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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7월 26일
행주대첩, 율곡 이이 그리고 비무장지대 (DMZ)
1. 분단의 현장
용어해설-GOP,GP,OP, DMZ, MDL, CCL
비무장지대 (De-Militarized Zone)
임진각 - 자유의 다리, 평화누리 공원
도라산역, 도라전망대, 제3땅굴.
대성동 자유의 마을과, 기정동 마을
2.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
화석정(花石亭)
자운서원(紫雲書院), 묘정비(廟庭碑)
3. 행주대첩
임진왜란
충장공(忠莊公) 권율(權慄)장군
행주대첩- 행주산성
신기전(神機箭)과 화차(火車)
중랑구 면목3.8동 주민자치위원회
사가정 역사 탐방대
목차
행주대첩, 율곡 이이 그리고 비무장지대 (DMZ)
1. 분단의 현장
용어해설-GOP,GP,OP, DMZ, MDL, CCL
비무장지대 (De-Militarized Zone)
임진각 - 자유의 다리, 평화누리 공원
도라산역, 도라전망대, 제3땅굴.
대성동 자유의 마을과, 기정동 마을
2.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
화석정(花石亭)
자운서원(紫雲書院), 묘정비(廟庭碑)
3. 행주대첩
임진왜란
충장공(忠莊公) 권율(權慄)장군
행주대첩- 행주산성
신기전(神機箭)과 화차(火車)
중랑구 면목3.8동 주민자치위원회
사가정 역사 탐방대
제13회 청소년 역사탐방 일정표
오전 7시 20분 - 해설자, 인솔자 미팅
7시 50분 - 사가정역 광장.
인원점검 및 차량배정.
8시 00분 - 출발.
9시 00분 - 임진각 도착.
비무장지대 출입수속.
도라산역, 도라산 전망대, 제3땅굴 견학.
대성동 자유의 마을 탐방.
오후12시 30분 - 점심시간 (임진각).
1시 30분 - 화석정 도착.
2시 00분 - 자운서원 도착.
3시 00분 - 행주산성 도착.
간식.
5시 30분 - 행주산성 출발.
7시 00분 - 사가정역 도착.
제13회 사가정 역사탐방 해산.
* 시간엄수 요망!!
특히 비무장지대 출입시 각 차량 인솔자 선생님들은
학생들및 학부모 안전에 만전을 기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 비상 연락망
정인봉 간사 : 016-657-9171
1호차 박시연 : 010-9068-2837
2호차 임종연 : 010-6801-7600
제13회 청소년 역사탐방에 즈음하여..
중랑구 면목3.8동 주민자치위원회 주관으로 2009년 중랑구 면목3.8동 사가정 역사탐방대의 “제13회 청소년 역사탐방”을 실시하게 됨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이번 제13회 청소년 역사탐방은 지구상 유일의 분단국가인 한반도의 비무장지대(DMZ)을 돌아보며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조국분단의 냉엄한 현실을 알려주고, 통일의 염원을 심어주고자 합니다.
또한 조선시대 중기의 최고의 학자이신 율곡이이 선생의 사상적 배경과 사적지인 화석정과 자운서원 및 이이 선생의 가족묘를 돌아보고, 마지막으로 임진왜란의 3대 대첩중 하나인 행주대첩의 유적지인 행주산성과 충장사를 탐방하여 권율장군의 생애와, 임진왜란의 3대 대첩중 하나인 치열했던 행주대첩, 그날의 함성과 감동을 같이 느껴 보고자 합니다.
제13회 청소년 역사탐방을 위하여 물심양면으로 힘써주신 중랑구 의회 행정재경위원장 김주용위원님, 면목 3.8동 유재학 동장님, 그리고 주민자치위원 여러분들과 역사탐방에 참가해주신 학생, 학부모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2009년 7월 26일
제13회 청소년 역사탐방대장
면목 3.8동 주민자치위원장 이 동 호
제13회 청소년역사탐방 해설 박 시 연
임 종 연
1. 용어해설
1. GOP(General Out Post)일반전초
통상 부대가 행군 후 정지하고 있을 때, 야영지나 전투진지에 있을 때 주력부대가 적의 기습을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주력부대로부터 상당한 거리를 두고 배치되는 소대급 규모의 부대로서, 배치된 일반전초는 적군의 접근을 조기에 탐지하여 주력부대에 경고함과 동시에 제한된 공격행동으로 적부대를 지연시키고 주력부대의 위치를 기만하여 가능하면 적이 아군 주력부대에 도달하기 전에 최대의 희생을 치르도록 강요하는 임무를 수행한다. 통상 철책부대를 호칭하는 말이다.
2. GP(Guard Post)감시초소
군사분계선에서 북쪽으로 2㎞ 떨어져 동서로 그은 선을 북방한계선, 남쪽으로 2㎞ 떨어져 동서로 그은 선을 남방한계선이라고 한다. 남방한계선과 북방한계선 사이의 4㎞를 비무장지대(DMZ)라 하여 남북 사이의 완충지대로 삼아 출입을 통제하고 있는데, 이 남방한계선과 군사분계선 사이에 '전초(前哨)'로 부르는 'GP'가 있다. GP는 말 그대로 감시초소로서 북한군의 침투나 매복을 조기에 발견하고, 또한 북한의 동태를 파악하는 즉 군사 활동을 감시하는 최전선에 위치한 초소로서 통상 철책부대의 수색대대가 임무를 수행하는 경우가 많다. 민정경찰이라고도 한다.
3. OP(Observation Post)관측소
아군 및 적군 부대를 볼 수 있으며 포와 화기 사격을 지휘·조절할 수 있는 위치로, 대공관측수가 비행기 및 기타 방법에 의하여 탐지되지 않은 목표물의 접근을 탐지하고 정보를 제공할 수 있는 지점을 선정한다. 관측하기 쉽고, 엄폐(掩蔽)와 은폐(隱蔽)가 용이하며, 후방으로의 통로가 은폐되며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설치된다. 통상 관측장교와 관측병이 위치하고 철책부대의 경우는 같이 있는 곳이 많다.
4. DMZ(Demilitarized Zone) 비무장지대
통상 군사분계선을 중심으로 남방한계선과 북방한계선 사이의 4㎞의 지대를 말하며 비무장지대에는 군대의 주둔이나 무기의 배치, 군사시설의 설치가 금지되며, 일단 비무장지대의 설정이 결정되면, 이미 설치된 것을 철수 또는 철거하여야 한다. 비무장지대는 주로 적대국의 군대간에 발생할 우려가 있는 무력충돌을 방지하지 하는 목적으로 주로 설정 된다.
5. MDL(Military Demarcation Line) 군사분계선
한국의 경우 1953년 7월 27일에 성립한 '한국군사정전에 관한 협정'에 규정된 휴전의 경계선을 말하며, 이것이 이른바 휴전선이다. 그 길이는 모두 155마일(약 250km)로, 동해안의 간성(杆城) 북방에서 서해안의 강화(江華) 북방에 이른다.
6. CCL(Civilian Controlled Line)/민간인 통제선(민통선)
남방한계선에서 5~20km떨어진 지점에 설정된 선이다. 휴전선 일대의 군 작전 및 군사시설 보호와 보안 유지를 목적으로 민간인의 출입을 제한하기 위해 만든 것으로 1954년 2월 미육군 제8군 사령관의 직권으로 귀농선(歸農線)이라는 이름으로 설정되었다. 휴전선 방어 임무를 한국군이 담당하면서 1958년 6월 군 작전 및 보안상 지장이 없는 범위에서 출입 영농과 입주 영농이 허가되었고, 민간인통제선(민통선)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1) 분단의 확인 -비무장 지대 (DMZ)
비무장지대는「정전협정」에 규정되어, 군사분계선에서 양측이 2km씩 후퇴하여 완충지대로서 설치한 지역이다. 서쪽은 한강 하구의 교동도, 동쪽으로는 강원도 고성군 명호리에 이르는 248km (155마일)에 이르는 한반도 허리를 가로지르는 분단의 상징이다. 비무장지대 내의 군사분계선에는 철책선이 없고, 군사분계선임을 표시하는 표지판이 설치되어 있다.「정전협정」에 의하면 비무장지대에서는 개인 화기(권총 혹은 단발식 보총) 이외에는 무장이 금지되어 있고, 군인과 민간인의 출입 또한 통제되었다.
