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멀어진 마음 차가운 육체
아직도 범인 윤곽 못 잡아, 명왕성 그룹 며느리 피살 사 건 신문 사회면 제목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강형사는 신문을 구겨 팽개쳐 버렸다.
"옘병할, 그저 경찰만 동네북이라니까."
"무슨 얘기야?"
열심히 수첩을 뒤적이고 있던 추경감이 강형사를 돌아보지도 않고 물었다.
"살인 사건이 일어났으니 빨리 와보라. 그래서 내가 뛰어
갔지. 그랬더니 멀쩡해. 다시 살인 사건 났으니 와보라!
가보니 정말로 사람이 죽었어. 그럼 신고한 놈은 오대산 도사야 정도령이야?"
강형사는 여전히 혼잣말처럼 떠들었다.
"무슨 얘기야?"
"그렇잖습니까? 이건 예고 살인 아닙니까? 그 신고자를 찾아내야 하는데."
"전기통신공사 의견은 뭐야?"
"아, 그 녀석이 전화 건 곳을 알아냈습니다. 중앙청 옆에
있는 다방에서 걸었답니다."
"용케 알아냈구먼. 그곳이면 살인 현장에서 과히 멀리 있
는곳도 아니구먼. 그날 그 시간의 목격자를 좀 찾아보지 그래."
"지금 탐문 중입니다."
"범인의 음성 감정 결과는?"
경찰국강력반 신고 전화에는 녹음 장치가 되어 있었기 때
문에 범인의 음성이 녹취되어 과학수사연구소에 의뢰되어 있었다.
"30대 초반 남자의 음성이라고 합니다. 억양은 경상도 서
헤안지역 하류 가정 출신 같더군요."
"충분히 범인일 수 있구먼. 설희주의 고향은 어디야?"
"고향은 서울입니다. 외가가 충남 서천군이군요."
"외가가 서천? 경상도와는 관계가 없군."
추경감은 잠시 생각에 잠기는 것 같았다.
"아냐. 그건 불가능해. 살인을 예고해 놓고 죽이고 도망가
고. 첫째, 예고를 하고 죽이는 그런 바보 같은 짓을 무엇
때문에 한단 말인가? 그리고 그 집은 완벽한 철옹성이라서
몰래 들어가 죽이고 도망갈 수가 없어."
추경감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면식범이란 게 있습니다. 아는 사람이라면."
"그러나 폐쇄회로 감시 TV에 아무도 다녀간 혼적이 없어."
"이상한 점이 더 있습니다. 따지자면 설희주는 심장에
두세번 칼을 맞았습니다. 칼에 맞은 뒤 방안 이곳 저곳을
돌아다닌 혼적이 있습니다. 구석구석에 핏자국이 있었으니
까요. 그러면서 비명은 왜 단 한 마디밖에 지르지 않았을까요?"
"그야 처음 몇번 찔린 것은 치명상이 아니니까 그냥 참고
있다가 마지막에 외마디 비명을 지를 수도 있는 일이지.
그건 이상할 것이 없어."
"가수라는 고봉길이 들었다는 비명 소리가 거짓말 아닐까
요? 더구나 다른 식구는 듣지 못했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
방과 가장 가까이 있었다는 가정부도 못 들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세탁기 소리 때문에 듣지 못했다고 하지 않았나."
추경감과 강형사가 입씨름을 하고 있을 때 이것 보라는 듯
이 과학수사연구소의 2차 감정 결과가 왔다.
여러 가지 잡다한 감정 결과 속에 주목할 만한 것은 와이 셔츠와 거기에 묻은 피였다.
감식과의 형사가 설희주의 일기장, 녹음기, 카세트 테이
프, 핸드백, 화장품 비밀백 등이 든 보따리와 감정서를 가지고왔다.
"반장님, 이것 좀 보십시오."
강형사가 그 중에서 피묻은 와이셔츠를 끄집어냈다.
"이 셔츠의 혈액이 설희주와 같은 형입니다."
