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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한국 가요(韓國 歌謠)
2. 강남달(낙화유수)(1927년/작사,작곡 김서정∙이정숙 노래) 무성영화(無聲映畵) 낙화유수(落花流水)의 주제가
<1절> 강남 달이 밝아서 님이 놀던 곳 구름 속에 그의 얼굴 가리워 졌네
물망초 핀 언덕에 외로이 서서 물에 뜬 이 한밤을 홀로 새울까
<2절> 멀고 먼 님의 나라 차마 그리워 적막한 가람가에 물새가 우니
오늘밤도 쓸쓸히 달은 지노니 사랑의 그늘 속에 재워나 주오
<3절> 강남에 달이 지면 외로운 신세 부평의 잎사귀엔 벌레가 우네
차라리 이 몸이 잠들리로다 님이 절로 오시어서 깨울 때까지
이 노래 강남달(낙화유수)은 1928년에 개봉된 무성(無聲)영화 낙화유수의 주제곡으로, 김서정(金曙汀: 본명 김영환)이 작사, 작곡하고 가수 이정숙(李貞淑)이 처음으로 불렀는데 이후, 박남포가 개사(改詞)하고 이봉룡이 곡을 다시 손보아 남인수가 불렀다고 한다. 이난영의 오빠 이봉룡(李鳳龍)의 어릴 때 이름은 이봉용(李鳳用)으로 1914년 전남 목포(木浦) 출생이다.
당시 주로 일본의 유행가가 번안(飜案)되어 유행하던 시절이었는데 강남달(일명 낙화유수)은 우리나라 창작 대중가요 제1호로 볼 수 있는 작품이다. 당시 서민들의 감정을 드러낸 곡으로 무성영화와 더불어 인기 절정이었고, 장안(長安/서울)의 기방(妓房)에서 많이 불리었을 뿐 아니라 젊은 층의 학생들도 많이 불렀다고 한다.
이정숙은 윤극영의 동요 반달(1924년)도 불렀으며, 박남포(朴南蒲)는 가수로, 작사가로 일세를 풍미한 반야월(半夜月/1917~2012)인데 본명은 박창오(朴昌吾)였다.
1939년, 가수로 데뷔할 때 진방남(秦芳男), 그 후 추미림(秋美林), 남궁려(南宮麗), 금동선(琴桐線), 허구(許久), 고향초(高香草), 옥단춘(玉丹春), 백구몽(白鷗夢) 등 수많은 가명(假名)도 사용했다.
3. 그리운 강남(1928년/김형원(호 석송) 작사/안기영 작곡/김용환 노래)
<1절> 정이월 다 가고 삼월이라네. 강남 갔던 제비가 돌아오면은 이 땅에도 또다시 봄이 온다네
<후렴>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강남을 어서 가세.
<2절> 하늘이 푸르면 나가 일하고 별 아래 모이면 노래 부르니 이 나라 이름이 강남이라네. <후렴>
<3절> 그리운 저 강남 두고 못가는 삼천리 물길이 어려움인가? 이 발목 상한지 오래이라네. <후렴>
<4절> 그리운 저 강남 건너가려면 제비 떼 뭉치듯 서로 뭉치세. 상해도 발이니 가면 간다네. <후렴>
일제(日帝)의 억압으로 인해 압록강과 두만강 북부지역인 간도(間島)나 연해주(沿海州)로 이주(移住)해야 했던 조선인(朝鮮人)들이 고향을 그리는 향수(鄕愁)를 녹여낸 가사이다.
4. 황성 옛터<皇城의 跡>(1928년/왕평(王平) 작사/전수린 작곡/이애리수 노래)
<1절> 황성 옛터에 밤이 되니 월색(月色)만 고요해 폐허에 서른 회포를 말하여 주노나
아~ 외로운 저 나그네 홀로 잠 못 이뤄 구슬픈 버레(벌레) 소래(소리)에 말없이 눈물져요
<2절> 성은 허물어져 빈터인데 방초만 푸르러 세상의 허무한 것을 말하여 주노나
아~ 가엾다 이 내 몸은 그 무엇 찾으려 덧 없난(없는) 꿈의 거리를 헤매여 있노라
<3절> 나는 가리라 끝이 없이 이 발길 닿는 곳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정처가 없이도
아~ 한 없난(없는) 이 심사를 가삼속(가슴속) 깊이 품고 이 몸은 흘러서 가노니 넷(옛)터야 잘 있거라
일제강점기, 한국에서 1928년에 발표된 왕평 작사, 전수린 작곡, 이애리수가 노래한 대중가요이다.
