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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부름 받은 사람
2019. 2. 15. 이현래 목사
옛날이야기인데 광주 운동장에서
본 재미있는 이야기이다. 우리나라 선거 초기에 선거를 할 때인데, 한분은 조선대학교 총장을 하신 분이고, 다른 한분은 사업가로서 돈이 많은 분이었다.
두 분이 나와서 연설회를 하는데,
총장을 하신 분은 말을 잘하는 분이다.
다른 분은 사업가로 돈은 많은데
강연을 해 보았겠는가?
그래서 원고를 써가지고 왔는데, 그날 바람에 원고가 날라 가버렸다. 말할 줄 모르는 사람인데 원고가 날라 가버렸으니 어찌 하겠는가? 웃음거리가 되고 만 그런 사건이 있었다. 원고 없이는 말을 할 수 없는 사람인데, 바람에 확 날라 가버렸으니 얼마나 난감하겠는가? 그것이 소문이 퍼져서 되지 않을 사람이었지만 결국 떨어졌다. 방금 내게 무슨 일이 있었는가 하면 어제 저녁에 말할 것을 메모 해놓았는데 그 종이가 어디로 가버리고 없다. 그래서 찾았던 것이다. 그전에도 말씀드렸는데, 히브리 사람이라는 말은 강 저편 사람, 강을 통해서 건너온 사람이라는 뜻이다. 아브라함 족속들은 강 저편에 있다가 강을 건너서 온 것이다. 갈대아우르 지방이 지금 이라크 지방이다. 거기서 이스라엘 땅으로 오려면 큰 강 2개를 건너야 한다. 티그리스, 유브라데 두 강을 건너야 된다. 그 강을 건너 왔기 때문에 별명이 붙기를 히브리인이라고 하면 강을 건너 온 사람들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그런데 강을 건너온 사람들은 참 중요한 의미가 있다. 초기교회를 에클레시아 라고 하는데, 불려온 사람들이다. 옛날 시골에 사신 분들은 알겠지만 동네에 무슨 회의할 일이 있으면 동네 머슴 하는 사람이 징을 가지고 돌아다니면서 두드리면 동네 사람들이 회의장에 모여든다. 이것이 바로 에클레시아이다. 부름을 받은 사람들은 어딘가 다른데 있다가 지금 새로운 곳으로 넘어온 사람들이다. 그러면 교회도 마찬가지로 모두 히브리인들이다. 다 자기 나름대로 강을 건너온 사람들이다. 여러분들도 아마 생각해보시면 어떤 세계에 있다가 어떤 세계로 이동해 왔을 것이다. 모태신앙도 있고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래도 나는 어딘가에서 어떤 강을 건넜다는 생각이 있을 것이다. 교회는 이 세상 속에서 세상을 변화케 하는 그런 존재가 아니고, 세상 속에서 밖으로 나온 사람들이다. 지금도 물론 그렇지만 한때 우리나라에서 교회가 기도하고 천당 간다고 하고 있으면 되느냐? 세상이 이렇게 좋지 않은데 교회가 거기 들어가서 세상을 변화시켜야 된다고 했다. 주로 이런 사람들은 구약성경, 선지자 시대를 이야기하면서 그런 이야기를 했다. 선지자들을 봐라. 세상에 들어가서 세상을 변화시키지 않았느냐? 왕 앞에도 가야 한다고 했다. 우리나라도 교회가 둘로 갈라져서 한쪽에서는 사회에 참여한다고 청와대까지 들어간 사람들도 있고 별 사람이 다 있다. 어떤 사람은 청와대를 어떻게 해서 들어갔는지 모르겠는데, 박*희대통령을 만나서 우상숭배하느니 어쩌고 한 모양이다. 박*희대통령이 듣고 나서 하는 소리가 당신들이나 잘하라고 했다고 한다. 교회는 자기들끼리 싸우면서 청와대에 와서 불상을 두었느니 하면서 그런 소리를 하니까 우스울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니까 당신들이나 잘하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기독교가 세상을 변화시킨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변화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세상이 그냥 있는 것이 아니고 주관자가 있다. 주관자를 잡기 전에는 변화시킬 수 없다. 임금이 있는데 그 임금을 놔두고 그 나라를 변화시킬 수 있는 방법이 있겠는가? 만약 그렇다면 이스라엘 사람들도 애굽에서 종노릇할 때 200만이나 되었으니 애굽을 변화시키면 되지 굳이 광야로 나와서 가나안 땅까지 갈 필요가 없다. 바로가 있는 한 애굽을 변화시킬 방법이 없기 때문에 나와야 된다. 그 사람들도 불러내어서 나온 사람들이다. 아브라함만 강을 건너온 사람이 아니고, 이스라엘 사람들도 역시 또 강을 건너온 사람들이다. 홍해를 건너서 나왔다. 여기서 사람들이 헷갈리는 것이다. 특별히 젊은 사람들은 많이 헷갈리는 것이다. 세상을 이렇게 놔두고 교회에서 이러고 있다고 되겠는가?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 우리 책임이 아니냐? 우리는 빛과 소금이다. 세상에 나가서 비춰야 된다고 한다. 세상에 나가면 빛과 소금이 너무 작아서 어둠을 밝히는 것도 아니고 쫓아내는 것도 아니다. 불가능하고 역부족이다. 지금도 세상의 변화와 교회의 능력을 비교하면 새 발의 피다. 막을 방법이 없다. 하나님이 오죽하면 그 백성을 불러냈겠는가? 하나님이 가능하시다면 그 안에 믿는 사람을 두어서 그 세계를 변화시키지 무엇 하러 거기서 불러내겠는가? 맞는지 모르겠는데 갈대아우르 거기는 바벨탑이 세워졌던 동네라는 말이 있었다. 우리의 위치가 어디인지를 분명히 아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다고 천당 가자고 앉아만 있는 것이 교회인가? 그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그런 문제가 생겼다. 7,80년대부터는 군사정권이 지배하던 시대로 제3세계 신학, 사회복음주의 신학이 활발히 움직이던 때이다. 알고 보면 카톨릭이다. 남미지방의 교회는 카톨릭인데 자본주의가 다 잠식하고 있는 곳이다. 돈은 미국에서 가져가고 종교는 카톨릭인 도시이다. 카톨릭에서 일어난 운동이 사회복음주의 운동이다. 이것이 결국 개신교에까지 들어와서 난리를 쳐서 그때는 개신교가 두 쪽으로 갈라졌다. 교회의 위치가 어디인가를 구별하는 것이 아주 필요하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벧전1:16).”, “너희는 그들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고후6:17).”라는 말이 있다. 오늘은 그 문제를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선악과를 먹고 하나님의 동산에서 나왔다. 하나님의 동산에 있어서 어떻게 해보지 못 있고 나왔는가? 하나님이 나가라고 하니까 나왔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화염검을 둘러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이것은 같이 있을 수가 없다는 뜻이다. 선악과를 먹은 가인과 아벨은 나가서 새로운 종교적인 방법을 시도한 것이다. 하나님께로 나가려면 제물이 있어야 되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아주 소박한 생각이다. 