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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대 영적 세계를 정복하라2(56P)
(오직 성령으로 전진하라)
B>.성령의 7대 전신갑주
윌리암 거어널(William Gurnall)에 대하여...
거어널은 「The Christian in Complete Armor」라는 3권의 책을 썼습니다.
첫번째 책은 자기가 목회하고 있던 영국 라벤햄의 시민들에게 헌정(獻呈) 되었습니다. 그는 1679년 6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하지만 그가 남긴 「The Christian in Complete Armor」는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었습니다. 「Amazing Grace」의 작사자로 유명한 존 뉴톤 목사님(1725-1807)은 “성경을 빼고 꼭 읽어야 할 책이 있다면, 거어널이 쓴「The Christian in Complete Armor」라고 말하고 싶다.”라고 했고, 스펄전 목사님(1834-1892)은 “거어널이 쓴 책의 진가(眞價)는 말로 설명할 수가 없다. 나는 영적으로 침체 되어 있을 때마다 거어널의 책을 읽는다. 그 때마다 나의 영혼이 재점화되곤 했다.” 했습니다.
이 책을 현대 영어로 번역한 사람 중의 한 사람인 데이빗 윌크슨(David Wilkerson)은 어느 날 친구로부터 이 책을 전달 받습니다. 그 친구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이 책이 당신의 생애를 바꾸어 놓을 걸세. 내 삶도 이 책으로 말미암아 바뀌었네. 내가 보기에 자네도 이 책을 읽을 준비가 된 것 같네.”
친구의 말대로 데이빗은 처음 25페이지를 읽어 대충 읽어 보다가, 그만 이 책에 깊이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는 이 책이 주는 영적 감동을 못 이겨서 이 책을 복사해서 동료 목사들에게 돌렸다고 합니다.
데이빗 윌크슨(David Wilkerson)과 그러함 펄킹함의 성령 예화는 유명합니다.
“그러함! 자네에게 좋은 친구 한 분을 소개하러 왔네...”
그리고 둘은 도서관에서 손을 잡고 기도했습니다. 펄킹험은 그 날의 떨림을 잊지 못했습니다. 성령 받은 이후 그의 사역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그리스도의 강한 군대로 쓰시고자 하십니다. 「The Christian in Complete Armor」는 에베소서 6:10-20절에 대하여 쓴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 교인들에게 영적 무장이 필요하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10절,“종말로 형제들아!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영적 분별력이 없는 사람은 영적 무장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합니다. 영적 싸움터에 나선 크리스찬은 무엇보다도 담대해야 합니다.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불행하게도 이 시대의 크리스찬들은 용기가 없는 것 같습니다. 나약한 것 같습니다. 이 시대의 크리스찬들이 나약한 것은 그들이 하는 기도에서 여실히 드러 납니다.
“사랑하는 아버지. 지난 일주일 동안도 세상에 나가서 이 모양, 저 모양으로 죄 짓고 살다가 오늘 주님의 전에 나왔습니다. 오늘 우리는 피곤하고 지친 심령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우리는 힘이 없고 연약한 사람들이오니, 우리를 도와 주옵소서. 우리들의 죄를 주님의 보혈로 깨끗이 씻어 주시고, 우리의 상처를 치료하여 주옵소서.”
물론 우리가 영적 싸움터인 세상에 나가서 때로는 힘에 겹기도 하고, 때로는 상처를 입기도 합니다. 그런데 노상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우리는 오늘도 죄를 졌습니다. 우리는 연약합니다. 우리는 상처를 받았습니다. 주님의 보혈로 씻어 주시고 낫게 하여 주옵소서.” 이렇게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그 기도 들으시고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성경에도 하나님을 치료하시는 분으로 묘사한 곳이 있습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 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 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호세아 6:1-2).”
또 신약성경에도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마태복음 9:12).”고 하시면서 예수님을 병자를 치료하시는 의사에다가 비유했습니다.
그렇다고 여러분, 하나님을 부상병이나 전문적으로 치료하시는 분으로 만들지 마세요. 연약하여, 스스로를 합리화 하며, 질질 짜지 마세요.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의 영적 싸움의 승리를 기뻐하시는 분이십니다.
크리스찬의 영적 싸움에서 제일 큰 문제는 영적 싸움의 실체(實體)를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깨어 있지 않는 것입니다. 그냥 무사안일(無事安逸)하게 살려고 합니다. 일반 사회에서도 무사안일은 사회를 좀 먹는 병폐(病弊)입니다. 영적인 삶에서도 무사안일에 빠진 사람은 발전성이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장래를 기약할 수 없습니다.
실패를 두려워 하지 않는 패기와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새로운 것을 창조해 내고,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프런티어(frontier) 정신이 있어야 합니다.
이슬람 국내 최대 선교단체인 <인터콥>의 표어는 “To the last frontiers” 입니다. 너무나 매력적입니다.
저는 알렉산더 대왕의 유명한 일화를 알고 있습니다. 그는 세계를 정복하고, 더 이상 정복할 땅에 없어서 울었다고 합니다. 그가 생전에 가장 싫어하는 것은 비겁함이었다고 합니다. 한번은 그가 부하들을 재판하고 있었습니다. 한 어린 병사가 앞에 섰습니다.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잘 생긴 메케도니야 소년이었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이 묻습니다. “이 소년의 죄가 무엇이냐?” “이 소년은 적군이 무서워 동굴에 숨었습니다.”
대왕의 얼굴이 일그러졌습니다. 그러나 다시 이 소년의 앳된 얼굴을 보는 순간, 대왕의 마음에 측은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대왕이 묻습니다.
“얘야, 네 이름이 무엇이냐?” 소년 병사가 조그만 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알렉산더입니다.” “네 이름이 뭐라고?” “알렉산더입니다.” “네 이름이 뭐라고?” 그 소년은 큰 소리로 대답했습니다. “알렉산더입니다.”
대왕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그 소년의 멱살을 잡아 땅에 내동댕이 치면서 소리쳤습니다. “이 놈아, 네 행동을 바꾸든지, 아니면 네 이름을 바꾸어라.”
우리가 장차 하나님 앞에 설 때, 그 분이 물으실 것입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크리스찬입니다.” “뭐라고? 그렇게 비겁하게 숨고, 사탄의 종 노릇을 하다가 이제 와서 네 이름이 크리스찬이라고? 네가 그렇게 무사안일하게 살더니, 이제 와서 네 이름이 크리스찬이라고?”
이런 하나님의 책망이 떨어지기 전에 그리스도의 병사로 무장하십시오.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 지십시오.”
“영적 싸움에 나간 성도는 강하고 담대해야 한다”고 말씀했습니다. 우리 크리스찬의 힘이 어디서 오는지 그 힘의 근원(根源)이 무엇입니까?
오늘 말씀에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라(Be strong in the Lord and in his mighty power.)”라고 했습니다.
예전에 미국과 이라크 전쟁 때 뉴스를 보니까, 미군의 사기가 땅에 떨어졌답니다. 보급로가 막혀서 먹을 것이 공급 되지 않아 굶주리고 있고, 이라크 군의 자폭 공격을 받고는 충격과 공포에 떨었답니다. 막강하다고 믿었던 아파치 헬기가 이라크 농부들이 쏜 소총 사격을 받고 추락한 것이 이라크 국영 tv 방송 알-자지라에 방영됨으로, 더욱 미군의 사기가 떨어졌다고 합니다. 아무리 좋은 최신 무기를 가지고 있어도 군인들의 사기가 떨어지면 모두 무용지물이 되고 맙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힘의 근원은 군대의 힘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힘과 능력이 곧 그리스도인들의 힘의 근원입니다. 이 말을 바꾸어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소유하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힘도 능력도 발휘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능력을 사용할 수 있습니까?
여기에도 무슨 대단한 비결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먼저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일’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나의 삶의 방패가 되어 주신다는 사실을 또한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시험을 받을 때나 어려움을 당할 때 그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입니다. “오직 저(하나님)만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니, 내가 크게 요동치 아니하리로다(시편 62:2, 6).”하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 나지 않습니다.
사실 우리에게 있어서 믿음은 늘 춤을 추고 있습니다. 살아 가는 사안마다 현실과 믿음의 양자 사이에서의 결단을 요구합니다.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쳐 주시면서 꼭 물으신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하나님이) 능히 이 일을 할 줄을 믿느냐(마태복음 9:28)?” 하고 물으셨습니다. 또 예수님은 “할 수 있거든 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마가복음 9:23).” 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사용하는 일은 제일 먼저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일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하나 하나의 일마다 믿음을 보여야 합니다.
어제 친구 목사의 얘기를 들었습니다. 부목사를 데리고 심방을 갔습니다. 장로가 봉투를 주었습니다. 사모에게 그 봉투의 돈으로 “부목사님 책이나 사 보게 주라” 하고 열어 보니, 5만원이 들어 있어서 그냥 다 주어 버렸다는 말입니다. 그 장로는 연간 250억을 버는 큰 부자입니다. 제 말이 “부자는 씨가 따로 있어! 우리는 절대 부자가 되지 못할 거야!”했습니다.
그 장로는 마침내 목사를 내쫓아 버렸습니다.
믿음이란 것이 무엇인가를 고민하게 하는 얘기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 영적 싸움에서 이기기를 원하는 여러분이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나의 능력은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내가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힘과 능력과 권세는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입니다.
내가 능력과 힘을 소유할 필요가 없고, 실상 나는 그럴 수도 없습니다. 항상 그 분을 의지하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언제나 이 믿음을 유지하는 삶의 자세가 중요합니다.
2019년 1월 말 튀니지에 가서 북 아프리카 최북단 지중해 바다로 가는 길에, 하루 종일 내내 비가 퍼부었습니다. 제가 30여 명이 탄 버스간에서 크게 소리쳤습니다. “비와 바람은 그칠지어다...”3번을 크게 외쳤습니다.
드디어 바닷가에 내렸습니다. 살인적인 바람이 북쪽 유럽 방향에서 불어 왔습니다. 우산은 아예 쓸 수가 없었습니다. 이 바람은 막을 수 없는 바람이었습니다. 사람이 날려갈 만한 바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늘은 맑고 청명했습니다. 저의 믿음이 구름과 비를 걷어가고, 2주일 동안 튀니지를 전도한 동료들에게 주님이 저의 믿음의 선포 기도를 들으시고, 비를 그치게 하신 것입니다.
그 날 3사람이 나에게 “정말 목사님의 기도는 능력이 있으십니다.” 칭찬했습니다. 사람의 인정과 칭찬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언제나 믿음을 갖고 살아가는 자세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무장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것 이것으로 무장을 하라고 명령하시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군사들은 그 명령대로 무장을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영적 무기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명령하시지 않은 다른 어떤 것으로도 무장을 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좀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그리스도인들은 전신갑주 자체 보다는 그 전신갑주을 입으라고 명령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진리, 믿음, 의(義, righteousness), 구원, 말씀, 기도, 이런 것들이 무기가 될 수 있습니까? 이런 것들이 영적 싸움에서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겠습니까?
