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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의 후손 예수의 사역
C. 바람 같은 힘으로 세상 풍랑을 일으키는 사탄을 다스리심
[막4:35~41, 마8;23-27, 눅8;22-25]
“35 그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 36 저희가 무리를 떠나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매 다른 배들도 함께 하더니 37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부딪혀 배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38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시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가로되 선생님이여 우리의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39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40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 41 저희가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저가 뉘기에 바람과 바다라도 순종하는고 하였더라”
이 기사는 요한복음을 빼놓고는 다 같은 말로 기록하고 있다. 표현은 조금 다르지만 이런 사건이 있었던 것만은 사실인 것 같다. 이 사건을 어떻게 보느냐는 것인데,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자연을 정복하셨다고 보는 것이 보수적인 입장, 소위 정통적인 입장에서 보는 관점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만 볼 수 없다. 그것은 그렇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주제가 ‘여인의 후손과 그 사역’이기 때문에 그것을 중심으로 말씀드리려고 한다.
바람이라는 말은 ‘숨쉬다’는 말에서 나왔다, 숨쉰다는 말을 의미로 해석해 나가면 풍조, 사조라는 이런 말로 또 번역된다. 세상풍습, 세상풍조, 이런 말이 있는데 요즘 말로 하면 세상 유행과 같은 것들이다. 뭔가 바람처럼 왔다가 간다. 한때는 장발이 왔다가 갔지만 요즘에는 펑크가 왔다가 간다. 한때는 홀태바지가 왔다가더니 또 한때는 나팔바지가 왔다가 간다. 이런 것이 바람처럼 왔다가 간다.
그래서 풍조, 사조 또 고상하게는 철학적인 사조, 사상이 있다. 한때 공산주의가 밀려오더니 지금은 잠잠해졌다. 이런 것들이 그런 말로 번역될 수 있는 말들이다.
그리고 ‘바람이 불다’는 이런 뜻이 되는데, 성경에서 바람이 부는 곳은 공중이다. 공중권세 잡은 자라고 번역할 때도 이 말을 썼다. 타락한 천사들이 공중의 권세를 잡고 있다. 이것은 성경을 기록한 시대의 사람들의 우주관이라고 할 수 있다. 공중권세 잡은 자라고 에베소서 2장에 나온다.
* 오고 감을 알 수 없음
왜 이런 해석이 가능했는가? 바람이라는 것은 오고 가는 것을 알 수가 없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는 것처럼~”이라고 했다. 지금은 과학적으로 생각하면 바람의 발생지가 다 있겠지만 우리가 직감적으로 볼 때는 바람은 어디서 일어났다가 어디서 없어지는지 모른다. 금방 불다가 금방 그치니까 바람의 오고 감을 알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인가? 귀신(鬼神)도 오고 가는 것을 모른다. 귀신의 존재는 다음에 이야기하기로 하고 좌우간 귀신이 있다고 하면 귀신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으니까 오고 가는 것을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바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 큰 힘을 가지고 있음
그런데 이 바람은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잘 아는 태풍, 아메리카 쪽에서는 토네이도 같은 큰 바람이 분다. 태풍도 무섭지만 토네이도는 더 무서운 것 같다. 일종의 회오리바람인데 한 도시를 삼켜버린다. 바람처럼 큰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은 없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을 사탄의 활동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사탄은 뱀처럼 오고 가는 것을 잘 모른다. 그리고 큰 힘을 가지고 있다. 세상을 휘두르고 휘몰아치고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 하나님께서도 천사들을 바람으로 삼으셨다 했음(히1:7참)
그리고 히브리서 1장에서는 하나님께서 천사들을 바람으로 삼으셨다고 한다. 하나님이 천사들을 볼 때도 바람 같다고 본 것이다.
타락한 천사인 사탄은 하늘에서 추방되었다. 하늘. 하나님이 계시는 곳, 하나님의 보좌, 하나님의 영역에서 추방되어서 지금은 공중에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은유적인 말이다. 우리가 아는 공중에 있다는 말이 아니고, 하늘과 땅 사이에 있다. 하늘에도 있지 못하고 땅에도 있지 못하고 공중에 있다는 말이다. 공중에 있으면 어떻게 되는가? 군사적으로 말하면 제공권(비행기)이다. 전쟁에서 지상군도 중요하지만 제공권은 굉장히 중요하다.
타락한 천사인 사탄은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고 공중에 있다. 땅에 있는 것이 아니고 공중에 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있다는 말이 된다. 사람은 땅에 있고 하나님은 하늘에 있다. 그러면 사탄은 공중에 있다는 말이니까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존재한다는 말이 된다.
1. 바람이 파도를 일으키듯이 사탄은 이간하여 어지럽게 하고 두렵게 함
우리는 사탄의 정체를 이것을 통해서 알기 위해서 하는 말이다. 사탄은 어디에 거하는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거한다. 동산에서 네가 이것을 먹으면 정녕 눈이 밝아져서 선악을 아는 일에 하나님과 같이 될 것(창3:5)이라고 한 이 말도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 한 것이다. 지금도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 바람을 일으키기도 하고 큰 힘을 발휘하기도 하는 역할을 역시 사탄이 하고 있다.
세상풍조로 휘몰아치면 사람들은 그것을 따라가지 않을 수 없다. 유행이 돌아가면 거기서 나 혼자 초연한다는 것은 참 어렵다. 절에서 수양을 하는 분들은 다르겠지만 그렇지 않고 그냥 시장바닥에서 사는 우리들로서는 어렵다. 나도 장발할 때 왜 저렇게 장발을 하고 다니나 했는데 뒤로 보면 나도 머리를 기르고 있는 것이다. 내 자신도 모르게 하고 있었다. 바짓가랑이가 왜 넓어졌는가? 나도 모르게 넓어지고 있는 것이다. 다 넓게 입고 다니는 데 혼자 홀태바지를 입고 다니면 참 우습게 보인다. 사람의 눈이라는 것이 참 이상하다.
어떤 풍조가 밀려오면 사람들은 거기에 몰아쳐 간다. 지금 전 세계는 자본주의의 물결이 확 몰아치고 있다. 그래서 이 물결을 거역하고서는 살아남을 수가 없다. 어떤 사람들은 반대하지만 반대해도 소용이 없다. 원체 물결이 크기 때문이다. 미국이 주도하는 자본주의 시장은 언제까지 갈지 모르지만 당분간은 이 흐름을 거역하고 살아남을 나라가 없다. 그만큼 풍조라는 것은 힘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 육신적으로는 어쩔 수 없을지라도 영적으로는 우리가 정신을 제대로 차려야 된다는 이야기다.