우리도 누구를 만나러 가려면 선물이라도 가지고 간다. 과일이라도 하나 사가지고 가야지 맨손으로 갈수 없다. 하나님께 가는 것도 맨손으로 가면 안 된다는 것도 소박한 생각이다. 그런데 그것이 알고 보면 종교이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보면 무엇을 가지고 간다. 내 의를 가지고 간다. 내 선을 가지고 간다. 이것이 다 종교행위이다. 어른들을 만나러 가면서 그냥 맨손으로 가는가? 뭐라도 가지고 간다. 그것이 예의이다. 그래서 예배라고 한다. 가인과 아벨은 그런 생각으로 간 것이다. 각자 자기의 소출을 가지고 갔다. 결과는 둘이 싸워서 형이 아우를 죽이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것은 의미상으로 생각하면 큰 자가 작은 자를 죽였다는 말이고,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죽였다는 말이다. 종교의 역사가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누르고 없애서 자기가 독점하려고 했던 것이 종교의 역사이다. 성경이 바로 그것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다. 가인과 아벨에서 일단락이 된다. 그 말은 동산에서 시작된 아담의 역사가 제 1단계로 가인과 아벨에서 끝난다는 뜻이다. 총론적인 것이다. 그러면 가인과 아벨의 역사는 앞으로도 계속 같은 유형으로 발전하고 끝나고 발전하고 끝난다. 창세기를 읽으면 1장은 총론이고 2장은 각론이다. 성경이 다 그런 방식으로 써 있다. 맨 처음에 나온 것이 총론이다. 1장이 대부분 총론이다. 그 다음은 연역해나가는 방식으로 써있다. 논문식의 귀납적으로 쓰지 않고 연역적으로 써있다. 1장만 잘 읽으면 잘 아는 셈이다. 더 심하게 말하면 1장 1절만 알면 다 아는 셈이다. 거기에 가장 중요한 말이 1장 1절에 써있다. 창세기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1:1).”로 시작한다. 이것이 전 성경의 서론이고 총론이다. 이것만 확실히 안다면 다른 것을 다 아는 셈이다. 복잡하게 뒤에 가서 찾아서 귀납적으로 올라가려면 불가능하다. 그것은 과학적인 방법이다. 조사해서 증거를 가지고 차차 올라가는 것이다. 과학은 그렇게 할 수 있지만 진리는 그렇게 해서 발견할 수 없다. 이 복잡한 세상을 다 어떻게 알고, 이 인간을 어떻게 다 알고, 그 다음에 하나님을 알겠는가? 불가능하다. 성경은 다 가장 중요한 말을 가장 먼저 해 놓았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요1:1).” 요한복음에서 가장 중요한 말이 그 말이다. 마태복음에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마1:1).” 이것이 가장 중요한 말이다. 그 말만 알면 마태복음을 다 아는 셈이다. 하나님은 이렇게 어떤 노선은 어떤 노선대로 간다. 선악과를 먹었으면 그 노선대로 가게 되어있다. 그 길로 가니까 아무리 막아도 안 된다. 돼지는 끌고 가려고 목을 잡아당기면 가지 않는다고 한다. 그런데 몽둥이로 앞을 때리면 저돌적이라서 앞을 뚫고 나가려고 하니까 앞으로 간다고 한다. 순리로 안 되는 것이다. 때려서 그놈을 이기려고 가다보니까 앞으로 온다고 한다. 선악과를 먹은 인간도 마찬가지이다. 앞에서 두드려야 그놈을 뚫고 나가지 달래서는 오지 않는다. 우리가 다 그렇게 하지 않았는가? 자기로서는 살려고 하는 것이 막히니까 뚫으려고 하나님께로 가는 길이 되거나 아니면 자기 길로 가게 되거나 하게 된다. 고난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사람들이 많은 이유가 그런 것에 원인이 있다. 하나님이 일부러 고난을 주겠는가? 하나님의 방법은 여기서 장수족들을 지나서, 그다음에 네피림 족속들의 세계를 지나서 바벨로 간다. 이것은 결국 다 알고 보면 선악과를 먹은 아담의 노선이다. 우리 인간이 다 그렇다. 장수, 유명해지는 것, 다 똑같다. 아담 한 사람만 알면 모든 인류를 아는 것이다. 바울이 사람을 딱 두 사람을 내놓고 이야기를 한다. 아담 안에서 우리가 죄인 된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의인이 된다고 했다. 한 사람이다. 그 한 사람 안에 모든 사람이 다 포함되어 있다. 여러 사람 연구하지 않아도 된다. 우리가 어떻게 60억을 다 연구하겠는가? 아담을 알면 60억을 다 아는 것이다. 우리가 가는 노선이 참 귀중한 노선이다. 한 사람으로 모든 사람을 아는 것이다. 자기 한 사람만 확실히 알면 모든 인류를 다 아는 셈이다. 남을 알 필요도 없다. 아담이 가는 그 노선은 결국 바벨로 가는 것이다. 선악과를 먹었던 원인과 목적은 바벨로 가기 위한 것이다. 네가 하나님 같이 될 것이라는 이 말이 결국 바벨로 갈 것이라는 말이다. 바벨의 구호가 ‘우리 흩어짐을 면하자. 뭉치자. 강해지자. 성을 강하게 쌓자. 흙을 벽돌로 굽자. 망대를 높이 세워서 하늘 높이 이르게 하자. 그리고 우리 이름을 세상에 빛내자.’ 이것이 바벨의 구호이다. 이것이 선악과를 먹은 마지막 구호이다. 인간은 어디가도 똑같다. 약자일 때는 어린양이 되었다가 강자가 되면 다 사자가 된다. 그래서 더욱 강해지기를 원하고 더욱 강해지기를 원하고 계속 더 강해지기를 원한다. 더 커지기를 원한다.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 이것은 시대가 달라지고 문명이 달라진다고 해서 인간이 달라지는가? 인간은 언제든지 그대로이다. 어떤 사람들은 시대가 어떤 시대인데 옛날이야기가 무슨 소용이냐고 하는데, 옛날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아브라함 이야기가 옛날이야기가 아니고 지금 이야기이다. 이 사람들을 아는 것이 우리가 가는 길, 노선을 아는 것이다. 내가 생각해도 신기하다. 다 지나와도 우리가 모른다.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우리가 다 지나간다. 그런데 모르는데 어느 날 그것이 알아진다. 신기하다. 어느 날, ‘아 그랬구나.’ 이렇게 알아지는 세계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다. 처음에 워치만니를 만나서 새로운 길에 들어섰을 때, 지금 생각하면 너무 좋았다. 이브라함이 100살이 되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거기다가 이스마엘을 낳기 전에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이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으면 그보다 더 좋은 것이 어디 있겠는가? 내가 비록 의롭게 될 수 없지만 의롭다 여김을 받았다는 것은 얼마나 귀한 일인가? 그것이 너무 좋았다. 그런데 아브라함을 보면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낳은 것이 이스마엘이다. 