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중국은 왜 최치원을 기억하는가?
지난 2000년 10월 16일.
중국 남경시 율수현에서 특별한 행사가 열렸다.
먼 옛날 이곳 율수현에서 벼슬을 지녔던 한 외국인의 동상 제막식이었다.
동상의 주인공은 신라인 최치원(崔致遠, 857년~?).
1,100년이 지난 지금 중국은 왜 최치원을 기억하는가?
"자, 지금 여기에는 전국 각지 사당에서 모은 수십여 종의 영정이 있습니다.
언뜻 보기에 모두 다른 사람처럼 보이지만 이 영정의 주인공은 한사람입니다.
지금으로부터 1,100년전의 신라인, 최치원입니다.
이 영정들을 살펴보면 조금씩 차이가 있는데요, 한 번 보겠습니다.
이 모습은 유학자 최치원의 모습입니다.
또 다른 모습은 엄격한 관리의 모습입니다.
이 영정은 구름낀 산을 배경으로 마치 신선을 연상시키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역사인물 중에 영정이 가장 많은 이가 바로 최치원입니다.
후대인들은 최치원을 유학자나 관리, 심지어 도를 통한 신선으로까지 추앙해왔습니다.
이것뿐만이 아닙니다.
고려시대 문장가 이규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나라 학자들은 모두 최치원을 조종으로 생각한다."
(東方學者皆以爲宗 - 동방학자개이위종)
이 말의 뜻은
'모든 학자들이 최치원을 유학의 스승으로 섬기고 있다'는 뜻입니다.
최치원은 그야말로 대단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역사상 최치원이 가장 성공한 유학생으로 손꼽히고 있다는 것입니다.
최치원은 12살의 어린 나이에 당나라에 간 조기유학생이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1,100년전의 그 당시 유학생활은 어떠했을까요?
또 중국에서 어떻게 성공할 수 있었을까요?
중국에서 내려오는 오래된 전설속에서 그 단서를 찾을 수 있습니다."
중국 남경시 율수현(황하강 아래).
인구 40만의 작은 도시지만 오랜 역사를 간직한 유서깊은 곳이다.
율수현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영수탑(永壽塔).
당나라 시대 원형을 복원한 거대한 7층탑이다.
탑 내부는 일반인이 관람할 수 있도록 공개되어 있는데
흥미롭게도 탑의 2층에서 낯익은 초상화를 볼 수 있었다.
최치원이었다.
초상화와 함께
최치원의 시가 전시되고 있는
이곳은 일명 '최치원실'이라고 불리고 있다.
현재 영수탑 주변엔 박물관 공사가 한참 진행 중이다.
율수현은 이 박물관에 소중한 유물과 몇몇 인물을 전시할 예정이라고 한다.
"이 박물관은 건축면적 2천여 평방미터이고
복도에는 대략 150여 개의 시비를 세울 예정이다.
그 중에서 50개는 최치원의 시비로 꾸밀 예정이다."
- 모록근(중국 율수현 문화국장)
율수현의 한 기념품 가게에서도 최치원을 만날 수 있었다.
점원이 율수현의 기념품으로 내놓은 것은
최치원의 저서 <계원필경>이었다.
최치원과 관련된 기념품은
책과 동상, 영정 등 대여섯가지가 넘었다.
"최치원은 이곳의 현위를 했기 때문에
그를 기념하기 위해서 이 물건을 만들어서 판매하고 있다."
최근 세워진 최치원 동상에서
그가 율수현위를 지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율수현위 신라인 최치원'
"고증에 따르면 이곳이 옛 율수관아의 자리다."
- 모록근(중국 율수현 문화국장)
율수현위는 종9품에 해당하는 관직으로,
주로 이 지역의 치안을 담당했다고 한다.
최치원이 율수현위가 된 것은 스무살,
약관의 젊은이가 중국의 관리가 된 것이다.
율수현위시절 최치원의 행적을 찾아보기로 했다.
인근에 있는 남경시 고순현 이가촌.
이씨 집성촌인 이 마을 사람들은
조상 대대로 뿌리를 내리고 사는 토박이들이다.
취재팀은 마을 노인들을 만나봤다.
"최치원은 신라에서 왔고 율수현에서 벼슬을 한 사람이다."
"나도 이런 얘기 열살 때 들었다."
마을 노인들은 취재팀에게 최치원과 관련된 아주 오래된 전설을 들려줬다.
마을에서 20여 분 떨어진 곳에 그 전설의 현장이 있다고 한다.
쌍녀분(雙女墳).
두 여인의 무덤임을 말해주는 것으로
잡초 우거진 뒤로 두 비석이 나란히 있었다.
최치원의 전설이 내려오는 이곳은
오래전부터 신령스러운 곳으로 알려져 왔다.
"옛날부터 마을 사람들이 병이 나면 집에서 쌍녀분의 두 소녀에게 빌었는데
병이 나으면 이곳에 와서 붉은 색과 녹색 천을 걸었다.
이런 일이 많아지면서 무덤 앞에는 저렇게 많은 천이 생겼다."
- 복양강경(중국 고순현 문화재관리소장)
고순현 문화재관리소장인 복야강경씨.
쌍녀분에 관련된 각종 자료를 수집하는 과정에서
그는 중국의 여러 역사기록에서 쌍녀분이야기가 기록된 것을 발견했다.
송나라의 역사서인 <육조사적편류(六朝事迹編類)>도 그 중에 하나.
