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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여름집회
하나님의 신성한 건축
3. 건축과 함께 오시는 하나님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창12:1~3)
우리 우주 안에는 두 개의 건축이 있다는 말씀을 지난 시간에 드렸다. 하나님이 건축을 하시려고 하는데 또 방해하는 자가 있어서 그 방해하는 자 역시 자기 건축을 하고 있다는 것을 말씀을 드렸다.
결국은 땅은 건축 전쟁이라고 할 수 있다. 누가 땅에 건축을 할 것이냐, 누가 땅위에 자기의 거처를 잡을 것이냐, 이러한 전쟁이다. 하나님은 왜 땅에 건축을 하려 하시는 것인가? 그것은 그분이 건축과 함께 오시는 분이기 때문에 그렇다. 건축 없이는 그분이 땅에 오실 수 없는 분이고 건축과 함께 오시는 분이다.
우리는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다는 관념을 갖고 있다. 물론 하늘에 계시지만 하늘에 계신 분은 우리가 만날 수 없는 하나님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늘에 올라갈 수가 없고, 우리가 하늘을 모르기 때문에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접촉하거나 만날 수가 없는 하나님이다. 많은 사람들이 접촉하거나 만날 수 없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생각하고 있고, 만난다고 생각하는 그런 착각을 갖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오셔야만 비로소 우리가 만날 수 있다. 그분이 오시지 않으면 인간은 누구도 그를 만날 수 없다. 인간이 하나님을 찾아가서 만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분이 오실 때만 만날 수 있다. 그분이 어떤 모양으로든지 표현을 하실 때, 자신을 표현하실 때 사람들은 하나님이 이렇구나 하고 알았던 것이다. 그것은 그분이 오실 때만 사람은 안다는 뜻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극히 제한적이다. 왜냐하면 오시는 분밖에 모르기 때문이다. 그분 전체가 얼마나 큰지, 얼마나 넓은지 그것은 아무도 알 수 없다. 우리에게 오셨던 분만 알고 있는 것이다. 아브라함에게 오셨던 분, 이삭에게 오셨던 분 야곱에게,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오셨던 그분만 알고 있는 것이지 그 이외의 그분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그분은 자기의 건축과 함께 오신다. 자기의 백성과 함께 오신다. 자기의 장막과 함께 오신다는 사상을 우리가 확실하게 가져야 한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을 때, 하나님은 그냥 하늘에 계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예수님과 함께 그분이 왔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 것이 아니라 예수와 함께 우리에게 왔던 것이다. 그렇다고 하늘에 없다는 말이 결코 아니다. 하늘에 존재하시지만 우리에게 오실 때는 예수하고 함께 왔다는 말이다.
전기가 이 우주 안에 많이 있다. 그렇지만 우리한테 올 때는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전등이나 이런 기구를 통해서 얻고 함께 오는 것이다. 전기가 아무리 있다고 하더라도 전등이 없는 데는 빛이 없다. 전기는 전등과 함께 우리에게 빛으로 온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당신의 건축과 함께 온다. 만일 하나님이 전혀 자기를 표현하지 않으신다면 아무도 하나님을 알 수 없다. ‘지으신 바 만물을 보아서 그분을 알 수 있느니라’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도 그분의 지으심 속에 그분이 표현이 되니까 지으심을 통해서 만물을 통해서 그분을 안다는 뜻이다. 만물을 통해서 그분을 안다는 것은 극히 제한적인 것이다. 그분을 전부 아는 것이 아니다. 어떤 개인을 통해서도 하나님은 오셨다. 하지만 역시 극히 제한된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건축을 원하시고, 건축과 함께 오시는 분이다. 예수님이 오신 것은 그분과 함께 하나님이 오신 것이다. 예수님이 오셨을 때 하나님을 따로 찾으면 없다. 필립이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시면 좋겠다고 했더니 내가 너희와 이렇게 오랫동안 함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하느냐고 하였다. 이 말은 아버지가 나와 함께 왔다는 말이다. 그분을 떠나서 아버지를 따로 볼 수 없다는 말이다.
전등이 없이 전기의 빛을 따로 볼 수 없다. 분명히 전기를 통해서 빛이 오고 있지만 빛을 따로 볼 수는 없다. 전등이 있을 때만 전등과 함께 오는 빛을 볼 수 있다.
이것을 알지 못 하면 우리는 예수를 만난다 하더라도 알 수가 없다. 다시 오신다 하더라도 역시 알 수 없다. 그분은 누구와 함께 오시는 분이다. 자신의 건축과 함께 오시는 분이니까 건축을 모르고는 그분을 안다고 할 수가 없고, 만날 수가 도저히 없다. 건축과 함께 온 하나님이다.
우리는 창세기 1장에서 창조를 보았다.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부르시는 하나님을 보았고, 있으라 하니까 있고, 갈라지라 하니까 갈라지는 것을 보았다. 이것이 바로 창조이다.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부르시는 분이다. 빛이 있으라 하시니까 빛이 있었다. 그럼 빛이 있으라 하기 전에는 빛이 없었다는 말이다. 뭍이 드러나라 하시니까 있었다는 말은 그렇게 말씀하시기 전에는 없었다는 것이다.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부르시는 하나님. 이것이 바로 창조하시는 하나님이다.
이 창조는 창세기 1장 2절에서 본 것처럼, 그리고 그 이후의 역사에서 본 것처럼 누군가에 의해서 손상이 되었다. 누구로 인해서인가 방해를 받았다. 그래서 창조가 온전하게 드러나지 못 할 뿐만 아니라 왜곡되게 되었다. 이것을 회복한 것이 하나님의 역사이다.
손상된 땅을 회복하려고 하나님께서 땅에 오셨다.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더라. 이것은 땅이 없기 때문에 물에 감춰져 버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앉으실 수가 없게 됐다는 뜻이다. 이것을 우리 자신에게서 생각해 보면 하나님이 나를 찾아와도 내가 만일 깊은 물에 잠수하고 있으면 하나님이 와서 앉을 자리가 없다는 뜻이다. 우리 교회에서 어느 형제 요새 잠수함 탔다는 말을 한다. 그러면 하나님이 오셔봐야 앉을 자리가 없으니 배회할 것이다. 우리가 세상에 깊이 빠져 있으면 하나님은 오셔도 앉을 자리가 없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자신이 앉아야 할 자리에 앉는 분이니까 앉을 수가 없기 때문에 배회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더라. 이것이 옛날 이야기가 아니고 오늘 우리 안에 있는 이야기이다. 오늘 우리 교회 안에 하나님이 오시더라도 우리가 만이 깊은 물에 잠겨 있다면 하나님은 공중에서 배회하고 말 것이다. 앉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노아시대 까마귀나 비둘기를 홍수에 내보내니까 날아다니다가 앉을 곳이 없어 다시 돌아오는 것과 마찬가지다.
하나님은 항상 도로 하늘로 갈 수 밖에 없다. 앉을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앉을 자리를 위해서 땅을 회복하는 것이 창세기 1장 3절 이후의 창조이다. 창세기 1장은 땅의 회복이라고 할 수 있다. 창조라고 하기보다는 회복이라고 할 수 있다. 1장 1절만이 순수한 창조이고 2절 이후부터는 창조가 아니라 회복이다. 땅을 다시 찾는 것이다.
