
엮어 보려 애썼지
평택 성결교회 권사
예쁘지만
너무 우울한 그의 전처 딸
부담스러워 사양
四 유혹 4.
평택 의료원 원장 맏딸
평택중앙감리교회
성가대 피아노 반주자
곱추
담임 이 충렬 목사가
적극 중매
원장이
자기 재산
3분지 1 뚝 떼서 준다니
좋지 않냐고....
그 속셈은
자기 아들
해병대 출신이 좋아하는
성동초등학교
미녀 교사 윤 봉이 나 좋아해서
그 거 방해할 흑심
“그 재산 탐나면
당신 아들 후택 씨
거기 사위로 내 주시구랴.“
五 유혹 5
문맹퇴치 운동
내 담당은
동삭 3리
방과후
자전거 타고 가
할아버지, 할머니
아저씨 아주머니
까막눈
한글 깨우치기
제법 재미있게 가르쳐
성적이 우수
공부 끝나면
옥수수, 참외, 감자, 고구마
철따라 성의껏 대접
보은의 표시로
자전거 뒤 짐칸에 바리 바리
실어 주고
3리 이장이
그 동네 제일 부자
삼계탕 종종
그 이장 외아들
약골 윤 은수군, 1학년 내 반
고모가
안고 없고 걸려
등하교 시켰지
집에서 학교까지 4km 남짓
문맹퇴치 교육시키고
밤 11시
집으로 오는 길
불쑥 나타나
사랑 고백한
윤 은수 군의 고모
“오빠가 내 몫의 논
10마지기 떼 준다고 했어요.“
“미안해요.
나 장가 갈 생각
전혀 없어요.
이러지 말고
어서 집에 돌아 가요.
나
통행금지 되기 전에
어서 집에 가야 해요.“
“선생님, 제발요.
날마다 꿈에....“
자전거 페달
힘껏 밟고 줄행랑
얼마 후
자살한
은수 군 고모
六 유혹 6
어쩜
그리 많았지?
참 많았지
그 당시
평택엔
쪼랑말
마부들
즐겨 쉬어가는 집
동료직원 소개로
정한 하숙집이 하필....
평택의료원 직원
김 xx씨와 한 방을
같이 쓰게 되었지
지금 식으로 말하면
경리직원 겸 간호조무사인 그 김씨
하숙집 아주머니의 맏딸
여고 2학년
마부들
조랑말에 달구지 매어
다 일 나가고
김 xx씨
아직 퇴근 이전
집안이 고요 적적할 때
고양이 발걸음
소리 없이
방문 열고 들어와
“선생님, 문학 좋아하시나봐요.
나, 문학소년데....“
작은 여우
“나가!
네가 왜 이 방에?“
맹랑한 소녀
더 이상한 건
하숙집 주인아주머니
그 아이 시켜
식혜, 수박...을 대령
그것도
꼭 나 혼자 방에서 책 읽을 때만
(아이고 이러다
큰 일 나겠다.)
학교 숙직실로 이사해 버렸지.
무서운 여고 2학년
七 유혹 7
<새한신문>
<새교실>
<교육자료>
교육지에 동시, 동화, 연구물 발표
일반잡시
<가정생활>
<부민농업>
등에 동시, 소설 발표
반공 어린이 잡지 <어린이 자유>에 동화 연재
1963면 <소년>지에 이 석현 님 추천으로 동시 <어떤 눈의 속삭임>으로 문단 등단 후 왕성한 작품활동
전락북도 정읍 이평국민학교의 장 순자교사가 내 작품들 읽고 펜레터 보내 오다 본명 대신 장 순아 라는 필명 애용한다고
취미는 붓글씨, 독서
펜 글씨도 정자로 깔끔하였다
꽤 긴 기간 편지, 엽서로 교우
저 쪽에서 먼저 결혼 이야기 꺼냈다. 자기네 식구는 홀어머니와 오빠, 자기 이렇게 세 식구란다.
어머니도 서울 큰어머니(내 큰아버지 소설가 만우 박 영준 연세대 국문과 학과장의 아내)도 그 쪽 여자라 꺼려하셨다. 특히 고향이 경북 상주인 큰어머니는
“그 애와 결혼하려면 우리집관 인연끊자!”
고 엄포.
그녀의 오빠 직업이 경찰관이란다. 할아버지가 왜경에게 붙들려 평양감옥에서 순교, 아버지도 왜경에게 수시로 주재소에 끌려가 고문 당해서....
물론 그녀의 오빠는 왜경이 아니고 대한민국의 민주경찰이지만 이상하게 마음이 개운치 못했다. 100% 나의 선입관이겠지만-.
군에 갔다 온 몇몇 동료직원들 말에 의하면 그쪽 사람들 표리가 부동하고 속이기 잘하고... 좋지 않은 평들을 많이 해서 찜찜.
고민하다 절연장 발송
눈물에 얼룩진 그녀의 편지로 그녀의 펜레터는 종언을 고하고
사진 한 장 안 보내온 그녀
八 유혹 8
꿩 사육장 운영하는 아버지를 둔 동료 양 지순 선생.
“선생님, 우리 꿩사육장 구경 안가실래요?”
“양계장이 아니고 꿩사육장요? 그런것도 있어요?”
“그럼요.”
“좋아요. 구경시켜 주세요.”
꿩사육장 앞
“아니, 저게 뭐요?”
“아, 그게요? 안경, 아니 하늘 못 보게 가림안경 씌운 거예요.”
“왜 그런 거 씌워요?”
“저거 안 씌우면 자꾸 날아서 도망치려고 해서요.”
“저거 씌우면?”
“하늘을 못 보고 땅에 있는 모이만 주어 먹고 살이 찌거든요.”
“아, 꿩을 돼지되게 하는 방법?”
“말하자면 그런 셈이지요.”
(아, 그거 별로구나 꿩은 꿩되게 해줘야지.)
다시는 꿩사육장 구경 가지 않았다.
양 순옥 선생과도 자연히 서서히 멀어지고.
양 선생의 부친의 사업, 그게 양 선생의 잘못이 아니다. 오히려 그로써는 사업상 수익창출을 위해 불가피한 수단이었을 수 있다.
그러나 왠지, 좀....
미안하지만, 마음씨는 고운 듯 하나 솔직히 말해서 외양이 좀 거시기하기도 해서.
九 유혹 9
새로 부임해 온 이 청자 교사
가냘픈 몸매
창백한 얼굴
병색이 완연
알고 보니 폐결핵 환자
많이 회복되었다고는 하나 께림칙
그녀의 성품, 손재주 자랑하며 추천하는 연세 많은 그녀의 친척 되는 할머니 교사
전염병
전염될까 걱정
(아무리 마음씨가 착해도...)
十 유혹 10
<평택중앙제과> 한 정희 사장네 첫째 아들 재군, 둘째 아들 재은의 입주 가정교사
학교 숙직실에서 한 사장 집에 입주
그 집 여자 종업원의 과잉 친절
빨래, 심부름 자원해서-
한 정희 사장의 아내(재군, 재은이의 어머니)의 수상히 여기는 시선
(여기도 오래 있을 곳이 못 되는구나.)
“선생님, 가지 마세요.”
재군이 재은이가 울면서 매달렸으나 나와 버렸다.
十一 유혹 11
“요새 <백장미 다방>에 대단한 미녀가 서울서 새로 왔다는데 가 보지 않겠어?”
K교사의 말
“다방엔 뭐하러 가?”
“같이 가 보자. 찻값은 내가 낼게.”
“싫어. 그 시간에 집에 가서 책을 읽겠어.”
“책 좋아하는 거 잘 알겠는데 종종 이런 재미도 보아야 인생 맛을 알지.”
“혼자 가서 그 인생 맛 실컷 보고 오셔.”
“그러지 말고 같이 가자고.”
“싫대도.”
“오다가 저녁까지 사 줄게.”
하며 마구 손을 잡고 이끈다.
과연 눈에 번쩍 띄게 예쁜 아가씨.
흰 피부 여자 키로는 조금 큰 키.
모나리자 닮았다.
양쪽 보조개가 귀엾다.
나이는 24살
“인 친구, 문학가요. 이런 시골에서 썩기 아까운 청년이오.”
K교사의 쓸데없는 소리
“어머, 그래요? 나도 문학소녀인데 다음에 오시면 제가 쓴 시 좀 봐달라고 해야 겠는데요?”
“이 친구 쓸데없는 소리 한거예요.”
“다음 월요일 꼭 오세요. 제가 쓴 습작 시 몇 편 보여 드리게, 가르쳐 주셔요. 수강료 낼께요.”
3번째 만났을 때 그녀가 한 자기 가정사.
아버지 사업 부도나서 가족들 제각기 제 밥벌이하러 뿔뿔이 흩어졌고, 자기도 이리 저리 굴러 여기까지 왔다고.
그녀의 시들은 한 마디로 신세한탄.
자기 시를 읽어 주며 눈가엔 늘 이슬이....
그 뒤
“선생님, 저같은 여잔 영 눈에 차지 않겠지요?”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아무 것도 아녜요.”
그 뒤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진 그녀 그녀가 남겼다며 다른 아가씨가 내게 전해 준 쪽지
<이룰 수 없는 사랑, 더 깊어지기 전에 떠나 갑니다. 짧았지만 정말 기뻤어요. 안녕히. 김 영희 올림. 행복하세요.>
十二 유혹 12
술집 <쌍과부집>
주인 아주머니와 그의 맏딸이 모두 과부. 이 모녀가 영업하는 집이라서 <쌍과부집>이라 부른단다.
이 주인 아주머니의 막내 딸 이 영미가 내가 담임한 아이. 1학년
이 아주머니에겐 딸이 셋인데 성이 다 각각이다.
이 영미의 손위 언니는 24살, 여중 국어교사, 장 미순.
어머니와 동업으로 술집을 운영하는 큰 딸은 오 순미, 34살.
영미 어머니의 세 딸의 성이 각각인 이유가 재미있다(?)
첫째 딸의 아버지는 돈이 많은 남자여서-
둘째 딸의 아버지는 꽤 높은 공직에 있는 남자여서-
셋째 딸 영미의 아버지는 자기보다 거의 20년 연하의 총각인데 워낙 잘생긴 미남이어서-
그래서인지 영미는 계란형의 미녀상. 등하교를 큰 언니가 업어서 했다. 특히 비가 오거나 눈이 오거나 바람이 많이 불 때는-
“엄마, 이거 우리 선생님한테 갖다 드릴래.”
“아, 이거 맛있다. 우리 선생님 잡숫게 해야지.”
“엄마, 저 넥타이 사 줘 우리 선생님한테 갖다 드리게.”
“아니 얜 뭐든지 좋은 건 자기 선생님한테 갖다 드리겠다네? 영미야, 선생님이 네 애인이라도 되니?”
“응, 나 커서 선생님에게 시집 갈거야.”
“어머머, 쟤 큰일 날 소리하네.”
둘째 언니의 비명
영미는 예쁘고 귀엽지만 너무 어리고... 그리고 술집 딸이니 끝!
□ 엣세이
나에게 평론이란 무엇인가?
김 철 교
평론은 일반 독자나 관객보다 조금은 더 깊은 시선으로 예술작품을 마주한 결과물이다. 문학의 경우, 제반 문학이론을 포용하여, ‘문학이란 무엇인가?’, ‘문학의 목적과 가치는 무엇인가?’로 부터, ‘작품은 어떻게 생산되는가?’, ‘작품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작품의 구조 및 내용은 어떤가?’등의 문제의식을 가지고 작품을 대하게 된다.
모든 예술작품은 예술가의 제작의도와 일치하여 생산되는 것은 아니다. 또한 수용자도 작품 앞에서, 생산자와는 다른, 수용자 자신의 무의식의 영향을 받으며 마주하기 마련이다. 문학작품 읽기는 크게 결을 따라 읽는 방법과 결을 거슬러 읽는 방법이 있다. ‘결을 따라 읽는 것’은 저자가 보여 주려한 부분을 발견하려는 것이고, ‘결을 거슬러 읽는 것’은 저자가 의도하지 않았고 인지하지도 못한 부분을 발견하려는 것이다. 수용자는 저자가 의도하는 내용을 항상 알 수는 없으며, 설령 저자가 자신의 의도를 밝힌다 할지라도 문학작품은 그 의도에 부응하지 못하고 엉뚱한 방향으로 전개될 수 있다. 따라서 예술작품을 생산하는 것도, 감상하는 것도 어떤 왕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생산자와 수용자의 무의식, 의식, 환경 등 복합적인 요인에 휘둘리기 마련이다.
필자도 예술작품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나름대로 정리해 보고자 한다. 한마디로 역사비평과 신비평의 시각은 물론 정신분석비평을 뭉뚱그린 융·복합 시각으로 작품을 읽겠다는 것이다. 필자가 비평에 대한 시각을 넓히는 데는 로이스 타이슨의 『비평이론의 모든 것(Critical Theory Today)』이 큰 도움을 주었다. 내가 영문학에 심취한 학부시절에 금과옥조였던 르네 웰렉과 오스틴 워렌 공저인 『문학 이론(Theory of Literature)』에게도 어느 정도 빚을 지고 있다.
19세기와 20세기 초반까지 지배적인 문학연구방법론이었던 전통적 역사주의 비평은, 저자가 작품을 집필하게 된 의도를 찾아내거나, 작품이 구현하고 있는 시대정신을 드러내는 데 주력했다. 역사주의에서 주도권을 넘겨받아 194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문학연구흐름을 주도했던 신비평은 텍스트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는 저자의 전기나 역사와 관련된 어떤 것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위대한 문학작품이란 ‘시간을 초월한 역사 바깥의 영역에 존재하는 자율적(자기충족적) 예술작품’이기 때문이다. 정신분석비평에서는 텍스트가 어떻게 등장인물 혹은 저자의 심리적 욕구나 갈등에 대한 재현으로 구체화되는가에 대한 답변을 찾는 것이 중심이 된다. 저자나 독자 모두 인간의 무의식의 지배를 받지 않을 수 없다.
필자는 정신분석비평의 입장에 기대어, 작품은 예술가의 무의식과 의식이 함께 협력하여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본다. 작가의 이력도 힐끗 보지만 거기에 매몰되지 않고 거리를 두고 작품을 읽는다. 또한 제작 당시의 문화적 사회적 영향을 어느 정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다. 작품을 촘촘히 읽으면서, 모든 비평기법과 예술론에 대해 이해를 하고 있되, 역시 비평가의 무의식에 접선되어 오는 작품을 의식의 그물로 건져 올리는 것이 비평의 진면목이 아닐까 싶다.
평론가가 읽는 시점에, 어느 요소에 초점을 맞추느냐에 따라서도 그 결과는 다르기 마련이다. 문학비평은 문학의 요소 중 무엇을 중점적으로 보느냐에 따라 모방론, 현실론, 효용론, 형식론 등으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모방론의 입장에서는, 작품이 세계나 인생을 반영 또는 모사한다는 견지를 취하고 있고, 표현적 입장에서는 작품을 통해 작가가 무엇을 표현하고 있는가를 주목한다. 효용론적 비평은 작품이 독자들에게 주는 영향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형식론에서는 문학작품의 짜임새에 중점을 두고 있다.
