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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과 기억 (1896)』 제1장
Henri Bergson, Matière et mémoire, Paris: PUF, 1990(1919, origine. 1896), 11-80.
**제1장에 대한 단상 ***
심층에서 인격성이 표면으로 올라오는 과정을 생각해보자. 그러면 제3장에서 다루었던 심층의 위상 총체는 기억이다. 기억 총체가 어떤 과정을 통해 신체라는 표면으로 올라올까? 감화적 감성에서 감정적 사실들로 그리고 감각적 장치들로 나오는 것이 아닐까? 실재론은 이 과정을 유기체의 신경계를 주목할 것이고, 관념론의 의식의 활동이 신체에 미치는 영향을 주목할 것이다. 전자는 길이로서 후자는 외연으로서 관여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관념론자들은 의식의 표상이 먼저이고 그 표상에 맞는 현실적 양태들이 있다고 할 것이며,실재론자들은 표상으로 등장하는 여러 인상과 경험들이 먼저이고 이것들의 축적과 압축에서 관념이 형성된다고 할 것이다.
이들이 공통으로 만나는 지점은 신체 또는 물체를 통해서 표현되고 발현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 신체 또는 물체가 무엇인가? 이 물체들은 항상 같은 양태로 머물고 있을까? 아니면 만들어지고 있는 즉 스스로 되어가고 있는 중에 있는 것은 아닐까? 이들에게 고정성 또는 부동성을 미리 부여한 것은 아닐까? 신체든 물체든 주변과 가능적 행위들과 관계 속에 있으며, 물체가 인력과 측력으로 신체가 가능적 행동의 반사와 투사로서 행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물체든 신체든 우주든 어떤 형상 또는 형태가 먼저 주어져 있지 않고 가정한다면, 모든 것은 진동하고 파동으로 흐르는 존재일 것이다. 벩송이 가정한다는 말을 먼저 하지 않았지만, 의식 사태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의식 상태로서 파악되는 모든 것들은 고체적이고 고정적이고 정지적인 것이 아니라, 움직임으로 또는 에너지로 상태로서 있다고 여긴다. 우주든 물체든 나의 신체든 그 상태로서 있는 것을 의식적 차원에서 이마쥬라고 한 것이다. 그런데 이 이마쥬가 의식의 상태에서 있는 것만이 아니라 실재성으로써 구체적으로, 들뢰즈 표현으로 추상적으로, 이마쥬라는 것이다. 추상적으로 이마쥬라는 말은 형태나 형상을 모두 빼버린 것으로, 그렇게 되면 흐물거리는 또는 원자나 요소도 없는 위상적으로 있는 무엇(덩어리)이 될 것이다. 그 덩어리 중에서 나의 신체라는 덩어리의 단절된 형성은 나의 관점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이때는 라이프니츠 모나드가 관점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하는 것을 수용하는 것이 편리하다. 편리하다고 해서 그 방식과 체계가 같다는 것은 아니다.
관념론(유심론)과 실재론(유물론)이 상식적으로 설정한 신체는 외적 대상처럼 설정하고 있다. 그래서 신체의 표상이든 사물이든 의식과는 별개의 것으로 현존하는 것으로 본다. 말하자면, 정신에 의해 전제되거나 감각을 통해서 형성되거나 간에 외부에 현존하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양식적으로 보면, 사유의 형식과 사물의 부피는 존재를 드러내는 두 가지 현실태로서 현존을 설명하는 틀이다. 둘은 짝을 이루듯이 대응, 대칭, 부대현상처럼 보이지만 둘은 별개이다. 이로서 양자 사이에 관계를 설정하는 문제거리가 남는다. 양식은 둘을 별개로 놓아서 각각이 고유한 방법으로 학문의 범주로 또는 인지의 영역으로 삼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문제거리를 해소하지 못한 것이 근대철학이다. 이에 비에 고등 양식으로 보면, 고정된 사물이나 고착된 관념의 형성에서는 각각이 다른 편을 설명 또는 관계 맺음을 할 수 없어서 기계적 신(deus ex machina) 불러들일 수밖에 없다고 보면서, 이마쥬 안에서 이마쥬 밖으로 연결의 선들(부피들)을 갖는 현실적 작동을 보자는 것이다. 이 작동을 통해 신체의 경우에 우선 지각이 발생한다는 점이다. 한계 안에서 지각은 선분이나 절단된 면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지속하는 흐름으로 있다는 것이다. 경계로부터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신경계라는 선들로서 보면, 지각 활동은 선(부피)들의 왕복 운동으로써 서 이루어진 지속하는 흐름이다. 이 지각이 밖으로 관계를 맺을 때는, 벩송에 의하면,항상 기억이라는 일부를 데리고 나간다는 점이다. 대상에게 이 기억의 작동이 형성하는 한계는 현상으로서, 소박한 관념론에서는 겉보기(외연적) 표상으로 통속적 유물론에서는 내용있는(내포적) 표상이라고 하나, 서로는 일부분만을 취할 뿐이다. 그런데 그 형성중인 대상(신체라도 관계없다)이 곧 이마쥬이다. 형성중이란 만들어진 현상이 아니라 형성하고 있는 실재라는 것이다. 이마쥬는 왕복운동의 경계에서 성립하고 그 내부 작동의 인식이 지각이다. 그런데 상식으로는 내부와 경계를 둔 외부를 지각이라 한다. 운동하고 있는 실재성이 경계를 둔다는 점에서 지각은 외부와 관계에서 구별된 물체이다. 의식있는 신체는 그렇게 해서 규정될 수 있다. 물체도 마찬가지이며, 의식 없는 물체는 외적 경계가 분명하다. 의식있는 이마쥬는 모나들처럼 닫혀있는 것이 아니라 열려 있어서 잠재적으로 외부와 서로 소통하고 공감하며 관통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왕복운동이 있는 신체는 자기중심이 있다. 그 중심을 사람들은 두뇌라고 생각하는데, 벩송은 두뇌는 들고 나는 운동(흐름, 진동)들의 교환장소 즉 전신전화국과 같은 것이라 한다. 그럼에도 들어오는 운동과 관련하여 분석하는 능력이 있고(다수가 들어오기에), 나가는 운동과 관련하여 선택하는 능력이 있다. 이는 모든 생명 보존에서 신경계의 조직화는 같은 양태이다.
그러면 생명체로서 나타날 수 있는 이마쥬는 살아있는 방식을 실현하는 신경계 뿐만이 아니라 여러 체계를 내재하고 있는 이마쥬이다. 단순 물체도 아니고, 단순 관념도 아니라는 점에서 이마쥬라는 가설적 개념이지만, 의식 상태로서는 이마쥬로 설명할 수 밖에 없다. 외화된 모습이 신체이지만 말이다.
감각의 오관을 통해 들어오는 감각들에 대해 관념형성에는 교육이 필요하다. 그래도 분석과 선택의 기제를 지닌 신체는 자극에 대해 연장적(길이적)으로 반응하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 들어온 내용에 대해서 동일하게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감각 기관들을 통해 나갈 때 오관의 감각에 더하여 감정이 실려있다. 감정은 자극과 반응의 대응적관계를 넘어서 내재성의 일부가 개입한 것으로 보인다. 그 중에서도 애정적(감화적) 감각은 감각의 종합에서 포함되지 않은 것이 들어 있다는 점이다.
애정적(감화적) 감각(감정)이 깊이에서 어떤 것을 길어 올려서 실재적 행위 이전에 가능적 행위로서 즉 잠재적 행위를 실행한다고 한다. 느리게(지체)하기도 하도 우회하기도 하고, 제자리로 지연하기도, 만기를 기다리듯 중지하고 있는 듯하기도 한다. [연애는 한 박자 ‘늦게 하기’와 같은 이 지체를 거쳐 가는 경우가 더 좋은 결과를 낳는다고 한다. 인간 관계도 즉각적 대응보다 한 박자 늦게 대응하기가 오해를 낳지 않는다고 한다. 애정적 감정(감각)은 순간적으로 번개 치듯 한다는 것은 젊은 시절 첫 만남 정도이고, 나이가 든 사람들일수록 애정적 행위와 연관은 언제나 망설임과 주저가 뒤따른다. 나가는 작동에는 기억(총량)이 뒤따르기 때문이다.] 어떤 감화적 감정(감각)은 심층 속에서 지각된 채 있으며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 중심이 되는 위상이 인격의 신체적 토대일 것이다.
감화적 지각이 비결정성 상태로 있는 것이 순수지각인 셈이다. 기억이 보태진 지각이 현재의 지각과 혼합하여 작동하는 것이 신체다. 이 지각들은 기억과 서로 침투하고 삼투 현상처럼 이어진 흐름으로 있다. 기억과 순수지각은 자연스럽게 현실적 지각에 이어진다는 것이다. 즉 심층(온자아)의 의식은 이어져 나와서 신체(자아)라는 부분적 이마쥬로 지각 현상을 드러낸다.
이 온자아가 자아로 등장하는 데도, 설탕물이 녹는 것을 기다려야 하듯이, 시간(지속)을 보낸다. 벩송이 이를 시간의 함수(fonction) 라고 할 때 물체의 낙하운동의 함수처럼 생각해서는 안된다. 방향과 에너지의 정해진 양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활동성은 방향도 내용도 정해져 있지 않은 비결정성이다. 이런 의미를 들뢰즈가 준 안정성이라 표현한 것이다.
그러면 벩송에서 기억에서 신체라는 표면 즉 물체로 이행에는 항상 더 적은 것이 현실적으로 활용된다는 점이다. 그 중에서 순수 지각은 신체가 지니고(내재하는) 있는 것에 비해 부분이다. 순수지각은 기억과 다른 차원으로 신체와 연관에서만 존속하기 때문이다. 이제 이마쥬라는 신체와 다른 차원의 현존인 기억은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문제가 남는다. 제2장에서 기억은 존속하지만 다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생리학적 실증에 비추어서 설명할 것이다. 이 신체를 통해 드러나지 표출되지 않는다고 해서 기억 총량이 없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고 제3장에서 기억 총량의 실재성, 그리고 무의식이 실재적임을 밝힐 것이다. (51QKF)
Ch. I. De la sélection des images pour la représentation. - Le role du corps 11-80
제1장 표상을 위한 이마쥬들 중의 선택 - 신체의 역할
- 실재적 행위와 가능적 행위 Action réelle et action possible 11-17
- 표상 La représentation 17-21
- 실재론과 관념론 Réalisme et idéalisme 21-24
- 이마쥬들 중의 선택 Sélection des images 24-41
- 표상과 행동관계 Rapport de la représentation à l'action (41-47
-- 이마쥬와 실재성 L'image et la realtité -(47-52)
첫 번째 사실 - 감관 기관의 교육이 필요하다 (47-50).
