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짐의 깊이는 존재의 높이에 비례한다
[시민포커스=조한일 기자]
파쇄기
우은숙
그가 노리는 건 사라지는 마술이지
형광빛 목을 죄고 붉은 입술 벌름거리지
촘촘히 새겨진 기록 거침없이 물어뜯지
달 표면에 얼룩진 비정형의 무늬들
오래된 동굴 속에 모아놓은 불빛들
안녕을 묻지도 않고 혓바닥에 휘어감지
뒤섞이며 창백해진 그대의 뒷모습에
길쭉한 뒷덜미는 헛기침만 잡아채지만
내게는 뭉개진 추신이 손을 꽉 잡고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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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존재하던 것이 사라질 때 “인위적 개입”이 있을 때가 있다. 아니 꽤 많다. 자연스러운 소멸이나 시간의 속성과 연관된 멸실은 그나마 수용할 수 있는 범주의 사라짐이라 하겠다. 하지만 이와 달리 인위적으로 파쇄된다는 것과 파쇄한다는 것은 감정의 임계점을 고의로 건든다는 차이점이 있다. 물론 가끔 의도치 않게 파쇄되는 경우는 별개로 하더라도....,
시인이 말하는 ‘촘촘히 새겨진 기록 거침없이 물어뜯지’는 ‘파쇄기’의 성향을 “기계적”에서 “동물적”으로 옮겨놓은 표현이다. 누구나 납득 가는 비유다. 용도가 다양한 ‘파쇄기’ 중에서도 이 작품에서의 ‘파쇄기’는 문서를 도륙하는 문서 파쇄기로 한정해서 보자. 그 기능은 ‘기록’을 삭제시키는 흡사 키보드 위의 delete 키를 연상케 한다. 움켜쥔 힘으로 멀쩡한 ‘기록’이 파쇄되어 사라져 가는 작금의 현실을 잊지 말라는 메시지로 읽어도 되겠다. 그의 ‘노림수’에 걸려들지 말자.
분명 이별도 준비가 필요하다. 파쇄기와 어떤 권력이 ‘안녕’을 묻지도 않는다는 것은 잔인하다. 힘이 있는 자는 준비가 되어 있지만 힘이 없는 자는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 나를 슬프게 한다. 또한 시인은 그 ‘혓바닥’이 날름 낚아채는 것이 아득히 먼 거리의 ‘달 표면’과 오래된 ‘동굴’이라는 “공간”과 “시간”을 초월한다는 점에 닿을 땐 가슴이 뻐근하다.
‘뒷모습’에 익숙해지기 시작하면 나이가 들었음이다. ‘헛기침만 잡아챈다는 것’은 미필적 고의로 받아들여질 수 있으며 그것은 소멸에 대한 기본적 예의의 결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덧붙일 말과 이야기”는 손을 놓지 못하는 모양이다. ‘뭉개지’면서 까지 말이다. 이별 앞에, 안녕 앞에 뭉개지지 않을 사람이 얼마나 될까? 뒤를 보인 ‘그대의 창백함’ 앞에 무너지지 않기 위해 다시는 그러지 않기 위해 ‘추신’을 내가 쓰는 모든 시조 작품 끝에 투명하게 써야겠다. 우리의 ‘기록’이 파쇄되지 않도록....,
사라짐의 깊이는 존재의 높이에 비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