문예사조도 얼마나 다양한가. 현세주의에서 출발한 인성중시의 헬레니즘과 신성을 중시한 내세주의를 표방한 헤브라이즘에서 출발한 문예사조도, 이성(고전주의, 주지주의)과 감성(낭만주의, 유미주의) 사이를 시계추처럼 오가도 있으며, 내적/정신적(상징주의, 초현실주의) 측면과 외적/형식적(사실주의, 자연주의, 행동주의) 측면 어디에 방점을 찍을 것이냐에 따라 다양한 견해가 도출되었다.
필자는 비평을 심미비평, 도덕적비평, 현실비평으로 구분하는 것도 의미있겠다고 본다. 심미비평은 예술지상주의의 입장에 서서, 작품의 아우라(‘흉내 낼 수 없는 고고한 예술적 분위기’)를 중요시하는 것이다. 도덕적 비평은 아포리즘(‘깊은 진리를 표현한 말이나 글’)을 중시하는 것이다. 현실비평은 참여문학과 관련이 있는데 작품의 현실적 목적에 집착하는 시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세상의 모든 것들이 그렇듯이, 분명한 경계선이 있는 것이 아니고 흐릿한 경계선, 즉 상호 겹치는 영역이 있게 마련이다. 더구나 예술은 이성적 측면, 감성적 측면, 영성적 측면이 조화롭게 작용하여 인간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인간의 수만큼 다양한 시각과 기법이 존재한다.
예술은 1 + 1 = 2가 아니기 때문에 무한대의 해석과 가치평가가 존재할 수 있어서 예술이 더욱 가치가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이 작품은 좋다 나쁘다의 평가를 내릴 수 없다. 오직 독자(일반 독자든 전문 독자든)들 간의 차이는 물론 시대적 환경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평론가의 글은 평론가 자신의 또 다른 읽기에 불과하며, 아무리 명문이라하더라도 그것이 완벽하게 그 작품을 이해한 것으로 볼 수 없다.
평론을 쓰는 사람들은, 남을 이해하기 위해서, 남의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 새롭고 깊은 이론과 넓은 시야를 갖추어야 한다. 작품 저 너머의 숨은 내면 혹은 의도까지 꿰뚫는 혜안이 필요하다. 편협되지 않는 중용의 자세를 갖추어야 한다. 작품을 만드는 사람은 혼신의 힘을 다해 만들 것이기에 남의 작품을 대하는데 경건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내가 평론을 쓸 때마다 다짐하고 노력하고 있는 키워드라 하겠다. 그러나 천학비재를 절감하고 있다.(*)
□ 수필
호미에 관한 소고
이 상 화
이제 경칩(驚蟄)이 지났으니 춘분도 머지않아 온다. 들에서 달래도 캐고 무릇도 캐며 냉이도 캐는 다시 말하면 호미를 사용하는 계절이 시작된다. 최근 모 일간지에 우리나라 농기구인 ‘호미’에 관한 기사가 실렸다. 그 내용은 요약하면 ‘강원도 원주 대장간에서 제작한 호미가 미국 아마존 대박’이란 기사이다. 우리나라에서 4,000원에 팔린다는데 미국에선 16,000원에서 20,000원에 팔린다고 하니 값으로 말하면 4~5배를 더 받는다는 말이다.
그곳에서 친환경적으로 화단을 가꾸는 등 용도가 다양하여 아주 유용하게 사용한다고 한다. 미국에 이민한 분 중에서 일시 귀국한 때 이 호미를 사 간다고 한다. 그것은 호미의 유용성을 알기 때문이다.
이 농기구인 ‘호미’는 순수한 우리말인데 미국에서도 우리 발음 그대로 homi(호미)라고 하며 일제 강점기에 일본에서도 이 호미를 가져다가 유용하게 사용했으며 일본에서도 ホミ(호미)라고 부른다.
호미의 모양새는 부등변삼각형(不等邊三角形)인 한쪽 모서리를 길게 늘여 구부려서 목을 만든 뒤에 그 끝에 나무로 만든 짤막한 자루를 박은 독특한 형태의 연장으로 다른 쪽 뾰쪽한 날로는 흙을 파고 등으로는 흙덩이를 툭툭 쳐서 깨기가 좋다.
이 호미는 주로 농촌에서 풀(잡초)을 매거나 작물을 옮겨 심을 때 사용하며 땅속에 묻혀있는 마늘, 양파, 감자나 고구마 등 구근류(球根類)를 캐낼 때, 산이나 들에서 자라는 더덕이나 도라지를 캘 때, 바다의 모래밭에 묻혀있는 조개 등 패류(貝類)를 파낼 때 사용하고 땅속에 공기가 잘 통하라고 땅의 표면을 긁적긁적할 때도 사용한다.
문헌을 찾아보니 이 호미는 서유구(徐有榘, 1764∼1827)가 쓴 ‘임원경제지’(林園十六志)에서 동서(東鋤)라고 표현하였다. 즉, 東은 동쪽 나라란 뜻이고 鋤는 호미서 자이므로 호미란 뜻이며 중국에서 우리나라 호미를 그렇게 불렀다. 따라서 중국엔 우리나라에서 사용하는 호미가 그때 없었던 것으로 보아진다.
이 호미는 이미 통일신라시대 신라문무왕 14년에 만들어진 안압지(雁鴨池)의 출토유물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고려시대의 호미도 오늘날의 호미와 모양새가 같았다고 한다. 이처럼 호미가 통일신라시대부터 지금까지 옛 모양 그대로 사용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바로 호미의 유용성 때문이다.
지금 원주 대장간에서 만든 호미는 종류가 같으나 크기 면에서 다섯 가지로 구별하며 논과 밭에서 사용하는 호미는 그 자루에서 다름을 알 수 있다. 논에서 사용하는 호미의 손잡이에 흙이나 물이 묻었을 때 미끄럼을 방지하게 하려고 자루에 새끼를 감아 사용이며 밭에서 사용하는 호미는 나무로 만든 손잡이 그대로다.
사람이 사용하는 모든 물건은 그 기능에 따라서 모양새가 다르다. 그러나 호미는 예나 지금이나 그 모양새가 같다. 호미와는 규모나 모양새가 다른 것으로 흙을 파는 데 사용하는 연장이 있는데 그것은 다른 용도로 쓰는 연장이다. 예컨대 삽, 곡괭이, 쇠스랑, 가래 등이 그것이다. 이것들은 다 우리나라에서 사용하는 농기구인 연장이다.
그런데 호미와는 모양새가 전혀 다르고 작게 만들어진 연장으로 어린 모종을 옮기는 데 사용하는 모종삽이란 것이 있다. 외국에서는 꽃모종을 옮기는 데 사용하는 것으로 꽃삽(shovel)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것의 용도는 단순히 모종을 옮기는데 사용하는 것이지, 호미처럼 그 용도가 다양하지 않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나라 농촌에서도 광복 이후 볼 수 있었으나 꽃삽을 별로 사용하지 않는다.
호미가 우리나라 농촌의 각 가정에 없는 집이 없다. 지금은 농사일이 기계화되어 경작용 트랙터(tractor)를 이용하여 갈고 파종도 하고 이앙기(移秧機)를 이용하여 모내기하며 드론(drone)을 이용하여 농약을 살포하고 콤바인(combine)을 이용하여 쉽게 추수도 한다. 위에서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넓은 밭은 경작하는 데는 트랙터가 필요하다. 밭은 갈고 씨를 뿌리고 수확하는 일은 역시 기계를 사용하는 것이 좋고 일시에 많은 양의 일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아기자기하게 손품이 필요한 밭일에는 지금도 호미가 필요하다. 꽃을 가꿀 때, 채소를 가꿀 때, 봄 동산에서 산나물을 캘 때 ..... 등에 사용되며 이 호미는 주로 소규모로 밭농사를 지을 때 지금도 유용하게 사용하고 있다. 과거의 사용례를 보아서 논농사와 대규모의 밭농사를 제외하고 그 사용은 계속될 것이다. 그 밖에 고적지(古蹟地)에서 유물을 발굴할 때 전쟁터에서 유골을 발굴할 때 이 호미가 아주 유용하게 사용한다고 한다. 그리고 바라건대 이 호미가 아름다운 여인의 섬섬옥수(纖纖玉手)에 쥐어져서 우리의 정서를 맑게 해주는 아름다운 꽃밭을 가꾸는 연장으로 자주 사용되기 바란다.
□ 수필
통영
박 신 배
어디서부터 이 열대아의 바람이 한반도를 짓누르는가. 피서철이 한창인 시절이다. 말복이다 입추라고 달력은 말해주지만 더위를 삭히려는 심정에 계절의 시기를 우리는 더듬는다. 여행을 한다는 것은 인생의 과정에서 특별한 계기가 있어야 하는데 이번 통영행은 종교적인 여행이었다. 교회에서 남선교회 행사로서 서 너 명이 움직이는 여정이었다. 통영 봉평동 아파트에 숙소가 있는 지인이 있어서 떠날 수 있는 여행이었다. 시간과 재정과 여건이 맞아야 떠날 수 있는 여행인데 통영 방문은 이 셋이 맞아 떨어진 특이한 형태였다. 일요일 오후 다섯 명이 교회에서 출발한다. 어린 세 살 여아 수현이를 동반하고 떠나는 어린이집 봉고차였던 차량으로 움직였다. 대전-통영간 고속도로가 생겨서 청량리에서 목적지까지 다섯 시간 가량 소요가 되었다. 도착하니 저녁 9시 경이 되어 저녁 식사로 왕궁 식당에서 멍게 비빔밥을 먹고 야경이 멋있는 통영 바닷가 다리 밑에 벽화를 구경한다. 그 그림은 통영을 아는 일행이 설명하는 말에 의해 특별하게 느껴졌다. 등대로 다시 돌아와서 숙소로 들어가서 성경 디모데전서를 같이 읽고 잠자리로 든다.
서호 시장으로 가서 시락국을 먹으며 통영의 아침 풍경을 본다. 시락국이라고 불리는 이 지역 사투리는 시래기국을 말하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정감이 있고 아침 어시장은 활기찼다. 진교 식당 아줌마는 어린 공주가 왔다고 복돈도 주고 계란 후라이도 따로 챙겨서 준다. 우리는 베트남 엄마인 어린 아이 세 살 수현이와 같이 육십대 할아버지들이 통영의 거리를 거닐며 일정을 시작한다. 미륵산에 케이블카를 타러 간다. 식당 이용 영수증이 있으면 10%이 할인을 해준다 하여 옆에 있는 아줌마가 영수증을 빌려 주어서 비용 절감 여행을 한다. 개인당 회비 십 만원에 함께 하는 여행이다. 과연 네 명이 아름답고 행복한 여행을 잘 할 수 있을까.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는 한려수도 모습은 섬들이 오밀조밀 모여서 하롱베이 섬 지도를 만들어 놓았고 나폴리와 같은 남도의 정경을 보여주었다. 한산대첩 전망대에 올라 더운 날 불어주는 바닷바람은 시원한 피서를 느끼게 해주었다. 여행객들은 가족 단위로 올라와서 셔터를 누르면 행복 순간을 찍기에 여념이 없었다.
미래사 편백나무 숲길을 걷기로 하여 효봉 스님이 안거하였다는 절로 갔다. 판사가 되어 잘못된 재판으로 한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판결을 하였다고 후회하고 스님이 되었다는 것이다. 사찰은 아늑하고 편안한 쉼터로 마음을 가라앉게 하였고 시원한 약수는 지친 더위를 식혀주었다. 거북이 일곱 마리가 연못에 바위위에 앉아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고 우리는 오랫동안 우리의 공주가 약수물 곁에서 떠나지 않고 오래 머물러 있는 것을 채근하여 다른 곳 국제 식물원터로 옮겼다. 그러나 고김운초씨의 유지가 통영시가 받아들여 앞으로 개발한다는 뉴스를 보고 찾아갔지만 아직 시작 단계라 길도 열려지지 않아 패교가 된 초등학교에서 산 위쪽을 바라보고 돌아서야 했다. 그 후에 세병관(洗兵館)을 향하여 이동했다. 점심 식사를 해야 해서 세병관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걸어서 오복 미역 전문점으로 갔다. 우리는 가자미 미역국을 시켜 먹었다. 맛은 일품이었고 입소문을 나게 하는 전통있는 음식이었다. 여행의 즐거움은 먹거리에 있기에 통영의 맛 집을 아는 일행을 통해 쉽게 우리는 로드맵대로 따르고 있었다.
세병관은 삼도수군통제사영이 있던 옛날 해군 사령부였다. 동해, 서해, 남해의 중심지가 통영이며 통제영의 줄인 말로 바닷가의 중심 도시라는 것이다. 이곳에 중심은 느티나무로서, 천년된 나무기둥이었다. 그것은 세병관 50개 기둥 가운데 전면 맨 오른쪽 기둥이었다. 우리가 만난 해설사 김영국, 전명덕은 두 시간 가량 이순신, 세계 해전사, 충무, 통영, 박경리 등 우리의 질문에 막힘없는 답변을 하여 우리 모두를 감동하게 하였다. 제 에이 발라드가 세계 최고의 해군 장군은 이순신이라고 평했다고 전한다. 인격과 작전, 전술사 등에 있어서 넬슨을 제치고 최고라고 한다. 이순신이 3.6년간 제일 오래 머물었던 곳이, 통영이었다. 이순신의 한산 대첩과 명량해전, 노량해전 이야기, 이순신의 칼 크기와 케이블카 길이가 같은 수의 배수인 것을 말해주며 한산도 제승당이 원래 이순신의 삼도수군통제사영이 있던 자리였다는 것이다. 그 후에 세병관이 생겼다는 것이다. 이 세병관의 뜻이 '하늘의 은하수를 가져다 피 묻은 병장기를 닦아낸다.' 이 말은 거룩한 의미와 적극적 의미로 국난을 당하며 제일 앞장서서 피를 흘린다는 뜻을 가진다고 한다. 통영이 충무로 불리다가 주민투표로 옛날부터 부르던 통영이라는 지명을 되찾았다는 이야기도 듣는다. 육이오 전쟁 때 해병대가 상륙작전을 성공리에 수행하여 전쟁의 반전을 일으켜서 서울을 수복하고 전세를 뒤집게 된 곳이 통영이라는 것이다. 윤이상, 박경리, 유치환의 고향이 이곳이라는 것 등 이야기는 끝이 없다. 동피랑으로 옮겨 빙수를 먹으며 더위를 식히었다. 동피랑은 서피랑과 함께 페인트 그림으로 관광객을 끄는 관광 마음을 꾸며놓았다. 우리는 일정을 더 늘이려고 바뀌려 하다가 다시 일박 이일의 짧은 일정으로 저녁 성게 비빔밥을 먹고 상경하기로 하였다.
한산도의 제승당 방문이나 한산대첩 기념 축제는 다음으로 넘기고 서울에서 온 식당 섬기는 아줌마로부터 일갈, 모두 목사님 같다는 말을 들으며 그 손주가 노아라는 이름이라는 말이 귓전에 울렸다. 이제 짧지만 짧지 않은 여행을 마치며 서울 행을 서둘렀다. 36시간의 여행이라 한다. 통영에서의 시간과 광경, 음식과 해설사 이야기, 생각들이 결국 다시 통영을 찾게 하리라. 한 번 통영에 오기는 쉽지 않지만 통영에 오게 되면 다시 오지 않을 수 없다는 말이 새록 마음에 남는다.
