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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재성: [온]생명(L’Immanence: une vie‥…, 1995)」 재음미
들뢰즈, Philosophie, no 47, septembre 1995, 4-7. [죽음 그해 철학지 47호에 실렸다.]
in “들뢰즈가 만든 철학사” (박정태, 이학사, 2007), 22장, pp. 509-517.
- Deux régimes de fouset autres textes (1975-1995), Édition préparée par David Lapoujade, 2003, ch. 62, L’immanence: une vie…, pp. 359-.
내재성은 온생명이며, 작용하는 권능이며, 생산하는 자연이며, 하나이며 통일성이며, 난바다이며 화엄의 세계이다. 그 자체가 능동적이고 역동적으로 역안트로피로 치솟고 올라오는 신이다. 이런 내용을 역할(기능이 아니라, 힘으로)을 하며 구성하며 밖으로 보여주는 것이 신체(생명체)이다. 신체의 외화가 영혼이다. 온생명은 기억 총량이며, 한 종(種)에서 생명을 이어온 경험의 총량이다. 새로운 형이상학은 경험의 총량이라는 점에서 선험적 자료를 다룰 수 밖에 없다. 그 자료들이 생명체의 진화에서, 지구라는 지층의 축적에서 그리고 그 속에서 유물과 유적에서, 사회에서 언어적으로 축적된 자료들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과정은 단계를 도약하는 과정들이 있는데, 벩송은 생명체에서 생명의 도약이라고 하였고, 들뢰즌 사회에서 탈영토화와 탈코드화를 말할 것이다.
한마디로 들뢰즈는 내재성 즉 생명의 자기에 의한 생성과 자기 스스로의 창조를 말했다. 그 실재성은 내재성이다. 인식적으로는 개인의 경험 이전이라는 의미에서 선험적이다. 이런 의미에서 들뢰즈는 스피노자와 벩송의 충실한 계승자이다. 새로운 형이상학은, 고대 그리스적으로 자연형이상학이고 그리고 질료형이상학이며, 19세기 이래로 생명형이상학이라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형이상학을 들뢰즈는 사회발전과 확장에 적용하여 맑스의 ‘생산양식’을 확장하는 시대(규소의 시대)에 걸맞게 ‘생명양식’(그가 이런 말을 쓴 것 같지 않다: 아직 그의 글을 다 읽어본 것이 아니라)을 만들어 보려고 했을 것 같다.
따라서 자연변증법에서 역사변증법으로 진행과정을, 좀 더 깊이에서 전개하여 ‘생명 양식’에서 ‘생산양식’을 거쳐서 확장에서는 ‘문화양식’을 써보고자 했을 것 같다. 왜 문화양식이냐고 묻는다면, 그가 스피노자의 감화와 감동의 행동으로 행동학(l’éthologie)을 보았듯이 벩송에서 신비가의 이중열망을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생명의 능동성과 자발성은 “같지 않은 행동과 사유”(nothos logos)를 드러낸다는 것이다. 인류라는 종은 기계를 몸에 삽입하여 새로운 종으로 나가기보다, 지구라는 환경과 자연이라 생태와 더불어 동화하고 공감하고 공명하는 삶으로 나아가야 진정한 공산사회를 이룰 것이다. - 평화통일 영세중립 코리아 (53MMB)
* 여기서 내재성은 벩송의 ‘안에서(dedans)’이며, 벩송에서 ‘안에서’라는 위상이 잠재적이지만 현실의 표면에 닿아있는 실재성이다. 들뢰즈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벩송에서, 그 실재성을 DI에서 의식 상태라는 것을 MM에서 기억으로, 그리고 EC에서 생명으로, 동연적(coextensif)으로 설명하게 된다. 벩송에서 실재성은 권능과 강도를 지닌 아직 유형을 만들지 않지만 선험적으로 만들 능력을 지니고 있는 상태이며 지속이다. 그 지속은 과거를 달고서 미래를 갉아먹는 작동(Acte)이다. 지속, 의식, 생명은 무매개적으로 실재하는 어떤 것이다. 이를 빛의 발현으로(또는 넘쳐나는 샘으로) 또 자연의 자발성(권능)으로 보면 플로티노스와 스피노자를 만나게 될 것이다. 사회의 변화를 일으키는 충력으로 보면 니체를 만나게 될 것이다. (52VKH)
** 내재성은 선험적 위상이다. 그 위상은 사유에서 장(champs)이라 할 수 있으며, 의식 흐름이 지속하는 장(즉 위상)이다. 이 흐름은 물체로 등장하기 이전에, 질료적인 환경(milieu)에 가깝다. 생태로서 흐름은 강도와 경향을 지니고, 흐름의 힘(생명력)은 덩어리를 생성한다. 이 덩이는 위상적이지 아직 전형적이 아니라는 점에서 온사건(Evenement)이다. 이 온사건 안에는 내재적 권능이 작동하고 있다고 하면 스피노자가 보인다. 스피노자는 이 권능에서는 실체도 속성도 규정하지 않는다.