쌍녀분 전설은 그렇듯 천여 년을 대대로 내려온 것이다.
"당 희종 2년 계림인 학자 최치원이 율수현위로 있었는데
어느 날 저녁에 공무때문에 초현관(여관)에 투숙하게 되었다.
그때 초현관 앞에 묘지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래서 호기심이 생겨서 물었더니 두 소녀가 묻혀있다고 했다.
당시 최치원은 젊었기 때문에 직접 묘지 앞으로 달려갔다."
쌍녀분의 주인공들은 강제결혼을 피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장씨 자매.
두자매의 운명을 슬퍼하며 최치원은 위로의 시를 바친다.
이 시를 보고 감동한 두소녀가 그날밤 최치원을 찾아와 즐거운 하루밤을 보냈다.
새벽이 되자 두자매는 최치원과의 작별을 아쉬워하며 무덤으로 돌아간다.
이것이 중국인들에게 대대로 전해오는 쌍녀분과 최치원의 전설이다.
1,100년전 이승과 저승을 넘나드는 사랑의 전설인 것이다.
"이 쌍녀분의 전설은 당나라 이후
송나라, 원나라, 명나라, 청나라 시대 기록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이 전설은 우리나라 기록에서도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추측을 낳기도 합니다.
최치원이 중국에 있을 때 실제로 있었던 러브스토리를 시로 썼는데
그 시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중국의 전설로 내려온 게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쌍녀분 전설에 의하면
최치원은 당시 20대 초반으로써 중국 율수현의 관리였습니다.
신라사람이, 그것도 아주 젊은 나이에,
중국의 관리가 되었다는 것은 무척 흥미로운 사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최치원은 당나라에 건너간 신라의 유학생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저 평범한 유학생이 아니었습니다.
12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유학을 떠난,
요즘으로 치면 조기유학생이었던 것입니다.
최치원은 왜 이렇게 어린 나이에 유학을 떠났던 걸까요?"
2. 6두품의 신분적 한계 넘고자, 12살 당으로 유학!~
"십년 공부해서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면
나의 아들이라고 말하지 말라.
가서 공부에 온힘을 다하라."
최치원이 유학을 떠난 배경을 알아보기로 했다.
경주 서악서원(西岳書院).
이곳은 최치원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곳이다.
현재까지 최치원의 가정환경에 대해선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경주최씨 대동본에도 최치원은 24세손으로 관직명만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최치원선생의 집안을 살펴보면 6두품입니다.
최치원선생님의 아버님을 보면 견일이라고 해서
숭국사비문을 보면 숭국사비를 세울 때 관여했다고 되어있습니다.
아마 말단관리를 역임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리고 동복형으로서 현준이라는 분이 있는데
해인사에 계시면서 당시 화엄종의 대단히 유명한 고승입니다.
한 집안에서 유학자와 고승이 같이 나올 수 있는 게
6두품 집안의 특성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 최영성, 한국전통문화학교 교수
그렇다면 6두품과 유학은 어떤 관련이 있을까?
충남 보령시 성주사터.
한때 이곳은 승려가 3천이 이를 정도로 큰절이었다고 한다.
이곳에 최치원이 직접 지은 비문이 있다.
낭혜화상탑비.
높이 4.5미터의 신라 최대의 비석이다.
최치원이 지은 5천여 자의 비문 속에 신분에 대한 주목할만한 내용이 있다.
'得難(득난)'
얻기 어려운 지위를 가르키는 이것은 6두품을 가리킨다.
골품제사회인 신라에서 6두품은 신분의 한계를 안고 있었다.
골품제는
신라지배층의 신분구조로써
진평왕때
왕족은 성골과 진골로,
귀족은 6, 5, 4, 3, 2, 1두품 등 지배층을 다시 8등급으로 나눴다.
그리고 이 신분에 따라 관직의 상한선이 제한될 뿐만 아니라
수레, 말의 숫자, 집의 크기 등 일상 생활 전반에 규제를 받았다.
귀족 6두품은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도
신라 18관등 중에서 6관등 아찬까지만 승진할 수 있고,
제일 높은 관직은 1~5관등,
즉 대아찬에서 이벌찬까지 장관직에 오를 수 없었다.
"6두품은
성골, 진골 다음 가는 계급으로
신라의 학문과 사상에 중추적 역할을 한 계급이었죠.
그러나 사실 6두품 계급은
계급의 한계성 때문에 경륜을 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포부를 펴기 위해서
당나라 유학이라는 방법을 택하게 되었죠.
당나라 과거에 합격했다는 권위로써
자신들의 경륜을 펴려고 했던 거죠."
- 최영성 교수
837년 한해동안 당나라에 건너간 학생이 200명이 넘을 정도로
당시 신라에선 유학의 열풍이 불고 있었다.
"837년 당의 국학에서 수학하던 신라학생은 모두 216명이었다."
- <당회요>
최치원이 유학을 떠난 나이는 12살이었다.
이렇게 어린 나이에 유학을 떠난 데에는
6두품의 신분 한계를 넘고자 하는 아버지의 바램이 있었다.
"최치원이 유학을 떠난 나이는 12살인데요,
지금으로 치면 초등학교 5학년 밖에 안됩니다.