□ 수필
검정 삥아리(병아리)
이 유
50대 중반인 나는 초등학교 2학년 때, 영광군 염산북교로 전학 갔다.
“시골 애들은 착해서 널 공주처럼 대해줄 거야~~”
설렘 반, 기대 반의 전학 첫날
턱수염이 많은 담임선생님은
“아따~~ 에리고(어리다)만~~니가 이수니냐? 서울서 여그까지 오니라고 고생 많았다잉~”
쉬는 시간이 되자 급우들은 나를 동물원 원숭이 보듯 했다.
키 큰 반장이
“야, 삥아리~. 서울 야그 좀 해봐라잉~”
“얘, 난 삥아리가 아니라 이순이야.”
공주가 돼야 해서, 서울말로 야무지게 따졌다.
착한 반장은 싱글싱글
“아쭈~~ 쬐깐한 삥아리가 똘똘허다잉~”
“얘, 난 삥아리가 아니라 이순이야. 반장이 말도 못 알아듣니?”
“허 흐흐 허 흐흐흐~~~”
난 공주답게 굴어야 했다.
“얘, 반장이면 남의 이름을 바꿔도 되는 거니? 난 삥아리가 아니고 이순이라고!!”
“알았다~ 알았어~ 삥아리야, 아따~ 귀엽다잉~”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얘, 남의 머리는 왜 만지는 거니?”
난 양 갈래로 묶어 리본을 단, 캔디머리를 헝클어버리고, 태권도 자세를 취하며
(오빠들이 다니던 학원에 몇 번 따라가서 본 게 전부)
“얍! 얍! 사과 해!”
기합을 넣고 당당하게 말했다.
반장은 더 싱글싱글
“얍! 얍”
짧은 내 팔과 두 다리는 허공만 찔렀다.
반장은 어이없다는 듯
“아따 쬐깐한 것이 똘똘 허니 귀엽다이?~”
내 머리를 또 쓰다듬었다.
나는 반장이 나를 얕잡아보는 거라 판단했다.
다음 날 반장에게 도전했다.
“반장, 나 따라와, 안 따라오면 바보다.”
귀염만 받고 자란 난 무서운 걸 몰랐다.
화장실 뒤에서 반장에게
“덤벼! 얍, 얍,”
정신을 차리고 보니 반장이 날 깔고 앉아 있었다.
내가 항복하지 않으면 반장은 날 풀어주지 않을 거라는 걸 느끼자,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마음 약한 반장은 놀라 도망갔다.
난 부모님께 다시 서울로 가자고 온갖 때를 썼다.
그러나 소용없는 일, 시골에서 살아남아야 했다.
난 커다란 무쇠 가위를 들고, 양 갈래로 묶어 리본을 단 캔디머리를 댕강 댕강 짧게 잘랐다. 그리고 공주원피스와 빨간 구두 대신, 검정바지와 검정고무신을 신고, 등교했다.
서울에서 전학 온 공주는 없고, 검정 삥아리(병아리) 한 마리 있었다.
그 후 사십년이 지났다.
얼마 전 초등학교 동창회에 참석했다.
친구들은 아직도 나를 삥아리(병아리)라 불렀다.
그 때는 정말 듣기 싫었던 별명이 눈물이 날 정도로 고맙게 들렸다.
다만 달라진 게 있다면 동창 몇 명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다.
그리고 친한 친구 몇 명을 빼고는 명찰이 없으면 그 시절 이름을 서로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초등시절 내 별명을 부르면서 수줍어하던 친구들이 금새 그립다.
□ 수필
후회(2)
권 희 일
‘도전 꿈의 무대’ 프로가 나의 시선을 끄는 요즈음이다.
이 프로는 이미 가수가 된 사람들인데, 이 무대에서 자신들의 노래 실력을 다시 한 번 인정받기 위해 나온 가수들이다. 출연 인원은 5명으로 제한돼있고 자기소개와 노래를 부르게 되어 있는데, 출연자 5명중 5회 연속 1등을 한 가수에게 상금이 수여된다.
여기에서 실력을 인정받은 가수들은 누구보다 열정과 자신감을 가지고 활발한 가수 활동을 하리라고 본다. 자기 소개하는 대목을 보고 있노라면 하나같이 가슴 아픈 사연들로 채워져 있다. 사업하다 부도로 인하여 많은 빚 때문에 극단적인 선택을 하려고 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몸에 암이 생겨 수차례 수술을 견뎌내며 투병생활 중에도 노래의 끈을 놓지 않고 매달린 의지가 강한 가수도 있었고, 또 남자가수 한 분은 교통사고로 다리 한쪽을 잃어 의족을 한 이도 있었다. 그들이 아픔을 삼키며 온몸으로 토해내듯이 열심히 노래 부르는 모습은 눈물 없이는 볼 수 없어 내 가슴도 먹먹하며 아리기까지 한다.
이렇듯 죽을 만큼 힘들고 어려움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가수의 꿈을 이룬 도전정신이야말로 존경할 만하다. TV를 보는 중에 내 눈에 번쩍 들어온 부인도 있었다. 식당을 운영하면서 자녀 둘 대학공부와 남편 대학공부며 가수의 꿈까지 이루게 한 부인이 있어 크게 감동을 받았다. 그 부인을 보면서 나를 뒤돌아보게 되었다.
나는 남편이 직장에서 승진할 기회가 있어 대학원에 가고자 원했을 때 나는 뭘 했는가? 사람은 기회가 오면 반드시 잡아야 하는데 아이들 대학공부와 겹쳐서 힘들다고 포기한 것이, 지금도 나는 그때의 자책감으로 많이 괴로워하고 있다. 남편의 친구며 동료직원들은 너도나도 승진하기 위해 계절 대학원에 가는 판에, 나는 깊은 고민도 없이 쉽게 기회를 놓친 것이 다시 생각해 보아도 많이 아쉽다.
그 당시 우리 생활 형편은 수입원이라고는 남편 봉급뿐이었다. 네 아이가 모두 대학교에 진학한 상태여서 학자금 용돈 생활비로 어려움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큰아들은 서울에 있는 D대 경영학을 전공하게 되고 셋째 아들은 K대 전자공학을 전공하게 되었는데 둘이 함께 쓰는 자취방을 얻어주었고, 집에도 우리내외뿐만 아니고 시골에서 중학교를 마친 친정 시댁 조카 둘이 시내 고등학교로 입학하여 우리 집에 와 있게 되었다. 우리아이들 넷 건사하기도 힘이 드는 판에 나의 두 어깨는 돌이 매달린 것같이 무거웠다. 남자 아이들 셋은 신경이 덜 쓰이나 하나인 딸아이는 신경이 많이 쓰인다. 어쩌다 한 번씩 가서 보면 옷가지며 반반한 그릇들이 없어지곤 한다. 이럴 때마다 아쉬우면 또 사야만 된다. 같이 세든 사람들과 부엌을 함께 쓰며 방문도 잠그지 않고 살았으니 수시로 드나들 수 있었을 게 뻔했다. 철저히 단속 못함이 내 잘못이지 누구를 탓하랴? 하면서도 속은 상했었다. 서울에서 자취하는 아이들도 내가 가서 돌봐주었어야 했는데, 그럴 형편이 되지 않아 김치와 반찬만 열심히 만들어 놓았다. 하루가 멀다하게 김치와 반찬 나르는 건 큰아들 몫이어서 서울에서 지방으로 수시로 오르내렸었다. 나 또한 데리고 있는 조카들 남편 도시락까지 챙기고 아이들 심부름하기에도 힘들었다.
하루는 머리를 감고 있는데 한국교원대 다니는 둘째 아들한테서 전화가 왔다. 점심을 먹어야하는데 용돈이 떨어졌다며 지금 은행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속히 돈을 보내달란다. 머리를 감다 말고 수건으로 물기만 제거하고 부리나케 달려가서 송금을 하고 집에 돌아와 머리를 다시 감은 적도 있다. 그 뿐만 아니라 C대 미대 다니는 딸은 수시로 재료를 사야 한다며 돈을 부치란다. 나는 네 아이들 돈 심부름으로 은행 문턱이 닳게 드나들어야만 했다. 돈만 넉넉하다면 아이들 심부름정도는 얼마든지 하겠는데, 남편 봉급으로는 부족하여 일일이 남한테 꿈질도 어렵고하여 아예 은행에서 마이너스 통장을 개설하여 아이들 용돈을 보내주곤 했었다. 나중에 갚아야 한다는 부담감이야 있지만, 이렇게 할 수 있다는 것만도 여간 고마운 일이 아니었다.
이런 와중에 남편 승진을 위해 대학원 공부까지 생각하기에는 엄두조차 내기 힘들었지만, 남편이 아니고 자식이었다면 어찌했을까? 나에게 반문을 해본다. 자식이 승진을 위한 일이라면 빚에 빚을 더 지더라도 주저 없이 대학원을 마치게 했을 것 같았다. 남편의 마음도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는 않았을 테지만, 가정형편상 자기 욕심을 낼 수 없다며 아이들을 위해 포기한다고 했을 때, 나는 심사숙고해서 남편의 승진을 위해 적극 밀어주지 못한 것이 많이 아쉽고 후회스럽다.
사람들은 누구나 힘든 고비가 반드시 있는 법인데, 죽을 만큼 어려움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끈만 놓지 않는다면 희망이 기다려 주는 것을…. 도전 꿈의 무대에 출현한 가수 분들처럼 암을 이겨내며 다리를 잃고서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을 힘차게 살아갈 수 있는 원동력을 얻었다고 볼 수 있다.
이 가수분들 보다 처지가 우리가 못할 것도 없는데 의지가 나약했음을 절실하게 뉘우친다. 사람이 살다보면 누구나 후회할 일이 많겠지만 남편한테는 일생에 가장 소중한 승진할 기회를 놓친 것이 평생 후회로 남아있어 아픈 추억으로 간직하기엔 괴로울 뿐이다.
□ 수필
사부곡(師父曲)
-보현(寶賢) 이한우(李澣雨)
이 상 일
『경북영천군 임고면 사동 이한우(李澣雨) 본관 경주. 1901년. 10월8일생.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한학을 수학하였으며 씨의 해박한 학식과 고고한 인격은 고장의 의표가 되고 있으며 신구(新舊)학자로도 높이 알려져 많은 사람으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다. 씨는 접빈대인(接賓 對人)시 에도 빈부귀천을 구별하지 않고 덕으로 벗을 대하듯 하여 감화시키며 사리가 분명하고 매사에 정확함으로 만인으로부터 칭송을 받고 있으며 부모님께 대한 효성 또한 지극하여 윤리가 피폐(疲弊)된 요즈음 사회에 무언의 사표가 되고 있다. 지방의회 의원에 당선되어 의장직을 현임하고 자치 행정의 공정한 평가는 물론이고 적극적인 지원으로 농촌근대화의 선두에 서서 지역민의 복지지원에 크게 기여하고 있어 그 업적은 영세에 빛날 것이다. 취미는 독서. 신봉교는 유교.』
나의 좁은 서재에는 낡았지만 고색찬연(古色燦然) 한 빛을 발하고 있는 책이 한 권 있다. “경행록(敬行錄)” 그 책의 제목이다. 오랫동안 다락방에 묵혀져 있던 책이었는데 근자 발견하여 내용을 보니 귀한 책이라는 생각이 들어 서재에 고이 보관하고 있다. 청년기에 처음 접하긴 했었는데 당시에는 아버지가 곁에 계셨기에 큰 느낌을 받지 못하여 잊어버렸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극구광음(隙駒光陰)이라 그 세월 득으로 철이 들어 이제야 낡은 책갈피를 한 장 한 장 넘겨본다. 필자에겐 카리스마의 화신으로만 보여졌던 선친의 흔적이 소롯이 되살아나는듯하다.
책에서 봐도 유교를 신봉하는 집안에서 태어나 일제강점기 소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 진학을 하지 않고 서당 훈장 밑에서 한학을 배우신, 하여 남존여비 사고가 강하고 효성은 지극한 유학자 아니 유생, 당시 지방의 일반호족들의 보편적인 사고를 가지신 분. 지금 필자의 눈 높이에서 구획된 선친 모습이다. 물론 필자 혼자 생각이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천수경 다라니며 천지팔양경을 암송하실 정도로, 사찰에 많은 시주를 하여 화주가 되었을 정도로 독실하신 불교 신도가 공식적으로는 유교를 신봉교로 내 세우신 점. 아마 생활은 유교로 의타(利他)는 부처님께 하신 모양이었다. 무학 한 민 들이 많던 시절이라 민심을 대변하고 중농 정도의 재력으로 어려운 사람들을 돌봐줄 정도의 의협심이 있어 민심을 얻고 제2공화국 초기에 우리나라에서 처음 시행한 지방자치 의회에 진출하여 의장으로 추대되어 현직에 있을 때 이 책이 발간된 것 같다.