일제강점기의 작곡자인 전수린(全壽麟)은 본명이 전수남(全壽南)인데, 대표곡으로는 알뜰한 당신외에 황성 옛터(皇城의 跡:이애리수 노래), 나는 열일곱살(박단마), 외로운 가로등(황금심) 등이 유행했다.
황성 옛터의 가사(歌辭)는 왕평(王平)이 일제강점기, 만주 흥안령(興安嶺)에 가 있을 때 개성 만월대(滿月臺)를 생각하며 쓴 글이라고 한다. 1907년생 왕평은 일제강점기 대중가요 작사가이자 연극배우였다. 가수이자 영화배우였던 이애리수(李愛利秀, Lee Alice/女)의 본명은 이보전(李普全)인데 1911년 개성 출생이다.
위의 황성(皇城)의 적(跡)은 낙화유수(강남달) 이후 나온 영화주제가들과 함께 1930년대 초반에 유행한 여러 노래 중에서 가장 인기를 끌고 널리 퍼진 노래였으며, 일본인까지 조선의 세레나데라고 하며 애창(愛唱)했던 노래였다. 1933년에 나온 음반에서부터는 곡명을 황성의 적(跡)에서 노랫말 첫 구절인 황성 옛터로 바꾸어 대중 속으로 더욱 깊이 다가가 우리 민족의 마음의 벗이 되었고, 망국(亡國)의 한을 달래는 노래로 정착하였다. 이렇게 민족 정서(情緖)가 강한 노래이다 보니 일제 식민당국이 이 노래를 요주의(要注意) 곡으로 보고, 항상 예의주시하고 있었다고 한다.
가수 진방남(작사가 반야월)이 신인가수 시절에 이 노래를 무대에서 부르다가 일본 순사(巡査)에게 끌려가서 혹독하게 문초를 받고 겨우 풀려나오기도 했다는 걸 보드라도, 일제 식민당국이 이 노래에 대해 얼마나 신경질적으로 보고 있었는가를 말해주는 좋은 예가 된다.
우리 가요 발전사의 입장으로 보면, 이 노래는 낙화유수(강남달)로 시작된 창작가요를 대중 속에 뿌리내리게 하여 본격적인 의미의 대중가요 시대를 열게 한, 대중가요의 효시(嚆矢)이자 불후의 명곡이었다. 또 이 노래는 뒤이어 전개되는 본격적인 트로트 곡 중심의 대중가요 전성시대와 연결되는 징검다리가 되면서도, 노래의 작품성이 뛰어나 다음 시대를 향해 건너가는 다리로서 우뚝 선 가교(駕轎)와 같은 역할을 한 명곡이다.
1930년대 중반부터 이난영(李蘭影), 남인수(南仁樹), 백년설(白年雪) 등의 인기 가수들이 목포의 눈물, 애수의 소야곡, 번지 없는 주막 등, 트로트 계열의 새로운 인기곡들을 쏟아내어 한국 가요의 전성시대를 구가하게 되자, 황성 옛터는 새로운 창법과 뛰어난 기량을 갖춘 가수들이 부른 수많은 새로운 곡들에 밀려나 대중의 관심으로부터 차츰 잊혀지는 듯했다.
그러나 1941년, 인기 가수 남인수가 황성 옛터를 리바이벌시킴으로써 다시 유행을 타게 된다.
이 노래의 작사자 왕평이 평북 강계(江界)에서 공연 중에 급서(急逝)한 것을 애석해하여 낸 추모곡 오호라 왕평(조명암 작사, 김해송 작곡, 남인수 노래)을 타이틀 곡으로 하는 추모 음반에 남인수가 부른 황성 옛터가 이미 실려 있었던 것이다. 추모곡인 오호라 왕평보다 남인수가 부른 황성 옛터가 더욱 인기를 얻었었다.
