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암(敬菴) 허조(許稠·1369~1439)
흔히 한 임금의 치세(治世)와 공과(功過)를 논(論)하면서 명군(明君·총명한 군주)에게는 충신(忠臣) 한 명이 열 명의 간신(奸臣)보다 낫고, 혼군(昏君·어리석은 군주)에게는 충신(忠臣) 열 명이 간신(奸臣) 한 명만 못하다고 했다. 그러나 절대(絶對) 왕권시대(王權時代) 임금에게 직간(直諫)하며 쓴 소리를 한다는 건 목숨을 거는 일이기도 했다. 남의 흠결(欠缺)을 나무라고 윗사람에게 직언(直言)하려면 우선 자기 자신(自身)부터 하자(瑕疵)가 없어야 하고 티끌만한 부정(不正)이라도 있어서는 불가능(不可能)한 일이었다. 우리 역사(歷史)를 반추(反芻)해 봐도 충신(忠臣)의 말을 귀담아 들은 명군(明君)의 시대(時代)는 백성(百姓)들이 태평성대(太平聖代)를 누렸고, 간신(奸臣)의 세 치 혀에 농락(籠絡)당한 혼군(昏君)의 재위(在位) 시(時)에는 종묘사직(宗廟社稷)이 위태(危殆)로웠다. 조선(朝鮮) 개국(開國) 초(初) 네 임금(태조 정종 태종 세종)을 차례로 섬기며 예조판서·이조판서 등의 중직(重職)을 거쳐 좌의정(左議政)까지 올랐던 경암(敬菴)허조(許稠·1369~1439)는 냉혈(冷血) 군주(君主) 태종(1367~1422)조차도 어쩌지 못한 꼿꼿하고 강직(强直)한 충신(忠臣)이었다. 경암(敬菴)은 황희, 최윤덕, 신개, 이수, 양녕대군(이제),효령대군(이보)과 함께 세종 묘정(廟廷)에 입묘(入廟)된7인(人)의 종묘배향공신(宗廟配享功臣) 중 한 사람이다. 역사학계(歷史學界)에서는 성군(聖君) 세종대왕(충녕대군·1397~1450)시대의 재상(宰相) 중 황희(黃喜)나 맹사성(孟思誠)에 비해 대중적(大衆的) 인지도(認知度)는 낮지만 세종의 치세(治世)를 운위(云謂 일러 말함)하며 빼놓을 수 없는 중요(重要) 인물(人物)로 손꼽고 있다. 하양(河陽) 허씨인 경암(敬菴)은 고려말 조선초(高麗末朝鮮初)의 명문(名門) 갑족(甲族 가계가 아주 훌륭한 집안)으로 누대(累代 여러 대)에 걸쳐 고위관직(高位官職)을 지냈다는 문중(門中)에 대한 자부심(自負心)이 대단했다. 아버지(허귀룡) 할아버지(허윤창)도 고려(高麗) 조정(朝廷)에서 벼슬을 했고 증조부(曾祖父 허수)는 고려(高麗) 말(末) 중국(中國)에서 성리학(性理學)을 도입(導入)한 문성공 안향(安珦)의 사위였다. 경암(敬菴)이 허수의 증손자(曾孫子)였으니 안향(安珦)에게는 외고손자가 되었다. 이런 문중(門中) 배경(背景)으로 경암(敬菴)은 조선 태조의 측근(側近) 중신(重臣)이었던 양촌(陽村) 권근(權近)(1353-1409) 문하(門下)에 들어가 학문(學問)과 예학(禮學)·문물(文物)을 배웠다. 엄격한 가풍(家風) 훈도(訓導)로 흐트러짐 없이 성장(成長)했고 당대(當代) 실세(實勢) 스승의 학맥(學脈)이어서 거침없는 출세가도(出世街道)를 달렸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과서거정(徐居正 1420~1488)의 ‘필원잡기(筆苑雜記 조선 전기 수필文學集, 옛적부터 전(傳)해 오는 일화(逸話). 기문(奇文)을 가려 모은 책(冊))’ 등에는 허조(許稠)에 관(關)한 여러 기록(記錄)들이 전(傳)한다. 그는 어릴 적부터 여위어서 어깨와 등이 굽은 듯 했고 식사(食事)도 겨우 허기(虛氣)를 면할 정도만 먹은 탓에 늘 깡마른 체구(體軀)였다. 타고난 부지런한 근성(根性)으로 매일 새벽닭이 울면 일어나 의관정제(衣冠整齊)한 뒤 바로 앉아 조금도 흐트러진 기색(氣色)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경암(敬菴)의 눈빛은 비수(匕首 날이 날카로운 단도)보다 더 날카로웠고, 조정(朝廷) 관료들은 송골매 눈을 닮았다하여 수응재상(瘦파리할수鷹매응宰相)으로 불렀다. 