사탄은 바람이 파도를 일으키듯이 인간세계를 어지럽히고 뒤엎고 있다. 우리는 무엇이 그랬는지를 모른다. 사람들의 필요에 의해서 공산주의를 했다가 자본주의를 했다가 하지만 그 배후에는 그보다 더 큰 세력이 있다는 것이 당시의 세계관이고 당시의 우주관이다. 지금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을 하지 않겠지만 지금도 생각해 보면 사람들이 왜 그렇게 혼란에 빠지는가? 이런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뒤에 더 무서운 배경이 있지 않을까?’이런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1-1. 선악과를 먹임으로 영과 혼을 혼란케 하고 시기와 분노로 폭력을 일으키게 함
사탄은 선악과를 먹임으로 우리의 영과 혼을 혼잡하게 만들었다. 처음에는 하나님의 말씀만 들었기 때문에 혼란될 일이 없었는데, 와서 묻기를 “하나님께서 너에게 이것을 먹지 말라고 하더냐?” 이렇게 물으니까 혼란이 생겼다. 먹어도 되는데 왜 못 먹게 하나? 이런 생각이 들 것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먹으면 정녕 죽을까 하노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담은 그때부터 이미 한 방을 얻어먹어서 혼란이 되게 되었다. 우리도 그렇다. 어떤 것이 와서 우리에게 탁 치면, 의문을 던지면 우리 속에서 혼란이 생기기 시작한다.
이것이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가인과 아벨에 오면 시기와 분노로 폭발해서 폭력이 일어나는 그런 사태로 발전했다. 그리고 그것이 더 발전해서 마지막에는 바벨론이 된다. 바벨탑을 건설하자는 것이 된다. “우리가 힘을 모으자, 흩어짐을 면하자, 망대를 높이 세우자, 하늘에 이르자, 우리의 이름을 세상에 빛내자.”(창11장) 이렇게 돌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모두 풍조에 따라서 올라가는 것이다.
1-2. 세상 풍조를 만들어내고, 사람들을 바람처럼 몰고 다님
세상 풍조를 만들어내고 사람들은 바람처럼 몰고 다닌다.
가인의 시대에 오면 사람들이 다 그렇게 되는 것이다. 다 폭력화된다. 거기에는 가인 한 사람만 그렇게 되어있다. 그러나 가인 한 사람은 그런 세대의 인류를 대표하는 것이다. 그런 세대에 가면 다 그렇게 되는 것이다. 안 하고서는 안 되는 것이다.
머리 가운데를 쫙 깎는 펑크라는 것이 미국에서 시작된 것이다. 전에 미국에 갔을 때 학교에서 나오는 중고등학생들을 보니까 시커먼 옷에 바지는 다 벗겨져 가는 바지를 입은 애들이 나왔다. 안 벗겨지나 싶은데 그런 옷을 걸치고 다닌다. 그랬는데 금방 한국에 와서 보니까 그렇게 했다. 요즘은 매스컴이 있으니까 아주 빠르게 돌아간다. TV에서 탤런트들이 나와서 말을 해 놓으면 아이들이 다 말을 그렇게 한다. 어느새 다 유행이 된다.
1-3. 큰 바람(태풍, 토네이도)을 일으켜 인간 세계를 파멸시키기도 함(전쟁(戰爭))
큰 바람을 일으켜서 인간의 세계를 휩쓸어 버릴 수도 있다.
전쟁 같은 것을 보면 그것을 사람이 하는 짓이라고 하기 어려울 정도로 무서운 일이다.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을 때 유럽의 상황을 보면 완전히 미치광이 판이었다. 독일이 중심이 된 그 세계대전은 완전한 미치광이였고 광란이었다. 유대인을 학살하는 장면은 광란에 가까운 일이었다. 이런 것들은 보면 과연 인간이 저렇게 할 수 있는가? 이런 생각이 든다. 인간이 말짱할 때는 참 선하고 좋고 양심도 있고 잘못하는 것을 못 본다. 독일 사람들은 유독 합리적인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이 어떻게 히틀러 만세를 부르면서 전쟁에 참여했겠는가? 물론 거기서도 전쟁에 참여하지 않고 반 히틀러 운동을 한 사람도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국민들은 히틀러를 지지했다. 이런 것을 볼 때 사람이라는 것이 별 것이 아니고 바람이 불면 어디로 가는구나. 거기서 따로 산다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고 외로운 일이다.
우리도 거기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어느 정도까지는 정신을 차릴 수 있지만 그것이 완전히 몰아쳐오면 그것을 이겨낼 사람은 많지 않다.
2. 그러므로 구주께서는 먼저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하시고 이제 그의 활동을 제한하고 다스리심.
그래서 구속자로 오신 주님인 구주께서는 먼저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하시고, 이제는 그의 활동을 제한하시려고 오셨다. 오늘 말씀은 그렇게 해석하고 싶은 것이다.
머리를 상하게 했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인생의 자리를 내 놓으시니까 사탄이 할 말이 없게 되었다. 쉽게 말하면 상대가 없어진 셈이다. 맞장구를 쳐야 되는데 한쪽에서는 전혀 다른 길로 가버리니까 머리가 아무리 좋더라도 멍해질 것이 아닌가? 아무리 머리가 좋아도 자기와 상관없는 문제가 나왔으면 못 풀 것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머리가 상했다는 뜻이다.
우리는 예수님 이전에 마귀가 그렇게 말을 하면 그 말에 우리는 응수가 되었다.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 그래야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할 수 있지 않느냐? 이러면 우리는 그래야 되는데 왜 나는 못하는가? 이렇게 되었다는 말이다. 천하만국의 영광을 보이면 말하되 내게 절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고 하면 그래 그럴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서로 교통이 되었다. 그리고 전쟁도 되었다. 그래서 거기서 머리를 쓸 것 아니겠는가. 그런데 나는 사람이다. 돌로 떡을 만들어 먹는 게 사람이 아니다. 하나님을 경배해야 할 자가 사람이다. 이렇게 대답을 해버리니까 머리 좋은 사탄이 어떻게 할 수가 없다는 말이다. 머리가 상했다는 말이 그런 뜻이다.
2-1. 주 예수께서 인생을 점유(占有)하면 사탄의 활동에 휩싸이지 않음
주 예수께서 인생을 점유하면 내가 사탄의 활동에 휩싸이지 않게 된다. 우리가 주님의 그러한 인격으로 젖어들게 되면 사탄이 우리에게 와서 똑같은 말을 하겠지만, 관계가 없으니까 우리가 말려들어갈 일이 없지 않겠는가. 돈을 돌 같이 보는 사람에게 와서 주식을 하면 돈을 많이 번다더라고 하면 먹혀 들어가겠는가? 안 흔들릴 것이다. 꼭같은 이치이다. 돈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겠지만 예를 들면 그렇다는 것이다.