1. 비무장지대의 역할
「정전협정」제10항에 의하면, 비무장지대 내의 군사분계선 이남지역은 UN군 총사령관이, 이북지역은 인민군 및 중국군 총사령관이 관리책임을 맡게 되어 있다. 따라서 이러한 문제 때문에 남북한이 비무장지대에 대한 독자적인 결정과 변화를 시도할 수 없게 되어있다. 이러한 문제는 경의선과 동해선, 그리고 금강산 육로 관광문제를 둘러싸고, 해당 지역의 비무장지대 통과에 대한 관리 책임을 둘러싸고 북한과 미국 간에 신경전이 벌어지는 근거가 되기도 했다.
2. 전망
최근 비무장지대는 남과 북의 대립의 상징으로서만 아니라 자연의 보고로서 보존의 가치가 높은 지역으로 인식되고 있다. 이 지역은 오랫동안 개발이 정지된 곳이어서 자연환경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편 비무장지대는 지난 2000년의 〈남북정상회담〉 이후 경의선과 동해선, 그리고 금강산 육로관광이 실시됨으로써 조금씩 개방되고 있다. 대표적으로 지난 1998년 6월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소떼 방북이 판문점을 통해 이루어졌고, 분단 반세기만에 처음으로 2003년 10월에는 정주영 체육관 개관식과 남북 합동 축하공연 참가를 위한 대규모 방북단이 판문점이 아닌 군사분계선을 넘어 북한을 방문하였다. 앞으로 대규모 방북이나 금강산 관광, 경의선·동해선 연결 등이 이루어지면 군사분계선의 여러 곳이 개방될 것이며, 이렇게 될 경우 비무장지대와 군사분계선의 변화가 요구될 것이다. 이는 곧 한반도의 평화체제 수립에 한 걸음 더 가깝게 다가서는 것이 될 것이다.
3.민간인 통제선 (민통선)
비무장지대는 1953년 7월 맺어진 정전협정에 의해 설정된 군사분계선을 중심으로 되어 있다. 이 군사분계선에서 남으로 2km떨어진 선이 남방한계선이며, 북으로 2km떨어진 선이 북방한계선이다. 비무장지대는 남방한계선에서부터 북방한계선 사이의 지역으로서, 남북간의 적대행위 및 전쟁재발 방지를 위해 설치된 완충지대이다.
남방한계선으로부터 5∼20㎞ 밖에 민간인 통제선이 설정되고 있으며, 민통선에서 남방한계선까지의 지역을 민간인 통제구역이라고 한다. 휴전 협정에 의해 설정돼 군대의 주둔이나 무기의 배치, 군사시설의 설치가 금지되고 있는 비무장지대와는 구분된다.
또한 민간인 통제구역은 낮은 인구밀도와 개발억제의 반사적 효과로 양호한 자연상태를 유지하게 됨으로써 최근 비무장지대와 함께 유일한 자연생태계 보전지역으로 자연자원의 가치를 높이 평가 받고 있다.
2) 분단의 현장 - 임진각, 자유의 다리
자유의 다리는 1953년 한국전쟁 포로교환 당시 북한에 억류되어 있던 전쟁포로 12,773명이 이 다리를 통해 자유를 찾아 귀환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 다리 옆에 지금은 교각만 남아있는 경의선 철교는 이미 폭격으로 파괴되어 있었기 때문에 포로들이 차량으로 경의선 철교까지 도착하여 임시로 가설된 이 자유의 다리를 걸어서 건너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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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분단의 끝, 통일의 시작- 도라산역
민간인 통제구역인 비무장지대(DMZ) 남방한계선에서 700여미터 떨어진 남쪽 최북단역이다. 2002년 2월 20일 미국의 부시대통령이 방문하여 세계적으로 주목을 끈 그리고 남북화해의 미완성 역이기도 한 도라산역은 2001년 10월 임진강역 개통에 이어 2002년 2월 12일 설날에는 철도운행이 중단된지 52년만에 임진강을 통과하는 특별 망배열차가 운행되었다. 도라산역의 평양 205km, 서울 56km의 이정표는 남북분단의 현실과 앞으로 극복해야 할 희망과 기대를 담고 있다. 도라산역은 남방한계선상의 남측 최북단 역인 관계로 향후 경의선 철도연결이 완료되어 남북왕래가 가능해질 경우 도라산역에서 북한은 물론 중국이나 러시아를 가는 사람 및 화물등에 대해 관세 및 통관업무를 담당하는 역사성을 지니게 된다. 향후 도라산역은 한반도 분단의 상징적 장소이면서 남북교류의 관문이라는 이중적 역사의미도 아울러 내포하고 있다.
4) 도라산 전망대
도라 전망대는 송악산 OP 폐쇄에 따라 대체 신설 되었으며 북한의 생활상을 바라볼 수 있는 남측의 최북단 전망대로서 개성의 송학산, 김일성 동상, 기정동, 개성시 변두리, 기차화통(장단역) 금암골(협동농장)등을 망원경을 통해 바라볼 수 있는 곳이다.
연건평 243평으로 관람석 500석, 상황실, 주차장 등의 부대시설이 있으며 일반인에게는 1987년 1월부터 공개 되었다.
5) 도라산의 유래
도라산은 경기도 장단군에 있는 산이다. 장단군은 고구려 때 장천성현(長淺城縣)이었고, 조선 예종조에 이르러 도호부로 승격되었다. 도라산의 유래는 지금으로부터 1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신라가 경순왕 10년(879)에 폐망하자 경순왕의 11왕자는 사분오열로 뿔뿔히 흩어지니 할 수 없이 경순왕은 신라 도읍 경주에서 머나먼 천리길 송도를 찾아 항복하였다. 고려 태조는 왕건의 딸 낙랑공주를 아내로 맞이하게 하고 유화관을 하사하였으며 정승을 봉하는 한편 경주를 식음으로 하여 사심관을 파견하였다. 그러한 가운데 낙랑공주는 비운을 맞게 된 경순왕의 우울한 마음을 달래고저 도라산 중턱에 암자를 짓고 머물게 하였는데 영원히 이곳을 지키겠다는 뜻에서 영수암이라고 이름지었으며 경순왕이 조석으로 이 산마루에 올라 신라의 도읍을 사모하고 눈물을 흘리었다 하여 도라산이라고 호칭하게 되었다.
이곳에서 고려경종 3년(935)에 경순왕이 돌아가시니 고랑포 뒷산 아늑한 골짜기 남향 자좌오향에 안장 되었으며 낙랑공주는 영수암이 훼손함에 따라 아담하게 새로 절을 건립하여 경순왕의 화상을 모시고 명복을 기원하는 한편 영원히 번창하라는 뜻에서 “창화사”라 호칭하였다고 하며 조선조 말까지 임갑진 스님이 수호 관리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조선조 개창 이후 도라산 마루에 봉수대를 설치 군인들을 주둔시키고 국난시에는 봉화 신호로 송도와 파주 봉수대를 거쳐 한양으로 소식을 전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지금 이곳은 남북이 갈라진 38선을 지키기 위하여 정상에 전망대를 설치 국군들이 수호하고 있으며, 제3땅굴과 아울러 실향민과 여러 지역 관광객들이 자주 찾아오고 있다.
