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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일 神父의 - 외줄위를 걷는 人生
23. 사제들의 가담
어머니가 드디어 감정이 폭발해 버렸다.
“네가 지금 제 정신이니? 착실히 회사 잘 다니는 얘에게 왜 바람 넣니? 네가 에미 쓰러져 죽는 꼴 보려고 그러니? 집에 아무런 보탬도 못 되면서. 아버지 말씀 잘 듣고 자기 앞가림 잘 하는 얘를 왜 꼬드기니? 너나 학교 끝까지 잘 다닐 수 있도록 정신 바짝 차리고 공부 열심히 해라. 알겠니?
반풍수 집안 망친다고 이러다 우리 집 아주 패가망신하게 생겼다. 네가 아버지 돌아가셨다고 네 마음대로 하는 모양인데 너 엄마 우습게 보지마라. 포탄이 눈앞에서 터지고 총알이 날라 오는 전선을 뚫고 맨몸으로 피난 와서 너희들 낳고 입히고 공부시켰다. 그리고 내 분명히 말하는데 우리 가문에 중도하차는 없다.
네가 뭐라고 큰소리치면서 신학원에 갔는지 기억하니? 교회를 바로 세워야겠다느니 어쩌니 온갖 흰 소리를 하면서 아버지 산소에 흙도 마르기 전에 여동생들이 ‘가더라도 좀 있다 가라’고 울면서 매달리는데도 냉정하게 뿌리치고 뒤도 안 돌아보고 간 놈이 바로 너야. 네가 사람이냐? 장남이 도대체 뭐가 장남이냐? 쓰러져 가는 집안부터 먼저 일으켜야 하는 것 아니냐? 교회를 바로 세우느니 너 자신부터 똑바로 세워야 하지 않겠니? 도대체 누구 인생을 또 망치려고 그러니? 나는 내 자식 중에 너 하나 망하는 걸로 족하다. 경희에 대해서는 무조건 반대다.”
신학교에 돌아와 내 방문을 여니 춘기가 미리 와서 내 책상에 엎드려 무언가 쓰고 있다.
“성명서 쓰고 있냐?”
“경일아! 얼굴 좀 펴고 다녀라. 어머니 젖 좀 만지고 왔냐? 얼굴이 아주 딴 사람이 됐는데?”
“아무래도 그렇지. 뭐. 부산교구에도 사건의 내용은 다 전해졌을 것이고. 어머니도 교회에 갔다가 신부님 통해 이런저런 소식은 들어서 아는 게지. 꾸지람 좀 듣고 왔다.”
“이런 일 할라고 치면 늘 하게 되는 얘기지만 어머니란 존재가 제일 마음에 걸린다. 나도 마음이 약해져서 가끔 그만 두고 싶을 때가 있긴 해. 많이 힘드냐? 하기야 집구석에 암환자가 둘씩이나 되니 오죽 하겠냐?”
“어차피 불행은 한꺼번에 오는 것이고. 난리가 났는데 문 닫아걸고 집안에 꼭꼭 숨어 있는 다고 전쟁이 비껴가겠냐. 맞을 만큼 맞고 겪을 만큼 겪어야지.
그건 그렇고 이번 일이 끝까지 가면 신학원 학생 중에 누가 남을 것 같으냐?”
“아마 정현이 정도가 남겠지. 모두들 사제가 되려고 다른 가능성을 끊고 하던 일도 포기하고 왔는데 다시 인생의 새로운 길을 모색한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이겠냐?”
“정현이는 대학입시학원에 다닐 때 친구들하고 나눈 얘기 때문에 이미 한번 들어갔다 나온 전력이 있지 않냐? 내가 듣기로 연대 신과대학에서 특별히 받아주지 않았다면 그 당시 입학도 어려웠을 것이라던데. 여기서 그만 두면 어떻게 되는 거지?”
“야. 너는 어떡하고? 너는 뭐 좀 나은 처지냐?”