기초가 확고하기 때문에 확고한 기초위에 서있으면 사탄은 자기 머리를 쓸 수 없다는 이야기다.
2-2. 세상 풍조와 사조를 능히 다스리고 바람을 잔잔케 하시듯이 평안을 가져옴
세상 풍조와 사조를 능히 다스리고 평안을 가져올 수가 있다.
왜 사람은 불안한가? 하면 세상 풍조 때문이다. 남들은 저렇게 사는데 나는 왜 이렇게 못사나? 이런 것 때문에 불안하다.
옛날에 비하면 우리가 아주 잘 살고 있다. 하지만 상대적이니까 지금도 여전히 똑같다. 옛날에 얼마나 못 살았는가? 지금 北韓만큼 못살았다. 우리 어렸을 때도 그랬고, 해방 후에는 그랬다. 지금은 북한과의 경제 수준이 10배차이라고 한다. 우리는 10배를 잘살고 있는데, 그렇다는 생각이 별로 안 든다.
외국에 나가 돌아다녀보면 우리나라도 상당히 괜찮은 나라라고 누구든지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사는 것을 보면 우리가 상당히 잘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미국 가서 보면 물론 집이 우리보다 크고 땅이 좀 넓다는 생각은 있지만 미국사람들 먹는 것은 우리도 다 먹고 누리고 있다. 일본에 가보면 우리보다 집이 좁다고 느낀다. 유럽에 가 봐도 별로 그렇게 넓게 느껴지지 않는다. 조물조물하니 옹색하게 느껴진다. 지금 우리가 괜찮네 그럴 정도이고 외국 갔다가 돌아오면서 선물 사려고 돌아다녀보면 아무 것도 살 것이 없다. 다 한국에 있는데 뭐하려고 달러를 거기다 주겠는가. 여기 와서 사면 된다. 백화점에 가면 다 있다. 없는 것이 하나도 없다. 괜히 무겁게 들고 올 필요가 없다. 세금내고 들여올 필요가 없다. 그만큼 우리는 지금 아주 좋은 세상에 살고 있는 셈이다. 그래도 상대적으로는 그렇게 느끼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만 그렇게 살면 괜찮은데 다른 사람도 다 그렇게 살기 때문에 내가 잘 살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세상 풍조! 이것 때문에 사람들은 평안이 없다. 내가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점유되면, 내 기초를 확고하게 그분 안에 두면, 나를 그리스도 안에 심어두면 바람과 바다를 잔잔케 할 수가 있다.
세상 풍조는 바람과 바다다. 바다가 조용할 때는 참 조용하다. 그런데 시끄러워지면 엄청나게 무섭다.
나는 바로 바다 앞에 살았기 때문에 그 바다가 변화무쌍하다. 내가 살던 곳은 바다가 호수처럼 생긴 곳이다. 바다가 조용할 때는 거울 판처럼 미끄럽다. 그런데 바람이 불면 성난 파도가 된다. 아마 큰 바닷가에 사는 사람들은 그것을 못 느낄 것이다. 큰 바닷가에는 항상 파도가 있다. 그런데 내가 살던 바닷가는 큰 바다가 아니고 둘러싸여 있어서 고요할 때는 정말 고요하다. 섬들이 물에 그냥 동동 떠있는 것 같다. 그런데 바람이 일어나면 그때는 완전히 달라져버린다.
세상도 역시 그렇다. 사람 사는데 보면 잘살고 괜찮은데 잘살고 있다가도 누가 옆에 와서 꾹 찌르거나 집 샀다는 이야기를 하거나 하면 속에서 바람이 확 일어나서 내 팔자야 한다. 자기 혼자 살 때는 잘 살았다. 이것이 꼭 바람 같은 것이다. 바람 일으키는데 가면 꼭 그렇게 염장 지르는 사람이 있다. 남 앞에 와서 속만 찔러놓고 가는 사람이 있다. 그렇다고 돈을 주는 것도 아니면서 돈 자랑만 실컷 하고 간다거나 이런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들이 남이 못 견디는 것을 즐기는 사람이다.
아무리 그럴지라도 내 인생의 기초를 확고하게 영원한 자리에 박고 있으면 사탄이 와도 문제가 안 되는데 하물며 아는 사람이 와서 그런다고 문제가 되겠는가. 자기 잘난 맛에 그런 것이지. 너나 나나 똑같은 사람인데 너는 십자가에 못 박으면 안 죽느냐? 이러면 간단하다. 너는 숨 안 쉬고 사냐? 이러면 간단하다. 너는 내일 일을 아냐? 그러면 간단한 것이다. 공연히 들떴다가 우리가 태풍에 맞는 것이다
3. 구주께서 사탄을 다스리신 것은 귀신들에게 억류되어 시달리고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한 것임
사탄을 다스리신 것은 왜 그렇게 다스려야 되는가? 건너편으로 건너가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자는 것이다. 여기 보니까 “우리가 저 펀으로 건너가자!”(막4:35)고 했는데, 왜 우리는 그렇게 사탄을 제압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 건너편으로 건너가서 복음을 전해야 하기 때문이다. 귀신 들린 자들이 많으니까, 그렇게 풍파에 헤매는 사람이 많으니까, 그런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전하려니까 이것을 제압해야 된다.
나도 폭발해서 어쩔 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복음을 전하겠는가? 나도 세상 풍조에 휘몰아치는 사람이 어떻게 세상에 가서 잔잔케 하겠는가? 내가 먼저 그것을 제압해야 할 것이 아니겠는가. 적을 제압해야 내가 적진에 들어갈 것이 아니겠는가.
미국식 전쟁은 전진하려 할 때 전진하려는 장소에 포탄을 엄청 쏟아 부어 완전 초토화시켜서 적이 하나도 없도록 한 후에 들어간다고 한다. 적이 있는데 들어가면 피차간에 피해가 엄청나게 많게 되기 때문이다. 전쟁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전진할 때는 아주 쉽다고 한다. 전진할 때는 적이 없어서 노래 부르면서 전진한다고 한다. 적은 후퇴하니까. 그런데 후퇴할 때 많이 죽는다고 한다. 우리도 1∙4후퇴 때, 나는 도망쳐야하는데 뒤에서 좇아오니까 많이 죽었다. 전진할 때는 깃발 날리면서 막 신나게 간다고 한다. 3∙8선 돌파하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트럭을 타고 가는데 아무도 없고 너무너무 신났다고 한다.
