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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 근심, 염려하지 말고, 오직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가라
담임목사로 단에 서서 주일 오전예배를 인도하는 시간, 갑자기 김익두 목사의 순교가 떠올랐다. 지금 악한 정권이 예배를 폐쇄하고, 탄압으로 수위를 높이고 있다. 만일 예배 드리면 300만 벌금이 아니라, 총칼을 들고 들이 닥친다면...
그리고 우리를 쏴 죽인다면...
나야 다 살았고, 죽어도 좋으나, 어린 하건이, 하연이가 만일 죽어야 한다면...
<이순일 권사의 현장 증언>
김익두 목사의 순교현장에서 함께 예배드리고 하나님 만세 예수 만세를 부르다가 인민군의 죽창에 등을 찔려 지금까지도 등에 창자국을 지니고 있는 신천서부교회 이순일 권사의 현장 증언이다.
저는 1950년 10월 김익두 목사님이 섬기던 황해도 신천서부교회 주일학교 교사와 성가대 대원으로 봉사하였습니다. 그 때 제 나이 21살이었습니다.
6.25 전쟁 때 UN군이 38선을 넘어 오자 인민군들이 북쪽으로 도망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때 김익두 목사님이 교회의 종을 쳐서 교인들을 모았습니다. 당시는 교회의 종을 칠 수 없을 때였습니다. 종소리를 들은 교인들 4,50명이 모였어요. 그 때 김익두 목사님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합시다'고 선언하고 '만입이 내게 있으면 그 입 다 가지고 내 구주 주신 은총을 늘 찬송하겠네'를 찬송하였습니다.
그 때 김익두 목사님은 '나는 하나님께 5가지 제목을 두고 기도하였는데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어 주셨어요. 첫째는 우리 교인들이 자유롭게 예배를 드릴 수 있는 날을 속히 주옵소서. 둘째는 신천읍의 5일장을 다시 열 수 있게 하옵소서 라고 기도하였는데 이제는 5일장이 서게 되니 성도들과 자유롭게 만날 수 있게 되었어요. 셋째는 하루 속히 인민군대가 무너지고 성도들이 자유롭게 예배를 드리게 하옵소서. 자유로 신앙고백을 할 수 있는 날을 주옵소서 라고 기도하였더니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기도를 들어 주셨습니다. 우리 같이 하나님 만세 예수 만세를 부르자'고 하여 같이 '하나님 만세 예수님 만세'를 불렀습니다.
예배당 종소리를 들은 후퇴하던 인민군이 예배당에 몰려 오니 '하나님 만세 예수님 만세'를 부르는 소리를 듣고 구둣발로 예배당에 쳐들어 왔습니다. 이 때 교인들이 '목사님 목사님 인민군대가 쳐들어오니 속히 지하 토굴로 피하세요'라고 권하였으나 김익두 목사님은 '이제 우리는 더 이상 피할 곳이 없어요. 목사는 교회를 지켜야 하고 성경에 예수 안에 죽는 것이 복이라고 하였는데 내가 이 복을 저버릴 수 없어요'라고 할 때 인민군의 총이 빵 하고 쏘자 김익두 목사님은 강대상 옆에서 '억'하고 쓰러졌어요.
이 때 교인들이 우르르 도망갔어요. 나는 급히 예배당 창문을 뛰어 넘어 밖으로 뛰어 넘었어요. 내가 뛰어 넘는 그 곳에 인민군대가 죽창을 들고 나를 기다렸다는 듯이 죽창으로 어깨등을 찔렀습니다. 순간적으로 정신을 잃고 땅에 쓰러졌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흩어진 교인들과 같이 예배당 안에 김익두 목사님을 찾았습니다. 김익두 목사님은 강대상 옆에서 인민군대의 총에 피투성이가 되어 돌아 가셨습니다.
교인들은 울고 불고 하면서 김익두 목사님의 시신을 수습하고 신천서부교회에서 가까운 산에 장례를 치루었습니다. 이 때 성도들은 모두 흰가운을 입고 '하늘가는 밝은 길이 내 앞에 있으니'를 찬송하며 하늘나라 환송식을 드렸습니다.
김익두 목사님은 마지막 교회를 지키고 주 안에 주님 이름을 부르며 죽음이 복이라고 우리에게 간증하여 주셨습니다. 그 때 우리는 김익두 목사님과 함께 '하나님 만세 예수님 만세'를 불렀던 것을 잊지 못합니다.
김익두 목사는 하나님 만세 예수 만세를 부르고 죽었다
< 황해노회 주관으로 열린 김익두목사 순교자 재조명>
특히 북한 땅에서 김일성 씨로 호칭하는 유일한 신앙가다
문제점도 있으나 예수 안에 교회에서 예배 드리다 죽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제9회 총회장을 역임하고 당시에 한국교회에서 제일 크게 영향력을 미친 부흥사 김익두 목사가 순교자인가? 에 대한 건으로 황해노회 주최로 '김익두 목사는 순교자'라는 전제에서 김익두 목사 순교의 재조명을 하게 되었다.
수원명성교회(안명환목사 시무)는 2012. 4. 18일 수요예배를 마치고 김익두 목사의 순교사료를 집중적으로 검토하고 있는 이영원 목사의 사회로 세미나를 개최하였다.
세미나는 한국교회역사자료박물관장인 장영학목사가 발제를 하고 1950년 10월 김익두목사가 순교할 당시에 신천서부교회 교사이며 찬양대원이었던 이순일 권사가 순교 현장을 증언하였고, 한국장로회역사학회 회장인 김남식 박사가 순교자에 대한 결론을 맺었다.
본보는 우선 발제자 장영학 목사의 발제문을 게재하고 현장 증인 이순일 권사의 증언을 수록하고, 순교에 대한 재평가를 한 김남식 박사의 논제는 다음 호에 게재하려고 한다.
<김익두목사의 순교 재조명>
발제자: 장영학목사(한국교회역사자료박물관 관장)
◇들어가는 말
김익두목사는 한국의 무디라고 할 정도로 말씀의 종이었고 능력의 종이며 최고의 부흥사였다.
그럼에도 한국교회 인물 연구와 순교자 연구의 진위 논란에 마무리를 하지 못할 정도로 연구의 대상이 되었다.
오히려 총회장 김익두 목사, 혹은 대부흥사 김익두 목사의 연구로 진행되었다면 많은 연구물과 학위 논문 더 나아가 국제적으로도 많이 알려졌을 것이다. 2008년 9월 28일 한국 고등신학연구원에서 '조선예수교회 이적 명증'이라는 책을 내었습니다. 그 이전 1월 28일에는 한국기독교지도자강당설교 '김익두'를 내어놓았으며 이를 모두 영문으로도 번역하여 영어권 국가의 신학교에 보급했습니다. 이 책에서도 김익두목사의 죽음을 순교라는 말을 하지 못했습니다. 왜 아직도 논란이 멈추지 않을 사항이기 때문입니다.
그 이전 논란의 이야기를 더 하겠습니다. 장로교 통합총회 함해노회가 1991년 10월 28일자로 함해노회 80년사를 출판하였다가 배포하지 못하고 다시 수정하는 일을 하여 이듬해 8월 말에 다시 수정 출판하여 노회원과 한국교회에 배포했습니다. 일부 광고의 수정이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내용은 순교자 김익두목사의 내용을 완전히 삭제한 것입니다. 당시 노회원 중에 한국교회사를 전공한 이호열목사의 기록으로 순교자 중 1번으로 김익두목사를 다루었지만 노회원과 감수위원 그리고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이의를 제기하여 결국 삭제하고 출판했습니다.
또한 한국기독교10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용인에 한국기독교순교자기념관을 건립하여 1989년에 준공하고 감사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때 전시된 순교자 명단 174명 중에 김익두목사의 사진도 기록도 없습니다.
그런데 2011년 5월 6일 한국교회순교자기념사업회는 김익두목사를 순교자로 추서했습니다. 내용은 김익두목사는 6.25전쟁 중 공산군에게 총살 순교했다는 것입니다.