“나도 별 수 없기는 매일반이지.”
“힘 빠지는 얘기 그만하고 생각 좀 해 봤냐?”
“문제는 뇌관이야. 화약뭉치만 있어가지고는 안된단 말이야. 우리들의 문제제기에 자연스럽게 무게가 실리면서 상황발전이 있으려면 교단전체가 비상이 걸릴 결정적 한방이 있어야겠는데 그게 여의치가 않다 말이야. 이상하게도 전국의회가 깨져버렸는데 조용하기만 한 것도 그렇고. 어쨌든 떠오르는 아이디어가 아주 없는 건 아닌데. 아직 확신이 안 서. 주변여건이 맞아 떨어지면 결정적일 수도 있는 건이 하나 있긴 해. 그런데 그걸 지금 바로 꺼내서 터트리기에는 주변 여론의 열기가 아직 발화점에 도달하지 못했단 말이야.”
“야! 뭐가 그렇게 복잡하냐? 그냥 터트리면 되지.”
“아니야. 사건의 성격으로 보아 그게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아. 현시점에서 지금까지 해 왔던 식의 상황분석이나 원칙적 선언만 가지고는 주목을 받기가 어려워. 돌풍을 일으킬 구체적인 사건이 있어야 돼.”
“답답한 친구 여기 또 있네. 그냥 무식하게 나가는 거야. 머리 써 봤자 그게 그거야. 목표는 간단해. 교회의 지도자가 시대와 역사의 흐름을 제대로 읽어내지 못하고 나아갈 방향을 올바로 제시하지 못하면 역사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 그것을 분명히 보여주는 거야.”
“진정하고 내 말을 잘 들어봐. 고리타분한 군대 얘기 하나 하자. 진해훈련소에서 훈련을 마치고 포항훈련소로 갔더니 우리와 같이 뒤늦게 훈련을 받는 제대말년 고참이 있었어. 통합병원에서 막 퇴원한 늙다리 훈병이 있는 거야. 그 고참이 포항훈련소에서 훈련받을 때 일어난 사건이라는데. 한겨울이었나 봐. 날이 추우니까 버려진 수류탄 박스를 쌓아놓고 모닥불을 피우고 있었단 말이야. 그런데 그 안에 불발수류탄이 하나 들어있었던 거지. 박스가 타며 열기가 오르니까 불발수류탄이 뒤늦게 터져버린 거야. 여러 명이 그 자리에서 죽고 그 고참은 다행히 살아남아 망가진 얼굴을 여러 차례 비슷한 모양이 나올 때까지 뜯어 고치느라 제대 말년까지 병원에서 보낸 거야. 그 양반 웃어도 얼굴 근육이 움직이지를 않더군.”
“모닥불 피우자고?”
]“발화점이 될 때까지 시간을 들여 불을 때야지.”
한국기독청년협의회 회의참석차 시내에 나왔다가 예장전국청년연합회 간부와 감리교 측 간부를 종로5가 기독교회관에서 만났다. 그들 역시 교회갱신운동이 반독재민주화운동과 함께 시급한 과제라고 입을 모아 공감을 나타냈다. 큰 교단의 경우 청년운동 지도부 측에서는 부정부패와 반민주세력의 책동이 구조적인 내부모순과 맞물려 더 이상 방치해서는 안 될 위험수준에 이르렀다고 평가하고 있었다.
교회갱신운동 역시 교단간의 연대가 필요하다고 보고 그 구체적 방법을 모색해 보자는데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밤이 깊어 밀린 레포트를 쓰기 위해 책을 펼쳐들고 있는데 춘기가 찾아왔다. 신학교 내에서 교수로 계시는 신부님이 교단 기관지인 성공회보에 내려고 쓴 원고를 우리 측에 넘겨준 것인데 대충 읽어 보아도 성공회보에 싣기에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글이었다. 주된 내용은 주교님들께 전국의회가 유회된 답답한 교회현실에 대해 준엄하게 책임을 묻는 글이었다.