그러니까 우리가 적을 먼저 제압하면 가는 길이 쉬워진다.
3-1. 건너 편 거라사인의 땅에는(막5장,눅8장) 무덤 사이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들이 있었음
건너편에는 누가 있는가? 귀신에게 시달리는 사람이 있다고 되어있다. 거라사인의 지방인데 무덤사이에 살면서 돌로 자기 몸을 해하는 귀신들린 사람이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 사람을 만나서 예수님께서 사역을 하셨다.
무덤사이에서 소리를 지르면서 돌로 자기 몸을 상하게 하고 있는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세상의 풍조와 사조에 밀려다니면서 자기를 어떻게 할 줄을 모르는 사람이다. 이웃집사람이 돈 이야기하고 갈 때는 속이 상해서 내 팔자야 하면서 자기 머리를 잡아당기고, 또 옆 사람이 자식 이야기를 한참하고 가면 그때는 못 견뎌서 돌로 자기 몸을 막 찧고 있는 일이 벌어지게 된다.
3-2. 그들은 무덤 사이에 거하며(막5:3)
“무덤사이에 거하더라.”(막5:3) 이것은 죽음이다. 거기는 절망과 흑암밖에 없다. 부정 밖에 없다. 전부 생각하는 것이 부정적인 것이고, 무덤 안에서는 아무리 생각해도 좋은 것이 없다. “무덤사이에 거하더라.”
⑴ 큰 소리를 지르고, 자기 몸을 자해하고 있었음
“큰 소리를 지르더라.”(막5:5) 큰 소리를 지르는 사람을 보면 다 문제가 있어서 그렇다. 동네에서 큰 소리 지르는 사람, 길가에서 큰소리 지르는 사람, 또 속으로 큰소리 지르는 사람은 다 문제가 있어서 그렇다.
“자기 스스로 자기 몸을 自害하고 있더라.”(막5:5) 남에게 화풀이를 못하면 자기 자신에게 한다.
서양 사람들은 남에게 화풀이하면 큰일 나니까 자기 혼자 땅을 두드린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화가 나면 자기 식구나 옆 사람에게 푸는 나쁜 습관을 가지고 있는데 서양 사람들은 그렇게 했다가는 큰일 난다. 자식한테 해도 잡혀가니까 마누라한테 하면 당연히 잡혀가기 때문에 아무리 자기가 화가 나도 화를 그렇게 풀 수가 없다. 누구 이야기를 들으니까 경찰서에 잡혀갔는데 완전히 개 취급한다고 한다. 닭장 같은데 가두어놓고 가정폭력범이라고 완전히 짐승 취급한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가정폭력범이라고 신고하면 경찰관 한두 명이 와서 슬슬 보면서 잘 해보세요하고 그냥 가버린다. 왜 그러느냐고 하면 남의 가정문제에 내가 간여할 수 있느냐고 말한다. 그러니까 가정폭력이 안 없어진다.
외국에서는 여지없이 경찰관이 현행범으로 체포해서 쇠고랑 채워서 닭장에 집어넣으니까 얼마나 조롱을 당하겠는가. 그 사람의 신분여하에 관계없이 집행해버린다. 그리고 재판받고 방면할 때는 1달 동안 또는 3달 동안 5M이상 접근하지 말라는 접근금지명령을 내리기 때문에 그대로 해야 한다. 그렇게 엄격하게 벌하기 때문에 자기가족에게 함부로 할 수가 없다. 외국 사람은 자기 혼자 가슴을 막 친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런 사람이 별로 없고 남에게 가서 막 화를 푸니까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방법이 서로 다르다.
“자기 스스로 자기 몸을 해하고 있더라.”고 하는 것을 보니 이 사람은 아마 서양귀신인 것 같다.
⑵ 구주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르면서 자기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함(막5:7)
(주님을 자신을 그들을 위한 인자라고 하셨는데..)
그리고 예수님을 가리켜서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다. 당신은 하나님 아들이라고 불러놓고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것이다.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것이다. 나는 귀신인데 하나님 아들이 나와 무슨 상관이냐는 것이다.
그런데 참 이상한 것은 예수님께서는 자기 자신을 가리켜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 적이 성경 어디에도 없고 人子(사람의 아들)라고 늘 말한다. 예수님은 자신을 사람의 아들이라고 하는데 귀신들은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다. 이 말은 당신과 나는 상관없다는 말이다.
종교적인 세계에서는 그럴 수도 있다. 예수님을 하나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이 참 좋은 것 같은데 하나님 아들이라고 해놓고 나와는 상관없는 사람으로 인식한다. 왜? 나는 사람이고 저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니까 나와는 상관없는 사람이라는 문제가 될 수 있다. 나는 예수님에게 도움을 청할 수 있지만 나와 예수가 깊이 관계될 사람은 못 되구나! 이런 관념이 종교인들한테 꽉 박혀있을 수 있다. 그분과 내가 참으로 인격적으로 교통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어려운 일이 있을 때 가서 좀 부탁할 수 있는 대상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 아들이니까.
귀신들이 예수가 하나님 아들이라는 말을 했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은 다르게 해석하는데, 귀신들도 알아보고 하나님 아들이라고 하지 않았느냐고 한다. 이것도 전형적인 해석이다. 나는 이것을 읽다가 생각해보니까 이럴 수도 있구나. 그것도 맞겠지만 우리 사람들 속에는 저 사람은 하나님 아들이라고 제쳐놓고 자기 생활을 하려고 한다. 저 형제는 아주 많이 성장한 형제라고 딱 제쳐놓고, 그것이 어떻게 생각하면 참 좋게 생각한 것 같은데, 자기는 딴 살림을 차린다. 여러분도 그런 경험이 있지 않은가? 아마 있을 것이다. 예수님이야 예수님이니까 그렇지 뭐. 그렇게 하고는 자기는 또 자기대로 살림을 산다. 이런 것도 있을 수 있다.
전통적으로 해석하면 귀신도 예수를 알아봤다. 그런데 전통을 좀 비켜서 생각해보면 그것이 자기를 숨는 방법일 수도 있구나. 그렇다고 예수님이 하나님 아들이 아니라는 말은 아니다. 그렇게 하는 뒤에는 자기를 감추는 것도 있구나.