남인수가 부른 황성 옛터는 종래의 여성 가수가 불렀던 취향과는 달리, 새로운 감각으로 대중에게 다가가 민족의 가슴 가슴에 깊이 새겨지는 노래로 각인시켜, 이 노래를 영원한 민족의 노래가 되도록 했던 것이다. 가요계에서는 황성 옛터를 작품성으로 보아 목포의 눈물(이난영), 산유화(남인수)와 함께 우리 가요의 3대 명곡으로 평가하고 있다.
이 노래는 그 후 고복수(高福壽), 김정구(金貞九), 신카나리아(申 Canariy), 현인(玄仁), 이미자(李美子), 윤복희(尹福姬), 패티김(Patti 金), 조용필(趙容弼), 나훈아(羅勳兒) 등 수많은 가수들이 불러 각 가수의 개성이 가미된 황성 옛터를 들을 수 있게 되었지만, 한결같이 이 노래가 풍기는 쓸쓸하면서도 낭만적인 분위기가 살아있는 것은 가사와 멜로디의 작품성이 뛰어났기 때문일 것이다.
조용필(趙容弼:1950~)이 일본 NHK홀 라이브 공연에서 피아노의 잔잔한 반주 속에 부른 황성 옛터가 열렬한 박수를 받는 것을 보면, 좋은 감의 멜로디에서 느끼는 감정은 일본인이나 우리나 마찬가지라고 생각된다.
지난 70여 년간 우리 민족에게 그토록 사랑받으며 불린 것은, 이 노래가 지닌 근본이념이랄까 사상이라 할 수 있는, 나라를 빼앗긴 슬픔과 회한을 울분으로 통곡하는 민족 감정 또는 민족 정서가 우리 가슴 가슴에 와 닿았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박정희 전 대통령도 황성 옛터를 좋아하여 기쁠 때나 우울할 때나 이 노래를 단골로 불렀다고 한다.
언젠가, 우리나라 사람이 일본에서 일본인들과의 모임에서 마지못해 노래를 불러야 할 때, 우리나라 황성 옛터와 이미지와 분위기가 비슷한 감이 있는 코우조노쯔키(荒城の月)라는 일본 노래와 황성 옛터를 함께 불렀다고 한다. 코우조노쯔키(荒城の月)는 일본 중학교 교과서에 100년간 실려 왔던 창가(唱歌)로, 일본 미야기현(みやぎ縣) 출신의 도이반스이(土井晩翠)와 오오이타현 출신의 타키렌타로(滝 廉太郎)가 작곡한 창가(唱歌)의 명곡으로, 달빛 비치는 옛 성에서 옛적의 영화를 지금의 현상과 대비시켜 회상하면서 느낀 감회를 노래한 교과서용 노래(문부성의 노래)였다.
이 노래를 작사한 왕평(王平/1908-1940)은 본명이 이응호(李應浩)로, 경북 영천 출신이고, 극작가, 연극 및 영화배우, 작사가로 활약한 다재다능한 인물이었다. 서울에서 배재(培栽) 중학을 나온 뒤 현철과 이구영이 주도하는 조선 배우학교 첫 입학생으로 들어가 연기 수업을 받았다.
1930년대 초, 왕평(王平)은 조선 연극사의 전속작가로 활동하면서 이팔청춘•학창 로맨스 등의 극본(劇本)을 집필했고, 연극시장•연극호 등에서도 많은 작품을 발표했다.
1932년부터 포리돌(Polydor)레코드 회사의 문예부장을 맡아 많은 가사를 발표하였는데, 황성 옛터•조선팔경가(朝鮮八經歌/선우일선) 등이 대표곡이다.
또, 1933년에 나오기 시작하여 1935년 속편, 1939년의 완결판까지 무려 8장이 발표된 포리돌의 인기 극반(劇盤) 항구의 일야는 그가 작품을 쓰고 전옥(全玉)과 함께 주연으로 출연한 작품이다.
이 음반이 성공한 이후, 낸 아내의 무덤을 안고•지나간 그날 역시 그가 쓰고 전옥과 함께 출연하였다.