지금은 전화도 되고 온라인도 되기 때문에 계속 연락을 취하면서 돈을 보낼 수 있지만,
당시로서는 한 번 유학을 가면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는 서로 연락이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가
12살짜리 어린 아들을 단독으로 유학을 보냈다는 것은
최치원에 대한 어떤 바램과 확신이 있었을 것이고,
어린 최치원 입장에서는
그런 아버지에 대한 원망도 상당히 컸을 것입니다."
- 남동신 교수, 덕성여대 사학과
<택리지 영암군조>에 의하면
'최치원은 영암에서 김가기, 최승우와 함께 상선을 탔다'고 한다.
12살의 어린 나이에 머나먼 중국땅으로 유학을 떠난 것이다.
"보통 당나라로 유학생들이 떠나는 시기는
북서풍이 부는 10월부터 2월까지 기간이었다고 합니다.
신라에서 당나라까지는 배로 1,500리,
다시 장안까지 걸어서 3천리,
무려 3개월이나 걸려야 도착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더구나 배를 타고 가다가 풍랑을 만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위험한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12살 밖에 안된 최치원은 혼자 배를 타고 떠납니다.
한참 부모품에서 보호를 받고 자랄 나이인데 말입니다.
이 어린 아들을 머나먼 이국땅으로 보내는 아버지의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유학을 떠나는 최치원에게 아버지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십년 공부해서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면
나의 아들이라고 말하지 말라.
가서 공부에 온힘을 다하라."
(十年不第 非吾子也 行矣勉之 : 십년부제 비오자야 행의면지)
십년 안에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면 부자의 인연을 끊겠다,
참, 그야말로 맹렬 아버지였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최치원은 어떤 심정으로 유학을 떠난 것일까요?
본인이 훗날 쓴 글에는 이런 귀절이 있었습니다.
'人百己千(인백기천)'
'남이 백을 하는 동안 나는 천의 노력을 했다.'
오늘날에 비춰도 참 의미심장한 대목인데요,
최치원은 이렇게 최선을 다해 노력했던 것입니다.
12살의 아이가 건너가서 어디서 공부하고 어떻게 적응해나갔는지 궁금한데요,
지금부터 당나라로 건너간 최치원의 유학생활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3. 힘든 유학생활!~그러나 19세 장원급제!~
"지금 국자감안에는 유독 신라학생들이 열심히 학업에 정진하고 있다.
천리 길을 가는데 3개월의 비용을 마련하기도 힘겹거늘
십년을 살아가자면 오직 황제의 은총을 바랄뿐이다."
- 견숙위학생수령등입조장, 최치원
당나라로 건너간 신라유학생은 현재 서안,
즉 당시 수도인 장안으로 향했다
중국섬서성 서안 市 장안성.
장안은 당나라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이자
외국사절과 유학생이 모여드는 국제도시였다.
당나라시대 장안엔 국립교육기관인 국자감이 있었다.
현재 그 터가 남아있는데 당시 국자감의 거대한 규모를 알 수 있다.
"당나라때 국자감은 1,000여 명 정도 수용하는 규모를 유지해왔다.
그러나 당 태종때 숙소를 1,200여 개나 지었는데 학생은 8천명이나 되었다.
본래 중국학생은 3천명이었으나
나중에 고구려, 신라, 백제, 토욕혼, 투르판 등에서
학생이 많이 와서 8천명이나 되었다.
당시 유학생이 매우 많았다."
- 호극 교수, 섬서사범대학 역사학과
외국에서 온 유학생은 국자감에서 수학했는데
<신당서>에 의하면 한때 그 숫자가 8천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고구려, 백제, 신라, 고창, 토번 등이 서로 자제를 보내어
국학에 입학시켜 그 숫자가 8천에 이르렀다."
- <신당서>
"당시 국자감의 입학연령은 14세에서 19세까지였다.
그러나 어떤 과목은 21세에서 25세까지로 늦춰주기도 했다.
최치원은 12살에 이곳에 왔다.
그러면 입학전 2년간 무엇을 했을까?
아마도 소학에서 예비수업을 받았거나 소년반에서 들었을 것이다."
- 호극 교수
국자감에서 공부하는 동안
신라의 유학생들이 학비와 생활비를 어떻게 조달했는지 알 수 있는 기록이 있다.
이것은 최치원이 신라에 돌아온 후
신라유학생에 관해 중국 정부에 보낸 글이다.
최치원은 당시 국자감에 신라 유학생들이 무척 많을 뿐만 아니라
향학열도 대단히 높다는 것을 사실을 강조하며,
오랜 유학기간동안 생활비 문제가 가장 심각하므로
이를 조달해줄 것을 중국정부에 요청하고 있다.
"지금 국자감안에는 유독 신라학생들이 열심히 학업에 정진하고 있다.
천리 길을 가는데 3개월의 비용을 마련하기도 힘겹거늘
십년을 살아가자면 오직 황제의 은총을 바랄뿐이다."
- 견숙위학생수령등입조장, 최치원
"당나라 정부는 유학생에게 숙소와 식사를 제공했다.
역사 자료에는 당 중종때 국가의 재정부서에서
학생들에게 단체식사를 제공하도록 구체적으로 규정한 내용이 있다.
학생들은 학비를 내지는 않았지만
중국의 전통에 따라 스승에게 선물을 바쳤다.
최고기관인 국자감의 경우 비단 세필,
사립학교의 경우는 두필, 기타 학교는 한필을 바쳤다."
- 호극 교수
장안의 남쪽을 병풍처럼 둘러싼 종남산.
이곳은 일찌기 불교와 도교의 성지로 알려진 곳이다.