대소신료(大小臣僚) 관원(官員)들의 복장(服裝)이 조금이라도 흐트러지거나 쓸데없는 잡담(雜談)을 하면 직위고하(職位高下)를 막론(莫論)하고 사정(事情)없이 나무라며 직격탄(直擊彈)을 날렸다. 또한 경암(敬菴)에게는 주공(周公)이란 별명(別名)도 따라 다녔다. 예학(禮學)에 걸출(傑出,남보다 훨씬 뛰어남)한 전문가여서 공(公)·사석(私席)에서 담론(談論)할 때마다 주례(周禮 중국의 경서(經書))를 내세워 좌중(座中)을 압도(壓倒)했기 때문이다. 이런 경암(敬菴)에게 공직부정(公職不正)이나 여색방탕(女色放蕩)은 가당(可當)치도 않은 얘기였다. 조정(朝廷)에서 내리는 녹봉(祿俸) 외(外)에는 단 한 푼도 탐(貪)하지 않았고 기방출입(妓房出入)이나 신변잡기(身邊雜技)에 얼씬도 안했다. 자기(自己) 관리(管理)가 엄정(嚴正)해 부정부패(不正腐敗)와는 완전히 담을 쌓았고 아무리 털어도 먼지 하나 안 나오는 철저(徹底)한 재상(宰相)이었다. 이처럼 완벽(完璧)한 청백리(淸白吏) 기질(氣質) 때문에 조정(朝廷) 관료(官僚)들은 그를 무서워했고 부정부패(不正腐敗) 사건(事件) 때마다 가차(假借)없는 원칙(原則)을 적용(適用)해도 모두가 승복(承服)했다. 세간(世間)에선 여색(女色)을 멀리하는 경암(敬菴)에게 “허 공(公)은 부부(夫婦) 간(間)의 음양(陰陽) 관계도 모를 것이다”고 놀려댔다. 그럴 때마다 “허허, 그렇다면 허눌과 허후의 두 아들은 하늘에서 떨어졌단 말인가?”라며 껄껄 웃었다고 한다. 이토록 꼬장꼬장한 경암(敬菴)을 태종도 처음에는 싫어했다. 강직(强直)한 상소(上訴)로 왕(王)의 진노(震怒존엄한 사람이 몹시 노함)를 사 사헌부(司憲府)잡단(雜端)-(사헌부에 속한 정5품 벼슬)에서 완산(完山 전주의 옛이름) 판관(判官)로 좌천(左遷)시켰으나 아무런 불평(不平) 없이 임지(任地)에 가서 충실(充實)히 복무(服務)했다. 황희(黃喜) 정승(政丞)이 태종 어전(御前 임금의 앞)에 아뢰었다. “전하(殿下), 조정에 허조(許稠)만큼 강직(强直)하고 청렴(淸廉)한 인물(人物)이 또 있겠사옵니까? 죽음을 두려워 않고 직언(直言)하는 신하(臣下)도 전하(殿下) 곁에 두셔야 하옵니다. 통촉(洞燭)하시옵소서!” 얼마 후 태종은 허조(許稠)를 다시 불러 요직(要職)에 앉혔다. 태종 18년(1418) 8월 태종이 세종에게 선위(禪位·살아서 왕위를 물려줌)하면서 “주상(主上 임금)은 들으시오! 이 사람이 바로 나의 주석지신(柱石之臣·나라를 떠받치는 중추적인 신하)이니 귀(貴,귀할 귀)히 쓰도록 하시오!” 라고 당부했다. 효자(孝子)였던 세종은 부왕(父王 아버지인 임금)의 지침(指針)을 잊지 않고 재위(1419~1450)하는 동안 허조(許稠)를 중용(重用)하고 나라의 중대사(重大事)에 늘 조언(助言)을 청(請)했다. 경암(敬菴)은 조정(朝廷)에서 뿐만 아니라 상국(上國)인 명(明)나라에 대해서도 소신껏 할 말을 다했다. 세종이 즉위(卽位)하고 얼마 안 돼 명(明)의 3대 황제 영락제(성조·1360~1424)가 말 1만(萬) 필(匹 마소를 세는 단위)을 내놓으라고 하자 경암(敬菴)은 세종 어전(御前)에 고(告)하였다. “전하(殿下), 1만 명의 기병(騎兵)을 양성(養成)할 군마(軍馬)를 명(明)나라에 빼앗기고 나면 우리나라가 위험(危險)에 처(處)하고 맙니다. 한사코 거절(拒絶)하시옵소서!” 명(明)나라 첩자(諜者)가 이 사실(事實)을 고(告)해 바쳐 영락제가 알았다면 목이 열 개라도 살아남지 못할 간언(諫言 웃어른이나 임금에게 하는 충고)이다. 