기록을 보니 선친은 면 의장으로 봉직을 하신 것으로 보인다. 당시 정부행정 구조는 대통령 밑에 시도지사 군수 읍 면장으로 되어있고 국회와 도의회와 면의회를 구성하여 자치 행정을 하였는데 도지사는 대통령이 임명하였고 시장 군수는 도지사가 임명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필자도 좀 특이하게 느낀 점이 면장은 면의회에서 임명했다는 점. 군에는 군 의회가 없다는 것. 기록을 뒤져보며 그 의도를 끝내 못 찾았는데 내각책임제를 도입한 장면정부 시절이라 좀 더 깊은 의미가 있었을 것으로 추론해볼 뿐이다. ‘뿌리 민초의 내음을 기초 지방자치에 불어넣는 것(?).’ 각설하고 선친은 그때 면의원에 출마하고 의장으로 추대되어 면장 임명 같은 권력의 맛도 알았으리라 생각해본다. 당시 면장은 제법 세도께나 누리는 벼슬자리인데 지방호족들이 많이들 선호를 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 면장을 추천을 받아 임명을 할 수 있는 의장. 의장의 세도(?)도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몇 년 후 선친은 그 자리에서 물러났다. 5.16혁명으로... 군사정부는 제3공화국을 세우고 행정개편을 하여 모든 단체장을 정부에서 직접 임명하는 체제로 바꾸어 버렸다. 훗날 선친은 필자에게 ‘내가 그때 그만두지 않았다면 얼마 안 남은 땅뙈기지만 그것마저 다 없어지고 말았을거야.’ 면의원선거때 고무신과 수저를 가가호호로 돌리면서, 군용짚차와 달구지. 수레를 동원하여 당일 투표소로 유권자를 모셔갔단다. 이고을 저고을 첩첩산중에 있더라도 유권자가 있는 곳이면 재 넘어서도 일꾼을 보내어 업고오게도 했다 하니... 아침 점심 두 끼를 국밥으로 사주는 것은 당연하고 투표 후에는 다시 그들을 본가까지 모셔다드렸다고 한다(이승만 정부시절 투표 한 방식의 판박이라고 하셨다). 재산 반이 그때 거덜 났다고 했다. 당선이 되고 의장이 되니, 처음엔 좋았단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문제가 생겼는데... 당신 돈으로 의회를 꾸려갔다고 한다. 무보수 명예직이 였던 모양이다. 개회를 하고 점심이나 저녁을 하고 나면 실무자들이 한결같이 식대는 어찌할까요. 답도 늘 상 같았단다. 내 앞으로 해놓게. 년 말이면 의장 된 죄로 소를 팔고 전답을 팔아 식대 외상값을 처리했다시며. 그때 그만두길 참 잘했다며, 박정희 대통령이 은인이란 생각도 든다면서 멋쩍어하시며 웃으시던 기억도 난다. 그러나 그 직책 후광으로 제법 재산을 얻은 것으로 필자는 기억된다. 적산토지 우선 불하라던지 하천부지 점용 편의 국유지 등 공유지 매입 특혜 같은 수혜를 많이 입은 것으로 추정이 된다. 필자가 청년이 되가면서 호연지기를 키우고 있을 때 나는 누구인가? 나의 뿌리는? 이런 생각이 들어 우리 가문의 형성과정을 많이 생각해보고 있었는데 많은 것이 생각에 맞지 않았다. 나는 우리 가문이 대단한 양반 집안 인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대학교에서 만난친구가 자기 집 다락에서 말안장이 나왔다길래 언제 한번 가 보자 하여 학우 집을 방문 한 적이 있었다. 지금 보면 이명박 대통령 생가 부근인데 경북 신광면으로 기억된다. 나는 깜짝 놀랐다. 민속촌에서나 보든 솟을 대문이 나를 반겨 주었기에... 학우는 성리학의 대가인 회재 이언적선생의 후손이었다. 그 고고한 ‘양동이씨로데’ 라는 말이 나온 집안. 그 이후 누가 필자에게 우리가문 양반이야라고 하는 사람이 있으면 반문한다. 씨족들이 그곳에 집단으로 몇호를 이루고 있는가, 솟을 대문은 있는가. 라면서 그러한 것들이 없으면 졸부가 되어 양반 행세는 해도 양반 가문은 아니라고 나는 확신하게 되었다. 선친이 내 학우들이 집에서 놀다가 인사를 올리면 자네 성씨가 어떻게 되나 라고 잘 물으신다. 그런데 딱 두 번 ‘양반이로고. 귀한집안 자손이로구나. 바로 ’여강이씨‘와 ’진정이씨‘ 성을 가진 학우 둘 뿐이다. 필자 집안이 그러했다고 유추해 본다. 일가(一家)라야 사촌들이 주변에 살 정도 물론 솟을 대문은커녕, 퇴계 집안 불천위(不遷位)같은 제사를 지내는 사당도 없다. 이곳에 정착한 시기는 오래된 것 같은데 재물은 조부와 선친 때 조금 모은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암튼 그렇게 선친은 고을의 토호(土豪)로 세를 보태며 사신 것 같다. 필자의 어린 마음에 고을 전체가 우리 집 것 같았고 주민들이 모두 우리집 집사 같았다. 다들 나를 의장 아들이라고 특별대우(?)를 해 주었다. 몇 년 전 고향 친구가 식사를 하다 성질을 내길래 점잖게 한 마디 보탯드니 발끈하며 나에게 일갈을 해 댄다. ‘니가 아직도 부잣집 귀공자라고 로 생각하고 있나?’ 거 참...
그렇다 그런 시절을 내게 만들어 주신 선친이다. 성격도 요란했던 것 갔다. 필자가 태어났을 때 군수가 축하사절을 보냈다하니... 얼마나 주변에다 아들타령을 하였으면... 나를 낳고 선친은 많이 기뻣던 모양이었다. 7남매 중 아들을 하나 만들어 불효 한 가지는 면하게 되었다고. 또 다시 주변 사람들에게 주안상을 베풀며 자랑을 하고 다녔단다. 필자의 이름도 무려 5개나 되게 만들었다. 여기저기 유명 작명가를 찾아 다니며... 야인이 되어서도 토호의 세는 부모에 대한 효와 더하여 한껏 더 커져만 갔다. 필자의 할아버지 산소는 수도 없이 많은 이장(移葬)을 하여 지금의 우리 고을 큰산(太山)이라는 천장산 준령에 자리를 잡았다. 선친은 풍수지리에도 조예가 있었는지 전국 의 유명 지관들을 초청하여 필자의 조부 묘터를 몇 년을 두고 찾아다녔단다. 어디에서도 좋은 터가 없어 아주 포기할 정도로 지쳐있었단다. 다시 마음을 다잡고 몇 달째 명산대천을 훌고 다니시는데 드디어 인연이 닿았단다. 그날도 지관은 포기하듯 ‘내일 하루만 더 다녀봅시다. 인연이 안되면 명당도 숨어버린다는 말도 있지요.’ 지관이 품값을 못하고 있는 자신을 스스로 자책을 하기도하면서 뱉어낸 말인데 새벽에 일찍 일어나 목욕재계(沐浴齋戒)를하고 해가 돋을 때 쯤 패철(佩鐵)한 지관과 일꾼들을 앞세워 고산준령을 다시 돌아보는데, 늦은 오후쯤 준비해 간 도시락을 먹고는 식곤증에 다들 나무 밑에 대충 터를 잡고 한 줌 낮잠을 자게 되었단다...
지관과 동시에 눈을 뜨고 벌떡 일어섰다고 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말문이 떨어졌단다. ‘여기 어딘가에 인연혈(穴)이 있을거요’
신령의 현몽을 같이 받았다는 듯이... 그러나 한참을 둘러 보아도 찾지를 못 했는데... 그때 갑자기 일진광풍이 일어났단다. 나무가 흔들리고 가지가 부러지고... 정말 숨겨진 인연이 믿기지 않게 나타났다고 한다. 그때서야 보이더란다. 꺾어진 나무가지가 그 인연을 여태것 보호하고 있었단다. 드디어 필자 조부의 영원한 안식처를 찾았단다. 일행은 준비해간 제수를 차려놓고 천지신명께 눈물을 흘리면서 고맙다고 만배를 올렸다고 한다. 그러나 그날 이후 선친은 더 깊은 고민에 빠져 잠을 이루지 못하였으니... 그 명당이 자리한 곳이 타인소유이고 그 소유자가 그 산밑 고을에 일가를 이루고 사는 장군을 배출한 황씨집안 이라는 것에.
며칠간을 그렇게 고민 고민 하다 한가지 계책을 세우셨단다. 다음날 일군들을 불러모아 그곳에다 가묘(假墓)를 만들도록 했단다. 가묘란 흙으로만 무덤처럼 봉분을 만들어 놓은것인데... 그리고 그 옆에다 말뚝을 박아 놓도록 했다. “이곳에 우곡사는 00가 부의 산소를 모셨으나 연고자를 몰라 이렇게 표식을 하고 가니 이의가 있으신 분은 찾아오시기 바라오.”
그러고 난 뒤 일군들을 시켜 다시 입소문을 내고 다니도록 했다. “황씨가문 산에 이씨 들이 산소를 몰래 썼다더라”
봐둔 산소 터가 워낙 고산인탓에 자주 사람들이 찾지를 않는 곳이라 어느 세월에 소유자가 찾아볼지를 모르니... 해서 입소문을 낸 것이라 했다.
예측은 정확했단다. 다음날 바로 험상궂은 장정을 몇 명 앞세운 황씨 종손들이 행장을 하고 찾아왔단다. 분노에 얼굴을 붉으락 푸르락하면서.. 전후 사정을 이야기하고 효를 위한 자식의 심정을 이해해달라고 간곡히 통사정을 드렸단다. 선비들은 그래도 통하는 바가 있어 서로를 이해하려고 예를 다하고 있음에도 종손격 되는 유생이 파묘를 하겠다며 을럼장을 놓고 같이 온 장정하나가 당장 자기가 파묘를 하겠다고 벌떡 일어서서는 나가자고 고성을 질러대더란다. 이때다 하고 선친은 옆에 있던 동생에게 신호를 보냈다. 동시에 선친은 훼방을 놓고 일어나는 장정을 발로 걷어 차서 단숨에 방바닥에 나뒹굴게 하니 필자 삼촌이 일어나 발로 장정 목을 밟고 호통을 쳤단다. “이호로 새끼 뭐라고? 파묘를 한다고? 어디 한번 해봐라. 니가 못하면 이제는 내가 니놈을 이 자리에서 죽여 땅에 묻어 버릴끼다. 이 본때 없는놈. 네 부모는 어떤 놈이고 이런 호로새끼. 파묘라고? 이놈 어디 집안 놈이고? 황씨 집안은 아니제? 못 되먹은놈” 아수라장이 되었단다. 서슬퍼렀던 황씨 종손어른도 완력만은 최고라고 믿었던 장정을 한방에 엎어 뜨리는 선친의 완력에도 놀랐지만 밑에 애들이 너무 일찍 파묘라는 말을 꺼내놓는 바람에 도로 약점이 잡혀 황씨 양반의 체면이 구겨졌다는 것에 심기가 몹시 어지러워졌다.
그때 먼발치에 있던 타성의 어른이 나선다. 물론 선친이 만든 각본이다. 우리 집에 집사처럼 드나들며 잡사를 돌봐주고 있다. “의장님, 이제 그만 하이소” 의장이었다는 사실을 상대에게 한번 크게 주지시킨다. 쉽게 풀렸다. 선친은 정중히 사과를하였고 적당한 선에서 산 일부를 매수하는 조건으로 양해를 얻었다.
산 넘어 산은 이를 두고 한 말인가 보다. 이제 진묘를, 가묘가아닌, 진짜 조부산소를 그 자리에 모셔야 한다. 소문이 나지 않을 수가 없다. 당시에는 무덤에 대한 신성모독 같은 근엄이 크게 자리하여 내 땅이라 해도 무덤은 절대 회손 하면 안 되는 곳으로 신성시 되고 있었다. 그래서 이미 시신을 묻은 묘는 남이 훼손하면 죄가 크다. 근데 이제 시신을 자기 땅에 묻으려고 한다면, 그건 어림도 없다. 산주나 토지주가 반대하면 지금도 장례를 치룰 수 없지만 옛날에는 장례행렬도 못 지나갔다. 선친은 계획을 했다. 달도 없는 그믐밤. 일군들만 사오명 데리고 백골이 된 조부유골을 미리 수습하여 칠성판에 눕혀서는 마포로 감아 지게로 오십리나 되는 길을 산길로만 돌고 돌아 인적을 없애며 고심고심 장례를 치뤘단다. 끝내고 나니 그때서야 동해의 여명이 비춰오더란다. 이곳이 명당임을 알려나 주듯이...
후일 선친은 이런 말씀도 하신 것으로 기억된다. 그믐밤이라 빛 같은 것은 아예 없고 전등은 불빛이 새어나간다고 일부러 가지고 못 갔으니 앞사람 소리만 듣고 풀밟는소리, 나뭇가지 부딪치는 소리만 듣고 따라 가는 형상인데 한 참을 가다 뒷 따라오는 사람의 흔적이 없어 이상하게 생각하곤 몇명이 돌아가 보니 지나온 절벽 밑에서 사람 소리가 나더란다. 절벽으로 떨어졌는데 다행히 다래나무 줄기에 지게가 걸려 살아 났다고... “그때 초상 두 번 칠뻔 했지. 너거들은 앞으로 잘 될기다. 명당은 명당 인가 봐 죽을 사람도 살린거보면...”
사연은 많았다. 필자가 초등학교 때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처음 주검을 손자 위치에서 보았다. 해서인지 깊이 각인되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바짝 마른 얼굴, 천석, 이천석이요, 하며 나무 숟가락으로 쌀을 떠서 할머니 입에 솓아 붓던 선친의 모습하며... 필자는 선친이 시키시는 대로 했다. 상례가 유교식으로 엄격했던 것 같았다. 선친은 굴건제복(屈巾祭服)을 했다. 복숭아 지팡이를 짚고 삼우제(三虞祭)가 끝날 때까지 호곡 소리를 멈추지 않았다. 삼년시묘는 하지 않았지만 삼년 빈소를 차리고 조석으로 상식을 올리고 호곡을 하였다. 물론 이 일은 반 이상을 어머니가 맡아 하신 것이지만... 필자는 성년이 안 되어 제복은 하였지만 굴건이 아닌 마포로 만든 두건만 하였는데 두건도 위가 열린 두건인 것으로 기억 된다. 선친은 삼촌 옆에 나를 배석시키고는 조문객을 같이 맞도록 했다. 하루종일 호곡(號哭)을 하였다. 선친이 문상객을 개별 면담을 할 때도 나는 그곳을 벗어나지 못하도록 하였다. 혼자서 호곡을 하면서... 처음엔 당황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였지만 선친 친구분들이 어린 것이 장하다는 소리에 끝까지 동참한 것 같았다. 훗날 생각이지만 그때도 당신의 아들을 자랑하고파서 그렇게 하신 것으로...
발인 날 일가 친척과 상여를 따르지 못하는 식솔들의 비통한 호곡 소리를 뒤로하고 만장으로 둘러쌓인 상여가 천천히 나아간다. 상여 위에 올라탄 요령잡이의 선창에 따라 상여꾼들의 후렴도 우렁차고 비창하다. “아이고~~ 아이고~” 언덕을 너머면서도 냇물을 건너면서도 상주일행은 호곡을 끊지 않는다. 상여가 도착한 곳은 선산이 아닌 고을 사람들이 같이 쓰는 공동묘지. 여기서 배골이 될때까지 몇 년 가묘로 모셔 둔단다. 시간을 두고 다시 선친은 지관과 명당을 구한단다. 할아버지 산소를 찾을 때 처럼...
부모에 대한 효심이 정말 대단하셨다. 망자에 대한 효는 그렇다치고 할머니가 살아계실 때... 죽어서 좋은 곳으로 가라는 생전 예수제를 모신 그런 분이다. 그것도 절에서 하는 단체 예수제가 아닌 스님들을 집으로 불러 집안뜰에서 에서 온 고을 사람들에게 잔치를 베풀며 행한 예수제를... 지금의 팔순이나 백순 잔치를 열어주신 것으로도 해석할수 있겠다.
바라춤을 추는 스님도 생각이 난다. 무당들이 대나무를 잡고 신내림을 하여 타령을 하던 것도 기억난다. 훗날 선친의 장례식에 스님을 모셨는데 “맞구나. 망자를 만난 적이 있었군요. 상주 할머니 생전 예수제때 염불공양을 하였던 스님입니다. 사미를 막 벗어난 시절이라 불경책을 보고 염불을 한 기억이 나네요. 당시 망자가 소문난 효자라고 들은 기억이 나네요” “오늘 망자의 하관식에서 왕생극락을 소승이 염송 할 수 있는 일이 일어나다니 ... 정말 기이한 인연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망자는 필히 좋은 곳으로 가실 것입니다.”
