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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미(反美) 좀 해도 되나?
"반미 좀 하면 어때?" (노무현 전 대통령).
최승수와 한국 좌파들이 쓴『미국과 맞짱 뜬 나쁜 나라들』을 보면 미국과 맞짱 뜨서 하나 같이 수그러들고 쪼그라진 나라들-이란, 쿠바, 베네스웰라, 리비아, 북한, 베트남, 니카라과 등-을 치켜세우고 있다.
최승수는 ‘원숭이 시리즈’를 통해 한국에 막시즘을(Marxism) 대중적으로 소개한 인물이다.
그는 무상의료와 무상교육을 실시한 베네스웰라의 우고 차베스를 가장 존경한다고 말했다.
무상으로 퍼주다가 ‘중미의 보석’인 석유 부국 베네스웰라를 거지 소굴로 만든 차베스를 지금도 존경하는지 궁금하다.
책은 북한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한다.
'2008년 조선(북한)은. . . . 김일성 주석 탄생 100돌이 되는 2012년을 강성대국의 대문을 열어놓는 해로 문을 열었다.
강성대국이란 '국력이 강하고 모든 것이 흥하여 인민들이 세상 부러움 없이 잘사는 사회주의 강성대국이다.
강성대국이 되려면 정치사상강국, 군사강국, 경제강국이 되어야 하는데 조선은 스스로 정치사상강국, 군사강국의 지위에 올랐으며 경제강국만 이루면 된다.
조선이 과연 2012년에 경제강국을 이룰까?’
그동안 조선(북한)은 경제강국은커녕 경제빈국으로 몰락했다.
사회주의 계획경제로는 결코 경제발전을 이룰 수 없다는 사실을 구소련의 멸망이 증거하고 있음에도 사회주의에 대한 허황한 기대를 거는 자들이 아직도 많다.
-왜 반미 하나?
반미 해서 남은 것도 없는데 마치 반미가 유행인 것처럼 한국은 물론 세계적으로 번지고 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김진웅은『반미』(2008)에서 전세계의 반미주의 확산의 원인을 분석하면서 각 반미주의의 상관관계를 규명한 후, 미국의 패권주의와 대외정책이 반미주의 대두의 가장 큰 원인임을 밝히고 있다.
'미국을 미워하는 것은 자신을 미워하는 것이나 같다'는 말처럼 세계인들은 미국의 팽창주의적 대외정책을 증오하면서도 미국의 문화와 생활방식을 호의적으로 바라보는 매우 이중적인 태도를 보인다.'
그러면서 그는 반미의 다양한 형태를 제시한다.
반미주의는 미국을 상징하는 표상들(예를 들어, 성조기)을 공격함으로써 미국의 대외정책에 대한 적대감을 뜻하기도 하고, 일시적인 미국의 대외정책 보다 더 항구적인 미국적 가치, 관습, 제도에 반하는 철학, 이데올로기, 제도 등을 의미하기도 한다.
또한 반미주의는 외국인들이 보는 미국의 문화와 그 문화의 해외 영향력 증대 즉 코카콜라와 청바지 문화의 확산에 대한 반감이기도 한다.
더 나아가 미국이 가장 강력한 자본주의 국가로서 다른 자본주의 국가들의 보호자 역할을 하는 것에 대한 사회주의 국가들의 반미가 있다
각 나라와 단체들이 왜 반미 하는가를 좀 더 구체적으로 간단히 살펴보자.
-서유럽 국가들의 반미 감정
세계 제2차 대전 이후 한때 미국의 종주국이었던 유럽국가들이 이제는 초강대국으로 성장한 미국에 의존하게 됨에 따른 분노에서 반미주의가 생겼다.
우파는 문화적 반미주의로 좌파는 정치적 반미주의 성향을 띄고 있었다.
그러나 반미 감정과 반미주의는 구분해야 한다. 반미 감정은 미국의 '특정 정책'에 반대하는 것이고 반미주의는 '미국적인 것 자체'에 반대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유럽 국가들은 사안에 따라 반미 감정이 있는 것이지 반미주의라고는 볼 수 없다.