찾는 과정을 보니까 물에 잠겨져있으니 땅을 물로부터 분리해야 한다. 그래서 흑암으로부터 분리하기 위해서 빛을 하나님께서 있으라고 말씀하셨다. 흑암을 빛으로 밖에 분리 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빛이 있으라 하셨다. 혼돈으로부터 분리하기 위해서 궁창이 있어라, 그래서 물과 물이 나뉘게 하라, 공간이 있게 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땅을 물로부터 건져냈다. 뭍이 드러나라 하니까 땅이 드러났다고 한다.
이것은 모두 잠겨져있는 땅을 물로부터 분리시킨다는 뜻이다. 오늘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은 잠겨져있는 우리 인생을, 물에 잠겨져있는 인생을, 다시 말하면 세상에 잠겨져있는 인생을, 자기 자아에 잠겨있는 인생을 분리시키려고 말씀하신 것이다.
하나님이 왜 말씀하시는가? 우리가 무엇인가 잠겨져있고, 갇혀져 있기 때문에 거기서 분리하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옛날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는 여기서 물에서 분리된 땅을 보게 된다. 뭍이 드러나라 하니까 뭍이 드러났다는 것이다. 이것은 물로부터 분리된 땅을 의미한다. 물로부터 분리된 땅은 곧 회복된 땅이다. 지금 비가 많이 와서 땅이 잠겨 있다가 물이 빠지니까 땅이 드러났다. 홍수 때는 큰 홍수가 온 땅을 덮었다가 물이 빠지고 나니까 뭍이 드러났다는 말이다.
창세기 때는 하나님께서 뭍이 드러나라 하시니까 뭍이 드러났다. 천하의 물을 한 곳으로 모으고 밀쳐내고 뭍이 드러나게 한 것이다, 이것은 회복을 의미한다.
이 회복된 땅은 어떤 땅이 되었는가? 생명이 땅이 됐다. 이 회복된 땅에 씨를 뿌려서 식물이 나고 사시와 연한과 일자를 정하게 되고 동물이 나게 되고 사람이 나게 되고 그래서 여기서는 생명의 땅이 되었다. 생명은 땅이 없으면 있을 수가 없다. 뿌려질 수도 없고 번식할 수도 없고 활동할 수도 없는 것이다. 땅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것은 식물의 생명과 동물의 생명과 인간의 생명 3종류의 생명이 나왔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식물의 생명이라는 말은 번식하고 자란다는 뜻이다. 식물처럼 잘 번식하고 자라는 것이 없다. 잘 번식하고 잘 자라는 생명을 대표할 때는 식물을 사용하게 된다. 동물의 생명은 동물의 생명은 활동하고 움직이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서 동물의 생명을 말한다. 사람의 생명, 인간의 생명은 무엇 때문에 말하고 있는가? 이것은 하나님과의 건축 때문에 말하고 있다. 사람의 생명은 식물의 생명만큼 생명력이 왕성하지도 않고 동물의 생명만큼 활동적이지도 않다. 사람은 다만 하나님과 연합할 수 있는 성질을 갖고 있다. 그래서 이 3종류의 생명이 분리되고 있다.
사람을 창조할 때도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시고”(창1:27)라고 되어 있다. 사람 자체가 단성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말이다. 남성이면 남성, 여성이면 여성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남자와 여자로 창조되었고 지어졌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미 벌써 지어질 때 우리는 어떤 연합체로서 지어진 것이다. 혼자 그냥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 속에 그런 본성을 갖고 있으니까 우리는 하나님과 연합할 소질을 갖고 있다. 형제와 연합할 소질을 갖고 있다. 원래 우리 자체가 단성으로 사람이라고 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1:27). 여기서 우리는 사람이 금방 복수가 된 걸 보게 된다. 단수로 시작한 사람이 금방 복수가 된다. 이것은 건축되어야 될 사람을 말한다. 그냥 흩어져 있는 사람이 아니라 건축되어야 될 사람을 말한다.
이 건축되어야 될 사람이 창세기 2장에 가면 하나님의 동산이 되었다.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에 두시고”(창2:8)라고 말했는데, 이것은 이 동산이 우리가 말하는 속리산 동산 같은 동산이 아니고, 하나님과 사람이 함께 거하는 곳이라는 뜻이다. 하나님과 사람이 함께 먹고 함께 노는 곳이다. 그래서 공원이라고 한다. 농장이라는 의미에서는 먹는 곳이고, 공원이라는 의미에서는 노는 곳이다. 하나님의 동산! 이 동산에는 생명나무가 있고 흐르는 강이 있고 변화하는 보석도 있었다. 생명나무가 있으면 물이 흐르고, 생명이 흐르면 변화가 일어난다는 뜻이다.
무엇 때문에 이 변화가 필요했는가? 건축을 위해서 변화가 필요했다. 건축하는 데는 보석이 필요하다. 돌이 필요하다. 결국은 생명나무 옆에 흐르는 강은 보석을 산출하게 되는데 이 보석은 건축을 위한 것이었다.
하나님의 동산! 하나님과 사람이 함께 거하는 이 동산은 건축의 동산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께서 배필을 찾고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아담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창2:18)했다. 이것은 하나님의 갈망이다. 하나님이 이렇게 배필을 찾고 있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단성이시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로 지어진 것이 아니라 단성이시기 때문에 배필이 필요하다. 아담을 통해서 자기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시인이 달을 통해서 자기 마음을 표현하듯이, 시인이 소나무를 통해서 자기 마음을 표현하듯이, 하나님은 아담을 통해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아담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다고 말씀하시려니까 부끄러워서 하나님께서 “아담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래서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한 후에 갈빗대 하나를 빼서 하와를 지어 놓고,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짓는가를 봤더니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창2:23)라고 말하더라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 자신의 마음이다. 그분이 자기 자신의 생명으로 지어진 배필을 보고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하시겠다는 뜻이다.
주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을 때 하나님은 비둘기를 통해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더라”는 말이 나왔다. 이 말이 곧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말과 같은 말이다. 하나님은 궁극적으로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인 자기의 완전한 배필을 찾고 있는 것이다. 땅 위에서 지금 우리를 부르신 것은 당신의 이와 같은 완전한 배필을 찾는 맥락에서 부름 받고 있다.
우리는 결국 그분의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 될 것이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그분이 우리를 그렇게 하기 위해서 우리를 불러 놨기 때문이다. 우리는 싫든지 좋든지 그렇게 될 것이다. 내가 원하든지 원하지 않든지 간에 부름 받은 사람은 그렇게 되는 것이다.
군대의 부름을 받는 사람은 자기가 원하든지 원하지 않든지 간에 군대가 되는 것이다. 훈련소에 불러 놓으면 자기가 원해도 군인이 되고 원치 않아도 군인이 된다. 사관학교에 간 친구에게 훈련을 얼마나 많이 하느냐고 물으니까 훈련이 별로 없다고 한다. 1학년 들어가서 여름 방학에 한번 훈련하고는 훈련은 없고 공부만 한다고 한다. 그럼 어떻게 장교가 되느냐고 하니까 4년 동안 공부를 하다보면 저절로 군인이 된다 했다. 군인 의식이 딱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군인 의식이 자기한테 베어서 나오는 것이다. 자기가 원하든지 원하지 않든지 간에 군인 의식이 자기 안에 들어오게 된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렇게 될 사람들이다. 될 것을 소망하고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이런 횡재가 없지만, 만일에 되기 싫은 사람에게는 악재이다. 나는 되기 싫은데 어떻게 된 영문인지 부름 받아 온 것이다. 그러면 대단히 괴롭다. 자기는 그렇게 안되고 싶은데 매일 같이 그렇게 되게 하기 위해 매일 같이 훈련을 시키니까 괴로울 것이다. 그래서 빨리 마음을 바꿔서 나는 부름 받은 사람이구나, 이렇게 마음을 바꿔야 편안하게 살 수 있다. 그리고 모든 일이 잘 풀려갈 수 있다.