묘한 생각이 들었다. 스님을 한분 모셔 달랬드니 그런 인연이 있었던 스님이 오셨다니... 자라오면서 내가 직접 보지 못한 여러 가지의 일들도 기억한다. ‘니 아부지는 진짜로 효자데이 니 할머니가 등창으로 많이 고생을 했는데 어디서 들었는지 입으로 고름을 빨아 냈다 아이가. 효력이 좋았는지 지극한 효심에 놀랐는지 바로 나았다 카더라. 니도 조금은 기억하제? 니할머니 살아계실 때 아무도 안하는 아니 하고 싶어도 멈두도 못내는 생전예수제를 안했나. 죽어서 좋은데 가리고 미리 살아생전에 해준다는 건데 그거 이군에서는 여태까지 한 일이 없었다 카데. 효심은 정말 대단하더라. 지금도 그렇다카데 제사나 결혼식에 초청받아가면 봉숭(행사시 만든 음식을 참객들에게 귀가시 나누어 사주는 음식봉투) 은 중간에 어디 들러지 않고 꼭 자기 엄마에게 가져간다 카데.’ 그때 그 소리를 들으며 어, 할머니가 내게 준 그 감춰놓은 떡이며 부치게가 아버지가 가져온 것이었구나 하던 기억도 새롭다.
학창시절 어느 날 불콰해지신 선친이 조용히 나를 불렀다.
“빙수생(氷水生)하나 빙수멸(氷水滅)하듯이
남녀생(男女生)하나 여인멸(女人滅)하나니
여상관(女想關)커든 간유수(看流水)하여라.”
얼음이 물에서 만들어졌지만
물에서 녹아 없어지듯
남자가 여자에게 태어났음에도
여자로 인하여 화를 당할수도 있음이니
혹 여자와 가까이 할 일이 있을시엔
흘러가는 강물을 보듯 먼발치에서 봐야 할 것이다.
학교도 들어가기 전에 무릅 위에 나를 올려놓고 따라하라며 선창을 하시던 선친. 하늘천 따지 검을현 누루황 집우 집주 넓을홍 거칠황. 착한 일을 하면 하늘이 복을 주고 못된일을 하면 하늘이 벌을 준다, 천자문이며 명심보감 삼강오륜을 노래하듯 어깨를 들썩이며 따라불렀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철이 들어 이런 심각한 말씀을 취중에 하시리라곤... 밤이 늦도록 많은 생각을 했다. 선친의 삶에서 직접느낀 소회 였다는 생각도 들었다. 막 사춘기에 접어든 자식이 행여 잘못 될까봐, 그것도 여자를 잘못 알아서...
해서인지 필자는 여자 문제만큼은 신중, 또 신중했다고 생각된다. 늘 선친의 하신 말씀을 생각하면서... 선친은 돌아가시기 전 근 삼사년을 중풍으로 누워계셨다. 늘 글쓰기를 좋아하시고 단오절에는 타문 중에서 한시(漢詩)경연을 즐기시기도 하셨는데. 반신불수로 의도 되로 쓰지 못하는 오른손을 내려다보며 어눌한 소리로 ‘내가 우짜다가... 내가 왜...’ 그때 필자는 선친의 옆에 누워 잘 들리지 않은 당신의 귀에 대고 큰소리로 외쳐댔다. ‘아버지 이렇게 누워서 지나온 시절 다 잊으며 사시다 가시라고 부처님이 복을 주신 거라고 생각하세요.’ 선친의 삶은 파란이 많다. 인품이 좋다 보니 아니, 돈 푼께나 가지고 호탕하다 보니 주변에 여자도 많았다. 말썽이 생기면 울림짱을 놓고 그것도 안되면 쌀가마니로 해결을 하며... 주변 사람들의 눈총도 많이 받았다. 아전인수라 저수지의 제일 끝에 위치 한 당신 논에 제일 먼저 물을 대었으니...
필자와는 즐겨 바둑을 두었다. 배우기 쉬운 장기는 상놈들이나하는 거라며 만지지도 일꾼들 방엔 가지도 못하게 하면서. 늘 져 주는거 같았다. 방학 때는 내기바둑을 두어 돈을 주시면서 웃으신다. 대구로 갈 때 어머니는 차비와 등록금은 아버지가 미리 너에게 줬다 하던데 하며 반찬만 한 보따리 사주신다. 늘 아버지는 그렇게 하셨다.
‘글재주가 아까워 어떻게...’ 하늘로 가시던 날 어머니는 방바닥을 두드리며 울었다. 필자도 대성통곡을 했다. 너무 슬펐다.
평토를 할 때 뛰어들듯이 내가 너무 애통해하였는지 그곳까지 따라온 우리 엄마 하신 말씀 ‘내캉살자 내캉살자.’ 그렇게 당신과의 이생 인연은 끝이 나고 말았다. 보고싶다. 같이 바둑 두고 싶다.
□ 수필
고무줄 잣대
진 용 호
새해벽두라 지인들로부터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축복의 덕담을 많이 받았고 또 나도 여러 지인에게 같은 축복의 덕담을 많이 전하였다.
복을 많이 받으라는 인사는 달리 해석하면 ‘재앙을 당하지 말라’는 뜻이다. 나의 지금의 처지는 최소한 현상유지만 하드래도 복이라고 자족한다. 나이가 들수록 마음고생이 심하여 살기가 더 힘 든다,
특히 ‘크리스찬으로 의 삶’이란 많은 중압감 때문에 하루에도 몇 번씩 고개를 떨 구며 후회를 거듭하고 있다. 우선 사랑이라는 단어는 희생이 동반되지 않으면 오염된 것이기에 과연 내가 사랑한다고 하면서 희생을 생각하였는지 자문하여 보면 솔직히 그저 말로만이지 그리 떳떳하지 못하다.
나 딴에는 삶의 질곡에서 사사건건 임기웅변 식으로 최선을 다하면서 살아 왔다고 하지만 어디 까지나 나의 잣대로 재단한 삶이기에 객관적으로 볼 때 많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었음을 부인하지 못한다.
주일예배시 목사님으로부터 설교를 들으면 만신창이가 되도록 뭇매를 맞아 가슴이 너덜거리지만 신앙생활 70 여 년간의 세월이 아까워 그래도 얼굴색하나 변하지 않고 안 그런 척 내숭을 떠는 이중성도 힘겹다.
지금은 양심이 실종된 세상이다. 그 와중에도 작은 양심이라도 갖기를 바라며 안간힘을 쓰지만 많은 사람들이 양심의 잣대가 이중적이어서 편리할 대로 재단을 한다.
나의 짧은 머리로써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역사관의 잣대이다.
역사란 ‘장님 코끼리 만지기’처럼 어느 편에 서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국교를 단절하는 단계 까지도 불사하고라도 일제 압제는 백여 년이 지났는데도 용서할 수 없고 잘 못을 사과하고 배상하라고 하면서 북한이 저지른 6.25동란, KAL기 폭파, 아웅산 테러, 천안함 폭침으로 많은 인명이 죽었고 연평도 포격으로 많은 재산과 사상자를 낸바 있는 등. . . .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질렀음에도 두 나라의 미래를 위하여서 거론조차 하지 말자는 현 정부와 국방장관, 통일부장관의 역사 인식 잣대는 가 히 고무줄 잣대의 표본 격이다.
어디 그 뿐인가 ‘내로남불’의 사건들은 날마다 뉴-스 매체를 통하여 가지 수를 늘려가고 있으니 이제는 식상하다.
정권을 장악하면 세상을 보는 눈이 어두워지나 보다 다들 못살겠다고 하는데도 세상이 살기 좋아졌다고 허세를 부리니 기가 찰 노릇 아닌가.
사자의 용기와 여우의 지혜를 갖춘 리더쉽을 설파한 “마키아 벨리의 군주론”을 지표로 삼은듯하나 하지만 장점은 버리고 단점만 골라서 실제 무엇이 행해지고 있는지를 소흘히 하는 사람은 파멸한다는 주장은 철저히 외면하고 “악의 교사”로 낙인찍힌 마키아 벨리의 권모술수를 찬양한 권력 지상주의 만 신봉하는 것 같다.
정치인들은 똑 같은 사안을 야당 시절에는 죽어라고 반대하드니 여당으로 돌아서니 언재 그랬느냐는 식으로 손바닥 뒤집듯 한다.
지금의 화두는 좋은 일자리 창출이라고 입을 모으는데 좋은 일자리는 국가가 만드는 게 아니라 시장이 만든다는 사실을 현 정부는 인정하길 꺼려한다. 정부의 지나친 시장개입이 일자리 참사와 함께 경제쇠락의 재앙을 낳는다는 걸 알았으면 한다.
정의로워야 할 적폐청산이 고무줄 잣대로 정부의 불공정한 법의 오, 남용으로 정적을 박멸하는 수단으로 타락하여서 원한을 키우고 사회통합을 파괴하며 나라의 근간을 흔들 수 있다고 생각되어 걱정이 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은 각자가 지니고 있는 잣대가 똑 같을 수야 없겠지만 최소한의 양심이라도 있어 여러 사람들이 수긍하고 납득할 수 있어서 살기 좋은 세상이 되었으면 하고 꿈같은 희망을 가져본다.
□ 수필
나와 은퇴(A Retirement)의 관계
이 응 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마태복음 16:25)
누구든지 은퇴라는 단어가 있을 텐데 은퇴하고 난 후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라?고 생각하여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노후에 무의미한 세월을 보내는 은퇴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은퇴(引退)란 직임에서 물러나거나 사회 활동에서 손을 떼고 한가히 지냄. 생산활동은 중지했지만 지속적으로 소비는 하고 있는 삶의 형태로, 단순히 직장을 그만두는 것을 의미하는 '퇴직'과는 차이가 있다.
Re라는 뜻은 기존의 프로그램을 거꾸로 분석하고 설계해 아이디어와 노하우를 추출하여 기술향상과 또 다른 창조를 추구하는 고도의 프로그램 행위를 말한다.고 사전에는 설명하고 있다.
그래서 RE는 단순 모방일 경우 불법복제 또는 재산권 침해의 소지가 있으나, 기술교류와 경쟁력 제고 차원으로 활용될 경우 필요한 기술교류 기법이라고 할 수 있다. 전문가들은 RE의 미학은 복제라는 개발행위가 아니라 창조라는 연구행위에 있다는 것이다.라고 백과사전에서 설명하고 있다.
필자는 은퇴한지 만 9년이 되었다. 그러나 은퇴 후 그동안 매주일과 수요일에는 홈쳐치에서 설교봉사를 하면서 틈이 나는데로 신구약성경을 통독하면서 지내왔다. 그동안 여섯번 성경 통동끝내고 일곱번째 통독중에 있다.
그리고 매일 한 두 편의 신앙칼럼을 한국어와 일본어로 쓰고 있다. 그리고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씀하는가?라는 제목으로 일본인들의 구령을 위해서 교제를 출판해서 비매품으로 나누어 주기도 하고. 한글로 '나의 신앙칼럼'을 출판하기도 하면서 시간을 소일하고 있다.
또한 이곳저곳에서 강단에 세워주는 동역자들이 계시기에 설교말씀 준비에도 게을리 하지 않고 평소에 말씀묵상과 기도로 준비하면서 지내고 있다.
은퇴 후 일본어로 신앙칼럼을 1차로 100편 정도로 출판중에 있다. 그동안 사역현장에서 못다한 일들 중에 문서선교의 중요성을 깨닫고 계속 글쓰기를 쉬지않고 있다.
또한 선교지역에서 은퇴자들의 모임인 은목회와 동경홀리클럽 기도회와 다양한 모임에 참석하면서 노후를 보내고 있다.
특별히 건강관리를 위해서 매일 삼천 내지 오천보를 걷기도 하면서 자기 자신의 건강과 영성관리를 꾸준히 하면서 지내고 있다. 특히 음식은 가리지 않고 잘 먹고 밤에 잠도 잘자고 있다.
선교지에 와서 지금까지 35년의 세월을 보내면서 슬하에 사남매가 모두 가정을 이루고 손자손녀 13명의 대가족들로 각각 삶의 현장에서 지내면서 신앙과 직장 생활에 열심으로 살아가고 있는 가운데 현재는 아내와 함께 건강하게 조용한 농어촌 소도시에서 지내고 있다.
그동안 선교지에서 제자훈련을 위해서 성서신학원을 운영하기도 하였고 예배당 건물도 건축하기도 하면서 지내온 지난날 한 곳에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사역지에 따라 이삿짐을 싸기에 바빳던 날들을 보내기도 하였다.
지금은 은퇴 후에 조용한 농어촌에서 정착해서 지내고 있지만 매일 주어진 일과는 글 쓰는 일과 산보로 주어진 환경에서 지내고 있다는 것은 감사한 마음뿐이다.
특히 지난날 강단에서 전한 메세이지를 생각하면서 시행착오로 자신의 게으름과 무지와 부족한 지혜와 약한 영성에 대해서 반성을 하면서 남은 생애에 적극적인 연구와 영혼구령에 더많은 관심을 가지고 시간 선용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때로는 생각을 굴려야 하고 책을 읽어야 하고 뉴스를 보아야 하고 전혀 다른 상식을 접해 보아야 하고 많은 분들의 글도 읽고 자신에게 부족했던 문제를 체크하면서 지내고 있는 오늘이 너무나 귀한 금같은 시간들이라고 생각되어 진다.
특히 스마트폰이 노트북과 같이 사용하면서 가장 가까운 친구겸 노트도 되어주고 나의 모든 글들을 담아주면서 많은 분들에게 공유하기도 하면서 육체와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게을리 하지 않고 매일의 시간들을 소일하면서 지내고 있다.
스마트폰이 일기장 사진첩 전화번호부등 카렌다외에 다양하게 사용하면서 때로는 필요할 때 카메라로 현장의 특별한 분위기와 장소까지 기억하도록 해주는 스마트 폰과 가까운 친구로 지내고 있다.
그래서 누구에게 무엇을 주려면 본인은 계속 노력하고 나눌때는 조건 없이 감사한 마음으로 주고 받으며 시간을 투자허고 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은퇴라는 것이 전혀 두렵지도 아니하고 늙어 가는 것도 못 느낄 정도로 정력을 쏟아 붓고 있다.
아무리 뜻이 좋아도 몸이 약하면 좋은 뜻을 이행 할 수가 없기 때문에 하루에 평균 오천보로 건강관리에 시간도 투자하고 있다.
걷기 운동한 시간외에 의자에 앉아 이것저것 생각하면서 칼럼을 쓰는데 시간가는 줄 모르고 피곤하지도 않고 외롭지 않고 잘 견디기면서 지내고 있다.
이렇게 나 자신의 시간과 글을 쓰면서 걷는 시간이 유익하고 은혜 스러운 것은 마음의 생각이 식어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팔십대에 입학한 오늘도 변함없이 은퇴후 노후를 즐겁게 지내고 있음이 감사한 마음뿐이다.
모세는 팔십부터 민족 해방자로 사명을 사십년동안 감당할수 있었다. 여호수아와 갈렙(민13장25-33, 14:1-3)도 팔십이 넘어 가나안에 들어가 건강 하게 사역을 감당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해야 할 일이 있기에 부지런해지고 있다. 매일 아침 기상하면 취침할 때까지 등을 바닥에 붙이지 않고 있다는 것도 감사하게 생각되어 진다.