두 번째 사실 - (50-52) [실재적 작용이 있다]
-- 이마쥬와 정념적(애정적) 감각 L'image et la sensation affective (52-63)
세 번째 사실
정념적 감각의 본성 Nature de la sensation affective 55-58
정념적 감각으로부터 고립된 이마쥬 L'image, isolé de la sensation affective 58-63
- 이마쥬의 자연적 확장 -Extension naturelle des images (63-67)
- 순수 지각 La perception pure (67-71)
- 물질 문제로 이행 Passage au problème de la matière (70-74)
- 기억문제로 이행 Passage au problème de la mémoire (74-78)
- 물질과 기억 Matière et mémoire (78-80)
##내용 ########
『물질과 기억(Matière et Mémoire, 1896)』 제1장
Ch. I. De la sélection des images pour la représentation. - Le role du corps 11-80
제1장 표상을 위한 이미지들 중의 선택 - 신체의 역할
실재적 행위와 가능적 행위
- Action réelle et action possible 11-17
[# 나의 신체 (mon corps)] 11-17
[나의 신체의 실재적 행위는 신체라는 이마쥬이다. 그것의 가능적이고 잠재적인 행위들 총체는 신체가 지각하는 부분들이다. 즉 신체가 현실적으로 행위하는 부분들의 영역이 물질인 셈이다. (44LLI)]
잠시 동안 우리가 물질에 관한 이론들과 정신에 관한 이론들에 관해, 외적 세계의 실재성이나 관념성에 관한 논의들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고 해보자. 나는 이미지들의 현전 속에 있다. (11)
그러나 내가 지각들에 의해서 밖으로부터 알뿐만 아니라, 정념들(affections)에 의해서 내부로부터도 안다는 의미에서 다른 모든 이마쥬들과 뚜렷이 구별되는 하나의 이마쥬가 있다. 그것은 나의 신체이다.(11) [여기서 정념들은 passion이 아니다.]
나는 이 정념들이 산출되는 조건들을 검토한다. 나는 정념들이 언제나 내가 밖으로부터 받아들이는 진동들[감각적 운동]과 내가 행사할 운동들[신체적 운동]들 사이에 와서 삽입된다고 생각한다.(11-12)
나는 유기적 세계의 어디서나 이 같은 감성(sensibilite)이 다음과 같은 순간에 나타나는 것을 본다고 믿었던 것을 상기해본다. 그것이 나타나는 정확한 순간은 자연이 생명적 존재에게 공간 속에서 운동하는 능력을 부여했기에, 종에게는 감각에 의해서 그것을 위협하는 일반적 위험들을 알리고, 개체들에게는 위험에서 피하기 위해 미리 대비할 것을 일임하는 때이다. 결국 나는 나의 의식이 정념 속에서 자기의 것이라고 여기는 역할에 대해 나의 의식에게 묻는다. (12) [나의 의식 속에 정념 만으로 이루어진 역할이 있는지, 아니면 지각과 감각의 영향에 의한 정념인지를 물어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념의] 작용은 우주와 우주의 역사에 진정으로 새로운 어떤 것을 덧붙이는 것이다. ... 모든 일이 진행되는 모습을 볼 때 내가 우주라고 부르는 이 이마쥬의 총체 속에서, 그 [이마쥬의]유형(type)이 내 신체에 의해 제공되는 어떤 특별한 이마쥬들을 매개로 하지 않고서는 진정으로 새로운 것은 산출될 수 없는 것 같다.(12) [ 어떤 특별한 이마쥬들을 - 추억을 암시한다.]
신체 - 신경계 - 구심적 유입신경
- 원심적 유출신경
유입신경들은 이마쥬들이고, 뇌도 하나의 이마쥬이고, 감각신경들에 의해 전달되어 뇌 속으로 퍼져 나간 진동들도 또한 이마쥬들이다.
뇌가 물질적 세계의 일부를 이루는 것이지. 물질적 세계가 뇌의 일부를 이루는 것은 아니다.(13) [ - 대우주와 소우주의 비유는 자기 모순적이다.]
이 마지막 지점에서 멈추어보자. 여기에 외적 세계의 이마쥬들이 있고, 그 다음에는 나의 신체,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의 신체가 주변의 이마쥬들에 가한 변양들(modifications)이 있다. (14)
어떻게 나의 신체가 특히 나의 신경계가 우주에 대한 나의 표상의 전체 또는 일부를 산출할 수 있겠는가? .... 신체로부터 우주 전체의 이마쥬를 끄집어내려고 하는 것은 부조리한 일일 것이다. 대상들을 움직이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대상인 나의 신체(mon corps)는 따라서 행동 중심(centre d'action)이다. 그것이 표상을 생겨나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14) [지구에서 태양 8광분, 은하계 2억광년, 전우주 125억광년... 계산의 중심은 우리이다.]
[과학이 말하는 이마쥬들의 관계는 자연법칙들에 따라 계산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내가 나의 신체라고 부르는 이마쥬의 역할이 다른 이마쥬들에 실재적인(réelle) 영향을 행사하는 것이고, 따라서 물질적으로 가능한 여러 과정들은 신체라는 이마쥬가 주변의 이마쥬들로부터 끄집어 낼 수 있는 다소간의 이점에 의해서 아마도 신체에게 암시되었을 것이기 때문에, ..... 실제로 내 관찰에 의하면 외적 대상들 자체의 차원(dimension), 형태, 색깔은 나의 신체가 접근 또는 멀어지느냐에 따라 변양되고, 냄새들의 힘, 소리의 강도는 거리에 따라 증감하며, 마지막으로 이 거리자체는 무엇보다 주변의 물체들이 내 신체의 직접적[무매개적] 행동에 대비하여, 굳이 말하자면, 안심할 수 있는 척도 [정도]를 나타낸다. (15)
따라서 그것들은[외부대상들은] 나의 신체에다 거울이 그러하듯이 나의 신체의 우발적(éventuelle, 돌발적) 영향을 되돌려 보낸다. 그것들은 나의 신체의 증가하거나 감소하는 능력(puissance, 권능)에 따라 정돈된다. 나의 신체를 둘러싸고 있는 대상들은 그것들에 대한 가능적 행동(action possible)을 반영한다. (15-16)
이제 다른 이마쥬[외적 대상]와 관계없이 내가 나의 신체라고 부르는 이마쥬를 가볍게 변형하자. [신체를 변형해보자.] .. 신경 섬유 다발을 잘라내도 우주와 나머지 신체는 남아있을 것이다. ... 구심신경의 절단은 .. 그것은 나의 신체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사물들 한 가운데서, 그것들에 작용하는 데 필요한 운동의 질과 양을 길러내는 것이 불가능하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불가능한 것] 이것은 바로 행동에 관한 것이며, 오직 행동 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라진 것은 나의 지각이다. 그렇다면 나의 지각이란 바로 이마쥬들의 집합 속에서 그늘이나 반사의 방식으로 내 신체의 잠재적(virtuelle)이거나 가능적(possible)인 행동들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무엇을 뜻하겠는가?(16) ... 나는 이마쥬들의 집합(ensemble)을 물질이라 부르고 나의 신체라는 어떤 결정된 이마쥬의 가능적 행동에 관련된 이 같은 이마쥬들을 물질에 대한 지각이라고 부른다.(17)
표상
- La représentation 17-21
[신체 이마쥬 덩이 자체가 지각이며 또한 접촉(행위) 가능한 사물들도 지각이다. 이 지각들이 신체 이마쥬에 관계 맺는 방식을 다시하는 경우(재현하는 경우)가 표상이다. 이 표상이 항상 같은 이마쥬라고 할 수 없다. 그럼에도 같은 또는 앞선 것과 유사성이 있다고 하면서 일반 관념으로 여기는 것은 신체가 같은(유사한) 방식으로 행동하는 관계에서 (임의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 행동의 기제는 두뇌와 신경일까? 베르그송은 신체라는 위상적 덩어리를 가정한 것으로 보인다. 위상 신체는 점도, 통일성이란 단위의 동일성도, 아니라는 것이다. (44LLI)]
17 .. 나는 나의 신체를 구심신경, 원심신경, 중추신경과 더불어 고찰한다. ... 대상을 변화시키거나 그것들과 내 신체의 관계를 변형시켜 보라. 그러면 내 지각 중추들의 내적 운동들 속에서 모든 것은 변한다. 그러나 또한 나의 지각 속에서도 모든 것은 변한다. 따라서 나의 지각은 이 분자적 운동의 함수이며 그것에 의존한다. (17) [신경기관들은 표상이 아니라 유입과 행위를 하는 기제이다. 이 기제들도 이마쥬이다. 그러면 행위 과정이 이마쥬로서 표상이 될 것이다. (44LLI)]
그들이[번역 가능자들] 우리에게 뇌수를 제시하는데, 이것은 물질적 우주의 나머지와 그 본질에 있어서 유사하며, 따라서 우주가 이마쥬라면 그것도 역시 이마쥬이다. [전제(요청)인 우주를 이마쥬로 놓았기 때문에 신체의 부분도 이마쥬이다는 것은 반대자들이 보면 순환논법으로 보인다. (44LLI)]
하나의 이마쥬보다 더하거나 덜한 것이 될지 모르는 어떤 것, 아무튼 이마쥬와 다른 본성의 것이어서 거기서부터 표상이 정말 기적적으로 흘러나오는 그러한 것만을 보는 체 한다. (18) [신체에서 표상을 찾는 것은 기적과 같다.]
