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江陵 鶴山 金光坪) 이야기
10. 춘궁기(春窮期) 이겨내기
내가 중학생이던 60년대 초는 몹시도 가뭄이 심했다. 초여름이 될 때까지 아침나절 희뿌연 안개가 끼었다가는 붉은 해가 떠오르는 날이 계속되어 비 한줄기 내릴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뜨거운 열기를 품은 바람이 쉴 사이 없이 불어댔고 밭의 곡식도 모두 빨갛게 타죽었다.
논에 댈 물이 없어 모를 내지 못하는 집이 대부분이었는데 어찌어찌하여 산골짜기 밑의 논은 모를 냈지만 천수답(天水畓)이다 보니 말라붙어 졸졸거리는 골짜기의 물줄기를 서로 자기 논에 대려고 다툼이 그치지 않았다.
논 물꼬 / 어린 송기 / 송기(松肌:소나무 속껍질) / 송기떡(松膏餠)
어느 마을에서는 자기 논 물꼬에 서로 먼저 물을 대겠다고 싸움이 벌어져 살인이 났다는 둥, 저녁에 논에 댄 물이 내려오지 않아 올라가 봤더니 건넛마을 젊은 아낙이 물꼬에 철퍼덕 앉아있다.
보나마나 자기네 논으로 물 대고 있어 일어나라고 호통을 쳤더니 어떤 놈이냐고 으름장을 놓으며 아래 속곳을 모두 벗고 앉았으니 어데 와서 손을 대기만 해 봐라... 는 둥 벼라 별 이야기가 다 들렸다.
자기 논에 물을 먼저 대려고 하는 사람들은 나이가 많거나 적거나, 아는 사람이거나 모르는 사람이거나 죽기 살기로 서로 욕을 퍼붓기도 하고 멱살잡이도 예사로 하였다. 그런데 어른들은 논에 물을 대다가 일어난 싸움은 큰 허물이 아니라고 하였다. 오죽하였으면 자식들 입에 밥 들어가는 것과 가물에 자기네 논에 물들어가는 것보다 더 좋은 일은 없다고 하였으니....
학교에서도 관정(官井)을 판답시고 수시로 학생들을 동원하였다. 우리 관동(關東)중학교에서는 경포 쪽으로 여러 번 나갔는데, 호미나 괭이를 들고 선생님의 인솔 아래 터덜터덜 흙먼지 일어나는 이면(臨瀛) 고개를 두어 시간이나 걸어 넘어 경포호수 위쪽의 개천 바닥까지 갔다. 개천 바닥은 물론이려니와 인근의 논들도 모두 거북 등딱지처럼 쩍쩍 갈라져 괭이로 파거나 호미로 긁으면 뿌연 흙먼지만 풀풀 날릴 뿐 축축한 땅도 만나기 힘들었는데 왜 이런 짓을 하느냐는 눈으로 선생님을 쳐다보면 선생님도 눈을 끔적이며 그냥 파는 시늉이라도 하라고 하셨다.
그해의 가뭄은 강릉지방뿐만 아니라 전국적인 것으로 특히 호남지방이 심해 그 넓은 평야에 벼 한 포기 못 심었다고 하였다. 연이은 가뭄으로 소작농들은 먹을 것이 없어 전국으로 떠돌게 된 사람이 많았다. 얼마나 굶주렸던지 처녀들은 밥만 먹여주면 째보(언청이)든 장님이든 심지어 늙은 홀아비한테도 시집을 가겠다고 하였다는 소문도 돌았다.
구람(도토리) / 주루먹 / 옛 강릉 임영(臨瀛)고개 / 왕가뭄
우리 마을도 식량이 떨어져 고생이 심했는데 봄에 감자가 나기까지가 힘들었다.
양식이 떨어지면 미처 감자가 여물기도 전에 감자포기 옆을 헤집고 콩알같이 맺힌 감자를 뜯어내어 물에 씻어서는 껍질째 삶아 먹기도 하였다. 어머니께서는 그래도 지금이 나은 편이라고 하셨다.