"아니, 그럼 시동생 고봉길이."
"아닙니다. 이 셔츠는 남편 고봉식의 것입니다."
"현장 어디에 있던 것인가?"
"침대 밑에 감추어져 있었습니다."
"감추어져 있었다? 그거 참 이상한 일이군. 우연히 침실에
벗어둔 와이셔츠에 묻은 것이 아니란 뜻 아닌가?"
추경감의 얼굴이 약간 심각해졌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생겼을 때 짓는 표정이었다.
"그 시간에 고봉식은 어디에 있었다고 했지?"
"분명히 집에 있지는 않은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범인이 뒤집어 씌우려고 그렇게 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 아닌가?"
두 사람은 한참 얼굴을 마주 보고 있었다.
의견이 일치되었을 때 하는 버릇이었다.
두 사람은 고봉식의 사무실로 갔다. 마침 고봉식은 점심을
먹고 들어와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 한잠 자고 있었다.
"이거 웬일들이십니가?"
그는 눈을 비비며 아주 귀찮다는 듯이 두 사람을 맞았다.
재벌 그룹 사람이라면 흔히 상상할수 있는 미련스러운 체
구와 기름이 흐르는 살찐 목덜미를 그는 가지고 있지 않았
다. 비교적 야윈 체격에 순하게 보이는 꺼벙한 얼굴을 하
고 있었다. 특히 그의 커다란 눈은 착한 농부처럼 보였다.
"고봉식 사장님, 이거 쉬시는데 미안합니다. 그냥 지나가다가 들렀습니다."
추경감이 권하는 자리에 엉거주춤 앉으며 말했다.
"그래 범인의 꼬리는 찾았나요?"
"꼬리는커녕 아직 그림자도 못 보았습니다. 그래서 몇 마
디 도움을 청하러 왔습니다. 실은."
강형사의 말올 듣자 그는 얼굴색이 약간 달라졌다.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러니까 지나가다가 그냥 들른 것이 아니군요."
"뭐 꼭 그렇지 않다고는 변명하지 않겠습니다. 간단한 참고사항 한두 가지만."
추경감이 겸연쩍어 머리를 슬슬 긁으며 말했다.
"그래 뭔지 빨리 끝냅시다. 말해 보세요. 난 희주 일만 생
각하면 열불 나는 사람이오."
그는 담배를 신경질적으로 빨면서 말했다.
"저어 고사장의 와이셔츠에 설희주씨의 혈액이 묻어 있었는데요."
강형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희주와 나는 부부요. 침실에 내 와이셔츠가 있었다는 것
이 이상합니까? 그리고 칼에 찔린 사람 피가 방안 어디엔들 튀지않았겠습니까?"
고사장은 퍽 신경질적으로 되물었다.
"그게 아니고 피묻은 셔츠가 침대 밑에 깊숙이 감추어져 있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추경감이 느릿한 목소리로 물었다.
"침대 밑에 감추어져 있다구요? 그럼 내가 그랬다는 얘깁니까?"
고봉식 사장이 더 못 참겠다는 듯이 벌떡 일어섰다.
"아, 아닙니다. 그냥 그렇다는 이야깁니다."
추경감이 그를 끌어앉혔다.
"그건 그렇고. 사건 당일날 그 시간에 사장님은 대관령에 계셨다고 했던가요?"
강형사가 고사장의 눈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몇번 대답해야 합니까? 그건 확인해 보셨잖습니까?"
"대관령에서는 왜 부인과 다투셨나요?"
"부부 싸움 안 하는 가정 있습니까?"
"재벌집 아드님도 불만 있습니까?"
"뭐요?"
그것은 확실히 강형사의 실수였다. 갑자기 그런 엉뚱한 질
문을 한 것은 그가 평소 가지고 있던 재벌에 대한 막연한
거부감 같은 것이 작용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설희주씨 일기장을 보면 늘 남편인 고사장에 대한 불만으로 차 있던데."