어쩌면 사건 자체인 순수 내재성은 생명이며, 위상적이라는 의미에서 덩이이다. 이렇게 볼 경우에 삼위격의 거물에 걸리지 않는 회오리로 퍼져나가는 온결의 신화를 수용할 수 있다. 이 온결은 도곤 족의 알이다. 알에서 생성은 기억(유전자들)을 포함한 선험적 사건들인 내재성이 포함되어있어서, 개체적일 수 있지만 비인격적이다. 이 정해지지 않은 인격은 현실에서 자기 정체성을 유지하려 한다.
생명, 즉 삶을 살아가는 주체는 잠재적인 것을 실재성으로 끈을 달고서 현실적으로 구현하고자 한다. 선험적 장, 내재성의 평면, 생명, 특이성은 지속하는 인격성과 마찬가지로 현존한다. 이 현존에서는 세포분열에서와 마찬가지로 계열을 세분화가 일어났는데, 그 과정에서 상처가 있다. (이 상처라는 개념을 들뢰즈가 왜 개입시킨 줄 모르겠지만 형태로서 주체가 갖추어진 외형은 상처를 안고 있다고 보는 듯하다) 상처일까 세분화 과정에서 퇴화되는 측면(망각 또는 사용부재)에서 신체를 지닌 인격체가 지닌 불가사의의 숙명이 아니겠는가. 인간도 생명 종 중의 하나이니깐. (52VK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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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재성: [온]생명(L’Immanence: une vie‥…)」, 1995
선험적인 장(un champs transcendantal)이란 무엇인가? 우선 선험적인 장은 그것이 [표면 위의] 대상을 가리키지도 않고, 또 [상층의 재현인] 주체에 속하지도 않는다는 점에서 [현실적] 경험과 분명히 구별된다. (509) [칸트의 선험성은 선천적과 초월성과 구별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선험적인 경험론에는 야생적인 어떤 것, 강력한 어떤 것이 있다. 이 야생적이고 강력한 어떤 것이 (단순히 경험론을 구성하는) 감각의 요소가 아님은 분명하다. (510) [ 선험적 위상은 감각아래 인 감정보다 더 깊이(속에) 감화와 닮은 의식 흐름이다. 즉 기억의 총체로서 흐름이라서 추억들과 같은 요소들의 집합이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결국 나와 대상이 배제된 직접적인 순수 의식, 시작도 끝도 없는 운동인 한에서 무매개적인 순수의식을 가지고서 선험적인 장을 정의해야 하는 것일까? [이 질문과 관해서](심지어는 이동[통과]과 양의 스피노자 개념작업은 의식에 호소하고 있다.)(510)
그러나 선험적 장이 의식과 연관은 단지 권리상으로 있다. 의식이 사실(un fait)이라는 경우는, 단지 주체가 자기의 대상과 동시에 생산되는 경우이며, 영역의 바깥에서는 “초월적”인 것처럼 나타나는 경우이다. 하지만 이와 반대로 의식이 선험적인 장을 무한한 속도로 가로지르면서 선험적인 장 이곳저곳에 퍼지는 한, 그곳에서 의식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510)
그러한 이유에서 선험적인 장이 자기의 의식에 의해, 그럼에도 공연적(coextensive)이지만 모든 드러남[계시, 솟아남]에서 제거된 자기의 의식에 의해 정의될 수 없다. (511) [공연적이란 동연적과 구별해야 한다. 단어는 같지만 의식 차원은 동연적이고 신체 차원은 공연적이다.]