창화사는 전란으로 소실되었으며 경순왕릉은 영조대왕이 복원한 후 현재는 민통선안에 위치하고 있다.
6) 분단의 현실 - '제3땅굴'
제3땅굴은 북한이 기습작전을 목적으로 휴전선 비무장지대의 지하에 굴착한 남침용 군사 통로이다. 1978년 10월 17일 판문점 남쪽 4km 지점인 군사분계선 남방 435m 지점에서 발견된 땅굴로 서울에서 불과 44km 거리이며 너비 1.95m, 높이 2.1m, 깊이 지하 73m, 길이 약 1.6km에 달하는 암석층 굴진 아치형 구조물이다. 전술능력은 1시간에 3만 명의 병력과 야포 등 중화기를 통과시킬 수 있다.
7) 남측 대성동 자유의 마을과 북측 기정동 마을
대성동의 역사
대성동의 원래 행정구역은 전쟁 전 장단군 군내면 조산리였다. 전쟁이 끝난 후, 대대로 이 마을에 살던 주민 30가구 160명이 다시 돌아온다. 북한의 기정동 마을과 남한의 대성동 마을은 직선거리 1.8㎞. 코앞에서 마주보며 이렇게 최북단, 최남단 마을로 남는다. 1962년 장단군에서 파주군 군내면 조산리로 행정구역이 개편됐다. 마을 앞 팔각정에 오르면 400m 앞에 군사분계선이 있고, 200m 앞에 북한군 초소가 있다. 손에 잡힐 듯 벌판 너머로 북한이 넘어다 보인다. 회관 옥상에서 북을 바라보면 망원경을 통하지 않아도 개성공단이 보이고 개성공단을 오가는 차량들이 다리를 건너는 것도 훤히 보인다.
대성동은 유엔사의 특수한 법률이 적용되는 동네다. 이곳 주민은 병역의무와 세금이 면제되고 초교를 졸업하면 대한민국 어느 학교라도 원하는 곳에 갈 수 있다. 밤 12시까지 돌아와야 하고 그 이후 시각에는 출입이 금지된다. 또한 사람이 죽으면 외부 조문객이 들어와야 하는데 규칙대로라면 장례식이 다 끝난 후에나 조문할 수 있지만 예외는 있다. 이곳 주민들의 일상은 유엔사 민정부대와 뗄 수 없다.
선생님 질문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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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
율곡 이이는 본관이 덕수, 자는 숙헌(叔獻)으로 중종 31년(1536) 강원도 강릉 외가에서 이원수와 사임당 신씨 사이에서 출생하였다.
명종 3년(1548) 진사시에 합격하고, 19세에는 금강산에 들어가 불교를 공부하다가, 다음해 하산하여 성리학에 전념하였다. 22세에 성주목사 노경린의 딸과 혼인하고, 다음해 예안의 도산(陶山)으로 퇴계 이황을 방문하였다.
그해 별시에서 '천도책(天道策)'을 지어 장원하고, 이 때부터 29세에 응시한 문과 전시(殿試)에 이르기까지 아홉 차례의 과거에 모두 장원하여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일컬어졌다. 29세 때 임명된 호조좌랑을 시작으로 관직에 진출하여 예조·이조 좌랑 등의 육조 낭관직, 사간원 정언, 사헌부 지평 등의 대간직, 홍문관 교리, 부제학 등의 옥당직, 승정원 우부승지 등의 승지직 등을 역임하여 중앙관서의 청요직을 두루 거쳤다.
아울러 청주목사와 황해도관찰사를 맡아서 지방의 외직에 대한 경험까지 쌓는 동안, 자연스럽게 일선 정치에 대한 폭넓은 경험을 하였고, 이러한 정치적 식견과 왕의 두터운 신임을 바탕으로 40세 무렵 정국을 주도하는 인물로 부상하였다.
그동안 '동호문답(東湖問答)', '만언봉사(萬言封事)', '성학집요(聖學輯要) 등을 지어 국정 전반에 관한 개혁안을 왕에게 제시하였고, 우계 성혼과 '이기 사단칠정 인심도심설(理氣 四端七情 人心道心說)'에 대해 논쟁하기도 하였다.
선조 9년(1576) 무렵 동인과 서인의 대립 갈등이 심화되면서 그의 중재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고, 더구나 건의한 개혁안이 선조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자 벼슬을 그만두고 파주 율곡리로 낙향하였다. 이후 한동안 관직에 부임하지 않고 본가가 있는 파주의 율곡과 처가가 있는 해주의 석담(石潭)을 오가며 교육과 교화 사업에 종사하였는데, 그동안 '격몽요결(擊蒙要訣)'을 저술하고 해주에 은병정사(隱屛精舍)를 건립하여 제자교육에 힘썼으며 향약과 사창법(社倉法)을 시행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당시 산적한 현안을 그대로 좌시할 수 없어, 45세 때 대사간의 임명을 받아들여 복관하였다. 이후 호조, 이조, 형조, 병조판서 등 전보다 한층 비중 있는 직책을 맡으며, 평소 주장한 개혁안의 실시와 동인·서인 간의 갈등 해소에 적극적 노력을 기울였다. 이 무렵 '기자실기(箕子實記)'와 '경연일기(經筵日記)'를 완성하였으며 왕에게 '시무육조(時務六條)'를 지어 바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런 활발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선조가 이이의 개혁안에 대해 계속 미온적인 태도를 취함에 따라 그가 주장한 개혁안은 별다른 성과를 거둘 수 없었으며, 동인·서인 간의 대립이 더욱 격화되면서 그도 점차 중립적인 입장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그 때까지 중립적인 입장을 지키려고 노력한 그가 동인측에 의해 서인으로 지목되는 결과를 가져오고, 이어서 동인이 장악한 삼사(三司)의 강력한 탄핵이 뒤따르자 48세 때 관직을 버리고 율곡으로 돌아왔으며, 선조 17년(1584) 1월 16일 서울 대사동 집에서 49세로 삶을 마감하였다.
1) 화석정(花石亭)
1974년 9월 26일 경기도유형문화재 제61호로 지정되었다.
임진강가 벼랑 위에 자리잡고 있는 정자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겹처마의 초익공(初翼工) 형태로 조선시대 양식을 따른 건물이다. 원래 고려 말 대유학자인 길재(吉再)의 유지(遺址)였던 자리라고 전해지나 자세한 문헌 기록은 없다.
그 후 1443년(세종 25) 율곡 이이(李珥)의 5대 조부인 강평공(康平公) 이명신(李明晨)이 세운 것을 1478년(성종 9) 율곡의 증조부 이의석(李宜碩)이 보수하고 몽암(夢庵) 이숙함이 화석정이라 이름지었다고 한다. 이숙함의 정자에 대한 기록에 의하면 당나라 때 재상 이덕유(李德裕)의 별장인 평천장(平泉莊:경치가 매우 아름다웠다 함)의 기문(記文) 중에 보이는 "花石"을 따서 정자 이름으로 삼았다고 한다.
그 후 이이(李珥)가 다시 중수하여 여가가 날 때마다 이곳을 찾았고 관직을 물러난 후에는 이곳에서 제자들과 함께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당시 그의 학문에 반한 중국의 칙사(勅使) 황홍헌(黃洪憲)이 이곳을 찾아와 시를 읊고 자연을 즐겼다는 이야기도 있다.
또한 왜구의 침공에 대비해 10만양병설을 주장한 이이의 상소를 받아들이지 않은 선조가 임진왜란 때 의주로 피난 가던 중 한밤중에 강을 건널 때 이 정자를 태워 불을 밝혔다는 이야기로도 유명하다.