왜냐하면 미국이나 자기들이 추구하는 가치는 비슷한데 미국이 모든 면에서 너무나 월등하니까 자존심이 상해서 반미 감정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1968년 프랑스 파리의 6∙8혁명으로 시작된 네오 막시즘은 반미를 넘어 반자본주의 세력이 되어 한때 기독교 국가였던 유럽과 미국 등을 초토화시키고 있다.
-아랍국가들의 반미주의
이슬람교를 신봉하는 아랍국가들은 기독교를 대표하는 미국과 유대교를 믿는 이스라엘을 철천지 원수로 여긴다.
이슬람 국가들은 어릴 때부터 반유대, 반기독교 및 반미 교육을 철저하게 교육시킨다.
이슬람 국가 중에서도 사우디아라비아는 친미적이지만 이란은 가장 심한 반미적 국가다. 당연히 미국의 경제제재를 받아 허덕이고 있다.
- 공산주의의 반미주의
여기에는 중공과 러시아는 물론 라틴 아메리카, 아프리카 및 아시아의 반미주의가 포함되어 있다.
특히 공산주의 체제를 지향하는 중공, 북한, 쿠바, 베네스웰라, 리비아 등의 반미주의는 공산주의와 자유 민주주의, 사회주의 계획경제와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이데올로기와 체제 경쟁이므로 이들의 반미주의가 심한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 한국의 반미주의
좌파의 입장에서 보면 한국의 반미주의는 해방 직후로 거슬러 올라간다.
남한에 주둔한 미군정청(1945.9~1948.8.15)은 처음에는 남한에 좌우합작 정부 수립을 지지했지만, 남로당의 위조지폐 사건을 계기로 이승만의 우파 단독정부 지지로 선회한다.
이때부터 남로당은 반미, 반 이승만 운동에 앞장서서 미군정과 이승만의 주장을 사사건건 반대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국에서 본격적인 반미주의에 의한 반미운동이 시작된 것은 김영환이「강철서신」을 통해 주체사상을 소개한 1980년 대로 본다.
우태영은『82들의 혁명놀음』에서 이 사실을 자세히 밝힌다.
1980년대 서울대 학생운동권 내부 사정은 잘 노출되지 않았다. 그런데 1980년3월18일, 「조선일보」의 서울대 담당 새내기 기자였던 우태영은 학생들의 구호에 충격을 받았다.
“반전반핵 양키 고 홈.”
학생들의 구호가 이전과는 전혀 달랐다. 이전에는 전두환 타도나 학원민주화 등이었다.
미국에 대해 이처럼 직접적으로 반대하는 내용의 구호는 학생운동권에서도 터부였다. 자칫 북한의 주장에 동조한다는 혐의를 뒤집어쓸 위험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날 이후 서울대에서 벌어지는 시위는 북한의 주장과 다름 없었다. 시위 양상도 이전보다 더욱 과격해졌다. 시위 현장에서 자살하는 학생도 생겼다.
학생들 사이에 드디어 북한의 주체사상이 석권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북한의 방송을 듣고 학생운동의 시위방향을 정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심지어는 운동권 학생들이 선배들을 몇 시간 사상 교육시켜 주체사상을 신봉하도록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졌다.
그러나 당시에는 워낙 산적한 문제-유신독재 청산, 12∙12사태, 5∙18 광주사태 등-가 많아서 주체사상이 학생운동 내부에 확산하는 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동안 주.사.파들은 1985년5월, 서울 한복판에 있는 미국 문화원에 73명이 진입하여 '광주 학살을 지원한 미국은 사죄하라'는 플래카드를 내걸고 농성에 들어갔다.
현재 민주당 국회의원인 정청래(1965)는 대학시절 반미시위를 한 이른바 운동권 학생으로 1989년 10월13일 서울 정동 주한미국 대사관저 점거 농성 사건을 주도한 인물 중 한 명으로 구속됐다.
