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5월11주일설교.hwp
2008.5.11 온고을교회 주일설교 (황의찬전도사)
「벧엘-엘벧엘-벧엘」
창35:1~29
살다보면 자기 생활이 “이게 아닌데…”하면서 뒤돌아보게 되는 때가 있다. 계획한 일들은 빗나가고, 시간만 흘러 자기 생활의 의미를 상실한 것이 아닌가 하는 회의가 들 때가 있다.
그런 때 ‘하나님을 믿어야 되는 것 아닌가?’하는 생각이 불현듯 들거나, ‘예수를 믿어야한다’는 유형무형의 메시지가 도착한 일이 있다면, 그것은 ‘주님의 음성’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아냐! 세상 사람들이 다 그렇게 살아들 가는데 뭘’하면서 그냥 물결 따라 가는 길을 택했다면 “당신은 누구의 음성에 순종한 결과가 되었을까?” 보편적으로는 세상의 음성에 순종한 것이고, 신학적으로는 ‘사탄의 음성’에 순종한 것이다.
창세기 35장에서 야곱은 지금 이러한 기로에 서 있다. 외동딸 디나는 이웃나라 추장에게 성폭행을 당했고, 그로 인해 다혈질인 아들들이 나서서 가해자 나라에 침공하여 대량 살상을 저질렀다. 그때 그에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다.
“벧엘로 올라가서 하나님께 예배 하여라!”
야곱은 그 즉시 순종한다. 그래서 그 길을 위한 준비에 착수한다.(2절) 그 준비의 첫째는 “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상을 버리라!”는 것이다. 야곱의 수하에 있는 사람들은 이웃나라들이 각기 나름대로의 신을 만들어 놓고 섬기는 모양을 답습하고 있었다. 당시는 ‘드라빔’을 만들어 섬기는 일이 성행했는데, 이제는 그것들을 모두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자는 명령이다.
둘째, “자신을 정결케 하라!”고 주문했다. 성경에서 맨 처음 “정결케 하라”는 명령이 등장했는데, 인간은 어떤 더러움을 정결케 해야 한단 말인가? 야곱에게 닥친 현실 과제가 무엇인지를 통해서 가늠해 볼 수 있다. 야곱의 딸 디나가 당한 성폭행 사건과 그로 인한 전쟁에서 아들들이 대량 살인 사건을 저지른 일이 야곱을 고통 속으로 이끌었다. 성 도덕의 문란과 전쟁으로 인한 피 흘림이 관건이다. 인류 역사 이래 가장 크고 심각한 문제가 바로 성적 문란과 전쟁이다. 하나님은 바로 이 두 가지 일을 놓고 “정결케 하라”고 명령하셨다.
셋째, “너희의 의복을 바꾸어 입어라!” 죄를 범할 때 입었던 옷은 벗고,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격식에 맞는 옷으로 차려 입으라는 뜻이다. 옷은 대단히 중요하다. 전투복을 입으면 전쟁에 나서서 용맹을 떨치고 싶고, 체육복을 입으면 운동장으로 달려 나가고 싶어진다.
세 가지 명령대로 각자 소지하면서 섬기던 우상을 야곱에게 내놓으면서, 사람들은 자기의 귀고리들도 같이 가져왔다.(4절) 웬 귀고리들?
당시 섬기던 우상은 대부분 ‘드라빔’이었는데, 백성들은 드라빔에게 소원성취와 복을 빌면서 귀중한 패물이나 금붙이 등을 땅에 묻음으로써 자기가 빈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믿었다. 그러니 우상을 포기하게 된다는 것은 재물을 함께 바치던 일까지 중지함을 의미한다. 야곱은 모아진 드라빔과 귀고리들을 땅을 파고 묻었다.(4절b)
이렇게 함으로써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빈손으로 가지 않고 자기의 귀중한 보화를 가져다 바치는 관행이 성경에 기록되기 시작했다. 주님을 사랑하는 자들이 주를 위해 자기의 귀중한 보배 합을 여는 것은 당연하고 자연스런 일이다.