글의 제목은 ‘교육에 길이 있다’였지만 주교님들께 교육을 시켜주겠다고 선뜻 팔 걷고 나설 사제나 평신도가 존재하기 어려운 현실에서 주교님들 자신이 주교의 직무를 올바로 깨닫고 한마음으로 수습의 노력을 다해야 할 것인데 그게 될 수 없다면 제단에 옷을 벗어놓고 고향으로 돌아가야 할 일 밖에 더 있겠냐는 신랄한 비판이 담긴 글이었다.
사실 주교님들을 향한 이런 글은 당시만 해도 교회 내부에서는 상상조차 하기 힘든 파격적인 행위로 간주될 성격의 것이었다.
성공회교회에서 주교란 존재는 전통적으로 교리와 교회법의 수호자이자 성사를 감독할 책임이 있으며 교회의 사부로서 사제와 신자들에게 신앙적 모본을 보여야 할 상징적 존재로 인식되고 있었다. 교회는 ‘주교의 교회’이며 사제는 주교의 임무를 대행하여 사목하는 존재라고 가르침을 받는 처지에 주교 본연의 직무를 이행하지 않는 주교는 기본적인 주교의 직무에 대해 재교육을 받거나 그도 저도 아니어서 책임도 지지 않으려면 그 자리에서 물러나는 게 옳지 않으냐는 지적은 어느 누구도 감히 할 수 없는 도발적인 발언이었다.
“경일아! 이런 글은 처음 읽어 본다. 파괴력이 굉장해. 어떤 식으로든 답변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읽으면 읽을수록 힘이 느껴지는 글이다. 사실 교회권력이 지도력을 상실했다면 권력의 정당성을 잃었다는 증거 아니야? ‘예수!’ 하면 연상되는 말이 우상타파라고 할진대 어떤 의미에서 이 글은 금기를 깨는 글이다.”
“이런 글이 아무렇지 않게 공식적인 언로를 통해 매체에 실려야 교회조직이 건강하다는 증거인데, 이런 글을 실어줄 교회 내부의 공식적 언론매체가 존재하기 어렵다는 게 교회의 병리적 구조를 말해 주는 것 아닐까? 그러니까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언로가 막혀있고 오직 상의하달식의 일방적 의사소통만 허용되는 것이 문제인 거지.”
“경일아! 이 글을 어떻게 처리하면 좋겠냐? 어디에 실어야 가장 효과가 있을까?”
“내가 신학원에 들어오기 전에 대성당 청년회 총무로 있었잖니? 그때 대학생회와 청년회 연합주보를 만들어 놓고 왔어. 거기에다 실으면 괜찮을 것 같은데. 그 주보를 읽는 일반신자들도 꽤 있는 걸로 알고 있거든.”
“그러면 어떻게 될 것 같으냐?”
“아마 대성당 뿐 만 아니라 교단 전체가 큰 충격에 빠질 것이다. 글의 내용으로 봐서 주교님의 가장 가까운 측근이 아니면 언급할 수 없는 내용을 담고 있기도 하고. 조만간 주교의 거취문제에 대한 입장표명이 있을 것 같다.”
“때가 온 거냐?”
“그렇다고 봐야겠지.”
“그런데 만약에 이번에도 무반응이면 어떻게 하냐? 그러면 그냥 주저앉는 거냐?”
“글쎄다. 섣부른 예측은 금물이지만 전체적인 흐름으로 보아 대세가 이미 기울어가는 추세다. 글을 쓴 신부님도 배수진을 치고 칼을 뽑은 것이 분명한 것 같고. 글이 나가고 난 뒤의 분위기를 보면 알겠지.”
1982년 12월 12일. 성탄행사 안내가 실린 청년회 대학생회 연합주보 ‘한뜻’의 사설란에 신부님이 쓴 문제의 그 글이 실리자 교회는 폭풍전야의 기분 나쁜 침묵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나는 춘기에게 후속탄으로 쓸려고 따로 준비해 온 글을 보여 주었다. 대성당 신자회장선거에 얽힌 이야기였는데 실제 내용은 가십거리에 불과한 평범한 것이었다.