하나님은 자기와 완전하게 연합할 한 무리의 사람을 찾고 있다. 물론 개인도 개인이지만 개인으로는 부족하다. 한 무리의 사람, 한 단체의 사람, 연합된 한 족속을 필요로 하고 있다. 이것이 오늘 우리를 교회로 부른 이유이다. 우리를 기도원으로 부르지 않고 골방으로 부르지 않고 왜 우리를 교회로 불렀는가? 그것은 그분이 한 무리의 사람을 원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골방으로 불렀으면 우리는 골방에서 매일 하나님과 대화한다고 하고 있을 것이다. 영국 북아일랜드에 가면 이 세상에서 가장 작은 교회가 있다고 하여 구경을 갔다. 조그마한 오두막집인데 사람이 없어서 안에는 못들어가 보고 창틈으로 봤는데 사람 한 3사람 정도 겨우 앉을 정도이고, 탁자도 놓고 십자가도 걸어 놓았다. 거기 부름 받은 사람은 거기 부름 받아서 거기서 일생동안 산 것 같다. 그곳이 제일 작은 교회로써 기념물이 되서 관광지가 되었다. 사람 3명밖에 앉을 수가 없다.
우리가 어디로 부름 받았는가? 이것이 참 중요하다. 기도원으로 부름 받았는가? 아골 골짜기로 부름 받았는가? 아니면 교회로 부름 받았는가? 교회로 부름 받은 사람은 교회가 될 것이고, 기도원으로 부름 받은 사람은 기도하는 사람이 될 것이고, 아골 골짜기에 부름 받은 사람은 아골 골짜기 구경하는 사람이 될 것이고 자기 부름 받은 대로 될 것이다.
하나님은 아담을 지을 때 무엇 하려고 지었는가? 자기의 배필이 되게 하려고 지었다. 아담은 어찌 하던지 그분의 배필이 돼야 되는 것이다. 사탄에게 아무리 팔려가고 물려갔다 하더라도 다시 또 와서 그분의 배필이 되어야 한다. 병은 한번 만들어놓았기 때문에 한참동안 쓰레기장으로 돌아다니다가 돌아와서 다시 병이 된다. 원래 만들 때 병으로 만들어 놨기 때문이다. 요새는 유리가 하도 싸서 병을 귀중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옛날에는 유리가 귀해서 또 씻어 쓰고 또 씻어 쓰고 그랬다. 병으로 만들어 진 것은 병으로 사용되어야 한다. 마이크로 만들어진 것은 마이크로 사용되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배필로 만들어진 인간은 하나님의 배필이 되어야 한다. 그것은 자기 팔자이다. 이유 여하를 불문하고 그것이 자기 팔자이다. 이 마이크가 자기 소원이 다른 데 있었을 수도 있다. 나는 마이크가 아니고 다른 것이 되고 싶다하는 소원이 있을 수도 있지만 지으신 이에 의해서 마이크가 되고 말았다. 자기 팔자이다. 평생 자기는 소리를 확성하는 데만 사용되어야 한다. 만일 그 길이 벗어나면 그것은 저주가 되고 만다. 자기 팔자이다. 우리가 지금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서 교회 안으로 부름 받은 것은 우리의 팔자이다. 변경할 수 없는 우리의 팔자이다.
하나님께서는 땅을 회복해서 땅에 생명을 번식하게 하고, 이차적으로는 하나님의 동산이 되게 해서 하나님과 사람이 동거하게 하고, 다음에는 하나님과 사람이 연합해서 한 몸을 이루게 작정을 해 놨다. 그래서 우리는 그렇게 되어야 한다.
이 땅은 심판으로부터 부활한 땅이라고 할 수 있다. 노아 시대에 가면 이 땅은 어떻게 건져지게 되는가? 홍수를 통해서 완전히 심판 받고, 그 다음에 물이 걷혀서 땅이 드러난다. 심판을 받고 부활한 땅이라고 할 수 있다.
창세기에서는 하나님께서 그냥 뭍이 드러나라 하니까 드러났다고 한다. 참 이상하다. 어떻게 하나님이 말씀만 하면 그 많은 물이 어디로 가고 없고, 흙이 드러나는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그런데 창세기 6장 이후에 가면 땅은 어떻게 해서 드러났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보여 지는데 심판으로부터 부활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뭍이 드러나라고 했을 때 그냥 말로 하니까 드러났다는 것이 아니고, 어떤 과정을 통해서 그것이 드러났는데, 창세기 1장에서는 단지 그냥 그렇게만 말할 뿐이지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았다. 창세기 6장 이후로 가니까 홍수로 부터 땅이 건져졌다고 말하고 있다. 이 홍수는 심판을 의미한다.
이 땅은 부활한 땅이다. 처음에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지었다 하셨을 때 그 땅에 무엇이 있었는지 아무것도 모른다. 식물이 있었는지 동물이 있었는지 사람이 있었는지 아무것도 모른다. 우리는 맨 처음에 물로부터 구원받은 물로부터 분리된 땅을 본 것이다.
두 번째 본 것은 심판으로부터 부활된 땅을 본 것이다. 이것은 우리 인생을 볼 때 우리가 인생 이전에, 우리 육신 이전에 우리가 무엇이었는지 모른다. 단지 우리는 태어난 이후 밖에 모른다. 태어난 이후의 내 육신밖에 모른다.
두 번째는 내가 거듭 났을 때 내 인생이 다시 났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한번은 부모로부터 낳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난 것을 알고 있고, 두번째는 내가 거듭난 것을 내 스스로 알고 있다. 이 거듭날 때는 나는 심판으로부터 거듭 난 것이다. 내가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심판 받고, 그 다음에 나는 다시 난 사람이 됐다.
어디에서? 십자가에서 내가 심판 받고 다시 나온 사람이 됐다. 이것은 심판 받고 부활한 땅이다. 왜 땅은 심판을 받고 부활을 해야 하는가? 생명의 영원한 번식을 위해서이다. 예수님께서는 왜 부활해야 하는가? 아브라함은 왜 이삭을 모리야 산에 드리고 다시 받아야 하는가? 다시 말하면 부활의 아들로 다시 받아야 하는가? 이것은 모든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기 위해서이다.
마찬가지로 왜 부활의 땅이 필요한가? 이것은 생명의 무궁한 번식을 위해서 그렇다. 부활할수록 더 무궁해진다. 육신에 메여있는 것과 부활하는 것의 차이는 육신에 메여있는 것은 시간과 공간에 메이는 것이지만 부활하면 우리는 시간과 공간에 메여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무한한 확산이 가능하다.
그래서 노아의 홍수 이후에 뭍이 드러난 후에 그 광경을 무엇이라고 기록했는가 하면, 노아가 포도 농사를 지어서 풍성히 거두었다고 했다. 얼마나 풍성하냐하면, 포도주에 취해서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로 풍성했다고 한다. 이것을 도덕적으로 해석한 사람은 노아가 술에 취해서 좀 타락한 것이라고 해석한다. 그런데 나는 그렇게 해석하지 않는다. 그 말을 왜 했는가 하면 농사가 이만큼 풍성하게 되려면, 포도주가 풍성하다는 것은 농사가 잘됐다는 것을 성경에서 의미하고 있다. 포도주가 없다는 말은 가난하다는 뜻이다. 농사를 아주 망쳤고 흉년이라는 말이다. 포도주가 넘쳤다는 말은 풍년이라는 말이다. 노아가 농사를 지어서 포도주가 풍성하게 됐고, 노아가 취했다는 것이다. 노아는 그 풍성에 취한 것이다.