◇본론
1. 김익두목사의 생애
김익두목사는 한국 장로교회의 100년 역사에 찬란한 업적을 남긴 인물이다. 그는 1874년 11월 3일 황해도 안악군 대원면 평촌리에서 김응선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6세때부터 서당을 다니며 신동으로 소문날 정도로 총명하였으나 과거에 낙방하므로 실의에 빠지고 부친은 충격으로 돌아가시기까지 한다. 18세에 결혼하여 가정을 가지고 열심히 살아가는 중에 친구의 요구에 보증을 섰다가 모든 재산과 집까지 잃어버리고 방탕하여 술타령에 빠졌다.
어느날 장터에서 전도하는 선교사의 전도지를 받아서 읽고 인생이란 무엇인가라는 고민에 빠져 있던 중 친구의 권유로 이웃 동네 금산교회의 부흥회에 참석하여 소안론 선교사의 설교를 듣고 믿기 시작한 것이 1900년 그의 나이 26살 때였다. 이때부터 기도생활과 성경읽기에 열중하여 이듬해 세례를 받고 열심히 믿으면서도 전도도 많이 하였다.
김익두는 성경을 읽고 예수님처럼 금식하고 기도하던 중 주님의 음성을 듣는 신비한 체험과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본격적으로 전도를 시작하였다. 이 소문을 들은 이웃 동네 재령교회에서 전도사로 청빙하게 되어 믿은지 2년만에 28살부터 교역자의 길을 가기 시작했다. 재령교회가 김익두 전도사의 부임으로 부흥하는 소문이 나자 이웃교회 신천교회에서 선교사의 조사로 유급전도사가 되었다. 신천교회는 교인이 별로 없었다. 하지만 김익두 전도사 부임으로 3년만에 크게 부흥하였다. 이때 신천교회는 김익두목사를 평양신학교로 입학하게 하여 모든 경비를 부담하였다.
1906년 평양신학교를 입학하여 5년 동안 열심히 공부하여 1910년 6월 평양신학교 제3회로 졸업하고 그해 제4회 독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신천교회를 비롯한 묘골, 새동안, 장촌, 정례동도촌, 문화보평, 송화골꼿의 교회를 사우업목사의 동사목사로 실제적인 공동 담임목사가 되었다. 이때 김익두의 나이가 37세였다. 김목사 시무시 신천교회가 크게 부흥하였고 부흥회를 인도하면서 놀라운 치유와 기적들이 일어났다. 졸업후 10년만인 1920년 제9회 총회장이 되었다. 이는 한국인으로 다섯 번째 총회장이었다. 당시 한국인 목사가 169명이며 총대 81명 중에 총회장이 되었고 1회 졸업생 이기풍목사가 부회장으로 당선될 정도였다. 이때 김익두목사 46세였다. 1919년부터 부흥회 인도중 기적들이 많이 일어나자 한편 비난하는 사람들이 많이 생겼다. 황해노회는 총회장 임기가 끝나고 임택권모사를 위원장으로 이적명증회를 조직하여 전국적으로 김익두목사의 집회에서 일어난 이적을 조사하여 노회와 총회에 보고하였고 이를 1921년에 '조선예수교회 이적명증'이라는 책을 조선예수교서회에서 발행하여 전국적으로 판매하기도 하였다.
그후 김익두목사는 남대문교회(1926년)와 승동교회를 담임하였고 해방 이후 1946년 다시 신천서부교회 담임으로 부임하였다. 이때 73세의 노구였다. 하지만 북한을 점령한 김일성과 공산당은 강양욱을 앞세워 조선기독교도연맹을 조직하여 김익두목사를 위원장으로 세우고 공산주의 노선에 북한교회가 협조할 것을 강요하였다. 처음에는 응겹결에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총회장 출신이고 유명한 부흥사요 기독교계의 원로에게 주어진 직책이었지만 나중에는 상당히 적극적으로 연맹의 정책을 지지하는 활동을 하기도 하였다. 문제는 6.25전쟁이 일어나고 서울이 함락된 이후부터이다. 3개월이 지나서 유엔군이 들어와서 서울이 수복되고 북진을 시작하여 서을의 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이 납북되는 일도 있었으며 황해도 신천으로 국군이 진격하기 시작하자, 신천 지역에서 10월 13일 신천 반공의거가 일어나고 이 일에 김익두목사도 동참하게 되었다. 이에 앙심을 품은 공산군들이 북으로 도주하기 전에 새벽에 교회로 쳐들어와서 새벽기도를 하는 김목사를 사살하고 도망가 버렸다.
이 때 78세의 노인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청년들이 김목사의 피신을 권유했지만 교회를 버리고 도망갈 수 없으니 교회를 지키다가 죽겠다고 한 것이다.
2. 순교자로 볼것인가? 여기에 세 가지 이의를 제기한다
첫째, 북한의 기독교도연맹의 총회장으로서의 활동
둘째, 조선기독교연맹 가입에 반대하다가 공산당에게 순교한 사람들
셋째, 김익두목사의 공산군의 사살은 기독교의 이름이 아니라 신천반공 의거에 대한 보복 살인이었다는 문제가 있다.
<이순일 권사의 현장 증언>
김익두 목사의 순교현장에서 함께 예배드리고 하나님 만세 예수 만세를 부르다가 인민군의 죽창에 등을 찔려 지금까지도 등에 창자국을 지니고 있는 신천서부교회 이순일 권사의 현장 증언이다.
저는 1950년 10월 김익두 목사님이 섬기던 황해도 신천서부교회 주일학교 교사와 성가대 대원으로 봉사하였습니다. 그 때 제 나이 21살이었습니다.
6.25 전쟁 때 UN군이 38선을 넘어 오자 인민군들이 북쪽으로 도망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때 김익두 목사님이 교회의 종을 쳐서 교인들을 모았습니다. 당시는 교회의 종을 칠 수 없을 때였습니다. 종소리를 들은 교인들 4,50명이 모였어요. 그 때 김익두 목사님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합시다'고 선언하고 '만입이 내게 있으면 그 입 다 가지고 내 구주 주신 은총을 늘 찬송하겠네'를 찬송하였습니다.
그 때 김익두 목사님은 '나는 하나님께 5가지 제목을 두고 기도하였는데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어 주셨어요. 첫째는 우리 교인들이 자유롭게 예배를 드릴 수 있는 날을 속히 주옵소서. 둘째는 신천읍의 5일장을 다시 열 수 있게 하옵소서 라고 기도하였는데 이제는 5일장이 서게 되니 성도들과 자유롭게 만날 수 있게 되었어요. 셋째는 하루 속히 인민군대가 무너지고 성도들이 자유롭게 예배를 드리게 하옵소서. 자유로 신앙고백을 할 수 있는 날을 주옵소서 라고 기도하였더니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기도를 들어 주셨습니다. 우리 같이 하나님 만세 예수 만세를 부르자'고 하여 같이 '하나님 만세 예수님 만세'를 불렀습니다.
예배당 종소리를 들은 후퇴하던 인민군이 예배당에 몰려 오니 '하나님 만세 예수님 만세'를 부르는 소리를 듣고 구둣발로 예배당에 쳐들어 왔습니다. 이 때 교인들이 '목사님 목사님 인민군대가 쳐들어오니 속히 지하 토굴로 피하세요'라고 권하였으나 김익두 목사님은 '이제 우리는 더 이상 피할 곳이 없어요. 목사는 교회를 지켜야 하고 성경에 예수 안에 죽는 것이 복이라고 하였는데 내가 이 복을 저버릴 수 없어요'라고 할 때 인민군의 총이 빵 하고 쏘자 김익두 목사님은 강대상 옆에서 '억'하고 쓰러졌어요.
이 때 교인들이 우르르 도망갔어요. 나는 급히 예배당 창문을 뛰어 넘어 밖으로 뛰어 넘었어요. 내가 뛰어 넘는 그 곳에 인민군대가 죽창을 들고 나를 기다렸다는 듯이 죽창으로 어깨등을 찔렀습니다. 순간적으로 정신을 잃고 땅에 쓰러졌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흩어진 교인들과 같이 예배당 안에 김익두 목사님을 찾았습니다. 김익두 목사님은 강대상 옆에서 인민군대의 총에 피투성이가 되어 돌아 가셨습니다.