“야. 이 글은 전투성이 좀 약하다. 폭발력이 별로야. 해당신부님 이름은 왜 안 썼냐?”
“그래. 솔직히 말해 고민이다. 이름 쓰나 안 쓰나 눈감고 아웅이지만 좋지 않은 일에 누군가의 이름을 거명한다는 게 두려운 일인 건 분명해.”
“야! 나도 그 양반이 교회족보로 따지자면 내 아버지나 다를 바 없는 분이다. 중 고등학교 사춘기 시절을 그 신부님 밑에서 다 보냈어. 하지만 어떻게 하냐. 역사의 도도한 흐름 앞에서 개인의 은원관계가 무슨 큰 의미가 있겠냐?”
“마음이 내키지 않아. 글이 잘 풀려나가지도 않고. 대학시절 연극한답시고 싸돌아다닐 때에는 내가 맡은 역할이 주로 중재를 서고 화해를 붙이는 일이었는데 교회에 오니까 왜 그런지 밤낮 싸움질에 원한 사는 일만 맡게 되는지. 나도 정말 이해가 안 돼. 성명서 한번 쓸 때마다 평생 이를 갈며 덤벼들 피 묻은 원수들만 만들어 내니.”
“예수님이 괜히 세상에 칼을 주러 왔다고 하시겠냐? 얼른 다시 써라. 어차피 우리는 불 지르러 온 거야. 그리고 어지간하면 빨리 주보에 실어버려. 질질 끌 거 뭐 있냐?”
“좀 기다려 봐. 아직 어떤 반응이 나올지 모르잖아. 성명서 잘못 쓰면 조롱거리가 될 뿐이야. 결과를 본 뒤에 써도 늦지 않아. 그 동안 내용이나 더 다듬지 뭐.”
나는 성탄을 부산에서 지내고 정초부터 서울에 불려 올라와 결국 대형사고를 쳤다. 대성당미사 중에 신학생들을 시켜 폭로성 삐라를 뿌리는 만용을 저지른 것이었다. 춘기의 독려도 있었지만 예상보다 싸움이 길어져 마무리를 빨리 지어야겠다는 생각이 앞섰기 때문이었다. 당시에도 전형적인 빨갱이수법이라는 비난을 교회어른들로부터 들었지만 그 후유증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사실 성명서에 언급한 대로 그게 그렇게 큰 문제가 될 만한 사건이라고 생각되면 개인적으로 직접 당사자에게 찾아가서 우려되는 바를 지적해 주면 간단히 해결될 일을 문서로 사건을 확대시켜 의혹사항에 대해 그 진실을 언제까지 공개적으로 밝혀라! 그러지 않으면 지나간 비리까지 몽당 만천하에 공개하겠다는 식의 협박성 성명서를 만들어 터뜨렸을 때 그 파괴력은 엄청난 것이었다.
대성당에서 봉사하던 정현은 화가 머리끝까지 오른 대성당 보좌사제에게 얼굴에 멍이 들도록 폭행을 당하고 왔고 나는 그 폭행의 현장에서 오간 대화의 내용을 다시 문서로 만들어 또 돌렸다. 20년도 더 지난 지금에 와서 나는 그 당시 내가 관여해 썼던 성명서를 다시 읽으며 말할 수 없는 수치심을 느낀다.
대의명분을 코에 걸고 있기는 했지만 그 내용과 방법, 태도에서 당당하지 못했고 비열하기까지 했다. 나와 춘기는 행적을 감추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숨어서 성명서를 썼다. 활동비가 필요해 아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모금도 하고 기부도 받았다. 이제 더 이상 새로운 폭로꺼리를 찾을 수 없어 쓸 것도 다 말랐을 즈음 신학교 교수님 두 분이 우리 거처를 용케 알아내고 찾아오셨다. ‘이제 할 만큼 한 것 아니냐. 그만 해도 될 때가 벌써 지난 것 같다’고 설득하였다. 나와 춘기는 말없이 듣고만 있었다.