"그 여자는 나뿐 아니라 우리집 식구 모두에 대해 불만이
가득 찬 여자요. 아니, 우리집 식구뿐 아니라 이 세상에
대해 불만이 가득 찬 여자랍니다. 그런데 남의 여편네 일
기장은 왜 들추고 치사하게 이러시요?"
고사장은 갑자기 부아가 치민 모양이다.
"거 유치하게 남의 여편네 일기장이나 들추어보며 떠들고 다니지 마시오."
고봉식은 강형사에게 삿대질까지 하며 화를 냈다.
"그 여자 말이요, 그게 일기장이 아니고 낙서장이요 낙서장.
뜻도 의미도 없이 세상 원망이나 하는 그런 낙서를 하는 게 그 여자 취미란 말입니다."
고봉식은 일기장에 대해 뜻밖에도 상당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대관령에서 다투고 따로따로 집으로 오셨다고 하셨지요?"
추경감이 질문의 방향을 바꾸었다.
"그래요."
"대관령에는 왜 갔습니까? 뭐 꼭 대답을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만."
"얘기하지요. 다 얘기해도 오해를 하고 난린데 얘기 안 할게 뭐 있습니까?"
고봉식 사장은 식은 커피를 꿀꺽꿀꺽 마신 뒤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러니까 뒤에 정혜한테 들은 얘기지만 걔 때문에 시작된 겁니다."
특히 사이가 나빴던 설희주와 정혜는 사사건건 충돌을 했다.
그날도 정혜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집에 뛰어 들어왔다.
"이 여자 이거 어디 갔어?"
정혜는 분에 못 이겨 핸드백을 거실 바닥에 팽개치면서 떠들었다.
"이런 개 같은 경우가 어디 있어? 어떻게 인간이 그럴 수가 있어? 한두번도 아니고."
설희주가 홈웨어 차림으로 2층 계단을 내려오다 말고 흥분
해서 날뛰는 시누이를 멀거니 내려다보고 있었다.
한참 보고 있던 설희주는 한두번 당하는 일이 아니라 태연하게 말했다.
"뭐가 잘못 되었나요? 큰 아가씨."
"뭐야? 잘못 되지 않았다구! 왜 우리 정필씨 따돌렸어? 나
까무란지 종까무란지 하는 쪽바리 회장 만나는 자리 왜 우
리 그이는 따돌렸어? 우리 정필씨가 이사대우 비서실장이
라는 것 몰라? 그뿐이야. 대명왕성 그룹 맏사위라는 것 까
먹었어? 대학 다닐 때 아바 학점 받았다며? 데모하느라 다 까먹었어?"
"아가씨, 너무 해요. 내 대학 때 얘기는 정말 참을 수 없어요.
그리고 내가 비록 나이는 작지만 올케예요. 아가씨의 언니란 말이에요.
언니보고 그렇게 말을 탕탕 놓아가며 야단 쳐도 되는 거예요?"
설희주가 더 참지 못하고 계단을 내려와 정혜 앞에 마주섰다.
희주는 분에 못이겨 가슴이 가쁘게 움직였다.
"어쭈! 웃기는 말씀 하시네. 그걸로 우리 비서실장 따돌린
이율 슬쩍 감추려 하지 마. 도대체 뭐야? 외국 최대 바이
어 만나는 자리에 정필씨 못 가게 하고 오빠 혼자 가도록 전해준 게 무슨 꿍꿍이야?"
"난 무슨 일로 그 사람들이 만나는지도 몰라요. 그냥 나까
무라 회장이 그이와 개인적으로 술 한잔 했으면 좋겠다고
하기에 전해 주었을 뿐이에요. 제가 전화받은 게 죕니까?
아가씨, 너무 그러지 말아요."
설희주는 더 상대할 수 없다는 듯이 돌아서고 말았다.
"너! 끝까지 그런 식으로 나갈래?"
정혜가 설희주의 뒤꼭지에 대고 악을 쓰자 그녀도 더 참을 수 없다는 듯 돌아섰다.