세종 6년(1424) 영락제가 죽자 명(明)나라 조정(朝廷)에서는 여비(麗妃) 한씨(인수대비의 고모)를 순장(殉葬 왕이나 귀족이 죽었을 때 살아있는 신하나 종을 함께 묻던 일)했다. 경암(敬菴)은 그 참혹(慘酷)함을 크게 탓하며 “허수아비도 순장(殉葬) 당하면 후손(後孫)이 끊어진다는 걸 어린애도 다 아는데 궁녀(宮女) 15명과 생매장(生埋葬)하다니 따를 수가 없다. 대국(大國) 것이라도 배울 바가 못 된다”고 장탄식(長歎息) 했다. 어느 날 용상(龍床)에 앉은 세종이 만조백관(滿朝百官조정의 모든 벼슬아치)이 시립(侍立 웃어른을 모시고 섬)한 가운데 좌의정(左議政) 허조(許稠)를 지목(指目)해 옥음(玉音 임금의 음성)을 내렸다. “경(卿임금이 2품 이상의 신하를 가리키던 이인칭 대명사)은 왕도정치(王道政治)의 바른 길이 무엇이라고 여기는가?” 허조(許稠)가 얼른 엎드려 부복(俯伏 고개를 숙이고 엎드림)했다. “신(臣) 좌의정(左議政) 허조(許稠), 엎드려 돈수백배 (頓首百拜 머리가 땅에 닿도록 수없이 계속 절을 함) 하옵고 성상(聖上)께 감(敢)히 아뢰옵니다. 무릇 정치(政治)란 백성(百姓)으로 하여금 그 고마움을 알게 하는 것보다도, 그것을 전혀 느끼지 못하게 하는 것이 위대(偉大)한 정치(政治)라고 배웠사옵니다. 한 나라와 각 조직(組織)의 흥망성쇄(興亡盛衰)는 올바른 인재(人材) 발탁(拔擢)과 적재적소(適材適所)의 씀에 있으니 어진 인재(人材)를 구(求)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努力)해야 하옵니다. 인재(人材)를 얻으면 便安해야 하며 일을 맡겼으면 의심(疑心)하지 말고 의심(疑心)이 있으면 임무(任務)를 주지 말아야 합니다. 전하(殿下)께서는 대신(大臣)을 선택(選擇)하여 육조(六曹)의 장(長)을 삼으신 이상(以上) 책임(責任)을 지워 성취(成就)토록 하심이 마땅하며 몸소 자잘한 일에 관여(關與)하여서 신하(臣下)의 일까지 하시려고 해서는 아니 되시옵니다. 성상(聖上)의 판단(判斷)만이 옳다고 자만(自慢)하실 때 나라 일은 어긋나기 시작하며, 성상(聖上)께서 평소(平素)에 면학(勉學)을 게을리 하시면 학덕(學德) 높은 대신(大臣)들을 장악(掌握)할 수 없사오니 유념(留念)하시옵소서!” 조정(朝廷) 안에는 깊은 침묵(沈黙)이 흘렀다. 세종은 잠시 11세 때의 옛일을 생각했다. 그 해 태종은 허조(許稠)에게 예문관직제학(藝文官 直提學)을 제수(除授 천거에 의하지 않고 임금이 직접 벼슬을 내림)하면서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조선시대 왕세자의 교육을 맡아보던 관아) 문학(文學 세자에게 글을 가르치던 정5품 벼슬)을 겸직(兼職)토록 해 충녕대군의 스승으로 앉혔다. 당시(當時) 충녕도 허조(許稠)의 성정(性情타고난 본성, 성질과 심정)을 잘 알고 있는지라 “이제 나는 죽었구나”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어릴 적 스승이었던 어깨 구부정한 저 노(老) 정승(政丞)이 임금이 된 나를 아직도 가르치고 있다”고 여기니 세종은 오히려 가슴 찡하고 고마웠다. 경암(敬菴)은 개국(開國) 초(初)부터 고려(高麗)의 불교식(佛敎式) 제례(祭禮)를 일소(一掃)하고 유교식(儒敎式) 제례의식(祭禮儀式)을 널리 보급(普及)시켰고 전국(全國) 각지(各地)에 많은 유교(儒敎) 학당(學堂)을 건립(建立)하며 인재(人材)를 양성(養成)했다. 세종 때 10여 년간(年間) 이조판서(吏曹判書 정2품 문관벼슬)직(職)을수행(遂行)하면서, 천거(薦擧)된 인재(人材)를 철저히 검정(檢證)하는 인사제도(人事制度)를 확립(確立)했다. 