오늘 우리는 이 풍성에 취하면 취할수록 더 좋은 것이다. 만일에 노아가 취한 것이 부도덕한 입장에서 취한 것이었다면 함의 저주를 받는 것은 부당한 일이다. 부도덕하게 취해 있는 것을 보고 함이 가서 이야기했다, 그랬더니 함이 일어나서 너는 저주의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했다. 잘못하기는 자기가 잘못해 놓고 함을 저주했다고 하면 말이 안 된다. 왜 함은 저주 받았는가? 이 그 풍성을 무시했다는 것이다. 이 생명의 풍성을 노아가 농사를 지어서 풍성히 거둔, 부활한 땅에서 나온 그 소산을 업수이 여겼다는 것이다. 부활한 땅에서 나온 풍성한 소산을 무시하면 나는 저주 가운데 놓이게 되는 것이다.
우리 교회 안에서도 부활한 땅에서 나온 풍성한 소산을 내가 무시해 버리면 교회에 가서 먹을 것이 아무 것도 없다. 누구에게선가 풍성한 소산이 나올 때는 그것은 심판 받고 부활한 땅으로부터 나온다. 그렇지 않고서는 절대로 풍성하게 나올 수가 없다. 그런데 그것을 이런 이유로 저런 이유로 다 걷어버리고 나면 먹을 것이 아무 것도 없어 맹숭맹숭하여 취할 리가 없다. 그 풍성을 마시면 취하게 되고 취해서 정신이 없어져야 세상을 잊어버리게 된다. 생명의 본성을 위한 이 땅이 회복되어서 노아는 농사를 지어서 풍성이 거두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 말은 나라와 족속이 그때로부터 퍼졌다고 되어 있다. 노아의 세 아들을 통해서 족속과 백성과 방언과 나라가 퍼졌다고 되어 있다. 이것은 부활한 땅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인류가 퍼진다는 것을 상징한다. 우리는 주 예수님이 와서 예수님의 부활함으로 인해서 유태인도 아니고 이방인도 아니고 모든 사람이 다 한 영 안에서 한 영을 마시고 한 새사람이 되서 한 교회가 되어서 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을 보았다.
이것은 부활로부터 온 것이다. 부활이 아니고는 이렇게 될 수가 없다. 유태인은 유태인이고 이방인은 이방인이라서 영원히 만날 수가 도저히 없다. 그런데 부활로 말미암아, 부활 안에서는 유태인도 없고 이방인도 없다. 죽을 때 십자가에서 같이 죽고 나니까 살아 날 때는 유대인으로 부활한 것도 아니고 이방인으로 부활한 것도 아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부활을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부활을 믿고 있고 부활을 기대하는데, 어떤 생각으로 기대하고 있는가 하면 지금 자기가 알고 있는 그 사람으로 부활 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지금 나는 누구라고 하는 그 사람으로 다시 태어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어 대단히 희망을 갖고 있다. 하지만 아주 천만의 말씀이다. 부활할 때는 유태인도 아니고 이방인도 아니다. 지금 나라고 하는 나는 없어져 버린다. 전혀 내가 모르는 사람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부활한 사람은 옛 사람이 아니다. 부활할 때 지금 김 아무개, 이러저러한 사람, 내가 알고 있는 나, 이 사람이 고스란히 껍데기만 벗고 부활할 것이라고 생각하면 절대로 안된다. 부활을 설명할 때 매미가 허물을 벗고 나오는 것을 보고 부활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그 매미가 그 매미가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부활은 그 매미가 그 매미가 되는 것이 아니다. 거기는 김씨도 없고 박씨도 없다. 부활할 때는 시집가는 것도 없고 장가가는 것도 없다.
그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고 산 자의 하나님이다. 죽은 자가 누구인가 하면 그 옛 사람을 이야기한다. 그 옛 사람의 하나님이 아니고, 산 자의 하나님이라고 한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하신 것을 읽어보지 못했느냐, 아브라함도 갔고 이삭도 갔고 야곱도 갔지만 그 하나님은 영원히 있다.
그런 하나님으로 말미암기 때문에 오늘 우리가 기다리는 부활은 어떤 부활인가? 내가 나로 부활하는 것이 아니고, 어쩌면 다 예수만 부활 할 수 있다. 부활할 때 우리가 의식을 갖고 있어서 본다면, 보면 아무도 내가 아는 사람은 없고 전부 다 예수밖에 없을 것이다. 틀림없을 것이다. 김아무개 찾고, 김장로, 박장로 아무리 찾아도 없고 전부 다 예수 밖에 없는 것이다. 부활한 사람 찾아보니까 아무리 돌아봐도 아는 사람이 없다. 자기가 혹시 있는가 하고 찾아봐도 자기도 없다. 예수만 거기에 있다.
지금까지 부활한 사람은 예수 한 사람 밖에 없다. 베드로도 바울도 요한도 전부다 예수님의 부활 안에 포함되어 있는 사람들이다. 그렇지 않았으면 벌써 바울 정도는 부활하지 않았겠는가. 벌써 2천년이나 됐는데 그 동안에 바울이나 베드로 같은 사람은 충분히 부활해서 한국에도 왔다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 부활 이후에 아무도 부활한 사람이 없다.
그것은 예수 외에는 부활할 수 없다는 말이다. 우리 안에 있는 예수만 부활 할 것이다. 우리 안에 예수 이외의 것은 부활 할 수 없으니까 내가 나라고 생각하고 부활할 수 없다. 내가 아니구나. 내가 아닌 나만 부활한다는 것이다. 내가 아닌 나는 누구인가? 그것은 예수이다. 내가 아닌 나는 예수다. 바울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2:20)고 말했다. 자기가 살아도 자기가 산 것이 아니고 자기 안에 그리스도가 사신다는 것이다. 그 그리스도가 부활한 것이다. 다른 것은 부활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열매가 열리는 것을 자세히 보면 처음에는 잎도 나고 가지도 나고 꽃도 피고 무성하다. 열매가 열 때를 보면 열매만 쏙 빠져서 나온다. 우리가 부활할 때도 마찬가지로 열매만 쏙 빠져 나오듯이 우리 안에 있는 그리스도만 쏙 빠져 나올 것이다. 자기를 붙잡고 있는 사람은 절대로 부활할 때 자기를 볼 수 없다. 자기 밖에 모르는 사람은 부활해도 모른다. 자기 밖에 모르니까, 왜냐하면 자기는 없어져 버리니까 부활에 가서 자기를 아무리 찾아도 없다.
내가 살아도 내가 산 것이 아니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신다. 그 그리스도가 부활하게 될 것이다. 심판으로부터 부활한 땅이 왜 필요한가? 바로 이래서 심판으로부터 땅은 부활할 필요가 있다. 우리 인생은 심판을 받고 부활해야 한다. 그것이 필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세 번째로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땅을 지정해 주셨다. 내가 너에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했다. 12장 말씀이 그러하다. 노아에게는 부활한 땅을 주었다. 그래서 풍성함을 보여주었고, 나라와 족속과 방언이 퍼져나간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아브라함에게는 하나님이 땅을 지정해 주었다.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지정해 주었다.