초월적인 것은 선험적인 것이 아니다. 의식이 결여되었다면, 선험적 장은 순수한 내재성 평면처럼 정의된다. 왜냐하면 그 선험적 장은 대상으로부터와 마찬가지로 주체로부터도 모든 초월적인 것을 벗어나기 때문이다. (511)
이 절대적인 내재성은 그 자체적(en elle-même, 즉자적)이다: 절대적 내재성은 어떤 것 안에도(dans) 또 어떤 것에 속하지도(à quelque chose) 않는다. 또 그것은 대상에 의존하지도 않고 주체 속하지(appertinet)도 않는다. 스피노자에 있어서 내재성은 실체에 속하지도(à la substance) 않으나, 실체와 양태들이 내재성 속에(dans)에 있다. (511) [벩송의 그 안에(dedans)에 대한 설명과 같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면 (칸트에서처럼) 경험을 중복하게(redoubler) 하는 것은 선험적인 것의 본성을 변질하게 하는 것(dénaturation)이고, 초월성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 내재성의 왜곡(déformation)이다. .. 선험적인 장이 의식에 의해 정의되지 않듯이, 내재성의 평면도 주체에 의해 또는 와 그것을 포함할 수 있는 대상에 의해 정의되지 않는다. (511-512) [변질(dénaturation)은 경험의 발생에 현실을 첨가하는 것이고, 왜곡 (déformation)은 경험 안에 먼저 이데아를 넣으려고 하는 것이다. 정신분석학에서 손님의 진술(이야기)는 변질이 기본이고, 그의 이상을 넣어서 하는 경우에, 기존 도덕과 종교에 습관을 포한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순수 내재성에 대해, 그것이 대생명(UNE VIE)이라고, 또 그것이외 전혀 다른 것이 아니라고 말할 것이다. .. 생명은 권능이자, 충만한 지복이다. 생명은 내재성의 내재성이고, 절대적 내재성이다. (512) [왜 이렇게 강조하느냐 하면, 생명은 부정성이나 수동성이 아니라도 말하고자 하다. 생명에는 모순으로서 무(le neant)이라는 것은 없다. 즉 (있는 것)인 것은 (있는 것)인 것이다.]
피히테(Fichte, 1762-1814)가 그의 말년의 철학에서, 선험적 장을 마치 생명(une vie 삶)처럼 제시한다. 이 생명은 존재(Etre)에 의존하지 않으며, 작동(un Acte, 행동)에 복종하지 않는다. 즉 [생명은] 무매개적 절대적 의식이며, 이 의식의 활동성은 하나의 존재로 더 이상 귀착하지 않고, 생명 속에서 의식 스스로를 제시하기를 그치지 않는다. (512)
선험적인 장은 이제 철학적인 조작의 핵심 속에 스피노자주의를 다시 들여오는 진정한 내재성의 평면이 된다. 사실 멘 드 비랑(Maine de Biran, 1766–1824)이 만년의 철학(Dernière philosophie)[전집, 제10권, 브룅판](그가 너무나도 지쳐있었기에 그 결말을 보지 못한 철학)을 하는 도중에 힘의 초월성 아래서 내재적인고 절대적인 생명을 발견했을 때, 그에게 돌연히 일어났던 유사한 모험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선험적 장은 내재성의 평면에 의해 정의 되고, 내재성의 평면은 생명에 의해 정의 된다. (512-513, 원 4-5)
내재성이란 무엇인가? 하나의 생명....이다. 우리가 특별히 정해지지 않은 하나의 어떤 항목을 취하여 선험적인 것을 위한 실마리로 고려할 경우, 하나의 어떤 생명이 무엇인지에 대해 이야기함에 있어서 디킨즈(Dickens, 1812-1870)보다 뛰어난 사람은 없었다. (513, 5)