자기 후사가 될 줄 알았다. 그런데 결국 후사가 되지 못하고 집에서 쫓아내야 됐다. 거기다 사라는 자기가 하갈을 데려왔으면서도 당당하게 말한다. 저 아들은 내 아들과 함께 유업을 얻지 못할 자니까 내보내라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얼마나 갈등이 생기겠는가?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사라가 말한 대로 하라는 것이다. 이것도 참 모순된 일이다. 의롭다 여기고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라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데, 사라의 말대로 따라 하라는 것이다. 이것은 아내 말을 잘 들으라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의 경륜은 이삭에게 있지 이스마엘에게 있지 않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경륜을 발생하기 위해서는 인간 상식은 소용이 없는 것이다. 의롭다 함을 받고 난 후에 낳은 아들이 이스마엘이다. 그런데 내보내라는 것이다. 지금 아랍권은 쫓겨난 세계이다. 무슨 죄인가? 아무 죄도 없다. 단지 하나님의 경륜에서 이탈된다는 말이다. 그 사람들이 잘못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하갈이 무슨 잘못을 했는가? 이스마엘이 또 무슨 잘못을 했는가? 아무 잘못한 것이 없다. 오히려 잘못 했다면 사라가 잘못한 것이다. 자기가 데려와서 아들을 낳게 해놓고 이제 와서 아들을 낳았다고 하갈이 낳은 아들을 내보내라. 저 아들은 내 아들과 함께 유업을 잇지 못하리라고 한다. 이것은 앞뒤가 안 맞는 생각이다. 세상의 인간 상식으로 생각한다면 사라가 밖으로 나가야 된다는 생각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라가 말한 대로 들으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얼마나 고민이 되었겠는가? 고민을 하다가 하나님이 하라고 하니까 어쩔 수 없어서 먹을 것을 챙겨서, 며칠이나 먹겠는가마는 그것을 챙겨서 모자를 내 보냈다. 그들이 나가서 대성통곡을 했다. 왜 통곡을 했는가? 억울하니까 통곡했다. 억울하지 않으면 통곡을 하겠는가? 그래서 여호와께서 그것을 위로하시느라 “너무 슬퍼하지 마라. 네 자손도 내가 큰 민족을 이루게 해주겠다.”고 위로하여 내보냈다. 그 말씀대로 사실은 아랍권이 이스라엘보다 훨씬 크다. 하나님은 왜 자기가 의롭다고까지 해놓고, 또 하갈을 데려다가 자식을 낳을 때도 아무 말도 하지 않으시다가 갑자기 와서 내년 이맘때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라고 왜 그렇게 말씀하시는지 이해할 수 없다. 진즉 말씀을 해 주시던지 미리 막든지 이랬으면 좋을 것 같은데, 하나님도 모른 체하고 계시다가 갑자기 내년 이맘때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라고 했다. 아브라함이 “어찌 그런 일이 있겠습니까?” 그렇게 말했다. 사라는 장막 뒤에서 웃었다고 되어 있다. 그때 당시에 아브라함과 사라를 면밀히 분석해 본다면 정말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믿음도 소용없어져 버리고, 그들의 선함도 소용이 없게 되어버리고, 모든 것이 소용이 없게 되어 버렸다. 만일 지금 기독교 안에 이것을 적용해본다면 뭐가 남겠는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이것도 소용이 없다고 하면 뭐가 남겠는가? 소망도 없고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아브라함에게는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다. 아무 소용이 없는 때가 왔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삭을 주었다는 것이다. 이치에 맞지 않는데 이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 알 수 없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 생각대로 하셨다면 우리가 참 좋을 것 같다. 그런데 우리 생각대로 되었으면 우리는 망하는 것이다. 우리가 전혀 모르는데서 작전 계획을 세워서 왔는데, 그것이 우리의 구원이 된 것이다. 우리는 어디까지나 뭐가 되었든지 간에 끝까지 우리의 어떤 것을 가지고 성취하려고 생각한다. 그런데 우리의 구원은 거기 있는 것이 아니다. 전혀 내가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고 생각지도 못한데 있다. 바울이 이것을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고전2:9).”라고 말했다. 바울 같은 사람이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고 하니까 우리는 말할 것도 없다. 여기서 나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때 참 소망이 생겼다. 많은 사람이 그 책을 읽었는데 왜 그냥 넘어갔는지 모르겠다. 나는 그것이 너무 좋아서 또 읽고 또 읽고 또 읽고 3번이나 읽었다. 그것을 생각해보니까 나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때야 그 생각이 났다. 이것이 나를 말하는 것이구나. 그렇지 않으면 나는 구원받을 수 없는 것이다. 나는 둔해서 죽을 자리에서 내가 살아서 병원에서 퇴원을 하면서도 감동이 없었다. 내가 죽었다가 살았다는 이런 감동이 없이 그냥 무덤덤하게 나왔다. 다른 사람들이 병원을 나오듯이 그렇게 나왔다. 그리고 두 번째 경험은 내가 완전히 절망에 빠져 있을 때 친구를 통해서 나를 불러냈다. 그런데 그것도 감사했던 것은 무엇 때문에 감사했는가? 내가 현실적으로 너무 암담한 상황에 있어서 올 데 갈 데가 없는 나를 불러냈기 때문에 그것이 일차적으로 나에게 해방이었다. 그것이 너무 좋았다.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이냐를 생각지 않고 나왔다. 왜냐하면 너무 현실이 답답하고 갈 데가 없었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이삭 사건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다. 이삭 사건이라는 것을 몰랐다. 그리고 세 번째도 내가 뼈를 묻을 줄 알고 있었던 그 교단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그런데 그것도 기약 없는 출발이었다. 나가면 어떻게 될 것이라는 것이 전혀 없고 나가지 않으면 안 되어서 나왔다. 더 있을 수 없기 때문에 나왔다. 