이 물질 앞에다 그들은 이마쥬 없는 의식을 놓는데, 우리는 이 의식에 대해서 어떤 관념도 만들 수 없다. 결국 의식을 채우기 위해서, 그들은 질료없는 이러한 사유에, 형식 없는 이러한 질료가 행하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만들어 낸다. 그러나 진실을 말하자면, 물질의 운동들은 이마쥬들인 한에서 매우 명백하고, 운동 속에서 사람들이 본 것과 다른 것을 거기서 찾을 필요가 없다. 유일한 난점이란 매우 특별한 이마쥬들[뇌수들]로부터 무한히 다양한 표상들을 생겨나게 하는 일이 될 것이다.(18) ... 결국 이 [뇌] 운동들은 무엇인가? 특별한 이마쥬들은 전체에 대한 표상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가? ... 그것은 내 신체의 내부에서 외적 대상들의 작용에 대한 나의 신체의 반응을 시작하면서 준비하도록 운명지어진 운동들이다. 이마쥬 자체가 이마쥬를 창조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것들[신체 운동]은 위치를 이동하는 나침반이 그러하듯이, 주변의 이마쥬들과 관련하여 나의 신체라는 어떤 결정된 이마쥬의 위치[지위]를 표시한다. 표상의 총체 속에서 이 [신체 운동] 운동들은 매우 보잘 것 없다. 그러나 이들은 내가 나의 신체라고 부르는 이러한 표상의 부분에 있어서는 핵심적인 중요성을 갖는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매 순간 내 신체의 잠재적(virtuelles) 진행(démarche)과정들을 그려주기 때문이다. (18-19)
척수는 받은 자극들을 실행된 운동으로 변형시키고 뇌수는 이 운동들을 오로지 시발적(naissantes) 반응들로 연장한다. 전자에서나 후자에서나 신경 물질의 역할은 운동을 인도하고 상호 구성하거나 억제하는 것이다.(19)
[우주의 지각과 뇌 물질의 운동관계] 유물론자와 이원론자 : 어떤 [유물]사람은 우리의 의식적 지각에서, 이 운동들을 따르며 그것들의 흔적을 비추는 인광(phosphorescence)만을 보고, 다른 어떤 이는 외피질의 분자적 운동들을 끊임없이 자신의 방식으로 표현하는 의식 속에 우리의 지각을 펼쳐 놓는다. 전자의 경우나 후자의 경우에 지각이 그리거나 번역한다고 간주하는 것은 우리의 신경계의 상태들이다. (19)
오히려 지각들은 이 운동들[뇌수의 분자운동]과 함께 변양되지만, 이 운동들 자체가 물질적 세계의 나머지와 분리될 수 없게끔 연결되어 있다고 말하자. 그러면 우리의 지각들이 회백질의 변양들에 어떻게 관련되는지를 아는 것 자체는 더 이상 문제가 안 된다. ... 나의 신체라는 어떤 특권적 이마쥬의 가벼운 변화만으로도 완전히 뒤죽박죽되는 이마쥬들의 체계가 있다. 나의 신체라는 이마쥬는 중심을 차지하고 다른 모든 이마쥬를 규제한다. 마치 만화경을 돌릴 때처럼 모든 것은 운동들의 매번에 따라 변한다. (20) 결과는 언제나 원인에 비례하는 방식으로 존재한다. 나는 그것을 우주라고 부른다. (20) [나의 신체라는 이마쥬와 우주라는 이마쥬가 분리될 수 없다는 점을 긍정하기 위해서는 둘 다 흐름이어야 하며 끊어짐(불연속)이 없는 질적 연속체여야 한다. 그럼에도 신체가 구분되는 것으로 보이는 것은 관심 때문이라 말하게 될 것이다. (44LLI)]
실재론과 관념론, 유물론과 유심론,... 두 상이한 체계가 있는데, 한 체계에서는 각 이마쥬가 자기 자신을 위해서도, 그리고 그것이 주변 이마쥬들의 실제적 행동(action réelle)을 감당하고 있는 정해진 한도 내에서 변화하고, 다른 체계에서는 모든 이마쥬들이 단 하나의 이마쥬를 위해서도, 그리고 이 이마쥬들이 특권적 이마쥬의 가능적 행동(action possible)을 반사하는 다양한 한도 내에서도 변화한다면, 똑같은 이마쥬들이 이 두 상이한 체계에 동시에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을 어디서 연유하는가? (20-21)
실재론과 관념론
- Réalisme et idéalisme 21-24
[실재론과 관념론은 외적 대상(이마쥬)에 관한 기존 학설에 대한 비판]
모든 이마쥬는 어떤 이마쥬들에 내적이고 또 어떤 이마쥬들에는 외적이다. 그러나 이마쥬들의 전체에 대해서는 그것이 우리에게 내적이라고도 말할 수도 외적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21)
[양쪽에서] 사물을 단지 이마쥬들의 형태로 포착하기 때문에, 문제를 이마쥬들과 관련하여 그리고 오로지 이마쥬들과 관련해서만 제기해야 한다. ... 하나는 과학의 세계인데 거기서는 각 이마쥬가 단지 자기 자신만을 따르기 때문에 절대적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다른 하나는 의식의 세계인데, 거기서는 모든 이마쥬들이 나의 신체라는 하나의 중심적 이마쥬를 따르며 그것의 변화를 쫓는다. ... 주관적 관념론은 첫째 체계를 둘째 체계로부터 도출하는 것으로 구성되며, 유물론적 실재론은 둘째 체계를 첫째 체계로부터 이끌어내는 것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21) [ 관념론과 실재론은 서로 의존하여 사고 한다. 즉 서로가 서로의 토대인 것으로 보인다.]
실재론자는 우주로부터...(21) 이 체계 이외에(en outre) 지각이 있다. ... 관념론자는 지각으로부터.... 자신들이 부여한 이마쥬들의 체계 속에 신체가 있다. (22) 관념론자의 경우에 현재를 과거와 관련시키고 미래를 예측하려 하자마자, 그는 이 중심적 위치를 포기하고 모든 이마쥬들을 하나의 동일한 평면 위에 다시 위치시키며, ... [주관의 체계를 넘어서 미래 예측의 성공하는 과학이 성립한다.] .. 이처럼 관념론이든 실재론이든 두 체계 중 하나를 놓고 그것으로부터 다른 체계를 도출하려고 한다. (22) ... 이 두 체계는 각각 자족적이다.
[유물론과 유심론은 의식의 표상에 관한 두 측면이다.]
[유물론의 경우] 따라서 지각을 산출하기 위해서는 의식부대현상이라는 유물론적 가설과 같은 어떤 기계로부터 신(deus ex machina)을 불러내어야 한다. 모든 실재론은 지각을 하나의 우발(accident), 따라서 하나의 불가사의(mystère)로 만든다. (23) [이들은 우연에서 자유를 찾는다.]
[기계적 신(deus ex machina) 도입: 고대 그리스극에서 자주 사용하던 극작술(劇作術). 초자연적인 힘을 이용하여 극의 긴박한 국면을 타개하고, 이를 결말로 이끌어가는 수법이다.]
[유심론의 경우] 당신은 이번에도 기계로부터 신을 불러옴으로써만, 즉 자의적인 가정에 의해 사물들과 정신 사이에 또는 적어도 칸트처럼 말해서 감성과 오성 사이에 알지 못할 어떤 예정 조화를 가정함으로써만 이 질서를 회복 할 수 있다. 그 때 과학은 우발(accident)이 될 것이며, 그것의 성공은 불가사의(mystère)가 될 것이다.(23) [기적같은 실현에서 자유를 찾는 것과 같다.]
결국 이 두 학설들, 즉 실재론과 관념론을 동일한 영역 위에 다시 위치시킬 경우, 그 것들은 같은 장애물에 대항해서 대립된 방향에서 싸우게 되는 것이다.(23-24)
이마쥬들 중의 선택
- Sélection des images 24-41
이제 이 두 학설의 지반을 [깊이] 파내려 가면... 지각은 전적으로 사색적(speculatif) 관심을 갖는다. 그것은 순수 인식이다. ... 전자에 있어서도 후자에 있어서도 지각한다는 것은 무엇보다 인식한다(connaître)는 것이다. (24) / 우리가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바로 이 가정이다. 그것은 동물계에서 신경계의 구조에 관한 아주 피상적인 고찰에 의해서 조차 논박된다.(24) [(동물적)신체라는 이마쥬가 갖는 인식은 사변적이라기보다 생명적 의식일 것이다. 이 인식은 자기과 연관 속에 수용할 인지, 또는 배척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인식일 것이다. 그런데 인격을 지닌 신체는 그것에 대해 인식한다는 것을 사변적이라고 한 것이다.(44LLI)]
24-2 [단충(monère)에서 고등 척추동물에 이르기까지 검토하건 데]... 원형질 덩어리는 ... 외적 자극 요인들의 영향을 받고 기계적이고 물리화학적인 반응으로 응답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신경세포가 나타나고, ...(24) 고등 척추동물에서 순수 자동기제와 의지적 활동 사이 구별이 있다.(25) 왜 우회하는가? ... 나는 그 진동이 거기서 사물들에 대한 표상으로 변형될 기적적인 힘을 길러낸다는 것을 이해 할 수 없으며, 앞으로도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게다가 나는 이 가설을 잠시 후에 보겠지만 무용한 것으로 간주한다. (25) [우회, 지체, 지연, 연기는 생명현상이다.]
뇌는 우리가 보기에 일종의 중앙전화국(le bureau téléphonique)과 다른 것일 수가 없다. 그것의 역할은 연락을 보내거나 연락을 기다리게 하는 것이다. 뇌는 자신이 받은 것에 어떤 것도 덧붙이지 않는다. .. 이처럼 뇌의 역할은 때로는 받아들인 운동을 선택된 반응 기관으로 인도하는 것이고, 때로는 이 운동에다 운동 방식들 전체를 열어 놓아 자신 안에 있는 가능한 모든 반응을 그려보게 하고, 주의를 여러 갈래로 분산시키면서 자기 자신을 분석하게끔 한다. 다시 말해서 뇌는 받아들인 운동과 관련해서는 분석기구(instrument d'analyse)이고,(26) 행사된 운동과 관계에서는 선택기구(instrument de sélection)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양자의 경우에서 그것의 역할은 운동을 전달하고 분할하는 데 한정된다. ... 신경요소들은 단지 다수의 가능한 행동들을 단번에 그려보게 하거나, 그것들 중의 하나를 조직화하게 하는 것이다. (27) [유입신경과 실행신경의 통로는 현대생리학에서 다르다고 한다.]
27 이 말은 신경계가 표상을 만들거나 심지어 준비하는데 사용되는 장치(appareil)가 결코 아니라는 것을 뜻한다. ... 신경계의 진보에 따라 진보하는 지각 역시 순수 인식을 향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행동을 향한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될까? 그렇다면 지각 자체의 점증하는 풍부함이란 사물에 대한 생명체의 선택 앞에 남겨진 비결정성의 몫의 증가를 상징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하면 안될까? 그러므로 이 비결정성의 진정한 원리로 놓고 거기서부터 출발해보자. (27) [이마쥬의 중심이 비결정이란, 고정된 통일적 주체를 설정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 설정이 전제로서 미해결이지, 비결정성은 원초적으로 철학 하는 것이다. (44LLI)]
생명체에 의해 표상된[일정한 경향성을 띤 지각이미지 덩어리의 재현 의식(44LLI)] 실재적 행동의 중심들(centre d'action réelle, 개체 인격들)을 ... 상상해보자. 나는 이 각각의 중심들의 주위에, 그 위치에 종속되며, 그것과 함께 변화하는, 이마쥬들이 배열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따라서 나는 의식적 지각이 생산되어야만 하고, 게다가 이 지각이 어떻게 출현하는지를 이해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말한다.(28) .
