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봉준을 대장에 추대
2월 28일경 김덕명, 김개남, 손화중 대접주와 주요 지도자들은 한 자리에 모여 두 가지를 결정하였다. 첫째 보국안민을 창의의 명분으로 내세울 것, 둘째 고부접주 전봉준을 동도대장(東道大將)으로 추대한다.
음력 3월 11, 12일경(양력 4월 16, 17일)에 동학당 약 3천명쯤이 금구로부터 태인을 거쳐 부안으로 가는 것을 태인에서 볼 수 있었다. 절반은 총기를, 절반은 창이나 도검을 가지고 오색의 큰 깃발을 세웠으며 그 중 지휘자로 보이는 자는 지휘기를 갖고 말을 타고 있었다. 그 자의 복장은 보통 의관을 착용했다. 그 밖의 사람은 모두 황색의 천조각으로 머리를 싸매고 또한 이것을 허리에 감고 있었다. 그리고 대장으로 추대된 자는 전명술(전명숙)이라 하며 연령은 40세 가량으로 복장은 보통이었다. (「김제의 동학당등에 관한 보고」, 『주한일본공사관기록』1)
지난 3월 1일 동학군 수백명이 부안군 줄포에 있는 세창(稅倉)을 털은 바가 있다. 민요 단게에서 타군을 월경하는 것은 역모로 취급되었다. 이 일을 지도했던 이가 바로 전봉준이므로 전봉준은 적어도 2월 28일쯤 대장으로 추대되었을 것이다.
전봉준이 대장으로 추대된 이후 이들은 백산에서 모일 것을 약속하였고, 행동강령과 군율 등을 집결 후 바로 정하기로 했다.
사발통문의 재검토
민요 단계를 벗어난 운동을 규정하려 할 때 사발통문을 거론한다. 거기에는 첫째, 고부성을 격파하고 군수 조병갑을 효수할 사. 둘째, 군기창과 화약고를 점령할 사. 셋째, 군수에게 아첨하여 인민을 괴롭힌 탐관오리를 격징할 사. 넷째, 전주성을 함락하고 경사(서울)로 직행할 사 등의 행동지침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이 사발통문은 전봉준을 위시하여 고부지역 동학도인 20명이 모여 1893년 11월 결의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 통문은 군내 각리 집강에게 보내졌다고 한다. 표영삼 선생은 이 사발통문에 문제가 많다고 생각한다.
서식을 보면 ①작성 년월(계사 11월) ②발신자 20명 서명(전봉준, 송두호, 정종혁, 송대화, 김도삼, 송주옥, 송주성, 황홍모, 최흥렬, 이봉근, 황찬오, 김응칠, 황채오, 이문형, 송국섭, 이상하, 손여옥, 최경선, 임노홍, 송인호) ③받는 이(각리집강 좌하) ④통문(通文) 내용의 순으로 작성되어 있다.
그런데 이러한 서식은 동학의 통문서식과는 다르다. 보통 ①제목(경통) ②경통(敬通) 내용③보낸 날짜 ④보낸 이로 되어 있다. 그래서 사발통문은 그때 작성된 것이 아니라고 생각된다.
둘째로 1894년 1월 10일에 고부민요가 일어난다. 말목장터로 모이라고 통문을 돌린 것이 1월 8일 장날이었다. 그런데 사발통문은 “전주성을 함락하고 경사(서울)로 직행한다”는 엄청난 통문이었으나 언제 어디로 모이라는 날짜가 없다.
국가 반란을 도모하려는 이런 통문은 비밀리에 돌려도 들통나는 경우가 많은데 2개월이나 앞당겨 공개적으로 돌렸다. 더욱이 각리집강은 말단 행정의 심부름을 하는 자이므로 상식적으로 납득이 안된다.
셋째로 주모자를 모르게 하기 위하여 사발모양으로 둥글게 연서했다고 하지만, 전봉준은 이미 장두가 되어 고부 관아에 등소하다가 체포되었던 인물이다. 이미 주모자로 드러난 전봉준이 뭐가 무서워 둥글게 연서했을까?
넷째로 통문 내용은 신문기사나 보고서와 같다. “이때 도인들은 선후책을 토의 결정하기 위하여 서부면 죽산리 송두호의 집에 도소를 정하고 매일 운집하여 차서(次序)를 정하니 그 결의된 내용은 좌와 같다”고 하였다. 모여 의논하는 장소와 주모자의 명단까지 밝혔다. 그런데 탐관오리의 학정이나 거사의 당위성은 어디에도 없다.
