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순흥안씨 찬성공파 원문보기 글쓴이: 바른정보(안정의)
역대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판한성부사(한성판윤) : 현 서울특별시장
한성판윤은 조선시대 한성부의 책임자로서 오늘날의 서울특별시장과 같다. 한성부의 행정을 담당하는 판윤은 정 2품의 관직으로서 초기에는 판한성부사, 한성부윤으로 불리다가 1469년(예종원년) 판윤으로 바뀌어 1894년 (고종 31)까지 425년간 호칭된 관직명이다. 1894년 한성부윤으로 명칭이 바뀐 이후 관찰사, 판윤, 윤, 부윤, (일제강점기)등으로 바뀌었고, 1946년 9월 28일 시장으로, 1949년 8월 15일 특별시장으로 개칭되었다.
우리순흥안씨는 4분의 선조가 조선시대 한성부의 행정을 책임졌다. 또한 네분 모두가 임금으로부터 시호까지 받으신 자랑스런 선조들이다.
판한성부사 안경공(安景恭) 태종 6년(1406)8월11일
판한성부사 안원(安瑗) 태종 7년(1407)12월 8일
한성부윤 안당 (安瑭) 중종 9년(1514) 1월 16일
한성부윤 안현 (安玹) 명종 3년(1548) 4월17일
서울시 한성판윤전에 의하면 양도공 휘 경공께서 제14대 판한성부사로 임명되었다고 기술되어 있는바 그러나 조선실록을 좀더 자세히 보면 14대가 아니라 13대임을 알수 있다.
(서울 600년의 발자취에는 10대로 되어있다)
제1대 : 성석린(成石璘)
제2대 : 정희계(鄭熙啓)
제3대 : 이거이(李居易)
시사(市史)에는 제3대 판한성부사로 조익수(조익수)로 되어 있으나 이는 잘못이다.
※. 태조 10권, 5년(1396 병자 / 명 홍무(洪武) 29년) 11월 23일(정축)
삼사 우복야 권화 등을 강원도에 보내어 왜구를 방비케 하다
삼사 우복야(三司右僕射) 권화(權和)와 상의중추원부사(商議中樞院副使) 장사정(張思靖)과 한성 윤(漢城尹) 조익수(曺益修)를 강원도로 보내어 왜구를 방비하게 하였다.
한성 윤을 판한성부사로 간주한다면 한성부 윤 정신의(鄭臣義)도 판한성부사로 기록하여야 할 것이다. 이외에도 한성 윤 하윤(河崙)도 있다.
--------------------------------------------------------------------------------------
정종 1권, 1년(1399 기묘 / 명 건문(建文) 1년) 5월 1일(경오)
임금이 백관을 거느리고 태상전에 조회하고 연향을 베풀다.
......전 판한성부사 이거이(李居易)가 기록되어 있다.
--------------------------------------------------------------------------------------
제4대 조박(趙璞)
시사(市史)에는 조박(趙璞)이 태종2년(1402) 10월15일 판한성부사로 되어있으나 태종1년(1401) 8월10일이 옳다.
※. 태종 2권, 1년(1401 신사 / 명 건문(建文) 3년) 8월 10일(병인)
조박(趙璞)을 판한성부사로 삼다
제5대 정탁(鄭擢)
제6대 최유경(崔有慶)
제7대 강서(姜筮)
제8대 최유경(崔有慶)
시사(市史)에는 8월26일로 되어 있으나 8월6일이 옳다.
태종 8권, 4년(1404 갑신 / 명 영락(永樂) 2년) 8월 6일(을해) 2번째기사
최유경·이지·김영렬·이귀령·민무질·권홍·함부림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제9대 이옥(李沃)
제10대 이행(李行)
제11대 유양(柳亮)
제12대 이귀령(李貴齡)
시사(市史)에는 누락이 되어있다.
태종 12권, 6년(1406 병술 / 명 영락(永樂) 4년) 윤7월 25일(임오) 2번째기사
이저를 탄핵한 대사헌 한상경 등을 순금사에 내려 조사하다
사헌부 대사헌 한상경(韓尙敬), 집의(執義) 이양(李楊), 장령(掌令) 한옹(韓雍)을 순금사(巡禁司)에 내리고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 이귀령(李貴齡)을 위관(委官)으로 삼아 순금사와 함께 국문(鞫問)하게 하였다. 임금이 이귀령을 편전(便殿)에서 인견하고 친히 명하여 말하였다.