그 자체로는 이런 무기들이 얼마나 효력이 있을지 의문이 갑니다. 좀 더 강력한 좋은 무기가 없을까 하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영적 무기는 재래식 무기들입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앞으로도 항상 똑 같은 무기들입니다. 그러나 재래식 무기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의 약속과 계획 속에서 이런 무기들이 막강한 위력을 발휘합니다. 똑 같은 믿음 같지만,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세상을 이기고도 남는 엄청난 위력을 갖습니다.
거어널이 이렇게 말합니다. 사탄이 자신의 도구로 즐겨 쓰기를 원하는 4가지 유형(類型)의 사람들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 권력이 있고 명성이 높은 사람이고, 둘째, 지적(知的)으로 뛰어나고 사교술이 좋은 사람이고, 셋째, 거룩하거나, 아니면 거룩하게 보이는 사람이고, 넷째, 사람들에게 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모두 어떤 사람들입니까? 모두 우리가 그렇게 되고자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되려고 목표로 삼는 유형의 사람들입니다. 사탄의 궤계는 이렇게 치밀하고 계획적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욕망(desire)과 꿈과 비전까지도 사탄은 이용합니다.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온 몸에 전율(戰慄)이 일어납니다. 한 순간도 방심할 수 없습니다.
영적 싸움터에서 사탄과 싸워야 하는 우리는 지속적으로 “주 안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강해져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 합니다.
나의 영적인 상태가 문제가 있을 때가 언제입니까?
교인들이 직장을 그만 두는 문제를 심히 우려하면서...
담임목사인 저는 항상 설교에서 세상 일에 골몰하지 말고, 영적인 가치에 삶의 우선순위를 두며, 예배와 교회 섬김과 주님의 일에 우선 가치를 두라고 늘 강조해 왔습니다.
2월 경에 성경아 집사님, 장현주 집사님, 김현희 집사님 등이 직장을 그만 둔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임채진 권사님도 현재 거주와 직장이 안정적이지 못합니다.
우리 성도들이 직장을 그만 둘 때에는 깊은 숙고와 기본 원칙이 있어야 합니다. 삶이 안정이 되지 않고, 가정 경제가 안정이 되지 않으면 개인의 삶과 신앙생활, 교회생활은 치명타를 맞게 됩니다.
1.먼저 가족과 의논하여, 집안의 생계 대책이 분명히 있어야 합니다.
2.기본적인 헌금생활의 여력을 살펴야 합니다.
3.절대 다음 인생 계획이나 구체적인 실행의 원칙이 없이, 직장을 그만 두면 안됩니다.
4.교회를 섬기기 위하여 직장을 그만 두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세우고, 교회를 잘 섬기고, 목사를 잘 동역하라는 담임목사의 설교를 오해하면 안됩니다. 믿음이 안되는 사람이 설교를 잘못 듣고서 덜컥 직장을 그만 두면 그 다음 아무 대책이 세워지지 않게 됩니다. 그러한 행동이 처음에는 믿음의 취지 같지만, 얼마 가지 못해서 후회하고, 가정 갈등을 유발하며, 교회 섬김과 신앙생활에도 치명타가 옵니다.
5.퇴직한 이후의 다음 직장과 생계 대책, 확실한 신앙적 관점하에서 퇴직 여부를 신중히 결단해야 합니다.
절대로 “내가 기도하고, 성령 충만하며, 교회를 잘 섬기면 어떻게 되겠지!”하는 사행심으로 이러한 퇴직 등의 중요한 일들을 섣불리 결정해서는 아니됩니다.
직장 퇴직과 이직에 대하여, 신중에 신중을 기하시기를 당부합니다.
깊은 밤 한 분, 한 분을 두고 기도하면서...
(2019.2.10일 주일 새벽 1:30분)
금,토 주말 <성령학교> 강의안 중에서...
나의 영적인 상태가 문제가 있을 때가 언제입니까?
1.‘나의 영적인 상태가 문제가 있을 때’란 영적인 열정과 열심히 식어질 때입니다.
병법에 ‘최상의 공격은 최상의 방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마음이 나태해지지 않고 그리스도를 향한 뜨거운 열정에 사로잡혀 있을 때, 우리는 사탄을 향하여 불화살을 쏘고 있는 것입니다.
사탄은 그런 때 감히 접근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기회를 엿봅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나태해지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2.그리고, ‘나의 영적인 상태가 문제가 있을 때’란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기는 일에 관심이 떨어질 때입니다.
이 때는 확실한 영적 위기의 때입니다. 우리 마음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랑이 증가되면 될수록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하고 싶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식으면 식을수록 예배와 교회에 대한 관심이 떨어집니다. 당연히 교회와 목사도 멀어지지요.
이러한 부정적인 마음의 현상을 당연한 것처럼 용인하면서, 자기 스스로의 마음을 합리화하며 사탄의 역사를 계속 방임하면 안됩니다. 부정적인 것은 그 모양이라도 버리고, 잠간의 생각조차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늘 깨어 기도해야지, 부정적인 자기 생각을 항상 따라가면서 불평, 불만, 원망해서는 절대 안됩니다. 사람은 습관의 동물입니다.
시편 84편 말씀을 한번 읽어 보세요.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생존하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 주의 집에 거하는 자가 복이 있나이다. 저희가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구구 절절이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예배에 대한 열정이 한꺼번에 느껴지지 않습니까? 교회를 얼마나 사랑합니까?
3.한가지 더 있습니다. ‘나의 영적인 상태가 문제가 있을 때’란 자신의 일에 대한 애착이나 강박관념을 가지게 될 때입니다.
이것도 확실한 영적 위기의 증상(症狀)입니다. 하나님의 일보다는 직장, 가정, 세상 일, 돈... 등등에 대한 책임에 묶여 더 우선시하는 경우를 말합니다. 이 묶임에서 풀려나지 않으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신앙생활은 세속화(世俗化)되고 맙니다. 기도를 해도 세상 냄새가 풀풀 나는 기도를 하게 되고, 묵상(默想)도 되지 않습니다.
위에서 말씀한 목사의 권고와 상충되는 것 같지만, 해석을 잘 하시기 바랍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충고한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디모데후서 2:3-4).”
우리의 관심은 자기 생활이 아닙니다. 세상 일이 아닙니다. 우리의 관심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영적 군사로 “부르신 분”을 기쁘게 해 드리는 것입니다.
이 말은 결코 여러분의 직장 일이나, 학문을 연구하는 일이 가치가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나는 지금까지 한번도 그런 식으로 설교를 한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성경을 해석한 적도 없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우리 자신의 정체성(正體性, identity)성을 얼마나 바로 알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적인 군사들입니다. 로마서의 표현대로 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지체(肢體)를 불의의 도구(道具)로 죄에게 드리는 사람들이 아니라, 우리의 지체를 의의 도구로 하나님께 드리는 사람들입니다(로마서 6:13).”
무슨 일을 하든지 우리의 정체성을 잃어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공부를 해도 그런 의식으로 공부를 하고, 직장 생활도 그런 의식으로 하고, 가정도 그런 의식으로 운영하는 것입니다. 자녀 교육도 그런 의식으로 하고요. 문제는 이런 의식이 없어지고 세상 일에 얽매여서 사는 것입니다.
자기의 정체성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살고 있습니다. 이것은 확실히 영적 위기의 증상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훈련이 없으면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알지 못하면서, 세상의 직장이나 가정이 안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나는 주님의 일과 하나님 나라의 일을 우선시 한다면서 자기 합리화하는 것은 믿음의 행위가 아닙니다. 부디 다들 잘 분별하시기를 당부합니다.
통성기도:
1.진리의 허리띠:
“진리로 허리띠를 띠라!”는 말씀은 “너희 마음을 신실하게, 진리의 말씀으로 항상 불타게 하라!”, 항상 마음을 ‘기동성 있게 준비하라’,“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하게 거하게 하라(골로새서 3:16).”는 뜻입니다.
우리를 사탄의 영적 공격으로부터 지켤 줄 수 있는 것은 하나님 말씀 밖에 없습니다. 진리로 그 마음이 무장(武裝)이 되어 있는 사람은 사탄의 모든 공격을 무력화(無力化) 시킬 수 있습니다. 진리로 그 마음이 무장되어 있는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영적 군사로서 영적 싸움터에 나간 사람들은 이렇게 마음이 진리로 무장되어 있어야 합니다. 진리의 허리띠는 영적 군사들의 정신 상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정신 상태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으면 자기가 손에 들고 있는 무기가 아무리 성능이 좋아도 무용지물이 되고 맙니다.
진리에 대하여 목청을 높이지만, 자기는 진리대로 살지 않는 사람이 많습니다. 성경에는 이런 사람들을 “거짓 선지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오늘날에도 “거짓 그리스도인들”이 많습니다. 진리를 가르치고, 진리를 주장합니다. 그러나 자신은 진리대로 살지 않습니다.
진리가 짓밟히는 현장을 보면서도 가슴 아파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온유하고 겸손했고, 자신을 변호(辯護)하는 일에는 침묵으로 일관했던 모세였지만, 우상숭배자에게 대해서 만큼은 분노가 끓어 올랐습니다. 그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했던 주님은 늘 인자하게 사람들을 대하셨지만, 불의의 현장을 보았을 때 주님은 손에 채찍을 들었습니다. 발로 차고 뒤엎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런 모습을 보면서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시편 69:9).”고 한 성경 말씀을 떠올렸다고 했습니다.
우리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진리를 위해서 고난 받기를 두려워하는 것 아닙니까? 멀찌감치 서서 팔장을 낀 채 구경만 하고 있지 않습니까? 방만하고 나태한 삶을 은밀하게 즐기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지 않습니까?
이런 사람들은 몸을 속박하는 허리띠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죄악의 낙을 즐기는 사람들에게 허리띠를 매는 것은 불편하기 짝이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어차피 진군(進軍) 나팔소리가 울려도 나가 싸울 의사가 전혀 없기 때문에, 귀찮게 허리띠를 맬 이유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진리로,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로, 성경의 진리로 신실하게 마음이 무장되어 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영적 군사로서 정신 무장이 된 것입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진리의 허리띠를 매십시오. 이렇게 마음과 정신이 무장된 사람이라야 영적 싸움터에 나갈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라야 기동성(機動性) 있게 전쟁터에서 그리스도도의 신실한 군사로서 사명을 완수할 수 있습니다.
진리이신 말씀에서 멀어지면, 거짓에 속습니다. 사단은 처음부터 거짓말하는 자, 거짓의 아비라고 말씀하십니다.