[디킨즈의 소설에서] 모든 사람이 경멸하는 한 못된 주체, 한 불량배(canaille 천민)가 다 죽어가는 채로 실려 온다. .. 모든 사람이 그를 구하기 위해 매달리고 이 비천한자는 가장 깊은 혼수상태 속에서 포근한 그 무엇이 자신에게 스며드는 것을 느낀다. 그의 생명과 그의 죽음 사이에는, 한 순간(un moment)이, 즉 죽음과 함께 노는[유희하는] 한 생명의 계기(un moment)가 있다. (513, 5)
그 개인[불량배]의 생명은 내적 외적 생명의 우발성들(des accidents)들로부터 해방된, 즉 그 어떤 것이 발생한다고 할 때 그 발생의 주관성과 객관성으로부터 해방된 순수사건을 이끌어내는 바로 그 비인격적이지만 특이한 하나의 생명에게 자리를 마련하게 했다. [순수사건으로서] 그 생명은 모든 사람이 관대하게 대하고, 그리고 일종의 지복에 도달한 “지고한 인간”(Homo tantum)이다. 이것은 [스콜라철학의] 이것임(hecceité)이며, 이것임은 개별화로부터가 더 이상 아니고 특이화로부터이다. 즉 순수 내재성의 생명, 중성, 선과 악을 저넘어 이다. 왜냐하면 사물들 한 가운데에서 이것임을 육화하는 유일한 주체가 이것임을 좋게 하거나 또는 나쁘게 해왔다. ... 개별성의 생명이 사라지고.. [남는 것은] 특이성의 본질, 즉 하나의 생명...을 위하여 이런 저런 개별성의 생명이 소멸하게 되는 것이다. (513-514, 5)
따라서 우리는 개별적인 생명이 보편적 죽음과 대치하게 되는 그런 단순한 순간[계기] 속에 하나의 생명을 포함할 필요가 없었으리라. 하나의 생명(Une vie)[온생명, 즉 신]은 도처에 있다. (514 원5)
레르네트-홀레니아의 소설은 군대를 전체 삼켜버릴 수 있는 사이-시간(un entre-temps) 속에 사건을 들여 놓는다. (514, 원5)
예를 들어 아주 어린애들은 그들 모두 서로가 서로를 닮음으로써 개별성이라는 것을 거의 지니지 않지만, 반면에 그들은 특이성을 지닌다. (515, 원6)
그런 것처럼 정해지지 않은 것[비한정적인 것]은 경험적 비결정성을 표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재성의 결정성 또는[즉] 선험적 결정가능성을 표시한다. 부정관사는 인칭의 비결정성이긴 하지만 단수의 결정이라는 것이다. 즉 [부정관사로서] 그 하나(l’UN)는 내재성 자체를 포함할 수 있는 초월적인 것이 아니며, 오히려 선험적인 장 속에서 포함되는 내재적인 것이다. 그리고 하나(Un, 1)은 언제나 곱셈[다양체]의 지수(l'indice)이다. 하나의 사건, 하나의 특이성, 하나의 생명[온생명]‥…. (515-516, 원6)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초월성은 오로지 이 [내재적]평면에 고유한 내재적인 의식의 흐름 속에서만 구성된다. 초월성은 항상 내재성의 생산물이다. (516, 원6) [언어로서의 초월은 내재성의 반영물이다. 즉 초월성은 내재성의 작은 티끌, 먼지 같은 것이며, 이를 상징화하여 고유성의 다자로서 세계를 구성한다고 한다. 다자들(이데아들)에게 의미를 부여하여, 그 불변의 세계를 전체 또는 완전이라 하며 초월적이라고 한다. 하나(온)의 단위를 무한히 확장하여 또는 투사하여 테두리 전체를 초월이라고 부르는 것이 종교이다. (47MLG)(첨, 53MMB)] [게다가 지향성은 정관사를 쓸 것 같다. la vie라고, 그리고 그 생명(삶)은 정해진 삶이라는 의미가 될 것이다]
하나의 생명[온생명]은 오로지 잠재적인 것들(des virtuels, 가상적 포함)만을 포함한다. 즉 이 생명은 잠재성들, 사건들, 특이성들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가 잠재적이라고 부르는 것은 실재성이 결여된 어떤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은[우리가 잠재적이라고 부르는 것은] 현실화 과정에 참여하는 것이며, [동시에] 그 과정에게 그 과정의 고유한 실재성을 부여하는 평면을 따라간다는 것이다. (516, 6) [이 생명은 인격성의 삶 총체이다. (47MLG)]
