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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토속된장 영월양지뜰 원문보기 글쓴이: 푸른하늘
고구려 시조 주몽이 도읍으로 정한 곳이 바로 졸본성이고 도시 이름은 환인(桓仁)입니다. 단군신화에 나오는 환인이랑 동일한 이름입니다.
백두산에서 환인으로 가려면 서쪽으로 가야 하는데 그 길이 비포장도로인데, 벌목해서 목재를 가득 싣고 다니는 트럭 때문에 길은 온통 패여있습니다. 우리가 탄 봉고차가 구덩이에 빠져서 헤매고 있자 주변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달려들어서 차를 빼줬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의 인정은 여기서도 빛을 발하더군요.
환인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옛 수도답게 큰 문이 있습니다. 조양문(朝陽門)이라고 부릅니다. 여기만 와도 조선족은 별로 없고 조선족자치주가 아니어서 간판도 모두 한자고 한글은 거의 안 보입니다. 백두산에서 여기까지 10시간 넘게 걸리기 때문에 중간에 통화(通化)라는 큰 도시에 하루밤을 자고 아침에 환인에 들어왔습니다.
졸본성은 현재 중국 정부에서 공식 명칭을 오녀산산성(五女山山城)이라고 부릅니다. 왜 그런지는 모두 짐작하겠지요. 그들의 설명으로는 주몽이 떠난 후에 졸본성은 만주족 등 여러 부족의 손에 들어갔는데 그때마다 이름이 바뀌어서 결국 오녀산산성이라고 했답니다. 그 산에 옛날부터 여자 다섯이 살면서 적들로부터 성을 보호했다네요.
성은 아래 사진에서 보듯이 사방이 깎아지르는 듯한 절벽 위에 쌓았습니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아요. 사방이 둥글게 팔괘(八卦) 형태로 되어 있고, 이런 형태는 중국에서 유일하답니다.
주차장에는 박물관이 있고 그곳에서 셔틀버스를 타고 산성으로 올라갑니다. 약 10분 정도를 가면 드디어 절벽 앞에 도달합니다. 거기서부터 돌계단 약 800개를 걸어서 올라가면 꼭대기에 있는 산성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성문은 사방 네개가 있었고 지금은 대부분 西門으로 들어갑니다. 아래 사진은 서문을 위에서 내려다 보며 찍은 것입니다.
성 안에는 왕궁터와 다른 건물들의 터가 남아 있고 성을 한바퀴 도는 길이 나와 있습니다. 길을 따라 가다보면 물을 받아놓았던 천지(天池)가 그대로 모습으로 남아있습니다. 제가 갔던 날은 공교롭게 비가 와서 성을 다 둘러보지는 못했습니다. 산 아래를 내려다 보면 경치가 매우 좋을 듯한데 안개가 자욱해서 전혀 볼 수가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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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돌아봤던 지역을 표시했습니다.
백두산에서 두만강을 따라 오른쪽으로 동해까지 가면,
중국의 남평 (북한의 무산) - 삼합 (북한의 회령) - 개산툰 - 도문 (북한의 남양) - 훈춘 - 방천을 보게 됩니다.
연길은 도문의 왼쪽을 보면 있고,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주도가 있고
연변 조선족들이 집중되어 있는 도시입니다.
연길의 오른쪽 아래에 용정이 있는데
이곳은 일제시대엔 만주국의 중심지였고, 많은 조선족들이 살았으며
박경리의 '토지'의 무대가 된 곳이기도 합니다.
그 가까이에 김좌진 장군의 '청산리대첩' 홍범도 장군의 '봉오동대첩'이 벌어졌던 곳도 있습니다.
백두산의 왼쪽에 집안(集安)과 환인(桓仁)이 있습니다.
환인은 고구려의 주몽이 처음 도읍을 정하여 졸본성을 쌓았던 곳이고
그 유적이 그대로 있습니다.
집안은 고구려가 환인에서 천도했던 곳으로 2대 수도였습니다.