그런데 길을 열어 놓았다. 전혀 생각지 못한 길을 열어 놓았다. 이것이 다 이삭 사건이다. 못하고 듣지도 못하고 마음으로 생각지 못했던 일이 일어났는데도 나는 그런 감동을 느끼지 못했다. 그런데 성경에 이 말씀이 써있다. 이것을 누군가 나에게 열어주었기 때문에 이것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전혀 모르는 일이었구나. 계획해보지 않았던 일이 생겼구나. 내가 지금 대구에 있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C.C.C.에서 나가라고 해서 나왔는데 나가서 어떻게 될 것이라는 것을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다. 뭐가 있었는가? 아무것도 없었다. 그때 이*승형제가 없었으면 나는 그냥 제천으로 가서 아이들이나 볼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 형제가 같이 있었기 때문에 우선 머무를 수가 있었다. 우선 있어보자. 그렇게 머물렀던 것이 지금 40년이 훌쩍 흘렀다.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다. 대구에 있으면서 여기에 이렇게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대학생들이 20명 정도 따라온 사람들이 있었는데 헌금 한 푼 안 나온다. 다들 하숙생이고 자취하는 학생들인데 뭐를 바라 볼 것이 있겠는가? 그런데 그것밖에 할 일이 없으니까 한 것이다. 학생들이라도 있으니까 할 말이 있지 그들마저 없었으면 누구에게 이야기를 하겠는가? 내가 어디 뚫고 돌아다니면서 무엇을 만들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런 능력이 없다. 사람을 모아보려고 생각을 하니까 참 어려웠다. 어떤 사람들은 잘 모으는데 나는 그런 재주가 없다. 재주라면 이상하지만 그런 능력이 없다. 나는 그런 사람이 부러웠다. 어디 가서 사람을 모으면 나는 그것이 안 되니까 부러웠다. 그래서 나는 그것이 신비주의적인 능력을 가지면 될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쫓아다녔다. 방언하는 데를 쫓아다녔는데 그것도 안 되었다. 내 능력이 없으니까 그런 능력을 받아서 해보려고 했는데 그것마저도 안 되었다. 그때 학생 20명이 말없이 따라 나오지 않았으면 나는 그냥 할 일이 없는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대구형제들이 참 귀하고 신통하다. 아무 말도 없이 따라 나왔다. 어제까지 그 사람들이 올지 안 올지 몰랐다. 한 사람에게도 말해본적이 없다. 목사님 어떻게 할 것이냐고 물어본 사람도 없었다. 더구나 그때 나는 말할 수도 없는 사람인데 자꾸 꾸역꾸역 온다. 방은 좁고 그래서 할 수 없이 장소를 얻어서 모임을 가졌다.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대구에 있을 명분이 아무것도 없다. 이런 것을 생각해보면 전부 이삭 사건이다. 알고 보면 이삭사건이다. 내가 생각지 못했던 사건이고, 있을 수 없는 사건이다. 그것을 그렇게 생각하지 못했는데 이 성경이 그렇게 열어주니까 이 사건이었다고 생각하니까 얼마나 재미가 있는가! 그래서 그 책을 3번을 읽었다. 내 일생에 처음이고 마지막이다. 그렇게 읽어본 책이 없다. 성질이 무슨 책이든지 한 삼분의 일을 읽으면 많이 읽는 것이다. 그런데 3번을 완독했다. 내 역사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 또 발생했다. 나는 거기서 새로운 길이 열렸다. 그 길이 있었다. 우리가 생각지 못한 길이 있었다. 전혀 내 관념에 없는 그런 길이 있는 것이다. 이 길로 오면 지름길이다. 아주 가깝고 지름길인데 이 길로 들어서지 않고 다른 데로 가면 큰 산에 들어가서 헤매는 것과 똑같다. 성경을 아무리 읽고 연구해도 똑같다. 한라산만 하더라도 들어가서 언제 다 검사하고 한라산을 알겠는가? 하물며 성경이라는 큰 산에 들어가서 무엇을 찾아서 나오겠는가? 아무리 공부해도 안 된다. 내가 일찍이 공부를 못하게 되어서 다행이지 내가 그것을 공부하고 있었더라면 내 인생을 망칠 뻔 했다. 지금은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길이 없는데 가서 길을 만들겠는가? 요즘 민주주의적인 방식은 밑에서 조사해서 통계를 내서 올라가는 것이다. 이것은 과학이나 하지 하나님의 세계는 불가능하다. 언제 내가 60억 인구를 다 만나보고 결론을 얻겠는가? 언제 모든 교회를 다 가보고 결론을 얻겠는가? 그것은 길이 아니다. 하나님이 길을 만들어 놓았다. 아무리 산이 크고, 아무리 복잡하고 가시덤불이라도 하나님이 가신 길은 있다. 그것은 아주 간단하고 쉬운 지름길이다. 나는 그 후로 성경에 여러 가지 말씀이 있겠지만 인물중심이 되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그리고 요셉 그리고 모세, 다윗, 다른 사람은 다 알 필요도 없다. 직통으로 가는 길이 이 길이다. 그리고 예수이다. 아주 가깝다. 시간적으로 보면 모르지만 아주 가깝다. 왜냐하면 이 사람들이 다 공통점이 있으니까 가깝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게 되는 그런 점이 있으면 이삭도 마찬가지이다. 야곱도 마찬가지이고 요셉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쉽다. 쉽다는 말이 그 말이다. 이삭이 제 정신으로 축복을 했는가? 눈이 어두워서 축복을 했는데 야곱을 축복해 놓았다. 축복하고 나서 에서에게 하는 말이 내가 축복을 다해서 너에게는 줄게 없다는 것이다. 이런 기가 막힌 말이 어디가 있는가? 큰 아들 에서에게 별미를 만들어 오라고 해놓고 축복은 야곱에게 했다. 그러면 이놈이 나를 속여 먹었으니 다시 너를 축복하겠다고 우리 같으면 그렇게 하면 될 것 같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고 에서가 와서 내가 당신의 아들 에서라고 하니까 속은 것을 알았는데도 너한테 줄 복이 다 주어버려서 없다는 것이다. 참 이상한 말이다. 우리 같으면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다. 복을 야곱에게 주어버리고 너한테는 줄 것이 없다는 것이다. 만약 이삭이 맨 정신으로 눈이 밝았을 때, 하나님이 축복하라고 했으면 야곱을 축복하겠는가? 당연히 에서를 축복한다. 그럴 줄 아시고 눈이 멀었을 때 축복을 하게 했다. 큰 실수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경륜이 그 쪽에 있었으니까 야곱이 후계자가 된 것이다. 그것이 이삭 사건과 똑같은 사건이다. 우리 인간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사건이다. 야곱 역시 마찬가지이다. 모든 것을 쟁취하던 사람이다. 자기의 능력과 꾀로 다 쟁취하던 사람이다. 