(요8: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 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금지된 과일을 먹을 때 정녕 죽으리라 하였는데, 사단은 왜곡하여 결코 죽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사단은 이 말을 의심케 교란시킵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일 수 없어."
"하나님은 우주를 주관하는 분일 수 없어."
"나는 죄가 너무 많아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어."
"나의 옛 본성은 변할 수 없어."
"하나님은 이 역경에서 나를 건져낼 수 없어."
"나는 할 수 없어."
"나는 망했어."
“내 인생은 끝장이야.”
그의 교란은 끝이 없습니다. 사단은 지금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해 왔고, 혼미케 해 왔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고 의심하게 만들어 공격의 허점을 노리고 있는 것입니다.
거짓과 싸워 승리하는 비결은 진실입니다. 정직입니다. 진리만이 사단의 공격을 차단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친구 목사의 이쁜 사모가 부목사에게 성추행을 당했습니다.
두 번이나 “영화 보러 가자” 하더니, 마침내 으슥한 방송실에서 팔꿈치를 나꿔챘습니다.
악한 이 놈 부목사가 ‘사모가 먼저 유혹을 했다’고 음해를 했습니다. 착한 목사는 몇 개월을 두고 참으며, 스스로 갈 길을 찾아 내보냈습니다. 문제는 이 부목사의 음해로 목사가 쫓겨난 것입니다. 일이 다 끝난 후에 사모가 마침 녹음한 것이 생각이 나서 그 장면을 틀어보니, 그대로 사실이 다 드러나 있었습니다.
진리의 허리띠를 생명벨트로 착용해야 합니다. 왜 하나님은 진리의 허리띠를 맨 처음 언급하셨을까요?
교회는 진리의 터위에 세워졌고, 진리의 성령께서 통제하시는 영역이기에, 맨 먼저 진리로 삶의 중심을 붙들어 매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진리를 옷 입고 굳게 서야, 모든 거짓된 마귀의 공격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보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진리로 우리의 코드를 삼고, 표준으로 삼고, 나침판으로 삼아 순간 순간마다 살아 가라는 것입니다.
루터는 "술은 강하고, 왕은 더 강하고, 여자는 그 보다 더 강하다. 그러나 진리는 가장 강하다. 진리는 궁지에 몰릴 때도 있고, 진리를 말하는 사람이 화형을 당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러나 진리는 반드시 승리한다."라고 말했습니다.
17년 간 승려 생활을 하다가 목사가 된 "김일규"씨의 간증이 있습니다. 어느 날 시주하러 갔는데 한 청년이 책 한 권을 자루에 넣어 주면서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이니 한번 읽어 보고 예수를 믿으시오"라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불쾌하게 느꼈지만, 호기심에 그 성경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다섯 번을 통독하는 동안 성경이 불경과 다르다는 4가지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① 속죄의 가르침,
② 예수님이 무덤에서 살아 나셨다는 것
③ 예수님은 속세와 함께 하셨다는 것
④ 예수만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것
이러한 진리의 사실을 깨닫고, 절에서 나와서 신학교를 가서 신학을 했다는 것입니다. 우리 동역자 김새천 원장도 같은 분입니다. 그는 기도하다가 성령을 받았습니다. 사모님의 이름이 양성령입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을 진리의 허리띠로 취하여 마음의 허리를 동이면, 밤낮 참소하며 거짓말로 우리를 미혹하는 사단 마귀를 넉넉히 이기고 승리하게 될 것을 믿습니다.
기록된 진리의 말씀, 말씀이 육신 되신 예수 그리스도, 매일 선포되는 생명의 말씀으로 진리의 허리띠로 착용하면 그 능력으로 강한 군사로 악한 날에 마귀를 대적하고 굳게 서서 승리의 노래를 부르게 될 것입니다.
통성기도:
2.의의 호심경:
“의의 흉배”라는 말을 생각할 때, 구약 성경에서 읽었던 “의의 호심경(護心鏡)”이라는 말이 떠오릅니다. 이 말은 이사야 59:17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의로 호심경을 삼으시며, 구원을 그 머리에 써서 투구를 삼으시고 보수로 속옷을 삼으시며 열심을 입어 겉옷을 삼으시고……”
이 말씀은 자기 백성 이스라엘의 불법과 죄악을 기뻐하지 않으신 하나님께서 친히 자기 백성들의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서 머리에 투구를 쓰시고, 의로 호심경을 삼으시고, 거짓과 불법을 뿌리 뽑겠다는 결심을 속옷으로 입으시고, 반드시 그렇게 하시겠다는 열심을 겉옷으로 입으시고 나섰다는 것입니다.
“호심경”이라는 것이 “the breastplate(가슴받이)” 이거든요. 치명적인 부상으로부터 가슴을 보호하는 것입니다. 당시의 로마 군인들은 놋쇠로 만들거나 다른 금속으로 된 가느다란 사슬 같은 것을 엮어서 만든 흉배(胸背)를 붙여서 심장을 보호했습니다.
마찬가지로 바울은 영적 싸움에 나가는 그리스도의 군사들도 “의의 흉배”를 붙여야 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진리의 허리띠”와 마찬가지로 영적 전쟁에 나가는 그리스도의 군사들의 마음이 무엇으로 가득차야 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성경은 ‘의의 흉배’를 붙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군사들의 마음이 “의(義, righteousness)”로 가득 차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군사들의 가슴이 “의”로 불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군사들은 하나님의 의를 위하여 싸우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하여 싸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쉽게 풀어서 말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셔서 이루신 예수님의 속죄와 구원의 의를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기뻐하십니까?
성경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나와 있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로마서 12:2에도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결론은 하나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예수를 믿어 구원을 받기를 원하십니다(디모데전서 2:4).
그러면, 어떻게 하면 우리의 가슴이 하나님의 의로 불타 오를 수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의에 대한 막연한 환상(幻想)을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의는 결코 감상적(感傷的)인 우리의 느낌으로 채워지지 않습니다. 먼저 우리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힘써서 추구해야 합니다. 그 때 우리 가슴은 하나님의 의로 가득 차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반대로, 하나님께서 무엇을 싫어하시는지 생각해 보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분명해집니다. 하나님은 죄를 싫어하십니다. 하나님은 본질상 거룩하시고 성결하신 분입니다. 그 분은 죄하고는 상극(相剋)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영적 군사로 살기를 소원하는 사람들은 죄의 문제를 제일 먼저 해결해야 합니다.
오래 전 모스크바에서 스탈린 비밀경찰의 눈을 피해 40년 땅굴살이를 한 사람이 나타나 화제가 됐었습니다. 일본군이 괌을 점거했을 때, 미군 투위드 상사가 한 섬소년의 도움으로 땅굴생활을 하다 생환하더니, 그 괌에는 밀림에서 전쟁이 끝난 지도 모르고, 28년 간 땅굴살이 하다가 생환한 요꼬이라는 일본병사도 있었습니다.
과거에 받은 상처, 과거에 당한 수치, 과거의 든 멍, 과거에 한 맺힌 원통함, 과거의 실패의 경험 과거의 어떤 죄를 범한 때에 대한 죄책감으로 초점을 맞추면 우리는 과거의 사람이 되어 마음에 쓰레기를 쌓아 두는 것입니다.
죄의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하면서도 완전히 해결되지 않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아직도 예전 생활을 청산하지 못한 그리스도인들이 많습니다. 성경은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에베소서 4:22-24).”고 합니다.
구습(舊習)이 무엇입니까? 예수님 믿기 전에 가졌던 예전의 나쁜 습관들 아닙니까?
이 문제 해결되지 않으면 결코 우리의 가슴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으로 채워지지 않습니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수많은 우상(偶像)들을 섬기면서 사는 것입니다.
우상이 무엇입니까? 성경에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골로새서 3:5).”고 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탐심(貪心,covetousness,kʌ́vitəs)이라는 말은 그것을 소유하고 싶어서 갈망(渴望)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이렇게 갈망하는 것이 있습니까?
그것이 무엇이든지 우상숭배가 될 가능성이 짙습니다. 하나님은 우상숭배에 대해서는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십니다. 우상이라는 말만 나오면 하나님 몸에 두드러기가 돋습니다. 보세요. “나는 여호와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이사야 42:8).” 그 마음 속에 하나님이 이렇게 싫어 하시는 수많은 우상들이 앉아 있는데, 어떻게 그 가슴이 하나님의 의로 채워질 수 있습니까?
루터는 로마에 있는 '스칼라 산타'라고 하는 성당에 갔었답니다. 지금 같이 교통이 편리할 때가 아닙니다. 로마에 한 번 간다는 건 일생의 한 번 큰 순례의 길입니다. 가서 '산타 스칼라'라고 하는 이 성당에 들어가서 거기에 예수님께서 빌라도 앞에서 재판 받으실 때에 올라가셨다고 하는 그 계단이 있습니다. 28 계단이 있는 그 나무로 된 계단, 그것을 콘스탄친 대제의 어머니, 헬레나가 믿음이 좋아서 이것을 뜯어다가 로마에 갖다 놓고 이 스칼라 산타 성당 안에다가 딱 갔다 놓았습니다. 2000년 된 계단이 말입니다.
많은 사람이 이 계단을 소중하게 여깁니다. “이 계단을 무릎으로 기어 오르내리면 죄사함 받는다, 심지어는 연옥에 있는 죄인도 여기서 기도하면 구원을 받는다.”라고 그렇게 당시에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이제 루터는 이 계단을 무릎으로 기어오르면서 계단마다 입을 맞추면서 계단마다 올라가며 주기도문을 외우면서 계속해서 올라갑니다. 다 올라가서 보니 아무 해결될 것도 없어요.
그 때에 마치 큰 불빛을 보는 것처럼 어떤 전광 같은 말씀이 귀에 들려 왔다는 겁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이지, 이까짓 것 무릎으로 기어오른다고 죄사함 받는 게 아니라는 것이죠. 여기서 소중한 것을 깨닫게 됩니다. 오직 믿음으로, 오직 은혜로, 오직 긍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길이 우리가 의롭게 살 수 있고,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이라 하는 겁니다.
'칭의(Justification)', 의롭다 함을 얻는다 하는 이 자체, 이 중요한 교리를 그는 발견하게 되고 벌떡 일어나서 신앙을 조정하게 되고, 마침내 종교 개혁을 단행하는 엄청난 역사를 이루게 됩니다.
의의 흉배를 붙여야 합니다. 사단은 고발자로서 우리 죄를 기억하도록 하여 우리를 공격합니다. 우리가 그 분의 의를 전가(imputed righteousness)받고 우리 것으로 삼게 됨은 바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서입니다. 죄인이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날 때 바로 그리스도의 의가 그에게 전가되어 의롭다함을 받게 된 것으로 변하지 않습니다. 이 때 우리의 불완전한 인격 생활은 별개의 문제인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에 순종하고 성령께 굴복할 때 우리의 삶은 변합니다.