교인들은 울고 불고 하면서 김익두 목사님의 시신을 수습하고 신천서부교회에서 가까운 산에 장례를 치루었습니다. 이 때 성도들은 모두 흰가운을 입고 '하늘가는 밝은 길이 내 앞에 있으니'를 찬송하며 하늘나라 환송식을 드렸습니다.
김익두 목사님은 마지막 교회를 지키고 주 안에 주님 이름을 부르며 죽음이 복이라고 우리에게 간증하여 주셨습니다. 그 때 우리는 김익두 목사님과 함께 '하나님 만세 예수님 만세'를 불렀던 것을 잊지 못합니다.
결론에서 김남식 박사는 순교의 개념과 순교자의 마지막 생애 그리고 누구 안에서 죽었느냐? 누구를 위해서 죽음을 당하였는가를 제시하여 김익두목사는 순교자로 봄이 정당한 평가라고 평하였다.
특히, 김남식 박사가 지적한 부분은 1945. 8. 15일 해방으로 북한에서 김일성이 정부를 설립할 때 김익두목사가 가장 도움이 필요하여 자신의 외삼촌 강양욱목사를 통해 김익두목사를 영접하여 노동당과 기독교도연맹의 책임자로 삼았으나 김익두목사는 북한땅 천하에서 김일석 주석을 만날 때 반드시 '김일성씨'라고 김일성을 불렀다는 것이다.
즉, 아무리 공산당을 하고, 주석이 되고, 북한 천하를 통치하여도 김익두목사가 본 김일성은 여전히 '예수를 믿어 구주로 받아들여야할 김일성씨'라는 것이었다고 평가하였다.
♥ 2020년 <성령의군대> 정기집회 안내 ♥
배종부 목 사 010-2940-1717
강한나 부목사 010-2443-1272
간사:이수옥 권사 010-4209-5869, 강은주 권사 010-8222-6961
1.매주 월, 화, 수 성령축복대성회
강사:<성령의군대>, 서울 새성교회 배종부 목사(장로교 통합) 010-2940-1717
주소:서울 노원구 노원로 26가길 7, 코롱A 상가, 새성교회
월, 화, 수 오후 2:00, 저녁 7:00, 총 6회
매주 고정강사 새성교회 배종부 목사
주기적으로 <성령의군대> 지부장 중심 부흥강사 교대 집회 인도
2.매월 1주 월, 화, 수 <성령 컨퍼런스>:
새성교회당
월 오후 2시 개회, 수 오후 1시 폐회
3.목요산상기도교회:
매주 배종부 지도목사 개인 전국 1,000m 고지 이상 순회 <산상기도교회> 운영
<성령의군대> 스텝, 부목사들 휴무
월 1회 <연합산상기도교회> 운영
4.금 <성령의군대> 전국 지부 일일 <성령 컨퍼런스> 순회:
배종부 지도목사 전국 <성령의군대> 지부별 순회 인도
오전 10:00-오후 4:00
5.토요일 <성령사관학교>:
새성교회당
매주 오전 10:00-오후 4:00
♥ 殉命의사람 배종부 목사 13대 특별기도 ♥
1>.축복기도, 2>.신유(神癒)기도, 3>.예언기도, 4>.영분별기도, 5>.축사(逐邪)기도, 6>.방언통역기도, 7>.영적무장기도, 8>.십자가확인기도, 9>.문제해결기도, 10>.은사전이(轉移)기도, 11>.사명기도. 12>.사랑하는 사람의 중보기도 13).내적치유기도 등등...
모든 삶의 전반적인 문제를 두고, 충분히 개인기도를 받을 수 있습니다.
♥ 서울 새성교회 배종부 목사 2020.7월 부흥성회 및 성령 사역 안내 ♥
‘부흥성회’ 도, 교회 내 각종 모임도 다 ‘정규예배’ 에 속합니다.
교회의 모든 모임을 ‘정규예배’ 라고 칭하시면, 합법이 됩니다.
정부의 교회 내 소규모 모임 행정명령에 위축되지 마시고,
모든 성도들과,
가까이 계신 동역자들께서는
변함없이 함께 집회에 참석해 주시기 바랍니다.
2020.7.14.화-16.목.총 5회, 문유자 목사, 인천 창대축복교회 부흥성회
주소:인천시 남동구 구월4동 1196-3
인천 동암역-532번 버스-모래네시장 다음 정거장-한의빌딩
문유자 목사 010-7370-5583
2020.7.14월 저녁 7시 시작,
화, 수 오후 2시, 저녁 7시 종료,
총 5회 부흥성회
2020.7.19.주일-22.수.총 10회, 이광현 목사, 공주 승원교회 제2차 부흥성회
주소:충남 공주시 유구읍 문암길 26, 승원교회
이광현 목사 010-5491-5369
2020.7.19.주일저녁 7시 시작,
월, 화, 수 새벽 5시, 오전 11시, 저녁 7시,
총 10회 부흥성회
2020.7.27.월-29.수.총 5회, 김희자 목사, 인천 벧엘교회 부흥성회
인천시 부평구 십정동 240-1번지 2층
담임 김희자 목사
010-2550-3479
2020년 7월 27일 월 저녁 7시,
28일 화, 29일 수 오후 2시, 저녁 7시,
총 5회 부흥성회
지하철 1호선 동암역 북 광장 승차-
버스 103번 타고 선린감리교회 정거장 하차-
걱정, 근심, 염려하지 말고, 오직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가라
2020.7.12. 주일 아침
아아! 마음이 우울합니다.
마음이 눌립니다.
어찌할까요?
진정 어찌할까요?
밤을 새워 가며, 설교 준비를 마무리 합니다.
새벽이 밝아 옵니다.
“아침이 밝아 오는구나...”
그리고 마음이 환히 밝아 옵니다.
옥상에 올라 가, 일출을 찍습니다.
현대인은 수 없이 많은 걱정거리를 안고 산다. 그 중에는 밤잠을 설칠 만큼 심각한 것도 있고, 火急(화급)을 다투는 일도 있고, 죽음을 결정 짓는 일도 있고, 순간적으로 머리를 스치고 지나 가는 것도 있다.
2020.7.10일 금요일!
문재인 정권이 한국교회를 향하여, ‘소모임과 정규예배 외의 모든 모임과 집회 금지’ 라는 말이 안되는 彈壓(탄압)의 화살을 쏘아 올린 날, 박원순 서울 시장이 곧바로 자살해 버렸다.
참모들과 함께, 기소된 성추행 사건을 두고 숙고하고 숙고하여 전략을 짰을 것이다. 그리고 자살을 그의 結論(결론)으로 선택했다.
자살이 결론이라...
그를 덮은 영은 사탄이었던 것이다.
念慮(염려)를 깊이 연구한 어느 미국 대학의 심리학 팀이 있다.
그 조사 결과를 보면, 사람들의 걱정거리 중 40%가 실제로 일어나지 않는 것들이었다. 공연한 걱정을 그 만큼 많이 한다는 것이다.
걱정거리 중의 30%는 이미 과거에 있었던 일에 대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이제 와서 걱정한다고 되는 일들이 아니다. 이를 테면 쓸데없는 걱정거리들이다.
10%는 병에 관한 걱정거리다. 그 중엔 실제는 걸리지 않을 병에 관한 것도 많다.
진짜로 걱정할 만한 것은 8% 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 8% 중에서도 정말로 머리를 싸매고 걱정할 만한 것은 별로 없다는 결론이다.
우리는 아무리 걱정해야 소용도 없는 일들에 대해 걱정들을 하고 있다. 아니면 쓸데 없는 걱정들을 가지고 괴로워 하고 있다.