그 후 80여 년간 빈터만 남아 있다가 1673년(현종 14)에 이이의 증손인 이후지(李厚址)·이후방(李厚坊)이 복원하였으나 1950년 6·25전쟁 때 다시 소실되었다. 현재의 정자는 1966년 경기도 파주시 유림들이 다시 복원하고 1973년 정부가 실시한 율곡 선생 및 신사임당 유적 정화사업의 일환으로 단청되고 주위도 정화되었다.
건물의 정면에는 정치가 박정희가 쓴 "花石亭" 현판이 걸려 있으며 내부에는 이이가 8세 때 화석정에서 지었다는 <팔세부시(八歲賦詩)>가 걸려 있다. 유형문화재 제61호(1974. 9 지정)이며, 경기도 파주시 파평면 율곡리 산100-1에 위치하고 있다.
<팔세부시(八歲賦詩)>
林亭秋已晩 임정추이만 숲속 정자에 가을 이미 늦으니,
騷客意無窮 소객의무궁 시인의 시상은 끝이 없구나.
遠水連天碧 원수연천벽 먼 물줄기는 하늘에 잇닿아 푸르고,
霜楓向日紅 상풍향일홍 서리 맞은 단풍은 해를 향해 붉도다.
山吐孤輪月 산토고륜월 산은 외로운 둥근 달을 토해 내고,
江含萬里風 강함만리풍 강은 만리의 바람을 머금었도다.
塞鴻何處去 새홍하처거 변방의 기러기는 어디로 가는고?
聲斷暮雲中 성단모운중 소리가 저녁 구름 속에 끊어지도다
2) 자운서원(紫雲書院)과 묘정비 (경기도 유형문화제 제77호)
1973년 7월 10일 경기도기념물 제45호로 지정되었다. 1615년(광해군 7) 지방 유림의 공의로 율곡 이이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하여 창건되어 1650년(효종 원년) 자운(紫雲)이라는 사액(賜額)을 받았다. 1713년(숙종 39) 김장생(金長生)과 박세채(朴世采)를 추가로 배향하여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을 담당하다가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1969년 지방 유림의 기금과 국비보조로 복원하여 1975년과 1976년에 보수하였다. 높은 대지 위에 사당을 앉히고 사괴석 담장을 둘러 삼문 앞 계단으로 오르도록 설계하였다. 사당은 6칸으로 익공계(翼工系) 형식 팔작지붕이며 이이 좌우에 김장생과 박세채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그외 신문(神門)과 동서 협문(夾門)은 양측면을 박공으로 마감한 솟을대문 모양이며, 묘정비(廟庭碑)가 세워져 있다. 좌우 능선에 이이와 부모의 묘소가 있다. 매년 8월 중정(中丁)에 향사를 지낸다.
자운서원 묘정비는 율곡 이이 선생의 덕행을 기리는 자운서원의 내력을 기록한 비이다.
숙종 9년(1683년)에 세워졌으며, 율곡 선생의 선영이 있는 이 곳에 서원이 세워지자 효종은 '자운(紫雲)'이라는 현판을 내려 사액서원으로 삼았다. 장방형의 대석(臺石, 받침돌)위에 비신을 세우고 그위에 팔작지붕 모양의 개석(蓋石, 덮개돌)을 얹었다. 송시열이 글을 짓고 김수증이 예서체로 글을 썼다.
자운서원에 있는 다른 유적들을 찾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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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행주대첩- 행주산성
1) 임진왜란(1592년 ~1598년)
임진왜란 당시의 시대상황
조선 - 오랜 평화와 성리학의 발전, 이민족에 대한 지나친 우월감으로 국방 정책에 소홀하였다. 특히 이율곡의 십만 양병 설을 무시하였으며, 양반 계급끼리의 세력 싸움으로 국론이 분열되었고, 조세 제도 문란으로 민심이 극도로 혼란하였다.
일본 - 1590년. 일본의 한 지역에서 한때 원숭이란 별명으로 불렸던 사내가 인생 최대의 결전에 나서고 있었다. 그가 앞세운 30만군의 포위전 앞에서 왜국 전국 시대 최강의 방어를 자랑한다는 오다와라(小田原) 성의 호죠(北條) 가문은 굴복하였고, 이로서 수 백 년을 이어온 전란의 세월은 종지부를 찍었다.
종합 - 수없이 갈라진 일본 전국(戰國)이 하나로 통일된 것. 이는 오랜 전쟁에 시달려온 왜국의 서민들에게 더 없이 기쁜 일이었지만, 바다 건너 조선이라는 나라에는 무관한 일로 받아들여졌고, 그리하여 당시 조선의 정부 인사들은 같은 해 통신사를 보내면서도 그에 대해 아무런 관심을 두지 않았다. 통신사 정사인 황윤길(黃允吉)이 "왜국의 침략 가능성"에 대해 논하는 것에 대해 당시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동인 출신 부사 김성일(金誠一)은 "괜한 걱정으로 민심이 어지러워질 것을 우려"하여 반대 의견을 내고 있었으니, 그야말로 태평 세월에 도끼 자루 썩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 해도 좋을 것이다. 물론, 조정이라고 대비를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당시 계속되던 무역 불균형 속에 왜구의 침입이 잦았던 것도 있었기에 조정에서는 장치 대규모 왜구 침공이 있을 것을 우려하여 나름대로 신경을 쓰고 있었던 것이다. (실례로, 16세기에 들어 빈번해진 왜구 침공은 16세기 중기(1550년대)에는 수 십 척에 달하는 왜선들이 활동하기에 이르렀고, 이에 대해 조선 조정에서는 최소한 전쟁 발발 1년 전부터 이순신, 원균, 권율 등 인재들을 요소에 임명하여 파견하는 등 대비하긴 했으나, 어디까지나 이제까지의 왜구 침공 정도로만 생각했기에 준비는 충분치 않았다.)
임진왜란(1592~1598)
1597년 제2차 침략전쟁을 따로 정유재란이라고도 하며, 일본에서는 분로쿠 게이초[文祿慶長]의 역(役), 중국에서는 만력(萬曆)의 역(役)이라고 한다. 조선 조정에서는 남해안 지방에 왜구들이 자주 침략하자 군국기무(軍國機務)를 장악하는 비변사(備邊司)라는 합좌기관(合坐機關)을 설치하여 이에 대비하였으나, 선조 때에 지배계급은 당파를 중심으로 분열하여 서로 반목질시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파쟁으로 중앙에서는 국방정책조차도 마련하지 않고 변해가는 동양의 국제정세를 명(明)나라와의 친선관계만으로 해결하려 하였다. 또 안일 속에서 고식적인 대책에만 만족해하던 지배층은 인접국가인 일본이나 대륙의 여진족의 정치적 변동이나 사항을 구체적으로 탐지하려 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16세기 말에 일본에 파견한 통신사(通信使)도 당파적인 엇갈림에 치우쳐 상반된 내용을 보고하였다.
한편 이이(李珥)는 10만 양병설(養兵說)을 주장하기도 했으나 조선사회는 이미 오랜 평화 속에서 지배계층인 사대부의 편당(偏黨)정치, 기강의 해이, 전세제(田稅制)의 문란 등 여러 폐단으로 인심이 동요되었다. 조정에서는 각 도에 왜군의 침공에 대비하여 성곽을 수축하고 군비를 정비하라는 명령을 내려도 몇 곳을 제외하고는 민폐를 야기시킨다는 원성만 높았으며 이에 동조한 일부 수령들도 전비(戰備)를 중지하라는 장계(狀啓)를 올리기도 하였다.
한편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대륙침공의 의도를 구체적으로 나타낸 것은 1585년경부터였고 1587년에 그는 국내 통일의 마지막 단계에 이르러 규슈[九州]정벌을 끝마치고 대마도주(對馬島主) 소 요시시게[宗義調]에게 조선 침공의 뜻을 표명하였다. 그러나 조선 사정에 정통한 쓰시마 도주는 이 계획이 무모한 것임을 알고 조선이 통신사를 파견할 것을 건의하였다.