정청래는 당시 미국 대사관저에 사재폭탄을 던진 혐의로 집시법 위반,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4년, 방화, 총포도 검 화약류 특별법 위반 등으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95년 8월 15일 복권되었다.
이후 대규모 반미운동으로는 효순∙미선 미군 장갑차 사고 규탄 시위(2002. 6.13)와 미국산 소고기 광우병 파동(2008)을 들 수 있다.
효순∙미선 장갑차 사건은 훈련중인 미군의 단순 실수에 의한 교통사고였다. 그런데 좌파들은 미군에 의한 고의적 사건이라며 '양키 고 홈'을 줄기차게 외쳤다.
소고기 광우병 파동은 당시에도 문제가 많았다. 미국산 소고기 수입을 반대하던 자들이 미국 가서 햄버거 먹고 스테이크 먹은 기사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최근 미국육류수출협회(USMEF) 집계 결과에 의하면, 2021년 한 해 동안 한국이 미국산 소고기 최대 수입국이 되었다는 발표가 있었다. 소고기 광우병 파동이 얼마나 사실을 날조한 반미 행동인가를 여실히 증명하고 있다.
5(3)86세대가 정치를 주도하면서 민주주의를 낙관하던 많은 사람들을 의아하게 만드는 일들이 벌어졌다.
민주주의에 기대했던 화합 보다는 분열과 갈등이 더 심해졌다. 이 모든 것이 김영한의「강철서신」에서 시작된 북한의 주체사상 탓이라는 사실이 나중에 드러났다 .
주체사상은 '우리 민족끼리' 통일하기 위해서는 반제∙반봉건의 원흉인 미군을 철수시킨 후, 먼저 사회주의를 이룬 북한의 도움으로 남한을 사회주의화 하여 둘이 합치면 된다는 주장이다.
'반제 반봉건 민주주의혁명론'은 당시 조선 현실을 '식민지 반봉건사회'(植民地 半封建社會)로 규정하였다.
이는 식민지조선에 대해 '완전한 봉건사회이다'라는 해석과 '완전한 자본주의사회이다'라는 두 가지 입장과는 다른 것이었다.
김일성은 당시 식민지조선이 계급적 지반 문제로 인해 '봉건제와 부르주아성이 혼재된 상태로 존재하고 있다'고 이해하였다
한국은 미국에 의해 '반제반봉건' 상태에 있으므로, 이석기의 주장처럼 ‘미국놈 몰아내고 우리 민족끼리 가즈아!’가 주.사.파의 핵심 주장이다.
이런 주.사.파가 이땅에서 사라지지 않는 한 한국의 반미주의는 수그러질 가능성이 드물다.
- 평화협정은 전쟁의 지름길
문재인은 재임시 종전선언과 평화협정 체결를 위해 임기 마지막 순간까지 벌버둥쳤다.
겉으로 보기에는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노력하는 것 같다. 그러나 여기에는 깊은 함정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첫째, 평화협정은 전쟁의 지름길이다. 전문가에 의하면, 역사적으로 8000여 회의 평화협정이 있었지만 한 번도 지켜진 적이 없다고 한다.
나치 독일은 영국과 평화협정을 맺은 후 2차 대전을 일으켰다. 2차 대전 중 독일은 소련과 불가침 조약을 맺었지만 소련을 침공했다.
소련도 일본과 불가침 조약을 맺었지만 미국이 1945년 8월6일 일본 히로시마에 원폭을 투하하자, 8월7일에 일방적으로 불가침 조약을 폐기하고 선전포고를 하여 일본 점령지역인 만주를 점령하고 북한을 점령했다.
1973년 1월23일, 미국은 월맹과 프랑스 파리에서 평화협정을 체결한 후 월남 주둔 미군을 철수했다. 2년 후 월맹은 월남을 공격하여 점령했다.
이때 월남은 월맹에 비해 국력이나 군사력이 서너 배 강했다.