거듭난 성도가 그리스도와 동행하고 성령께 굴복하여 살아갈 때 그리스도의 의가 그에게 분여(imparted righteousness) 되고, 그는 더욱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매일 매일 삶을 살면서 공급되는 성화(sanctification)를 말합니다.
또 하나님은 경건한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성경에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디모데전서 4:7).”고 했습니다. 경건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닮는 것입니다. 날마다 하나님을 닮아가는 훈련을 게을리하지 않는 사람을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바리새인같이 경건의 외적 모습에 힘쓰라는 것이 아닙니다. 조용히 우리의 속사람이 하나님을 기뻐하고, 하나님을 즐거워 하고, 하나님으로 만족하면서 그 분을 닮아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누구를 죽도록 사랑해 본 적 있습니까? 죽도록 좋아해 본 적 있습니까?
사랑하면 그 사람이 좋아하는 것을 나도 좋아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닮아가는 사람은 어느 새 하나님이 좋아하는 것을 나도 좋아하게 됩니다.
이런 사람이라야 하나님의 의를 사랑하게 됩니다. 이런 사람이라야 하나님이 기뻐하신 것을 같이 기뻐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이라야 하나님의 의로 가슴이 불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일은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영혼 구원의 기쁨에 대하여 예수님은 여러 번 말씀하셨습니다.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누가복음 15:7).”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누가복음 15:10).” 죄인 하나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을 하나님도, 하나님의 사자들도, 하늘의 천사들도 모두 축하하고 기뻐합니다.
여러분에게 “인생은 즐기는 거야. 왜 그 즐거움을 포기하려고 하는 거야?” 이런 사탄의 음성이 들려 올 때는 단호하게 거절하십시오. 우리의 가슴이 하나님의 의로 채워질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전에 맛보지 못한 기쁨을 주십니다. 제가 “쉬려고 하지 말라, 즐기려고 하지 말라, 육신의 것들을 다 누리려고 하지 말라”고 여러번 설교했습니다.
하나님의 의를 사랑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비장하고 엄숙한 얼굴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니라 기쁨의 얼굴로 살아갑니다. 이 기쁨은 예전에 우리가 알던 그런 기쁨이 아니라 “주 안에서” 누리는 기쁨입니다.
여러분, 이런 기쁨을 맛보셨습니까?
바로 이 기쁨이 예수님께서 가지고 계셨던 기쁨(요한복음 15:11)이고, 바울이 감옥에서도 가지고 있었던 기쁨이고(빌립보서 4:4), 제가 주 안에서 누리고 있는 기쁨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일에 헌신하는 모든 주의 사역자들이 누리고 있는 기쁨입니다.
이제 여러분의 가슴을 보십시오. 크고 작은 수 많은 상처의 흔적들이 있습니다. 가슴에 웬 상처들입니까? 의의 흉배를 붙이지 않았더니, 사탄은 그 틈을 정확하게 노리고 그렇게 상처를 낸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의 가슴에 의의 흉배를 붙이십시오. 하나님의 의로 여러분의 가슴이 붙타게 하십시오. 하나님이 기뻐하는 것으로 여러분의 가슴을 채우십시오. 하나님의 의를 이루고자 하는 뜨거운 열망이 여러분 속에서 불타게 하십시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영적인 군사들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이루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사탄이 점령한 적지(敵地)를 탈환하고 그 자리에 하나님의 의의 깃발을 꽂으십시오.
통성기도:
3.평안의 복음의 신발:
신발은 더 말할 것도 없이 발을 보호하기 위해 신는 것입니다. 군인에게 군화(軍靴)는 필수적인 장비입니다. 공사판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도 “작업화(work shoes)”는 필수적입니다. 공사판에서 부주의로 삐죽 나온 못을 밟을 수도 있고, 무거운 것이 떨어져서 발들을 찍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치명적인 부상을 입게 됩니다. 제가 학교 다닐 때만 해도 중고등학교 학생들이 무거운 “워커(walker)”를 신은 학생들이 많았습니다. 여름철에도 “워커”를 신었습니다. 주로 미군부대나 군 부대에서 나온 것들이었습니다. 학교에서도 신사화는 허용이 안되는데 “워커”는 허용이 되었습니다. 왜 그런지 그 이유를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 “워커”는 그렇게 비싸지도 않고, 한번 사면 오래 신으니까 경제적이라고 생각되어서 그랬는지 모르겠습니다.
또 등산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들에게도 신발이 필수적이라고 합니다. 전문 산악인들은 등반 하고자 하는 코스의 특성에 따라서 적어도 6개월 전에 신발을 제작한다고 합니다. 이런 신발은 프랑스에서 만든 것을 제일 알아 주는데, 신발 한 켤레에 몇 백만원씩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에서는 마이클 존슨(Michael Johnson)이 단연 올림픽 영웅으로 떠올랐습니다. 존슨은 200m 경기에 103번 출전해서 88차례 우승을 거둔 경이적인 기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틀랜타 올림픽에서도 존슨은 19초 32라는 경이적인 세계 신기록을 수립했습니다. 그 때 마이클 존슨은 특수 제작한 금빛 찬란한 “골드 슈즈(gold shoes)”를 신고 나와서 더욱 화제가 되었습니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는 더욱 업그레이드 된 신발을 신고 나왔습니다. 나이키에서 만든 이 “골드 슈즈”는 무게가 138g 밖에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신발끈도 공기의 저항을 줄이도록 첨단 디자인을 했고, 존슨의 달리는 스타일에 맞춰 뒷굽에는 스파이크를 제거했고, 바닥에는 딱딱한 밑창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나이키 측의 설명에 의하면 황금 신발로 200m에서 100분의 1초를 줄여 주는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또 시드니 올림픽에서 여자 육상 사상 처음으로 5관 왕에 도전했던 매리언 존스(Marion Jones)라는 여자 육상 선수는 100m와 200m 신발을 따로 제작한 것으로 알려져 화제가 되었습니다.
전쟁터에서 싸우는 군인들에게도 그렇고, 공사판에서 일하는 일꾼들에게도 그렇고, 높은 산을 오르는 산악인들에게도 그렇고, 달리기를 하는 운동 선수들에게도 신발은 필수적입니다. 그들의 임무를 효과적으로 수행하는데 신발이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영적 무장에서는 어떻습니까?
신기하게도 영적 싸움터에 나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신발이 중요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 15절에 보니까 “평안의 복음으로 예비한 것으로 신고……” 라고 했습니다. 무슨 말인지 알 것 같기도 하면서도, 자꾸 생각해 보면 그 뜻이 애매하기도 합니다. 헬라어 성경 원문을 직역(直譯)하면, “그 평안의 복음의 준비로 너희 발들에 신을 신기우고……” 이런 뜻이 됩니다.
샬롬은 인간의 정치적, 군사적 노력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샬롬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보세요.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로마서 5:1).”라고 했습니다.
샬롬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얻은 사람들에게 주어집니다. 샬롬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샬롬을 말씀하셨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한복음 14:27).”
우리는 믿음생활을 통해서 예수님의 이 말씀을 조금씩 깨닫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평안이 세상에서 얻는 평안과 확실히 다르다는 것을 조금씩 알아가고 있습니다. 그렇습니까? 찬송가 469장 가사가 그렇습니다.
“내 맘 속에 솟아난 이 평화는 깊이 묻히인 보배로다.
나의 보화를 캐내어 가져갈 자 그 누구랴 안심일세(3절).
이 땅위에 험한 길 가는 동안 참된 평화가 어디 있나?
우리 모두 다 예수를 친구 삼아 참 평화를 누리겠네(4절).
평화, 평화로다. 하늘 위에서 내려 오네.
그 사랑의 물결이 영원토록 내 영혼을 덮으소서 (후렴).”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으라”는 말씀은 무슨 뜻이겠습니까?
운동선수에게 신발은 기록을 단축할 수 있는 필수적인 장비가 되고, 군인에게 신발은 어떤 험한 지역이라도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필수적인 장비가 되는 것처럼,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신발은 평안의 복음을 가지고 기꺼이 세상으로 나갈 수 있는 준비성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 “준비성(準備性)”이라는 말을 KJV에서는 “preparation”이라고 했고, NIV 성경에서는 “readiness”라고 했습니다. “readiness”라는 말은 교육학에서도 잘 쓰는 말입니다. 학습자가 공부를 할 수 있는 준비성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학습자에게 “readiness”가 없으면, 효과적으로 학습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유능한 교사는 학생들의 준비성에 주목합니다.
이런 사실을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 적용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평화의 복음을 전파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는 사람에게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태복음 28:19-20)”고 하신 그리스도의 지상 명령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사도행전 1:8)”고 하신 말씀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말씀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고, 사명을 수행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아무 소용 없는 것입니다. 마치 공부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학생처럼,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도 “readiness”라는 것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그러나 준비가 되어 있는 학생은 쉽게 배우는 것처럼, 준비가 된 그리스도인은 억지로, 마지 못해서가 아닙니다. 즐거움으로 자기 사명을 감당하게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어디 복음을 전하는 일이 간단한 일입니까? 쉽게 말해서 전도하는 일이 그렇게 쉬운 일입니까? 매일 부딪치는 옆 집에 사는 그 아주머니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일이 쉬운 일입니까? 친구들에게는 어떻습니까? 가족에게는 어떻습니까? 믿지 않는 부모님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은 어떻습니까?
어렵습니다. 쉽지 않습니다. 하물며 타문화권 속에 사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이 쉬운 일이겠습니까? 기독교에 대하여 적대감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이 쉬운 일이겠습니까? 언어의 장벽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어떻습니까? 타 종교를 믿는 사람들에게는 어떻습니까?
복음을 전하다가 거절(拒絶) 당하는 경우는 어떻습니까? 바울도 그런 참담한 경험을 했습니다. “주여! 우리의 전하는 바를 누가 믿었나이까(로마서 10:16)?” 바울은 이 말씀을 이사야 53:1에서 인용했습니다. 이사야도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백성들에게 전하면서 거절 당했습니다. 말씀을 전해도 듣지 않고 귀를 막습니다. 바울도 같은 경험을 했습니다. 그럴 때 겪는 참담한 심정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이렇게 위로하셨습니다. “그들이 너희를 거절한 것이 아니라, 나를 거절한 것이다.”
전도하다가 절대 낙담하지 말 일입니다.
게다가 복음의 일꾼들이 겪는 신체적인 고난은 또 어떻습니까?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 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린도후서 11:26).”
그렇습니다. 선교는 예수님의 지상 명령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들에게 무조건 돌격 명령을 내린다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두려움으로 사기가 떨어질 것입니다. 이탈(離脫)하는 사람들이 나올 것입니다. 그러나 준비된 그리스도인들에게 선교는 기쁨으로 감당해야 하는 거룩한 의무가 됩니다.