따라서 쓰시마도주는 가신인 다치바나 야스히로[橘康廣]를 일본국왕사(日本國王使)로 하여 1587년 조선으로 파견, 일본 국내사정의 변화를 설명하고 통신사의 파견을 요청하였다. 이 첫번째 일본 사신이 부산에 도착하였을 때 그들의 영접에 대한 가부와 서계(書契)의 서사(書辭)가 종래와 달리 오만하다 해서 문제가 되어 조정에서는 여러 논의가 있었다. 특히 공주교수(公州敎授) 조헌(趙憲)은 만언소(萬言疏)를 올려 시폐(時弊)와 국방을 논하는 등 일본 정벌의 강경론을 주장하자 결국 조정에서는 수로미매(水路迷昧)를 이유로 통신사의 파견을 거절하였다.
도요토미의 첫번째 외교가 실패하자 다시 쓰시마도주의 알선으로 1588년 10월과 89년 6월, 두 차례에 걸쳐 조공과 함께 통신사의 파견을 간청하고 앞서 왜구의 앞잡이가 되어 노략질한 조선인을 잡아 보내왔다. 이에 조선 정부는 1590년 3월 황윤길(黃允吉)을 정사(正使), 김성일(金誠一)을 부사(副使), 허성(許筬)을 종사관(從事官)으로 한 통신사 일행을 파견하였고 이들은 이듬해 정월 일본의 답서를 가지고 귀국하였다.
일본의 답서에는 종래의 외교관례에 따르지 않는 무례한 구절과 정명가도(征明假道)를 뜻하는 글이 있어 침략의 의도가 분명하였으나 1591년 3월 이들 사신이 복명하는 자리에서 정사 황윤길(서인)은 왜가 반드시 침략할 것이라고 한 데 반해 부사 김성일(동인)은 왜가 침범할 동정이 없다는 상반된 보고로 당파적인 엇갈림과 함께 조정의 의견도 통일되지 못하였다. 동인세력은 서인들이 전쟁을 빌미로 정치적 위기를 넘기려한다고 의심하였기 때문이었다.
이어 제3차 일본 사신 일행이 조선 통신사보다 한달 늦게 입경하여 일본이 가도입명(假道入明)하리라는 통고에 조정은 놀라 그 해 5월에 일본의 서계 내용과 함께 왜정(倭情)을 명에 알리는 한편 일본의 침공에 대비하여 김수(金晬) ·이광(李洸) ·윤선각(尹先覺) 등으로하여금 경상 ·전라 연안의 여러 성을 수축하게 하고 각 진영의 무기를 정비하게 하였다. 신립(申砬) ·이일(李鎰)에게는 변비(邊備)를 순시하게 하는 등 요충지인 영남지방의 방비에 힘을 기울였으나 이미 시기가 늦었다.
이 동안 일본의 침략계획은 더욱 성숙하여 내전을 통해 연마한 병법·무예·축성술(築城術)·해운술 등을 정비하고 조총(鳥銃)의 대량생산도 진행되었다. 1592년 4월 13일 경상도 동래부 다대포 응봉봉수대(鷹峰烽燧臺)에서는 왜군의 700여 병선(兵船)이 쓰시마를 출항하여 부산포에 이르고 있다는 상황보고가 곧 경상·전라도의 각 감영(監營)과 중앙에 전달되었다.
그러나 경상좌수영군은 저항도 하지 못한 채 궤멸되었고 14일에는 왜군 선발대인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약 1만 8000 병력이 부산성을 공격하여 십수시간의 혈전 끝에 부산성(釜山城)을 사수하던 부산진첨사(釜山鎭僉使) 정발(鄭撥) 등의 전사로 성을 빼앗겼다. 이튿날 동래(東萊)에 진격한 왜군들과 맞선 동래부사(東萊府使) 송상현(宋象賢) 이하 군민(軍民)은 끝까지 항전하다 순국하였다.
부산과 동래를 함락시킨 왜군의 후속부대는 계속 상륙해 와서 4월 18일에는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이끄는 제2군 2만 2000여 병력이 부산에,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가 이끄는 제3군 1만 1000여 병력이 다대포(多大浦)를 거쳐 김해(金海)에 상륙, 침공을 개시하였다. 이와 함께 구키 요시다카[九鬼嘉隆] ·도도 다카토라[藤堂高虎] 등의 9,000여 수군(水軍)이 편성되어 바다에서 이들을 응원하였다.
일본 국내의 잔류병력과 쓰시마 등지의 주둔군 등 일본 침략군의 총병력은 약 20만이었는데 이 중 부산과 동래를 함락시킨 제1군은 중로(中路)로 동래-양산(梁山)-청도(淸道)-대구(大邱)-인동(仁同)-선산(善山)-상주(尙州)-조령(鳥嶺)-충주(忠州)-여주(驪州)-양근(楊根)-용진(龍津)나루-경성동로(京城東路), 제2군 좌로(左路)는 동래-언양(彦陽)-경주(慶州)-영천(永川)-신녕(新寧)-군위(軍威)-용궁(龍宮)-조령-충주-죽산(竹山)-용인(龍仁)-한강, 제3군 우로(右路)는 김해(金海)-성주(星州)-무계(茂溪)-지례(知禮)-등산(登山)-추풍령(秋風嶺)-영동(永同)-청주(淸州)-경기도의 3로로 나뉘어 서울을 향하여 북상하였다.
4월 17일 경상좌수사 박홍(朴泓)으로부터 왜군 침공의 급보가 전해지자 조정에서는 신립을 도순변사(都巡邊使), 이일을 순변사, 김여물(金汝岉)을 종사관(從事官)으로 임명하여 왜군 침공에 대비하는 한편, 김성일을 경상우도초유사(慶尙右道招諭使), 김근(金玏)을 좌도안집사(左道安集使)로 삼아 민심수습과 항전을 독려하도록 하였다.
북상하는 왜군을 막기 위해 이일에게는 중로(中路)인 조령 방면을, 유극량(劉克良)과 변기(邊器) 등에게는 각기 죽령과 추풍령을 방비하게 하였고 도순변사 신립과 도체찰사(都體察使) 유성룡(柳成龍)으로 하여금 이일을 응원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일이 4월 24일 상주에서 가토에게 패하여 충주로 물러나자 왜군은 조령과 죽령 등지에서 저항도 받지 않은 채 충주까지 진격하였다.
이일의 뒤를 이은 신립은 충주 탄금대(彈琴臺)에서 방어작전을 폈으나 패하였다. 이일 등이 죽령·조령·추풍령 등의 요새를 방어하기 위해 출발한 후 조정은 적군의 수도 공격에 대비하여 우의정 이양원(李陽元)을 수성대장(守城大將)으로 삼아 도성의 성곽을 축성하게 하는 한편 전 북병사(北兵使)였던 김명원(金命元)을 도원수(都元帥)를 삼아 한강을 수비하게 하였다.
신립의 패전보고가 있자 4월 29일 선조는 도성을 버리고 개성을 향하여 피란길에 올랐다. 선조를 싫은 가마가 개성 남문에 도착하자 백성들은 이를 가로막고 농성을 벌였다. 이곳에서 선조는 민심을 달래고자 하는 수 없이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였다.
서울이 함락되자 선조는 다시 평양으로 달아났다. 파천에 대한 민심이 거제지자 파천을 주동한 사람은 영의정 이산해로 내몰고, 유성룡은 파천을 적극적으로 막지 않았다는 거짓 죄목으로 귀양을 보냈다. 그리고 임해군(臨海君)은 함경도로, 순화군(順和君)은 강원도로 보내어 근왕병(勤王兵)을 모집하였지만 백성들은 오히려 두 왕자를 붙잡아 왜군에게 인도하였다. 한편 명나라에 원병을 청하여 수복을 꾀하고자 하였다.