그런데 마지막에 할 수 없이 베냐민을 잃게 되었다. 마지막 남은 것이 베냐민이었는데, 베냐민을 내놓지 않으면 양식을 가져오지 못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가 하는 말이 “내가 베냐민을 잃으면 잃으리라.”고 했다. 그것이 얼마나 기가 막힌 절망인가? 그런데 베냐민을 내놓으니까 요셉이 왔다. 이것이 다른 이야기가 아니고 다 같은 이야기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우리 조상’이라고 이야기하면 이 세 사람을 이야기한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때도 꼭 ‘우리 조상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한다. 그렇게 말하는 이유가 있다. 그런 하나님이다.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주셨던 하나님, 이삭의 눈이 멀게 해서 야곱을 축복하게 했던 그 하나님, 마지막에 베냐민을 내놓고 요셉을 다시 받게 한 그 하나님이었다. 우리 하나님이 그 하나님이다. 내 하나님이 그 하나님이 되니까 내가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 아무 내 조건이 없다. 내가 가지고 있는 조건이 아무 것도 없다. 내가 갖추고 있는 조건은 전부 다 무효가 되었다. 아브라함도 믿음 안에서는 참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순종한 사람이다. 그런데 그것도 소용이 없어졌다.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니다. 그것까지도 아닌 다른 세계가 있다. 이삭도 마찬가지이다. 굉장히 참 좋은 사람이다. 한 번도 누구와 싸우지 않고 다투지 않고 다 내놓고 간 사람이다. 그래도 가는 데마다 창대했다. 이런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야곱은 정말로 세상으로 본다면 정말 재주가 많은 사람이다. 결국 흉년이 들어서 망하게 된다. 그런데 그 밖에 계신 분이 있다. 우리 인간의 상식밖에 있는 분이 있다. 우리 인간 상식밖에 있는 분이 우리 소망이다. 우리 안에 있는 것이 소망이 아니다. 우리 안에 있는 것은 언제 없어질지 모른다. 아무리 큰 소망이라도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느니(눅12:20).”라고 해버리면 끝이다. 아무 것도 없다. 그런데 그 밖에 계신 분의 계획이 있으면 그것이 우리의 소망이다. 우리의 그런 것과 전혀 상관이 없는 또 다른 계획이 하나 있다. 이것이 우리의 소망이다. 복음은 무엇인가? 이것을 전하는 것이다. 우리가 다 할 수 있는 것을 전하는 것이 아니다. 복음이라는 것은 우리에게 없는 것을 가져다주는 것이다. 나에게 없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낳을 수 없는 이삭을 가져다 준 것이 복음이다. 이삭으로서는 할 수 없는 축복을 하게 한 것이 복음이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인간적으로 사회적으로 윤리나 도덕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선생들이 하는 일이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사람들에게 없는 것을 전하는 것이다. 생각지 못했던 것, 우리가 알지 못했던 것, 들어보지 못했던 것, 만져보지 못했던 것, 그것을 주는 것이 복음이다. 병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이 아니라면 살아날 수 없는 병이다. 그 약이 없으면 살아날 수 없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가 어떻게 우리의 구속자가 되겠는가? 대장이 와도 안 되고, 하나님이 와도 안 될 것인데, 어떻게 우리의 구속이 되겠는가? 사람에게 없는 것을 가져와야 살게 되어 있는 것이 인간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계획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그래서 약이 없다. 우리 속에 있는 어떤 것을 가지고서는 살아 날 수 없는 병이다. 병도 요즘에는 좋은 항생제가 나와서 죽을 사람이 많이 산다. 아무리 좋은 항생제라도 나쁜 것을 없애서 살게 하려면 그 사람 자체가 그 약을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없으면 아무리 좋은 약을 써도 안 된다. 나와 같이 병원에 입원해 있던 사람 중에 나이도 같고 환경도 비슷하고 다 비슷한 사람이 있었다. 나는 두 달 만에 균이 없어졌다. 이것은 의학적으로는 증명이 안 된다. 그 사람은 몇 달간 입원하고 있었는데도 균이 없어지지 않았다. 약을 계속 써도 안 되었다. 나는 약을 안 썼는데도 균이 없어지고, 이 사람은 약을 썼는데도 균이 안 없어지는 것이다. 결국 죽었다. 그것은 약의 문제가 아니고 내 몸에서 약을 받아들이느냐 안 받아들이느냐의 문제이다. 아담 안에서 선악과를 먹은 인간은 돌아오게 할 약이 없다는 뜻이다. 우리의 어떤 선악으로, 의로움으로, 심지어는 의롭다 함을 받은 것으로도 우리를 완전히 돌이킬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의 언약에 불과하고 약속에 불과한 것이다. 그런데 죽은 사람을 살리려면 다른 생명이 와야 살리지 있는 생명이 없어졌으면 어떻게 살리겠는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는데 어떻게 다시 살리겠는가? 다른 생명이 오는 것이다. 부활이라는 것은 다른 생명이 왔다는 말이지 있던 생명이 살아난 것이 아니다. 있는 생명이 살아나면 소생이다. 죽었다가 사흘 만에 깨어난 사람이 있다. 심지어는 간증을 들어 보니까 8일 만에 깨어났다는 사람도 있다. 옛날에 김*봉씨라는 대중소설가가 있었다. 6.25때 붙들려서 인민재판을 받았다. 서울대학교 교수였는데 시청 앞에서 제자들에 의해서 인민재판으로 타살 형을 받았다. 몽둥이로 때려서 죽이는 형이다. 패서 죽였는데, 이 사람이 집에 와서 시체를 치우지 못해서 8일 동안 있었는데 8일 만에 깨어났다고 한다. 소설가답게 그런 이야기를 써 놓았다. 자기가 8일 동안 죽어 있었는데 아무 것도 본 일이 없고 천당이 없더라는 이야기를 써놓았다. 그래서 내가 기억을 하고 있다. 아무 것도 없더라는 것이다. 나도 죽어 보니까 몇 시간 동안 죽어 있었는지 모르겠는데 아무 것도 없다. 죽었는지도 살았는지도 모르겠고 아무 것도 모르겠다. 아무 것도 모르는 시간이 죽은 시간이다. 살려면 다른 힘이 와야 사는 것이지 자기 힘으로는 못 산다. 나는 죽었다가 살았어도 그것은 소생한 것이지 부활한 것은 아니다. 부활은 완전히 죽었다가 다시 산 것이다. 다시 살려면 다른 힘이 와야 하는 것이다. 