그러나 월맹이 월남을 공격할 때, 월남 인구의 0.3%에 불과한 좌파 정치인, 종교인들이 이것은 월맹의 침략이 아니라 월남군끼리의 우발적 오인 사격이라면서 국민들을 선동하고, 월남 내의 자생적 무장단체인 베트콩의 협력으로 월남은 속절없이 무너졌다.
한국도 북한과 종전선언과 평화협정을 채결하면 다음 수순은 UN 사령부 해체와 주한미군 철수이다. 전쟁이 끝난 상태에서 외국군대가 주둔할 명분이 없기 때문이다.
주한미군이 철수한 후 북한이 남한을 공격해도, UN이 군대를 파견하기 위해서는 같은 민족끼리의 '내전'이 아닌 '침략'이라는 증거가 있어야 하고, 설령 침략이라 해도 안보리의 중공과 러시아가 반대하면 군대 파견을 결의할 수 없다.
이럴 경우, 아무리 남한의 재래식 무기가 북한에 비해 월등해도 핵 무기를 가진 북한을 이길 수 없다. 남한은 북한에게 속절없이 당하고 북한의 뜻대로 한반도는 적화통일 되는 것이다.
최근 이재명 민주당 대표는 '더러운 평화가 숭리하는 전쟁 보다 낫다'고 주장하여 여당 인사들에게 뭇매를 맞고 있다.
이 말은 매국노 이완용이 나라를 일본에게 넘긴 후 한 말이다.
전쟁없이 평화롭게 일본에게 나라를 넘겨 35년 동안 일본에게 잣밟힌 것이 더 나은 것인가?
북한이 쳐들어 오면 희생을 줄이기 위해 끝까지 싸우지 않고 그냥 져주는 것이 더 나은가?
북한과 평화협정을 체결하여 미군이 철수하고, 설령 북한이 남침하지 않더라도, 북한과 낮은 단계의 고려연방제를 체결하여 국가보안법을 철폐하고, 민족통일기구를 통해 단계적 통일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구소련은 무력으로 주변국가를 침공하여 공산화시켰지만 민족주의자들의 거센 저항에 부딪쳤다.
이후 구소련은 주변 국가에 좌우합작 정부를 세운 후, 우파를 설득, 협박, 제거하여 좌파 위주의 공산위성국가를 하나씩 세워나갔다.
고려연방제 통일은 구소련의 외무부 부상이 1960년 4.19혁명 후 북한의 김일성에게 무력적화통일의 보완책으로 제시한 통일방안이다.
북한이 이런 통일 방안을 남한에 제시하자 김대중이 이를 수용하여 박정희 정권 동안 심한 견제를 받는 주요한 이유 중의 하나가 되었다.
이후 문재인이 대통령이 되면서 적극 추진했고 이재명도 같은 노선을 취하고 있다.
평화협정 체결은 주한 미군철수로 이어지고, 주한미군 철수는 무력 적화통일이든 낮은 단계의 연방제 통일이든 결국은 한반도 적화통일로 이어진다. 평화를 가장한 주.사.파들의 꼼수에 현혹되지 말아야 한다.
공산주의자들이 말하는 평화는 공산화의 수단이자 과정일 뿐이다.
소련을 적화시킨 레닌은 이렇게 말했다.
"전세계적으로 부르주와지(자본가)가 타도된 후에야 전쟁은 필요없게 된다."
소련 공산당 흐루쇼프가 서방세계와 평화공존을 추구할 때 내부에서 비판 여론이 일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평화공존은 계급투쟁의 포기나 타협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계급투쟁의 한 형태다."
북한의 김일성은 1950년 6월7일 평양방송에서, 6월15일~17일에 평양이든 서울이든 상관없이 남북한 대표가 모여서 평화에 대해 논의하자고 했다.
또한 6월10일 방송에서는, 북한에 감금되어 있는 기독교 지도자 조만식과 남한에 감금되어 있는 남로당의 자도자 김삼룡과 이주하를 교환하자고 제안했다.