윌리암 거널(William Gurnall)은 그리스도인들의 준비성에 대하여 몇 가지 중요한 권고를 했습니다. 첫째로,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순종이 신실한지 늘 점검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주님을 위한 헌신하겠다는 건전한 동기(動機)를 가지고 있는지 점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순종하지 않는 자는 반대합니다. 낙담합니다. 불평, 불만, 원망합니다.
둘째로, 그리스도를 위해 즐겁게 고난을 받을 수 있는 영(spirit)을 주시도록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셋째로, 그리스도의 고난을 묵상(默想)하라고 했습니다.
넷째로, 매일 하나님께 자신을 의탁하라고 했습니다.
다섯째로, 그리스도를 본받아 자기를 부인(否認)하는 법을 배우라고 했습니다.
여섯째로, 세상적인 욕망을 버리라고 했습니다.
이번에 새성교회 3분의 목사들이 해외선교를 다녀 왔습니다.
앞으로 우리가 행하는 선교는 지금까지 해 왔던 선교와는 근본적으로 그 성격이 다릅니다. 우선 우리가 한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회교권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 동안 만나 경험을 쌓았던 동남아나, 탈북자들이나, 조선족들은 무신론자들이었거나 아니면 공산당 사상으로 무장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사정이 다릅니다. 이제는 회교를 믿는 무슬림들에게 가는 것입니다. 그것도 기독교를 공적(公的)으로 전파하는 것이 법으로 금지(禁止)된 지역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극복할 수 없는 언어의 장벽을 무릅쓰고, 회교권으로 갑니다. 상식적으로 보면 말도 안되는 무지(無知)한 도전을 하는 것입니다. 선교를 나간 사람들이 짧은 기간 동안 말을 배울 수도 없습니다. 물론 영어를 쓸 수도 없습니다. 과거에는 우리가 그들에게 줄 선물도 많이 가져 갔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보여 줄 많은 것들을 준비해서 갔습니다. 그러나 올해 이후에는 그런 모든 것들이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욱 절실하게 하나님을 의지할 수 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선교를 나가는 사람들의 손에 예수 그리스도의 “평안의 복음”만을 들려 주십니다. 회교권 사람들, 그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어야 한다고 말씀하시면서 “나의 평안의 복음”만을 들고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단기선교사로 헌신하실 여러분들에게 말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하는 삶에 대한 아름다움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로마서 10:15)!”
단기선교사로 헌신할 여러분들의 발은 세상의 어느 발보다도 귀하고 아름답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회교권 사람들의 영혼을 향해서 나아가는 여러분의 그 발걸음을 통해서 그 곳의 영혼들이 “평안의 복음”을 들을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헌신을 기쁘게 받으시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발걸음을 축복하시기를 원합니다.
세계 지도를 펴고, 10/40 윈도우를 그려 보세요. 북위 10도에서 40도에 이르는 창을 그려 보세요. 우리 시대의 마지막 선교의 전략지대, 전 세계의 모든 교회들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연합해서 집중적으로 선교해야 한다는 그 선교의 전략 지역으로 여러분은 들어 가는 것입니다.
생각만 해도 흥분되지 않습니까? 생각만 해도 가슴이 설레지 않습니까?
남은 기간 동안 하나님과의 교제에 힘쓰십시오.
윌리암 거널의 권면처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여러분의 모든 것을 점검하십시오. 동기를 깨끗하게 하십시오. 그리스도의 고난을 묵상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선교는 세상 어떤 것보다도 귀하고 가치 있는 일인 것을 확신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헌신을 받으시고 귀한 열매를 맺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통성기도:
4.믿음의 방패:
오늘 말씀에는 믿음의 방패에 대하여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火戰)을 소멸(消滅)하고…… In addition to all this, take up the shield of faith, with which you can extinguish all the flaming arrows of the evil one.,)”
군인이 아무리 허리띠를 띠고, 가슴에 흉배를 붙이고, 군화를 신었다고 할지라도, 손에 방패를 들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나와 있습니다. “그 악한 자”가 쏘아대는 불화살을 막아내기 위해서는 방패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도의 ‘불평’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아십니까?
영어의 “complain”이라는 단어는 오늘날 현대인들이 가장 많이 쓰는 말 중의 하나입니다. 조그만 애들도 complain합니다. 엄마 아빠에게 complain합니다. 학교의 선생님에게 complain합니다. 부모가 자기에게 해 주는 일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성도의 불평도 그런 것입니다. 말로는 하나님께서 세계를 주관하시고, 자기 인생을 주관하신다고 하면서 불평합니다. 성도의 불평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왜 우리를 애굽에서 데리고 나왔느냐?”고 불평합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가나안 땅으로 돌려 보내시는 구원의 계획을 전면적으로 거부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성경 말씀에 뭐라고 했습니까?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돌이켜 감사하는 말을 하라(에베소서 5:4).” 또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평강을 위하여 너희가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또한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골로새서 3:15-17).”
성도는 불평의 말 대신, 감사의 말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위하여 하신 일을 불평함으로써 거부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불뱀”을 보내셨습니다.
“사탄이 성도에게 화살을 쏜다”는 성경의 표현은 아주 적합한 표현입니다. 활은 멀리서 쏩니다. 그래서 누가 쏘는지 방향도 알 수 없고, 누가 쏘는지 쏘는 사람의 정체(正體)를 알 수 없습니다. 사탄이 성도를 공격하는 방법이 꼭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가 영적 싸움에서 부딪치는 문제들을 실로 다양합니다. 갑자기 믿음 생활에 의심이 들기도 하고, 사람들에게 걸려 넘어져서 상처를 받기도 하고, 유혹에 빠지기도 하고, 환경을 이기지 못해서 쓰러지기도 하고, 불평을 하다가 믿음이 떨어지기도 합니다. 이럴 때 성도들은 “왜 나에게 이런 일이?” 하면서 당황하면서 어쩔 줄 몰라 합니다. 그 문제의 원인을 모르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자기 믿음이 전과 같지 않고 침체되어도 그 원인을 모릅니다. 그 사람이 그렇게 미워지고 싫어져도 그 이유를 알 수 없습니다.
그 중에 ‘의심’은 무서운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의심’이 들거든 오늘 설교 말씀을 꼭 기억하십시오. 지금까지 믿어 오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의심, 그리고 하나님의 존재(存在)에 대한 의심이 들 때 성도는 경계(警戒)해야 합니다.
“도대체 하나님이 계시긴 계신 거야? 그렇다면 왜 이런 일이? 왜 이런 일이 하필 나에게?” 이런 의심이 들 때 성도는 조심해야 합니다. 믿음생활에서 오는 의심의 기원(起源)은 사탄입니다. 사탄이 성도에게 숨어서 불화살을 쏘아대는 것을 성도들을 모릅니다.
‘유혹’도 무서운 것입니다. 인간의 본성(本性)은 악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인간의 죄된 본성을 말할 때 늘 “마음의 정욕(evil desire, 情慾)에 빠져 살았다(로마서 1:24)”고 합니다. 자기 본성이 이끄는대로 산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죄된 본성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추구하기 보다는 자기의 정욕대로 살기를 더 좋아합니다. 성도라도, 여러분과 저라도 예외가 아닙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어디선가 정욕의 화살이 날아오면 치명적인 상처를 입기 십상입니다.
한 때 하나님을 위하여 그토록 헌신했던 사람들이 한 순간에 무너져서 ‘정욕’의 노예가 되어 버린 사람들을 많이 봅니다. 성경에 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나옵니다. 그 중에 데마(Demas)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성경에 이 사람에 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데마는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디모데후서 4:10),”
그렇습니다. ‘데마’라는 청년도 한 때는 바울의 제자가 되어 복음으로 세상을 뒤엎겠다는 뜨거운 열망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분명 ‘데마’는 자기가 사탄의 표적(標的)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탄이 쏘는 정욕의 화살을 맞았을 때, 그는 그 정체를 몰랐을 것입니다.
일단 화살을 맞으면 치료가 어렵습니다. 사탄의 불화살을 맞은 ‘데마’도 화려한 데살로니가의 삶을 그리워하면서 바울 곁을 떠났습니다.
누구나 다 그렇습니다만, 특히 청년의 때는 사탄이 쏘는 정욕의 화살을 맞기 쉽습니다. 사탄은 청년들을 공격의 목표로 삼습니다. 청년들은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 하면서 노래만 부르고 있어서는 안됩니다.
청년들이야말로 사탄의 공격의 대상들입니다. 청년들이 영적으로 강하게 무장되어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일생을 헌신하는 것을 사탄은 죽으면 죽었지 그냥 놔 둘 수가 없습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디모데에게 그렇게 편지를 쓴 것입니다.
“또한 네가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좇으라(Flee the evil desires of youth, and pursue righteousness, faith, love and peace, along with those who call on the Lord out of a pure heart... 디모데후서 2:22).”
예수님의 기도가 아니었으면 벌써 사탄의 밥이 되었을 베드로가, 아니, 이미 사탄의 화살을 맞고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생명이 끊어졌던 베드로가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회복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식었던 가슴은 다시 사명감(使命感)으로 불탔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런 그가 신앙의 박해(迫害)를 받고 숨어 지내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했던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Be self-controlled and alert. Your enemy the devil prowls [praul,찾아헤매다] around like a roaring(rɔ́ːriŋ표효) lion looking for someone to devour [diváuər 먹어치우다]. Resist him, standing firm in the faith... 베드로전서 5:8-9).”
그리스도인의 영적 승리를 위해서 두 가지 중요한 원리를 보여줍니다. 하나는 근신하는(Be self-controlled) 것입니다. 운동선수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먹고 싶다고 마음대로 먹습니까? 쉬고 싶다고 마음대로 쉽니까?
아닙니다. 자기 자신을 self-control해야 합니다. 배부르게 먹고 싶은 마음을 절제(節制)해야 합니다. 마음대로 먹고 마시고 놀고 싶은 유혹을 절제해야 합니다. 일류 선수들은 모두 이렇게 상대방과 싸우기 전에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긴 사람들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사탄의 불화살을 맞아서 정욕이 일어나서 우리를 지배하려고 할 때에, 우리는 그 정욕을 스스로 control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과연 그럴만한 힘이 있을까요?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에는 성령의 열매와 육체의 열매가 나와 있습니다. 육체의 열매는 우리의 삶을 정욕이 지배할 때 나타나는 결과입니다. 음행(淫行), 더러운 것, 우상 숭배, 술수(術數), 원수를 맺는 것, 분쟁(分爭), 시기, 분노(忿怒), 파당(派黨), 분리(分離), 이단(異端), 투기(妬忌), 술 취함, 방탕(放蕩)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우리의 삶을 성령께서 지배하게 될 때에 맺게 되는 열매입니다. 사랑, 희락, 화평, 참음, 자비, 양선(良善, goodness), 충성, 온유, 절제입니다.