사건은 비-현실화(non-actualité)(무한정한, indéfini, 부정관사의 의미에서)로서 생각되었기에 아무것도 부족하지 않다. [실재성, 내재성은 결함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사건을 자신의 동반하는 수반물 연관 속에 시작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이 수반물들이란, 선험적 장, 내재성의 평면, 생명, 특이성들[다양체들]이다. 상처(une blessure)는 분명 사물들의 상태와 체험 속에서 육화되거나 현실화된다. 허지만 상처는 그 자체로 놓고 볼 때, 우리를 생명 속으로 이끄는 내재성의 평면위에 놓인 하나의 순수한 잠재적인 것이다. 나의 상처는 나 이전에 현존하고 있었다. 상처의 초월성이 우월한 현실성처럼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상처의 내재성이, 환경(장 또는 평면)의 한 가운데에서, 마치 항상 잠재성처럼 있는 것이다. (517, 원7) [다양체의 분화는 당연히 상처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상처는 영혼(심리)적으로 분열증이며 사건의 균열이다. 세상을 그렇게 표면이 등장하는 것이다. (47MLG)]
선험적인 장의 내재성을 정의하는 잠재적인 것들과, 잠재적인 것들을 현실화하며 선험적인 장을 초월적인 어떤 것으로 변형시키는 가능한 형식들 사이에는 이와 같이 커다란 차이가 존재하는 것이다. (517 원7: 마지막 문장)
*참조 {논들뢰1995내재성14철학 }-(재정리, 53MMB, 수정53MMC)
# 인명록 **
1632 스피노자(Baruch Spinoza, lat. Benedictus de Spinoza, 1632-1677) 유태계 네델란드 철학자. 범자연내재주의자.
1724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독일 계몽주의 철학자. 오성에 대한 “비판철학”을 전개하여 비판주의를 창안하였다. 흄을 읽지 않아서 사회와 제도에 대한 교정에는 관심이 없었다.
1762 피히테(Johann Gottlieb Fichte, 1762-1814)는 독일 철학자. 후기 칸트주의자라고 하지만, 인간론을 다루는 실재론 철학자에 가깝다.
1766 멘 드 비랑(Maine de Biran, Marie François Pierre Gontier de Biran, 1766–1824) 프랑스 철학자, 수학자. 아버지는 의사. 대학에서 시민법을 공부했다. 근위대 출신으로 1789년에 베르사이유 방어했다가, 1792년 은퇴하고 네델란드로 떠났다. 로베르삐에르 몰락후에 고향이 베르제락에서 의사협회를 창설하였다. 유심론에 속하는 심리학의 선구자이며, 이데올로그들과는 단절했다. Essai sur les fondements de la psychologie et sur ses rapports avec l'étude de la nature, 1812.
1812 찰스 디킨스(Charles John Huffam Dickens, 1812-1870) 빅토리아 시대 영국 소설가. 크리스마스 캐럴(A Christmas Carol, 1843), 두 도시의 이야기(A Tale of Two Cities, 1859), Our Mutual Friend 1864–65: l’ami commun
1842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 1842-1910) 미국 철학자, 심리학자. 프래그머티즘 철학을 정립하였다.