왜 이렇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했는가? 하나님의 왕국을 건설하기 위해서 지정된 땅이 필요했던 것이다. 내가 너를 큰 민족을 이루고, 내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 그러려면 너는 한 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아무 땅이나 내가 찾아가면 되는 것이 아니고, 그분이 당신의 왕국을 건설하기 위해서 지정된 땅이라야 했다.
12장 7절에 보면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했고, 15장 7절에 가면 이 땅을 네게 주어 업을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 내신 여호와라고 말했다. 17장 5절에는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않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너는 열국의 아비가 되어야 할 것이라고 했다. 많은 민족의 아비가 될 것이다. 많은 나라의 아비가 될 것이다. 이 많은 나라의 아비가 될 것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왕국이 건설이 된다는 뜻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지정해 준 땅으로 가라는 것이다.
이 땅으로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될 것이다. 왜 땅을 지정해 주었는가? 그 땅을 지정해 주고 거기서 하나님은 그 백성의 하나님이 되겠다는 말이다.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다의 모래 수와 같게 할 것이며, 네 씨가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네 씨로 인하여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고 22장에서 말했다.
이것을 볼 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아무데나 흩어 놓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지정된 곳에 두려고 했다. 그리고 당신의 거처를 아무데나 두려는 것이 아니고 지정된 곳에 두려고 했다. 이 지정된 곳! 이것이 아주 중요한 것이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지정해 두고, 자기 백성이 거할 땅을 지정해두고, 당신이 거할 땅을 또 지정해두고, 천하 만민이 복을 받게 하려고 했다.
하나님은 왜 오늘 온 인류를 한꺼번에 구원하지 않느냐는 의문을 갖는 사람도 있다.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통해서 천하 만민이 복을 받게 하려고 하는 것이다. 왜 오늘 대한민국의 모든 사람들이 여기 오지 않았는가? 그것은 우리를 통해서 그 사람들을 복을 받게 하려고 하는 것이다. 혹시나 어떤 집에서는 가족이 다섯 사람인데 한 사람만 왔다면 왜 네 사람은 못 왔는가? 한 사람을 통해서 다섯 사람이 다 복을 받게 하려고 한다. 하나님의 원칙이 그러하다.
구약성서를 읽으면 이상하다. 어떻게 모든 인류 가운데 왜 이스라엘만 유독 관심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왜 그런가하면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이 되게 해서 그 백성을 통해서 천하 만민이 복을 받게 하려는 것이다. 하나님이 자기 것이 있어야 한다. 자기 것이 있어야 다른 백성을 축복할 수 있지 자기 것도 없는데 무슨 축복을 하겠느냐는 것이다.
내가 기업체라도 만들어서 돈을 잘 벌어서 기업체를 만들어야 자선 사업도 할 수 있고 도와줄 수도 있고 학교도 세워주는 것이지 아무것도 없이 학교를 세운다거나 병원을 세운다거나 고아원을 세운다고 해보았자 아무 소용이 없다. 내가 누구를 도와주려면 내가 먼저 기업을 가져야 한다. 그래야 내가 도와 줄 수 있다. 사람이 자기가 먹고 살아 남아야 도울 수 있다. 자기가 먹고 살지 못 하는 자는 남을 도울 수가 없다. 그것은 공연한 空約에 불과하다. 남을 도우려면 내가 무엇이 있어야 도울 수 있다. 남을 돕고 싶은 사람은 먼저 자기가 기업을 만들어야 한다. 도울 수 있는 기업을 만들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남을 돕겠다고 하는 사람은 허황된 사람이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만들어서 그 백성이 복이 넘치도록 만들어서 그 백성을 통해서 천하 만민이 구원을 받도록, 천하 만민이 복을 얻도록 그렇게 하기를 원하고 있다. 우리 교회에서 보면 어떤 형제들이 다른 형제들에게 복음을 전한다. 어떤 형제들이 어떤 형제들이 복을 준다. 어떤 형제들이 어떤 형제들에게 도움이 된다. 자세히 보면 그 형제는 그냥 되는 것이 아니고 그 형제가 먼저 되서 다른 사람들에게 복을 주고 있다. 그 사람이 되지 않고는 줄 수가 없다. 그래서 되기도 전에 주겠다는 사람은 내가 말리고 있다. 줄 것이 없는 사람이 주겠다는 경우는 내가 보기에 딱해서 그 사람은 좀 기다리라고 한다. 왜냐하면 줄 것이 있도록 네 기업을 키워서 원조를 하라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기업이 커져야 남을 도울 수 있다.
아브라함은 헤브론에 장사됐다. 이 헤브론은 지정된 땅이다. 하나님께서 지정해 준 땅인데 거기서 장막을 치고 살다가 죽을 때도 역시 거기서 죽어서 헤브론에 있는 막벨라 굴이라는 굴에 장사가 됐는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3대가 그 여섯 명이 그 막벨라 굴에 묻혀 있다. 여기서는 무엇을 보여주는 것인가? 지정된 땅으로 가라했는데 그 지정된 땅에서 어떻게 축복이 임하게 되는 것인가를 바라보기 위해서 그 막벨라 굴에서 그들은 지금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보기 위해서 거기서 기다리고 있다. 구름 같이 둘러선 허다한 증인들이 우리의 경주를 바라보고 있다는 말이 있었는데,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의 조상인 이 세 사람은 막벨라 굴에서 하나님이 그 땅으로 가라, 내가 네 후손을 바다의 모래수와 같이 하늘의 별 수와 같이 많게 하겠고, 천하 만민이 너로 인해서 복을 받게 하겠다고 약속을 했는데 그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려고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지정한 땅! 이 땅은 참으로 중요하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지금도 팔레스타인, 가난한 땅을 이 성경에 있는 말씀대로 문자대로 지정된 땅이라고 굳게 믿고 2천년 동안 땅을 잃고 나가 있다가도 다시 돌아와서 그 땅을 다시 차지해서 뺏기지 않으려고 온갖 방법을 다 쓰고 있다. 왜냐하면 그곳은 지정된 땅이니까, 그 땅이 아니면 자기들은 지정된 땅이 없다. 업으로 준, 기업으로 준 땅이 없다. 그래서 생사를 걸고 그 땅을 지키려고 하고 있다.
얼마 전에도 중동에서 계속 폭탄 떨어지고 로켓을 쏘는데 그것은 바로 그 땅을 지키려고 하는 것이다. 문자적으로 이 사람들은 그 땅에 꼭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리라고 믿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세상에 오시고 난 후에, 그 땅은, 지정된 땅은 팔레스타인이 아니라는 것이 드러났다. 팔레스타인이 아니다. 그럼 그 땅이 어디인가? 그 땅은 대한민국인가? 그 땅은 바로 그리스도 자신이다. 그리스도 자신이 바로 지정한 땅이다. 우리의 기업으로 지정해 준 땅이다.
우리는 그 땅에서 농사를 지으면 모든 만민이 먹고 살 수 있는 농사가 나오는 것이다. 팔레스타인 땅에서는 아무리 농사를 지어봤자 온 천하를 먹여 살릴 농사가 나오지 않는다. 유태교에서는 아무리 잘돼봐야 모든 민족의 축복을 받을 근거가 나오지 않는다. 지금도 그 사람들은 자기들 회당에 유태인 이외의 이방인들은 들어오지 못 하게 한다. 그러니 어찌 거기서 온 천하 만민이 복을 받겠는가.