그래서 매일 쓰는 칼럼과 메시지는 내게 있어서 아주 매력적이 기도 하다. 그래서 글쓰는 것과 운동하는 것은 은퇴가 없다라는 것이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은퇴라는 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 단순히 휴식을 취하고 여행을 하거나 취미생활을 즐기는 인생의 시기다.
은퇴란 단어를 영어로 Retire 라 한다. 타이어는 자동차 타이어이기도 하고 오랫동안 수만 키로 달리다보니 타이어가 헤어지가도하고 빵구도 나고 그래서 피곤하다는 뜻도 있는데
마찬가지로 직장생활 혹은 평생목회하느라 타이어와 같은 육체의 기능이 다 낡아졌으니 Re( 바꾸라) 하라는 의미로. 이제부터 타이어 교환하듯이 남은 생애를 새로운 마음으로
달려가리라는 의미라고 생각하고. 또한 피곤해졌으니 쉬면서 새힘을 얻으라는 의미로 생각해 보기도 한다.
오늘 말씀에 중요한 동사가 있다. "찾으리라"다. 찾으라면 잊어버린 것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잃어버린 시간 쇠약해진 마음과 육체를 리(Re)로 되돌려 새로운 각오와 결심으로 마지막 달려 갈 길을 달려가는 지혜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느 정도 깨닫게 된것 같다.
다른 사람들을 돕는 것을 통하여 우리자신을 주님께 드리는 것은 자기부정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언젠가는 예수님께서 그 노력을 보상해 주실 것이다.
우리의 삶의 상태가 어떠하든지 우리 모두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을 향한 사랑을 은퇴 후에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지금을 잘 정리해야 하지 않을까?
사랑하시는 주님! 다른 사람과 평생 말씀과 삶을 나누어 줌으로 용기와 소망을 주는 은혜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주님 위해 일을 하라. 주님의 은퇴 계획은 이 세상에 없다."--Pastor Cho--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전 20장 24절)
□ 단편소설 연재
로스엔젤레스, 아리랑1
정 운 우
1.
7월의 여름날이다. 수요일 임에도 불구하고 로스엔젤레스 올림픽 블리바드에 위치한 아리랑 쇼핑몰은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지하 1층 지상 3층의 아리랑 쇼핑몰은 슈퍼마켓, 커피숍, 옷가게, 화장품 가게, 안경점, 미용실, 푸드코드와 음반, 서점까지 구비한 종합 쇼핑몰이다. 지난해에 재건축이 완공되어 로스엔젤레스 한인 상가 중에서는 가장 현대식 건물이 되었다. 대부분의 고객이 한국 교민들이지만 드문드문 미국인들도 있다. 청소카트를 몰고 가는 멕시칸들이 있고 아시아 친구들과 함께 한국음식을 사먹으러 온 백인이나 흑인들도 보인다. 케이팝에 들뜬 다양한 미국의 십대 청소년들이 한국 음반 상점을 기웃거린다. 그런데 미국의 대도시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진귀한 풍경이 아리랑 쇼핑몰에 있다. 푸드코트에는 손님들의 편의를 위해 곳곳에 대형 TV가 설치되어 있다. 점심시간이 훌쩍 지나버린 식당 좌석에는 텔레비전을 반경으로 족히 백여명의 한인 교포 노인들이 무리지어 앉아서 한국 방송을 시청하고 있다. 그 풍경이 마치 탑골 공원에 몰려 있는 노인들의 모습과 별반 다를 바가 없다. 은퇴를 했거나 더 이상 일을 하지 않는 노인들에게 상가 나들이는 하루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유일한 낙이다. 한 때는 가족들과 함께 미국에 이민을 와서 개척자적인 삶을 살았을 노인들 이었다. 그런 야성적이던 사람들이 시간이 흘러 그 투철하던 사명감을 잃어버리고 하루의 시간과 여유를 아리랑 쇼핑몰 3층 푸드코트에서 한국 방송을 시청하며 보내고 있다.
“사장님, 구두 닦아요.”
두 팔을 쫙 벌리 중년의 사내가 쇼핑객들 사이를 요리조리 분주하게 달린다. 그의 양팔에는 수십 켤레의 남녀 구두가 달랑달랑 걸려 있고 바지의 앞, 뒤 주머니에는 슬리퍼들이 꽂혀 있다.
“사장님, 구두 닦아요. 사장님, 구두 닦습니다.”
쉰은 훨씬 넘었을 것 같은 구두닦이 사내는 연신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구두 닦아요를 외친다. 그에게 쇼핑몰에 있는 사람들은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사장님인 모양이다. 그의 팔에는 한 켤레 정도는 더 올릴 수 있는 여유가 있다. 3층 에스컬레이터를 내리면 몇 개의 상점들이 푸드코트 앞까지 도열해 있는데 그 중에서 안마의자를 판매하는 가게 사장이 구두닦이를 향해 손짓한다.
“예에 사장님, 구두 닦습니다.”
“얼마죠?”
“5달러 입니다. 사장님.”
안마의자 가게 사장은 지갑에서 링컨의 초상화가 그려진 오달러 지폐를 꺼낸다. 구두닦이는 재빨리 왼팔에 올려 놓았던 구두를 바닥에 가지런히 내려 놓으며 뒷주머니에 있던 슬리퍼 한 켤레를 재빨리 안마의자 가게 사장의 발 아래에 내려 놓는다. 그 다음, 지폐를 받아 주머니에 쑤셔 놓는다.
“오후 6시까지는 꼭 갖다 주세요.”
“예에, 사장님.”
구두닦이는 재빨리 내려 놓았던 구두들과 안마의자 가게 사장의 구두를 왼팔에 다시 올려 놓고 푸드코트 옆 화장실 복도로 향한다. 구두닦이의 양팔에는 전신주에 나란히 앉은 참새떼들처럼 각각 열 켤레씩의 구두가 앉아 있다. 지난 11개월간 아리랑 쇼핑몰에서 구두를 닦으면서 생긴 노하우이다.
“구두닦이 사장님, 안녕하세요.”
“예에, 사장님 구두 닦아 드릴까요?”
“아니, 아닙니다. 잠시 구두닦이 사장님께 전할 말이 있어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말씀 하십시오.”
구두닦이는 3층 푸드코트 옆 통로에 나 있는 화장실이 있는 복도 맨 안쪽에 그의 작업실이 있다. 구두닦이는 갑작스러운 관리 직원의 등장에 마치 십자가 처럼 그의 양팔에 올려 놓은 구두를 그대로 둔 채 직원의 말을 받는다. 아리랑 쇼핑몰 관리 직원은 구두닦이에게 건물주인의 말을 급히 전달하고 떠나려는 기색이 역력하다.
“구두닦이 사장님도 잘 아시겠지만, 다음달이면 아리랑 쇼핑몰과 맺은 1년간의 리스 계약이 만료됩니다. 쇼핑몰 사장님께서 리스계약 갱신을 원하시면 관리사무실로 내일 오전 11시까지 꼭 오시랍니다.”
“잘 알겠습니다. 내일 계약 갱신하러 오전 11시까지 관리사무실에 꼭 가겠습니다.”
“그럼, 이만.”
상가 관리 직원은 총총히 화장실 복도를 벗어난다. 구두닦이는 스무 켤레의 구두를 마치 귀금속으로 만든 보석을 다루듯이 사뿐히 바닥에 내려 놓는다. 그런 다음, 구두를 색깔별로 분류를 하여 구두닦을 준비를 한다. 그의 장기는 불광을 내는 것이다. 라이터의 불을 검정색 구두 약에 당긴다. 휘발성이 있는 구두 약은 금세 불기를 머금으며 활활 타오른다. 구두닦이는 구두솔을 가지고 첫 번째 구두 표면에 묻은 먼지를 털어낸다. 구두 약이 녹아 내리자 구두닦이는 강한 입김을 불어 불을 끈 다음 메리야스를 찢어서 만든 천을 그의 오른 손가락에 칭칭 감은 다음 구두약을 듬뿍 묻힌다. 그런 다음, 첫 번째 검정색 구두를 향해 말한다.
“사장님, 감사합니다. 반짝반짝하게 닦아드리겠습니다.”
구두닦이는 그 구두의 주인을 향해 깊은 감사의 마음을 담은 한마디를 던진 다음 구두를 닦기 시작한다.
2.
구두닦이는 올해 52살이다. 1997년 외환위기가 닥친 대한민국의 시련은 구두닦이가 다니던 회사에도 명예퇴직이라는 구조조종을 단행하게 만들었다. 솔직히, 구두닦이가 다니던 회사는 공기업이었기 때문에 굳이 직원들을 감원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경영진들의 생각은 달랐다. 대한민국의 수많은 기업들이 정부의 구제금융 신청 발표가 난 다음 속절없이 연쇄 도산을 하기 시작했다. 재정적으로 불실한 기업들은 구제금융 신청이 있기 전부터 부도를 맞았다. 그래서인지 당시 대한민국에서는 우량기업들도 감원과 명예퇴직을 시행하는 것이 마치 유행처럼 번져 나갔다. 외환위기에 따른 선제적 대응이라는 명목을 달았다. 따라서, 구두닦이의 회사 경영진들은 공기업이라고 예외일수는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당시, 구두닦이의 나이는 35살이었다. 팀장겸 부장으로 승진한지 꼭 2년이 되었다. 구두닦이는 왜 자신이 퇴출 대상자가 되었는지 당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회사에 출근했는데 감원이 되어 퇴출되었다는 것이 가장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구두닦이가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을 온 것은 2년 뒤인 1999년이었다.
퇴직금과 재산을 처분하여 아내와 열 살, 일곱 살인 딸과 아들을 데리고 시작한 미국 이민생활은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일종의 도피였다. 반강제적인 명예퇴직을 당하기 전까지 구두닦이는 일류 인생이었다.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시작된 명문 대학으로의 진학은 순탄한 인생 역정의 시작이었다. 그는 대학 2학년 때 일찌감치 행정고시를 재학 중에 합격하겠다는 목표를 세웠고, 그 목표는 성공하여 인생의 절정으로 달렸다. 하지만, 자신감에 가득한 구두닦이는 인생에 한 번 더 가속을 붙여 보기로 했다. 순탄하게 시작할 수 있는 공무원 생활 보다는 자신의 능력을 좀더 크게 쓰고 싶다는 욕심에 대기업에 지원서를 냈다. 그의 야망을 기업의 채용 담당자들은 정확하게 읽고 인정해 주었다. 지원하는 족족 합격 통지서가 날아 들었다. 구두닦이는 여러 회사의 합격 통보 속에서 어느 회사를 선택해야 할 지 숙고해야 했다. 대한민국의 현실을 차분히 돌아 봤을 때, 에너지의 확보는 대한민국 경제와 산업 그리고 일반 시민들의 생활에 필수불가결한 자원이라고 생각했다. 구두닦이는 에너지 생산, 관리를 총괄하는 공기업에 지원하여 대한민국 미래 에너지 정책을 설계해 나갈 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 목표의 실현가능한 출세는 바로 산업자원부 장관이 되는 것으로 결정했다. 공기업의 사장들이 주로 낙하산 인사가 많은 만큼 그런 사장과 잘 엮이면 정치입문이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고 나름대로 전략까지 세웠다. 그런 전도유망한 구두닦이의 35살 인생에 찾아든 명예퇴직은 이유를 알 수 없는 행정착오라고 생각했다. 그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던 상무, 전무, 그리고 부사장까지 찾아가 보았지만 한결같이 이해할 수 없다는 애매모호한 말로 그 끝을 제대로 맺어 주지도 않았다. 강제 퇴사를 당하고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비로서 알게 되었다. 구두닦이의 적은 그의 상사들이 아니라 그가 데리고 있던 팀 내부에 있었다.
1996년 여름. 구두닦이는 비서실의 호출을 받고 사장실로 올라갔다. 팀장급 부장으로 승진하여 종종 사장과 임원들 앞에서 차년도 에너지 전략, 기획 발표를 여러 차례 했기 때문에 뜻밖의 부름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사장은 인사처 상무와 함께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부르셨습니까?”
“어, 자네구만. 어서, 이리 와서 앉아.”
사장은 화기애애한 미소까지 지으며 구두닦이를 환대했다. 그러나 그에게 커피나 차를 권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구두닦이와의 면담이 그리 긴 시간 지속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사장으로부터 짧은 지시 사항만이 있을 것이다.
“자네를 부른 건 다름이 아니라, 우리 회사에서 숙고 끝에 새로운 인재를 영입하기로 결정했네.”
“그렇군요.”
구두닦이는 인사처 상무를 곁눈질로 반응을 살펴 보았는데, 상무는 특유의 무뚝뚝한 표정으로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해외에서 석유화학에 대한 심도있는 연구를 진행한 우수한 자원이고, 앞으로 해외 유전 개발 사업에 꼭 필요한 언어적 능력도 출중하게 갖춘 후보자야. 밑에 두고 잘 가르쳐 봐.”
“새로 오는 직원의 직급은 어떻게 됩니까?”
“자네 바로 밑이니깐. 차장으로 오는 거지.”