28 우선 하나의 엄밀한 법칙에 의해 의식적 지각의 범위(l'étendue 부피)가 생명체가 처리하는 행동의 강도(l'intensité)에 연결된다는 사실에 주목해보자. 우리의 가정이 근거 있다면, 이 지각은 물질로부터 받은 진동이 필연적 반응으로 이어지지 않는 바로 그 순간에 나타난다. [주저하고 지체하는 과정에서 생긴다.? ] ... 그러나 반응이 더욱 불확실하게 되고 더 많은 자리가 남겨져 주저하게 됨에 따라, (28) ... 거리도 증가한다. ... 점점 멀리 떨어져 있는 영향을 받게된다. ... 약속이든 위협이든 지불기한을 연기하는 것이다. 따라서 생명체가 처리하는 독립성의 몫은 또는 앞으로 말할 것처럼, 그의 활동을 둘러싸고 있는 비결정성의 지대는 생명체가 관계하는 사물들의 수와 거리를 선천적으로(a priori) 평가하게 해준다. ... 지각은 행동이 시간을 처리하는 정확한 비율로 공간을 처리한다.(29)
우리는 행동자체와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비결정성, .... 신경계란 표상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이 비결정성을 위해 구성되었던 것처럼 보인다. 하나의 사실로서 받아들여진 이 비결정성으로부터 우리는 지각의 필연성, 즉 생명체와 그것에 관계된 대상들의 다소간 먼 영향들 사이에 있는 변화 가능한 관계의 필연성의 결과로 끌어낼 수 있었다. (29) [생명체가 살아가는 데 지각의 범위가 있고 그 범위 안에서 행위는 비결정이며, 선택적 관계가 행동의 강도와 연관되어 있다.(44LLI)]
의식은 뇌수질의 내적 운동으로부터 생겨나는가?(30)
30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하여 우리는 우선 의식적 지각이 완성되는 조건들을 상당히 단순화하려고 한다. 사실 추억들(souvenirs)로 배어 있지 않은 지각은 없다. [완화된 단순화라는 것은 기억이라고 하지 않고 추억들이고 하였다.]
[왜 과거가 스며든 지각을 ... 본뜨는 일에만 몰두하는 지각으로 대체되는 착각을 하는가?] ... 하나의 지각이 아무리 짧다고 하더라도 사실상 그것은 항상 일정한 지속을 점유하고, 따라서 무수한 순간들을 서로 서로의 안으로 연장하는 기억(mémoire)의 노력을 요구한다. (30-31) [기억의 노력은 삶에서, 추억은 관념(또는 개념)형성에서 모방에 관여한다]
기억은 다음 두 형태 아래서, 즉 그것이 무매개적 지각이라는 바닥을 추억들의 담요(une nappe de souvenirs)로 깔고 있는 한에서, 또한 무수한 순간들을 응축시키고 있는 한에서, 지각 속에 있는 개인적인 의식의 중요한 지분(le princopal apport, 기본적 지주)을, 즉 사물에 대한 우리 인식의 주관적인 측면(le côté subjectif)을 구성한다.(31)
그리고 언제나 일정한 두께의 지속을 제공하는 지각이 아니라, 순수 지각, 사실적이라기보다 오히려 권리적으로 존재하는 지각 즉 내가 있는 곳에 위치하고, 내가 사는 방식으로 살지만, 현재 속에 매몰된, 그리고 모든 형태의 기억(mémoire)을 배제시킴으로써 물질로부터 무매개적이면서 동시에 순간적인 영상(vision)을 얻을 수 있는 존재가 가질지도 모르는 지각으로 이해할 것을 요청한다. (31)
31 의식의 도출은 무모한 기획일지 모른다(31) [ - 유물론에서]
이마쥬가 지각되지(être perçue) 않고도 있을 [존재(être)할] 수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것은 표상 되지 않고도 현재 할 수 있다 (32) [내가 없어도 사물(이마쥬)들은 있다.]
결국 물리적 이마쥬는 지각되지 않으면서 존재할 수 있고, 표상되지 않으면서도 존재할 수 있다. [무기물의 물체를 말한다] 현전과 표상사이의 구별은 물질자체와 우리가 물체에 대해 갖는 의식적 지각 사이의 간격[차이]을 측정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베르그송은 현재하는 지각을 물체에 그리고 선택이 들어간 의식적 지각을 표상에 연관시킨다]
[통속적 유물에서] 현전에 보다 표상 속에 더 많은 것이 있다는 것이라면, 물질로부터 지각으로 이행을 해결하지 못하고 꿰뚫을 수 없는 불가사의(mystère)에 빠진다(32). [소박한 관념론에서] 한 이마쥬의 표상이 그것의 유일한 현전(présence)보다 더 적다는 것이라면, 상황은 그와 같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때 현재하는 이마쥬들은 단지 자신들의 현전을 표상들로 바꾸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강제로 버리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 내가 물질적 대상이라고 부르는 이마쥬가 있다. 나는 그것의 표상을 가지고 있다.(32) - [전자에서는 대상의 지각 속에 포함된 기억을 이해하지 못하였고, 대상의 지각은 겉보기 차원을 넘어서 다른 것(기억)이 보태어졌다는 것을 설명하지 못한다. 경험론이 회의론에 빠질 수 밖에 없는 이유이다. 후자에서는 지각에 대한 선택으로서 표상을 설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표상이 물질적 이마쥬들 중의 일부이다. 칸트의 인식이 그러하다.]
[표상론]
그런데 바로 여기에 내가 물질적 대상이라고 부르는 이마쥬가 있다. 나는 그것의 표상을 가지고 있다.(32) 그것은(이마쥬는) .. 자신을 앞서는 이마쥬들을 연장하는(prolonger) 동시에 자신을 뒤따르는 이마쥬들 속에서 연속되기 때문이다. [지각의 과정은 이러하다] 이 이마쥬의 순수하고 단순한 현존을 표상으로 변형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뒤따르는 것과 앞서는 것, 그리고 또한 자신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을 단번에 제거하고, 그것의 외피(croûte extérieure) 즉 표면의 얇은 막(pellicule superficielle)만을 보존하는 것으로 충분할지 모른다. 현재하는 이마쥬이자 객관적 실재성인 그것[(얇은 막)]을 표상화된 이마쥬와 구별하는 것, 그것은 [다음과 같은] 필연성인데... 결국 무한한 우주 속으로 퍼지는 변양들이 모든 방향으로 통과하는 하나의 길(chemin)이 얇은 막과 같은 것이다.(33) [길의 단면(의식의 여러 평면들 중의 하나)이 표상일 뿐이다.]
만일 내가 그것을 고립시킬 수 있다면, 특히 내가 그것의 외피를 따로 떼어놓을 수 있다면, 나는 그것을 표상으로 바꿀 수 있을지 모른다. 표상은 그것이 다른 것으로 연속되어 스스로 상실해야 하는 강제로 인해 현실태(l'acte 작용으로)로 이행하는 순간에, 바로 거기에, 그러나 항상 잠재적이고 중화된 채로 있다. 이런 전환(conversion)이 이루어지기 위해 필요한 것은 대상을 조명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그것의 어떤 측면들을 모호하게 하고, 그것으로부터 가장 커다란 부분을 감소시킴으로써, 그 나머지가 주변 속에 하나의 사물(chose)처럼 끼워 놓여져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그림(tableau)처럼 그것으로부터 분리되도록 하는 것이다. (33) [비트겐슈타인의 그림이론은 표상이론이다. 그것은 사물에 대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 만일 생명체들이 우주 속에서 비결정성의 중심을 구성한다면, [들뢰즈 시네마 I, 92] 그리고 이 비결정성의 정도가 생명체의 기능들이 증가하고 상승함에 의해 측정된다면, 생명체들의 현존 자체가 자신들의 기능들이 관련되지 않은 대상들의 모든 부분들을 제거하는 것과 등가적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생명체들은 자신들에게 무관한 외적 작용(actions)들 중 어떤 것들로 하여금 어느 정도 통과하게 내버려 둘 것이다. [들뢰즈 시네마 I, 91] 다른 작용(actions)들은 고립되어, 그들의 고립자체에 의해 지각들이 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모든 일이, 마치 우리가 [대상의] 표면들 위에다 그것으로부터 나온 빛, 즉 계속 퍼져나가면서 결코 드러난 적이 없었던 빛을 반사하는 것처럼 일어난다. (33-34)
반대로 만일 그것들이 어디선가 반작용하는 어떤 자발성에 부딪힌다면, 그것들의 작용은 줄어들고, 그것들의 작용의 이러한 감소가 바로 우리가 그것들에 대해서 가지는 표상이다. 따라서 사물에 대한 우리의 표상은 요컨대 그것이 우리의 자유에 부딪혀 반사된다는 사실로부터 생겨난다. (34) [= 이처럼 무기물과 반성의 가장 높은 단계에 도달한 정신 사이에는 기억의 모든 가능한 강도들 즉 같은 말이 되겠지만, 자유의 모든 단계들이 있다. (250)]
[지각론]
34 한 광선이 어떤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옮겨갈 때, 그것은 일반적으로 방향을 바꾸면서 이 장소를 통과한다. 그러나 두 장소의 각각의 밀도는 어떤 입사각에서는 더 이상 굴절이 가능하지 않는 그러한 것이 될 수 있다. 그 때 [빛] 전반사가 이루어진다. 광점으로부터 말하자면 광선들이 자신의 길을 계속 가는 것이 불가능함을 상징하는 하나의 잠재적 이마쥬(l'image virtuelle)가 형성된다. 지각은 이와 같은 종류의 현상이다.(34) ... 따라서 지각은 방해받은 굴절로부터 나오는 이러한 반사 현상들과 유사하다. 그것은 마치 신기루 효과(effet de mirage)와 같다.(35) [MR 328, 무의식과 연관시킴]
이것은 결국 이마쥬들에 있어서 존재하는 것과 의식적으로 지각된 것 사이에 본성의 차이가 아니라 정도의 차이만이 있다는 것을 뜻한다.(35) [해석이나 측정을 목적으로 하는 모든 선입견을 떨쳐버리고 직접적 실재성과 대면해 보자. 우리는 지각과 지각된 사물 사이에서, 질과 운동 사이에서 더 이상 뛰어넘을 수 없는 거리를 발견하지 못하고, 더 이상 본질적인 차이를 발견하지 못하며, 진정한 구분조차 발견하지 못한다. (245)]
의식은 - 외적 지각의 경우에 - 바로 이 선택(ce choix)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우리의 의식적 지각의 이 필연적인 빈약함 속에는 이미 정신을 예고하는 적극적인 어떤 것이 있다. 그것은 말의 어원적 의미에서 분간(discernement)이다. (35) -(p. 48 참조) - [심리학에서 베르그송의 의식이론이 주목받은 것은 선택개념이었다. 자연에 의한 선택이 아니라 생명의 자기 선택이라는 것이다. (44LLI)]
그러나 사진이 있다고 하면, 그것은 사물의 내부 자체에서 그리고 공간의 모든 점들에 대해서 이미 찍혀지고, 이미 현상되었다는 것을 왜 알지 못하는가? .... 라이프니츠가 그렇게 원했듯이, 각 모나드는 우주의 거울이다. 단지 우주의 임의 장소를 고려한다면, 물질 전체의 작용이 거기서 저항없이 그리고 소모 없이 통과한다는 것, 거기서 그 전체의 사진은 반투명(translucide)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건판 뒤에 이마쥬를 분리하는 검은 판(l'écran noir)이 없다. 우리의 비결정성 영역은 어느 정도 검은판[필름]의 역할을 하는 것인지 모른다. 그것들[비결정성 영역]들은, 단지 실재적인 작용은 지나가게 하고, 잠재적인 작용은 머무르게 할 뿐이다.(36) [잠재적인 작용 => 추억]
[심리학자도 외적 대상이 존재하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외적대상에서 분리된 나의 신체가 있고, 나의 신체에서 분리된 지각중추가 있다고들 생각한다. 여기서 두 가지다 문제가 있다. 외적 대상과 나의 신체, 나의 신체와 나의 지각 중추 사이의 분리를 연결하는 것은 무엇인가?](36-37) [외부 대상으로부터 - 지각 중추에 들어가 표상을 만드는 것은 마술 막대기의 장난 같다. 여기서 만들어진 환영은 보존하기 위해 표상처럼 비연장적 의식 속에 전개할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어떻게 연장을 받아들일 것인가? 마술 막대기를 포기해보라]
당신은[심리학자] 우리에게 외적 이마쥬들이 감각 기관들에 도달해서, 신경들을 변형하고, 그 자신들의 영향을 뇌 속으로 퍼져나가게 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러면 끝까지 가보라. 그러면 운동은 뇌 물질을 곧 가로질러, 물론 거기에 머물지 않는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의지적 행동으로 피어날 것이다. 지각의 메카니즘 전체는 그와 같다.(38)
따라서 당신이 설명해야 하는 것은 어떻게 지각이 생겨나는가 하는 물음이 아니라, 어떻게 그것이 제한되는 가하는 물음이다. 왜냐하면 지각은 권리상으로 전체에 대한 이마쥬이고 사실상으로는 당신에게 관심있는(intéresser) 것으로 축소되기 때문이다. (38)
사실상으로 당신이 당신의 신체라고 부르는 이 특별한 이마쥬의 움직임 앞에 놓여 있는 비결정성의 부분을 그리도록 제한되어 있다. 따라서 역으로 뇌의 회백질의 구조의 결과로 나오는 바와 같은 신체의 비결정성은 당신의 지각의 범위의 정확한 척도를 제공한다. (38) .... 따라서 두 [의식적 지각과 뇌의 변양]의 상호 의존성은 둘 다 의지의 비결정성이라는 제3항의 함수라는 사실에 기인한다.