성령의 열매 중에 절제가 있습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삶을 다스리시게 되면 이 사람은 자신을 절제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을 절제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우리를 절제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근신하는 삶의 비결은 자기 자신의 힘으로 정욕을 이기려고 애쓰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내 삶을 지배하시도록 자신을 내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의 도움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마귀의 유혹을 피하는 것만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맞서서 대적(對敵)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매우 조심해야 할 전략입니다. 자기에게 그럴만한 충분한 역량(力量)이 갖추어져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전까지는 좀 비겁한 것처럼 보이지만, 바울이 디모데에게 충고했던 것처럼 도망가는 것(flee)이 최상의 방법일 수 있습니다. 요셉이 이 방법을 썼습니다. 보디발의 아내가 성적(性的)으로 요셉을 유혹했습니다. 그 때 요셉은 20대의 피끓는 청년이었습니다. 요셉은 그 자리를 피해서 도망갔습니다. 도망가려는 요셉을 그 여자가 붙잡는 바람에 옷이 벗겨졌습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요셉은 유혹의 현장을 피했습니다. 만약 요셉이 그 현장을 피하지 않고 앉아서 그 유혹을 이기려고 했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사탄이 숨어서 정체를 감추고 쏘아대는 불화살을 막아내는 길은 또 하나의 길은 믿음의 방패를 드는 것입니다. 사탄이 ‘의심’의 화살을 날려 보낼 때, 사탄이 ‘절망’의 화살을 날려 보낼 때, 사탄이 ‘불평’의 화살을 날려 보낼 때, 사탄이 ‘유혹’의 화살을 날려 보낼 때, 믿음의 방패로 막아내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영적 군사들입니다. 수많은 사탄의 불화살이 우리에게 날아들고 있습니다. 화살이 하나 둘이 아니라 “all the flaming arrows”입니다. 화살 하나를 용케 막아냈다고 해서 방심하면 금새 또 하나의 화살이 날아옵니다.
비결이 무엇입니까?
피하는 것입니다(Flee the evil desires).
근신하는 것입니다(Be self-controlled).
사탄과 적극적으로 맞서 싸우는 것입니다(Resist the evil one).
그 외에 가장 확실한 방법은 믿음의 방패를 드는 것입니다(Take up the shield of faith).
이 방패로 사탄이 쏘는 불화살을 소멸시키는 것입니다. 믿음의 방패를 들면 신기하게도 사탄의 공격은 무위(無爲)로 끝나 버립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믿음은 하나님의 능력을 동반(同伴)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세상을 이기게 합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게 합니다. 여러분 주변에 있는 “허다한 증인들”이 이 사실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방패를 들고 사탄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시키십시오. 그리고 영적 싸움의 승리자들이 되어서 “허다한 증인” 중의 한 사람이 되십시오.
1958년 뉴욕의 어느 가정에서 한 아이가 태어났는데 그 아이는 어려서 소아마비를 앓아 다리를 절었고 시력도 좋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천식까지 앓아서 옆에 있는 촛불을 끌힘도 없는 호흡 곤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가까스로 생명을 연장하여 드디어 열한 살이 되던 날 아버지는 이 아이에게 이런 말을 들려 주었습니다.
“아들아 네가 가진 장애는 장애가 아니란다. 네가 만일 전능하신 하나님을 참으로 신뢰하고 믿는다면 그리고 하나님의 도우심이 너와 함께 한다면 오히려 너의 장애 때문에 모든 사람이 너를 주목할 것이고, 너는 진실로 역사의 신화 같은 기적을 남기는 놀라운 삶을 살 수 있단다. 그 후 그는 23세가 되던 해 뉴욕 주를 대표하는 의회의원이 되었고, 28세에 뉴욕시장 선거에 출마하였고, 얼마 후에 뉴욕주지사가 되었고, 부통령을 거쳐 미국 역사의 가장 어두웠던 시절에 미국의 신화를 재건하는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제2차세계대전을 종전시킨 가장 위대한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이 주인공이 1906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던 이 사람은 바로 데오도르 루스벨트 대통령입니다.
이처럼 믿음은 장애를 극복합니다. 믿음은 자기가 처한 환경과 상황을 극복합니다. 믿음은 인간의 한계를 넘게 합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받습니다. 믿음으로 응답받습니다. 믿음으로 천국을 갈 수 있습니다. 믿음은 천국을 여는 마스터키입니다.
오늘 우리의 문제는 믿음의 문제입니다. 이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도 없습니다. (히11:6)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과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바울사도도 영적인 전쟁에서 믿음에 대한 가치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서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엡6:16),”
믿음은 약속의 말씀을 의지로 붙드는 것입니다.
(롬10: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1>.시련에 대한 약속
(벧전1:6-7)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간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7)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욥23:10)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2>.기도 응답의 약속
(롬8:32)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마21:22)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
(요일3:22)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사55:8-9)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9)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3>.보호와 인도의 약속
(사41:10)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4>.시험에 대한 약속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롬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5>.온전케 하심에 대한 약속
(롬5:3-4)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 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4)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약1:3-4)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4)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약속의 말씀을 믿는 그 믿음에는 분명히 소망이 있습니다. 이 소망은 믿음만 잃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분명히 성취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세계 제2차대전 때 독일 콜론의 지하실에는 "나는 태양이 빛을 발하지 않을 때도 그 태양을 믿으며, 나는 사랑을 느끼지 못해도 그 사랑을 믿으며, 하나님이 침묵하고 계실 때도 하나님을 계심을 믿는다."라고 쓴 글이 있었는데 이것은 분명히 어떤 전쟁 포로가 장차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조국으로 무사히 돌아 갈 소망을 버리지 않고 있었음을 말해 주는 글일 것입니다.
(엡6:16)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防牌)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火箭)을 소멸하고,"(웹3:20)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의 온전하신 믿음의 방패로 마귀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통성기도:
5.구원의 투구:
오늘 말씀에 성도는 “구원의 투구를 쓰라.”고 했습니다. 투구는 더 말할 것도 없이 머리를 보호하는 것입니다. 머리는 우리 몸 중에 가장 중요한 곳입니다. 머리를 다치면 그것이 치명적인 부상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전쟁터에 나가는 군인들이 헬멧을 씁니다.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 오토바이를 타는 사람들도 머리에 헬멧을 씁니다. 야구 선수들, 풋볼 선수들도 머리를 보호하기 위해 헬멧을 씁니다.
그렇다면 영적 싸움에 있어서 사탄의 공격으로부터 머리를 보호해야 한다는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그냥 “머리에 투구를 쓰라”고 하지 않고 “구원의 투구를 쓰라”고 했습니다. 물리적인 전쟁이라면 튼튼하게 만든 철모를 쓰면 됩니다. 그러나 영적 싸움에서는 “구원의 투구(the helmet of salvation)”를 써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구원”이라는 말의 의미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구원’에 대한 개념 중에 바로 잡아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첫째로, 우리는 구원을 과거(過去)의 사실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 말에 “구원 받았다”는 말이 주는 뉘앙스가 그렇습니다. 그러나 구원이라는 말 속에는 과거의 죄를 용서받았다는 뜻 뿐만 아니라, 앞으로 죄의 모든 공격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해 준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것은 과거의 사실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그리고 앞으로도 죄를 이겨 나갈 힘을 주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둘째로, 우리는 구원이라는 말의 의미를 너무 좁은 의미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히브리어로 구원을 “야사(yasa)”라고 합니다. “야사”는 위험이나 고통(distress), 적(enemies), 속박(bondage)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 그리이스어로 구원은 “쏘테이리아(σωτηρία)”입니다. “쏘테이리아” 역시 위험으로부터 보존되고, 죽음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특히 신약성경에서는 이 말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죄로부터 구원 받는 의미로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셋째로, 구원이라는 말 속에는 회복(回復)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본래의 완전한 상태로 돌아간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구원이라는 말 속에 “온전(wholeness)” “건전(soundness)” “건강(health)” “치유(healing)” 등의 뜻이 들어 있습니다.
이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하나님은 구원의 선물을 모든 믿는 사람들에게 주셨습니다. 우리는 과거의 죄로부터 용서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 죄의 모든 유혹과 공격을 이겨낼 힘을 받았습니다. 그 뿐만 아닙니다.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은 하나님의 관심과 보호 속에 있습니다. 위험이나 죽음이나 고통이나 우리의 삶을 구속하는 것들이 단순히 우리 혼자 겪는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의 선물을 주셨을 때는 이런 문제들을 넉넉히 이길 수 있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삶은 하나님께서 친히 회복시키십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을 온전하게 하십니다. 건강하게 하십니다. 회복시키시고, 치유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의 선물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이 중요합니다. 이 믿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바울처럼 고난 중에서도 승리의 선언을 합니다. 이 믿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더 이상 인생의 패배자로 사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승리자로 삽니다.
그리스도인의 영적 무장으로 “구원의 투구를 쓰라”는 말은 바로 이런 뜻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구원의 확신으로 무장되어야 합니다. 사탄의 공격은 교묘하기 짝이 없습니다. 교묘하게 우리의 생각을 파고 들어와서 구원의 확신을 흔들어 놓습니다.
그리고 죄의식을 불어 넣습니다. 그것도 아주 논리적인 방법으로 흔들어 놓습니다. 이상하게도 그리스도인들 중에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을 찾아 보기 어려운 것은 왜 그렇습니까?
“목사님, 전에는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했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아닌 것 같습니다!” 그래요. 여러분 중에도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이런 사람들은 구원의 투구를 써야 합니다.
“맞아! 너의 과거의 죄는 용서 받았다고 치자. 그런데 지금 네가 얼마나 죄된 생활을 하고 있는지 네 자신이 잘 알 것이다. 이 죄도 용서를 받았단 말이냐? 어림도 없다.” 사탄은 늘 이렇게 그럴듯한 논리로 성도들의 머리를 공격합니다.
구원을 의심하게 만듭니다. 그릇된 생각을 불어 넣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의심하게 만듭니다. 이렇게 되면 진리의 허리띠가 무슨 소용이 있고, 의의 흉배가 무슨 소용이 있고, 믿음의 방패가 무슨 소용이 있고, 성령의 검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아무 소용 없습니다.
여러분, 이런 생각이 들 때 어떻게 이런 생각을 물리칠 수 있습니까? 구원의 투구를 쓰십시오. 여러분이 받은 구원은 과거의 죄만 용서 받은 것이 아닙니다. 윌리암 버클리 목사님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항상 구원이란 과거를 돌아보는 것 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구원은 단순히 과거의 죄에 대한 용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구원은 모든 미래의 죄의 공격을 이겨낼 수 있는 능력을 말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은 우리에게 과거의 죄에 대한 용서와 미래의 죄를 이길 능력을 준다.