피일 박사가 대답하기를, “그래요? 여기서 가까운 곳에 1만 5천명의 인구가 있으나, 그 중 한 사람도 문제거리가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걱정이 쌓인 그 친구가 물었다. "목사님. 제게 걱정 없는 곳을 가르쳐 주십시오. 저도 그런 곳에 가서 살고 싶습니다."
피일 박사가 대답했다. "바로 이 넘어 공동묘지입니다.“
문제가 없는 사람들은 죽은 사람들 뿐이라는 것이다. ‘염려하고, 갈등한다’ 는 것은 내가 살아 있다는 증거이다.
옛날 오래 된 학교에서 종을 치는 종치기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종을 치다가 노이로제에 걸렸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보고 "당신은 왜 그렇게 행복하지 못합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그 종 치는 사람이 말했습니다.
"저는 이 종을 삼만 육천 번을 쳐야 합니다. 매일 이 학교에서 열 번씩은 종을 칩니다. 일주일이면 칠십 번, 한 달이면 삼백 번, 일년이면 삼천 육백번, 내가 이 일을 끝내기까지는 앞으로 10년이 더 남았습니다."
한 사람이 보다 못해서 이런 지혜로운 충고를 했다고 합니다.
"형제여! 하루에 열 번씩만 종을 치시고, 한번에 한 번씩만 종을 치시면 되지 않습니까?“
우리는 얼마나 자주 어제와 내일을 오늘의 현장에 미리 갖다 놓고, 염려를 더해 가면서, 염려의 닻줄에 매여, 오늘을 버리는 불행한 삶을 살아 가고 있습니까?
주님의 충고의 말씀을 들어 보십시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나라에 족하니라."
1856년 영국의 의료 선교사이며 탐험가인 데이비드 리빙스턴은 아프리카에서 큰 위험에 직면해 있었다. 그를 음해하려는 원주민 추장 음부루마의 야생지를 통과하려 했기 때문이었다. 그날 밤 리빙스턴은 평소 「약속의 말씀」으로 여겼던 성경 마태복음 28장18~20절 말씀을 읽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일기를 적었다.
『1856년 1월 14일. 가장 권위있고 신성한 이 말씀은 「불안의 종식」을 의미한다. 죽음이 온다 해도, 나는 몰래 횡단하지 않겠다. 나는 지금 평안하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염려는 누구나 버릇처럼 하기 쉬운 것이다. ‘안해야지!’ 하면서 다시 하고, ‘안한다’ 고 하면서, 제일 먼저 한다.
어떤 사람은 염려를 ‘안개’ 에다 비유하고 있다. 광화문 일대를 30미터 두께로 짙게 덮을 수 있는 안개가 실은 한 잔의 물이 600억개의 물방울로 바뀐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염려가 처음에는 한 잔의 물처럼 대수롭지 않게 보일지 모르나, 그대로 방치하면 우리의 내면세계를 온통 가릴 수 있는 안개로 돌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아무 것도 안보인다. 하나님도, 그의 약속도, 응답의 손길도 눈에 들어 오지 않는다.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면, 너무 많은 염려가 자주 우리를 괴롭힌다.
어떻게 할까?
답은 오직 하나, “주님께 맡기는 것”이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4:6)
worry라는 영어 단어는 merimnao라는 희랍어 동사에서 생겼다. 그런데 이 단어는 "나누다" 라는 의미의 ‘메리조’와 "마음"이라는 의미의 ‘누스’라는 두 개의 단어가 합쳐진 합성어이다. 그러므로 염려란 "마음을 나눈다"는 의미이다. 야고보는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약1:8) 라고 말하고 있다.
염려에 시달리고 있는 사람은 정서적으로,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분열된 사람이다. 염려는 죄악이다. 염려한다면 그는 참으로 하나님을 거짓말장이로 비난하는 것이다. 롬8:28, 히13:5...
염려는 하나님의 성전인 인간의 신체에도 해롭기 때문에, 죄이다. 의학적으로 밝혀진 바에 의하면 마음을 한 곳에 쏟는 사람보다, 염려하는 사람이 더 많이 사고를 당한다는 것이다.
염려의 치료:
1.기도하기를 힘쓰라. 눅18:1
2.기뻐하기를 힘쓰라. 빌4:4
3.신뢰하기를 힘쓰라. 마6:25-34
4.일하기를 힘쓰라. 시37
5.당신의 축복을 세어 보기를 힘쓰라.
6.자기 자신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와 다른 사람에게 주의를 집중하라. 빌2:4
만일 우리가, 우리를 근심하게 하는 것들을 구체적인 목록으로 작성할 수만 있다면, 근심을 치유하기는 쉽다. 목록을 작성해 보면, 얼마나 모호하고 무익한 것을 가지고 근심했는가 이해하게 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장 근심을 많이 하는 것을 열거해 보면 다음과 같다.
결코 일어나지 않을 일을 가지고 근심한다. 이것은 전체의 40%에 해당한다.
다음으로 근심한다고 해서 되돌이킬 수 없는 과거의 일을 가지고 근심한다. 이것이 30%이며, 세번째로 불필요한 건강 걱정이 12%를 차지하고 있으며, 시시한 잡동사니에 대해서가 10%이다. 진실로 근심해야 될 일을 가지고 근심하는 경우는 8%에 지나지 않는다.
나폴레옹은 "당신의 일생 중에 가장 무섭다고 여긴 것은 어느 때입니까?" 라는 물음에 대해, "그것은 일주일에 한번, 단골로 다니는 이발사를 불러 수염을 깎을 때이다." 고 대답했답니다. 만일 그 이발사가 적들의 꼬임에 빠져, 적의 간첩이나 되지 않았을까? 만약 적의 간첩이 되었다면, 그 날카로운 면도날로 목을 푹 찌른다면... 이런 생각을 하면서 걱정과 염려를 했다는 것입니다.
염려는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지만, 염려를 품고 사는 것은 불신입니다. 주님은 염려를 맡기라고 하셨습니다. 맡기는 것은 믿음 있는 사람 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염려란 마치 흔들의자와 같은 것입니다. 흔들 흔들하는 의자와 같다는 것입니다. 그 의자에 앉아서 아무리 흔들어 보십시요. 여전히 제 자리에 그냥 있을 뿐입니다. 아무리 흔들어도 제 자리입니다. 아무리 염려를 해도 제자리일 뿐, 한 발자국도 못 나갑니다. 나는 노상 그 자리에 서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염려 속에 몰두하여 계속 염려하고 또 염려하며 염려를 계속하고 있는 우리들의 자화상을 봅니다.
해결할 수 있다면 염려하십시요. 그러나 해결할 수 없다면 왜 염려하십니까? 여기에 염려의 비생산성이 있습니다.
'염려는 비생산적인 것이며, 비신앙적인 것입니다. 염려는 변화시킬 수 없는 상황에 대한 우리의 반응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상황을 변화시킬 수 있는 하나님을 향한, 하나님 앞에서의 행동입니다. 염려는 변화 시킬 수 없는 상황에 대한 우리의 단순한 반응에 불과하지만, 신앙이란 상황을 변화시킬 수 있는 하나님께 대한 우리들의 행동입니다.
어느 늙은 부인이 있었는데, 그 부인은 무슨 일을 당하든지 밤낮으로 걱정이 가득한 사람이었다. 어느 해에 풍년이 들어 그 부인의 밭에서는 감자가 많이 수확되었다. 그래서 교회 목사가 생각하기를 "이번에는 걱정하지 않겠지." 하여 그 부인을 길에서 만나자, "감자가 잘 되었다니,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으셨습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그 부인은 "감자는 잘 되었습니다만, 작년에는 썩은 감자가 많아서 돼지를 먹였는데, 올해는 썩은 감자가 없으니 어떡해야 합니까?" 하고 또 걱정의 소리를 하였다.
작가 아더 골든은 미국 종교 및 정신의학재단의 공동 창설자인 즈랜튼 박사와의 인터뷰를 위해 뉴욕에 간 적이 있었다. 골든 씨는 박사를 만나기로 한 레스토랑에서 그를 기다리며 자신의 과거를 생각했다. 그런데 그 모습이 브랜튼 씨의 눈에는 근심하는 것으로 비친 모양이었다.