우리 속에 남아 있는 것으로는 다시 사는 것이 아니다. 나사로는 죽었다가 다시 살았지만 소생한 것이다. 부활의 상징으로 나와 있는 것뿐이다. 그것도 예수님이 살렸기 때문에 산 것이다. 지금 썩어서 냄새가 난다고 한 것은 그 사람 속에 생명이 없었다는 뜻인데, 예수님이 일어나라고 하니까 일어난 것이다. 그것은 다른 생명을 주었다는 뜻이다. 상징적인 해석이다. 우리는 ‘어느 길로 가느냐?’ 이것이 너무너무 중요한 것이다. 어디로 가느냐? 우리를 불러내서 어디로 데려 가느냐? 우리는 그것을 걱정하는데 걱정할 필요가 전혀 없다. 불러내신 이가 신실하시면 불러내신 이의 뜻대로 가는 것이다. ‘누가 나를 부르느냐?’ 이것이 중요하다. 어떤 세계로부터 불러내려면 보통 일은 아니다. 사탄이 동산에 있는 아담을 불러낼 때 그게 보통 일이 아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정녕) 죽으리라(창2:17).”고 했는데, 그것을 무시하고 나왔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지 않은가? 불러낸 사람은 보통 사람이 아니다. 불러낸 신이 있다면 그 신은 보통 신이 아니다. 사탄에게 불려나간 사람도 돌아오기 어려운 것이고, 하나님께 불려나온 사람도 돌아가기 어려운 것이다. 부르신 이가 누군가에 따라 가는 목적지가 다를 뿐이다. 사탄이 불러내서는 바벨론으로 가는 것이고, 하나님이 불러내서는 새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이다. 그 차이이다. 일단 불러내신 분에게 잡히면 그분이 가는 길로 가게 되어 있다. 왜냐하면 길을 닦아 놓았기 때문이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이 세 사람은 같은 길을 닦아 놓았다. 똑 같은 길이다. 정류장이 조금씩 다를 뿐이다. 경부선을 타고 가면 대전을 지나서 김천을 지나서 대구를 지나간다. 정류장은 다르지만 길은 같다. 아브라함의 부르심 안에 왔다. 이삭의 부르심 안에 왔다. 야곱의 부르심 안에 왔다. 길 자체가 보증이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마태복음에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마1:1).”고 말했는데 그것이 전부이다. 그리고 그 안에 다섯 여인도 있다. 이 여인들도 다 같은 노선이다. 인간적으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그리고 이 여자들이 다 인간이 해결할 수 없는 일을 해결했다. 이것이 다 같은 노선에 있기 때문에 한번만 딱 붙잡히면 그 노선으로 쫙 갈 수밖에 없도록 되어 있다. 내가 지금 돌이켜보니까 그때 처음 아브라함에게 딱 꽂힌바 되었는데, 앞으로 어디로 갈지 몰랐다. 전혀 몰랐는데도 항상 그 길로 가게 되었다. 항상 그 길로 갔다. 노선이 그렇게 중요하다. 내가 그때그때 노선을 찾아 가는 것이 아니다. 철로는 이미 나 있다. 도로는 이미 개설되어 있다. 그래서 한 번 들어서면 그 길로 가게 되어 있다. 우리가 어디서 부름 받았든지 간에 부름 받은 것 자체가 복이다. 이것이 모두 공중에서 본 사건이다. 옛날에 측량하는 방법은 사람이 일일이 콤파스를 들고 온 산을 다 뒤지고 돌아다니면서 지도를 그렸다. 김정호는 정말 대단한 사람이다. 그 다음에는 일본 사람들이 우리나라 산이고 땅이고 다 측량을 했는데, 전부 발로 밟아 측량한 것이다. 그런데 거의 틀리지 않는다고 한다. 그만큼 정확하게 측량 해놓았다. 그런데 요즘은 사람이 발로 밟고 다니면서 측량하지 않고, 공중에서 비행기로 측량한다. 항공 촬영을 하면 환하게 보인다. 공식만 적용해 버리면 생생한 지도가 그냥 나온다. 인생 문제도 항공촬영을 하면 쫙 보이지 않겠는가? 옛날처럼 발로 걸어 다닐 필요가 없다. 항공촬영 해버리면 지나가면서 다 찍어 버린다. 도시에서 그린벨트를 감시하는 것이 있다. 옛날에는 사람이 걸어 다니면서 감시하였다. 어떻게 산을 다 감시하겠는가? 지금은 항공촬영을 한 번씩 한다. 그러면 없던 집이 나오고, 없던 길이 나온다. 그래서 거기만 찾아가면 된다. 너무 쉽다. 우리도 공중 권세 잡은 자만 이긴다면 우리가 공중에서 모든 것을 다 볼 수 있다. 교회도 공중에서 봐야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있다. 땅에서 봐서는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다. 왔다 갔다 하고 세상 풍조에 휘말려 가니까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그런데 공중에서 보면 길이 새로 나도 그 길밖에 없다. 경부선을 타고 있으면 기차가 운전하는가? 그냥 가는 것이다. 그런데 부산으로 간다. 길이 부산으로 가는 길이다. 기차에 타고 있는 사람들은 자기가 길을 찾아가는가? 그 노선에 타고 있으니까 부산까지 가는 것이다. 잠을 자도 가고 걸어가도 가고 똑 같이 간다. 열심이 있는 사람이나 없는 사람이나 다 똑 같이 간다. 공중에서 보면 전혀 다른 세계이다. 부름 받은 사람! 우리는 부름 받은 사람으로서 구약시대에는 히브리인, 신약시대에는 에클레시아이다. 모두 부름 받은 사람들이다. 이스라엘 민족은 부름 받은 민족이다. 교회는 부름 받은 백성들이다. 원리가 다 똑 같다. 그러면 어디로 가는가? 전부 다 예수 안으로 간다. 구약시대에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된 부름 받은 사람들은 어디로 가는가? 예수 안으로 들어간다. 신약시대에 에클레시아로 부름 받은 사람들은 어디로 가는가? 다 예수 안으로 들어간다. 그것이 둘이 만나는 종착역이다. 예수를 만나기 전까지는 거듭남이라는 것이 없다. 거듭남이 없으면 하나님 나라도 없다. 거듭난다는 것은 내가 어떻게 해서 행실이 바꿔지는 것이 아니고, 예수 안에서 죽고 다시 나는 것이다. 그것이 거듭나는 것이다. 니고데모가 왜 예수님 말씀을 끝까지 못 따라왔는가? 예수 안에서 다시 나야 되기 때문에 못 따라온 것이다. 다른 것은 다 한다. 훌륭한 사람이 아닌가? 그런데 그것이 안 되는 것이다. 예수 안에서 죽고 다시 나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비유를 드셨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요3:14).” 이 비유를 든 이유가 십자가에서 죽고 다시 난다는 말이다. 그것이 거듭난 것이다. 죄 사함 받고 거듭난다고 하는데 죄가 무엇인지도 모르는데 거듭나게 되겠는가? 인간적인 잘못이나 이런 것을 회개해서는 거듭난 것이 아니다. 그런 사람은 많다. 녹도라는 조그만 섬이 있는데, 거기에서 부자인데 왕 노릇하는 사람이 한 사람 있었다. 그곳이 도미 주산지이다. 봄에는 양식을 공급하는데 가을에는 2배로 받는다. 옛날에는 다 그런 식이었다. 벼 한가마니를 빌리면 가을에는 두가마니를 갚아야 되는 것이다. 이것을 보고 장리쌀이라고 한다. 이자가 100%가 되는 셈이다. 한 번 가난한 사람은 영원히 일어날 수가 없다. 