국내성을 쌓았고, 그 유적이 집안 도시 가운데에 남아 있습니다.
그 일대에 광개토대왕비와 왕릉, 장군총, 그 외에 무시히 많은 고구려 유적들이 있습니다.
집안은 압록강을 끼고 있고, 강 건너엔 만포라는 북한 도시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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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에서 북한, 중국, 러시아가 만나는 곳이
바로 훈춘이라는 곳인데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 곳을 무역특구로 개발한다고 개발 바람이 불었고
속초에서 직항여객선까지 다니다가 지금은 중단되었습니다.
중국쪽에서는 방천이라는 곳이 동해 직전까지 연결되어 있는데
동해안까지는 나가지는 못했고,
러시아와 북한이 동해안에서 접하고 있습니다.
남한에서 가려면 러시아 항구나 북한 항구를 이용해서 다시 중국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아래 사진은 방천에 있는 전망대 위에서 찍은 것으로
발 아래까지 중국 땅이고, 멀리 전방 너머에 동해가 있고, 왼쪽은 러시아, 오른쪽은 북한 땅입니다.
아래 사진은 러시아 쪽 전경입니다.
아래 사진들은 북한 쪽 전경입니다.
장군총 부근에 여러 개의 고분들이 있습니다.
그 중의 한 곳에 갔는데
우씨 일가의 고분이라고 합니다.
5개의 고분이 한 곳에 있는 일종의 고분공원이었습니다.
입구에서 지하로 계단이 있고 내려가면
석실이 나타납니다.
그곳에서 책이나 사진으로만 봤던 고구려 고분벽화를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림 그린 솜씨나 물감 등이 지금 수준에 비해 떨어지지 않는 것 같아서
그 당시 고구려의 높은 문화수준을 직접 볼 수 있었습니다.
내부에서 사진 찍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으나
우리 일행 외에는 다른 구경꾼이 없자
가이드가 빨리 찍어라고 해서 동영상으로 촬영했습니다.
이 주위 고분들에서 아래 사진과 같은 벽화들이 나왔다고 합니다.
고구려의 무덤은 처음엔 돌로 쌓았고
점차 흙으로 변해갔다고 합니다.
아래 사진은 환도산성 주변에 있는 고구려 귀족들의 무덤들인데
흙으로 된 것과 돌로 된 것이 혼재되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연길 옆에 용정(龍井)이라는 도시가 있습니다.
용정은 일제시대에는 연변지역의 중심지였고, 특히 일제가 세운 만주국의 중심지였습니다.
여기에 일본군사령부도 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일본군과 전투를 벌리며 항일투쟁을 했던 독립군들이 이 일대에 많이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이곳에서 차로 약 30분 떨어져있는 청산리에서는 김좌진 장군이 청산리대첩을 거두었고,
차로 약 1시간 정도 떨어져 있는 봉오동에서는 홍범도 장군이 지휘하여 봉오동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이들 유적지는 아직 있긴 하나 가보면 안내판 자그마한 것 하나 달랑 있고
자세한 설명은 볼 수 없습니다. 전투가 어디서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궁금하지만 알길이 없습니다.
가이드들도 중구난방이고... 중국 당국의 의도적인 무관심 때문이겠지요.
그 전투 상황은 용정 시내에 있는 대성중학교 옛 교사에 있는 기념관에 가면 간략하게나마 볼 수 있습니다.
일송정(一松亭)은 비암산(琵岩山) 꼭대기에 있는 정자이며,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노래 '선구자'에 나옵니다. 비암산 옆으로 해란강이 흐르고
그 일대에 평강벌이라는 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습니다.
일송정 옆에는 옛부터 소나무가 한 그루 있었습니다. 그런데 일제가 한민족의 혼을 잘라버리겠다며 톱으로 잘랐는데 가지가 옆으로 계속 돋아났다고 합니다. 그래서 결국 뿌리에 독약을 주사하여 죽였다고 합니다. 해방 후 조선족들이 그 자리에 다시 소나무를 심었는데, 자리가 절벽 위여서 뿌리를 못 내리고 계속 죽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몇 년마다 새로운 소나무를 계속 심는다고 합니다.
