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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사이유의 궁전 나폴레옹 대관식 방에서... 나폴레옹 命으로 그린 대관식 .. 캔버스에 유채 / 621×979cm / 1806~1807년 제작 204명이나 되는 인물들의 사실감을 높이기 위해 엄청난 스케치를 반복했고, 주연급 인물들의 경우에는 밀랍 인형까지 만들어 그것을 모델 삼아 작업했다. 그림은 황제의 대관식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기본으로 하지만, 참석하지도 않은 나폴레옹의 어머니를 정중앙에 배치하거나, 나폴레옹의 키를 훨씬 크게 그리는 등의 조작도 감행했다. 교황이 황제의 머리에 왕관을 씌워 줌으로써 세속의 왕권도 결국 교회에 복종해야 함을 천명하는 것이 일반적인 의례였으나, 나폴레옹은 손으로 왕관을 받아 스스로 쓸 정도의 당찬 면모를 지니고 있었다. 다비드는 그런 나폴레옹의 심중을 파악하고 대관식 장면을 황제가 아내인 조제핀에게 황후의 관을 씌워 주는 장면으로 바꾸었고, 교황 피우스 7세를 그저 자리에 앉아 무력하게 축복이나 내리는 존재로 그렸다. 물론 실제 대관식 행사에서는 황후의 관을 씌워 주지 않았다. |
ㆍ왕실 소성당(Chapelle royale) : 망사르가 설계한 성당으로 높은 천장에는 삼위일체 이야기 외에, 예수의 부활과 재림을 알리는 등 성서를 모티브로 한 벽화들이 그려져 있다. 그리고 루이 15, 16, 18세와 샤를 10세의 결혼식이 있었던 곳으로, 1770년에는 이곳에서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의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1. 헤라클레스의 방(Salon d’Hercule) : 북쪽 날개에서 중앙까지 연결해 주는 곳에 있는 이 방은 궁전의 방 중에서 가장 크다. 벽난로 위에는 베로네즈(Véronèse)의 성경을 주제로 한 대형 회화가 있고, 천장에는 르 모안(François Le Moyne)이 1733년~1736년에 그린 헤라클레스를 예찬한 천장화가 장식되어 있다. 왕의 아파트(Le Grand Appartement du Roi)2. 풍요의 방(Salon de l’Abondance) : 천장은 풍요로움과 넉넉함을 표현하는 천장화로 장식되어 있는데 르브룅(Lebrun)의 제자인 르네 앙투안 오아스(René-Antoine Houasse)의 작품이다. 그리고 루이 14세의 아들과 손자의 초상화가 있다. 이 방은 연회와 뷔페 파티를 위해 사용되었다. 3. 비너스의 방(Salon de Venus) : 천장에는 미의 세 여신에 둘러싸인 비너스의 모습이 있으며, 정면에는 로마식 복장을 한 루이 14세가 있다. 4. 디아나의 방(Salon de Diane) : 천장에 사냥과 달의 여신 디아나가 장식되어 있다. 루이 14세의 흉상이 있는 이 방은 주로 당구와 게임을 즐기던 방이다. 5. 마르스의 방(Salon de Mars) : 루이 14세의 경비가 행해졌던 이 방은 전쟁의 신 마르스에 관한 장식이 되어 있다. 6. 머큐리의 방(Salon de Mercure) : 도로의 신인 머큐리의 방의 천장화는 새벽 별과 함께 수레에 오른 머큐리의 모습을 표현해 놓았다. 7. 아폴론의 방(Salon d’Apollon) : 아폴론은 그리스의 신이면서 태양의 신, 치유와 예언, 쾌락을 위한 음악과 시를 창조하는 신이다. 그래서 특히나 화려한데 루이 14세가 은제 왕좌에 앉아 접견을 했다 해서 ‘옥좌의 방’이라고도 불린다. 8. 전쟁의 방(Salon de la Guerre) : 거울의 갤러리의 북쪽에 있는 방으로 루이 14세의 용맹스러운 기마상 부조 등, 승리를 거둔 프랑스를 상징하고 있는 방이다. |
루이 14는 치질환자였다고 한다. 당시에는 베르사이유 궁전에 화장실이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본인은 이동식 변기가 26개나 있었으며, 大식가로 하루에 변기를 15~18번을 사용했다는데....인터넷 글을 올려본다. 유럽의 모든 전제 군주가 모범으로 삼았던 프랑스의 태양왕 루이14세가 아닌가. 국왕이 아침에 일어나 잠옷을 벗고 정장을 차려 입는 데에도 1백여 명의 신하들이 참석했고, 양말이나 모자 하나를 건네 주는 것도 커다란 영광이었으며, 특히 내복을 건네는 일은 최고의 특혜이었을 정도로 그의 위세와 권위는 대단한 것이었다. 그러니 태양왕의 키스는 말할 것도 없고, 가까운 거리에서 대화 하거나 식사를 한다는 것은 모든 귀족들이 갈망하는 엄청난 영예가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이런 영예를 누리려면 왕이 내뿜는 고통스러운 악취를 견뎌낼 만한 인내력이 필요했다. 17세기에는 일반적으로 목욕을 하는 습관이 없었으므로 누구에게나 고약한 체취는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왜 태양왕의 체취는 유독 고약했던 것일까? 