그렇게 높은 이자를 줘야 하기 때문이다. 그 사람은 그렇게 해서 점점 부자가 된 사람이다. 사람들이 앙심을 품고 있다가 6.25때 이 사람을 바다에 빠트려 죽였다. 발에 돌을 묶어서 배로 싣고 나가서는 바다에 던졌다. 영락없이 죽을 게 아닌가? 그런데 어떻게 해서 발에서 돌이 빠져서 살아났다. 그 사람이 그런 후에 돌아와서는 마음을 완전히 바꾸었다. 그 다음부터 그 사람이 봄에 양식을 줄 때, 이자를 안 받기로 하고 여름에 도미를 잡으면 다른 사람을 주느니 자기를 주라고 했다. 도미를 걷어 들였다. 쌀 이자는 안 받았다. 그랬으니 사람이 얼마나 회개를 했는가? 아주 180도로 돌아선 사람이다. 예수를 안 믿어도 그렇게 하는 사람이 있다. 그것은 거듭나는 것과는 다른 문제이다. 회개는 회개이다. 그런데 거듭나는 것과는 다른 문제이다. 거듭나는 것은 예수 안에서 죽고 다시 난 것이 거듭난 것이다. 그래서 니고데모가 못 했다. 니고데모 같은 사람은 물에 빠져 죽을 일도 없는 사람이다. 그 훌륭한 사람을 누가 그 사람을 물에 빠트리겠는가? 예수 안에는 못 들어가도 끝까지 그를 따라다니면서 장례식까지 치러준 그렇게 선한 사람이다. 그래도 거듭난 것은 아니다. 나는 사람이 그렇게 완전히 바뀐 사람은 처음 보았다. 그 전에는 손가락질 받던 사람이었는데 완전히 진짜 도주다운 도주가 되었다. 모든 사람이 다 칭송하고 좋아했다. 쌀을 배급해 주고 이자를 안 받으니까 살 판 났다. 그 뒤로는 그 섬에 춘궁기라는 것이 없어졌다. 이 사람이 다 배급해주니까 굶어죽는 사람이 없는 것이다. 아주 평화로운 섬이 되었다. 예수를 안 믿어도 그런 사람이 있다. 그런데 니고데모는 그럴 필요까지도 없는 사람이다. 그런데도 거듭날 수 없었다. 장대에 달린 놋 뱀을 쳐다보고 다시 살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수에게로 다 몰아 놓았다. 아브라함에게서 온 사람도 예수 안으로, 에클레시아로 온 사람도 예수 안으로 다 모아 놓았다. 이 안에서 뭔가 다시 만들어져 나와야 한다. 그것이 거듭난 것이다. 그러면 어디로 가는가? 당연히 하나님 나라로 간다. 불러내신 하나님이 있고, 우리를 구속하신 하나님이 있고, 우리로 나라를 만드신 하나님이 있다. 하나님은 세 가지 일을 하신 것이다. 불러내시고 구속하시고 나라가 되게 하신다. 성경은 아주 간단하다. 하나님은 사람을 불러내시고, 그 다음에 구속하시고, 그리고 하나님 나라가 되게 하신다. 이 초점을 가지고 이 중심을 가지고 성경을 읽으면 성경이 아주 간단하고 쉽다. 다 여기에 해당이 되겠지만 내가 지금 생각할 때 해당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냥 접어놓으면 된다. 굳이 몰라도 된다. 알면 좋지만 다 모른다고 해서 안 되는 것은 아니다. 이 중요한 노선이 없으면 다 알아도 소용이 없다. 어디로 가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내가 성경을 배운 목사님도 성경 강해를 아주 잘 하셨다. 너무 성경 강해를 잘하시니까 감탄했다. 그분은 평생 신학교에서 강의만 하셨다. 주 내용은 무교회주의자는 아니면서도 우찌무라 간조의 정신과 사상을 받았다. 우찌무라 간조는 동양이 낳은 가장 위대한 성서학자라고 한다. 평생 그 책만 본다. 왜냐하면 일본 말 밖에 모르기 때문에 다른 책은 볼 수가 없었다. 다른 책을 봐도 별 것이 없다. 나는 그분에게서 성경을 배울 때 나는 정말 좋은 선생님을 만났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벽에 부딪치는 날이 오게 되었다. 그런 가르침을 받았는데 좋다보니까 교회는 몰랐다. 충주를 가서 학생들을 두고 말씀해보니까 도대체 반응이 없다. 나는 그렇게 좋다고 했는데 전혀 반응이 없었다. 꽉 막혔다. 지금 생각해 보니까 전혀 다른 것이었다. 길이 다르고 다른 것이었다. 좋은 말이었는데 다른 길이었다. 좋은 설교, 유명한 설교를 들어보라. 명 설교가 있지만 공중에서 말하는지 땅에서 말하는지 구별이 안 되었다. 그런데 지금은 구별이 된다. 공중에서 말하는지 하수구에서 말하는지 구별이 된다. 우리가 모두 복음을 전하는 일꾼들로 부름을 받았는데 중심 되는 노선을 타고 가야될 것 같다. 그래서 세상에 이 복음을 전해야 한다. 너무 복잡하다고 천주교가 개혁을 해서 나왔다. 오히려 천주교회가 더 간단하다. 지금은 개신교가 더 복잡하다. 천주교는 단순하게 의식에만 참여해도 지옥에는 안 간다. 이것만 잘해도 지옥에는 안 간다. 그런데 개신교는 천국으로 가는지 지옥으로 가는지 모른다. 자기도 모르고 남도 모른다. 너무 복잡하다. 그리고 시간이 갈수록 더 복잡해진다. 연구를 더 많이 할수록 더 복잡해진다. 중심을 잃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노선을 가지고 복음을 전한다면 자기 자신에게도 축복이고, 듣는 사람에게도 축복이다. 길이 간단해지고 쉬워진다. C.C.C.에 있을 때 김*곤목사를 보면 오로지 한 가지 생각만 하신다. 민족복음화, 사영리만 생각하는데 처음에 거기를 가니까 단순하고 좋았다. 어떤 사람들은 김목사님을 보고 신학의 무덤이라고 하였다. 나는 들으니까 복잡한 것보다 간단하고 좋다고 생각되었다. 예수만 믿으면 되지 별게 있나 했다. 그 사람은 거기에 집착을 했다. 그런데 나는 그렇게 집착하지 못한 성격이기 때문에 그렇게 안 되었다. 그분처럼 하고 싶어도 안 되었다. 왜냐하면 나는 뭔가를 붙잡아야 되지 안 그러면 끝까지 못한다. 처음에는 좋았는데 뒤로 가니까 자꾸 힘이 없어진다. 그분처럼 안 되었다. 이제는 너무 확실하다. 왜 한 가지 말만 하는가?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다른 것은 필요가 없다. 딱 예수를 우리에게 보냈다. 자기 백성을 저희의 죄에서 구원할 자로 보냈다. 임마누엘로 딱 보냈다. 이분 안에 모든 것이 다 들어 있다. 이 한 사람 속에 다 들어 있다. 그분의 죽으심 안에 우리 모든 사람의 죽음이 들어 있고, 그분의 다시 살아나심 안에 모든 사람의 다시 살아나심이 들어 있다. 이 한 사람만 알면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이다. 이 한 사람이 답이다. 지금 생각하니까 전에는 안다고 해도 늘 희미했다. 좋긴 좋아도 확실하지 않고 희미했다. 지금 와서 생각하니까 희미했다. 그때는 그렇지 않았다. 그때 생각으로는 확실하고 좋은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와서 보니까 그때는 희미했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한 단계씩 갈수록 늘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길을 모르다가 길을 알고 나니까 내가 길도 없는 데서 헤맸구나. 그때 처음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 전에는 그런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내가 하는 일이 옳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분명한 길을 딱 보고 나니까 내가 길도 없는 데서 헤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얼마나 명쾌해졌겠는가? 