제13대 안경공(安景恭)
제14대 이원(李原)
핀한성부사(한성판윤:현 서울시장)/1대 - 20대까지
관직명 |
성명 |
就任年月日 |
離任年月日 |
관련기사 |
비 고 |
판한성부사 |
성석린 (成石璘) |
태조 4년(1395) 6월13일 |
|
|
제1대 |
판한성부사 |
정희계 (鄭熙啓) |
|
태조5년(1396) 7월12일 |
|
제2대 |
판한성부사 |
조익수 (曺益修) |
|
|
|
판한성부사 아니다 |
판한성부사 |
이거이 (李居易) |
|
|
정종 1년(1399) 5월 1일 |
제3대 |
판한성부사 |
조 박 (趙 璞) |
태종 1년(1401) 8월10일 |
|
|
제4대 |
판한성부사 |
정 탁 (鄭 擢) |
태종 3년(1403) 7월16일 |
|
|
제5대 |
판한성부사 |
최유경 (崔有慶) |
태종 3년(1403) 8월20일 |
태종3년(1403) 윤11월27일 |
|
제6대 |
판한성부사 |
강 서 (姜 筮) |
태종 3년(1403) 윤11월27일 |
|
|
제7대 |
판한성부사 |
최유경 (崔有慶) |
태종 4년(1404) 8월 6일 |
|
|
제8대 |
판한성부사 |
이 옥 (李 沃) |
태종 5년(1405) 7월 3일 |
|
|
제9대 |
판한성부사 |
이 행 (李 行) |
태종 5년(1405) 9월22일 |
|
|
제10대 |
판한성부사 |
유 량 (柳 亮) |
태종 5년(1405) 12월 6일 |
|
|
제11대 |
판한성부사 |
이귀령 (李龜齡) |
|
|
태종 6년(1406) 윤7월25일 |
시사누락 제12대 |
판한성부사 |
안경공 (安景恭) |
태종 6년(1406) 8월11일 |
|
|
제13대 |
판한성부사 |
이 원 (李 原) |
태종 6년(1406) 12월 8일 |
태종7년(1407) 1월 30일 파직 |
|
제14대 |
판한성부사 |
설미수 (??眉壽) |
|
|
태종 7년(1407) 4월19일 |
제15대 |
판한성부사 |
정 요 (鄭 曜) |
태종 7년(1407) 8월 3일 |
|
|
제16대 |
판한성부사 |
연사종 (延嗣宗) |
태종 7년(1407) 10월 3일 |
|
|
제17대 |
판한성부사 |
안 원 (安 瑗) |
태종 7년(1407) 12월 8일 |
|
|
제18대 |
판한성부사 |
정 구 (鄭 矩) |
태종 8년(1408) 2월11일 |
태종 8년(1408) 3월14일 |
|
제19대 |
판한성부사 |
김한로 (金漢老) |
태종 8년(1408) 5월27일 |
|
|
제20대 |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은 조선 시대 한성부를 다스리던 정2품의 관직으로서, 품계는 자헌대부 이상의 품계에 해당되었다. 행정과 사법 업무를 겸하였다. 육조의 판서, 좌참찬, 우참찬과 함께 9경으로도 부른다. 오늘날의 서울특별시장에 해당한다.
대수 | 명칭 | 이름 | 임기 |
---|---|---|---|
제1대 | 판한성부사 | 성석린(成石璘) | 1395년 음력 6월 13일 ~ ? |
제2대 | 판한성부사 | 정희계(鄭熙啓) | ? ~ ? |
제3대 | 판한성부사 | 조익수(曺益修) | ? ~ ? |
제4대 | 판한성부사 | 이거이(李居易) | ? ~ ? |
대수 | 명칭 | 이름 | 임기 |
---|---|---|---|
제5대 | 판한성부사 | 조박(趙璞) | 1401년 음력 8월 10일 ~ ? |
제6대 | 판한성부사 | 정탁(鄭擢) | 1402년 음력 7월 16일 ~ ? |
제7대 | 판한성부사 | 최유경(崔有慶) | 1403년 음력 8월 20일 ~ ? |
제8대 | 판한성부사 | 강서(姜筮) | 1403년 음력 윤11월 27일 ~ ? |
제9대 | 판한성부사 | 최유경(崔有慶) | 1404년 음력 8월 6일 ~ ? |
제10대 | 판한성부사 | 이옥(李沃) | 1405년 음력 7월 3일 ~ ? |
제11대 | 판한성부사 | 이행(李行) | 1405년 음력 9월 22일 ~ ? |
첫댓글 태종 8대 강서(姜筮) 선조님
세종 46대 강회중(姜淮仲) 통계공께서 부임한 사실은 잘못기술(판한성부사가 아닌 한성부윤 임)된 것으로
★ 본 서울시장 역대인물에서는 빠져야 합니다.