오늘 그리스도라는 땅을 새로 주었는데,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그 땅은 바로 그리스도를 말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라는 땅에다가 우리 인생을 재배해보니 무한히 풍성하게 나오더라는 것이다. 우리 인생을 어디에 재배할 것인가? 그리스도라는 땅에서 농사를 지어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이 지정한 땅이다. 신약 안에 와서 우리에게 지정해 준 유일한 땅은 그리스도이다. 팔레스타인도 아니고 대한민국도 아니고 미국도 아니고, 오직 그리스도가 우리의 땅이다. 천하 만민이 여기서 복을 받을 것이고, 천하 만민이 여기서 번성하게 될 것이라는 그 땅이 이제 와서 보니 바로 그리스도 자신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참 이상하다. 처음부터 팔레스타인 땅이 아니고 그것은 그리스도라고 했으면 우리가 생각할 때는 지금 유태인들이 헷갈리지 않을 것 같은데, 그러면 왜 그렇게 말씀하셨는가? 유태인들이 그때 그리스도가 너에게 준 영원한 땅이라고 했으면 다 도망쳐 버리고 아무도 오지 않을 것이다. 땅이 없는 사람들에게 땅은 안 주고 그리스도가 네 땅이라고 하면 하나님을 믿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하나님도 아주 수가 높으신 분이다. 단수가 높으신 분이다.
땅이 없는 사람들이니까 가나안 땅을 내놓고 이것이 너희들의 영원한 땅이라고 주었다. 그러니 죽자 사자 그것을 지키는 것이다. 죽자 사자 지키다 보니 아무리 지켜봐도 이게 아닌 것이다. 아무리 지켜봐도 외국 사람들이 와서 다 점령해 버리는 것이다. 여기서 어떤 반성이 생겼겠는가? 하나님은 분명히 약속을 하셨는데 왜 이 땅이 이렇게 험하게 되는가 하는 문제가 생겼을 것이다. 선지자들을 통해서 이것이 깨달아 졌다고 생각한다. 한편으로는 계시이지만 한편으로는 깨달아졌다고 생각한다. 그게 아니구나, 이 땅이 아니고 정말로 참 땅이 있겠구나, 영원한 땅이 있겠구나, 천하 만민이 먹고 살 수 있는 농장이 있겠구나가 선지자들의 이상 속에 비춰왔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사도들을 통해서 예수를 만나고 나니까 이 사람이 진짜 농장이구나, 여기에 농사를 지으면 안될 것이 없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아브라함은 분명히 막벨라 굴에서 그러면 그렇지 하나님께서 이 좁은 땅을 주었겠느냐, 저렇게 넓은 땅이 있는데 저렇게 무한한 땅이 있는데, 우리가 몰라서 그렇구나하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나님은 자기의 왕국을 건설하기 위해서 한 땅을 지정했다. 오늘 우리에게 당신의 왕국을 건설하기 위해서 한 땅을 지정해 주었는데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이다. 이 지정된 땅으로 하나님은 내려오고 계신다. 아무 데나 가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지정한 땅으로 내려오신다.
출애굽기를 읽어보면 하나님은 어떻게 내려 오셨는가? 성막과 함께 사람들 속으로 오셨다. 성막이 있기 전에 그 하나님이 어디 계신지를 몰랐다. 그래서 모세를 산으로 불렀다. 산으로 올라 오라하여 모세가 산에서 만났는데 이스라엘 백성 중에 한 사람도 모세가 만난 하나님을 만난 사람이 없다. 그것은 인류 중에 모세 이외에는 하나님을 직접 대면한 사람이 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 준다.
하나님은 모세만 만나려는 것이 아니고 온 백성을 만나려는 것이 아니겠는가. 모세에게 내가 너는 개인적으로 만날 수 있지만 온 백성은 만날 수 없으니까 네가 가서 내가 거할 수 있는 집을 지어라는 것이다. 그럼 내가 거기로 갈테니까 거기서 내 백성을 만나겠다는 것이고, 그래서 도면을 준 것이 성막에 대한 도면이다. 이 도면을 갖고 모세는 땅에 내려와서 성막을 건축했다.
이 성막이 건축 됐을 때 여호와께서는 그 성막 안으로 들어오셨다. 하나님은 성막과 함께 그 백성에게 오셨다. 성막이 아니면 그 백성에게 오실 수 없다는 말이다. 빽빽한 구름과 나팔 소리와 천둥과 번개와 이런 속에서 모세를 부르셨다. 모든 사람을 다 부른다 해도 아무도 거기 갈 사람이 없다. 거기를 들어가려면 자기 목숨을 내놓지 않고는 갈 수 없다. 무서운 원자폭탄 같은 것이 떨어지는데 누가 들어가겠는가. 성경은 말하기를 모세 한 사람을 불렀다고 되어 있지만 어쩌면 아무리 불러도 모세 한 사람 밖에 못 갔다고 할 수도 있다. 모세 한 사람 외는 갈 사람이 없다.
그런데 성막은 지어놓으니 누구든지 갈 수 있었다. 하나님은 누구나 올 수 있는 누구나 와서 자기를 만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성막과 함께 오셨다. 성막이 세워진 이후로 이스라엘 사람들은 다른 곳에 가서 하나님을 찾는 것은 전부 다 우상숭배이다. 성막 이외의 다른 곳에 가서 하나님을 경배한다거나 제사를 지낸다거나 단을 쌓는다거나 하는 것은 전부 다 우상 숭배에 해당된다. 꼭 그 성막에 가야만 했던 것이다. 단 지파는 가나안 땅에 들어간 후에 핑계를 댔다. 우리는 너무 머니까 예루살렘 까지 갈 수가 없고, 굳이 하나님을 꼭 거기 가서 만나야 하겠는가. 여기서 단을 쌓자하여 단 지파는 자기들 땅에 단을 쌓았다. 그것이 여호와 보시기에 너무너무 악한 일이었다. 그래서 그 단 지파는 저주를 받게 되었다.
성막이 땅위에 세워진 이후에는 어떤 사람도 성막 이외의 곳에서 예배를 드리면 절대로 안되게 되어 있다. 아주 중요한 일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지정하신 곳에 하나님이 계신다는 말이다. 아무 곳에 가서 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성막과 함께 오신 하나님이었으니까 요즘 생각하듯이 무소무재하신 하나님이라는 그런 분이 절대 아니다. 그분은 꼭 성막과 함께 계신 분이다.
이것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예수를 만날 수 있다. 성막에도 계시고 다른 데도 계시고 단을 쌓기만 하면 계시고 그런 하나님을 알아서는 예수를 만날 수가 없다. 꼭 그분은 성막과 함께 오실 수밖에 없는 분이라는 것을 알아야 우리가 예수를 만날 수가 있다.
이 성막 시대가 끝난 다음에 요한복음 1장 14절에 보니까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되어 있다. 이것은 하느님이 어디로 오셨는가? 예수와 함께 왔다는 말이다. 성막과 함께 왔다는 것과 예수와 함께 왔다는 것도 똑같은 말이다.
“이 성전을 헐어라 내가 사흘 만에 일으키겠다”(요2:19)고 했는데, 이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서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님 자신이 바로 그 성막이라는 말이다. 하나님은 이제 성막과 함께 오셨던 하나님은 예수님이 오셨을 때 이미 성막이 없어졌다. 역사적으로 분실되고 없어졌다. 예수와 함께 왔다. 이것은 보다 더 실제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성막과 함께 왔을 때는 그 의미가 그리스도이긴 하지만 그것은 물질적인 것이다.