춘기에게서 전화가 왔다. 저녁10시에 성남에서 만나자는 거다. 부산에서 기차를 타고 서울에 도착하니 이미 저녁 먹기에도 늦은 시간이었다. 시간에 맞춰 약소장소에 가니 맞이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 약속시간이 30분이 지나도록 길거리에 서 있으니 매서운 1월의 한파가 온몸을 파고들어 왔다. 편도차비만 간신히 구해왔으므로 주머니에는 동전 몇 개만 굴러다닐 뿐이었다.
얼은 발을 동동 구르다 눈여겨 보아둔 인근 공동변소에 들어갔다. 공동변소 안에는 동파를 막기 위해 항상 난로를 피워놓기 때문이다. 난로가 설치된 장소에서 가장 가까운 칸에 뛰어 들어가 몸이 녹을 때까지 제 자리 뛰기를 하였다. 내 옆 칸에서도 누군가가 뛰고 있었다. 잘 자리를 구하지 못한 떠돌이가 나 말고도 또 있었던 모양이다. 얼굴이 녹아 입이 움직여질 만한 때에 다시 약속장소에 가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다시 변소로 돌아왔다. 체온유지를 위해 계속 뛰어야 했다. 다시 가 보았다. 역시 없었다. 이러다 변소에서 밤새도록 뛰며 아침이 오길 기다려야 할 모양이라고 체념할 즈음에 춘기 목소리가 들렸다.
다른 모임 때문에 약속시간에 늦은 그가 나를 찾느라고 인근 다방을 뒤지다가 혹시나 해서 공동변소에 들러 보았다고 했다.
따뜻한 여관방에 누우니 졸음이 쏟아졌다. 잠이 깊이 들었었는데 새벽녘에 춘기가 나를 흔들어 깨웠다.
“경일아.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신학원 학생인 우리 능력으로는 더 이상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한계가 온 것 같다. 계속 더 해 보려고 해도 누가 정보를 주는 사람도 없고 신학원동기들도 너무 지쳤다. 이제 신부들이 나서야 할 때다. 여기까지 우리가 버텨온 것도 능력 이상의 무리한 것이었어.”
“춘기야. 그렇게 결론지으려면 차라리 우리 선에서 끝내자. 어차피 학생운동이란 것이 끝까지 원칙을 선포하고 주장하는 것으로 그 임무를 다하는 것이지만 사제들은 교권을 중심으로 자신이 속한 체제와 조직의 논리에 따를 수밖에 없는 존재야. 결국 우리의 존재가 교회권력을 위한 교회정치의 말단 하위조직에 불과하다는 평가를 받지 않으려면 이쯤에서 씻은 듯이 딱 끝내는 게 가장 현명한 처사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목표로 정한 고지가 바로 코앞에 있는데 지금까지 고생만 하다가 여기서 손놓고 주저앉자는 거냐?”
“춘기야. 우리는 어차피 교회갱신운동을 위해 사제가 되는 것마저도 포기하는 걸 전제로 하고 이 일을 시작했다. 우리가 지금까지 그나마 지탱해온 것은 그나마 가진 기득권을 포기하는 힘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거라고 본다. 사제들은 우리 학생들과는 달리 행동의 제약이 많아. 그리고 사제들과 함께 운동을 하다가 피치 못할 사정이 생겨 사제들 가운데 의견의 대립이 생기거나 혼선이 오면 우리가 무슨 방법으로 그들을 설득할 수 있냐? 우리가 주장하는 의견을 사제들이 고분고분 듣겠냐? 사제들과 운동을 함께 하는 순간 운동의 주도권이 학생들의 손에서 떠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경일아. 네가 함께 있어야 돼. 그래야 일이 제대로 된다. 나는 너를 믿어. 네가 한 몫을 해 줘야 돼. 서울교구에서는 서품과정만 남은 5명의 전도사들이 모두 가담하기로 했고 대전교구에서는 젊은 사제들이 거의 다 가담하기로 약속했다. 물론 부산교구에서도 몇 명의 사제들이 참여의사를 밝혀왔고. 사전정지 작업은 다 끝났어.”