아래 사진에서 일송정 오른쪽에 소나무가 보이지요? 바로 그것입니다.
연길을 관광회사를 통해 팩케이지 투어로 오면
방문 코스에 일송정이라고 적혀 있기 합니다만
가이드들이 대부분 못 올라간다고 합니다. 백두산 가는 길에 있는데 버스가 못 올라가니 걸어서 올라가면 시간이 많이 걸리므로 못 고 버스 안에서 보고 그냥 지나치게 합니다.
그럼 어떻게 할까요? 사실은 버스가 일송정까지 갈 수 있게 길이 닦여져 있습니다,
가이드에게 200위안 정도를 줘보세요...ㅎㅎ 여긴 중국입니다...이해되시죠?
일송정 기념비입니다
뒷면에는 한글로 일송정이라고 적혀있습니다.
옆면에 선구자 노래가사가 세겨져 있습니다.
선구자 노래는 원래 곡명이 '용정의 노래'였습니다.
용정의 기념일에 맞추어 조선족 작사자와 작곡자가 곡을 만들었는데
노래가 너무 좋아서 늘리 불리면서 가사에 나오는 선구자의 노래로 변했다고 합니다.
중국 당국이 얼마전에 이 노래비를 떼어냈다가 조선족들이 항의를 해서 다시 세겨넣었다고 합니다.
여길 찾아오는 한국사람들은 모두 이 비 앞에서 선구자 노래를 부르고 관광을 시작합니다.
연변과기대에 부임해오는 교직원들도 모두 여길 와서 3절까지 목청 높여 부릅니다.
일송정에서 내려다 본 해란강입니다.
금년엔 비가 많이 와서 강처럼 보이지만 지난 수십년간 가물어서 강에 물이 별로 없었다고 합니다.
이 일대 경치가 바로 만주벌판입니다.
산은 거의 없고 구릉지들만 있습니다.
그 아래 평야가 평강벌이라고 부르는데
우리 선조들이 이주해와서 논농사를 일구었습니다.
반짝이는 곳이 모두 벼를 심어놓은 논들입니다.
이곳은 워낙 비옥해서 비료를 별로 쓸 필요도 없고
밥을 하면 그 맛도 아주 좋습니다.
이 만주 벌판도 우리 것이 되었어야 했는데.... 보면 볼 수로 아까워 죽겠어요...
용정에서 차로 약 30분 정도 떨어진 곳에 시인 윤동주의 생가가 있습니다.
동네 이름은 명동이라고 하고
그 일대에서는 가장 부유한 집이었던 것 같습니다.
여기에 조선족 최초의 소학교였던 명동소학교가 있어서 문익환 목사 같은 분들이 윤동주시인과 함께 공부를 했다고 합니다.
생가 옆 건물에 다음과 같은 귀여운 칠판이 붙어 있습니다.
떠드는 학생이 윤동주라고 하네요...ㅋㅋ
윤동주 생가 옆에 기념관이 있는데
시인의 사진이 모셔져 있습니다.
시인의 묘소는 여기서 조금 떨어져 있는 산에 있습니다.
시인은 일본 오사카형무소에서 독립운동죄로 옥살이를 하던 중
정체불명의 주사를 수차례 받고 해방되기 직전에 돌연사를 했습니다.
일제가 생체실험을 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 유명한 '서시' 친필 원고입니다.
여기에서는 복사본을 판매하고 있습니다.
그 외 자료들도 전시 판매하고 있습니다.
원래 이 기념관은 교회였는데 지금은 기념관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기념관과 생가의 보존 비용은 모두 이 판매대금과 후원금으로 충당하고 있습니다.
생가 건너편에 명동소학교가 있었습니다.
아래 사진의 중앙 우측에 있는 붉은벽돌집이라고 합니다.
용정 시내에 있는 대성중학교 옛건물입니다.