이 사발통문은 1968년 11월 신태인읍 평화동에 사는 송기태가 처음으로 세상에 알렸다. 통문 서명자 송국섭의 아들이라 한다. 이 사발통문에 대해 김용덕 교수는 반신반의의 문건이라고 하였다. 필자(표영삼)는 1893년 작성된 통문이 아니라 훨씬 후에 만들어진 문건이라 생각된다. 전봉준 등 동학도 20명이 모여서 사전에 거사계획을 수립하고 1894년의 운동을 전개했다고 보는 것은 어딘가 무리인 것 같다.
임내 산중으로 이진
도인들을 동원하려면 숙식이 커다란 문제로 떠오른다. 손화중 포나 김개남 포는 전라감영과 떨어져 있어서 동원하는데 큰 위험은 없었다. 그러나 금구 원평의 김덕명 포는 전주와 가까운 곳이다. 하루 이틀간 원평에 집결시켰다가 다른 곳으로 옮겨야 했다. 2차 집결지는 외지고 식량조달이 쉬워야 한다.
전봉준은 두 곳을 택했다. 하나는 부안면(현 고창군) 임천(林川)이고, 하나는 무장 동음치면 당산이다. 임천은 깊은 산중이고 당산은 외진 서해 바닷가다. 임천은 임내, 인천, 인천강 등으로 불렸고, 현재 흥강(흥덕강정) 마을이다. 흥강에 사는 백남숙은 현재의 강이름을 주진강, 인천강, 임천강 등 세가지로 부른다고 한다. 임천은 마을 이름이고 인천은 개울 이름이다. 현재 고창군 아산면 반암리에 임천(현 흥강) 마을이 있다. 이곳은 당시 무장현에 속해 있어서 무장강정이 원래 이름이었다.
고부에서 임천까지는 뱃길과 육로가 있다. 뱃길은 줄포에서 배를 타고 주진강 하구까지 가서 강을 거슬러 3킬로 정도 가면 된다. 육로는 줄포에서 흥덕으로 가다가 사포를 건너 선운사쪽으로 가면 된다. 백산에 있던 동학군 일부가 이곳에 온 날짜는 2월 그믐경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뒤따라 올 많은 인원이 숙식할 시설을 준비하기 위하여 선발대로 왔다.
다음으로 전봉준은 수천 명의 식량을 대기 위하여 3월 1일에 줄포 세미창을 털었다. 탈취한 양곡은 바다를 거쳐 주월강 하구로부터 배편으로 이곳까지 운반했다. 당시 줄포의 연간 세미는 18,000여 석이나 되었다.
일단 준비를 마치자 3천여 명의 동학군을 3월 9일까지 원평에 집결시켰다. 3월 11일 대오를 편성하여 다음날 이진(移陣)에 들어갔다. 임천에 도착한 이들은 3일간 머물며 기본 훈련을 마치고 16일부터는 무장현 당산(堂山)으로 이동하였다고 추정된다.
무장현 당산에 집결
무장현 당산은 법성포에서 복동 사이 7km 지점에 있다. 당산은 바닷가이지만 외진 곳이어서 마음놓고 활동할 수 있는 곳이다. 5일 정도 체류한 것으로 보인다. 무장현감은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금 16일 본 현 동음치면 당산이란 곳에 어떤 난류배들이 몇 천명이나 모여서 머물고 있다. 종적이 수상하여 영리한 이속과 장교를 보내 은밀히 알아보게 하였다. 그들은 민가에 모여 머물고ㅗ 있었는데 동학도들이라 한다. ...이곳은 영광과 법성 양 읍의 경계와 상접해 있다. 그들 몇 백명은 법성 진량면 대밭으로ㅗ 가서 대를 베어 죽창을 만드는가 하면 각처로 나가 촌민이 갖고 있는 조총과 낫과 도끼 같은 물건을 찾아내어 탈취했다. 저들은 동학을 반대하거나 험담하는 사람, 괴롭혔던 사람들을 찾아내어 모조리 잡아다 구타하였다. 이웃 석교촌의 안덕필의 백미 60석을 빼앗고, 송경수의 가산도 때려부수었다. 이속과 향장을 보내어 효유하여 보기도 하고 해산하라고 명령도 해보았지만, 그들 무리는 수천인지라 고을의 힘으로는 그들의 기세를 물리칠 수 없었다. 그들이 보낸온 글에는 며칠간만 머물다 곧 떠날 것이라 하였다. 그들은 분대를 편성하더니 짐을 꾸리기 시작했으나 어디로 가는지 알아내기는 어려웠다. 우선 사실대로 첩보를 올린다. [『동학농민전쟁사료총서』5권 159-162]
동학군의 포별 기포는 3월 10일부터 20일에 걸쳐 이루어졌다. 이들이 고부 백산에 도착한 것은 3월 22일부터 23일 사이로 보여진다.