특히 종남산 지상사는 신라 고승들의 자취가 남아있어
신라유학생들이 반드시 들리는 필수코스였다고 한다.
"이 절에 제일 먼저 왔던 스님으로 의상이 있습니다.
의상스님이 이곳에서 8년간 화엄사상을 배웠던 곳입니다.
그리고 승장, 진감, 혜낭스님이 와서 수학을 했습니다.
최치원이 법장 전기를 썼던, 그 법장스님이 바로 이 절의 주지를 했던 분입니다."
- 변인석 교수(아주대 동양사학과)
훗날 최치원이 법장스님을 비롯,
지상사 스님들의 전기를 썼던 것으로 보아
최치원이 이 절을 다녀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종남산은 유학생활을 알 수 있는 또 하나의 중요한 유적이 있다.
종남산 기슭에 비스듬하게 누워있는 이 거대한 바위가 그것이다.
바위엔 중국에서 신선으로 추앙받는 김가기 전기가 새겨져 있다.
김가기 석각.
김가기(金可記),
그는 최치원과 함께 당나라에 온 유학생으로
그의 전기엔 눈에 띄는 대목이 있다.
김가기가 신선이 되기전 과거에 급제했다는 사실이었다.
"김가기는 신라인으로 과거에 급제했다."
"김가기는 신라에서 태어나 일찍 유학을 와서 빈공과에 합격했지만
워낙 도교를 즐겨서 이곳에 와서 수행을 깊게 하고 나중에 승천을 했습니다.
외국사람으로 승천을 한 사람은 김가기 한사람뿐입니다."
- 변인석 교수
당시 유학생들의 목표는 과거에 급제하는 일이었다.
과거에 급제할 때까지 고국으로 돌아갈 수 없던 심정을
그 당시 한 유학생은 이렇게 표현했다.
"함께 고국을 떠났다가 그대 먼저 급제해서 돌아가니
자랑할 것 없는 편지 한 장이나 우리 집에 전해주오."
"과거 수험생은 보통 수백명이기 때문에 합격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어떤 사람은 평생 급제하지 못하기도 했다.
3년에 한번씩 치뤘는데 열번 스무번 시험을 봐도 합격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았다."
- 호극 교수
송나라시대 기록인 <등과고기>는
역대 과거급제자들의 명단을 기록한 책이다.
이 명단에 최치원의 이름이 있었다.
여기에 최치원은 소감을 적고 있다.
"실로 공정한 평가를 받아서
그전 해에 발해에 장원을 빼앗긴 수치를 씻었습니다.
(實逢至公 得雪前恥 - 실봉지공 득설전치)"
- 예부상서 배찬에게 올리는 글
이는 최치원이 장원급제 했음을 말해주고 있다.
중국 서안의 상징인 대안탑.
7세기 중엽 현장법사가 인도에서 가져온 불경을 보관하기 위해 세운 이 탑엔
1,335권의 불경이 저장되어 있다.
그런데 이 대안탑은 과거급제자들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이다.
'곡강유미'란 행사가 바로 그것이다.
"대안탑 남쪽 5킬로 떨어져 있는 지점에 큰 저수지가 있었습니다.
그것을 곡강이라 그러는데요,
그 당시 과거합격자들이 모여서
관직으로 나가는 동료를 축하하는 행사가 있었습니다.
술도 마시고, 즐겁게 배도 타고, 시를 지어 서로 나누고,
그러한 여흥이 남아 시내를 돌아 대안탑으로 와서
시를 써서 탑에 빙 둘러가며 붙였다고 합니다."
- 변인석 교수
과거급제후 율수현위에 제수받은 최치원.
그도 이 대안탑에 와서 축하행사를 즐겼을 것이다.
"당시 학생들의 목표는 과거 합격하는 것이었습니다.
과거에 합격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하는 것은
당시 국자감의 수학 기간이 9년이나 된다는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최치원은 중국에 건너간 지 6년만에 장원급제 했습니다.
'인백기천(人百己千)'으로 노력한 결과 이렇게 빨리 목표를 달성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또 과거에 합격했다고 누구나 관직에 나아갈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장원급제후 그가 관리로 등용된 것은 그만큼 실력이 뛰어났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중국의 뛰어난 시인이자 급제 동기였던 고은이라는 사람이 준 시입니다.
"12세에 배를 타고 중국으로 건너와
문장으로 중국을 감동시켰네.
열여덟에 문단을 휩쓸어
단 한번에 장원급제 했네."
"최치원의 문장이 중국을 감동시켰다는 대단한 찬사를 하고 있는데
중국인도 아니고 외국인이 문장으로 중국인을 감동시켰다는 것은
그의 어학이나 문장 실력이 얼마나 뛰어났는가 알 수 있습니다.
최치원은 유학시절 전국을 여행다니며 많은 시를 남겼는데
우리나라는 물론이고 중국이나 일본에 전해질 정도로 아주 유명했다고 합니다.
중국유학시절, 국제적인 시인으로 이름을 떨친 최치원의 흔적을 찾아가보겠습니다."
취재팀은 중국 율수현에 살고 있는 왕금옥, 축리부부를 만났다.
그들은 최치원만을 소재로 그림을 그리고 있는 화가부부다.
왕금옥부부는 최치원이 유학온 시절부터 귀국하기까지의 생애를 화폭에 담고 있다.