그래서 예수님은 항상 자신을 인자라고 한 것 같다. 자기가 하나님 아들이라고 해버리면 사람들이 다 그렇게 살 것이니까 그래서 늘 인자라고 하신 것이 아닐까. 나는 여러분을 구원하러 왔다. 여러분과 함께 살려고 왔다. 여러분의 생명이 되기 위해서 왔다. 그렇게 하려고 늘 인자(人子)라고 말씀 하신 것 같다.
이 사람은 귀신 들린 것이 분명하다. 무덤사이에서 큰 소리를 지르고 자기 스스로 몸을 자해하면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고 자기는 피해가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에게 하나님 나라를 전해야 되기 때문에 우리는 귀신을 제압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사람들을 그냥 놔둘 수가 없다. 이런 사람들을 불러내야 되기 때문에 우리는 사탄과 그 부하들을 제압하지 않으면 안 된다.
4. 거라사인의 지방에도 귀신들의 지배를 물리치고 하나님의 통치가 있는 나라를 세워야 함
거라사인의 지방에도 귀신들의 지배를 물리치고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는 나라가 세워져야 된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統治)가 있는 곳이라는 뜻이다. 천당하면 개념이 이상해서 하늘에 있는 집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우리말에서 천당이라고 사람들이 말하고 있는 것은 아주 빗나가기 쉬운 것이다. 바실레이아라는 말을 나라라고도 번역하고 국(國)이라고도 번역했다. 국이나 나라나 마찬가지이다. 천국이나 하나님 나라라고 할 때 이것은 바실레이아라는 말을 번역한 것이다. 이 바실레이아라는 말은 통치권을 이야기한다. 왕권, 통치권을 의미한다. 실제적인 말이다.
천당(天堂)하면 집이라는 개념이니까 공간적인 개념이다. 우리나라 기독교인들이나 동양의 한자 문화권에 속해 있는 많은 기독교인들이 천당에 간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죽으면 어떤 공간으로 간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죽으면 공간이 없다. 그런데 공간으로 간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이것이 아주 뿌리 깊게 박혀 있다. 그래서 교회의 목사님들이 대부분 교회에서 그 말을 잘 안 한다. 나처럼 천당이 없다고 해버리면 여기는 천당도 못 가더라고 하면서 다 교적부 빼서 다른 곳으로 갈 것이다. 요즘에 사람들이 천국 간다는 말을 하면서도 개념은 천당이다. 말은 천국이라고 하는데 개념은 천당이다. 이것은 한자 문화권에 와서 이렇게 되었다.
원래는 불교의 육도윤회에 속한 것이다. 불교가 지혜를 깨닫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하면 육도윤회에서 벗어나고 싶은 것이다. 육도윤회에서 벗어나는 것이 해탈이다. 육도 가운데 하나가 천당이다. 지옥도, 축생도, 아귀도(삼악도) 천도, 인도, 아수라도(삼선도) 해서 여섯 개가 있는데 그것을 뱅뱅 돈다는 것이다. 인생이라는 것이 내가 살았을 때 나쁜 짓을 하면 죽은 후에 귀신이 된다든지 짐승이 된다든지 하는 이런 식이다. 그래서 마부로서 말을 괴롭게 했던 사람은 죽어서 자기가 말이 된다는 것이다. 내생에서는 다시 말로 태어난다는 것이다. 전생과 후생을 회전하면서 방황을 한다는 것이다. 이 방황에서 벗어나는 것이 해탈이다. 극락, 천당 하는 것이 그 육도 가운데 하나가 천당이다. 그리고 불교에서 심오한 진리를 사람들한테 그냥 말하기 어려우니까 이런 은유를 써서 말했다. 왜냐하면 우리나라에 불교가 들어와서 조선시대에는 사대부나 공부하는 사람들한테 못 들어갔다. 완전히 배척 받아서 서민들, 무식한 사람들을 상대하게 되었다. 이 사람들한테는 불교의 심오한 진리를 설명해도 안 된다. 그러니까 그런 식으로 설명했다. 절에 가면 극락전이라는 것이 있다. 천정에 배를 만들어서 달아놓았다. 그러면 그 배를 타고 극락으로 건너간다는 것이다. 이렇게 가르쳤다.
찬송가(讚頌歌)에도 진짜로 배타고 건너간다는 노래가 있다. 이런 것이 다 우리 문화적인 후유증이다. 그런 것이 교회에 그냥 들어왔다. 그래서 사람들이 다 공간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나도 조심해서 잘 말 안하는데 오늘 내가 왜 확실하고 담대하게 말 하느냐 하면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고 나왔기 때문이다.
유명한 꽃동네 신부님이 나와서 여러분 천당에 가고 싶지요. 나도 가고 싶어요. 그렇지만 천당은 공간이 아니고 상태입니다. 이렇게 신부님이 이야기한다. 그래서 나도 안심하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번에 또 어떤 분이 상해에서 연합교회를 한다고 한다. 상해에서 한국 사람들이 약 3천 명 정도 모인다고 하는데, 중국에서 선교를 해 보니까 한국 사람들이 천국을 잘못 알고 있다는 것이다. 집 당(堂)을 썼기 때문에 공간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천국은 공간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게 말하기 때문에 나도 이제 말해도 된다. 그래서 말하는 것이다. 그전에는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없는 줄 알고 나 혼자 조심해서 말했는데, 그런 사람들이 말하기 때문에 이제는 조심해서 말 할 것도 없다.
천국, 나라! 이것은 지배권, 권세를 말한다. 영어에서는 정확하게 번역했다. Reign of God, Reign이라는 말은 통치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Kingdom of God. Kingdom이라는 말도 왕권(王權)을 말한다. 영어에서는 정확하게 번역했는데 한국에 와서 잘못 돼버렸다. 성경에는 사실 천당이라는 말이 없다. 그렇게 번역을 안 해놓고 천국과 하나님 나라로 번역해했데 천당이라는 개념이 먼저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받아들이고 그렇게 좋도록 하자고 돼버린 것이다. 아무도 그런 이야기를 잘 안 한다. 그런데 우리가 분명하게 알 것은 그분의 통치다.
거라사인의 지방은 어떤 일정한 땅이 아니고 바로 귀신이 통치하는 곳이다. 그 곳에 하나님의 통치가 임해야 되지 않는가. “나라이 임하옵소서!”(마6:10)하는 그 말은 어떤 공간이 내려오십시오라는 말이 아니고, 하나님의 바실레이아가 오십시오하는 말이다.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기를 원합니다라는 뜻이다.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옵소서.” 할 때 그 나라는 바실레이아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통치가 임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천국은 어디인가? 오늘 교회(敎會)일 수도 있다. 하나님의 통치가 있는 곳을 천국이라 한다.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상태, 그것이 바로 천국이다. 그러니까 오늘 교회일 수도 있다. 그리고 물론 또 앞으로 오는 나라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앞으로 우리 대구교회는 더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는 곳일 수가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지금 50%라면 그때 가면 70%일 수도 있다. 그리고 또 더 나아가면 100%일 수도 있다. 그 100%일 수도 있을 때 그때가 예수님이 오시는 때라는 말이다. 오신다는 말이 그런 뜻이다.