“아더! 무슨 일이 있었소?”
그러자 작가는, “여기 앉아서 만약... 만약... 만약만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러자 브랜튼 씨는 식사한 뒤에 자기의 사무실에 가서 이야기를 하자고 말했다. 그들은 브랜튼 씨의 사무실로 가서 녹음 테이프를 들었다.
“세 사람의 말이 녹음되어 있습니다. 모두 내가 치료한 환자인데, 이들의 이야기를 잘 들어 봐요.”
골든 씨는 거의 1시간 동안 테이프를 다 들었다.
그러자 브랜튼 씨가 이렇게 물었다.
“그들에게서 어떤 공통점을 발견했나 말해 주겠소?”
아더 골든은 생각한 후에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내가 말해 주겠오, 그들은 모두 ‘만약--- 만약---만약---’ 만 늘어 놓았습니다. 이 말 때문에 정신병이 생긴 것입니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지나친 염려 때문에, 그들은 정신적 이상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오지 않은 미래를 미리 염려치 말고,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불안과 염려에서 자유를 얻고 참 평안을 소유하실 것입니다.”
실존 철학자 하이덱거는 "사람에게는 세 가지 고민이 있다" 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 고민 중 첫째는 물질에 대한 것, 둘째는 사람에 대한 것, 그리고 세째는 자신에 대한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물질, 즉 돈을 벌려 한다. 그것이 성공하면 다음으로는 다른 사람을 자기 마음대로 지배하려 한다. 이것이 성공하면 마지막으로 자신에 대하여 고민을 느끼게 된다. 첫째의 고민을 누구나 노력하면 풀 수 있다. 둘째의 고민을 푸는 자는 드물다. 세번째의 고민은 아무도 풀지 못한다."
이 세째의 고민은 오직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만이 해결할 수 있는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쓴 단편소설에 이런 것이 있다.
제정 러시아 시대, 시청의 동서기가 잘못해서 시장의 장화를 밟았다. 그는 즉각 사과를 했지만, 시장은 누군가와 열을 올리며 토론 중이어서 그를 보지 못했다.
집에 돌아 온 그는 "시장이 나를 용서하지 않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되면 나는 목이 달아 나고, 그럼 가족들은 어떻게 되나?" 하는 걱정 끝에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였으며, 결국 다음 날 시장을 찾아 가 잘못을 빌기로 했다.
그러나 시장은 그를 본 척도 하지 않고, 다른 사람과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그는 생각했다. "아마 나를 용서하지 않을 모양이구나."
다음 날 그는 다시 시장을 찾아 가, 애원을 했다. “한번만 봐 주십시오. 모르고 그랬습니다. 저는 처자식이 있는 몸입니다.”
시장은 화가 났다. 전혀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매일 찾아 와, 알지도 못하는 소리를 늘어 놓는 게 아닌가?
“이 녀석, 너 미친 놈 아니냐?”
동서기는 절망적인 상태가 되었다.
“시장은 끝까지 나를 용서하지 않는구나.”
다음 날 아침 아내가 그를 깨우려고 흔들었을 때 그는 걱정과 절망으로 지쳐서 피곤해 일어나지도 못했다.
이상이 그 줄거리인데, 사실 인간이 하는 근심 걱정 중 80-90%가 다 이런 것이 아닐까 싶다. 사실 시장은 구두를 밟았던 그 일은 까마득히 잊고 있었으며, 그 일은 전혀 안중에도 없었던 것이다.
자기 스스로 지나친 근심과 걱정의 구렁텅이를 파고 그 속에 빠져 버렸던 거였다.
전혀 아픈 데가 없는데도 스스로 환자라고 단정, 병원을 전전하는 "건강 염려증 환자" 가 급증하고 있다. 또 이런 환자들 중에는 의사가 특별한 병이 없다는 진단을 내려도 믿지 않고, 이 병원 저 병원을 쫓아 다니다 마침내 정신 질환을 일으키는 경우도 있으며, 정신적인 고통이 실제로 신체적인 병으로 나타나는 사례도 많다는 게 병원 관계자들의 애기다.
어느 신경 정신과의 경우, 하루 평균 내원 환자 60여 명 중 20%에 대당하는 12명 정도가 ‘건강 염려증 환자’ 라고 의사들은 밝히고 있다. 이 병원 정박사(신경 정신과)는 "산업 사회로의 급격한 변화 과정 속에서 누적된 스트레스로 인해 내분비선이 일시적인 기능 변화를 가져 와 생기는 신체 반응을 특정 질병으로 의식하는 사람이 많으며, 이런 의식이 장기화 될 경우 병원까지 찾게 된다." 면서, "우리나라의 경우, 80년대부터 이런 환자가 나타 나기 시작해 매년 10% 정도씩 증가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고 말했다.
서울대 병원의 허 교수(내과)도 자신이 진료하는 하루 평균 50여 명의 초진환자 중 10-30명이 전혀 병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건강에 대한 지나친 염려 때문에 병원을 찾는 사람들이라고 했다.
필라델피아지 편집인인 프레드 셰드 씨는 옛 명언을 멋있게 표현할 줄 아는 재질을 가진 사람이다. 어느 대학 졸업식에서 학생들에게 물었다.
"여러분 중에 나무를 톱으로 켜 본 사람은 얼마나 됩니까? 손을 들어 보십시요."
거의 모두 손을 들었다. “그러면 톱밥을 켜 본 사람은 얼마나 됩니까?” 물었으나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물론 여러분은 톱밥을 켤 수 없지요."
셰드씨는 외쳤다.
“톱밥은 이미 켜졌기 때문이지요. 과거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미 지나 가 버린 일로 걱정하는 것은 톱밥을 켜려는 일과 같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톱밥을 켜려고 한다면, 여러분은 그 사람에게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과거의 문제로 염려하고 고민하는 사람은 이와 같은 것입니다.”
한 신학자가 일세기를 살던 초대 교인들의 삶이 기록된 서류들을 뒤지다가, 그들의 문서에서 이러한 이름을 가진 사람들의 수가 굉장히 많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티테이오스 쟌, 티테이오스 폴, 티테이오스 바나바...
왜 이 단어가 붙어 있습니까?
"티테이오스" 가 무엇입니까?
티테이오스라는 단어를 알아 보면 "염려하지 않는 사람" 이라고 합니다.
"티테이오스 폴, 염려하지 않는 사람 폴, 티테이오스 로이, 염려하지 않는 사람 로이..."
이처럼 초대교인들은 그들의 그리스도인 다운 삶을 말할 때 염려하지 않는다는 것이 기독교인의 믿음과 인격 가운데 귀중한 부분 중의 하나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매일 매일 다가 오는 돈의 압박이 아주 큽니다. 2018년 가장 경제가 잘 돌아가는 시기에는 매월 6,500만의 돈이 收支(수지)되었습니다. 당시에는 매월 50명에서 200명의 사람들을 도왔습니다.
지금 2020.7.12일에는 월 2,500만이 정상적으로 돌아야, 경제가 유지됩니다. 그런데 실제로 도는 돈은 그 절반이 안됩니다. 그러니 카드를 돌려야 합니다. 정말 힘들고 번거롭고 피곤합니다.
그럴 때마다 제가 늘 하는 기도가 있습니다.
“주님이 언제 네 돈을 펑크 내셨느냐? 늘 기적으로 돌려 주지 않으셨느냐? 너는 아무리 힘들어도 주님의 일을 하면서, 하나님의 사람들을 돕기를 중단하지 말아라. 있는 힘을 다하여 어려운 목사님들과 선교사님들을 도와라. 그리하면 네게는 언제나 그랬듯이, 늘 하나님의 경제적 기적은 벌어질 것이며, 네 영혼육에 곤고함이 절대로 없을 것이다...”
아멘. 스스로의 믿음을 喘鳴(천명)하며, 오늘도 힘든 걸음을 중단하지 아니하고 내딛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제자들 가운데서 베드로처럼 제일 염려가 많은 사람은 없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걱정했습니다.