어린 최치원과 유학길을 배웅하는 아버지 모습,
"그때 아버지가 했던 말이...(과거에 합격하지 않으면 내 아들이 아니라고 한말)
글쎄 한번 생각해봐라 당시 최치원은 12살의 어린아이가 아닌가,
10대에 과거에 합격한다는 것은 우리로서는 상상하기도 힘든 일이다.
유학가는 어린아이에게 그렇게 말하는 것은 좀 지나친 것 같다."
- 왕금옥, 화가
왕금옥부부는 쌍녀분 전설도 화폭에 담았다.
두소녀가 최치원을 찾아온 장면이다.
최치원이 귀국하는 모습도 화폭에 담았다.
상서로운 구름은 무사귀환을 의미한다고 한다.
왕금옥부부의 붓끝에서 살아나는 최치원은
용모가 준수한 청년으로 최치원에 대한 그들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예전에 우리가 한 자료를 봤는데 최치원에 관한 내용이었다.
그것을 보고 나서 우리는 매우 흥미가 생겼다.
특히 어린시절 유학온 이야기를 보며 그를 매우 숭배하게 되었다.
이렇게 어린 아이가 이런 일을 해냈다니 어떻게 상상할 수가 있겠는가.
이점에서 부인과 서로 공감을 했다.
물론 이 이야기 자체가 대단히 감동적이다."
- 왕금옥, 화가
그런데 왕금옥부부의 그림 중에서
최치원의 교우관계를 알 수 있는 그림이 있다.
율수현위시절 최치원과 자주 어울린 이 사람은 두순학이다.
당대 유명한 시인인 그는
'율수 최소부에게 바치노라'라는 시를 쓰는데
율수 최소부는 최치원을 가리킨다.
"두순학은 '두순학체'를 만들만큼 인정을 받는 유명한 시인이거든요.
그 사람만이 만드는 독특한 풍이 있어요.
그가 최치원에게 벼슬 높낮이를 따지지 말고 친하게 지내자 했다는 것은
최치원을 인정해준 대단한 이야기라 볼 수 있죠."
- 김중열 교수, 군산대 국문학과
4. 20세 율수현위 관직!~여행을 즐기다!~
율수현위시절, 최치원이 자주 드른 곳이 있다.
율수현 강소성 우이현 회산.
경치가 뛰어나 중국 사람들은 이곳을 강남 제일산이라 부른다.
당나라시대 수많은 문장가들이 이곳에 들러 회산을 노래했는데
당시 시인들이 쓴 석비가 지금도 남아있다.
"경치가 좋았지요.
풍수가 좋았지요.
임금이 앉은 의자처럼 옆으로 쭉 반원형을 형성하고,
그 중심에 광장이 있어서 거기 앉아서
남쪽을 보면 저기 유명한 회하가 흐르기 때문에
'북산남회' 이런 정취, 풍수이기 때문에
모든 시인, 필객들이 와서 시를 쓰고,
서예가들은 마애석각을 남기고 유명하지요.
최치원은 율수현위에 있을 때 당나라 유명한 시인들이 많이 오니까 오기도 했고
또 자기 친구 이전이 여기서 현위를 했기 때문에 자주 오고 했지요."
- 마중가 교수, 한림대 중국학과
회산 입구에 세워진 현판들속에서 최치원의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
'회산승경(淮山勝境)'은 최치원의 시에서 따온 말이다.
최치원이 우이현을 둘러보며 지은 시는 20여 편.
남경대 중국문학과 당은편 교수는
그 중에서 '가을날 우이현을 다시 지나며 이 장관에게'란 시를 즐긴다고 한다.
" 외로운 나그네 다시 여기서 신세를 지니
가을 바람에 읊조리며 헤어질 일 한스럽네
문앞에 버들잎은 벌써 시들었건만
나그네는 아직도 작년 옷 그대로일세
하늘같이 아득한 길 시름속에 늙어가는데
바다 건너 고향집엔 꿈에나 돌아갈까
우스워라 이내 몸은 봄에 돌아온 제비런가
화려하고 높은 집에 올해 또 다시 찾아왔네."
최치원의 발자취를 따라 강소성 회안시로 향했다.
지금으로부터 1,100년전 당나라 시대에 이곳엔 당 한국성,
즉 신라방이 있었다고 한다.
당 한국성(唐韓國城) - 신라방 유적지
지금은 터만 남아있지만
당시엔 약 1,000여 세대가 모여 살았던
당나라 최대 규모의 신라방이었다.
특히 신라를 오가는 뱃길과 운하가 교차하는 지점으로
유학생들의 발길도 끊이지 않았을 것이다.
"옛날에 이곳을 초주(회안)라 하기도 하고 산양이라고 하기도 했는데,
신라인들이 많이 와서 항해활동도 하고 선박제조도 했습니다.
천세대가 와 있었는데,
여기가 고운하와 고해안이 교차하는 지점이었기 때문에 선박제조하기 아주 편리했고,
신라로 오가는 길이 여기서 시작했습니다.
최치원이 율수현위로 있으면서 여기 와서
같은 신라인을 만나서 고향생각을 하면서 눈물 흘렸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 마중가 교수, 한림대 중국학과
고국을 떠나온 지 어느덧 7년,
마음대로 오갈 수 없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최치원은 이곳에서 달랬을 것이다.
'산양에서 고향친구와 작별하며'
서로 만나 잠시 초산에 봄을 즐겼다가
또 다시 헤어지려니 눈물이 수건을 적시네
봄바람 앞에 시름없이 바라봄을 괴이치 마오
타향에서 고향사람 만나기는 참으로 어렵다오
중국 강소성 소주시.