기념관으로 아직 사용하고 있습니다.
대성중학교는 그 당시 주위에 있던 5개 학교를 통합하여 현대식 교육을 실시했고
많은 선구자들을 배출했습니다.
특히 항일운동의 거점 지역이었기 때문에
많은 사료들을 볼 수 있습니다. 안중근 의사도 이곳에 머물면서 사격 연습을 하고 나서 하얼빈으로 가서 이등박문을
처단했다고 합니다.
북한의 김일성도 이 일대에서 항일운동을 했던 것으로 나와있습니다.
여기 사람들 말로는 김일성의 원래 이름은 김성주가 맞다고 합니다.
실제 김일성은 당시 작은 독립군 소대를 이끌던 지휘관이었는데 김성주가 이 사람 이름을 나중에 사용했다고 합니다.
그 과정은 복잡해서 들어도 잘 이해가 안되요...ㅠㅠ
여기 사료 중에 눈이 띄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한일합방의 증거인 을사조약(을사늑약)의 원본에는 고종의 비준과 조약문의 명칭이 없어서
국가간 조약으로 인정할 수 없고 따라서 한일합방은 원인무효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국사 전공하는 동포들은 이것에 대해 설명 좀 해세요...
연길은 현재 조선족이 가장 많이 살고 있고,
인구 약 40만.
그 중 조선족이 대략 30%라고 합니다.
10년 전만 해도 70% 정도 였는데
그 새 대부분이 한국으로 또는 상해나, 북경, 청도 쪽으로 이주해가버렸다고 합니다.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주도가 연길인데, 이 추세로 가면 조만간 조선족자치주가 사라질까 다들 걱정하고 있습니다.
현재는 자치주이기 때문에 간판에는 왼쪽엔 반드시 한글을, 오른쪽에 한자를 쓰게 법으로 규정되어 있고
또 모든 관공서의 기관장은 반드시 조선족이 임명되고 부기관장은 한족입니다.
이런 특혜들이 조만간 다 사라질 위기에 놓여있습니다.
한국에 조선족이 얼마나 많이 나와있는지는
이들이 서울에서 중국은행을 통해 송금해오는 돈이
연길시 일년 예산보다 더 많다고 합니다.
이들이 직접 들고 들어오는 돈이 아마 이보다 더 많을 겁니다.
서울에서 연길로 가는 직항이 있는데 매일 있고, 항상 만원입니다.
연길 입국장에서 세관원이 짐가방을 조사하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시내에서 본 재미있는 광경들을 사진으로 담았습니다.
특히 한글간판이 웃기는 것이 많습니다.
서울의 한글을 그대로 직역하거나
한자를 직역하다보니 엉뚱한 명칭으로 둔갑을 합니다.
예를 들면, 서울에서 미용실에 '헤어 디자인'이라고 붙이자
연길에서는 '머리설계전문'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있습니다.
조선족들도 비만관리를 하는데 살빼는 것을 여기서는 '살까기'라고 합니다.
한자를 직역하여 한글로 표기하다보면 이런 간판이 나옵니다.
노래방은 즐겁게 논다는 뜻으로 '환락모임노래광장'이라고 표기했네요....ㅎㅎ
연길에서 제일 인기있는 음식이 개고기입니다.
물론 조선족들이 먹고, 한족은 거의 안 먹습니다.
저도 딱 한번만 먹었고,
대신 다른 음식은 가리지 않고 먹었습니다.
특히 매운 사천성 음식들이 인기를 얻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래 사진의 원숭이매운탕 집엔 정말 못들어가겠더라고요...ㅠㅠ
연길에도 짝퉁이 많습니다.
그중에서 기발한 것.
한국의 롯데리아 짝퉁입니다...롯디리아.
롯데리아의 지점을 연길에 내는 것을 가지고 양측에서 협상을 하다가 깨지자
연길의 조선족이 롯디리아를 차리고 인테이리어와 도구, 포장지, 맛 등을 그대로 모방해서 현재 성업 중입니다
연길에서 또 빼놓을 수 없는 음식이 냉면입니다.
