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 선진국을 향한 꿈
초범인 점, 피해자와 합의한 점, 피해자나 그 가족이 선처를 바라는 점, 심신이 미약한 상태에서 범행한 점, 의도한 범행이 실행되지 않고 예비에 그친 점, 재발 가능성이 낮은 점, 범행을 자백하고 뉘우치는 점, 과거에 처벌받은 적이 없는 점 등 일반적 예상을 뒤엎는 너그러운 판결의 배경에는 다양한 양형 사유가 존재한다. 그런데 솜방망이 처벌에 안도하는 가해자를 제외하고 이를 수긍할 국민이 얼마나 될지 궁금하다.
국민의 법감정으로는 선고되는 형량들이 죄책에 비해 낮은 게 사실이다. 게다가 가해자의 입장을 대변하는 듯한 감형 이유가 납득이 잘 가지 않는다. 도로에서 작업 중인 근로자 그리고 음식배달원‧행인이 사망해도 음주 운전자에게 부과되는 형량은 3년 안팎이다. 성 관련 범죄에 관한 처벌 역시 가볍기는 매한가지이다. 오죽하면 판사 가족이 똑같은 일을 겪어 봐야 피해자의 심정을 이해할 거라는 원성이 터져 나오겠는가.
일반적으로 불의의 사건‧사고를 당하고 나서 마지막으로 기댈 데는 법이다. 그러나 재판을 통해 억울함이 완전히 해소되리라 믿는 사람은 많지 않다. 보편적 정서와 상식을 외면한 판결이 드물지 않은 까닭이다. 세간의 눈으로 보면 약삭빠른 큰손들은 법망을 쉽게 빠져 나가고 어리바리한 잔챙이 소시민만 걸려드는 듯하다. 법이 무른 것인가. 판사의 법해석 능력에 문제가 있는 것인가, 그도 아니면 해당 사건의 판사에게는 가족이 없는 것인가.
1988년 영등포 교도소에서 충남 공주 교도소로 이감되는 죄수를 태운 법무부 호송 차량에서 교도관을 제압하고 탈주한 4명의 탈주범이 있었다. 그들은 서울의 어느 주택가에 잠입하여 가족을 인질로 붙잡고 세상을 향해 자신들의 억울함을 외쳤다. 이때 그들의 입에서 흘러나온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이 지금까지도 회자되고 있다. 여하한 경우에도 그들이 저지른 죄가 정당화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지 않은 시민들이 그들의 절박한 호소와 분노에 공감을 표한 이유는 무엇일까.
한편, 재작년 말에는 아동 성범죄자 조 아무의 출소를 앞두고 온 나라가 들썩였다. 사회에서 그를 격리시켜 달라는 청원이 빗발치고, 사건을 담당한 판사에 대한 성토가 이어졌다. 죄는 미워도 인간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이 있다. 하지만 타인의 인격과 생명을 무참히 짓밟은 범죄자들이 죗값치고는 턱없이 짧은 형기를 마친 뒤 사회에 복귀하여 활갯짓하고 다니는 상상만으로도 공포심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흉악 범죄가 기승을 부리는 현실을 감안한다면 무고한 시민들의 안타까운 희생을 막기 위한 제도적 장치는 반드시 필요하다. 사형제도 부활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진 것도 그만큼 사회 안전판이 절실하기 때문이다. 사형제도는 사회 질서를 유지하고 정의를 구현할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이후 존폐 여부를 두고 사회 일각에서 꾸준히 논란이 제기되어 1997년을 끝으로 현재는 집행이 중단되었다.
사형제도 반대론자들은 윤리적·종교적 측면을 강조하며 비록 죄인일지언정 소중한 생명을 함부로 박탈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펼친다. 반면에 사형제도 지지자들은 사형제도가 폐지되거나 혹은 존속되더라도 지금처럼 유명무실하면 범죄 성향을 지닌 자들의 범죄 충동을 억제시킬 수 없다고 말한다. 이와 같이 사형제도에 관한 찬반양론이 수그러들지 않는 이상, 국민적 공론화 과정을 통한 재논의도 가능하리라 본다.
사형제도는 사람의 생명과 결부된 만큼 그 어떤 사안보다 깊이 상세히 논의되어야 함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또한 유죄 확정시에도 죄 없는 기결수가 나오지 않도록 만전을 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살인사건의 범인으로 몰려 억울한 옥살이를 했던 모씨 사례를 타산지석 삼아, 죄 없는 시민이 누명을 쓰는 일이 다시는 없어야 한다.
그건 그렇고 위풍당당함의 대명사 격인 사법부가 근년 들어 유달리 뭇매를 맞았다. ‘사법 개혁’, ‘법관 탄핵’이란 말이 나도는가 하면 판사의 실명까지 거론되자 해당 판사가 직접 법원에 신변 보호를 요청하기도 했다. 이에 현직 부장판사가 “검사가 말 안 들으면 검찰 개혁, 판사가 말 안 들으면 사법 개혁, 그 개혁을 ‘겁박’으로 읽는다.”라고 일갈했다. 이후에도 판사가 탄핵을 당하는 헌정 사상 초유의 사건이 이어졌다.
그런데 판사를 ‘판새’라 조롱하는 시류를 통해 짐작하듯, 판사도 이제는 초등학생 희망직업 최상위를 다투던 예전의 그 판사가 아닌 모양이다. 그렇다고 해서 사법부의 위상과 기능이 축소되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사법부는 명실공히 삼권분립의 한 축으로서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수호하기 위해 존재하는 법률기관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다가오는 ‘법의 날’에는 일부 법조인들의 일탈과는 별개로, 사법부 전체 구성원들의 노력과 헌신에 다함께 경의를 표함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2022. 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