경암(敬菴)은 당시(當時) 인사담당관(人事擔當官)이었던 이조낭관(吏曹郎官)을 시켜 간택(揀擇) · 평론(評論) · 중의(衆議)의 3단계 인사정책(人事政策)을 면밀히 세워 국가(國家)의 동량(棟梁)을 가려냈다. ▲간택(揀擇) : 후보자의 경력·자질·부패 혐의는 물론 가족관계까지 꼼꼼히 살펴 적격 여부를 판별했다. ▲평론(評論) : 이조(吏曹) 내부의 관원들과 함께 후보자가 그 자리에 적합한지, 더 나은 인재는 없는지를 놓고 난상토론을 전개했다. ▲중의(衆議) : 최종적으로 이조(吏曹) 밖의 의견을 들었다. 고위직(高位職)인 경우에는 적합(適合) 판정(判定)에도 불구(不拘)하고 여론(輿論)이 안 좋으면 임명(任命)을 포기(抛棄)했다. 이런 재상(宰相)들이 있어 우리나라는 영토(領土)를 넓혀 오늘날의 국경(國境)으로 확정(確定)했고 백성(百姓)들은 생업(生業)에 열중(熱中)하며 태평(太平)했다. 54년(年)의 생애(生涯) 중 32년(年)을 재위(在位)하면서 청사(靑史 역사상의 기록)에 길이 남을 업적(業績)을 셀 수도 없이 남긴 세종대왕의 지치(至治) 시대(時代)도 이런 충신(忠臣)들이 있어서 가능(可能)했다. 경암(敬菴)은 조선(朝鮮) 초기(初期) 속육전(續六典)을 편수(編修)하며 중구난방(衆口難防)의 예악제도(禮樂制度)를 완성(完成)시켰고 정치·경제적 안정(安定)과 유교적 질서체계(秩序體系)를 확고(確固)하게 자리매김했다. 왕실(王室)의 여러 의식(儀式)과 일반(一般)의 관혼상제(冠婚喪制)도 그가 정(定)하는 대로 임금은 윤허(允許)했다. 어느 날 전국의 주(州)와 현(縣)에서 공창(公娼)[관기官妓]제도의 폐지론(廢止論)이 거세게 일어 조정(朝廷)에 문의(問議)해 왔다. 임금의 눈치를 보던 신료(臣僚)들 거의가 내숭을 떨며 관기(官妓) 혁파(革罷)에 찬성(贊成)했다. 음양(陰陽) 관계에 엄격(掩擊)했던 허조(許稠)에게 세종이 의당(宜當 마땅히,으레) 찬성(贊成)할 줄 알고 물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허조(許稠)는 극력極力(있는 힘을 다함) 반대(反對)했다. 세종은 허조(許稠)의 말을 듣고 관기(官妓) 제도(制度)를 유지(維持)하도록 했다. “전하(殿下), 집을 떠나 지방(地方) 장관(長官)으로 오래 있으면 참지 못하는 것이 음양(陰陽)의 이치(理致) 이옵니다. 만일 관기(官妓)가 없으면 권력(權力)으로 남의 유부녀(有夫女)를 간통(姦通)할 염려(念慮)가 있으니 거두어 주소서. 남녀(男女) 간(間)의 본능(本能)을 어찌 법(法)으로 저지(沮止)하겠사옵니까?” 세종 21년(1439), 71세 되던 해 경암(敬菴)은 하찮은 고뿔(감기를 말하는 우리의 고유어다)이 도져서낫지 않자 죽음을 직감(直感)했다. 식솔(食率)들을 모아놓고 마지막 말을 남겼다. “태평(太平)한 세상(世上)에 태어나서 태평(太平)한 세상(世上)에 죽으니 천지간(天地間)에 굽어보아도 부끄러운 것이 없다. 내 나이 70이 지났고 지위(地位)가 재상(宰相)에 이르렀으며 성상(聖上)의 은총(恩寵)을 만나 간언(諫言 웃어른이나 임금에게 하는 충고)하면 행(行)하시고 소청(訴請 하소연하여 청함)하면 들어 주셨으니 죽어도 여한(餘恨)이 없다.” 허조(許稠)의 부음(訃音)을 들은 세종대왕은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슬퍼하며 사흘간 조회(朝會)를 폐(閉)했다.문종 2년(1452) 세종 묘정(廟庭)에 배향(配享)되며 문경(文敬)이란 시호(諡號 제왕이나 재상, 유현(儒賢) 들이 죽은 뒤에, 그들의 공덕을 칭송하여 붙인 이름)를 내렸다. 