예를 들어 하나의 광점 P에 대해 ... 과학과 의식은 순간적인 것 속에서는 일치할 것이다. (39) ... 유일한 문제는 무수한 다른 이마쥬들을 배제한 채로, 왜 그리고 어떻게 이 이마쥬가 나의 지각의 일부가 되기 위해 선택되었는가를 아는 것이다.(40) ... 관심있는 신경 요소들이란 받아들여진 진동에 진동 효과를 부여하는 바로 그 무엇이다. 이 관심있는 요소들은 의지의 비결정을 기호화 한다. [선택적 포착을 한다.] 이 비결정성은 신경요소들의 총체에 의존한다.(40)
사실인즉, 점 P와 그것이 보내는 광선들, 망막 그리고 관심있는 신경요소들은 하나의 연대적 전체를 형성하고, 광원 점 P는 전체의 일부를 이루며, P의 이마쥬가 형성되고 지각되는 곳은 바로 P 안에서이지 다른 곳이 아니다.(41) [P를 나의 신체로 바꾸어 읽어 보라] 표상과 행동관계
- Rapport de la représentation à l'action 41-47
[지각과 행동관계 41-45]
소박한 상식 - 우리는 대상을 우리 안에서가 아니라 대상 안에서 지각한다고 믿는 것으로 시작했다. (41)
대상이 사라져도 뇌는 존속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거기서부터 뇌수현상이 이마쥬 산출에 충분하다고 결론짓는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모든 심리적 상태들에서 기억이 첫째 역할을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41)
선천적 시각 장애자들이 그들의 시각중추들을 손상되지 않은 채로 가지고 있다. [그래서 수술해서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시각적 이마쥬를 형성하지 못한 채 살다가 죽는다. ... 왜냐하면 여기서 다루고자 하는 것은 순수지각이지 기억에 의해 복잡해진 지각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억이 가져온 몫을 던져 버리고, 지각을 날 것 그대로의 상태에서 고려해 보라. 그러면 대상없이는 이마쥬도 결코 없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통속적 유물론, 경험론을 인정]
신경계의 역할은 이 진동(ébranlement)을 이용하고, 그것을 실제적이거나 잠재적으로 완성된 실천적 과정들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42)
외적 대상을 동물의 시신경을 포함하는 운동기제에 연결하는 선이 끊어진 것이다. 따라서 시신경이 무력하게 되고 바로 이 무력함 속에 무의식이 존재한다. (43) ... 그러나 사실 나의 신경계는 내 신체를 움직이는 대상들과 내가 영향을 행사할 수 있을 대상들 사이에 놓여, 운동을 전달하고 배분하거나 억제하는 단순한 전도체(conducteur)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 [비유: 점] 주변에서 중심으로 향해 가는 섬유들이 있는 만큼, [거대한 수의 섬유들 즉 다발이다] ... 나의 운동 활동에 기본적인 질문을 제기할 수 있는 공간의 점들이 있다. 제기된 각 질문이 바로 지각이라 부르는 것이다.(43) ... 빛이 자신이 출발한 이마쥬로 회귀하는 것, 또는 차라리 지각을 이마쥬로부터 이끌어 내는 이러한 분리 즉 분별(discernement)이다. 따라서 지각의 세부 사항은 정확하게 이른바 감각 신경들의 세부사항 위에서 주조되지만, 지각은 전체적으로 볼 때, 신체의 운동하려는 경향 속에 그것의 진정한 존재이유를 갖는다고 말할 수 있다.(44)
하나의 대상에 도달하고 그것을 변양하기 위한 내 신체의 운동은 동일하게 남아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 때 나의 운동적 활동은 하나의 분리된 실체이자, 의지에 따라 운동을 낳는 일종의 저장소가 되고, 어떤 종류의 이마쥬가 행동이 일어나게끔 촉발했던 간에, 동일한 행동에 대해 같은 것이 된다. (44) ,
[시각을 상실할 경우의 예] - 따라서 나의 활동은 실제적으로 감소한다. ... 그러나 사실상 지각은 운동 중추 들 속에 있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감각 중추들 속에서 있는 것도 아니다. 지각은 이것[중추들]들의 관계의 복잡성을 측정하는 것이며, 관계의 복잡성이 나타나는 바로 거기에 존재한다.
[표상과 행동관계]
조금씩 조금씩 그리고 귀납의 힘에 의해서 [비개인적] 표상은 우리의 신체를 중심으로 받아들이고, 우리의 표상이 된다. (45) [주변에서 중심으로]
어떻게 [비연장적인] 감각들[표상들]이 연장성을 얻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외재성이라는 개념을 어디서 이끌어 낼 수 있겠는가? 그러나 만일 사람들이, 경험이 그렇게 믿듯이, 이마쥬들의 전체가 우선 주어진다는 데 동의한다면, 나는 어떻게 나의 신체가 이 전체 속에서 특권적 상황을 마침내 점유하게 되는지를 알게 된다.(45) ... 내부와 외부라는 개념이 어떻게 생겨나는지를 이해하게 된다.(46) ...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의 구별은 이처럼 부분과 전체의 구별에 이르게 될 것이다. 우선 이마쥬들의 전체가 있다. 이 전체 속에 “행동의 중심들”이 있는데, 이에 관련된 이마쥬들은 이 중심들에 반사되는 것처럼 보인다. 지각들이 생겨나고 행동들이 준비되는 것은 그와 같이 이루어진다. 나의 신체(Mon corps)는 이 지각들의 중심에서 그려지는 것이고, 나의 인물(ma personne)은 이 행동들이 결부되어 있는 존재이다.(46) [이 경우는 주변에서 중심으로 가는 경우의 설명이다.]
중심에서 주변으로 간다고 주장하면... 비연장적 감각이 어떻게 연장적 표면을 형성하는지, 그리고 그것들이 어떻게 신체 밖으로 투사될 것인지 이해하지 못한다. ( [표상으로부터 가능적 행동의 범위 접근의 난제] .. 나의 의식적 자아로부터 나의 신체로, 나의 신체로부터 다른 물체로 나아가기를 바라는가? ... 우리의 외적 지각이 우선 비연장적인 성격을 갖는 다고 믿는 데는 서로 결합되어 있는 많은 착각들이, 우리가 순전히 내적인 상태들을 우리 밖에 투사한다는 이 생각에는 많은 오해들이, 우리가 단번에 밝힐 수 있다고 주장할 수 없는 잘 못 제기된 물음들에 대한 많은 불안정한 대답들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 이 착각들 뒤에, 불가분적 너비와 동질적 공간의 형이상학의 혼동, [공간 개념의 혼동] “순수 지각”과 기억의 심리학적 혼동 [시간개념의 혼동]을 명백히 보여줌으로써 (47)... ( 이를 바로 잡기 위해 [다음 단원으로]
이마쥬와 실재성
- L'image et la réaltité -(47-52)
첫째 사실(47-50) - 감관 기관의 교육이 필요하다
시각도 촉각도 자신의 인상을 곧 바로 위치화(localiser) 시키지 못한다. 일련의 비교와 귀납이 필요하다. 이것들에 의해 우리는 우리의 인상들을 서로에 대해 조금씩 정돈된다. (47)[- 교육이 필요하다. ]
바로 여기에 모든 이마쥬들 가운데에 내가 나의 신체라고 부르는 어떤 이마쥬가 있는데, 이 이마쥬의 잠재적 행동은 주변의 이마쥬들이 자신[신체] 위에서 명백히 반사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나의 신체에 대해서 일종의 가능적 행동들이 있는 만큼 다른 물체들에 대해서도 상이한 반사 체계들이 있을 것이며, 이 체계들의 각각은 나의 감관들 중 하나에 상응할 것이다.(47) 따라서 나의 신체는, 다른 이마쥬들 위에 행사할 다양한 행동들의 관점에서, 그 이마쥬들을 분석하면서 반사하게 될 어떤 이마쥬처럼 행동한다.(48)
따라서 같은 대상 안에서 나의 여러 감관들에 의해 지각된 성질들 각각은 나의 활동의 어떤 방향, 어떤 필요를 상징한다. 이제 나의 다양한 감관들에 의해 어떤 물체의 지각들 전에는 서로 결합함으로써 이 물체에 대한 완전한 이마쥬를 제공할 것인가? 아마 그렇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전체 속에서 모아진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물체들의 모든 점들의 모든 영향들을 지각한다는 것은 물질적 대상의 상태로 내려가는 것일지 모른다. 의식적으로 지각하는 것은 선택하는 것을 의미하고, 의식은 무엇보다 이 실천적 분별(discernement) [실용적으로]로 이루어진다. 따라서 나의 다양한 감관들이 제공하는 동일 대상의 상이한 지각들은 서로 결합된다고 해서 대상의 완전한 이마쥬를 재구성하지는 못할 것이다. (48)
이 지각들은 나의 욕구들 속에서, 말하자면 그 만큼의 공백들을 측정하는 간격들에 의해 서로 분리된 채로 머무를 것이다. 바로 이 간격들을 메우기 위해 감관들의 교육이 필요하다. 이 교육은 나의 감관들의 상호간에 조화시키고, 감관들의 재료들 사이에 나의 신체적 욕구들의 불연속성 자체에 의해서 끊어졌던 연속성을 회복시키며, 결국 물질적 대상의 전체를 대략적으로 재구성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48) [ - 여기도 교육이 필요하다.]