동시에 6월10일, 북한의 총참모장 강건은 예하 사단장들게, 6월23일까지 남한 기습 준비를 완료하고 지시를 기다리라고 명령했다.
이틀 후인 1950년 6월25일 새벽 4시에 북한은 남한을 기습 공격헸다.
이러한 평화 공세 탓인지 당시 남한의 채병덕 참모총장은 5월1일 내린 비상경계령을 6월23일에 해제했다.
그리고 6월24일에 전방 지휘관의 인사이동을 단행했다. 또한 전방병력의 반 이상을 휴가보냈다.
6월 24일 저녁 7시에는, 장교구락부에서 장교구락부 건물 준공을 축하하는 파티가 열렸다.
이 파티에는 육군의 고급장교들과 미국 군사고문단 장교들 및 그 부인과 애인들이 대거 참여했다. 장기간의 비상경계령의 해제로 이날 파티 분위기는 매우 들떠 있었다.
채병덕의 경우는 술을 잘 마시는 사람이 아니라서 10시 쯤에 1차 파티를 끝내고 집으로 간 것으로 추정된다. 다른 장교들은 자정~새벽 2시 사이에 귀가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날 새벽 4시에 전 전선에서 전쟁이 터진 것이다.
채병덕의 이러한 행동으로 보아 그가 북한 간첩이었다는 주장도 있지만 분명치 않다.
어떻든 북한은 평화 공세로 남한을 기만한 후 기습 공격한 것은 확실하다.
공산주의자나 주.사.파가 말하는 평화는 전쟁의 또다른 수단이자 과정에 뷸과하다.
사실 어느 전쟁이나 마찬가지다. 중국의 손자가 말한대로 전쟁은 속임수이자 기습 공격이다.
2차 대전 때 일본도 미국에 평화를 말하면서 진주만을 가습 공격했다. 미군 레이더 병사가 레이더를 통해 대규모 비행단을 발견하고 담당 장교에게 보고했지만 담당 장교는 아군 훈련기일 것이라고 말하면서 무시했다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 작전도 기만과 기습이었다. 독일군 장성둘도 예측은 했지만 '설마'하다가 당했다. 그날(6월6일) 독일군 총사령관 롬멜은 아내의 생일을 위해 베를린으로 출타 중이었다.
맥아더 원수의 인천상륙작전도 1/5000 확율률 불가능한 작전이었다. 미군 수뇌부도 무모한 작전이라면서 수차 말렸다. 숭리를 눈 앞에 둔 북한군도 예상은 했지만 '설마' 하다가 당했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겉으로는 평화를 말하고 평화에 응하는 척하면서도 국방력을 게을리해서는 안된다. 유비무환이다.
그러므로 윤석열 정부의 대북정책도 유연성을 가져야 한다. 대북 강경론자인 김영호 통일부 장관 지명자에 대한 우려의 소리가 많다.
지나치게 강성으로 나가면 미친 x같은 김정은이 '너 죽고 나 죽자'는 식으로 핵 단추를 누를지도 모른다. 괜히 우리 측의 패를 다보여서 미친x를 도발할필요는 없다.
물론 겉으로 보기에는 유사한 양동작전이지만 차이가 있다. 북한의 양동작전은 무력적화 통일을 위한 것이지만 한국의 양동작전은 방어를 위한 것이다.
한국은 북한에 대해 임전격퇴의 의지를 보여주면서도 망할 때까지 기다리는 '전략적 인내'가 필요하다.
극소수 특권층 외의 대다수 백성들이 탄압과 굶주림으로 고통 받고, 상당수의 사람들이 남한 문화를 접하면서 남조선(한국)의 썩고 병든(?) 자본주의에 뽕! 가있으므로 북한이 망하는 것은 시간 문제이다.
이런 점에서 윤석열 정부는 북한 접수 플랜을 보다 구체적으로 세울 필요가 있다.
윤석열 정부가 박근혜 정부에 이어 이런 계획을 세울 것을 잘알고 있다는 사실을 좌파 정부의 모 통일부 장관이 밝힌 바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