'동방의 베니스'라 불리는 중국의 소주에서도
최치원이 지나간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
최치원은 소주의 아름다운 풍경은 물론
이곳의 독특한 문화도 그냥 지나치지 않았는데
특히 최치원이 이곳에서 주목한 것은 바로 여인들이었다.
'강남의 여인'
강남 땅은 풍속이 음탕하여
딸들은 아리땁고 예쁘게 기르네
성품이 사치스러워 바느질을 싫어하고
단장을 마치고 악기만 만지네
아침에 베 짜는 이웃집 여인에게
하루 종일 고달프게 일해도
비단옷은 제게 돌아오지 않는다며 비웃네
개방적이고 화려한 강남의 여인들을 바라보면서,
한편으로 어렵게 살아가는 여인들의 모습도
시인의 예리한 눈으로 보고 있다.
"최치원은 율수현우로 있을 때 시간만 있으면 여행을 다녔다.
당나라때 과거에 급제한 사람들은 명승지를 유람하는 문화가 있었는데
이것은 중국의 오랜 전통문화로 만유(漫遊)라고 한다."
- 당은평, 남경대 중국문학과
"한시는 뜻만 가지고 되는 게 아니고
운이라든지, 평칙이라는 게 다 맞아야 되는데,
최치원은 어려서 중국에 가서 중국어에 능통했기 때문에
중국사람과 전혀 다르지 않게 시를 쓸 수 있었습니다.
더구나 많은 공부를 해서 인용함에 틀림이 없고 시제가 뛰어나서
당나라 그 유명한 시인들과 교류를 하면서
전혀 외국인이라는 어색함을 느끼지 않았고 오히려 그 사람들이 최치원을
'너는 문장을 가지고 당나라에 와서 문장으로 중국 천지를 감동시켰다'
라고 했을 만큼 특출났다고 봐야 됩니다."
- 김중열 교수, 군산대 국문학과
이렇듯 신라에서 온 유학생 최치원은 뛰어난 시인으로 인정받고 있었다.
"이 그림들은 중국화가가 그린 최치원의 모습들입니다.
쌍녀분의 이야기는 물론이고 공부하고 있는 모습,
당나라 시인들과 교류하는 모습들도 보입니다.
그런데 한결같이 모두 젊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묘사가 되어있습니다.
실제로 최치원이 이름을 떨친 것은 20대의 젊은 시절입니다.
이 천재적인 신라 유학생에 대해서 당시 당나라에서도 깊은 관심을 보이는데요,
중국 역사서인 <신당서>에 최치원에 관한 기록이 있습니다.
"최치원은 고려인으로 빈공과에 급제하여
<사육집(四六集)>과 <계원필경(桂苑筆耕)> 등이 있다."
이 <신당서>는 우리나라 <삼국사기>나 <조선왕조실록>과 같은 정사(正史)입니다.
중국의 역사를 연구하는데 있어서 아주 가치가 있는 중요한 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중국의 정사에 외국인의 작품이 실린 건 최치원이 아주 유일한 경우라 합니다.
자, <계원필경>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책이길래 이렇게 높은 평가를 받게 된 걸까요?
같이 살펴보겠습니다."
중국 양주대에서 <계원필경>을 찾아봤다.
<계원필경>은
최치원이 율수현위 시절 이후에 지은 글 중에서 그 정수만을 모은 문집으로
시 예순편과, 문장 삼백열편.
우리나라에서 뿐만 아니라
중국에서도 중요한 가치를 인정받고 있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문헌적인 가치이다.
당대의 사람이 쓴 당대의 역사서다.
중국의 정사(正史)인 <신당서>, <구당서>, <자치통감>에서 빠진 부분까지도 기록했다.
그래서 현재 우리는 중국 정사에서 틀린 부분이 있으면 계원필경을 근거로 수정하고 있다.
계원필경은 매우 정확한 역사책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하다."
- 당은평
5. 회남 절도사 고병 휘하,
문장으로 중국에 이름을 날리다!~
최치원이 계원필경을 쓴 곳은 어디일까?
중국 양주시.
중국 최대의 상업도시로 유명하다.
'허리춤에 돈 10만관을 꿰차고
학을 타고 양주로 날아간다'
또한 양주는 수양제가 200만을 동원해 만든
대운하가 지나는 교통의 요지이기도 하다.
최치원은 율수현위를 그만두고
양주에 그 모습을 드러내는데,
최치원의 두번째 직장이
바로 양주의 당성(唐城)이다.
수양제의 공성인 이 당성은
중국에서 가장 잘 보존된 성 중에 하나라고 한다.
"최치원은 바로 이 성에서 일을 했다.
이곳은 수양제가 살았던 성이다.
당대에 이르러서는 양주 대도독부의 소재지가 되었다.
나중에 회남절도사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최치원은 여기서 많은 시를 썼다.
계원필경에 있는 글도 대부분 이곳에서 썼다."
- 주 강, 양주대 교수
최치원이 머물고 있던 당성은
당나라 절도사 고병의 주둔지였다.
즉, 최치원은 고병의 휘하에 들어간 것이다.
양주의 고병(高餠)은
양주의 병권을 쥐고 <신당서 열전조>에 들어갈 만큼 중요한 인물이다.
"당나라때는 영토가 너무 넓어서 양주에 회남절도사가 있었다.