세종1년(1419)2월11일 <한성부윤 : 현 서울시 부시장>을 제수받으시고 동년 4월16일까지
★실제 부시장으로 역임한 사실(족보엔 직에 나가지 아니하였다는 설?도 있지만)이 증명된다 할까요
단종 92대 강맹경(姜孟卿)
연산군 148대 강귀손(姜龜孫)
중종 159대/169대 강혼(姜渾)
명종 291대/ 선조 308대 강섬(姜暹) ★명종21년(1566)3월12일 파직되었다는 추가기록도 보이고요
선조 311대 강사상(姜士尙)
광해군 371대 강홍립(姜弘立)
숙종 565/570/571/577/594/602/645대(★7회 역임) 강현(姜현)
다음 세종실록 140710.03자의
판한성부사(현 서울시장)와 한성부윤(련 서울시부시장)을 비교하면 쉽게 이해되실 것이며
제2자(第二子) 이호(李祜)를 봉하여 효령군(孝寧君)을 삼고, 이직(李稷)으로 의정부 찬성사(議政府贊成事)를, 임정(林整)으로 형조 판서를, 안원(安瑗)으로 사헌부 대사헌을, 연사종(延嗣宗)으로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 겸 우군 총제(右軍摠制)를, 김우(金宇)로 희천군(熙川君) 겸 좌군 총제(左軍摠制)를, 윤향(尹向)으로 한성부 윤(漢城府尹)을, 강회중(姜淮仲)·유두명(柳斗明)으로 좌·우사간 대부(左右司諫大夫)를 삼았다. 대간(臺諫)이 모두 벼슬이 파면되었으나, 윤향만이 홀로 천직(遷職)되었다.
통계공께서는 동실록 1419.02.11자 한성부윤으로 제수 받은 사실이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간 제가 잘못 알고 본글을 옮겼던 사실이라는 점과
이는 우리 카페지기 강대희님의 글 <32회>6 통계공의 불사이군설과 조선조 참여에
이미 해설된 것을 오늘에사 보게되어 수정하여 댓글을 다시 올렸음을 밝힙니다.
참고로
검교(檢校) 한성윤(漢城尹) 강양(姜陽 1350 고려 충정왕~1417 조선 태종★금천 인헌공파)의 경우처럼
고려말기부터 조선초기에 걸쳐 정원이외에 임시로 증원할 때나
실제 사무는 보지않고 이름만 가지고 있게 할 때에
그 벼슬앞에 검교(儉校)를 붙일 경우도 있다 합니다
위 글끝부분 300자 글씨제한으로 추기하면
한성부판윤을 7회나 역임하신 강현(1650∼1733) 선조님은
문인 서화가인 강세황의 아버지로,
영정(影幀)이 보물 제589호로 지정되어 있구요
대제학, 예조판서,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등 여러 벼슬후
기로소(耆老所)에 입사(入社)하셨습니다.
제가 최근 확인한 족보자료로서
계유정란에 참화를 당한 영의정 황보인(皇甫仁)의 장인이신
양성이씨(陽城李氏) 7세 한성윤파(漢城尹派) 이지택(李之澤) 께서도
족보내용에는 검한성부윤(檢漢城府尹)이라 되어 있는데...
위 역대명단에 없는 걸 보면...검(檢)은 검교(檢校)로
실제 사무를 보시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姜明求(통계공-청풍공-忠烈公종회)
또한 전주최씨 경절공 최사강(崔士康)의 묘비중
배위에 대한 내용에서도
그의 장인이신 진주강씨 양희공 강서(姜筮) 선조님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配 晋州姜氏 檢校政丞 筮之女 生一男二女
繼配 陽城李氏 判決事 思恥之女 生二男二女
검교정승(檢校政丞) 그러면 실제 정승은 하지 아니하셨다~??
우리 진주강씨 족보내용과 달라 검토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와~ 굉장한 자료입니다. 감사합니다.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통계공께서 <한성부윤>을 제수받은 사실을
<한성부 우윤(종2품) 선생안>에서 34번째에 실려 있음을 확인하였으나
<재직확인>란은 빈칸으로
실제 부임여부는 제가 아직도 확인할 수 없었다고 말씀드립니다
실록에서 기록된 관직을 살펴보면
통계공의 최종품계는 종2품 벼슬이셨다고 확인되며
정2품이상의 벼슬은 하시지 않았다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