사단은 틈만 있으면 성도들에게 절망하고 낙심하도록 화전을 쏘아댑니다. 세상이 너무나 힘이 들고 고난이 길어지면, 견디기 힘이 들고 낙심하게 되고 절망하게 됩니다. 이 때에 우리 성도가 영적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인내를 이루어가야 합니다.
누가복음 8:15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누가복음 21:19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
로마서 5:3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4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로마서 15:4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위로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로마서 15:5 이제 인내와 위로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데살로니가전서 1:3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데살로니가후서 1:4 그러므로 너희가 견디고 있는 모든 박해와 환난 중에서 너희 인내와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여러 교회에서 우리가 친히 자랑하노라.
데살로니가후서 3:5 주께서 너희 마음을 인도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에 들어가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디모데전서 6:11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며,
디모데후서 3:10 나의 교훈과 행실과 의향과 믿음과 오래 참음과 사랑과 인내와,
디도서 2:2 늙은 남자로는 절제하며 경건하며 신중하며 믿음과 사랑과 인내함에 온전하게 하고,
히브리서 10:36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
히브리서 12:1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야고보서 1:3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야고보서 1:4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야고보서 5:11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
베드로후서 1:6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요한계시록 2:2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요한계시록 2:19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요한계시록 3:10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요한계시록 13:10 사로잡힐 자는 사로잡혀 갈 것이요, 칼에 죽을 자는 마땅히 칼에 죽을 것이니,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
요한계시록 14:12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어떻게 구원 받은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까?
A.말씀에 근거하여
(막16:16)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롬10:1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요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요일5:12-13)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13)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요1:12-13)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B.성령의 내적 증거
(롬8:16)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겔36:27)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찌라."
주 예수를 믿고 영접할 때 그 분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는데, 그 분의 영을 우리 영안에 넣어 주십니다. 이 성령은 우리 안에 영원히 함께 하십니다.
(요14:17)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롬8: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C.생명의 체험에 근거하여
(요일5:1)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니, 또한 내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
(요일4:16)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요일3:14)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
(요10:28-29)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29)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이래서 우리는 구원의 세 단계를 거치게 됩니다.
초기단계/영이 구원받는 단계입니다.
하나님은 먼저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객관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십자가위에서 죽으심으로 생영 주는 영으로 그 분은 우리 영 안에 우리를 거듭나게 하십니다. 이러한 단계는 구속과 죄사함과 깨끗케 함과 의롭게 함과 화목을 표합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남의 단계입니다.
전진단계/우리 혼안에서 우리를 구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거듭나서 우리의 영안에 계신다 할찌라도 우리의 혼은 여전히 사탄의 본성으로 충만합니다. 우리는 악한 생각을 하고 거짓말을 하고 다른 사람을 미워하고 질투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미워하는 것을 행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미워합니다.
이 단계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악한 혼을 다루십니다. 거듭남은 다만 우리의 영안에 그리스도를 분배한 것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그리스도가 확장되어야 합니다. 그 분 앞에 우리 자신을 열고 기도하며 우리의 죄를 자백함으로, 그 분이 확장됩니다. 이러한 분배하심이 우리의 거룩함입니다. 그 분은 우리의 영으로부터 우리의 혼 안으로 거룩한 본성을 집어넣는 것입니다.
동시에 옛사람으로부터 새사람으로, 사탄적인 생명이 충만한 데서 하나님의 충만한 존재로 변화해 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화’라고 말합니다.
완성단계/우리의 몸이 변형됩니다.
우리의 몸이 주의 영광의 몸으로 변형됩니다. 영화의 단계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왕노릇 합니다. 하나님을 표현하고 대표합니다. 신의 성품에 이르러, 하나님의 생각하는 방식으로 생각하며,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것을 사랑하며, 우리의 의지는 하나님이 선택한 것을 선택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 하나님의 생명으로 충만할 것이며, 영원히 하나님을 표현할 것입니다.
‘영화’의 단계는 우리를 하나님의 표현 안으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행동입니다. 이 영광은 우리 안에서부터 밖으로 나옵니다. 먼저 이 씨는 우리 영안으로 뿌려집니다. 그리고 나서 그것은 혼의 모든 부분으로 자라납니다. 물질적인 모든 부분까지 채우고 흠뻑 적셔서, 우리를 주님의 형상으로 만들어 가십니다.
그리스도를 진리의 띠로, 의의 흉배로, 평안의 신으로, 방패로, 구원의 투구로 취하여, 모든 악한 자의 화전을 소멸하고, 날마다 승리하시는 성도들 되기를 소망합니다.
통성기도:
6.성령의 검, 하나님의 말씀:
우리의 삶 가운데 전신갑주를 확인하시기를 바랍니다.
진리의 허리띠를 띠었나요?
우리의 삶이 부산하고 너저분한 것은 허리띠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진리의 띠로 두르면 용동하지 않는 신앙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가슴엔 의의 흉배를 붙였나요?
우리의 감정의 자리에 주의 의의 피의 덮개를 덮고, 모든 마귀의 화전을 막아야 합니다.
여러분의 발은 평안의 복음의 신을 착용하고 있습니까?
평안을 유지해야 정서와 이성이 말을 듣습니다. 우리의 평안을 깨는 것들이 무엇입니까?
분노, 미움, 시기, 다툼, 염려 근심에서 십자가를 통한 세상이 주는 것과 다른 환경과 조건에 관계없는 진정한 평안을 누려야 합니다.
이 모든 일에 믿음의 방패를 소유해야 합니다.
믿음은 그리스도를 온전히 신뢰하는 것이고, 그 분의 약속의 말씀을 붙드는 일입니다.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질 때 모든 악한 자의 화전을 소멸할 수 있습니다.
구원의 투구를 취해야 합니다.
구원은 그리스도 자신을 취하는 것입니다. 마귀는 우리의 구원을 의심케 합니다. 우리 전체가 보호되고 우리의 분깃인 구원을 확신하고 난 때에야 성령의 검을 사용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고 말씀합니다. (엡6:17)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전신갑주가 방어용이었으나, 검은 공격무기인 것입니다. 성령의 검은 하나님 말씀이며, 성령의 검 하나님의 말씀 그 둘 다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성령의 검’이라고 했습니다. 성령은 ‘검 자체’이며, ‘하나님의 말씀’이 또한 검이란 말입니다. 검은 성령이며, 성령은 말씀과 함께 임하며 역사합니다. 우리는 검과 성령과 말씀을 가졌습니다.
성경에 항상 있는 말씀인 로고스가 직접적인 레마가 될 때, 이 레마는 성령의 능력이 될 것입니다.“종말로 너희가 주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이 능력의 검이 말씀인 것입니다. 말씀이 성령의 검으로 이 레마는 대적을 산산 조각내 버리는 검이 됩니다. (요6: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그래서 말씀과 성령은 하나입니다. 말씀을 갖지 않고 성령을 갖는다는 말은 틀리기 때문인 것입니다. 말씀을 취하지 않고서는, 성령을 가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내가 살아 있는 방법으로 말씀을 접촉할 때 그 말씀은 내게 그 영이 됩니다. 주 예수님은 ‘그 영’이신 동시에 ‘말씀’이십니다. 그 분은 말씀 없는 성령님이 아니요, 성령 없는 말씀도 아닙니다. 성령은 말씀 안에서, 말씀에 의해서, 말씀을 통하여, 말씀과 함께 역사한다는 말입니다.
말씀을 대할 때 생각과 우리 영을 모두 사용해야 합니다. 읽음으로써 생각을 사용하고, 기도함으로써 우리의 영을 모두 사용해야 합니다.
베드로전서2:2(벧전2:2) "갓난 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말씀은 갓난아이에게 있어 젖과 같이 중요합니다. 갓난아이에게 있어 젖은 생명과 같고 성장함에 필수적인 영양분입니다.
예레미야는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 먹었사오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먹으면 마음의 기쁨과 즐거움이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음식임으로 우리의 자양분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영으로 말씀을 만지고 접촉해야 하는 것입니다.
(히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말씀은 좌우에 날선 검으로 관절과 골수는 물론, 보이지 않는 영혼을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생각과 뜻을 감찰합니다. 혼과 영을 쪼개는 말씀입니다. 영은 혼 안에 깊은 곳에 있습니다. 관절과 골수를 쪼개려면 주로 관절을 깨뜨려야 합니다. 같은 원칙으로 영과 혼을 나누기 위하여서는 혼을 깨뜨리는 일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혼은 우리의 자신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혼인 ‘자기 자신’을 부인하여야 합니다. 영과 혼이 나누어지지 않는 사람들은 사단이 진을 칩니다. 우리의 옛본성이 혼 안에 있습니다. 옛뱀의 속성이 혼 안에 주입되어 있기에, 영에 속한 그리스도 안이냐 육에 속한 그리스도인이냐는 말씀의 검으로 영적인 것과 혼적인 것을 쪼개야 합니다.
(딤후3:16-17)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성령의 검-영적 공격무기
(렘23:29)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말이 불 같지 아니하냐? 반석을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 같지 아니하냐?"
어떻게 말씀의 검을 잘 사용할 수 있습니까?
성경은 기록된 말씀(written word)/ 태초에 계신 말씀,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살아있는 말씀을 날마다 먹는 것입니다.
말씀을 읽고, 듣고, 공부하고, 암송하고, 묵상하는 다섯 가지의 말씀을 먹는 방법을 잘 사용해야 합니다. 말씀을 심령에 가득 채우고, 말씀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자에게는 성령께서 늘 말씀으로 검을 삼아 사단의 진을 파하는 강력히 되는 것입니다.
마귀는 우리의 생각 속에, 마음속에, 의지 속에 불화살을 쏘아댑니다. 의심, 두려움, 염려, 근심, 불안, 외로움의 마음과 생각을 불어 넣습니다. 그럴 때 성령의 검인 말씀을 붙들고, 그 말씀 안에 내 생각과 마음을 올려 놓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십자가를 통하여 이루어 놓으신 마귀의 일을 멸하고 승리하신 그 위치에 서는 것입니다. 이것이 말씀의 검, 성령의 검으로 마귀를 물리치는 것입니다.
(엡6:13)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감리교 창시자였던 요한 웨슬레는 “나로 하여금 한 책의 사람이 되게 하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그가 말한 “한 책”이 무슨 책이겠습니까? 성경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힌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령의 검을 든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디모데후서 3:15-17).”
사탄이 두려워 하는 것은 우리가 순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소유하는 것입니다. 마귀는 할 수만 있다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사고속에 잘못된 생각을 집어 넣어서, 우리의 영혼이 순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대면(對面)하지 못하게 합니다. 마귀가 두려워하는 것은 결코 우리 속에 있는 어떤 개인적인 확신이나 신념이 아닙니다. 어떤 사상이나 삶의 태도도 아닙니다. 마귀가 진정 두려워하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순전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마귀는 어떻게 하든지 순전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물을 섞으려고 합니다.