왕이 달아나자 백성들의 사기는 더욱 떨어졌고 특히 하삼도(下三道)는 무정부적 혼란상태가 더했다. 왕이 피난해 있는 사이 민란이 일어나 공사노비의 문적이 있는 장례원(掌隷院)과 형조의 건물을 불태우고 경복궁·창덕궁 둥 궁궐과 관청에 들어가 약탈을 하였다.
상륙 20일만에 서울은 왜군에게 점령되었으며 서울에 입성한 왜군은 대오를 정비하여 고니시의 부대는 평안도, 가토의 부대는 함경도, 구로다의 부대는 황해도로 진로를 정하는 한편 서울을 지키는 부대를 두고 경상·강원·전라도 방면으로 진출하여 후방지역을 담당하였다. 강원도·황해도 방면으로 모병하러 간 두 왕자도 왜병의 포로가 되고 파죽지세로 밀려드는 왜군에 의해 개성·평양은 부산 상륙 이후 60일도 못 되어 함락, 거의 무방비상태인 전국토는 함경도까지 진출한 왜군에게 짓밟히게 되었다.
서울이 함락되고 함경도 지역까지 왜군의 침략을 당하고 있을 때 해상의 싸움은 전라도 해안으로 진출하는 왜병을 막아내고 있었다. 조선 수군의 편제와 전술은 고려 이래로 왜구 방어 위주였으므로 잘 정비되어 있었다. 따라서 각도에는 수영(水營)이 있어 이를 수군의 근간으로 하였다. 1592년 4월 14일 부산으로 침입한 왜선단(倭船團)에 경상좌수영과 우수영은 해상에서 제대로 싸움조차 하지 못한 채 대패하였다.
전라좌수영의 수군절도사로 있던 이순신은 경상우수영으로부터 왜군의 침입보고를 받자 출동하여, 옥포(玉浦)의 첫 해전에서 승리를 거둔 후 당포(唐浦)·당항포(唐項浦)·한산도(閑山島)·부산 등지에서 계속 전과를 거두었다. 특히 한산도 앞바다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역전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진주성(晉州城)싸움· 행주산성(幸州山城)싸움과 더불어 임진왜란 3대 대첩으로 꼽는다.
임진왜란의 영향
-전국토가 황폐화되고, 많은 문화재가 파괴되고 불에 탔다.
-수많은 인명이 죽고 재산을 잃어 백성들의 생활이 어려워졌다.
-일본은 도공들을 포로로 잡아가 일본의 도자기 문화를 발전시켰다.
-일본은 전쟁을 일으킨 것을 반성하고 외교를 하자고 간청해오자, 조선은 통신사를 파견 하여 학문과 기술을 전해주었다.
임진왜란 이후 국제적 변화
1592년 임진왜란은 조선의 정치, 경제,사회,문화는 물론 전쟁에 참여한 명과 왜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먼저 명나라는 임진왜란 이후 청나라에게 멸망하였다. 사실 명나라는 조선에 군대를 보낼만한 상황은 아니었다. 북쪽으로는 여진족(청)의 압박이 거세였고, 내부적으로도 재정과 파벌싸움이 격렬한 상태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무리하게 군대를 파견한 명나라는 결국 청나라에게 멸망하고 말았다(1644).
왜도 정치적 변동이 일어났다. 전국시대를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임진왜란을 일으킨 장본인이지만, 결국 그는 전쟁의 최종적 승리를 맛보기도전에 죽고 말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조선에 출병하지 않고 남아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히데요시의 아들을 죽이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에도막부를 열고 일본 통치권을 다졌다. 그러면서도 다시 조선과 화친하기 위해 사명대사에게 조선인 포로를 넘겨주고, 통신사를 통해 조선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였다. 한편 일본은 임진왜란 중에 조선인 성리학자(*특히 이황의 제자, 퇴계학파)와 우수한 도자기 기술자 등을 포로로 잡아갔다.
그 결과 일본에서는 퇴계학파의 성리학이 발달하였다. 또한 조선인 도자기 기술자들이 일본에 끌려가 일본 도자기 발달에 결정적으로 기여하였다. 이에 임진왜란을 도자기 전쟁이라고도 한다.
조선도 전란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특히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와준 명나라에 대한 고마움이 극에 달하였다. 그래서 명나라가 청에 멸망하자 명의 황제를 위한 만동묘를 설치하고, 청나라에 대해서는 오랑캐라 멸시하며 경계심을 내보였다(*이런 경계심은 결국 병자호란을 불러 일으켰다.) 그러면서도 이제 중화국인 명나라가 멸망했으니, 조선이 유일한 문명국이라는 ‘소중화’ 의식이 높아졌다.
한편 왜와의 관계도 정산할 필요가 있었다. 먼저 왜에게 잡혀간 포로들을 다시 데려올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당시 왜에 대한 복수심이 강하여 공식적으로 일을 추진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사명대사를 비공식적으로 파견하여 포로 3500명을 데려오도록 했다. 두 번째로 왜와 관계를 회복하고 통신사를 파견하였다. 조선은 통신사를 파견하여 조선의 선진문물을 전파하였다. 통신사의 파견은 일본의 재침을 대비하기 위한 정찰의 성격도 가지고 있다. 세 번째는 부산 초량에 왜관의 설치한 것이다. 왜란 전에는 왜와의 창구를 여러 곳에 두었으나, 왜란 이후에는 교섭 창구를 부산 초량의 왜관으로 일원화시켰다. 또한 일본 사신이나 상인들을 부산 왜관에서만 일을 처리하도록 하고 한양으로 올라오는 것을 막았다. 이로써 왜와 관련된 모든 일은 부산 왜관을 통해서만 진행되었다.
2) 권율(權慄)장군(1537-1599), 충장사(忠莊祠)
권율장군의 본관은 안동. 자는 언신(彦愼). 호는 만취당(晩翠堂) ·모악(暮嶽).
시호는 충장(忠莊). 1582년(선조 15)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가 되고, 전적(典籍)을 거쳐 1587년 전라도도사, 이듬해 예조정랑 ·호조정랑 ·경성판관(鏡城判官)에 이어, 1591년 의주목사(義州牧使)가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수도가 함락된 후 전라도순찰사 이광(李洸)과 방어사(防禦使) 곽영(郭嶸)이 4만여 명의 군사를 모집할 때, 광주목사로서 곽영의 휘하에 들어가 중위장(中衛將)이 되어 북진하다가 용인에서 일본군과 싸웠으나 패하였다. 그 뒤 남원에 주둔하여 1,000여 명의 의용군을 모집, 금산군 이치(梨峙)싸움에서 왜장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의 정예부대를 대파하고 전라도순찰사로 승진하였다. 또 북진 중에 수원의 독왕산성(禿旺山城)에 주둔하면서 견고한 진지를 구축하여 지구전(持久戰)과 유격전(遊擊戰)을 전개하다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가 거느리는 대부대의 공격을 받았으나 이를 격퇴하였다. 1593년에는 병력을 나누어 부사령관 선거이(宣居怡)에게 시흥 금주산(衿州山)에 진을 치게 한 후 2800명의 병력을 이끌고 한강을 건너 행주산성(幸州山城)에 주둔하여, 3만 명의 대군으로 공격해온 고바야카와의 일본군을 맞아 2만 4000여 명의 사상자를 내게 하며 격퇴하였다. 그 전공으로 도원수에 올랐다가 도망병을 즉결처분한 죄로 해직되었으나, 한성부판윤으로 재기용되어 비변사당상(備邊司堂上)을 겸직하였고, 1596년 충청도순찰사에 이어 다시 도원수가 되었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적군의 북상을 막기 위해 명나라 제독(提督) 마귀(麻貴)와 함께 울산에서 대진했으나, 명나라 사령관 양호(楊鎬)의 돌연한 퇴각령으로 철수하였다. 이어 순천예교(順天曳橋)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하려고 했으나, 전쟁의 확대를 꺼리던 명나라 장수들의 비협조로 실패하였다. 임진왜란 7년 간 군대를 총지휘한 장군으로 바다의 이순신과 더불어 역사에 남을 전공을 세웠다. 1599년 노환으로 관직을 사임하고 고향에 돌아갔다. 영의정에 추증되고, 1604년(선조 37) 선무공신(宣武功臣) 1등에 영가부원군(永嘉府院君)으로 추봉되었으며, 충장사(忠莊祠)에 배향되었다.