유명한 진달래냉면집인데, 5층까지 사용하고 늘 만원사례입니다.
연길의 음식 중에 별미라고 부를 만한 것은
'뀀'이라는 것인데, 한자로 입구(口)자 두개를 아래 위로 쓰고 가운데에 길게 아래로 작대기를 그은 것입니다. 바로 꼬치구이를 뜻하는 것인데 신장성에서 넘어온 음식입니다.
아래 사진처럼 꼬치구이를 자리에서 각자 직접 구워먹는 것입니다.
소고기, 양고기, 돼지고기, 닭머리, 떡, 채소 등 꿸 수 있는 것은 모두 꿰서 굽습니다.
한국에도 을지로에 지점이 들어왔다는데 저는 본 적이 없습니다.
가장 유명한 집은 '풍무뀀성"입니다. 1.2층 모두 무지 큰 홀인데, 식사시간에 가면 적어도 30분 이상 기다려야 합니다.
연길에서 가장 흔한 방이 세 개 있는데,
PC방, 약방, 안마방입니다.
아래 PC방은 연길에서 유명한 PC방체인의 하나입니다.
내부에 들어가면 PC가 200대씩 놓어있습니다.
연길의 조선족은 소수민족이어서 자녀를 2명까지 낳을 수 있습니다.
한족은 1명 밖에 못 낳고요. 그러다 보니 자식에 대한 애정이 유별납니다. 우리보다 더 합니다.
신흥소학교라는 초등학교 앞에 부모들이 애들 하교를 기다리는 모습입니다.
시내 곳곳에는 시정부가 내건 구호들이 종종 눈에 띱니다.
"인기를 모아 기회를 틀어쥐고 발전을 도모하여 휘황을 창출하자"
이것은 한자말을 직역하다보니 이런 요상한 말이 되어버렸는데
"인기"는 사람들의 氣(人氣).
"틀어쥐고"는 한자 "포착(捕捉)"를 직역했네요.
연길 시내에는 3개의 북한식당이 있습니다.
중국 내 다른 도시에도 그렇듯이 북한에서 직접 투자해서 운영하고
종업원은 모두 평양에서 파견되어온 여자들입니다.
그런데 생각과 달리 손님들에게 적극적으로 접대를 하더군요.
술은 안 마시는데 분위기는 아주 잘 맞추어주었습니다.
무대로 손을 잡아 끌고 가서 같이 부르스도 추고요.
음식 가격은 상당히 비싼 데도 한국 사람들은 미인계에 거의 홀려서 엄청 쓰고 나옵니다.
아래 동영상은 그날 어떤 조선족 할머니 회갑이었던 것 같습니다.
자식들이 잔치를 벌여드렸는데 여종업원들이 분위기를 맞추어 노래를 불러줍디다.
연길에 골프장이 하나 있습니다.
해란강CC. 2개 코스로 36홀.
해란강변을 따라 18홀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잔디 상태는 겨울이 워낙 추워서 썩 좋지는 않으나
경기하는데는 전혀 문제 없고, 해란강을 따라 걸어가는 기분.. 끝내줍니다.
그린피가 상당히 비싼데, 한국에 있는 본사에 예약하면 할인이 됩니다.
만주 벌판의 바람이 얼마나 센지
한번 찍어봤습니다.
거의 사람이 날라갈듯 합니다.
이런 바람이 연중 수시로 부네요.
이럴 땐 말 타고 다는 것이 가장 멋있는데...ㅎㅎ
시리즈를 마치며....
연길에 4개월 남짓 있으면서 돌아다녔던 데를 사진과 동영상으로 찍어봤습니다.
혹시 이미 보고 들었기 때문에 식상한 분들도 계셨겠지만
혹시 게중엔 의미있다고 생각할 분도 있을 것 같아서 용기를 내어 올려봤습니다.
그러다 보니 올릴 양이 많이 시간이 무지 많이 들었습니다.