1859 벩송(1859-1941)
1859 후설(Edmund Husserl, 1859-1938) 유대계 오스트리아 출신 독일 철학자. 현상학의 체계를 세운 철학자. 1886년 루터파로 개종했다(au protestantisme luthérien le 8 avril 1886). 내용상으로 가톨릭 토마스주의에 가깝다. 데카르트적 성찰(Les Méditations cartésiennes: Introduction à la phénoménologie(1929 파리 소르본에서 발표 논문 2편, 1953 정보판)
1891 게루(Martial Gueroult, 1891-1976) 프랑스 철학자, 17세기 철학사가, 스피노자 전공. Spinoza, tome 1: Dieu (Éthique, livre I), 1968, tome 2: L'Âme (Éthique, livre II), 1974
1897 레르네트-홀레니아(Alexander Lernet-Holenia, 1897–1976) 오스트리아 작가, 극작가, 시나리오작가, 시인. 언어와 문학 독일 아카데미 회원. 환상적 소설 바게 백작(Der Baron Bagge, 1936: Baron Bagge(군대 은퇴자의 이야기), 양편의 시실리아인(Beide Sizilien, 1942: Le Régiment des Deux-Siciles.
1897 부스께(Joë Bousquet, 1897-1950) 프랑스 시인 작가. 21살의 나이로 1919년 전투에서 척추에 독일군 총알의 타격으로 흉부 위 부분이 마비되고, 하반신은 쓸 수 없었다. 겉창이 닫혀진 방에서 평생 침대에서 지냈다. « Ma blessure existait avant moi, je suis né pour l'incarner. »(Gilles Deleuze, Logique du sens, Paris, Les éditions de Minuit, coll. « Critique », 1969, 393 p., chap. 21 (« de l'événement »), p. 174.)
1905 장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 1905-1980) 프랑스 철학자, 다재다능한 철학자로서 노마드처럼 살았다.
1964 라푸자드(David Lapoujade, 1964-) 프랑스 철학자. 파리 1대학(Panthéon-Sorbonne) 교수. 「William James. Empirisme et pragmatisme, 1997」 「Puissances du temps. Versions de Bergson, 2010.」 「Deleuze, les mouvements aberrants, 2014」
(7:20. 53MMB) (7:32, 53MM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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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Deux régimes de fous et autres textes(1975-1995) [광인의 두 체제와 다른 원문들]
Table des matières (목차)‑‑‑‑
Présentation – 1. Deux régimes de fous – 2. Schizophrénie et société – 3. Table ronde sur Proust – 4. À propos du département de psychanalyse à Vincennes (avec Jean-François Lyotard) – 5. Note pour l’édition italienne de Logique du sens – 6. Avenir de linguistique – 7. Sur Le Misogyne – 8. Quatre propositions sur la psychanalyse – 9. L’interprétation des énoncés (avec Félix Guattari, Claire Parnet, André Scala) – 10. L’ascension du social – 11. Désir et plaisir – 12. Le juif riche – 13. À propos des nouveaux philosophes et d’un problème plus général – 14. Le pire moyen de faire l’Europe (avec Félix Guattari) – 15. Deux questions sur la drogue – 16. Rendre audibles des forces non-audibles par elles-mêmes – 17. Les gêneurs – 18. La plainte et le corps – 19. En quoi la philosophie peut servir à des mathématiciens ou même à des musiciens - même et surtout quand elle ne parle pas de musique ou de mathématiques – 20. Lettre ouverte aux juges de Negri – 21. Ce livre est littéralement une preuve d’innocence – 22. Huit ans après : entretien 80 – 23. La peinture enflamme l’écriture – 24. Manfred : un extraordinaire renouvellement – 25. Préface à L’Anomalie sauvage – 26. Les Indiens de Palestine – 27. Lettre à Uno sur le langage – 28. Préface pour l’édition américaine de Nietzsche et la philosophie – 29. Cinéma-I, première – 30. Portrait du philosophe en spectateur – 31. Le pacifisme aujourd’hui (avec Jean-Pierre Bamberger) – 32. Mai 68 n’a pas eu lieu (avec Félix Guattari) – 33. Lettre à Uno : comment nous avons travaillé à deux – 34. Grandeur de Yasser Arafat – 35. Sur les principaux concepts de Michel Foucault – 36. Les plages d’immanence – 37. Il était une étoile de groupe – 38. Préface pour l’édition américaine de L’Image-mouvement – 39. Foucault et les prisons – 40. Le cerveau, c’est l’écran – 41. Occuper sans compter : Boulez, Proust et le temps – 42. Préface à l’édition américaine de Différence et répétition – 43. Préface pour l’édition américaine de Dialogues – 44. Préface pour l’édition italienne de Mille Plateaux – 45. Qu’est-ce que l’acte de création ? – 46. Ce que la voix apporte au texte – 47. Correspondance avec Dionys Mascolo – 48. Les pierres – 49. Postface pour l’édition américaine :« Un retour à Bergson » – 50. Qu’est-ce qu’un dispositif ? – 51. Réponse à une question sur le sujet – 52. Préface pour l’édition américaine de L’Image-temps – 53. Les trois cercles de Rivette – 54. L’engrenage – 55. Lettre-préface à Jean-Clet Martin – 56. Préface pour l’édition américaine de Empirisme et subjectivité – 57. Préface : une nouvelle stylistique – 58. Préface : les allures du temps – 59. La guerre immonde (avec René Scherer) – 60. Nous avons inventé la ritournelle (avec Félix Guattari) – 61. Pour Félix – 62. L’immanence : une vie – Bibliographie générale – Index
# “수”라는 개념
Un nombre est un concept permettant d’évaluer et de comparer des quantités ou des rapports de grandeurs, mais aussi d’ordonner des éléments par une numérotation.