이 시대의 크리스찬들은 마귀의 이런 궤계를 알아야 합니다. 인본주의가 뭡니까? 다원주의가 뭡니까?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구속의 은총을 약화시키고, 성경의 권위를 약화시키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설교자들이 이런 사상에 놀아나다니요? 말도 안됩니다.
혼잡한 말씀을 내려놓고 순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손에 드십시오. 이 순전한 하나님의 말씀이 성령의 검이 되어 역사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 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히브리서 4:12-13).”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하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이니이다(9절).”
성령의 검은 순전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의 검으로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에 숨은 것들을 그 분 앞에 드러 내십시오. 그 말씀으로 여러분의 행실을 깨끗하게 하십시오. 그 말씀으로 살아 가십시오. 이런 예수 그리스도의 영적 군사만이 마귀의 궤계를 능히 물리치고, 승리의 깃발을 꽂을 수 있습니다.
통성기도:
7.모든 기도와 간구-최종 승리의 원동력:
복음서를 보면 병 고침의 사건 속에 놀라운 사실 하나를 발견합니다. 그것은 그들이 갈망하고 요청하기 전에는 주님이 자발적으로 기적을 베푸신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바디메오는 예수님의 시선을 끌기 위하여 오랫동안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옆에 있는 사람들이 그를 꾸짖어 잠잠하라고 할 정도로 소리를 쳤습니다(막10:46-52).
수로보니게 여인도 자신의 딸을 고쳐 달라고 했을 때 예수님은 처음에는 못들은 체 하시더니 나중에는 그녀를 "모욕"까지 하면서 고쳐 주십니다(마15:21-28).
여리고 회당장의 경우 그는 자신의 딸을 위해 예수님께 나오는 기민함을 보였고 혈루증 앓던 여인이 예수님이 그녀를 주목하기 전에 치유 받고자 하는 열망으로 먼저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은 이렇게 약속하십니다.
(요14:13-14)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예수님은 "나는 네가 그 일을 하도록 돕겠다"고 말씀하시지 않고 "내가 시행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구할 때 들어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기도하면 주께서 행정을 집행하신다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구하면 들으신다고 하셨을까요? 기도의 세 가지 요건이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뜻
둘째는 예수님의 이름
셋째는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일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는 것만이 진정한 기도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응답하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우리의 필요를 아시고 모든 것을 예비하시고 구하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기도 없이 시행한 일의 결과는 자신의 공로로 돌리지만, 기도한 후에 된 일의 결과는 하나님이 시행하심이 분명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한 이유 때문입니다.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라.
모든 기도는 공중기도,개인기도,긴기도 짧은 기도, 통성기도, 골방기도 일반적인 기도와 특별한 간구를 다 포함하는 것입니다.
전신갑주를 기도로 입어야 합니다. 전신갑주를 기도로 보존해야 합니다.
(롬13:14)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기도로써 그리스도로 옷 입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기도를 통하여 우리 안에 실재화 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우리의 신분을 기도로 획득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주님을 우리 편이 되시도록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주님이 사람이 되고, 주님과 함께 연합하는 것입니다. 내가 주님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하나님의 자녀와 상속자로써 입장을 견지하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첫째 진리의 허리띠를 기도로 취하여야 합니다. - 삶의 표준/삶의 가치
진리의 주체이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진리이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주님의 말씀을 행함의 원칙과 삶의 표준으로 삼아 그리스도를 살아내는 것입니다. 주님을 의지하고 기도함으로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빌1:21/
바울이 산 그리스도가 그의 진리의 허리띠였습니다.
둘째 의의 흉배를 기도로 취하여야 합니다. - 양심, 율법, 세상-참소
의를 이루신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를 이루신 의를 힘입어 사단의 모든 참소와 정죄함을 물리칩니다. 날마다 의의 덮개를 기도로 취하여 가슴을 덮어야 합니다.
셋째 평안의 복음의 신발을 기도도 취하여야 합니다. - 마음, 감정, 정서 - 염려 근심, 두려움, 미움, 연민은 평안을 깨는 마귀의 화전입니다.
주의 평안의 신발을 신고 주님과 동행합니다.
저의 발이 상하지 않게 지켜주시고 저의 길을 인도하소서.
평안을 기도함으로 취하여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통하여 성취하신 평안은 견고한 발판이요 견고한 기도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능히 서게 하는 평안이십니다.
(빌4:6-7)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주님의 평강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 주셔야 평안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넷째 믿음의 방패를 기도로 취하여야 합니다. - 믿음의 주, 온전케 하신 예수의 인격, 그 분의 약속의 말씀을 붙드는 것입니다.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 분의 말씀을 붙드는 것입니다. 그 분의 안에, 그 분 마음 안에, 그 분의 신실하심 안에, 그 분의 능력 안에, 그 분의 말씀 안에, 그 분의 뜻 안에, 그 분의 주권 안에 있는 온전한 믿음을 가지는 것을 말합니다.
다섯째 구원의 투구를 기도로 취하여야 합니다. - 생각, 지각 - 의심, 불순종의 영이 조정
생각은 구원의 투구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의심하게 하고 구원받은 것을 의심케 하는 사단으로부터 구원의 투구이신 그리스도를 매일 체험함으로 물리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힘이시오 방패시요 나의 구원이십니다.
여섯째 성령의 검을 기도로 취하여야 합니다.
말씀을 기도로 읽을 때 모든 말씀이 대적을 물리치는 성령의 검이 되는 것입니다. 로고스가 레마로 좌우에 날선 검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과 혼을 쪼개 분해합니다.
출17:8-16- 여호와 닛시 - 모세가 체험한 승리의 원동력에서 배워야 합니다.
이스라엘과 아말렉이 르비딤에서 여호수아 장군이 선두 지휘 하에 전쟁할 때에 모세가 산에 올라 손을 들고 기도하면 승리하고, 손이 내려오면 패배하여 아론과 훌이 돌을 가져다 받치고 손을 붙들어 이스라엘을 승리케 하신 하나님을 ‘여호와 닛시’라고 표지를 세웠습니다. 기도 없이 영적 전쟁에서 승리할 수가 없습니다. 모세의 지팡이가 심포니 오케스트라 지휘자의 지휘봉과 같습니다.
마귀는 기도하지 않는 성도는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마귀가 가장 두려워하는 존재는 무릎 꿇고 자신의 생각을 주님의 생각에 굴복하는 사람을 제일 두려워 합니다. 기도하면 자신의 뜻을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도하면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게 되며,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신 그리스도의 권세가 마음과 생각과 의지를 다스림으로, 마귀 사탄은 한길로 와서 일곱 길로 도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기도해야 할까요?
첫째 성령 안에서 기도하라.
(롬8:26-27)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27)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우리 안에 보혜사 성령님이 친히 우리를 위하여 중보하시며, 우리의 구할 것을 구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십니다. 우리의 육의 생각과 육의 기도를 드려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영 안에서 주님의 생각이 내 생각, 주님의 마음이 내 마음 일치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시행하시리라 약속을 이루신 것입니다.
둘째 쉬지 말고 기도하라 - 주님을 첫 자리에 모신다는 의미입니다. 기도 없는 약속, 기도 헌신, 봉사, 순종 지켜지지 않습니다.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하여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잠3:5-6)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6)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우리의 무지함과 무기력을 고백하는 것과 자신의 힘만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는 고백이 들어 있습니다.
(요1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원수 마귀는 밤낮 참소하는데, 어찌 우리가 밤낮으로 고소하지 않겠는가?
사단이 아직 무저갱에 감금되지 않고 불못에 던져지지 않는 한, 그를 저지하는 기도를 그쳐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셋째 기도에 항상 힘쓰라 - 기도는 낭비가 아닙니다. 기도를 저축하여야 합니다. 지하 갱에 갇힌 광부가 밖으로 연결되어 있는 전화선이 생명선인 것처럼, 기도는 우리의 모든 것에 모든 것이 되시는 주님께 연결된 생명선입니다.
기도하다 낙심하지 말 것, 의심 낙심, 우울함, 문제들을 통해 기도를 방해함
하나님은 기도 응답의 시기를 알고 계시며, 그 일을 행하실 주님의 말씀을 믿고 신뢰하는 것입니다. 베드로 감람산에서 기도하지 않아, 시험을 당합니다.
주님의 기도 덕분에 베드로가 다시 회복합니다. (눅22:31-32)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請求)하였으나(32)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祈禱)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우리가 날마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셨기에, 오늘 우리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중보기도를 매일 들어야 합니다.
넷째 성도들을 위하여 기도하라
(엡6:18-19)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
(고전12:26)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 하나니,"
어떤 사람이 꿈에 여행을 하였습니다. 그는 한 예배당 지붕에 귀신이 거기 누어 단잠을 자고 있음을 보았고, 한 곳은 무더기 귀신이 모여 지붕을 둘러친 지붕을 보았습니다. 궁금해서 천사에게 물었습니다. 이 꿈의 내용은 무슨 뜻일까요?
첫 번째 꿈은 교인들이 잠을 자고 있기 때문에 한 귀신이 방비해도, 귀신이 할 일이 없어서 잠자고 있는 것이고, 한 교회는 두 사람이 동심 합의하여 밤낮 기도하기에, 기도를 힘써 방해하기 위하여 무더기 귀신들이 지붕에서 망을 보는 것이라고 일러 주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지붕은, 여러분의 교회는 어떤 모습일 것 같습니까?
항상 깨어서 성도들을 위하여 교회를 위하여 기도하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다섯째 목회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19)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벌려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
신령한 목사, 능력 있는 목사는 성도들의 기도를 통하여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주께서 말씀을 주사 복음의 비밀을 담대하게 간증하도록 기도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국가와 국가 지도자를 위하여 기도하여야 합니다. 나라가 평안해야 교회가 평안하고 가정이 평안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중보기도가 필요합니다.
(딤전2:1-2)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2)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한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니라."
여섯째 복음증거를 위하여(사역) 기도하라
(골4:3-4) "또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되 하나님이 전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주사, 그리스도 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 내가 이것을 인하여 매임을 당하였노라.(4) 그리하면 내가 마땅히 할 말로써 이 비밀을 나타 내리라."
전도는 은사가 아니라, 생명이 있는 자의 생수의 강이 넘치는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주님 만나고 즉시로 전도합니다. 나다나엘도 즉시로 생명을 전합니다. 예수 생명이 있는 자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담대히 복음의 비밀을 전하는 것입니다. 영적 추수를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자신을 변화시킵니다. 기도는 환경을 바꾸십니다. 하나님은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말씀하십니다.
통성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