첫째 설명에서 시각의 비연장적 감각들은 촉각이나 다른 감관들의 비연장적(inextensives) 감각들과 함께 구성되어 그것들의 종합에 의해서 한 물질적 대상의 관념을 제공할 것이다. (48) [관념론자]
반대로 둘째 설명에서는 “우리의 여러 감관의 재료들”은 우리 안에서라기보다 우선 사물 안에서 지각된 성질들이다. 그것들이 재결합하는 것은 놀라운 일일까?(49) [실재론자]
첫째 가설에서 물질적 대상은 전혀 우리가 지각한 것의 총체가 아니다. 사람들은 한편으로는 감각적 성질들과 함께 의식적 원리를 놓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에 대해 어떤 것도 말할 수 없는 물질을, 또한 그것을 드러내는 모든 것을 그것으로부터 벗겨냈기 때문에 부정에 의해서만 정의되는 물질을 놓는다. 둘째 가설에서는 물질에 대한 점점 심화된 인식이 가능하다. 우리는 이 물질로부터 지각된 어떤 것을 떼어내기는커녕, 반대로 모든 감각적 성질들을 그것에 접근시키고, 그것들의 친화성(parenté)을 재발견하며, 그것들 사이에서 우리의 욕구들이 단절시킨 영속성을 회복해야 한다. 따라서 물질에 대한 우리의 지각은 적어도 원리적으로는 그리고 우리가 곧 보게되겠지만, 정념(affection)과 특히 기억을 제외한다면, 더 이상 상대적인 것도 주관적인 것도 아니다. 그것은 무수한 우리 욕구들에 의해 단지 분할 된 것이다. (49)
첫째 가설에서 정신은 물질만큼 인식불가능하다. ... 두 번째 가설에서는 의식의 역할은 분명히 정의된다. 의식은 가능적 행동을 의미한다.(50)[가능적 행동과 실재적 행동..] [가능적 행위의 범위와 한계가 축소된는 이유는 셋째에서 ]
둘째 사실 - (50-52)
사람들이 내세우는 두 번째 사실은 오랫동안 “신경들의 특수한 에너지”라고 불렸던 것으로 이루어진다. .... 아주 특별한 사실들로부터 사람들이 말하는 일반적인 두 법칙들로 이행하는데, 그것은 상이한 원인이 동일한 신경 위에 작용하면 동일한 감각을 자극한다는 것, 그리고 동일한 원인이 상이한 신경들 위에 작용하면 상이한 감각들을 야기한다는 것이다 ... 마지막으로 우리의 지각이 상이한 두 부분 .. 이 두 부분이란 하나는 공간 속의 동질적인 운동들이고 다른 하나는 의식 속의 비연장적인 감각들이다. (50, 92) [“신경들의 특수한 에너지”, 이 개념은 로체(Lotze)의 학위 논문에서 나왔다.]
이미 로체(Rudolf Hermann Lotze, 1817-1881)가 그 허위성을 의심한 바 있다. 그는 “음파들이 눈에 빛의 감각을 주거나, 빛의 파동들이 귀에다 소리를 듣게 할 것”을 기다렸다. ..그 때 같은 감각들을 낳는 것은 물론 같은 자극들일 것이고, 상이한 감각들을 야기하는 것은 상이한 자극들일 것이다.(51, 93) Lotze, Métaphysique, p. 526 et suiv.
슈바르츠(Schwarz) 견해 : ��지각문제(Das Wahrnehmungsprbleme)��, Leipzig, 1892, 313. 사람들이 여기서 말하는 감각들은 우리에 의해 우리 신체 밖에서 지각된 이마쥬들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 신체 자체 속에 위치한 정념(affection)들이다. (52, 94) [우리라는 내부에서 생산 된 것은 신경의 작용이라 하더라도 정념, 흥분, 기억 등과 관련있다. 사과를 먹는 감각이 없어도, 추억은 침을 돌게 한다.]
다음과 같은 결론이 나온다. 우리 신체의 이른바 감각적인 요소들 각각은, 그것이 일상적으로 지각하는 외적 대상들에 관해, 그것의 잠재적 행동과 같은 종류에 속함에 틀림없는 자신의 고유한 실제적 작용을 가진다.(52, 94) [정념(애정)의 문제로 넘어간다]
이마쥬와 정념적(애정적) 감각
- L'image et la sensation affective (52-63)
셋째 사실
셋째 논증은 사람들이 공간을 점하는 표상적 상태에서 비너비(inétendue)인 것처럼 보이는 정념적 상태로 서서히 이행한다는 사실로부터 도출된다. 거기서부터 사람들은 모든 감각이 자연적이고 필연적으로 비연장적(inextension)이며, 감각이 너비(étendue)에 덧붙여지고, 지각의 과정이 내적 상태들의 외재화로 이루어진다고 결론짓는다. (52)
이 논증을 다른 형태로 하면 어떨까? 우리 신체 위에서 대상의 작용을 증가시킴으로써 정념이 되고, 더욱 특별하게 고통이 될 수 없는 지각이란 별로 없다. 사람들이 바늘의 접촉으로부터 찔린 자국으로 보이지 않게 이행할 때가 그러하다. 역으로 고통의 감소는 차츰 그 원인의 지각과 일치하고 말하자면 표상으로 외재화된다. ...그런데 정념은 나의 개인적 실존과 내밀하게 연결되어있다. (53)
관념론자들은 물질적 우주 속에서 주관적이고 비연장적인 상태들의 종합이외에 다른 것을 보지 않는다. 실재론자들은 이 종합 뒤에 그것에 상응하는 독립적인 실재가 있다고 덧붙인다. 실재론자들이건 관념론자들이 건 ... 우리가 물질적 우주의 표상으로부터 먼저 분간된(dégager)된 것이 아니라 표상이 우리로부터 나온 것으로 결론짓는다. (54, 97)
정확한 사실에 대한 이의 있는 해석을 비판하기 앞서 이 해석이 고통의 본성도 지각의 본성도 설명할 수 없으며, 심지어 그것들을 조명하는 일조차 성공할 수 없다. 나라는 개인에 본질적으로 연결되어 내가 없어지면 사라져 버릴 정념의 상태들... (54, 97)
고통 속에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어떤 것이 있는데, 사람들은 어떤 철학자와 더불어 그것이 혼란된 표상으로 이루어진다고 말함으로써 이를 잘못 설명하고 있다. (55)
정념적 감각의 본성
- Nature de la sensation affective 55-58
정념 - 고통(douleur) 55
모든 고통은 [위치적]국부적(local) 노력이며, 바로 이 노력의 고립자체가 그것의 무능력의 원인이다. 왜냐하면 유기체는 자신을 이루는 부분들의 연대성으로 인해 전체의 효과에만 적합하게 되어있기 때문이다. 고통이 생명체에 노출된 위험에 절대적으로 불균형적인 것도 역시 노력이 국부적이기 때문이다. 위험은 치명적이지만 고통은 가벼울 수 있다. 고통은 결딜 수 없지만(치통처럼) 위험은 대수롭지 않을 수 있다. (56, 100).