어머니 젊은 시절에는 미처 밀∙보리가 익기를 기다릴 수가 없어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밭에 들어가 이제 파랗게 올라오는 보리나 밀 이삭을 똑똑 잘라다가 가마솥에 넣고 볶아서 맷돌에 갈아 그 가루에 나물을 많이 넣고 죽을 쑤어 연명하기도 하셨단다. 조상 대대로 겪는 이른바 춘궁기(春窮期)이니 그냥 그러려니 여겼다고 한다.
흉년이 거듭되다 보니 가을에 미리 구람(도토리)을 주워다 보릿고개에 대비하였다. 가을걷이가 끝나면 마을 아낙들은 주루먹(주루막)을 하나씩 메고 큰골이나 절골로 도토리를 주우러 다녔다. 그러다 저녁때면 주루먹 가득 구람을 주워 왔고, 어떤 집은 몇 가마니씩이나 모으기도 했다.
주워온 도토리는 먼저 껍질을 벗긴 다음 개울가에 큰 자배기를 가져다 놓고 물에 담가 도토리의 쓰고 떫은맛을 우려내야 한다. 그런데 아무리 우려내어도 쓰고 떫은맛이 없어지지 않았는데 그 우려낸 도토리를 삶아서 밥처럼 먹었다.
도토리는 아무리 푹 삶아도 여전히 딱딱했고, 입에 넣고 씹으면 가루처럼 바스러지며 목이 멜뿐더러 너무 써서 정말 먹기가 힘들었다. 특히 아이들은 먹기 싫어 울고는 했는데 푹 삶은 후 간혹 강낭콩이나 감자를 같이 넣고 다시 삶아 방망이로 도토리를 으깨서 섞어 먹기도 하였다. 거기에 인공 감미료인 사카린(Saccharin)을 물에 타서 끼얹어 먹으면 조금 나았는데 지금처럼 반찬으로 도토리묵을 쑤어 먹는 것은 언감생심, 사치로 치부되었던 시절이다.
제대로 먹지 못하다 보니 부황(浮黃)이 걸린 사람들이 많았는데 대여섯 살짜리들은 배는 불뚝 나오고 얼굴이 부석부석 부어오른 아이들이 많았다. 그래도 여나무 살 먹은 우리 또래들은 찔레 순을 따 먹기도 하고, 소나무 껍질을 벗겨 송기(松肌)를 먹기도 해서 그나마 허기를 조금은 면할 수 있었다.
이른 봄, 나무에 물이 오르기 시작하면 작은 소나무의 연한 가지 아래쪽 껍질을 벗긴 다음 손으로 다잡아 쥐고 쭉 훑으면 하얀 목질 부분만 남고 두어뼘 가량의 껍질이 쏙 벗겨져 나온다.
이것을 거꾸로 들고 솔잎을 살살 잡아당기면 거친 껍질은 벗겨지고 하얗고 부드러운 속껍질이 남는데 이것을 입에 넣고 씹으면 진한 소나무 향기와 아울러 들쩍지근한 맛이 났다.
좀 더 나은 것은 제법 굵은 소나무를 정하여 빨갛고 매끈한 부분을 골라 우선 거친 겉껍질을 대충 긁어낸다. 그다음 낫으로 아래위 쪽 껍질을 자르고 살살 껍질을 들춰내면 하얀 나무 속살이 드러나는데 이 부분을 낫으로 살짝 긁어내면 제법 두툼한 송기가 나온다. 이것은 훨씬 물기가 많을뿐더러 송진 냄새도 전연 나지 않고 달짝지근하고 부드러워서 먹기가 좋았다.
소나무 속껍질을 벗겨다가 물에 우려내고 가루를 만들어 떡을 해 먹기도 하였다는데 바로 송기떡(松膏餠)으로, 우리 마을에서는 만들어 먹는 것을 보지는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