‘오신다’는 말도 늘 공간적인 말로 생각하다 보니까 저 어디 멀리 갔다가 오는 것으로 생각할 수가 있다. 천당이라는 곳이 공간이니까 예수님이 가시는 곳도 천당에 가 있을 거라고 생각 할 수가 있다. 그러면 거기서 지금 또 옮겨서 올 거라는 말이다. 공간적으로 생각 하니까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통치로 생각하고 왕권으로 생각하면 그분은 지금도 오고 계신다. 우리 안에 지금도 오고 계시고, 앞으로도 오실 것이고, 점점 더 오실 것이고, 언젠가는 더 오실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가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그분이 더 빨리 오시기를 바라는 것이다. 빨리 오시기를 바란다는 말은 그분의 통치가 더 온전해 지기를 바란다는 말이다. 나는 그분에게 지금 50% 밖에 점유가 안됐는데 내가 갈망하는 것이 무엇인가? ‘오십시오.’하는 말은 나를 80% 90% 100%를 점유해 주십시오라는 이 말이다.
요한계시록 마지막에 보면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 한다. 오기는 어디에서 오는가? 그것이 아니고 나를 점유해 주십시오라는 말이다. 내게로 더 가까이 와 주십시오하는 이 말은 나를 더 점유해 주십시오라는 말이다.
그래서 성경은 마지막에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말한다. 그 앞장에서 보면 예수님은 벌써 오셨다. 벌써 오셨는데 마지막에 가면 또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말한다. 이것은 시공간의 문제 아니라 상태의 문제다.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는 상태다.
우리 교회도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는 상태가 점점 더 발전하고 더 깊어지고 더 넓어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어느 날에는 주님이 완전히 통치하시는 나라가 될 것이다.
4-1. 사람을 광인이 되게 한 것들은 떼 귀신이었음
사람을 미치광이(광인)가 되게 한 귀신들은 어떤 귀신인가? 군대라고 하는 떼거지 귀신이다. 군대라는 말은 떼라는 말이다. 떼거지 귀신이 왔다는 말이다. 이것은 세상풍조를 일으키는 귀신이라고 봐야한다. 혼자 다니는 귀신이 아니고 떼로 몰려다니는 귀신이다. 세상 풍조라는 것은 떼 몰려다니는 것이다. 떼 몰려다니는 귀신이 오니까 사람들이 정신을 못 차리는 것이다. 군대가 오니까. 네 이름이 무엇이냐고 하니까 군대라고 한다.
4-2. 떼 귀신은 사람들을 그냥 두지 않고 세상 풍조에 밀려다니게 함
이 떼 귀신들은 사람들을 그냥 두지를 않고 세상 풍조를 만들어 가지고 밀고 다닌다. 떼 귀신 자체가 보이지 않는 풍조이다.
4-3. 이 떼 귀신을 바다 자기 곳으로 몰아넣는 길은 구주 안에 있는 인생의 확고한 위치의 권세뿐임
이 떼 귀신을 바다로 몰아넣었다. 돼지 떼가 있었는데 그 돼지 떼 속에 들어가서 바다로 들어갔다고 한다. 돼지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안 좋게 생각하는 짐승이다. 부정하게 생각하는 짐승이다. 레위기에 나오는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 가운데 돼지는 부정한 짐승이다. 왜냐하면 발은 쪽 발로 갈라졌지만 되새김질을 하지 않기에 부정한 짐승이라는 것이다. 이 부정한 짐승에게 묻어가지고 비탈길을 따라서 바다로 들어가더라는 것이다.
사람의 몸을 입고 있던 떼 귀신들이 돼지 몸을 입고 바다로 들어갔다는 말이다. 귀신도 활동하려면 몸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귀신도 몸이 없으면 활동이 안 된다. 귀신도 어차피 몸이 있어야 되는데 이 사람들에게 들어있던 귀신이 돼지에게로 들어가서 바다 속으로 들어갔다는 것이다. 어쩌면 돼지도 사람일수 있다. 잘못 하면 무덤 사이에 있던 그 사람 귀신이 다른 사람에게 또 들어갈 수 있다. 그러면 바다로 몰고 들어간다는 이야기다.
우리도 그렇게 바다로 몰아넣으려면 예수님의 확고한 위치에서, 그 위치 안에서 우리가 서 있어야 떼 귀신에게 밀려다니지 않고 떼 귀신을 바다로 넣을 수 있다. 왜냐하면 바다는 떼 귀신이 살고 있는 곳을 말한다. 사람이 제 위치에 살고 있으면 귀신도 제 위치로 갈 것이다. 예수님이 제 위치를 내놓으니까 사탄은 물러나고 천사들이 수종 들더라고 했다. 그러면 질서가 똑바로 잡혔다는 말이다.
이 우주는 사람이 제 자리에 있어야 질서가 잡힌다. 내가 제자리에 있어야 내 주변의 환경이 제 자리로 간다. 내가 내 자리에 있지 않고 다른 곳에 있으면 내 주변이 다 다른 자리에 있게 된다. 다 다른 자리에 있으면 시끄러워지는 것이다. 각자 자기 자리에 있으면 시끄럽지 않은데 자기 자리를 두고 돌아다니면 시끄러울 것이 아닌가? 위치를 이탈했으니까.
회사(會社)에서 사장이 자기 위치를 지키지 않고 있으면 사원들이 모두 제 멋대로 돌아간다. 그러면 그 회사는 시끄럽게 되어버리고 만다. 나라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대통령이 자기 위치를 못 지키면 나라가 다 시끄러워질 것이다. 지금 태국은 난리가 났다.
이 우주는 사람이 제자리에 있을 때 비로소 안정된다. 그 우주는 누구인가? 바로 우리들의 우주다. 내주변이 시끄러운 것은 내가 안정이 안 되어서 그렇구나. 내가 내 자리에 있지 않아서 내주변이 시끄럽구나. 이렇게 해석해야만 도움이 된다. 저사람 때문에 그렇다고 하면 도움이 안 된다. 내가 내 자리를 못 지키고 있으니까 주변이 이렇게 시끄럽구나. 이렇게 생각해야 도움이 된다.