이 세 가지를 함으로써 하나님께 나아갈 준비를 마치고 민족의 대이동이 시작되었다.
한 민족이 일시에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것은 전쟁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자기의 본거지를 놔두고 떠나는 것은 적국에게는 공격의 호기가 된다. 더욱이 야곱의 아들들은 얼마전 이웃 나라 세겜과 정당치 못한 전쟁을 벌이고 그 나라를 멸절시켜버렸기 때문에 자칫하면 인근 국가들로부터 공격의 표적이 될 터였다.
하나님은 이 문제를 해결하신다. 인근 나라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집, 벧엘을 향하는 민족을 섣불리 넘볼 수 없도록 그들에게 공포심을 갖게 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는 ‘신적 공포’ 또는 ‘신적 두려움’이라고 한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믿고 전폭적으로 의지하면, 그분은 ‘신적 공포’를 확산하여 자기 백성을 보호해 주신다.
안전하게 ‘벧엘’에 당도한 야곱과 그의 일행은 제단을 쌓고 그곳에서 다시 만나는 하나님과의 기쁨을 노래한다. 전에 하나님을 만났던 곳, 벧엘에 당도하니 감개무량하고, 성령이 충만하여 감사와 감격이 넘쳤다. 하나님의 집 ‘벧엘’에서 다시 만난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니 “엘벧엘”이다. 그곳에서 야곱은 명령대로 제단을 쌓았다.
하나님도 이스라엘의 옛 이름 ‘야곱’을 거명하시면서 이제는 명실상부한 ‘이스라엘’이 되어라 하시면서 비로소 ‘이스라엘’이란 새 이름으로 불러주신다.
새 이름으로 불리어진 이스라엘, 그의 신앙의 발자취를 살펴보자, 그는 대단한 야망의 사나이로서 야심을 채우기 위해 자기의 능력과 잔꾀와 수완으로 승부를 걸었다. 그의 지나친 욕심을 화를 불렀고, 형으로부터 도망하지 않으면 안 되는 처지가 되었다. 도망 길에 밤이슬 맞으면서 돌베개를 베고 자다가 하나님을 만나는 ‘벧엘’의 신앙을 체험했다. 그러나 그는 얼마 못되어 옛 방식으로 복귀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기 수완으로 세상을 헤쳐 나가려는 태도가 되살아났다. 그런 중에 자신에게 닥친 험난한 사건들에 직면하여 다시 ‘벧엘’을 향한다. 하나님께 다시 나아가 하나님의 집 벧엘에서 다시 만나는 하나님이란 뜻의 ‘엘벧엘’
그곳에서 회한과 감격의 뜨거운 눈물을 흘리는 야곱은 감동의 ‘엘벧엘’신앙에 도달한 것이다. 그러나 좋은 일 다음에 따라오는 슬픈 소식은 또 야곱을 흔들어 놓는다. 그가 가장 사랑하는 아내 라헬이 그만 아들 베냐민을 출산하다가 죽고 설상가상으로 장남 르우벤은 자기의 첩과 간통을 저지른다.
성적 더럽힘과 전쟁으로 인한 살인의 죄악으로부터 정결케 하고 도달한 엘벧엘에서 다시 반복되는 사건들은 ‘성과 속’의 교차를 드러낸다. 이런 사건들은 인생을 질곡 속으로 몰아내며, 그때 자칫 신앙은 흔들린다.
세상의 욕심에서 ‘벧엘’로, 벧엘에서 다시 세상 죄악 속에 빠졌다가 하나님의 은혜로써 ‘엘벧엘’ 신앙으로 상승했으나, 다시 세상풍조 속에 젖어드는가 했더니 다시 ‘벧엘’에 이르는 순환의 고리가 이스라엘의 삶의 여정으로 드러난다.
현대인들은 자신의 인생에는 전쟁도 없었고 성적인 문제점이 없으니 굳이 하나님께 나아가 정결케 할 일이 있겠는가? 하고 큰 소리 친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5:28에서 음욕을 품는 자는 이미 간음을 했다고 경계하신다. 죄에서 정결케 하는 것은 예수님의 피 외에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