고병은 회남절도사로 세력이 커지니까 도처에서 문인을 모집했다.
이때 최치원과 과거급제 동기이며 가장 친한 친구인 고은과,
또 한국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원랑충,
이 두사람이 최치원을 적극 추천했다.
최치원도 자기 추천서로 백여 편의 시를 고병에게 보냈다.
고병은 최치원의 글을 보고 매우 감동했다."
- 당은평, 남경대 중국문학과
당시 당나라는 정치 혼란과 흉년으로 최대의 혼란기를 맞고 있었다.
875년 산둥지역에서 시작된 황소의 난은
중국 전역을 휩쓸고 급기야 수도 장안을 점령하는 사태에 이르렀다.
황소의 난(875~884)
그때 세상에 나온 것이 '격황소서(檄黃巢書)',
황소 토벌 총사령관인 고병을 대신하여 최치원이 쓴 격문이다.
'격황소서(檄黃巢書)' - 계원필경속에서
천하의 사람이
모두 너를 죽이려고 생각할 뿐만 아니라
아마 땅속의 귀신까지도
너를 죽이려고 은밀히 의논하였을 것이니
네가 비록 숨은 붙어있다고는 하지만
넋은 벌써 빠졌을 것이다.
"이 당나라가 시원찮으니까 네가 일어난 심정도 이해는 한다 이렇게 올려줬다가,
그러나 이렇게 뭇생명들을 죽음의 구렁텅이로 몰고 간
네 죄는 귀신도 용납하지 않을거다 야단을 치고,
이 병려문이라는 글이
원래 문장 수식을 잘하며 멋지게 과장법을 써가며 운을 맞춰 가거든요.
마치 강물이 흘러가는 것처럼 올려줬다가 내리치고,
내리쳤다가 다시 올려주는 식으로 말입니다.
너는 이제 틀림없이 망하고 말거다라는 글로써
황소를 꼼짝 못하게 하는 이런 글을 썼습니다."
- 김중열 교수, 군산대 국문학과
황소의 난이 진압된 후
최치원은 중국 황제로부터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는다.
그의 능력을 인정받은 것이다.
자금어대 - 황제가 정5품 이상에게 하사하는 붉은색 주머니
신라에서 유학 온 최치원은
불과 25세에 중국에서 명성을 얻은 것이다.
6. 귀국, 그러나 신라는 기울어가고!~
'개혁안 시무 10여 조' 올리다!
"고려시대 이규보는 '토황소격문'에 대해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황소가 이 격문을 읽다가 책상에 나뒹굴어졌다
귀신을 울리고 바람을 놀라게 하는 재능이 아니라면
어찌 이 정도에 이를 수 있겠는가'
한마디로 사람의 솜씨라고 믿기지 않는 문장력이라고 극찬을 하고 있습니다.
최치원이 토황소격문을 쓴 것은 25세,
중국에서 자금어대를 받을 정도로 성공한 인물이었습니다.
사실 본인만 원한다면 중국땅에서 얼마든지 영화를 누리며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최치원은 중국에서 정리하고 귀국길에 오릅니다.
왜 그는 귀국을 택했을까요?
자, 이것은 최치원이 불교 고승들에 대해 쓴 비문입니다.
이 비문에는 그가 조국 신라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적혀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최치원은 신라를
'군자국(君子國), 인역(仁域), 태평승지(太平勝地)'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것은 글자 그대로 신라를 살기좋은 땅이라고 생각한 것도 있지만
신라를 높혀서 부르는 말이기도 합니다.
최치원이 비록 중국 유학을 가서 성공을 거두었지만
결국 신라인이라는 그 뿌리를 잊지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최치원은 귀국후 신라를 위해 어떤 활동을 했을까요?
경남 함양.
이 지역의 대표적인 관광 명소 아름드리 상림숲에서 최치원의 흔적을 만났다.
"최치원 선생이 이곳에 함양태수로 와 가지고
냇물이 들 가운데로 흘려서 해마다 수해로 전답이 다 떠내려가고
지방민들이 고충을 겪고 있는 것을 보시고
강을 서남쪽으로 돌리고 거기에 숲을 조성하셨다고 합니다."
- 김성진, 시인, 향토사연구가
귀국후 함양태수로 내려간 최치원은 이 숲을 조성한 것이다.
최치원이 이곳에 태수를 지낸 흔적은
마을 주민들이 세운 사운정(思雲亭)과 공덕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사운정(思雲亭).
공덕비(文昌僕崔先生神道碑-문창복최선생신도비)
그런데 중국 유학에서 성공하고 돌아온 최치원이
왜 함양태수라는 미관말직에 머문 것일까?
"885년 헌강왕때, 처음 돌아오자마자 한림학사(翰林學士)라는 벼슬이 주어집니다.
한림학사는 글자 그대로 외교문서 같은 것을 담당하는 직책이었지요.
자신의 경륜과 재능을 펼칠 직책은 아니었습니다.
거기다가 당나라 유학파와 국내 국학파와의 갈등과 대립이 심했습니다.
걸핏하면 유학파에 대한 시기와 질투가 뒤따르니까
최고운 선생님으로서는 감당하기 힘들었던 모양입니다.
결국은 외직을 자청하여 철령군태수라든지, 부선군태수로 나가,
백성들을 가까이 하면서, 민생고를 직접 목도하고 해결하며서
정치를 해나가지 않았나 싶습니다."