5. 타락한 천사 사탄은 하나님의 거처인 하늘에서 쫓겨나서 공중에 거하고 바람 같은 힘으로 하나님 보좌의 통치의 통로를 가로 막고 있음(풍랑처럼)
타락한 천사인 사탄은 하나님의 거처인 하늘에서 추방되어서 공중에 거하면서 바람 같은 힘으로 하나님 보좌의 통치의 길을 가로 막고 있다.
시공간적으로 생각하면 하나님이 땅위에 오려면 공중을 거쳐야 할 것이 아닌가? 그런데 공중에서 권세를 잡고 있으니까 하나님이 사람에게 오기가 어렵다. 그리고 사람도 하나님께로 가기가 어렵다. 중간이 막혀 있으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시려면 길이 트여져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 길을 트시려고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이다.
사람이 십자가 자리에 가 있게 되면, 그것을 자기 자리로 알게 되면, 공중권세 잡은 자가 힘을 잃게 되니까 하나님이 사람에게 오기가 쉬울 것이다. 사람도 하나님께로 가기가 쉬울 것이다. 지금까지 꽉 막혀 있던 길이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과 사람이 만나게 된 것이다.
5-1. 풍랑으로 가로 막고 떼 귀신으로 인간을 무덤 사이로 끌어 냄
이렇게 사탄은 하나님의 통치의 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공중처럼 때로는 바다처럼. 광풍으로 가로막고. 귀신 떼들이 가로막고. 여러 가지로 가로 막고 있다. 사람을 인간의 거처에서 무덤사이로 유인해냈다. 사람이 살아야할 자리가 아닌 무덤사이로 끌어냈으니까 사람이 자기 위치를 잃어버린 것이다. 산 사람이 죽은 사람과 같이 사는 것이니까 자기 위치를 떠난 것이다.
5-2. 그러므로 구주께서는 방해자를 제압하고 저편으로 건너가심
그러므로 우리와 하나가 되신 구속자 예수님을 깨워서 바람과 바다를 잔잔케 해야 되겠다. 주님을 깨워야 된다. 우리의 생명되신 그분을 깨워야 된다. 그 말은 다른 말로하면 주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우리의 자리를 깨워야 된다. 그래야 바람과 바다를 잔잔케 하고, 건너편으로 건너가서 거라사인의 땅으로 건너가서 귀신들린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것이다.
5-3. 이들은 마지막 때에 열뿔 달린 짐승이 되어 그리스도를 대적하려고 바다에서 올라 올 것임(계13;1-참)
바다로 들어간 귀신들은 계시록에 가면 무엇이 되는가? 열뿔 달린 짐승이 되어 바다에서 올라오게 된다. 땅에서 올라온 짐승이 하나 있고,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이 하나 있다고 했는데,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은 뿔이 열 개고 머리가 일곱 개다. 짐승은 뿔로 받는 것이니까 뿔이 열 개라는 말은 힘이 세다는 것이다.
5-4. 그러나 구주께서는 하나님의 인 맞은 십사만 사천인과 함께 시온산에서 하나님과 어린양의 나라를 선포할 것임
그는 바다 속에서 커서 마지막에 나오게 될 텐데 그래도 어린양은 시온 산에서 십사만 사천 명과 함께 서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되더라는 것이다. 계시록은 모두 이런 은유로 만들어졌다. 만약 계시록에 나오는 열뿔 달린 짐승은 그때 거라사인 땅에서 바다로 들어갔던 그 떼 귀신인지도 모른다.
바다에서 올라온 귀신! 그것은 그때 당시의 바다는 세상(世上)을 상징한다. 그 지방에서 지중해 바다는 세상을 상징한다. 왜냐하면 모든 무역과 모든 부와 정치가 모두 바다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우리가 갖고 있는 문화도 바다를 통해서 들어온 문화다. 옛날에 바다를 통하지 않았을 때는 세계의 모든 문화와 문명이 다 폐쇄적으로 닫혀 있었다. 그래서 크게 잘사는 나라도 없고, 큰 물류가 이동된 일도 없었다. 그런데 네덜란드 그 쪽에서 배를 타고 항해를 하기 시작하면서부터 급격하게 문화가 이동되기 시작했다. 해양문화가 발달한 나라가 소위 선진국이다. 그런데 우리는 해양문화가 없었기 때문에 맨 마지막 꼴지가 된 것이다.
서양 사람들은 바다를 통해서 발전했다. 육지를 통해서 발전하는 것은 한계가 있었다. 왜냐하면 네 땅 내 땅, 네 나라 내 나라가 있기 때문에 마음대로 못 갔다. 그리고 가고 오기가 험하다. 많은 물량을 수송하기가 어렵다. 그런데 배 타고 돌아다니다 보니까 공 땅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임자 없는 땅이 많고 가보니까 다이아몬드가 굴러다닌다. 그것을 주워다가 부를 축적하여 지금 유럽이 된 것이다. 지금 유럽에 가보면 그때 얼마나 돈을 긁어다가 이렇게 했나싶다. 그 시대에 얼마나 돈이 많았으면 도대체 이런 건물을 지었으며 이런 도시를 건설할 수 있었느냐는 것이다. 아스팔트가 없을 때 바닥을 전부 돌로 이빨처럼 만들어서 깔았다. 그 돌이 지금 대구역 지하도에 가면 있다. 그렇게 해놓고 마차를 타고 다닌다. 우리는 상상도 못하는 일이다. 이것이 모두 배타고 다니면서 한 일이다. 아메리카 대륙도 발견되었으니까 그때는 노다지였을 것이다. 횡재했을 것이다. 주인 없는 땅이 수없이 있고 아무도 가져갈 사람이 없는 보석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얼마나 돈을 많이 가져 왔겠는가.
바다는 바로 세상의 상징이었다. 그때도 그랬다. 그러니 그 이후에도 그랬을 것이다. 바다 귀신, 떼 귀신이 열뿔 달린 짐승이 되었다는 것은 세상세력을 말한다. 세상세력이 등장할 것을 이야기하는데, 그래도 어린양은 시온 산에서 십사만 사천과 함께 나라를 선포하고 어린양의 혼인잔치가 준비가 되더라는 것이다. 이것이 요한계시록의 재미있는 이야기다.
열뿔 달린 떼 귀신들이 나와서 세상을 혼란스럽게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주님 어린양의 혼인잔치가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누가 이런 소설을 하나 쓰면 베스트셀러가 될 수 있다. 실낙원이니 복낙원이니 하는 것보다 훨씬 좋다. 이것을 제대로 못 써서 그렇다. 재주 있는 사람은 계시록을 잘 연구해서 이것을 소설화시키면 노벨 문학상 값이다.