(3권에 계속)
이상으로 표영삼 선생의 『동학2-해월의 고난 역정』은 끝납니다. 3권으로 이어져야할 것인데, 연로하셔서 다 끝맺지 못하고 돌아가셨습니다. 다음은 『동학1-수운의 삶과 생각』에 실린 도올 김용옥의 서문 일부입니다.
나는 동학을 잘 안다고 하는 무수한 사람들을 만나 보았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공통의 오류가 있었다. 동학을 하나의 고정된 개념의 틀에서 이해하는 것이다. 그리고 동학을 자신이 배워온 어떤 기존의 신념체계 속에서 이해하려는 것이다. 수운이 “다시 개벽”을 말했다면 우리의 개념, 우리의 언어 그 자체가 다시 개벽되어야 하는 것이다. 나는 동학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이러한 개벽적 삶을 실천하고 있는 진인(眞人)을 만나고 싶었다.
표영삼 선생은 1925년 음 12월 평북 구성군 오봉면 봉덕동에서 태어났다. 동학교도 조부 춘학으로부터 도를 전수받아 오로지 “동학하는” 외길의 인생을 걸어왔다. 표영삼 선생은 우리가 생각하는 어떠한 학문의 체계에서 공부한 사람이 아니다. 평생을 “동학하는” 속에서 동학관을 형성시켰고, 자신의 학덕과 인격을 닦아왔을 뿐이다.
표영삼 선생을 뵈온 것이 벌써 스무해 가까워오지만 단 한순간도 삶의 일관된 자세가 흐트러진 것을 본 적이 없다. 그는 오로지 동학을 해온 진인(眞人)이었다. 그의 삶 자체가 하나의 개벽이었다. 그의 말과 행동 모두가 우리의 상념을 깨우쳐주는 개벽적 암시였다. ...그는 사인여천(事人如天) 즉 “사람을 섬기기를 하늘 섬기듯이 하라”고 한 수운 선생의 말씀만을 실천하고 살아온, 동학 1세대의 삶의 모습이 그대로 이어져 내려온 마지막 빛줄기였다. 표영삼 선생은 후대의 종교화된 제도 속에서 이해하는 모든 개념적 사고를 혐오한다. 그는 수운과 해월의 가르침의 바다를 끊임없이 뛰어들어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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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표영삼선생의 필생의 누적된 작업이 『동학』이라는 표제하에 3권으로 집대성되는 이 기쁨을 동학을 하는 모든 도인들과 나누어 가지고 싶다. 이 『동학』의 역사는 우리 민족사의 서광이요, 민본성(民本性-플레타르키아)의 완성이요, 민주(民主)를 위해 피흘린 모든 영혼의 진혼처라 할 것이다. 표선생님의 원고 한 글자 한 글자가 살아있는 동학의 자취요, 우리 민족사의 양심의 진실이요, 곡필을 거부하는 적나라한 삶의 고백이다. 더 이상 도올의 가필이 뭔 필요가 있으리오! 졸서(拙序)가 표선생님의 위업에 누가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2004년 5월 14일
낙송재에서 도올 김용옥
표영삼 선생께서 좀더 오래 사셔서 동학 3권을 이루어내셨으면 더욱 좋았을 것인데, 무척이나 아쉽습니다. 일단은 표 선생님의 저작을 읽으면서 동학의 역사를 살펴보는 일은 여기서 끝을 맺습니다. 그동안 읽어주시고 격려해주신 여러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는 다른 저서를 통하여 동학농민전쟁의 과정을 이어가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첫댓글 음매, 이렇게 아수울 수야. 이야기가 진짜 무르익을만 하니 접게 되는 군요. 후속 편 이어지길 기대해 봅니다. 구 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너무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