“언제 거기까지 진전됐냐? 빨리도 했다. 야.”
“경일아. 우리는 반드시 이긴다. 두고 봐라.”
“그래. 그럴 것 같으냐? 어쨌든 나는 빠진다. 내가 주도하지 못하는 운동은 책임을 지려고 해도 질 수가 없는 거야. 사제들이 가담하면 운동의 성격도 달라질 수밖에.”
“경일아. 너 부산 꼭 가야 되냐? 서울서 우리하고 같이 있으면 안 되냐?”
“누구하고?”
“나하고 정현이.”
“하기야 부산에 가도 별 뾰족한 수는 없다만. 그래도 내 집이 낫지 않겠냐? 오늘처럼 돈 떨어지고 갈 데 없어져서 냄새나는 공동변소에서 얼은 몸 녹이느라 죽도록 뛰는 일은 없을 것 아니냐고? 더구나 고향집에는 암환자가 둘이나 있고. 어머니는 당뇨병 중증이신데 밤이 늦도록 가게를 지키고 있지 않니? 현실도피가 목적이라면 모를까. 그게 아니라면 서울에 남아있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부산교구 주교님이 윌리암 신학교를 새로 설립한다는 소문이 들리던데 너는 알고 있냐?”
“그럴 계획인가 봐. 그런데 주교님이 재미있는 말씀을 하더라.”
“뭐라고? 무슨 말을?”
“부산교구 소속 신학생들을 모아놓고 ‘내가 운영할 윌리암 신학교에 여러분이 다녔다고 해서 꼭 서품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그 문제에 관한한 오해가 없기를 바랍니다.’ 그러시는 거야. ‘그러면 이 학교에는 우리가 왜 다녀야 합니까?’ 라고 내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더니 ‘공부해서 나쁠 게 뭐가 있겠습니까?’ 그러시는 거야. 그리고는 다른 신학생들 잠시 기다리게 하고 나를 사무실로 따로 불러 하시는 말씀이 ‘사람들이 오해를 하는 모양인데, 자네가 학교를 중도에 그만 두고 내려온 것은 자네가 배울 게 없다고 내려온 것이지, 내가 자네를 일부러 학교 그만 두게 한 것은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지?’ 그런단 말이야.”
“그래서?”
“저는 학교 그만 둔다는 말을 한 적도 없고, 단지 교구직원이 빨리 내려오라는 급한 전갈을 받고 내려 온 것인데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라고 눈치 없이 되물었더니 주교님이 자기는 그런 지시를 내린 적이 없다고 하며 어찌나 역정을 내시는지... 거 참 답답하데.”
“무슨 꿍꿍이속이 있는 건 아닐까?”
“글쎄. 사실 지난 12월에 부산교구에서 호출을 받았을 때에도 주교님 면담이 잡혀있다고 해서 부산교구 사무실에 도착하니까 주교님이 벌써 교구 상임위원들을 다 모아 놓고 날 기다리고 있더라고. 그리고는 날더러 서울교구의 심각한 상황을 설명하라는 거야. 내가 발언하는 중간 중간에도 수시로 말을 멈추게 하고 슬쩍 슬쩍 원하는 답변을 유도해 가면서 말이야. 전국의회 유회라는 결과도 문제이지만 주교들 간의 깊은 반목과 불화는 매우 심각한 상태이고 어쩌면 가장 근본적인 문제가 아닌가 싶어. 이런 상황에서 누구 잘못이 더 크며, 누가 더 큰 죄인이냐가 뭐 그리 중요한 문제이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