그 출중한 인재가 회사에 출근했을 때, 곧바로 소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현직 국회의장의 맡 사위라는 소문이었다. 그리고 1997년 가을에 정부가 구제금융을 신청한다는 발표가 있자 구두닦이는 몇몇 직원들과 함께 권고 명예퇴직이 된 것이다. 해외유학파 출신의 차장은 1년동안 구두닦이의 업무를 파악하고 난 다음 팀장급 부장으로 고속 승진을 한다. 구두닦이가 바라는 산업자원부 장관의 후보는 국회의장의 맡사위라는 그 사람도 꿈꾸고 있었나 보다. - 연재
□ 단편소설
큐바의 비오레타(The violeta of Cuva)
김 길 홍
I. 큐바 여행
여기는 카나다 토론토 공항이다. 큐바에 가는 비행기가 6시간이나 연착(Delay) 되어 따분하게 기다려야 했다. 진혁이와 같이 온 친구들은 샤핑 한다고 공항 안을 둘러보고 다니고 있었고 진혁은 혼자 공항의 벤취에 기대어 깊은 상념 속으로 들어갔다. 지금 살고 있는 아내 하영을 만나 롱 아일랜드의 죤스 비취와 섬의 끝 몬탁 해수 욕장은 물론 여러곳을 여행으로 누비며 한 때 행복 했었다. 딸 송주를 낳아 홀로 된 장모의 사랑도 받았고 서울의 알부자인 진혁의 큰 누나가 뉴욕을 방문 하였다가 어린 송주가 오래된 카펫에서 과자나 음식 떨어진 것을 주어 먹는 것을 보고 안스러워 진혁을 특별히 사랑하던 그녀가 서울에 가 돈을 부쳐 주었고 그간 틈틈이 하영이가 모은 돈으로 큰집을 장만하여 한국에서 오는 분들의 안식처가 되었고 손님들의 휴식처도 되었다. 그런데 몇 년 만에 아내 하영이가 손 댄 사엽체 아이스크림 가게, 커피 샾. 주얼리 가게 들이 줄줄이 망해 있던 집도 날라 가고 빈 털털이가 되어 버렸다. 뉴욕에 도착한 진혁이 평생 해보지 않던 야채 가게, 드라이 크리닝 ,심지어 여자들이 주로 하는 네일가게 까지 기웃거리다 보니 한국에서 막 왔을 때의 고품격은 사라지고 몰골이 완전히 노동자 모습이 되었다. 그가 처음 미국에 올때만 해도 괜 찮았다. 강남 스타일 였으니... 하영이를 만나 프러포즈를 할 때민 해도 . .... 진혁은 고품격이었다. 그후 경제적 어려움이 겹치고 빚까지 여기저기 지기 시작하니두 사람의 다툼은 끊이지 않았다. 하영이 진혁에게 큐바 여행을 권유한 데는 자기 나름대로 숨은 비밀이 있었다. 그녀가 한국에 다녀올 계획이 있어서다. 최근 그녀가 자주 이혼 하자고 졸라 댔었다. 그녀가 대학 다닐 때 따라 다니던 박 진수란 친구가 있었는데 지금 한국의 연예계에서 주름잡고 있는 황태자다. 최근 그의 아내가 갑자기 폐암으로 세상을 떠난 후 외로워서 인지 하영에게 자주 연락이 온다. 하영도 싫지 않은 모양이다. 그에게 사업이 망하고 다시 사업을 한다고 거금을 빌렸지만 아직도 값지 못한 상태다. 그에게 전화가 올때면 얼굴에 화색이 돋고 생기가 난다. 그렇다고 하영에게 질투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진혁이의 자존감을 건드리는 일이기에 아얘 상관 하지 않는 것이 편하다. 하영이 한국에 2년전 갔을 때 그녀가 기거 하고 있는 호텔에 눈길을 운전하고 8시간이나 걸려 달려 왔다고 진수 이야기를 마치 전쟁 영웅 이야기 처럼 말할 때, 썩 기분은 안 좋았지만 듣고만 있었다. 진혁이 외국어 대학과 대학원에서 서반아과 ( Spenish ) 를 전공 하고 K 대학에서 강의를 하다가 간호사인 누나 덕으로 미국 영주권을 얻어 첫 발을 뉴욕에 디뎠다. 서반어를 공부했지만 막상 서반어를 사용하는 나라는 가본적이 없다. 그런 이유 인지 아내가 권하는 큐바에 가고 싶었다. 잡화 가게에 나가던 진혁이 이혼 문제로 다툰 후 직장도 그만 두고 집에서 하루 종일 컴퓨터 게임 만 하고 빈둥거리고 있다. 지루하고 아내에게 무시당하는 것도 싫었다. 집에서 살림하고 아이 치닥거리 하는 것도 따분했다. " 이혼 하면 이런 써비스도 없다 " 는 아내의 말이 캥겼다. 그래 가자 어디든 가야 한다. 그녀가 짜놓은 계획은 월요일에 떠나 토요일에 오는 일정이다. 큐바는 미국인들이 가기를 꺼리는 나라다. 우선 큐바는 미국과 비 수교 국가다. 그리고 적성국(사회주의) 이다. 그래서 가깝고도 먼 나라다 사는 것도 지루하고 아내 에게 무시 당하는 것도 싫다. 집안 일과 송주 치닷 거리 하는 것도 싫증이 났다. 동행인들과 뉴욕 후러싱에 있는 금강산 식당에서 버스를 타고 토론토로 왔는데 저렴한 비행기표를 사다 보니 토론토 까지 10여시간이나 걸려 왔다. 오다가 나이아가라 폭포(Niagara Fall)를 들린 것은 구경거리의 백미였다. 언제 보아도 장엄하고 우람한 폭포다. 신의 신비한 작품이다. 미국의 3대 명소가 아닌가? 그랜드 케년, 요세미티 팍과 함께........ 공항 안내 방송의 소리를 듣고 비행기에 올랐다. 토론토에서 하바나 까지는 4시간 반이 걸린 단다. 비행기가 낡고 오래 되어 조금은 불안 했다. 일행이 하바나에 도착하여 민박인 카사 (Casa)에 짐을 풀었다. 시골스러운 허름한 집이다.
II. 하바나에서 생긴 일
그들 일행은 400여년 간 스페인 식민지에서 큐바를 해방 시켰던 전설적인 인물인 큐바의 영웅 호세 마르티 기념관에 갔다. 기념관 광장 맞은 편엔 호세 마르티와 채데 카라 의 사진이 크게 걸려 있엇다. 기념관을 둘러본 그들은 곧 바로 헤밍웨이가 자주 들려 술을 마셨다는 크럽(Club)에 갔다. 크지 않은 공간 왼쪽에 헤밍웨이 구리 동상이 있었다. 어릴 때부터 헤밍웨이를 좋아하던 진혁은 감회가 새로웠다. 관광객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그와 사진을 찍으려고 줄을 섰다. 진혁이의 일행도 사진을 찍은 후, 북적대는 술집의 안으로 비비고 들어갔다. 일행이 앉은 자리는 큐바의 세 여성이 앉은 옆 자리 였다. 자연스럽게 그들과 합석해 인사들을 나누었다. 통 성명을 하고 큐바의 전통술인 럼주 (Rum)를 마시며 이야기를 하는 동안 그녀들의 이름도 알게 되었다. 아마볼라, 바팔 로 시오, 그리고 비오레타이다. 그리고 한국인 세명은 김 진혁을 비롯해 이 서진과 최 영석이다. 이들이 어울어 질수 있었던 것은 진혁의 스페니쉬 덕이었다. 20대 후반의 그녀들과 30 대 중반의 진혁 일행의 만남은 동양인과 카르비안의 만남이요 청춘들의 어울림 이라고나 할가? 세 여성 중에 눈에 띄는 여성이 있었다. 비오레타다. 그녀는 인물도 좋았지만 지적이고 수려했다. 그녀가 자기를 소개 하는데 고등학교 영어 선생 이란다. 이국적 향수를 느끼면서 서스럼 없이 오랬동안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그들이 술집을 빠져 나올 때는 거의 밤 12시 였다. 비오레타에게 진혁이 넌지시 식사를 한번 사도 되겠느냐? 고 묻자 그녀가 쾌히 승락한다. 마침 봄 방학이라 시간도 있단다. 진혁과 비오레타가 다음 날 만난 곳은 하바나에서 쾌 이름 난 산토스란 레스토랑 였다. 시골 도시 치고 큰 음식점 이다. 녹색 정장을 한 비오레타는 어제보다 더 아름다웠다. 그들이 저녁으로 립 아이 스테이크 와 럼주 를 한잔씩 먹고 나와 간 곳은 헤밍웨이가 노인과 바다 (The Old man and Sea)를 썼다는 비취다. 저녁 바다가 아름다웠다. 잔잔한 카르비안의 숨결이 있는 바다다. 밤 하늘엔 수많은 별 빛이 빛나고 북두 칠성이 수를 놓았다. 시원한 봄 바람이 얼굴을 스친다. 자기가 중학 교 시절 헤밍웨이 작품에 매료되어 거의 다 읽었다 며 살며시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녀도 싫지 않은지 가만히 있다. 진혁이"라파 로마"를 불렀다. 그녀가 놀라"어떻게 자기나라 노래를 아느냐? 묻자 그가 중학교 시절에 배웠다고 했다. 참 한국 노래에 "아리랑"이 있다는데 그 뜻이 무엇이느냐? 물었다."신나는 여흥을 말하며 어려움을 극복하는 긍정적 꿈을 노래하는 것이라"진혁이 설명해 주니"재미있는 노래다"라고 말한다. 그런후 진혁이 큰 소리로"베싸 매 베 메싸메 무쵸 코모시 후에라 에스타 노애 (Besame Besame Mucho Comosi Fuera esta noche) 를 부르다가 그녀를 덥석 껴안았다. 그녀도 바라고 있었는지 모른다 가만히 있다. 그들이 뜨거운 키스를 하고 그녀의 집에 도착한 것은 새벽 1시경이었다. 혼자 사는 캄비니도가 울타리로 둘러 쌓인 작은 집이다. 샤워를 마친 두 사람의 몸은 환상적이었다. 구리빛 색갈의 비오레타는 큰 젖 가슴과 미끈한 몸이다. 그런가 하면 진혁 역시 큰 키에 운동 근육으로 뭉쳐진 잘 발달된 몸매다 두사람은 그날 밤 뜨거운 사랑의 아리아를 내 품었다."아이 러브 유"를 연발하며 태고적 비음의 노래 소리를 내 품었다. 다음 날 그들은 배를 타고 하바나를 떠나 시에 바라데 시로 향하고 있었다. . 선상은 아름다운 카리브 해로 펄쳐 졌다. 잔잔하고 고요한 바다........ 아니 아름다운 바다........청춘 남녀의 사랑으로 빚은 물결 따라..... 서서히 미끄러지듯 배가 달린다. 3시간 후 관광지엔 시에 바라테의 한 호텔 노에 티에라 에 들어 갔다. 전경과 운치있는 최고급 호텔이다. 그날 저녁 비오레타가 자기 가정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사회학 교수 였단다 .그가 공산주의를 반대 하다가 교수형을 당했다고 한다. 그녀가 6살 때 였다. 어릴 때 아버지와 재미있게 놀던 일을 생각하면 눈물이 난단다. 그녀가 12살 때 어머니가 조그만한 사업을 하는 남자와 재혼했는데 좋은 사람이라고....... 어쩧든 400여년의 식민지와 70여년 사회주의 속에서도 발랄하게 살아온 비오레타는 전형적인 낭만이 몸에 스며진 카르비안 이다. 진혁이는 늘 가슴 속에 응어리 진 것이 하나 있었다. 그의 아내 하영이 첫눈에 반해 결혼 했지만 아이가 있는 이혼녀 였다. 총각 이던 그에에게 늘 아쉬움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비오레타는 그런 점에서 싱싱한 처녀가 아닌가? 비오레타와 진혁, 두 사람은 결혼 하기로 약속을 했다. 겨울 방학에.........몇가지 문제는 있다. 문화적 차이, 조건, 종교적 차이, 등.... 너무 갑자기 가까 와 져 피차 어리 둥절하다. 이렇게 빠르게 진행되는 것도 하영의 이혼 촉구에 따른 원인 제공이기도 하다. 진혁은 아름다운 로맨스를 경험하고 뉴욕에 돌아 왔다. 도착하여 생선회를 잘하는 베이 사이드에 있는"황금어장"식당에 에 들려 활어회와 매운탕 그리고 시원한 맥주로 일주일 양식만 먹었던 속을 풀고 각자 헤어졌다.
III. 부부의 외도.
집에 온 진혁이 놀랐다. 3주간 한국에 다녀 온다던 그녀가 집에 벌써 와 있었다. 그리고 사색이 되어 누워 있다. 몸살 감기에 한국에 가서 몸이 아파 병원에 갔더니 암 선언을 받았다고 한다. 거기에서 오는 충격으로 힘들어 하고 있다. 사실 그녀가 한국에 간 것은 자기를 좋아하는 남자 친구를 만나 결혼을 해 볼가 하고 나갔는데 가자 마자 계획이 틀어 졌단다. 이틀이 지나도 그 남자 친구는 바쁘다는 핑계로 나타나지 않았고 3일째 되는 날 만나서 겨우 한다는 말이 자기가 신인 배우와 결혼을 할꺼라는 말을 해 그와는 끝이 났단다. 그리고 다음 날 몸이 아파 병원에 가서 진단을 받아 보니 유방암 이라는 판정을 받은 것이다. 그녀가 누워 있는 동안 그녀와 딸 송주의 치닥거리를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녀를 사랑하던 진혁이 그녀가 불쌍한 생각이 들었다. 정성껏 음식을 장만해 그녀 앞에 내밀었디. 그녀가 천천히 음식을 씹더니 와락 울기 시작한다. 여보 미안해! 내가 잘못 했어요! 용서 해줘요! 다시는 이혼 하자고 안 할께! 말없이 방에서 나온 진혁은 멀리 큐바에 있는 비오레타 를 생각하고 있었다. 오래동안 각 방을 쓰며 이혼 하자, 못한다. 로 아귀 다툼을 했던 과거가 떠 올랐다. 그 날 밤 비오레타의 영상 편지와 그녀의 환한 모습이 왔다.
# 오 마이 다알링 진혁 (Oh My Darling Jin Hyuk)!
# 우리들이 만났던 순간이 오늘도 하바나의 바다 물결처럼 출렁이며 다가오네요.
당신이 이곳 하바나를 떠 날때 아쉬움이 내 마음 슬프다 못해 텅비었어요. 7월의 태양처럼 이글거리며 내 품던 뜨거운 사랑의 입김이 내 가슴을 다 태워 버려 재가 되었지요. 이곳 안개 낀 저녁 노을 하바나의 바다 위 에 아름다운 무지개가 떠 있어요. 우리의 미래를 약속 하고 있는 것 같아요. 아니 그럴 거예요. 가슴이 두근 거려요, 속히 만나기를 기원 하겠어요. 부디 몸 건강 하세요. 하바나에서 ......
비오레타 올림
# 사랑하는 비오레타 에게!
#뉴욕에 그대의 향기를 안고 잘 도착 했습니다. 우리의 만남은 일생 동안 잊을수 없을 마치 운명처럼 느껴요. 비오레타! 이곳 뉴욕의 바다도 대서양 입니다. 한 바다의 물결처럼 우리는 하나요. 사랑도 하나 랍니다.
난 날개 드리운 비둘기 사랑으로, 진주 같은 우정으로, 보라빛 라이락 꿈으로, 뿌리내린 지성으로, 텅빈 마음으로 신의 음성 들으며, 멋있는자 되어 그대 앞에 우뚝 서려 하오 . 꿈속에도 그대를 잊을수가 없다오. 비오레타! 비오레타! 나의 사랑하는 천사여
막상 사랑의 편지를 주고 받고 하지만 진혁에겐 고민이 있었다. 암 으로 고생하는 아내가 있다. 밤마다 앓는 소리가 그녀의 방에서 들린다. 저렇게 암 으로 고생하는 아내에게 이런 사실을 알릴 수도 없다. 그리고 어린 딸 송주 문제도 있다. 아내는 암은 접어 두고 라도 감기 몸살로 콜록 거리는 데 나을 생각을 안한다. 한약, 양약 그리고 병원, 심지어 침까지 맞아도 차도가 보이지 않는다. 날이 갈수록 얼굴은 초췌하다.
이러고 있는 동안 진혁에게 기쁜 소식들이 왔다. H 학원에서 7월 부터 강의를 해 달래는 신청이 왔다 .월급도 좋게 주겠단다. 그런가 하면 한 야간부 C 초급대학에서 9월부터 강사로 오란다. 그가 뉴욕에 온지 7년 만이다. 그가 할 수 있는 직장이다.
어느 토요일 이다. 송주가 그녀의 아버지 무릎에 앉아 눈망울을 굴리며 묻는다."아빠! 아빠! 아빠는 엄마를 사랑해?"확인이라도 하려는 듯 아빠의 눈을 바라 본다."응! 물론이야 . 많이 사랑 하지. 송주도?""나도!""왜 묻니?""그냥!"진혁은 속으로 뜨끔 했다. 이 녀석이 뭔가 눈치를 챘나? 어린 아이들에게 가장 큰 상처는 뭐니 뭐니 해도 부모들의 이혼이다. 송주가 자기 방으로 가자 방안이 뭔가 텅 빈 것 같았다. 진혁은 커피를 마시며 생각에 잠긴다 . 아내 하영이 불쌍하다. 너무 힘들어 한다. 두달이 지나도 낫지 않는다. 진혁은 정성을 다해 아내 얼굴이 창백해진 하영을 수발 했다. 그리고 처음으로 자기 존재 전부를 포기하고 아내 하영을 위해 기도를 드렸다. 그간은 아내 하영이 얼굴도 예쁘고 그래서 그냥 사랑 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것이 아니었다."하나님! 만일 제 아내 하영이만 낫게 해 주신다면 제가 무슨 일이든 하겠습니다."그의 기도는 간절했다. 그리고 진심 이었다.