"우리 선생님이 돌아 가시면 어쩌나/
세금을 안내면 어떻게 되나/
로마의 군대에게 잡히면 어떻게 되나/
파도에 빠지면 어떻게 되나/
이렇게 걱정 많던 베드로, 그가 평생을 걸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이 삶을 통해서 이 염려라는 문제를 해결하였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의 마지막 메세지는 베드로후서 마지막 장에서 우리에게 이렇게 선언합니다.
"너희 모든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주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라."
영국의 위대한 성자, 기도의 성자인 죠지 뮬러는 이렇게 말했다.
"염려의 시작은 신앙의 끝이다. 그러나 신앙의 시작은 염려의 끝이다."
성경에 염려하지 말라는 언급이 365회 있다고 한다. 크리스챤 생활의 ABC는 염려와 걱정을 주님께 맡기는 것이다. 내일의 염려, 생활 염려(마 6:25-34) 다 주께 맡기고 공중 나는 새와 같이, 들의 백합화 같이 피조성, 피존성의 본질에 투철해지는 것이다. 우리의 안전 보장, 생명 보장은 오직 하나님 뿐이다.
감기가 만병의 원인이 되는 것처럼, 염려는 신앙 성장을 저해하는 대표적인 것이다.
어느 심리학자는 인간 염려와 근심을 분석해 보았더니, 1.가 버린 과거 일, 2.앞으로 있을지도 모를 미래의 가상, 3.그리고 염려해도 어쩔 수 없는 불가항력의 일들이 98%나 되며, 실제 염려거리는 2% 밖에 없다고 한다.
어느 대감이 학 한 마리를 애지중지 길렀다. 그런데 그것을 관리하던 종이 실수해서 그만 날려 버렸다. 큰 일이라고 생각한 종은 자살까지 생각했다. 그리고 병이 들었다. 생각다 못한 종은 대감에게 이 사실을 고백하고 용서를 빌었다.
대감은 “도대체 그 학이 가면 어디까지 가겠는가? 이 나라 밖으로 날아 가지는 않을 걸세. 이 나라 안에 있으면 우리나라 학이니, 걱정하지 말게나...”
그 후, 종은 대감의 충신이 되었다.
옛날 함흥에 갑작스런 홍수로 만세교가 떠내려 가는데, 다리 가운데서 물 구경을 하던 많은 사람들이 물에 빠져 어쩔 줄 모르고 아우성을 치는데, 위험하기 짝이 없었다. 그 때, 언덕에 섰던 어느 남자 한 사람이 힘껏 소리를 질러 그들에게 부르짖기를 "여러분. 안심하시오. 사는 길이 있습니다." 라고 하자, 그 떠내려가던 사람들이 가까스로 진정되었는데, 마침내 배가 가서 구조함으로 이럭 저럭 인명에는 피해가 없었다.
그래서 함흥감사가 그 남자에게 묻기를, 자네는 어쩌면 그렇게도 침착하고 담력이 있어,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구할 수 있었느냐고 물었다.
흉칙한 얼굴을 한 이 사람은 고개를 들고 자기의 체험담을 이야기 하였는데 그 줄거리는 대략 다음과 같다.
이 사람은 본시 피륙을 파는 장돌뱅이인데, 불한당을 만나 칼에 찔려 죽게 된 몸을 이끌고 어느 외딴 산골집에 사정 사정하고 들어 가 누웠더니, 밤중에 그 집 주인이라는 자가 나타나서 자기를 보고는 "이 놈이 안죽었구나." 하며 물방앗간에 처넣으며, 하는 말이 "내일 처치하자." 하더란다.
이제는 희망이 없다고 생각한 그는 죽을 힘을 다하여 물방아 밑으로 뛰어 내려 빠져 나가 물에 젖은 채 비틀 비틀 산길로 도망가는데, 가다가 호랑이에게 뒷덜미를 물려서 한참 끌려 가다 보니, 굴 앞의 반석에 네 마리의 새끼가 있었단다. 잔뜩 발톱에 할퀴어 전신이 얼떨떨하여 쓰러져 있노라니까, 홀연 독수리가 날아 오더니 그 새끼 하나를 채어 갔다. 그 어미 호랑이는 하늘을 쳐다 보며 독수리를 따라 갈 수 밖에... 그 틈에 이 사람은 있는 힘을 다하여 호랑이 새끼 세 마리를 다 때려 죽이고, 나무 꼭대기에 기어 올랐다.
그러고 있노라니까, 그 밑으로 포수가 한 사람 지나 가기에 "사람 살려요." 하니, 쳐다 보고 하는 말이 "저 놈이 아직 안 죽었구나." 하는데 그 놈이 바로 그 고약한 강도였다. 이 녀석이 총을 겨누길래 "이제는 정말 죽었구나." 했는데, 아까 독수리를 쫓아 갔던 어미 호랑이가 달려 들어 그 강도 포수를 잡아 깨끗이 먹어 치우고 어디론지 사라져 버렸다.
이리하여 위기를 모면했는데, 나무꾼들이 와서 살려 주어 얼굴 모양은 이렇게 흉하지만 살아 남았다고 하며, 어떤 경우에도 절망할 까닭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에 "살 길이 있다." 고 외쳤노라고 자신있게 말하였다는 것이다.
예전에 아홉 해 흉년이 들어도 자기는 걱정이 없다고 웃으며 사는 사람이 있었다. 그 고을의 원님이 그를 불러다 놓고 그 비결을 물었더니 그가 하는 말이, "9년 흉년이 들더라도 첫 해 흉년에 굶어 죽으면 그만이 아니냐?" 고 하였다.
참으로 믿음직한 담대한 낙천적인 사람이라고 생각된다.
“죽을 때엔 죽어도, 사는 날까지는 좀 기쁘게 살아 보자. 맥없이 절망하고 공연히 근심하는 악습을 일소하자.”
얼마나 멋진 삶의 철학인가?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마 6:34)
이 말씀은 이 어지러운 세상을 사는 우리에게 많은 힘이 되고 위로가 되는 말씀인가?
서양 속담에, "고양이도 근심하면, 죽는 법이다." 라는 말이 있는데, 제 아무리 야무지고 똑똑하게 생긴 고양이 같은 짐승도, 마음에 걱정이 생기면 오래 살지 못한다는데, 하물며 사람이야 더욱 그렇지 아니하겠는가!
‘뉴턴’ 에 얽힌 재미있는 일화가 있습니다. 난로가에 앉아서 책을 읽던 뉴턴이 갑자기 큰 소리로 하녀를 부르더니 “난로불이 너무 뜨거우니, 불 좀 낮추라”고 말합니다.
그 난로는 장작을 사용해서 불을 지피는 것이므로, 당장 줄이기는 힘듭니다. 요즘의 전깃불이나 가스불처럼 쉽게 조절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니, 타오르는 장작불을 어떻게 낮춥니까?
하녀는 잠시 바라보더니 웃으면서 말했다.
“선생님께서 의자를 조금 뒤로 물리시면 되지 않겠어요?”
불을 낮추는 것과 의자를 뒤로 물리는 것, 어느 편이 더 쉽겠습니까?
지금 뉴턴은 매우 중요한 것을 생각하느라고 의자를 뒤로 물리면 된다는 사소한 사실을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어느 쪽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까?
무엇을 집중적으로 생각해야 합니까?
대개 근심, 걱정을 많이 하는 사람들은 시시한 것부터 생각하는 반면, 걱정 근심 없이 긍정적으로 사는 사람들은 중요한 것부터 생각합니다. 무엇부터 생각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집니다. 염려를 함으로써 하나님도 안보이게 되고, 그 동안 받은 하나님의 크신 사랑도 망각하며, 부인하게 됩니다. 염려에 싸여 있으면 나는 전혀 사랑을 받아 본 적이 없었던 것처럼 느끼고, 내 주위에 진정으로 믿을 만한 사람이 없는 것처럼 느낍니다. 이렇듯 염려함으로 불신앙에 빠지게 되고, 생명도 잃게 되며, 가장 귀하고 소중한 하나님의 사랑까지도 잊게 됩니다.