유기체, 중심점, 신체, 그것은 밖으로부터의 작용을 반사하는데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투쟁하며, 그럼으로써 이 작용(action)에서 어떤 것을 흡수한다. 거기에 정념의 근원이 있을지 모른다. 따라서 비유적으로 말하면, 만일 지각이 신체의 반사하는 능력을 측정한다면, 정념은 신체의 흡수하는 능력을 측정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57, 101) [능동과 수동관계의 다른 표현일 수 있다. ]
/ 그러나 그것은 비유에 불과하다. ... 정념의 필요성이 지각 자체의 존재로부터 흘러나온다는 것을 이해해야만 한다. 지각은 우리가 이해하는 것처럼 이해된다면, 사물들에 대한 우리의 가능적 행동을 측정하며, 따라서 역으로 우리에 대한 사물들의 가능적 작용을 측정한다. (57, 101) .. 따라서 우리의 신체를 지각된 대상과 분리시키는 거리는 위험(danger)이 다소간 임박했음을, 또한 약속(promesse)의 지불기한이 다소간 근접했음을 알려주는 척도이다.(57 101)
거리가 짧아지고, 약속이 직접적이 됨에 따라 가능적 행동은 더욱더 실제적 행동으로 변형되려고 하고, 이제 극한으로 가서 거리가 O(영)이 된다고, 즉 지각할 대상이 우리의 신체와 일치한다고, 다시 말해, 결국 우리 신체가 지각대상이 된다고 가정해 보라. 그 때 이러한 매우 특수한 지각이 표현하게 될 것은 더 이상 잠재적 행동이 아니라 실재적 행동이다. 정념은 바로 이 사실로 이루어진다. 따라서 우리의 감각과 지각과의 관계는 우리 신체의 실재적 작용(action)과 가능적 또는 잠재적 작용의 관계와 같다. (57-58, 102)
그러므로 결국 모든 일이 진행되는 양상은 마치 실제적이고 잠재적인 작용들이 자신들의 적용적점들 또는 기원점들로 실제로 회귀함으로써, 외적 이마쥬들은 우리 신체에 의해 신체를 둘러싸고 있는 공간 속에 반사되는 것처럼 보이고, 실재적 작용들은 우리 신체에 의해 그것의 신체의 실체성(sa substace)의 내부에 포획된(arrētée 체포된) 것처럼 보인다. 이런 이유로 외적인 것과 내적인 것의 공통의 한계인 신체의 표면은 지각되는 동시에 감각되는 연장(étendue)의 유일한 부분(portion)이다.(58) [물체는 지각인데 비해, 우리의 신체(생명체)는 지각과 감각의 이중 작용을 한다.],
정념적 감각으로부터 고립된 이마쥬
- L'image, isolé de la sensation affective 58-63
이런 것은 언제나 나의 지각은 내 신체밖에 있고, 나의 정념은 반대로 내 신체 속에 있다는 것을 뜻한다.(58)
그렇게 해서 우리는 순수지각에 관한 우리의 이론을 최초로 수정할 필요성을 엿볼 수 있다. (59)
[심리학자의] 오류는 공간의 역할과 연장(étendue)의 본성에 관한 거짓된 견해에서 빌어온 논증들로 강화된다. 그러나 이 오류는 더 나아가 자신에 대해 잘못 해석된 사실들을 가지고 있는데... (60, 105)
그 사실은 결국 정념이 처음부터 하나의 어떤 연장적(extensive) 결정을 지닌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닌가? (61) [잘못1 실재론, 잘못2 관념론]
사람들은 여전히 잘못된 위치화들, 즉 (더욱더 새로운 검토을 받을 여지가 있을지 모르는) 신체의 일부가 절단된 환자의 착각을 내세운다. 그러나 (106)... 일단 이러한 번역이 만들어지면 원본은 퇴색한다. [생리학적으로 재 지도화의 과정을 걸으면] 그러나 만일 원본이 처음에 놓이지 않았다면, 그리고 정념적 감각이 처음부터 단지 자신의 힘에 의해서 그리고 자신의 방식으로 국재화[위치화]되지 않았다면, 번역을 결코 만들어지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심리학자는 이러한 상식을 받아들이는데 매우 큰 어려움을 느낀다. (61, 107) [실재론자의 착오]
정념에서 표상으로 이행도 마찬가지로 불가해한 불가사의에 싸여 있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반복해서 말하지만, 사람들은 단순하고 비연장적인(inextensive) 내적인 상태들에서 그것들이 공간 속에서 특별히 이러저러한 결정된 질서를 택하는 이유를 결코 발견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표상자체는 하나의 절대로서 놓여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것의 기원(origine)도 그것의 목적(destination)도 알지 못한다. (62, 108) [관념론자의 오류]
반대로 만일 사람들이 표상자체로부터, 즉 지각된 이마쥬들의 총체로부터 출발한다면 사태는 명확해진다. 나의 지각은 순수 상태에서 기억과 분리되어 있으며, 나의 신체로부터 다른 물체로 가는 것이 아니다. 나의 지각은 우선 물체들의 총체 속에 있고, 그리고 조금씩 조금씩 제한되며, 중심으로 나의 신체를 채택한다. (62).. [나의 지각은 우주 이마쥬의 일부분으로서 신체이다.] [신체가 지각의 기원인 셈이다]
사실 한편으로는 이 이마쥬가 언제나 표상의 중심을 점하고, 따라서 다른 이마쥬들은 이 이마쥬[신체]의 작용을 받을 수 잇는 순서로 그 주변에 단계적으로 배열된다. 다른 한편으로 나는 그 이마쥬에 대해 다른 이마쥬들처럼 단지 표면적인 껍질만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내적 상태, 그 안을 내가 정념적이라고 부르는 감각들에 의해서 지각한다. 따라서 이마쥬들의 전체 속에는 어떤 선호된 이마쥬가 있는데, 그것은 더 이상 단지 자신의 표면에서가 아니라 자신의 심층 속에서 지각되며 행동의 근원임과 동시에 정념의 자리이기도 하다. 바로 그 특별한 이마쥬를 나의 우주의 중심으로 받아들이고, 내 인격성(ma personalité)의 물리적 토대로 받아들인다. (62-63, 109) [DI의 답이 있다]
이마쥬의 자연적 확장
- Extension naturelle des images (63-67) [감관으로]
예로서 시각기관 ... 두 개의 망막이 있다. 두 감각들이 우리가 공간의 한지점이라고 부르는 것에 상응하는 유일한 지각으로 섞이게 되는 지를 설명해야 할 것이다. (63) 이 문제는 해결되었다고 하자.
감각들이[비연장적인] 어떻게 연장을 받아들이는가?(63) ... 그리고 감각이 연장과 결합하는 과정, 요소적인 각 감각이 공간의 결정된 지점을 선택하는 것은 설명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을 것이다. (64)
왜냐하면 그것들[촉감 시감]은 완전히 다른 두 종류에 속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각적 연장과 촉각적 연장 사이의 상응성은 단지 시각적 감각들의 질서와 촉각적 감각들의 질서 사이의 평행론에 의해서만 설명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시각적 감각들과 촉각적 감각들 이외에 그것들에 공통적이며, 따라서 그것들과 독립적임에 틀림없는 어떤 질서를 가정하지 않을 수 없다. 더 나아가 보자. 이 질서는 우리의 개인적인 지각과 독립적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든 인간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속하며, 결과들이 원인들과 연쇄를 이루고 현상들이 법칙들에 따르는 하나의 물질적 세계를 구성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결국 개관적이며, 우리와는 독립적인 질서의 가설, 즉 감각과 구별되는 물질적 세계의 가설로 인도된다. (64, 111-112) [독립적인 질서의 가설: 외연성이론, 감각과 구별되는 물질적 세계의 가설: 관념연합론으로]
우리는 앞으로 나아감에 따라 환원불가능 한 재료들을 증가시키고 우리가 출발했던 단순한 가설을 확대시켰다. ... 따라서 물질은 전혀 우리가 아는 것도 우리가 상상하는 것이 되지 못하며, 될 수도 없다. 물질은 불가사의한 본질(entité mystérieuse)의 상태로 남아있다. (65, 112)
우리 각자 안에서 정신과 신체를 구별해야 한다고 가정한다면, ... 관계에 관해서 전혀 알 수 없다. / 우리의 가설[내재적 연관(연속성)이 있다]을 무엇으로 이루어 있는가? 어떤 점에서 다른 가설과 구별되는가? [베르그송은 자신의 견해를 밝히기 보다 상대의 견해를 따라가면서 약점을 보완하는 척하다가 자기 견해(가설)를 밝힐 것이다] ...[그래서] 정념(affection)으로부터 출발하는 대신에 행동(action)으로부터 출발해보자. 즉 우리가 사물들 속에서 변화들을 행사하는 기능, 의식에 의해서 확증되었고, 유기체의 모든 능력들이 그것으로 집중되는 것처럼 보이는, 이 기능으로부터 출발해보자. (65, 113)
생명있는 물질의 진보는 이중적 작업을 두 가지 범주의 기관들로 분배하는 것으로 이루어지는데, 첫째는 영양섭취의 기관들이라 불리며, 둘째 범주의 기관을 유지할 목적으로 존재한다. 둘째 범주의 기관은 행동하기 위해(puur agir) 만들어진 것들이다. ... 말단[신경] .. 신경계 .. 중추 ... 지각은 생명체의 행동능력(la puissance d;agir, 작동하는 권능), 즉 받아들인 진동을 이어나갈 운동 또는 행동의 비결정성을 표현(expreimer)하며, 그것을 측정한다. 우리가 보여준 바 있듯이 이 비결정성은 이마쥬들에 대한 반사로 표현되거나 또는 차라리 우리 신체를 둘러싸고 있는 이마쥬들의 분할(division)로 표현될 것이다. (66, 113-114) [작동하는 권능은 스피노자의 ��윤리학�� 3장의 potentia agendi와 동일한 의미일 것이다. 벩송은 EC에서도 다시 사용한다.] [표현하다(exprimer)도 스피노자의 표현(expression)과 닮았다.]
우리의 지각은 이 신경요소들 자체의 모든 세부사항을 따르며, 그것들의 모든 변화를 표현하는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순수 상태에서 우리의 지각은 진실로 사물의 일부를 이룰 것이다. (65-66) [우주의 부분으로서 일부, 즉 각자의 신체는 중심이 아닌 부분이다.]
순수 지각
- La perception pure (67-70)
외적 지각에 관해서 예고했던 단순화된 도식적 이론, 그것은 순수지각이론이 될 것이다. (67)
따라서 완수할 행위(acte)들의 비결정성은 순수한 변덕과 섞이지 않기 위해 지각된 이마쥬들의 보존을 요구한다. ...기억(mémoire)은 인식의 영역에서는 우리 의지의 비결정성의 반향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그러나 기억(mémoire)의 작용은 이런 피상적인 고찰이 예측하도록 남겨놓은 것보다 훨씬 더 멀리 또한 더욱 심오하게 펼쳐진다. 이제 지각 속에 기억을 통합하고, ... 이렇게 함으로써 의식과 사물들, 신체와 정신 사이에 접촉점을 더 정확하게 규정할 순간이 왔다. (67-78) [비결정성의 반향에서 자유의 시원이 있을 것이다.]