하영의 머리털은 병든 쥐처럼 빠지기 시작했다. 누구보다 육체의 미에 애착을 갖고 있는 그녀에겐 견딜수 없는 형벌이었다. 그녀가 그렇게 두려워 하고 무서워 하던 키모도 받았고 유방의 절단 수술도 받았다.
그녀가 세상을 떠나기 이틀전 진혁에게 마지막으로 들려준 말이 있었다."딩신은 진심으로 날 사랑한 남자 예요. . 정말 고마워요. 그런 남자를 버리고 돈을 더 사랑 했나 봐요. 당신을 따르던 수많은 여자를 마다하고 이혼녀인 날 선택해 준 남자 가 아니었나요? 하늘 나라에서도 당신의 그 귀한 사랑을 기억 하겠어요."그녀가 말라 빠진 손을 내 밀었다."당신은 죽어선 안돼.........."진혁이 말 없이 그녀의 손을 잡는다.
IV. 부활
추운 겨울도 지나갔다. 4월, 따뜻한 봄 날 오후다. 송주는 아직 자기 엄마가 이 세상을 떠넌 사실을 아직도 알지 못한다. 그녀가 한국에 치료차 간 겄으로 알고 있다. 송주와 집 뒷 뜰로 나갔다. 송주가 어제 사다 준 빨간, 파란 큰 고무 풍선 두개를 들고 나왔다. 진혁이 묻는다."넌 아빠가 좋아, 엄마가 좋아?""둘 다""아빠 귀를 대 봐 비밀인데 사실은 아빠가 더 좋아, 엄마 에겐 비밀야."보통 딸은 아빠를, 아들은 엄마를, 좋아 한다는데 이 녀석도 그런가 보다. 아빠! 이 풍선 하늘에 날리고 싶어, 날아가는 것을 보고 싶어 . 네 것이니 마음대로 해라. 날린다! 하나, 둘,셋! 묶여진 두개의 풍선이 갑자기 하늘로 치솟는다. 하늘로 치솟은 고무 풍선이 서 북 풍이 부는 바람 따라 둥실 둥실 동 남 쪽을 향해 멀리 멀리 나른다. 풍선이 보이지 않을 때 까지 두 사람 아빠와 딸은 눈을 떼지 못하고 있다. 아내 하영이가 마지막 들려주었던 말"하늘나라에 가서도 당신의 사랑을 기억 하겠어요"을 더 한번 떠 올린다. 그리고 진혁 만 알고 있는 비밀의 섬인 비오레타가 사는 뉴욕의 동 남쪽 큐바의 하늘을 바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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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편소설
목걸이
나 은 혜
벌써 삼일 째이다. 노인의 표정이 무표정하게 굳어진 것은...여름에 미국 다녀온 며느리가 선물한 은색줄에 조그만 파란 보석이 달린 꽤 깜찍하게 생긴 목걸이가 감쪽같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그 반짝이는 작은 목걸이는 노인의 마르고 긴 목에 아주 잘 어울렸다. 노인은 다른 목걸이들이 이미 몇 개 있었지만 다들 좀 크고 무거웠다. 그런데 이번에 며느리가 선물한 작은 은색 목걸이가 마음에 쏙 들었던 모양이다.
문제는 그 목걸이를 며칠 목에 하지도 않았는데 목걸이가 감쪽같이 사라진 것이다. 노인은 속이 상했다. 그까짓거 없었던셈 치면 되지 하면서도 자꾸만 목걸이 생각이 났다. 그래서 목걸이 생각만 하면 누구에게라고 할 수는 없지만 괜히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그 때 마침 현관문이 열리면서 집으로 들어오는 며느리를 보자, 노인은 단단히 별렀다는 듯이"너 이리 좀 와 봐라. 여기 내 방에 누가 왔다 갔니?" 하고 따지듯이 묻는다. 하지만 며느리는 천연스럽게 "아무도 안 왔다 갔어요." 할 뿐이다.
며느리가 그렇게 천연스럽게 나올수록 노인은 더욱 화가 치밀었다. 그날 저녁엔 자신이 좋아하는 멸치육수에 김치를 송송 썰어 무쳐서 얹은 잔치국수를 며느리가 만들어 주었다. 하지만 노인은 화난 표정으로 말없이 국수를 건져 먹을뿐이다.
다른때 같으면 "아이고 이 국수 참 맛있구나. 국물도 아주 시원하고...너는 참 요리를 잘한다."하며 너스레를 좀 떨면서 며느리의 국수 만든 솜씨를 칭찬해 주곤 하던 노인 이었다.
몇년을 함께 살면서 어느듯 며느리의 충청도식 음식을 먹으면서 매번 맛있다고 칭찬 할만큼 노인은 며느리가 만드는 음식에 입맛이 길들여져 있었다. 그런데 요 삼일은 도통 입맛이 없었다. 무얼 먹어도 맛이 없었다.
저녁이 되었다. 자상한 큰아들이 어머니의 불편한 심기를 읽었나 보다. 그는 큰 소리로 자신의 아내를 부른다. "여보! 수사반장! 어서 와서 어머니 목걸이를 찾아봐요. 당신은 수사반장이니까 찾을 수 있을거야." 큰 아들은 치매를 앓는 어머니가 의심병이 생겨서 번번이 소란을 떠실때 마다 아내가 잃었다는 물건이라든가 돈을 찾아 내었기에 그런 별명을 아내에게 붙여 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어머니에게 씩 웃으며 "어머니, 걱정 마세요. 에미가 목걸이를 꼭 찾아낼거니까요." 한다.
이제 수사 의뢰를 맡은 수사 반장 며느리가 노인의 방에 들어서서 수색 하듯이 목걸이 찾기 작전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먼저 그동안 노인이 입었던 옷들의 호주머니를 샅샅이 검사한다. 이쪽 바지 주머니에서 다른 목걸이 하나가 나온다. 저쪽 윗도리 주머니에선 열쇠 하나가 나온다. 그러나 노인이 오매불망 찾고 싶어하는 반짝이는 은색 목걸이는 나오지 않는다.
이제 수사반장 며느리는 노인의 화장대 위에 있던 작은 문갑 설합들을 열어본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숟가락이 하나 나온다. 다른 설합에서는 과도가 하나 나온다. 또 다른 설합에서도 작은칼이 하나 나온다. 그러나 찾고 있는 은색 줄의 목걸이는 여전히 나오지 않는다.
수사반장 며느리는 도합 두개의 과도와 숟가락을 하나 찾아서 화장대 위에 올려놓았다. 요즘 주방에 세개나 있던 과도가 하나밖에 없었던 비밀이 풀어져서 수사반장 며느리의 입가에 보일듯 말듯 살풋이 미소가 지나가지만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한다.
하지만 노인의 표정은 여전히 굳어 있다. 자신이 좋아하는 작은 은색줄에 파란 보석이 달린 목걸이가 아직 안 나왔기 때문이다. 수사반장 며느리는 이번에는 노인의 침대밑에 깔린 침구를 들추어 본다.
그런데 노인이 돌연 화를 내시는 것이 아닌가? "내가 감추어 놓고 너보고 찾으라고 하는줄 아냐?" 어머니의 심기가 심상치 않은 것을 눈치챈 아들이 "여보, 그만 찾아요. 됐어요." 한다. 자칫 어머니의 불똥이 아내에게 튈 수 있기 때문이다. 아니, 이미 불똥이 튀었다. 며느리를 보는 어머니의 시선이 곱지 않은것을 보니 말이다.
이튿날 새벽이다. 새벽기도를 하러 가기 위해 집을 나가는 며느리를 노인은 또 부른다. 그리고는 대뜸 "나 오늘 복지관 안가. 가라고 하지 마라!" 라고 하신다. 목걸이가 없어진 불만 시위를 새벽부터 며느리에게 시작 하시는 것이다. 며느리는 조그만 소리로 "집에 계시면 심심 하실텐데... 알았어요." 하고 교회로 간다.
며느리는 새벽 기도를 가자마자 하나님께 일러바치기 시작한다. "하나니임~미국서 사온 그 목걸이가 어디로 갔을까요? 어머니가 그 목걸이 없으면 마음이 도저히 풀어지시지 않을 것 같아요오~어서 찾게 도와 주세요오~"
기도하던 며느리는 갑자기 남편조차 자신에게 억지소리를 한 것이 생각나 눈물이 핑~ 돈다. 어머니가 자꾸 골을 부리시자 남편은 아내에게 "당신 앞으로 어머니에게 선물 하려면 기도해 보고 해요. 괜히 목걸이는 선물해 가지고서는......."하고 트집을 잡았던 것이다.
남편도 어머니의 며칠간이나 계속되는 잔뜩 구름 낀 얼굴을 보면서 많이 힘들어 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얼마나 억지소리인가 글쎄... 며느리는 한숨이 나왔다. 아무리 찾아도 목걸이는 나오지 않고...그러니 도대체 무슨 방법이 있는가 기도 하는 수 밖에는...
교회에서 한참동안 기도를 하고난 며느리는 교회를 나와서 동네 빵집인 파리바게트로 가서 빵을 산다. 시어머님이 빵을 좋아 하시기 때문에 날마다는 아니지만 일주일에 세 번 정도는 아침에 갓 구은 따끈한 빵을 사서 조반으로 차려 드리곤 했던 것이다.
이렇게 어머니가 좋아하는 아침을 준비하고 정성을 들인다고 해도 어머니는 그 목걸이를 찾기 전에는 기뻐하지 않으시겠지... 생각하며 집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현관문을 열고 들어선 며느리는 집안 분위기가 왠지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전처럼 정상으로 돌아온 것을 느꼈다.
"어? 이거 어떻게 된 거지? 하고 며느리는 "마음 속으로만 생각 하였다. 노인은 오늘은 노란색 계열의 가로줄 무늬 티셔츠를 산뜻하게 입고 앉아 있었다. 요즘 보기 드물게 밝은 시어머니 모습에 며느리는 또 의아해진다.
남편은 싱긋이 웃으며 아내를 맞이한다. "어서와요. 여보! 어머니가 목걸이 찾으셨어" 한다. 며느리는 큰소리로 "아니 어디서요? 그렇게 찾아도 안 나오던 목걸이가 도대체 어디서 나왔어요?" 했다.
말할 것도 없이 며느리는 너무 기쁘고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렇게 소리친 것이다. 너무 너무 고맙고 반가워서 말이다. 그러나 그 목걸이를 도대체 어디서 찾았을까? 그렇게 찾아도 안 나오던 것이었는데 말이다.
며느리는 여전히 강한 의문을 갖으면서도 일단 아침으로 준비해 온 갓 구은 따끈한 빵을 접시에 놓았다. 그리고 냉장고에서 우유와 과일을 꺼내었다. 그리고 나서 아주 조심스레 "어머니 좋아 하시는 빵 사왔어요. 어서 아침 드세요." 하고 말하며 어머니의 안색을 살펴본다.
그 작은 목걸이 하나 없어진 것 때문에 어머니의 얼어붙은 얼굴 표정과 태도로 인해 온 집안 분위기가 며칠간이나 얼마나 썰렁했던가? 또 며느리는 그동안 얼마나 힘이 들었었던가? 그런데 그 요물단지 같은 목걸이가 도대체 어디서 튀어 나왔단 말인가?
며느리는 그렇지 않아도 오늘은 어머니의 방을 다시 하나하나 뒤집어 가며 그 목걸이를 찾고야 말리라 생각하던 참이었다. 왜냐하면 똑 같은 목걸이를 구하기 전까지는 어머니의 대책 없는 화내기와 며느리를 대하는 냉냉 함은 계속 될 터였으니 말이다.
특히 이런 경우에 노인은 아들 보다는 며느리가 만만한가 보았다. 그래서 이번에도 며느리를 의심하는 것이다. 실은 이번뿐이 아니었다. 노인은 번번이 며느리에게 트집을 잡았다. "애, 너 이리 좀 와 봐라... 여기 있던 내 시계 못 봤니?" 이러시면서 말이다.
아무튼 속상한 마음으로 교회에 달려가 새벽에 하나님께 일러 바친 것이 즉각 응답 되었나 보다. 그래서 며느리는 "여보! 도대체 어디서 그 목걸이가 나왔어요?" 했다. 남편은 씨익 웃으며 "응 어머니 방 화장대 밑바닥에 들어가 있었대."
"어머니가 화장대 밑을 손바닥으로 넣어 쓸어 보시다가 발견 하셨대. 아마 목걸이가 바닥에 떨어져서 밀려서 화장대 밑으로 들어 갔나봐" 한다. 며느리는 "세상에... 화장대 밑바닥에 어떻게 목걸이가 들어 갔을까요? 아마 수사반장인 나도 그건 절대 못 찾았을 거예요."하며 어이없어 한다.
그런데 노인은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듯이 며느리가 아침에 사온 갓 구은 따끈한 빵을 찢어서 우유에 찍어 드시면서 "아이고~ 그빵 참 부드럽고 맛있다." 하며 천연스럽기만 하다. 아무튼 이젠 드디어 어머니의 골부림과 냉전이 끝난 것이다.
아들과 며느리는 언제 내가 골을 내었느냐는 듯이 천연덕스러운 표정으로 맛있게 빵을 드시는 모친을 바라보았다. 그리곤 의미 있는 눈빛을 서로 주고받았다. 물론 어머니가 눈치 채지 못하게 말이다. 먼저 아내의 눈빛이 말했다.
"휴~ 여보 십 년 감수 했어요. 알츠 하이머(치매) 걸린 어머니 모시는 일은 보통일이 아니네요.” 그러자 남편의 눈빛이 말한다. "당신 말 백프로 수용해요. 내가 더 기도 많이 할께 당신 힘들지 않도록..."
그 때 전화벨이 울렸다 복지관에서 주간에 운영하는 치매환자를 돌봐주는 주간보호 센터 차가 온 것이다. 노인을 모셔 가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순간 며느리는 명랑하게 "어머니 잠깐~ 목걸이 찾은 기념 인증샷 하고 가셔야죠.”
그런데 노인은 그동안 당신이 했던 행동에 대해선 전혀 기억이 안 나시는 듯 전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지으신다. 그리곤 괜히 새삼스럽다는 듯 쑥스러워 하시면서도 슬쩍 웃으며 포즈를 취해 주신다. 며느리는 찰칵~ 하고 사진을 찍었다.
창밖을 보니 그동안 장마 비처럼 계속 내렸던 비가 어느새 멈추었나 보다. 밝고 환한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햇빛 한 줄기가 노인의 목에 걸린 은색 줄 목걸이에 '반짝' 하고 부딪히고는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