3) 행주대첩-행주산성
1602년에 세워진 행주대첩 초건비.
앞면은 글은 최 립이 글씨는 한석봉이 썼고 뒷면의 글은 이항복, 글씨는 김현성이 썼다.
1593년 1월 25일. 벽제관에서 명나라 이여송 군을 격파하고 명군을 개성까지 밀어낸 한성의 왜군들은 2월이 되자 드디어 눈앞의 적, 권율 군을 향해 창끝을 겨누었다. 이때 권율 군은 남하해 오는 조명 연합군과 합세해 한성 수복에 참여할 계획으로 한성에서 불과 8km 떨어진 덕양산(행주산성)에 주둔해 있었다.
권율은 1만의 병력 중에서 수원 독성산성에 일부의 병력을 남기고 3천의 정예병만을 이끌고 행주산성에 진을 쳤다. 나머지 병력은 양천(서울 양천구의 안양천)과 금천(시흥) 부근에 주둔시켜 놓았는데 이 병력은 왜군의 행주산성 공격 때 왜군을 견제할 외곽 응원부대였다. 권율 군은 행주산성으로 이동해 오자마자 성을 구축하고 산 중턱에 2중 3중으로 목책을 세우는 등 수성을 위한 준비를 해나갔다. 또 제1차 진주성전투 이후 수성전(守城戰) 승전의 교범이 된 화약무기의 비축에도 만전을 기했다. 행주산성은 산성이라고 하기에는 지대가 낮은, 한강을 끼고 있는 작은 야산 진지에 불과했다. 때문에 수성전을 펴기에는 불리한 점이 많았다. 하지만 한강변에 위치하고 있었기에 고대로부터 남북을 잇는 군사 요충지로 각광받던 곳이다.
행주산성의 토성은 산 정상을 향해 주변을 둘러치듯 쌓는 테뫼식 토성이다. 발굴 당시 삼국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와당과 토기 파편이 출토됨으로써 이곳이 오래 전부터 한강 유역의 중요 군사 요충지였음을 짐작케 한다.
권율이 위험을 무릅쓰고 행주산성에 진을 친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남해를 조선 수군이 차지함으로써 왜군들의 발을 묶어 버렸듯이, 한강은 충청-경기 수군의 무대였던 것이다. 그 동안 충청 수군은 경기 수군과 함께 강화도를 지키면서 한성의 왜군들이 한강 하류로 나와서 평양의 고니시 유키나가 군에게로 가는것, 의주의 조정을 공격하는 것, 요동반도와 명나라로 진출하는 것, 서해를 따라 내려와서 전라도를 공격하는 것과 같은 일체의 도발 행위를 차단하고 있었다.
1593년 2월 12일 새벽. 출전 채비를 마친 3만의 왜군들은 깜깜한 새벽길을 달려 행주산성으로 이동했다. 왜군들이 선택한 공격 지점은 산성의 서북쪽이었는데, 동남쪽을 피했던 이유는 그곳에는 한강을 장악한 충청-경기 수군이 진을 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한강을 점령한 충청-경기 수군에는 강화도에 피난 와 있던 수백 척의 어선, 상선, 화물선단도 합류하고 있었다. 이들은 배에 방패를 세우고 화약무기로 무장하고 있었기에 왜군들로서는 한강으로의 접근은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왜군의 이동을 포착한 권율은 외곽 부대들에 이 사실을 알리는 한편 왜군들의 공격이 예상되는 산성 서북쪽에 화약무기들을 집중 배치했다. 권율 군이 준비해 둔 화약무기들은 각종 대포, 발화탄과 비격진천뢰 등 투척용 무기에서부터 다연발의 화차까지 미리 준비하였다. 왜군들은 성 내의 조선군의 수가 많아봐야 3천 명 정도라는 점과 행주산성이 험준한 산악지대에 웅거한 요새가 아닌 점을 감안하여 병력 수가 10 : 1 규모인 3만 명이면 반나절 안에 성을 함락시킬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그리고는 성을 겹겹이 포위한 채 총사령관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의 공격 명령이 내려지기만을 기다렸다.
선봉 제1대를 맡은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군을 비롯한 전 군에서 "공격 준비 완료"를 속속 보고해 오자 우키타는 천추의 한이 될 사건의 시작을 포효하듯 열어 제켰다. “제1대 돌격!” 선두에 선 고니시 군이 장창과 일본도를 뽑아들고 목책이 세워진 외곽 진지를 향해 노도처럼 달려들었다. 조선군도 일제히 화살과 대포, 각종의 화약무기로 응전했다. 지축이 흔들리는 강력한 폭발이 끝없이 이어졌다. 권율 군의 위력적인 반격에 질려버린 고니시 군은 끝내 목책을 돌파하지 못하고 후퇴해 내려갔다. 단 한 차례의 돌격전으로 고니시 군 진영에는 사령관 고니시가 부상을 당하는 등 수백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상상 외의 결과에 왜군들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제2대 돌격!" 격앙된 우키타의 명령이 떨어지자 이번에는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의 제2대가 개미떼처럼 몰려 올라갔다. 이시다는 돌격용 방패를 더욱 촘촘히 세우게 해서 돌격전을 지휘했지만 방패만으로는 조선군의 가공할 화력을 버텨내지 못했다. 이시다 군 역시 수백 명의 사상자를 내고 퇴각해 내려갔다.
왜군들의 공격은 날이 밝자 보다 조직화되어 거세게 이어졌다. 하지만 반나절이 지날 때까지 성을 함락시키지 못했고 목책조차도 돌파하지 못하자 우키타는 보다 대담하고 적극적인 공세를 취할 것을 주문했다. 그리고 자신의 공격 차례가 오자 모범을 보이려는 듯 최선봉에 서서 돌격전을 지휘했다. 그러다가 어깨 부위에 부상을 입고 후퇴해 내려갔다. 총사령관이 부상을 당하자 왜장들은 저돌적인 파상공세로 목책 저지선을 뚫기 위해 끊임없이 달려들었다. 그 과정에서 이시다 미쓰나리, 키카와 히로이에 등이 추가로 부상을 당했다. 하지만 성과도 있었다. 오후 4시경부터는 목책선 일부를 돌파할 수 있었고, 왜군들은 그 틈을 비집고 자신들의 장기인 백병전을 시작했다. 이즈음, 화살과 화약무기가 바닥난 조선군도 백병전과 투석전으로 사투를 벌여야 했다. 화살이 모두 떨어지자 마을의 부녀자들까지 총동원되어 앞치마에 돌을 담아서 날랐으니, 이것이 바로 유명한 '행주치마'의 전설을 낳은 유래가 되었다. 총공세로 나선 왜군들은 숫자와 백병전에서의 우위를 살려 승부를 결판낼 듯이 권율 군을 몰아붙이며 토성 진지 앞까지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그런데 그 순간, 왜군들의 머리 위로 느닷없이 다연발의 신기전과 산탄, 그리고 편전 등이 빗발치듯 쏟아졌고 왜군들에게 또다시 떼죽음을 안겼다. 충청수사 정걸(丁傑)이 배편으로 화살과 화약무기를 싣고 응원해 왔던 것이다. 상황이 원점으로 돌아가자 왜장들은 공성을 단념하고 한성으로의 퇴각을 결정했다.