우선 기억(mémoire), 즉 과거의 이마쥬들의 잔존(survivance)을 전제하면, 이 이마쥬들은 항상 우리의 현재 지각과 혼합되며, 심지어는 그것을 대치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해두자. 왜냐하면 그것들이 보존되는 것은 단지 유용(utile)하게 되기 위해서이기 때문이다. (68, 116) [잔존은 위치에서 자리차지가 아니라, 위상학처럼 현존의 지위(영향력, 감화력)은 있으나 어디에 위치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위상이라 한다. (51QKE)
심리학에서 형이상학으로 올라가는 중대한 [첫] 오류는 순수 지각과 추억(souvenir) 사이에 본성의 차이 대신에 강도의 차이만을 보려고 하는 것으로 이루어진 오류이다. ... 지각과 추억, 이 두 작용(actes)은 항상 서로 침투하고, 삼투현상에 의해서 각자의 실체의 어떤 것을 항상 교환한다. (69)
이 오류의 첫째 결과는 기억이론에 심층적 효과를 끼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기억을 더 약화된 지각으로 만듦으로서, 사람들은 과거와 현재를 분리하는 본질적 차이를 오인하고, 재인(reconnaissance) 현상과 무의식(inconscient)의 매카니즘을 이해하기를 포기하기 때문이다. (70)
사람들은 지각의 본래적이고 근본적인 작용(acte), 우리를 사물들 속에 단번에 위치시키는 순수 지각의 이 구성적인 작용을 오해 할 것이다. 그리고 심리학에서 기억(mémoire)의 매카니즘을 설명하는데 있어 극단적인 무력함으로 표현되는 동일한 [둘째] 오류가 형이상학에서는 물질에 관한 관념론적 그리고 실재론적 개념 규정 속에 깊이 배어들어 갈 것이다. (70)
물질 문제로 이행
- Passage au problème de la matière (70-74)
실재론에 있어서 자연현상의 불변적 질서는 실제로 우리 지각자체와 구별되는 하나의 원인 속에 있다. ... 관념론에서 이 지각들은 실재성의 전체이고 자연 현상의 불변적 질서는 단지 실재적인 지각들 측면에서 가능적 지각들을 표현하는 기호(symbole 상징)에 불과하다. 그러나 실재론이든 관념론이든, 지각들은 “진정한 환각들(des hallucinations vraies)”, 자신의 밖으로 투사된 주체의 상태들이다.(70, 119-120) [OE, 1551, 뗀(Hyppolite Taine, 1828-1893)의 주제이다.] [버클리에서 보면, 지각은 현존이며 외부로 투사이다. 관념론은 외부(물체계)가 상징처럼 기호이고, 실재론은 외부 자연이 실재하는 별개의 것이고, 지각의 원인 정도가 된다. (51QKF)]
위 착각(l’illusion)이 다른 착각을 은폐하는 이유: ... 그리고 우리의 순수 지각을 구성하는 것은 이 이미지들 가운데서 그려지는 우리의 시발적 행동이다. 따라서 우리 지각의 현실성(actualité)은 그것의 활동성(activité)으로, 즉 그것을 연장하는(prolonger) 운동에서 이루어지지 더 큰 강도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71)
[착각(l’illusion)을 벗어나기 위해] 반대로 지각의 진정한 성격을 회복하도록 해보자. 순수 지각이 자신의 심층적 근원에 의해서 실재 안에 잠겨 있는 시발적(naissantes) 행동들의 체계임을 보여주도록 하자. 이 지각은 근본적으로 추억(souvenir)과 구별될 것이다. 사물의 실재성은 더 이상 구성되거나 재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접촉되며, 침투되고, 체험될(touchée, pénétrée, vécue) 것이다. [베르그송의 경험적 유물론이라 할 수 있다.] 실재론과 관념론 사이에 걸려 있는 문제는 형이상학적 논의들 속에서 영구화되기보다는 직관에 의해서 종결되어야만 할 것이다. (71-72)
실재론과 관념론은 물질을 정신[오성]에 의해 이루어진 구성 또는 재구성으로 환원하려 한다. 우리가 놓았던 원리, 즉 우리 지각의 주관성은 무엇보다도 우리 기억의 지분으로 이루어진다는 원리를 실제로 따라가 보자. 물질 그 자체의 감각적 성질은 .. 더 이상 밖으로부터(dedehors) 가 아니라 자체로(en soi), 내부로부터(du dednas) 알려졌다. (72) [내부로부터(du dednas): PM 「형이상학 입문(1903)」에서 형이상학은 내부로부터 라고 한다. 이로부터 직관의 합일 무아(extase)가 아니라 몰아(entase)이며, 새로운 철학의 방법론이 제시된다. 벩송은 내재성이라는 용어보다 일상어에서 쓰이는 전치사를 사용했다는 것이 흥미롭다. - 윤구병이 톨의 철학보다 결의 철학이라고 할 때, 결은 파동이며 흐름이며 진동이라는 의미에서 벩송 철학을 암시한다. 톨은 원자론자인 셈이다. (51QKE)]
우리의 순수 지각은 아무리 그것이 급속하다고 하더라도 어떤 지속의 두께를 차지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의 잇따른 지각들은 우리가 지금까지 가정했던 것처럼 결코 사물들의 진정한 순간들이 아니고, 우리 의식의 순간들이다. ... 그러나 사실상 우리에게 있어서 순간적인 것(instantané)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72)
실재론이 물질과 지각, 지각과 감각의 연결성을 설명하지 못하는데 비해 - 만일 우리의 가설에 정초한다면, 어떻게 지각과 물질이 구별되며 어떻게 그것이 일치하는 지를 쉽게 알 수 있다. 우주에 우리의 잇따르는 지각의 질적인 이질성은 이 지각들의 각각이 어떤 두께의 지속 위에서 전개된다는 사실과, 거기서 기억은 비록 계속적(successifs)이지만, 우리에게 모두 함께 나타나는 것으로 보이는 무수한 진동들을 응축시킨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73) [운동 시간, 자아, 인격, 기억 등은 과학자가 나누어 아무리 작은 부분이라도 두께있는 지속이다.]
지각으로부터 물질로, 주체로부터 대상으로 이행하기 위해서는 한마디로 모든 기억을 제거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73)
주체와 대상 그리고 그것들의 구분과 결합에 관련된 물음들은 공간보다는 시간의 함수로 제기되어야 한다.(74) [시간의 함수란 발생적 과정을 주목해야..]
기억문제로 이행
- Passage au problème de la mémoire (74-78)
순수지각과 순수 기억의 구분 ... 순수지각이 우리에게 물질의 본성에 관한 실마리를 제공함으로써 우리에게 실재론과 관념론 사이에서 입장을 취할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한다면, 순수 기억은 우리에게 정신이라고 부르는 것에 관한 어떤 관점을 열어줌으로써, 그 측면에서 유물론과 유심론이라는 두 다른 교설에 관해 결정적인 판결을 내리도록 해 주어야 할 것이다. (74) [지각이 기억과 구별되는 경우에, 신체의 활동성와 영혼의 상태들 사이에 차히가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둘 사이에 연속성이 이루어지는지 하는 것이다. 데카르트는 송과선을 이야기했다. 벩송은 상호침투 또는 삼투압과 같은 것이라 한다. (51QKF) / 들뢰즈는 두 말굽쇠와 같은 진동의 공명이라고 표현할 것이다. /나로서는 환경에서 사유로 공명현상이 발생론적이고 관념이 환경을 울리는 쪽이 인지론이다. 후자는 제국주의 방식이다]]
순수 지각에 관한 요약 - 물질 속에는 현실적으로(actuellement) 주어진 것과 다른 무엇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더 많은 어떤 것(quelque chose en plus)이 있다. 아마도 의식적 지각은 물질 전체에 도달하지 못할지 모른다. [완화된 불가지론] .. 그러나 물질에 대한 이러한 지각과 물질 자체 사이에는 단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본성의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다.(74) 왜냐하면 순수지각은 물질에 대해 부분과 전체의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75) [조각 또는 요소들과 전체 관계가 아니라 부분과 전체가 상호 공명하는 관계이다.] [순수지각과 물질의 연관은 부분과 전체의 관계이다. 나의 신체와 우주도 부분과 전체의 관계인데 공연적이지 동연적이 아니다. 동연적은 대우주와 소우주로 보는 관점이다.]
감각적 성질들의 완전한 상대성을 주장하는 것은 유물론의 본질에 속한다. .. /.. 유심론은 이상한 맹목성에 의해 이 길에서 항상 유물론을 따랐다. (75) [리투르넬로: 부부가 닮는다. 여자들끼리 살면 주기가 같아진다. 몇이서 걸어보면 걸음이 같은 보조로 된다.(51OLD)]
그럼에도 한 가지 점에서 상식을 수정해야 한다. 기억은 지각으로부터 거의 분리할 수 없는 것이지만, 현재 속에 과거를 삽입하고, 또한 지속의 무수한 순간들을 단일한 직관 속에 응축시킨다. 이렇게 해서 기억은 이중적(double) 작용에 의해서, 비록 권리상 물질을 그 자체에서(en elle) 지각하지만, 사실상으로 우리 안에서(en nous) 지각하도록 하는 원인이 된다.(76) [단일한 직관이라고 말하지 않으면 무어라고 말 할 것인가.]
기억의 문제: 순수지각은 우리에게 물질의 전체 또는 적어도 물질의 본질적인 것을 제공하기 때문에, 그리고 나머지는 기억으로부터 와서 물질에 첨가되는 것이기 때문에, 기억(mémoire)[생명]은 원리상 물질과 절대적으로 독립적인 역량(puissance)[운동]이어야 한다. (76)
[간단히 말하면] 물질[신체]은 본질적인 점에서 순수지각과 일치한다. ... 생체일반 특히 신경계는 ..운동들을 위한 통로이다. 이 말은 뇌수질에 표상을 산출하는 속성을 부여하는 것은 헛된 일이라는 것을 뜻한다. (77)
우리는 기억이 무엇인지를 탐구할 책임이 있다. 신체에다 행동들을 준비하는 유일한 기능만을 부여했기 때문에, 우리는 왜 기억이 신체와 연대적인 것으로 보이는지, 어떻게 신체적인 손상들이 기억에 영향을 주는지, 어떤 의미에서 기억은 뇌수질의 상태에 맞추어 형성되는지를 탐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78) [제2장에서 다룰 것이다.]
물질과 기억
- Matière et mémoire (78-80)
우리는 기억의 문제가 어떻게 우리가 보기에 특권적 문제인지를 확립하기 위해 이 같은 생각을 또한 셋째 형태아래 제시해야 한다. 순수지각의 분석으로부터 이른 귀결은 어느 정도 발산하는 두 결론이 나온다. 하나는 심리 생리의 방향에서 심리학을 넘어서고, 다른 하나는 형이상학에서 심리학을 넘어선다. (78) [전자는 지각문제 후자는 기억문제]
첫째는 지각에 있어서 뇌의 역할에 관련된다. (78) ...그러나 기억에 관한 경험적 연구는 그것들 중에서 결정적인 판결을 내릴 수 있고 내려야 한다. 사실상 순수 추억은 가정상 부재하는 대상의 표상이다.(79) [소박한 실재론(유물론)이 다룰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경험적 실재론이 다루어야 한다.]
형이상학적 질서에 속하는 이 둘째 결론에 남게 되는데, 우리는 순수지각 속에서 진실로 우리 밖에(hors nous) [자리를 차지] 위치한다는 것, 그리고 우리는 그때 무매개적 직관 속에서 대상의 실재성을 접촉한다는 것이다. 여기서도 실증적 입증은 불가능하다.(79)
.. 그러나 반대로 만일 우리가 기억과 지각 사이에 정도의 단순한 차이가 아니라 본성의 극단적인 차이가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면, 기억 속에서는 어떤 단계에서도 존재하지 않는 것을 즉 직관적으로 포착된 실재성을 지각 속에 개입하게 하는 가설에 유리한 추정이 이루어질 것이다.(80)
따라서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은 모두 제시되었다. 우리는 정상심리학 또는 정신 병리학적 심리학에서 빌려온 다양한 종류의 자료를 자세히 검토하는 것으로 시작할 것이다. .. 기억의 작용(opération) 속에서 신체의 역할이 어디서 시작되고 어디서 끝나는지[제2장]를 탐구해야 한다. ..더욱 밀고 나가서[깊이 들어가] 정신의 기본적인 작업 그 자체를 고찰하고[제3장], [1장에서 기억의 내재성(무의식)을 확보하고, 생물학적으로 생식질(세포질)과 같은 위상을 세우고, 그 속에는 DNA와 같은 요소들이 아니라 활동하는 회로가 있다고 본다. 그리고 2장에서 회로들의 현실화는 추억들의 층위화와는 다른 방식으로 작용하는 권능을 행사한다. 행사 방식(활용론)은 만들고 있는 것과 만드는 것 사이의 차이를 드러낸다. - 스피노자의 생산하는 자연과 생산된 자연이다. 이를 바꾸어 말하면, 만들어 가는 본성(욕망)과 만들어진 본성(사물) 사이의 차이, 내용과 표현 차이이며, 진화에서 문(un phylum)과 종(une espèce)의 차이와 같을 것이다. (51QKF)]
(21:04, 51QKF)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