* 수의 여러 집합들 사이의 포함관계(Relations d'inclusion entre les différents ensembles de nombres.)
자연수 집합 l’ensemble N (ou {ℕ}) des entiers naturels, qui peuvent s’écrire à l’aide des dix chiffres arabes ; [0,1]
정수 집합 l’ensemble Z ({ℤ}) des entiers relatifs, qui sont munis d’un signe positif (+) ou négatif (-) ; 음수 포함 [-1, -2]
소수 집합 l’ensemble D (ou {ⅅ}) des nombres décimaux, qui admettent une partie entière et une partie décimale de longueur finie, en général notées de part et d'autre d'une virgule ; 분수 소수 포함 [3/4. -3.12]
유리수의 집합 l’ensemble Q (ou {ℚ} ) des nombres rationnels, qui sont représentés par des fractions avec un numérateur et un dénominateur entiers (ou décimaux) ; [-7/11, 1.333...]
실수 집합 l’ensemble R (ou {ℝ}) des nombres réels, qui repèrent tous les points d’un axe orienté continu ; [-√2, π]
복소수 집합 l’ensemble C (ou {ℂ}) des nombres complexes, qui peuvent décrire tous les points d’un plan. -i, 1+i√3
# 무리수의 표상(Représentation des nombres irrationnels) selon la répartition des réels en nombres rationnels, constructibles, algébriques et transcendants.
- 유리수(nombres rationnels), 0, 1, -9/7
* 유리수를 제외한 아래 수를 무리수라고 부른다.
- 작도가능한 수(nombres constructibles), cos(π/9), √2(넓이의 근), φ (황금 수)
- 대수(nombres algébriques), ∛5(입체의 근), ψ (nombre plastique)[La spirale de Fibonacci]
- 초월수(nombres transcendants), ea(e le nombre), Ω(Oméga de Chaitin, 리만가설), π(원주 길이의 직선화, 3.14159‥…), √2√2= 16325269‥…, ℚ: eα1,…,eαn(le théorème de Lindemann-Weierstrass, 1882) [영어는 transcendental number]
ℂ ℍ ℕ ℝ ℚ ℂ O א ⅅ ℂℍℙℕℝℤ
첫댓글 들뢰즈의 마지막 글 “내재성: 한 생명(une vie)”은 다양한 의미가 있다. ‘한(une)’은 ‘온(tout)’일 수 있다. 벩송은 DI 2장에서 “모든 수는 하나(Tout nombre est un)”(56쪽)라고 한다. 각각은 부정관사이지만 잠재적으로 전체이다. 개체로서 온세상을 반영할 수도 있고 온 세상이 하나일 수 있다. 나는 들뢰즈의 마지막 작업이 벩송의 첫 작업과 맞물려 있다는 점을 발견하고 이 글을 재음미하여 올린다. - 이 한 구절을 잘 생각해보면 "형상존재론"과 "질료존재론"의 차히를 발견할 수 있을 것 같다. (53MM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