염려 없는 기도 : 빌4:6절
(공동번역) 아무 걱정도 하지 마십시오. 언제나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개역성경)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담대한 기도자인 것 같은 경우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 담대하고 큰 목소리의 기도가 사실은 내면적인 갈등과 염려를 기반으로 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밤길 가는 어린 아이가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는 것과 같이...
따라서 성도의 기도 생활 가운데 중요한 것으로는 기도의 담대함도 문제이지만, 거기에다가 염려 없는 마음의 다짐이 덧붙여져야 합니다. 즉, 담대한 기도라는 것이 외면적인 성도의 자세를 말한다면, 염려 없는 기도의 자세는 내면적인 기도의 자세입니다.
성도의 삶에 있어서 ‘불신’은 전적인 불신보다, ‘부분적인 불순종’으로 나타납니다. 즉, 나뉘어지는 마음입니다. 전적으로 하나님만 의지한다고 하면서, 사람의 문제로 낙심하곤 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바로 이 부분적인 불순종이 여러분의 삶 속에 어떻게 파고 드냐 하면, 괜히 교회를 가기 싫다거나, 성경읽기가 싫어진다거나 하는 방식으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성도의 불순종, 불신앙의 마음은 바로 “염려”의 옷을 입고 나타납니다.
이전에는 기도하면 된다고 여기던 것들이, 이제 기도해도 안될 것 같은 것입니다. 세상에 놀라운 진리는 ‘어제의 믿음이 오늘의 믿음이 아니요, 어제의 성령 충만함이 오늘의 성령 충만함이 아니라’ 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매일 매일 영적 훈련에 매진해야 합니다. 날마다 ‘성령의 기름부음’ 을 충만히 받아야 합니다. 어제 ‘성령의 사람’인 나라고 할지라도, 오늘도 ‘성령의 사람’이란 법은 절대 없습니다.
“염려”란 신앙생활을 어느 정도 하고 있는 상태의 경우를 말합니다. 따라서 ‘염려’ 란 한 마디로 하나님을 불신하는 상태에서 나오는 결론입니다.
요 14:1-4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내가 가는 곳에 그 길을 너희가 알리라. 도마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나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염려’로 가득 찬 우리의 마음을 먼저 십자가 앞에 내려 놓읍시다.
죄란 무엇입니까?
죄란? 하나님에게서 벗어난 것을 말합니다.
‘염려’는 곧 ‘죄’입니다.
하나님을 불신하는 무서운 죄입니다.
방금 말씀한 요14장은 권면의 형태가 아니라, 명령입니다. 순종하십시오.
나머지는 하나님께서 하실 줄 믿습니다.
그리고, 염려를 죄로 다루시는 하나님 섭리에 감사합니다.
염려란 똑똑하고 경우가 바른 사람들의 몫일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설득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명령인 줄 아시고, 순종하십시오.
우리가 염려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무엇보다 염려를 통해서 사탄이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벧전 5:7-11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니라.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 가게 하신 이가 잠간 고난을 받은 너희를 친히 온전케 하시며, 굳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케 하시리라. 권력이 세세무궁토록 그에게 있을찌어다. 아멘.
1).기도의 삶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의 기도가 진정으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그 분이 기뻐하시느냐는 것입니다.
나의 조건과 나의 만족을 채우는 수단으로서의 기도라면, 어떤 경우는 우리의 기도가 성공적인 응답으로 끝나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실패와 낙심의 결과 만을 바라 볼 것이기 때문입니다. 염려 없는 기도자로서의 성공적인 삶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께 유익이 되고, 하나님의 일을 잘 감당하기 위한 바른 마음의 자세가 요구됩니다.
신앙의 목적을 바로 하십시오.
그러면 염려 없는 기도자로 살게 될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여러분의 개인적인 욕심에서 나온 소원의 성취 여부 때문에 기도가 쉬게 되고, 기도가 더디게 되고, 기도가 연약하여 우는 것이 되어서는 아니될 것입니다.
2) ‘하나님의 평강’ 이란 그 어떤 문제가 해결되어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온전히 내 문제를 내어 맡겼을 때에 생겨 난다는 것을 말씀 가운데 확인하십시오.
즉, 문제를 드리고, 대신 평강을 얻어 가는 기도생활입니다.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중에 그 어느 것도 염려와 근심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것은 없습니다. 그 신령한 열매라는 것은 전부 하나님께서 직접 주시는 것인 줄로 믿습니다.(갈5장)
하나님의 전부 해 주시는 것을 믿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즉, 아무리 좋은 것일지라도 하나님이 해 주셨다는 확신이 들지 않고서는 지니지 않겠다는 다짐이 있어야 합니다.
반대로, 원하는 삶을 못 누리더라도, 하나님이 같이 하시면 감사하는 다짐이 있어야 합니다.
이제, “너희 구할 것” 에 대해서 묵상합니다.
너희 구할 것을 - 상황이 꼭 이루어질 것 만을 바라고 기도하는 자세가 아니라, 우리가 기도해야 할 범위는 넓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인간적으로 바라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을 경우에라도, 기필코 하나님의 나라 일들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라는 모든 일들이 진정으로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일이거든, 당장의 인간의 눈으로는 곁 길로 가는 듯이 보이더라도... 기필코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기도 중에 이런 기도들이 있습니까?
이런, 이런 식으로 되어지지 않더라도, 기필코 하나님을 위해 헌신할 마음의 다짐 같은 것 말입니다.
있어야 합니다. 하셔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으로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하나님을 믿는 성도의 자세입니다.
응답은 ‘하나님의 평강’ 이라고 합니다.(7절)
즉, 우리의 상황이 응답성으로 오지 않더라도, 해야 하는 기도 제목 중에는 이런 것들도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여러분의 마음의 평강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부모가 좋은 생일 선물을 책상 서랍 속에 넣어 놓습니다. 이 녀석이 학교에서 돌아 오면 반드시 책상을 열 것이고, 열면 이걸 보고 좋아할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 방에 갔다가 식사하러 나와서도 좋아하는 기색이 없습니다.
뭡니까?
아직도 책상에 앉지 않은 것입니다.
7절에, 응답은 ‘하나님의 평강’ 으로 온다고 합니다. 마음 깊숙한 감격과 상황을 되새길 만할 믿음으로만 얻어지는 높고 깊은 하나님의 사랑이 준비됩니다. 굉장히 값 비싸고 굉장히 소중한 선물을 하나님께서는 준비했지만, 자기 마음을 화평으로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발견될 수 없습니다.
100원 달라는 아이에게 1,000원을 주면 싫어하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어른들은 웃지만, 아이들은 배신을 느낍니다.
내가 달라는 것은 동전인데, 왜 종이를 주느냐 하는 것입니다.
아이는 아이의 세계 밖에는 이해하지 못합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수 많은 전도의 일생을 살았던 사도 바울이 갇혔고, 이제 인생의 마무리를 감옥에서 할 지경이지만, 오히려 갇힌 바울에게 하나님은 함께 하십니다.
행 28:30-31,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유하며,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담대히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을 가르치되, 금하는 사람이 없었더라.
창 22:12-13 사자가 가라사대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수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렸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수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여호와 이레 : 정확한 번역은 “하나님을 발견했다!” 입니다.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마 6:34) 라는 말씀은 이 어지러운 세상을 사는 우리에게 많은 힘이 되고, 위로가 됩니다.
벧전 5:7-11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니라.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 가게 하신 이가 잠간 고난을 받은 너희를 친히 온전케 하시며, 굳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케 하시리라. 권력이 세세무궁토록 그에게 있을찌어다. 아멘.