타락한 천사인 사탄은 하나님의 거처인 하늘에서 추방되어서 지금은 공중에 있다. 그 공중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이다. 거기서 항상 길을 가로 막고 있다. 우리가 이것을 처리 하지 않고는 우리도 하나님께로 갈 수 없고, 하나님도 우리에게 올 수 없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것이다. 이제 주님께서 길을 터 났으니까 우리는 쉽게 되었다.
고속도로(高速道路)를 뚫어 놓으니까 우리는 쉽게 되었다. 옛날에는 서울에서 부산 가는데 얼마나 시간이 많이 걸렸겠는가. 고속도로를 뚫어 놓으니까 3~4시간이면 간다. 뚫을 때는 엄청나게 힘이 들었다. 고속도로 만들면서 많은 사람이 죽었다. 그때는 지금처럼 장비도 많이 없었고 기술도 부족할 때였기 때문에 고속도로를 뚫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었고 대다한 공사였다. 군인들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을 했다. 해놓으니까 우리들은 달리기가 너무 너무 쉽다.
예수님이 하신 일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이제 우리가 가기는 쉽다. 한번 길이 열렸으면 가기는 쉽다. 모를 때는 정말 모르지만 누가 한번 터주면 짝 터진다. 주님이 이루어 놓으신 일을 우리는 쉽게 누릴 수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못 누리면 자기만 손해다. 다 열어 놓았는데도 또 자기가 시작해보겠다. 내가 한번 해보겠다. 예수님 무시하고 내가 한번 해보겠다. 이러면 미련한 짓이다. 그런 사람을 가리켜 성경에서는 멸망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아주 절망적이기 때문이다.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줬다. 멸망치 않게 하려고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게 하려 함이라”고 했는데 안 믿으면 멸망이다. 아주 절망적인 말이다. 왜냐하면 완전하게 길을 열어 놓았기 때문에 한 말이다. 완전한 길을 열어 놓았기 때문이다. 만일 아직도 길이 덜 뚫리고 있었더라면 그런 말을 못할 것이다. 완전하게 뚫려 있기 때문에 만일 이 길로 가지 않으면 멸망이라는 뜻이다.
암(癌)을 치료하는 약이 확실하게 개발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안 쓴다면 멸망이다. 지금은 암치료약이 없으니까 이것도 써보고 저것도 써보고 해보는데 확실하게 나왔는데도 쓰지 않으면 멸망이다. 나병환자(癩病患者)를 치료하는 약처럼 확실한 약이 나왔다. 그러면 그 약을 쓰지 않은 사람은 멸망이다. 그 약을 쓰지 않고 혹시 다른 것을 해서 나았다 하더라도 그것을 보고 멸망이라고 한다. 그렇게 완전한 것을 두고 안 썼으니까. 완전한 것을 안 쓰고 다른 것을 해서 살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산 것인가? 아니다. 그것은 멸망이다. 확실한 것이 왔으니까 확실해졌으니까 멸망이라는 말이 나오게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귀신의 머리를 상하게 했다.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하고, 그 졸개들을 바다에 몰아넣었다. 자기의 거처로 몰아넣었다. 귀신들이 사는 곳으로 몰아넣었다.
우리도 우리가 우리위치를 확고하게 지키면 우리는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할뿐 아니라 그 졸개들을 자기들 집으로 가게 한다. 자기들 집으로 애 보러 가게 만든다. 너희들은 가서 애나 봐라하며 보낸다. 왜냐하면 여기 있을 곳이 아니니까 너희들과 상대할 사람 아무도 없으니까 가라는 말이다. 그렇게 될 때 세상은 얼마나 평안해지겠는가. 그리고 우리 인생이 얼마나 평안해지겠는가. 우리 집안이 얼마나 평안해지겠으며 우리교회가 얼마나 평안해지겠는가.
방해꾼만 없으면 쉽다. 방해꾼이 있기 때문에 어렵다. 방해꾼을 처리하면 우리 길은 평탄하고 쉬울 수 있다. 앞에 가는 사람이 가시덤불을 다 헤치고 길을 만들어 놓으면 뒤에 따라 가는 사람은 쉽다. 주님이 가시덤불을 다 헤치고 길을 열어 놓으니까 따라 가는 우리는 아주 쉬운 것이다.
이 길을 떠나서 또 다른 길을 가려고 하면 옛날 사람들이 하는 것(방법)을 또 하는 것이다. 옛날 사람들이 하다가 안 되었던 것을 또 내가 다시 하게 되지 옛날 사람들이 안 해본 것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럴만한 천재는 없다. 다 옛날 사람들이 하던 것을 되풀이 하면서 자기만 새로운 것을 한다고 생각하는데 절대로 그럴 수가 없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은 인류사적으로 우리를 대표(代表)하는 사람들이다. 아브라함은 부름받은 사람의 대표자이다. 모든 사람들은 다 그 아브라함의 부름 안에서 하나님께 부름 받았다. 더 이상의 사람이 없다. 그리고 선악과를 먹은 사람은 아담이 대표자다. 아담이 먹었는데 다른 사람이 안 먹을 수 있는가? 절대로 안 먹을 수가 없다. 우리의 대표자를 아담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우리가 아무리 잘난체 해봤자 소용이 없다.
성경에 있는 사람들과 우리는 다를 것이라고 생각할 수가 없다. 성경에는 우리의 대표자만 기록해 놓았다. 많은 사람 가운데 왜 그 사람만 기록해 놓았는가? 그 사람이 우리의 대표자가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성경을 보면서 그것을 거울로 삼아야 된다. 저 사람이 나구나! 아브라함이 남이 아니고 나고, 이삭이 남이 아니고 나고, 다 나구나!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 기 도 ]
감사하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 우리가 스스로 우리 길을 찾지 못하고, 우리가 길을 보고도 갈 수 없기 때문에 주님께서 먼저 모든 길을 예비하시고 첩경을 평탄케 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가기 쉽게 인도하여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귀신의 머리를 상하게 하고 그 수족을 다 결박해서 바다로 몰아넣으신 주님께서 오늘 우리의 생명이 되고 우리의 동반자가 되고 우리의 머리가 되셨습니다. 우리와 하나이신 당신은 늘 깨우게 해주시고 우리와 하나이신 주님을 늘 의지하게 하여 주시고 우리와 하나이신 주님을 늘 따르도록 주께서 은총을 베풀어 주시기를 원합니다.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