- 최영성 교수, 한국전통문화학교
경주 인왕산 상서장(上書莊).
함양태수 시절인 829년,
최치원은 이곳에서 진성여왕에게 시무 10여 조를 올린다.
"최치원이 시무 십여 조를 올렸다(崔致遠進時務十餘條)."
- 진성여왕 8년 <삼국사기>
그것은 최치원의 사회개혁안이었다.
"진성여왕기에 이르면,
신라가 하대로 접어들면서 가장 혼란스러운 시기였습니다.
신라 멸망의 시작이
진성여왕때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때 최치원선생은 지방의 태수로 있었습니다.
여러해 지방의 관리로 있으면서 유학자로서 많은 고민을 했을 것입니다.
이대로 가서는 신라가 안 되겠다,
신라를 다시 건설하기 위해 개혁이 필요하다,
이런 마지막으로 자기 충정을 담아 올린 글이 시무십여조라 할 수 있겠습니다."
- 최영성 교수, 한국전통문화학교
현재 시무십여조는 전해지지 않지만
비문을 통해 그의 개혁사상을 엿볼 수 있다.
'능관인(能官人)'
인재를 잘 선발해야 한다는 이 대목에서
골품제의 개혁과 과거제 실시 제안이 담겨있다.
이것은 효공왕이 즉위할 때 쓴 글이다.
'불이 나무에서 났으나
불이 맹렬하면 나무를 태우고
배는 물에 뜨지만
물이 날뛰면 배가 엎어진다
(火生於木而 火猛則木焚 水폄其舟而 水猛則舟覆
화생어목이 화맹즉목분 수폄기주이 수맹즉주복)'
- <사사위표>
군주가 실정을 하면
백성이 군주를 바꿀 수 있다는
덕치주의와 민본주의가 담겨있다.
신라의 개혁을 꿈꿨던 최치원.
그러나 시무 십여 조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그는 해인사에 은둔한다.
해인사 홍류동 - '고운최선생축'
홍류동 석벽에 쓴 최치원의 시는
당시 은둔을 택한 심정이 잘 드러나 있다.
'물은 미친 듯이 바위를 치고 산을 울리어
지척에서 하는 말도 분간하기 어렵네
항상 시비소리 귀에 들릴까 두려워
짐짓 흐르는 물로 산을 다 감싸네'
"시무십여조를 받칠 때가 서른여덟입니다.
우리 나이로 서른여덟이면 왕성하게 일할 때 입니다.
그리고 최치원이 시무십여조를 받쳤다는 것은
현실에 대한 희망의 끈을 놓치 않았다는 것이죠.
그래서 진성여왕도 그 개혁안에 대해 좋은 평을 하시고
그 당시 6두품이 할 수 있는 최고의 관직인 아찬 벼슬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었죠,
개혁안이 실행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은퇴를 하게 되는데,
최치원이 은거를 하였다는 것은 공무원 신분에서 벗어났다는 것이지,
세상과 담을 쌓았다는 뜻은 아닙니다."
- 남동신 교수, 덕성여대 사학과
해인사에 은둔한 후 최치원은
그 어느 때보다도 저술활동에 몰두했다고 한다.
의상스님의 전기를 비롯해
이 시기의 저술은 귀중한 사료로 평가받고 있다.
최치원의 마지막 저술인
<신라수창군호국성팔각등루기>에도 현실 참여의식이 담겨있다.
"임금의 은혜에 보답하는 길은 불사를 높이는 것이다.
바라건데 모든 미혹한 무리를 깨우치게 하려면
법등을 높이 달아서 빨리 병화를 없애는 것이다."
- '신라수창군호국성팔각등루기'
불교를 통해
신라의 혼란을 잠재워야 한다는 그 내용이다.
최치원.
그는 결코 은둔자가 아니었다.
생에 마지막 순간까지 그는 현실개혁의 꿈을 놓지 않았던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유학 가서 성공하기란 쉬운 일이 아닌 듯 합니다.
12살에 유학 간 최치원의 성공은 그가 대단한 천재이기도 했지만
인백기천(人百己千),
남이 백을 할 때 나는 천을 한 노력 덕분일 것입니다.
이렇게 성공을 한 그는 중국에 남을 수도 있었지만
그는 결코 조국 신라를 잊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당시 신라는 이미 최치원의 경륜과 학문을 펼치기엔 너무 기울어진 나라였습니다.
신라말 혼란기에 최치원과 같은 학자들은 새로운 선택의 기로에 서 있었습니다.
쓰러져가는 신라에 끝까지 충성을 다할 것인가,
아니면 새로 일어난 양길, 궁예, 견훤, 왕건 등의 세력에 편승할 것인가.
그러나 최치원의 선택은 끝까지 조국 신라였습니다.
그것이 행동으로 드러난 것이 바로 개혁안 십여 조입니다.
비록 당대에는 뜻을 이루지 못했지만
최치원의 개혁의 꿈은
고려 왕조에서 실현이 됩니다.
고려 왕조는 최치원을 '문창(文昌)'으로 추대하고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문묘에 봉사하게 하는데,
이것은 고려 왕조가 새로운 왕조의 사상으로
최치원의 사상을 계승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천재적인 시인이자 유학자인 최치원.
그는 비록 시대를 잘못 만난 불운한 사람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이 암울한 현실을 회피한 소극적인 지식인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이 사회를 변화시키려고 노력한 지식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1,100년이 지난 지금 우리가 최치원을 여전히 기억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