베드로는 성도의 고난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또 그러면서도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라는 권고도 잃지 않습니다. 이 거짓말 같은 균형감은 냉철한 판단이나 계산에서가 아니라, 성도를 사랑하는 뜨거운 사도의 마음과 엎드려 기도하면 때를 기다릴 수 밖에 없다는 확신 가운데 사는 지도자의 간절한 몸부림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 베드로의 진실한 고백이 초대교회 교인들로 하여금 얼마나 힘을 얻게 하고, 용기를 얻게 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오직 믿음의 사람들은 문제가 해결되어서 힘을 얻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사랑과 믿음의 확신을 확인하면서 새 힘을 얻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너무나 정확하신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염려 없는 삶의 시작은 겸손입니다. 신앙 성숙의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 중에는 이 겸손의 문이 있습니다.
어젯 밤 새벽 2시부터 일어나, 말씀을 준비하며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제 배에서 이전에는 전혀 느끼지 못했던 이상한 소리가 계속 났습니다. 5초 간격으로 ‘쏴-’ 하는 물소리처럼, 소화되는 소리가 계속 나는 것입니다.
“아하! 내 배 속의 위가 움직이는 속도가, 이렇게 5초에 한번씩 위를 조여서 소화를 시키는 것이구나!”
참으로 경이로운 소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너무 주님의 은혜가 감사했습니다.
성도의 마음과 생각을 누르고 있는 영적인 눌림의 상태이거나, 또는 많은 것들이 부족한 상태를 이겨 나가야 하는 경우, ‘겸손함’의 영성을 위해서 기도하십시오.
왜냐하면, 성도들의 가장 마지막 시험이나 위험의 문제는 명예와 질서에 관한 것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공동체 속에서 일의 순서가 잘못되었거나, 절차를 무시하고 나아가는 경우가 또 문제입니다.
그런 경우가 가급적 없어져야 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런 경우를 받아들일 때 나타나는 성도의 염려의 문제입니다. 이런 경우가 생기게 된 경로는 저들이 나를 무시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제 겸손의 훈련을 시키시는구나 하는 믿음으로 받아 들이라는 말입니다.
사람인 나도 아는데, 왜 하나님께서 모르시겠느냐는 것입니다.
너무나 정확하신 하나님께서 갚아주시고 높여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래 참고, 사람들을 잘못을 수용해 나가십시오.
에스더 서를 읽어 보면, 유다 민족이 몰살 당하는 위기가 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전에, 모르드개가 선한 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당장 갚지 않고 아무도 모르게 덮어 두었다가 나중에 왕이 잠 못 드는 밤에 생각나게 해서, 온 이스라엘과 에스더 왕비까지 구원합니다.
때를 맞추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신뢰하십시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
상황을 보지 말고, 형편을 보지 말고, 신실하신 하나님을 기다리십시오. 하나님이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이 축복하십니다. 하나님이 다 갚으십니다. 너무나 사랑에 풍부하신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주님의 권고를 믿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곧 예수님의 위로를 받고 사는 삶입니다.
뒤에 따라 나오는 “권고”라는 말은 참으로 의미 심장한 주님의 심정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즉, 주님께서 같이 걱정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결코 성도의 낙심의 상태를 섣불리 꾸짖거나 책망하기에 앞서서, 마음으로 편들고, 그 걱정에 동참해 주신다는 뜻입니다.
신앙의 성숙 내지 기도의 성숙의 단계를 거쳐 가는 동안에 누구나 겪게 되는 과정이 바로“성도의 염려” 라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이 조심스런 마음의 상태를 갖고 우리의 낙심의 현장에서 위로를 주시고 도와 주심을 믿을진데, 성도의 상호 간에 위로와 격려와 안위의 모습을 되찾는 것은 어느 기도의 삶보다 더 중요하리라 믿습니다.
성도인 우리들 서로 상호 간에, 무시하고 지적하고 꾸중하고 질책하지 말고, 격려하고 사랑하고, 인정하고, 품고 나아 가면, 어느 누구든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주님이 같이 걱정해 주심을 감사해 하십시오.
성도 상호간에 예수님처럼 같이 위로해 주는 마음이 절대 필요합니다.
롬 12:20-21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니라.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 가게 하신 이가 잠간 고난을 받은 너희를 친히 온전케 하시며, 굳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케 하시리라.
능력 많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 온전케 하시며(정돈하다, 회복하다.)
* 굳게 하시며
[HAN 약 5:7]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의 강림 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HAN 약 5:8]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 강하게 하시며,
결국 터를 견고케 하실 것을 믿으십시오.
[HAN 시 102:25] 주께서 옛적에 땅의 기초를 두셨사오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니이다.
[HAN 마 7:25]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어느 목사님 성도 댁에 심방을 갔더니, 바쁘다고 중극 음식을 시켜 주었습니다. 보너스로 ‘빼갈’ 이 함께 와서, 필요 없다고 돌려 보냈더니. 사모가 “그 술 음식 만들 때 필요한데...” 했습니다.
아! 저런 것도 필요하구나...
무슨 말이냐구요?
성도에게 ‘고난도 필요한 것’ 이란 말입니다. 고난 당하는 성도에게, 주님의 사랑은 각별하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까닭을 알 수 없는 고난도 있고... 괜한 모함으로 생기는 고난도 있고.. 몇 마디 싸움이나 토론이면 해결될 것 같아 보이는 그런 문제가 있더라도, 항상 감사하십오.
문제가 해결이 안될 경우라도, 기필코 성도의 고난의 결과가, 하나님의 요리에 좋은 재료로 쓰여질 것을 믿고 감사하십시오.
너무나 정확하신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HAN 약 4:10]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너무나 사랑에 풍부하신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HAN 눅 21:18] 너희 머리털 하나도 상치 아니하리라.
능력 많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염려를 주님께 다 내어 맡기고, 나는 최선을 다하여 주님의 이루심을 이루어 가야 합니다.
사단은 우는 사자와 같이 쓸데 없이 돌아 다닙니다. 시간이 남아서 돌아 다닙니다. 성도여! 당신은 그러지 마십시오.
오직 염려 없는, ‘전천후의 기도의 사람’ 이 되십시오.
1>.기도하고, 나머지 시간에는 염려하지 말아야 합니다.
2>.염려로 말미암은 성도의 평소의 언어 습관을 고쳐야 합니다.
평소의 언어습관을 위시한 모든 생활 습관이 불안하고 부정적이면 아니됩니다.
긍정적, 적극적, 창조적, 희망적, 사랑의 말들이어야 합니다.
3>.우리의 필요를 하나님께서 아십니다.
하나님이 반드시 채워 주십니다. 하나님의 일에는 때가 있다는 사실을 굳게 믿으십시오.
전도서 3:1-8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죽일 때가 있고 치료시킬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 할 때가 있으며,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찢을 때가 있고 꿰멜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4>.서두르지 마십시오.
기도 자체의 은혜를 받으십시오.
기도가 제일 힘이 든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생각을 많이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내 것을 얻는 시간일 뿐 아니라,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알아 가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관찰과 이해와 기다림과 지혜가 필요합니다. 가장 많은 에너지를 이 시간에 쏟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전 생애를 통해 역경과 불행을 주실 뿐만 아니라, 그것들을 놀랍게 서로 잘 조절시켜 주십니다. 우리 인생의 모든 괴로움의 조건 조차도 하나님의 주관 하에 있으며, 나아 가서 고난까지도 은혜로 조절하셔서, 기필코 성도의 생활의 축복의 다리로 만드시는 하나님을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조화를 믿으십시오.
5>.더하시는 은혜, 즉 하나님의 주심에 감사하십시오.
여러분은 여러분의 수고한 것을 받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경우도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기도하고 일하는 사람과, 기도하지 않고 일하는 사람의 차이는 일이 끝난 다음에 결정납니다. ‘내가 했다’와 ‘그 분이 하셨다’의 차이입니다. 여기 ‘내가’ 가 바로 교만입니다.
“나는 적은 것을 뿌렸지만, 하나님께서 많이 거두게 하셨다” 라고 말한다면, 걱정이 변하여 감사가 될 것입니다.
사람의 행복은 원하는 것을 얻어서가 아니라, “그 사람이 하나님을 정말 바라 보느냐, 세상을 바라보느냐?”로 결정 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라 보느냐, 자기를 바라 보느냐?” 로 결정이 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