행주산성 전투 후, 권율 군은 충청 경기 수군의 병선으로 한강 하구에서 임진강으로 올라가 파주로 이동했다. 왜군들은 파주산성으로 진을 옮긴 권율 군을 재차 공격하고자 했다. 그러나 권율 군이 행주산성에서처럼 가공할 화약무기로 무장하고 있을 것이 두려웠고, 임진강 역시 중무장한 조선 수군의 선단들이 강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공격을 단념하고 한성으로 되돌아갔다.
이것이 임진왜란 3대첩 중 하나인 행주대첩이다. 이에 대해 우리는 그냥 교과서에서 권율(權慄) 장군의 뛰어난 지도력과 원래 입던 치마 위에 덧입은 치마(행주치마)에 돌을 날라 투석전을 가능하게 했던 부녀자들의 애국심이 승리를 가져왔다고 배웠다. 하지만 다른 조금 각도에서 고찰해보면, 아낙네들이 행주치마로 돌을 날라 싸움을 지원했다지만 그 결과로 왜군을 격퇴했다는 것은 이해하기 쉽지가 않다. 왜군들도 이미 여러 전투를 경험했고, 당시로선 첨단무기인 조총을 소지했으며, 무엇보다도 군사의 숫자가 압도적으로 많았으며, 행주산성은 난공불락의 철옹성도 아닌 일반적인 성곽 정도의 낮은 토성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승리의 결정적인 이유는 우리가 신기전(神機箭)을 탑재한 화차(火車)를 가지고 있었 때문이다.
1) 신기전(神機箭)
귀신 신(神), 틀 기(機), 화살 전(箭). 신기전(神機箭). 신기전은 세종 때부터 역사에 등장하여 활발히 사용된 화약무기로 1477년 편찬된 「국조오례의 서례」의 「병기도설(兵器圖說)」에 그 설계도가 전해지고 있는데 세계우주항공학회(IAF)는 이것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로켓 설계도로 공인한 바 있다. 신기전의 형태를 살펴보면, 약통(추진체)에는 화약(연료)을 넣어 끝을 종이로 여러 겹 접어 막고, 그 위에 발화통(폭탄)을 장착한다. 그리고 약통 윗면과 발화통 아랫면 가운데에 구멍을 뚫어 둘을 약선(도화선)으로 연결한다. 이렇게 연결한 까닭은 목표지점으로 신기전이 거의 다 날아갔을 때 폭탄인 발화통이 자동적으로 폭발하게 하기 위해서다.
신기전에는 대신기전, 중신기전, 소신기전 그리고 산화신기전이 있었다. 전체 길이 5.6미터, 약통 길이 70센티미터로 크기가 가장 큰 대신기전은 주로 압록강 하구의 의주성에서 압록강 건너편에 있는 오랑캐들을 공격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압록강 하구에서 물이 흐르는 너비를 감안하면 그 사정거리가 1.5~2킬로미터 정도일 것으로 추측된다. 가장 작은 소신기전은 맨 앞에 발화통 대신 화살촉을 달았으며 사정거리는 100~150미터였다.
신기전을 발사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화차다. 300개 이상의 부속품으로 이루어진 화차 위에 신기전기 혹은 총통기를 설치하고 100개의 신기전을 놓거나 사전총통 50개를 놓고 이것을 차례로 점화하여 발사하는 것이다. 특히 1개의 사전총통에는 4발의 세전을 장전할 수 있으므로 모두 200발의 세전을 연발로 발사할 수 있었다. 특이하게도 조선의 화차는 차체가 바퀴 축보다 반지름 이상 높은 곳에 있었는데 이것은 손잡이를 자유롭게 조종하여 신기전의 발사 각도를 다양하게 하여 사정거리를 조절하기 위한 것이다. 이 경우 손잡이를 바닥에 놓으면 발사각도가 43도가 되는데 이것은 이론적으로 최장발사각도에 가깝다.
왜군의 조총에 맞서 조선군은 모든 화약무기를 동원하였다. 개인발사용인 사전총통과 적군이 접근할 때 던지는 수류탄인 지화통뿐만 아니라 자그마치 40대의 화차가 동원되었다. 신기전은 소리와 모습뿐 아니라 폭발력도 컸기 때문에 왜군의 기세를 꺾는 선제공격용 무기로 충분한 역할을 할 수 있었다.
신기전의 구조는 당시 우리나라의 과학기술 수준을 보여준다. 안정막대의 길이와 끝의 날개 그리고 약통의 위치는 신기전이 무게중심을 유지하여 안정된 포물선으로 비행하도록 정밀하게 제작되었다. 단위는 기술의 정밀도를 보여주는데 「병기도설」에 사용된 1리(釐)는 0.3밀리미터다. 이것으로 당시 우리나라 과학기술의 정밀도를 알 수 있다. 당시에 0.1mm단위까지 정밀하게 화약무기를 제조했던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조선 초기에 보여준 이러한 무기 기술은 세조 이후로 큰 발전을 이루지 못했다. 조선의 화포 기술을 비롯한 과학기술 자체가 침체기에 접어들었고 기술 개발의 의지도 거의 없었다. 혹자는 화차를 개발하고, 화약 제조술에 뛰어났던 문종의 재위 기간이 더욱 길었다면 우리나라의 국제적인 판도가 바뀌었을 것이라는 기대를 해보기도 한다.
2) 변이중(邊以中:1546~1611)과 화차(火車)
행주대첩의 보이지 않는 이면에는 망암(望庵) 변이중(邊以中:1546~1611)과 그가 제작한 화차(火車)라고 하는 신무기의 역할이 컸다. 해전에 ‘거북선’이 있었다면, 육전에는 ‘화차’가 있었던 것이다.
변이중은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을 하던 도중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전라도 지역에서 군사를 모집하는 소모사(召募使)를 하였다. 그는 왜군의 조총에 대항할 수 있는 무기를 연구하다가, 고향인 전남 장성에서 화차를 개발하였다. 화차는 수레 위에 화살을 수십 발 장착하여 이동할 수 있으며, 한 번에 수십 발의 화살을 동시에 발사할 수 있는 무기이다. 화차는 문종 때인 1451년에 이미 ‘문종화차’라고 하여 개발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후로 평화가 계속되어 사용이 흐지부지되다가 변이중에 의하여 다시 계승 발전되었던 것이다.
변이중이 발전시킨 화차는 화살 3~4개가 들어가는 통이 있고, 이 통이 가로로 5개, 세로로 10개가 장착되어 있었다. 한 번에 200발의 화살이 동시에 발사되는 무기였다. 도화선을 연결해서 화약에 불을 붙이면 엄청난 폭음을 내면서 자동 발사되는 구조였다. 행주산성에서 아군 3400명이 왜군 3만 명을 제압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요인은 이 화차의 화력 때문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행주산성은 산성이기는 하지만 주변이 야트막한 구릉으로 되어 있어서 난공불락의 요새도 아니다. 평탄한 지형에서 화차는 더욱 위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전투에는 40여대의 화차가 동원되었다.
변이중은 장성에서 백양사 가다 보면 중간에 있는 조양리(朝陽里)라는 곳에서 300대의 화차를 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제작비용을 댄 사람은 망암의 사촌동생이자 만석꾼이었던 변윤중(邊允中:1550~ 1597)이었다. 전 재산을 여기에 썼다고 한다. 정유재란 때 조양리는 왜군의 철저한 보복을 받았다. 변윤중 가족이 왜군과 끝까지 싸우다가 자결한 곳은 현재 호남고속도로 장성IC 맞은편의 ‘휴암(休岩) 바위’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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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회 청소년 역사탐방 기행문 ( 학교 학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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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랑구 면목3.8동 사가정 역사탐방대 귀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