당시 태양왕은 세 명의 시의를 거느리고 있었는데 그들은 당시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대학인 파리의 소르본에서 교육 받은 의학 지식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우리는 이 의사들이 남긴 세세한 의료 기록을 통해 태양왕의 말 못할 고통을 알 수 있다. 우선 의사 다칸을 예로 들어 보자. 그는 인간의 몸 가운데 치아처럼 위험한 질병원은 없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이 의사는 일반 신하의 이라면 그냥 방치해 둘 수도 있겠지만 국왕 폐하의 것이라면 이가 아직 건강할 때 남김없이 뽑아 버려야 한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물론 루이 14세는 처음에는 거부했지만 '폐하의 건강은 곧 폐하의 영광' 이라는 말에 홀려서 결국 "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어떤 일이라도 할 용의가 있다. 죽어도 좋으니 시행하라" 하며 승낙했다. 루이 14세는 멀쩡한 이를 다 뽑아 내고도 다행히 죽지는 않았다. 의사는 제딴에 훌륭한 조치를 취해 왕의 아랫니를 빼다가 함께 턱까지 금이 가게 하고, 윗니와 함께 입천장의 대부분을 제거해 버렸다 이러한 조치는 소르본의 가르침에 따라 마취도 없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의사는 그런 데는 개의치 않았다 한 달 뒤 그는 일기에 이렇게 기록했다 "살균할 목적으로 폐하의 입천장에 뚫린 구멍을 뜨겁게 달군 쇠막대로 열 네 번에 걸쳐 지졌다. “그 이후로 왕과 함께 식사를 하는 사람들은 식사 때마다 왕이 포도주를 마시면 반 잔 정도가 곧바로 콧구멍으로 흘러내리는 묘기 를 보게 되었다. 더 가관인 것은 왕의 입에서 코를 향해 뚫려 있는 구멍에 끊임없이 음식물 건더기가 들러붙어 며칠이 지난 뒤에야 콧 구멍을 통해 튀어나오는 것이었다. 이로써 악취의 원인 한가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모두 10∼12시간 동안 흐물흐물해지도록 삶은 것이었다. 이가 없는 왕을 위한 배려 였다. 그리고는 오후 내내 심한 소화 불량에 시달렸다. 의사의 일기 에 '바뿔' 이라는 말처럼 자주 등장하는 단어도 없는데, 이는 온갖 장내 가스를 뜻한다. 여기서 악취의 두 번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이다. 의사 다칸의 일기를 보자. "폐하는 오늘도 또 토하셨다. 나온 것은 대개 전혀 씹히지도 않고 소화도 안 된 것이었는데 그 속에는 다량의 버섯이 섞여 있었다. " 그러나 의사 다칸은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소르본의 가르침은 위보다는 장이 더 중요하며, 텅 빈 장이야말로 건강한 장이라고 가르쳤기 때문이다. 따라서 의사는 줄곧 설사약을 처방해 장을 비게 했다 . 왕에게 바치는 설사약이므로 좀 더 질이 좋고 효과도 강력한 약이어야 했다. 이 약은 놀라울 정도로 약효가 훌륭했다. 그래서 태양왕은 날마다 14∼18번이나 대 변을 보아야 했다. 우리는 이 장면에서 악취의 또 다른 원인을 짐작할 수 있다. 뱃속에서 위급함을 알리는 신호가 오더라도 점잖은 신분에 어찌 화 장실로 뛰어갈 수 있겠는가 '싸더라도' 품위 있게 걸어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덕분에 태양왕 시절에는 화장실도 정무를 보던 주요 공간 가운데 하나였다. 마침내 의사의 일기에. '폐하는 오늘도 혈변을 보셨다'는 기록 이 늘어 갔고, 결국에는 폐하의 고귀한 엉덩이에 주먹만한 종양이 생겼다. 그리하여 모든 관리들에게 왕과 비슷한 종양을 갖고 있는 시민을 전부 찾아내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외과의 대가'인 소르본의 페릭스 교수는 한 달에 걸쳐 이 가엾은 인간 모르모트의 엉덩이를 과감하게 잘라 내고 꿰매었다. 수술이 끝난 뒤 수술의 성공에 대해 하느님께 감사 드리는 미사가 열리자, 태양왕은 자신의 건 재함을 유럽 제국에 과시하기 위해 참석해야 했다 더구나 몇 십 명이 보는 앞에서 점심 식사를 들어야 했으며 , 오후에는 두 시간 동안 국정 회의까지 주재해야 했다. 그 엉덩이로 앉아서 말이다. 아무튼 사정이 이러하니 루이 왕의 악취는 유별나지 않을 수 없었다 왕비 맹트농이 뒷날 신앙에 깊이 빠져서 루이 14세에게 ‘육욕의 죄를 짓기보다는 종교적인 수양에 힘을 쓰라’ 고 촉구하며 남편을 멀리하고 제 방에 틀어박히게 된 것도 아마 절실한 딴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요즘 세계 여성들을 매혹시키는 프랑스의 향수는 고약한 체취를 감추기 위한 프랑스인 선조들의 안간힘에서 크게 발전할 수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