"솔직이 나까무라씨도 정실장 만나기 싫어했을 걸. 일본 말도 못하시고."
"뭐야? 느네 남편은 얼마나 잘하니?
난 다 알아, 정필씨 몰래 오빠가 무슨 흥정 하고 다니는지."
"억측은 그만 둡시다."
설희주는 끝까지 말끝을 흩트러뜨리지 않으려 애썼다. 그녀는 입술을 꼭 깨물고 참았다.
"나까무라씨와는 개인적인 술자리일 뿐이에요."
"큰오빠와 올케가 우리 정필씨를 경계한다는 것은 곧 무엇을 뜻하는 것이겠어?"
"큰아가씨, 제발 그 심술 좀 버리세요. 난 그이가 무얼 하
고 다니는지도 몰라요. 나와 그이를 마치 공모자처럼 몰아 세우지 말아요.
정말 참기 힘들어요."
"흥! 연극 같은 소리 적당히 해둬.
우리 정필씨를 따돌리는 것은 곧 그룹 회장한테 뭔가 숨겨야 할 사안이 있다는 것 아니겠어?"
"제발 아가씨!"
설희주는 이제 좀 살려달라는 표정이었다. 모든 것이 귀찮
아 죽겠는데 왜 너까지 그러느냐는 투였다.
"괜히 애처로운 얼굴 하지 마! 속에 시퍼런 칼을 품고 다니는 여자가."
"큰아가씨."
설희주는 곧 울 것 같은 표정이 되었다.
"설희주, 똑똑히 들어. 운동권 애들과 함께 철없는 짓 하던 네가 무슨 흑심을 품고
이 집에 기어 들어와 머리를 굴리는지는 모르지만 날 그렇게 우습게 보지 마!
네가 원수 처럼 여기던 부르조아 집안에 들어왔을 때에야 무슨 꿍꿍 이가 있었는지
그런 것쯤 나도 다 알아.
그리고 우리 정필씨 어리숙해 보인다구 그렇게 쉽게 생각하지마! 용돈 얼마
마련하겠다고 철강 몇백 톤 몰래 삼키다가 그게 목에 걸려 결국 우리 정필씨에게
떨어질 명왕성 자동차 대표이사 자리가 느네 남편한테로 굴러갔지만 진짜 승부는
이제부터야. 세 끼 밥도 제대로 못 먹던 가난뱅이 집 출신이 이 집에 들어와 보니 모두가
네 것처럼 보여? 너무 분수 넘친 짓 좀 하지 마!"
설희주는 분을 참느라 한동안 숨을 죽이고 있었다.
얼마 뒤 그녀는 씩씩거리는 정혜 옆에 조용히 앉았다.
그리고 지금과는 전혀 다른 목소리로 차분하게 말했다.
"큰아가씨! 왜 말을 그런 식으로 하세요? 나는 이 집에 시집왔으니 좋든 싫든 이 집 식구예요.
아가씨가 미워한다고 해서 내가 이 집을 떠나 주지는 않아요. 그리고 회사 일에
대해서도 그래요. 아가씨나 내가 명왕성 그룹의 뭐예요?
나는 명왕성 그룹 계열회사인 명왕성 자동차 대표이사 아내예요.
아가씨는 명왕성 그룹 회장 비서실장의 아내예요.
우리는 명왕성 그룹의 직원도 임원도 아녜요.
그리고 기업이란 기업의 것이지 개인의 것이 아니랍니다.
아버님이 그룹의 회장이라고 해서 그것이 그 며느리나 딸의 회사가 아니예요. 우리는 다만."
더 못 참겠다는 듯이 정혜가 고함을 질렀다.
"이게 웃기고 있네. 말끝마다 우리우리 하는데 너 건방지게 우리 속에 끼어들지 마!
천박한 가정의 빗나간 딸로 자라 사회의 천덕꾸러기가 되었던 네가, 남자 하나 잘 꼬셨
다고 갑자기 신분이 달라지는 줄 알아? 이거 왜 이래? 얻다 대고 우리우리하고 염불하는 거야!"