그러나 예수와 함께 왔을 때는 한 인격과 함께 왔다. 보다 더 실제적이다. 완전하고 실제적이다. 예수와 함께 왔는데 예수와 함께 오신 이후에는, 예수와 함께 계신 하나님 이외의 하나님을 찾는 것은 전부 다 이단이다. 이단이 다른 것이 아니라 그것이 이단이다. 그것이 우상숭배이다. 예수와 함께 있는 하나님 이외의 다른 하나님을 경배하거나 다른 하나님을 찾는 사람은 전부 우상숭배를 하는 것이다.
구약시대에 성막과 함께 오신 하나님을 놔두고 다른 곳에 가서 성막을 짓는 것, 사마리아 사람들이 그랬다. 다른 곳에 단을 짓는 사람들, 단 지파가 그랬다. 이것은 이스라엘 가운데 극열하게 정죄되었고 성경을 읽으면 무자비하게 정죄되었다. 그리고 단 지파는 결국 요한계시록에서 이름도 없어지고 말았다. 거역한 백성인 것이다.
이 무서운 사실을 본다면 예수와 함께 온 하나님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는 아주 더 무서운 일이다. 유태인들은 왜 저주를 받게 되는가? 예수와 함께 온 하나님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저 사람들이 지금 미국에 도움을 받고 후원을 받아서 떵떵거리지만 내 생각은 예수와 함께 온 하나님을 거부한 사람들이다. 하나님을 믿는데 하나님을 경배하는데 예수와 함께 오는 하나님을 거부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해결되기 전에는 절대로 이스라엘에게는 평화가 없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절대로 있을 수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어떤 경로를 통해서든지 우리가 예수를 버린 것이 바로 하나님을 버린 것이구나를 깨달을 때 비로소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에 주어진 모든 축복을 자기들이 누리게 될 것이다.
빌립이 아버지를 좀 보여주시면 족하겠다고 했는데 그때까지 유태인들 속에는 예수와 함께 오신 하나님을 몰랐다는 말이다. 빌립이 아버지를 좀 보여달라고 했더니 나와 함께 이렇게 오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 것이고, 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아버지가 있는 것을 믿지 못하느냐고 말했다.
오늘 우리의 믿음은 무엇인가? 예수와 함께 왔다 이것을 믿는 것이다. 하나님은 예수와 함께 왔다는 이것을 믿는 것이 믿음이다. 그러자 제자들은 헷갈렸다. 자기들하고 밥도 먹고 김치도 먹고 잠도 자고 이렇게 하는 사람이 과연 하나님이 저 사람과 함께 있다는 말이냐, 하나님과 함께 온 사람이 저 사람이냐 말이냐, 하나님은 저 사람 외엔 없다는 말이냐는 문제에 봉착했다.
그래서 요한복음 14장 이후부터 제자들은 계속 헷갈리기 시작한다. 어디로 갈지 모르고 방황하게 된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갈 때 그들은 완전히 갈라져서 어디로 갈지 길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되고 말았다. 예수와 함께 오신 하나님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예수와 함께 오셨다. 오늘은 어떻게 되는가? 예수님이 안계시는데 어떻게 되는가? 이것이 문제이다. 그때는 예수님과 함께 오셨으니까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곧 하나님을 만난 것이었다. 그러면 오늘은 어디 있는가? 예수님과 함께 오시면 오늘 예수님을 만나야 하는데 예수님이 지금 없다. 하늘에 올라가서 만나겠는가? 어디 가서 만나겠는가? 하늘에 계신다면 하늘에 가야 되고, 바다 끝에 계신다면 바다 끝에 가야 되는데 어디에 계신지를 모른다.
오늘 하나님은 교회와 함께 오신다. 교회는 옛날에 성막의 실제이다. 옛날의 성막의 실제가 오늘의 교회이다. 예수의 몸이 곧 교회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은 하나님이 어디에 있는가? 교회와 함께 계신다는 것이다. 저 높은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이 교회와 함께 땅 위에 내려와 계신다는 말이다. 이 말을 들으면 하늘에는 하나님이 없다는 말인가 하고 물을 사람이 있다. 하늘에 하나님이 있어도 우리에게 오신 분은 교회와 함께 있다는 말이다. 하늘에 하나님이 있다는 것은 철학자들이 하는 말이다. 그것은 우리하고 아무 상관이 없다. 우리에게 오신 하나님은 교회와 함께 왔다.
오늘 교회 안의 교회와 함께 하고 계신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면 우리는 또 추상적인 하나님에 빠지는 것이다. 하늘에 있는 철학적인 그런 신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무당들이 믿는 그런 신을 믿게 되는 것이다. 실제적인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다.
교회와 함께 오신 하나님! 이것을 집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몸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전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교회를 보고 하나님의 집이다, 그리스도의 몸이다, 하나님의 전이라는 표현들을 썼다. 이것은 전부 다 성막과 함께 오신 하나님이라는 말을 하기 위해서이다.
오늘 하나님은 교회와 함께 땅위에 내려와 계신다. 오늘 교회가 어디로 간다는 것은 하나님이 어디로 가는 것이다. 오늘 교회가 속리산으로 왔다는 말은 하나님이 속리산으로 왔다는 뜻이다. 옛날에는 성막이 어디로 가면 하나님이 거기 간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은 성막이 가는 데로 따라갔다.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도 성막을 따라갔다. 성막이 움직일 때 그들도 움직이고 성막이 서 있으면 그들도 서 있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임재가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오늘 하나님은 교회와 함께 오시기 때문에, 우리가 교회와 함께 움직이고 교회와 함께 진행하고 교회와 함께 나가는 것이다. 교회와 함께 계신다. 교회를 우습게 생각하면 안 된다. 교회를 놀러 다니는 것으로 생각해도 안된다. 그런 곳이 절대로 아니다. 하나님이 함께 와 있는 곳이다. 이 말은 하나님이 왔다 갔다 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니고 하나님은 교회와 함께 오시는 분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이 오시려면 교회가 있어야 오신다는 뜻이다. 빛이 나려면 전등이 있어야 한다. 전기 빛은 전등과 함께 왔다. 전등이 없으면 빛도 없다. 그만큼 교회는 중요하다.
그런데 이것이 마지막에 어떻게 될 것인가? 요한계시록을 보면 하나님은 그 신부와 함께 온다고 되어 있다. 이것은 아주 달콤한 말이다. 교회와 함께 온다는 말보다도 훨씬 더 달콤한 맛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자신의 신부와 함께 왔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신부와 함께 왔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마지막은 우주적인 혼인 잔치이다. 가장 아름다운 가장 영광스러운 우주적인 혼인 잔치이다. 신부와 함께 온 신랑. 이것은 인류(사람)가 하나님과 부부가 됐다는 뜻이다. 사람과 하나님이 부부 관계가 됐다. 배필이 됐다는 뜻이다.