동영상을 다른 사이트에 넣었다가 연결하는 방법도 이번에 배우게 되었고요.
어쨌던 재미있게 봤다는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끝으로 제가 있었던 연변과기대의 졸업생 사은회 동영상을 올립니다.
연변과기대는 아시겠지만 조선족 젊은이들에게 대학교육을 시키려고 설립한 대학교입니다.
조선족들은 대개가 가난하고 또 중고등학교에서 영어를 거의 배우지 않아서 (대개 일본어를 제2외국어로 배우고 있었습니다.
소수민족이라서 그렇다네요) 중국의 유명 대학에 입학하기 어렵습니다.
이들을 위해 대학을 설립하였고, 전원 기숙사에 넣어서 집중교육을 시키고 있습니다.
그렇게 4년을 가르쳐서 졸업시키면 대부분 한국계 기업이나 외국계기업에 취업이 가능해집니다.
중국어, 한국어, 영어, 게다가 일본어까지 할 수 있는 애들로 탈바꿈을 하니까요.
이 애들에게는 우리 대학생들에게서는 더 이상 보이지 않는 순진함이 아직 남아있습니다.
키 작고 좀 촌스럽고 어리숙해 보이는 얘들이 더 친근감이 갑디다.
아래 동영상은 졸업생들이 사은회를 한 장면들입니다.
여학생은 한복, 남학생을 까만 정장을 입고 와서
약간을 공연을 하고는 마지막에 모두들 펑펑 울었습니다.
대학생들이 사은회하며 우는 것을 저는 생전 보지 못했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19년 4월13일 상해에서 창설. 수차의 이전을 걸쳐 1926년 보경리 4호 로 옮겨왔습니다. 1932년 5월 홍구공원 폭발사건이 있은후 부득이 상해를떠났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이집에서 7년간 공무활동을 하였습니다 이곳이 바로 한국 임시정부가 상해에서 사무활동을한 시간이 가장길고 지금까지 가장 완전히 보존된곳입니다.
홍구공원(지금은 노신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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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곳이 바로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가 도시락 폭탄을 투척한 곳입니다. 윤봉길 의사의 의거후 당시 국민당의 장개석 총통이 "중국의 백만 대군이 해내지 못한 일을 한국의 한 청년이 해냈다"면서 감탄했고 이 일을 계기로 중국에 있던 김구선생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중국의 인정을 받음과 동시에 많은 지원을 받게 됩니다
윤봉길의사가 직접 저술하여 야학교재로 사용한 농민독본입니다. 윤봉길의사는 처음에는 농민계몽운동에 종사하다가 일본제국주의라는 근원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한 농촌문제역시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독립운동에 투신했습니다.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라는 글을 남기고 고국을 떠나 대련, 청도를 거쳐 1931년 상해에 도착했고 이때 윤봉길의사의 나이는 24살이었습니다. 1932년 4월29일 11시40분 홍구공원에서 열린 일본 천황생일경축식 및 상해사변 전승기념식에서 도시락 폭탄을 던져 시라카와 대장을 저승길로 보내고 일본군 수뇌부 여러명에게 중상을 입힙니다.
윤봉길의사가 사용한 폭탄입니다( 모형)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추서(追敍)
매정(梅亭) 윤봉길 의사 기념당 입니다. |
무산은 우리가 초등학교 때부터 철광석으로 유명한 도시라고 불렀던 곳입니다. 도시의 뒷산 전체가 광산입니다. 그런데 이 철광석 채광권을 중국에 넘겼답니다. 무려 50년간 캐갈 수 있게 계약을 했다고 합니다. 무산에서 광석을 싣고 중국으로 들어오는 덤프트럭이 줄을 섰습니다. 왜 우리에게 채광권을 넘기지 중국에 줘버렸을까요... 통일이 되면 우린 빈털털이 땅에 나무는 하나도 없는 민둥산만 넘겨 받을 겁니다.
그리고 매주 주말이면 전 국민이 동원되어 이 산에 와서 나무 심어야 할겁니다....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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