정혜는 삿대질까지 해대며 떠들었다.
"큰아가씨!"
그러나 분해서 자지러질 줄 알았던 설희주가 이번엔 뜻밖에도 정혜를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어쩔 수 없는 어리석은 어린 동물을 바라보듯 했다.
"오빠랑 결혼해서 한 이불 속에서 배때기 비벼댄다고 너라는 존재가 약물처럼 우리 속으로
스며든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야. 네 사타구니나 비집고 비벼대니까 네 남편이 네
것인 줄 알지만 천만에! 오빠는 우리 가족이야.
우린 말 배우기 전부터 한 식구야. 넌 무슨 소릴 해도 이방인이야!"
차마 듣고 있을 수 없는 저질스러운 인신 공격을 거침없이 했지만,
설희주의 태도는 결심을 한 듯 흔들리지 않았다.
처음에는 정혜와 싸움을 하려고 들었으나 그러기보다는 체념을 하는 것이 속편하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설희주! 너에게는 무지개빛 미래가 열리는 희망찬 결혼식 이었는지 몰라도,
그날부터 우리에겐 지옥같기만한 일상이 시작되었어.
하마터면 순한 우리 오빠가 우리의 적이 될 뻔했단 말야."
"큰아가씨! 목마르실 텐데 쥬스라도 한잔 가져올까요?"
"설희주, 넌 과연 듣던 그대로 영리한 머리와 불의를 꼬집어내는 선한 가슴을 가졌어.
아마 내가 오빠였더라도 넘어 갔을거야. 하지만 세상은 하나가 아닌 여러 입장들의 각축
장이란 걸 넌 아직 몰라. 이 집안이 네 눈에는 개선해야 하고 개혁해야 하고 거듭 나야 할
모순으로 가득 차 있을 지 모르지만 우리에겐 안락하고 평화로운 안식처야. 넌 광
풍을 몰고 온 야차에 불과하단 말야."
설희주는 그 동안 조용히 냉장고에서 쥬스 두 잔을 들고 와 한 잔을 정혜 앞에 놓았다.
분노로 끓는 가슴을 지그시 누르고 있는 모습이 역력했다.
그녀의 가슴과 그녀의 머리는 너무나 다른 일을 하고 있었다.
"큰아가씨! 들면서 얘기해요."
"네가 들어온 뒤부터 우리 가족은 모두가 밤잠을 설치며 전전긍긍하고 있었어.
피가 끓다 못해 당장 정수리로 터져 나와 분수를 이룰 것만 같았단 말이야.
넌 이 집이 밉디 미운 오리야, 오리!"
마침내 설희주는 얼굴을 감싸고 울음을 터뜨렸다.
"느이 남편이 비행기 특등석에 누워 오대양 육대주 누비고 다니며 백말도 타보고 흑말도
타보면서, 세계 곳곳 기집년 아랫도리에 태극기 꽂느라고 바쁠 때, 우리 정필씨는 노조
대표라는 것들하고 입술이 부르터가며, 멱살 잡이 해가며,
얻어터져 가며 싸우고 이 재산 지킨 거야. 승부란 마라톤
이지. 지금부터야. 지금부터 느이 남편과 정정필의 싸움은 시작이란 말야!"
설희주가 눈물을 보이자 정혜는 더욱 기세가 등등해지고
입이 거칠어졌다. 약세를 보았을 때 완전히 끝장을 내야 한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내가 모를 줄 알아? 우리 정필씨를 차차 무능력자로 만들어 결국은 나까지 도매금으로
묶어서 이 그룹에서 쫓아내려는음모! 그 계략을 내가 모를 줄 알아?"
한참동안 어깨를 들먹이며 울던 설희주가 눈물을 닦고 고개를 들었다.
"큰아가씨, 정 그러시면 우리가 나갈께요. 그 알량한 사장 자리 그이 보고 내놓으라고 하겠어요."