이것이 창세기 2장에서 하나님이 아담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해서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던 하나님의 갈망이 채워졌음을 의미한다. 이는 하나님이 혼자 계시지 않는다. 배필이 있는 분이 됐다는 것이다. 홀로 계신 분이 아니고 배필이 있는 분이 됐다. 이것은 한 몸이 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그 영과 신부가 말씀하기를 오라 하는 도다, 목마른 자들은 값없이 와서 생명수를 받으라 하더라는 것이다. 이것은 아무런 부족함이 없다는 뜻이다. 목마름이 전혀 없다는 말이다. 밤이 없다, 어둠이 없다, 저주가 없다, 고통하는 것이나 애통하는 것이 없다고 표현하는 말은 하나님이 충분하게 충족이 됐고 사람도 충분하게 충족이 됐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왜 외로웠던가? 사람이 없어서 외로웠다. 인생은 왜 공허했던가? 하나님이 없어서 공허했다. 이 둘이 만나서 그 영과 신부가 됐기 때문에 하나님도 만족하시고 사람도 만족하시게 되었다. 아무 부족함이 전혀 없게 됐다.
우리 인생도 이 사회도 이 세상도 언제 부족함이 없어질 것인가? 하나님과 사람이 연합 될 때, 하나님과 인류가 하나가 될 때 그때 비로소 목마름이 없어질 것이다. 완전한 역사의 해답은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에 있다. 역사의 해답은 거기에 있다. 그 외는 역사는 해답이 없다.
하나님의 왕국! 이것은 인간의 생각을 초월한 것이었다. 유태인들은 지금도 유태인 민족의 생각을 갖고 있다. 지금도 헛된 왕국을 꿈꾸고 있다. 다윗이 말을 타고 올 것이다, 전차를 갖고 올 것이다, 로켓을 갖고 올 것이다, 인공위성을 갖고 올 것이라는 이렇게 헛된 생각을 하고 있다.
하나님의 생각은 그 생각을 초월한 것이다. 하나님의 왕국은 한 인격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이것은 인격의 나라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인격의 나라이다. 땅은 사람과 함께 있는 것이고, 사람은 땅이 필요한 것이고, 이 땅은 사람을 상징하고, 그 사람은 인격이 바로 사람이다.
하나님은 인격과 연합할 때, 신격이 인격과 연합할 때, 그때 모든 것이 충족된다. 성막은 나무와 금으로 만들어졌다. 이것은 인성과 신성이 결합됐다는 뜻이다. 인성과 신성이 결합할 때는 완전한 것이다. 부족한 것이 전혀 없어진다.
오늘 우리도 우리 인성 안에 신성이 들어오면 부족함이 없어진다. 인성 안에 신성이 입혀지면 영광스러워진다. 그것을 잃어버린 인간은 헛된 영광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신성이 있으면 영광스러워질텐데 신성이 없다 보니 헛된 영광을 만들어서 스스로 만들려하다 보니까 남을 못살게 하는 것이다. 우리 같은 사람들은 세상에 큰 빛나는 영광을 추구하지도 못하는 사람들이지만 지극히 적게라도 심지어는 부부간이라도 서로 자기가 영광을 얻으려고 내가 잘났니 네가 잘났니하는 것이다. 심지어 부부간에도 한 집안에 같이 밥 먹고 살면서도 내 이름을 낼 것이냐 네 이름을 낼 것이냐로 싸우고 있다. 그러니 평화가 없다.
그런데 왜 그런가? 신성의 충만이 육체로 거하면 내 이름을 낼 것인가 네 이름을 낼 것인가의 필요가 전혀 없어져 버리기 때문에 네 이름만 다 내어도 전혀 상관이 없고 내 이름은 안 내도 전혀 관계가 없다. 그러니 평화가 되게 된다.
그런데 그렇지 않으면 무엇인가 허전하고 부족하다. 사람은 만들어지기를 빈 그릇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뭔가 채워지기 전에는 항상 허전하고 허탈하다. 그러니 뭔가로 채우려고 한다. 진짜가 아니면 가짜라도 채우려고 한다. 가짜로 채워진 인생을 보면 험하고 거칠다. 자기 이름을 빛내지 않으면 못살고 자기가 이기지 못 하면 못 견디고 자기 뜻대로 안 되면 피똥 싸고 자기 생각대로 안되면 못 견딘다.
이런 것이 모두 왜 그런 것인가? 그 사람이 나빠서 그런 것이 아니고 그 안에 채워질 것이 안채워져서이다. 신성의 충만이 육체를 거해야 할 텐데 그러지 못하다 보니까 뭐가 안차서 그런 것이다. 아이들이 배가 고프다거나 잠이 온다거나 하면 막 짜증을 부린다. 마음대로 안되니까 막 짜증을 부린다.
신성의 충만으로 살게 되면 안되고 되는 것도 없고 모자란 것이 없기 때문에 신경질 낼 일도 없고 피똥 쌀 일도 없고 남 못 살게 굴 일도 없고 남 잘되면 배 아플 일도 없고, 그럴 일이 전혀 없다. 원천적으로 없어져야지 있는 것을 갖고 참으려고 하면 그처럼 어려운 것이 없다. 사돈이 논을 산 것을 보고 배가 아픈데 그것을 참으려고 하니 얼마나 어려운가. 그것이 율법주의다. 생각해보면 배가 아프긴 아픈데 배 아프다는 말을 하기는 그렇고 참는 것이 옳은 줄로 안다. 참으려니 배가 더 아프다.
원천적으로 그것이 필요 없어져야 한다. 사돈이 논 사도 좋고 안사도 좋고 나 보다 잘 살아도 좋고 못살아도 좋고, 상관이 없어야 한다. 내가 충족되면 내가 배가 부르면 밥이 있든지 없든지 전혀 상관이 없다. 호랑이나 사자 같은 놈들도 자기 배가 부르면 전혀 거들떠보지 않는다. 앞에 와서 양이 지나가든지 토끼가 지나가든지 전혀 거들떠보지 않는다. 성인군자가 되어 버린다. 공자가 따로 없다. 그때 보면 너무너무 점잖다. 아주 평화롭다. 배가 고프면 눈이 벌개져서 쫒아 다닌다.
인생은 왜 배고팠는가? 하나님이 없어서 배고팠다. 신성의 충만이 안채워져서 배고팠다. 배고프니까 눈이 벌개져서 쫒아 다니게 된다. 하나님은 건축을 위해서 우리를 부르시고, 건축과 함께 오시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건축하게 하고, 건축 안에 오늘 거하심으로서 우리가 날마다 만날 수 있고 날마다 함께 살 수 있도록 그렇게 하시는 분이다.
[기 도]
감사하신 아버지 하나님! 건축과 함께 오심으로 해서 만날 수 없는 하나님을 만나게 하시고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고 생각 할 수 없는 하나님을 가까이서 건축 안에서 함께 함 안에서 함께 건축됨 안에서 만날 수 있게 하신 것을 감사합니다. 당신과 함께 짜여짐으로 인해서 당신 안에 거함으로 인해서 당신이 우리 안에 우리가 당신 안에 있음으로 인해서 날마다 당신을 누리는 삶으로 우리를 이끌어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성막과 함께 오셨던 하나님이 예수와 함께 오셨고 예수와 함께 오셨던 하나님이 오늘 교회와 함께 오셨고 장차는 그 신부와 함께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를 달콤하게 하실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오늘 교회 안에 하나님이 계실 뿐만 아니라 교회와 함께 오시는 분임을 우리로 하여금 알게 하여 주심을 감사하고 우리가 함께 오신 하나님을 교회와 함께 오신 하나님을 우리가 누릴 수 있게 되기를 원하고 믿을 수 잇게 되기를 원하고 우리가 그를 찬양하게 되기를 원합니다.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