오늘을 사는 후학(後學)들에게 크나큰 교훈(敎訓)을 남긴 경암(敬菴)을,그가 묻힌 묘지(墓地)에서라도 만나기 위해 찾아 나선다는 건 가슴 벅찬 일이다.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 이천 2리 42-1번지에 있는 경암(敬菴) 묘(墓)를먼발치에서 발견(發見)했을 때는 오르기가 쉬울 줄 알았다. 안타깝게도 사당(祠堂) 건립(建立)을 둘러싼 하양 허씨 문중과 지역 주민들 간 갈등으로 진입로(進入路)가 막혀 있어 천신만고(千辛萬苦천 가지 매운 것과 만 가지 쓴 것이라는 뜻으로, 온갖 어려운 고비를 다 겪으며 심하게 고생함을 이르는 말) 끝에 묘역(墓域)을 찾았다. 간좌(艮坐,동에서 북으로 45도)곤향(坤向,서에서 남으로 45도)의서남향(西南向)으로 내·외(內·外) 청룡(靑龍)과 내·외(內·外) 백호(白虎)가 겹겹이 호위(護衛)하고 있는 안락한 유택(幽宅)이다. 특히 봉분(封墳) 앞의 여기(餘氣)가 봉요(蜂腰·벌 허리)처럼좁혀졌다가넓게 퍼져후손(後孫)들이 크게발복(發福)할 대길지(大吉地)다. 묘역(墓域)을 내려오며 “만일 주민(住民)들이 경암(敬菴)의 업적(業績)과 국가(國家)에 대한 충성심(忠誠心)을 제대로 알고 있다면 사당(祠堂) 건립(建立)을 과연반대(反對)할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경북 경산시 하양읍 부호리에는 숙종 10년(1684) 지방(地方) 유림(儒林)들이 경암(敬菴) 허조(許稠)의 학문(學文)과 덕행(德行)을 기리기 위해 건립(建立)한 금호서원(琴湖書院)이 있다. 이전(移轉)과 훼철(毁撤)을 거듭하다가 1923년(年) 현(現) 위치(位置)에 복원(復元)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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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간사람, 2017/09/26 > 이규원 saram@monthlysaram.com 1949년생, 작가 세계일보 문화부장 논설위원 역임
*세종 시대 - 3인의 명재상(名宰相) 황희(黃喜·1363~1452, 90세), 허조(許稠·1369~1439, 71세), 맹사성(孟思誠·1360∼1438, 78세) 세종시대 중기 황희·맹사성·허조는 차례로 정승이 되어 세종을 보필하여 조선 왕조의 제도를 완비하고 문화적인 발전을 통하여 가장 안정된 시대를 이룩하였다. 제도를 정비하는 데에 기여한 재상은 허조이고, 문화적인 창조를 이룩하는 데에 공헌한 재상은 맹사성이다. 이에 비하여 황희는 제도적 기반과 문화적 발전 위에 정치적 안정과 사회적 통합을 이룩한 재상이다. 황희(黃喜)는 18년간(1431~1449) 영상(領相)의 자리에 있었으나, 맹사성(孟思誠)은 우상(右相)에서 좌상(左相)까지 8년간(1427~1435), 허조(許稠)는 우상(右相)에서 좌상(左相)까지 2년간(1438~1439) 있었다. 맹사성(孟思誠)과 허조(許稠)는 황희(黃喜)가 영의정의 자리에 오래 있었으므로, 좌의정으로 끝남 (위키 실록백과) **변계량(卞季良·1369~1430, 62세 초대 집현전 *대제학) - 경암(敬菴)과는 동갑내기의 명신하(名臣下) *대제학 : 현재의 국립서울대 총장에 해당하는 벼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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