그러나 그 소리를 듣자 정혜는 더욱 펄쩍 뛰었다.
"뮈야? 이거 왜 이래? 이 여자 이제 보니까 점점 더 하는군.
그 핑계로 명왕성 그룹 조각을 내겠다는 말이지? 알맹이만 쏙 뽑아 가지고 독립하겠단 말이지?
웃기지 말아! 우리 아버지도 산전수전 다 겪은 노친네야. 허튼 수작 부리지 말아!"
정혜의 얼굴이 더욱 험악해졌다.
"그럼 도대체 절더러 어쩌라는 거예요? 제가 나이는 적어도 올케예요, 큰아가씨!
손위 올케 보고 그럴 수 있어요?"
설희주는 악에 바친 듯했다.
"올케? 흥! 그래 올케로 인정받고 싶거든 행동을 똑똑히해!
당장 전화 걸어 오빠 집에 들어오라고 하든가,
우리 정필씨 그 일본놈 자리에 합석시키든가 하란 말야!"
"그건 어려워요."
"뭐야? 그럼 그 장소가 어딘지 대봐. 내가 당장 쫓아갈 거야."
"몰라요."
"뭐야?"
그때였다. 두 여자의 싸움 소리를 듣고 있던 봉길이 문을 열고 나왔다.
"이제 그만해 둬요, 큰누나!"
그러나 정혜는 수그러들지 않았다.
"저리 가!"
"누나 제발 좀 그만둬요. 뭐하는 짓이에요, 이게 다 돈,
사장자리 그게 다 뭐하는 거예요? 그것 때문에 그리 바둥 바둥해야 돼요?"
"얘가?"
정혜는 너무나 어이 없어하며 고봉길을 바라보았다. 측은 하다는 눈빛이었다.
그때 고회장 부부가 들어왔다.
"아빠 나 분해서 못 살겠어요."
그때까지 서슬이 시퍼렇던 정혜가 갑자기 고회장 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얘가 왜 이래?"
고회장은 며느리와 봉길, 그리고 아내 최화정 여사의 얼굴을 번갈아보며 어리둥절해졌다.
"아빠, 내 신세가 왜 이렇게 되었어요? 내가 왜 저런 여자한테 괄시를 받아야 해요?
내가 누구 딸인데요."
고회장은 사태를 짐작한 듯 조용히 입을 열었다.
"하루가 빠끔한 날이 없다 없어! 또 뭘 갖구 쌈질이냐!"
"그만해요, 방으로 가."
최화정이 정혜의 팔올 끌고 방으로 들어갔다.
"참으로 살 수 없는 사람은 저예요, 아버지." 봉길이 푸념을 시작했다.
"아버지, 우리 집안이 왜 이런지 아세요? 이게 모두 그놈의 돈 때문이에요,
돈! 돈이 없었다면, 아버지가 재산을 모아두지 않았다면 우리 집안이 이 꼴이 되진 않았을 거예
요. 이게 다돈 때문이라구요. 그 놈의 돈 때문에 우리는 어느 땐가 모두 미쳐 버리고 말 겁니다."
고회장은 아무 말도 않고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고봉식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난 강형사는 입맛을 쩍쩍 다셨다.
"그래서 아드님과 며느님을 대관령으로 보내 쉬게 하면서
달아오른 집안 분위기를 식히려 한 것이란 말이죠?"
"꼭 아버님이 그렇게 하셨다기보다는 우리가 떠난 거죠."
"그런데 대관령에는 동생 부부와 함께 간 이유가 뭡니까?"
추경감이 수사 수첩을 뒤져보머 물었다.
"싸운 사람들이 화해하라는 뜻으로 아버님이 뒤에 동생 부부를 보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대관령에는 별장이 있습니까?"
강형사가 불쑥 물었다.
"회사서 공용으로 쓰는 전용 콘도가 있긴 합니다만."
"대관령에서 동생 내외와 무슨 일을 했나요?"
추경감이 지포 라이터를 꺼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