과정을 지나갈 때마다 뒤돌아보면 그때는 희미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당시에 희미하면 못 견딘다. 당시에는 다 명백하다. 그런데 하나님은 부르시고 또 부르시고 부르실 때마다 그때는 좀 희미했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에게 이제 이것을 나에게 알려 주시느냐, 진즉 주셨으면 내가 젊었을 때부터 할 것이 아니냐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때는 그때대로 그것으로 만족하게 주셨다. 부족함이 전혀 없었다. 참 이상한 일이다. 예수 안으로! 예수 안으로! In Christ! 바울은 놀라운 사람이다. '그 안에'가 모든 것의 Key words다. 그렇지 않으면 희미하고 다 확실하지 않다. 이 안에 와야 확실하다. 죽음도 확실하고, 인생의 끝도 확실하고, 모든 것이 확실하다. 이것이 열매이다. 이래서 하나님께서 독생자라고 하시는구나. 우리에게 독생자를 주셨다고 요한이 말하는구나. 바로 전에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요3:14).”라고 해 놓고 다음 구절에 가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요3:16).”라고 한다. 놋 뱀을 상징적으로 내세워놓고 하는 말이다. 옛날에는 놋 뱀을 모르고 그 성경구절을 알았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요3:16).” 그 말이 얼마나 좋은 말인가! “하나님이 나를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얼마나 좋은 말인가! 그래서 가장 애호하는 성경구절이다. 나는 광야에서 놋 뱀을 못 보았다. 좋기는 좋은 말인데 나에게 실감이 안 난다.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사랑하는가? 이런 생각이 안 난다.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는 비슷하게 된 것 같은데, ‘하나님이 나를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십자가에 못 박았으니’라고 하면 말이 안 된다. 내가 제일 어려웠던 것이 내가 무슨 죄를 지어서 하나님께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한다는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무슨 죄를 지었는지 모르겠다. 이분을 다 알기 전까지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없다는 것도 사실이다. 이분을 모르면 아무 것도 모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너무너무 놀라운 분이다. 모든 곳에 다 맞는 분이다. 장대에 달린 뱀에 붙여도 딱 맞다. 홍해 바다에 붙여도 딱 맞다. 모든 데 다 맞다. 성막에 들어가서 기물 하나하나를 다 맞춰보면 그리스도이다. 신기한 사람이다. 번제단에 가도 그분이 계시고, 금등대에 가도 그분이 계시고, 떡상에 가도 그분이 계시고, 향단에 가도 그분이 계시고, 그분이 없는 곳이 아무 데도 없다. 무엇을 봐도 다 ‘이 사람이구나. 이 사람이구나.’로 해석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 ‘예’만 되었다. 하나님의 모든 약속이 그리스도 안에서는 ‘예’만 되었다고 한다. 다 ‘예’가 되었다고 한다. 성경이 이분이 아니면 성취가 안 된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증거)하는 것이니라(요5:39).”고 한 말이 바로 이 말이다. 성경은 예수에 대해서 말한다는 말이지 예수의 역사를 말한다는 말이 아니다. 성경에 있는 모든 말과 모든 약속은 다 예수를 이야기 한 것이다. 옷 하나까지 견장 하나까지도 모두 다 예수이다. 그렇게 보면 성경에는 너무 많은 것이 들어 있다. 그 한 사람이 모든 것이니까 한 사람이 모든 것이고 모든 것이 한 사람이다. 그분 안에 내가 있고, 내가 그분 안에 있는 이것만이 아니다. 그분은 만유를 포함하고 있다. 내가 거기에 포함이 안 될 수가 있겠는가? 만유를 포함하신 분 안에 내가 포함되어 있다. 너무 쉽다. 나는 누구인가? 아주 간단하다. 옛날에는 ‘나는 누구인가?’ 하면 대답하기 어려웠다. 나는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고 해도 찝찝했다. 나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해도 찝찝했다. 꼬치꼬치 물으면 대답을 못한다. 내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니까 누가 꼬치꼬치 물으면 대답을 못한다. 여러분은 그런 질문자를 안 만나보았을 것이다. 그런 질문자를 만나면 대답을 못 한다. 요즘 아이들이 얼마나 영리한가! 꼬치꼬치 묻는 학생이 있으면 대답을 못 한다. 그런데 이 사람을 알면 무슨 질문을 해도 다 대답할 수 있다. 어떤 스님이 직문직답 한다. 그런데 알고 보면 모든 것을 다 부처님으로 대답하는 것이다. 무슨 질문을 하더라도 대답은 똑 같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무슨 질문을 하든지 예수로 대답해야 한다. 그러면 같은 대답할 것이라고 해도 할 수 없이 온다. 목사님에게 가면 똑 같은 대답하겠지 해도 온다. 그것이 이상하다. 지난번에 누가 나에게 목사님은 왜 늘 똑 같은 대답만 하느냐고 한다. 자기가 못 받아들이겠으니까 그랬다. 어느 날 와서 그 말을 한 것이 맞다고 하는 날이 올 것이다. 대답은 딱 하나뿐이다. 그 안에서 이렇게 대답하기도 하고 저렇게 대답하기도 한다. 직문직답 하는 그 스님 이야기를 들어보라. 무슨 말을 하든지 부처님 이야기이다. 아닌 것 같아도 그렇다. 우리 목사들도 무슨 말을 하든지 예수이어야 된다. 그렇게 대답이 되어야 완전한 대답이 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 꼬치꼬치 물으면 다 들통이 나고 만다. 예수를 아는 것이 모든 것이다. 모든 것의 모든 것이다. 부름 받은 사람은 예수께로 가려고 부름 받았다. 예수께로 간 이유는 우리가 거기서 거듭나게 하려는 것이다. 거듭나면 어디로 가는가? 하나님 나라로 간다. 간단하다. 우리는 평생 예수만 전해야 한다. 다른 것은 해보았자 소용이 없다. 다 잊어버린다. 세상에 나가면 그 이상 좋은 것도 많기 때문에 죽으나 사나 하여튼 예수만 전해야 한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