1938년에는 성봉 영화원에 참여하여 나그네•군용열차’ 등에 출연하였는데 1940년 강계(江界)에서 남매를 공연하는 도중, 무대 위에서 뇌일혈(腦溢血)로 별세했다.
작곡자 전수린(全壽麟 1907∼1984)은 1907년 12월 15일 북한 개성(開城)에서 출생했다.
송도고등보통학교 재학시절 바이올린 연주법을 배우면서 음악에 눈뜨기 시작하였고 악전(樂典) 공부에도 몰두했다. 본격적인 음악 공부를 위하여 호수돈(好壽敦)여학교 교장 리콜스 부인으로부터 바이올린 개인 지도를 받기도 했다.
열아홉 살 때 상경(上京)하여 연악회(硏樂會)를 주도하고 있던 홍난파가 주관하는 파락한(破樂限)의 멤버로 바이올린 연주활동을 하면서 홍난파로부터 바이올린도 지도를 받는다.
1928년, 순회공연 극단인 동방예술단에 입단하는 것을 시작으로, 취성좌(聚星座) 등 악단에 관계하면서 배경음악을 연주하는 악사(樂士)와 작곡가로 활동하였다.
1928년, 황성(荒城)의 적(跡)을 작곡하여 우리나라 사람의 손에 의해 단조(短調) 트로트의 시대를 연 첫 곡이 되게 했다.
황성(荒城)의 적(跡)으로 인하여 배우 이애리수를 유명 가수로 만든 그는 나는 열일곱 살이예요로 열일곱 살의 소녀 박단마(朴丹馬/이애리수)도 스타에 오르게 했으며 알뜰한 당신으로 16세 소녀 황금심(黃琴心)의 데뷔곡이 되면서 그녀를 황금(黃金)의 신인(新人)이 되게 했다.
또 1942년, 전수린(全壽麟)은 자신의 이름을 일본어로 타마카와(玉川)로 창씨개명(創氏改名)하고 타마카와(玉川) 위문대를 조직하여 만주와 일본 북해도 탄광(炭鑛)지대에 가서 그곳에서 일하는 노무자(勞務者)들 위문공연도 한다. 그는 트로트(Trot)는 물론, 신민요, 재즈송(Jazz Song)에 이르기까지 작곡 영역을 넓혀 190년대 초-중반을 리드(Lead)하는 작곡가가 되었다.
트로트(Trot) 곡인 알뜰한 당신(황금심)•얄궂은 운명(이인권)•무정(손금용), 그리고 재즈나 블루스 색채가 강한 나는 열일곱 살이예요(박단마)•외로운 가로등(황금심) 및 신민요 색채가 있는 사천리 강산•에라 좋구나(이애리수) 등 다양한 영역에 걸친 인기곡을 계속 발표하였다.
1826년경에 작곡을 시작하며 막간(幕間) 가수로 불렸지만 1932년 취입한 고요한 장안(이애리수)은 일본에서 아다나 사케(仇情 또는 怨情)라는 제목으로 발표하여 일본에서도 크게 유행한다.
이 노래는 일본 작가 코가마사오(こがまさお)가 1931년 최초의 일본 엔카로 발표한 술인가 탄식인가(酒は淚か溜息か)는 이 노래를 표절했다는 논란이 있었다는 곡이다.
일본 엔카(れんか/戀歌)는 일본 가곡의 원조(元祖)라고 하는 노래인데 우리나라 고요한 장안(長安)의 표절곡이라면, 일본 엔카보다 우리나라 트로트 류(流)의 대중가요를 먼저 출발시켰다고 볼 수 있으니 왜색(倭色)가요 시비도 자연히 없어질 것이다.
사실, 코가마사오(こがまさお)는 8세 때부터 우리나라 인천(仁川)에서 자라 인천 창영초등학교와 서울 선린(善隣)상업학교를 거친 후 일본 명치(明治) 대학을 다닌 경력이 이야기해 주듯이 그의 많은 음악적 기초와 소양은 한국에서 쌓여진 것이 많을수 밖에 없다고 볼 수 있기에 일본 엔카(れんか)를 태표하는 코가마사오(こがまさお)의 엔카(れんか)에는 한국 음악이 스며있다고 볼수 밖에 없는 것이다. 거기에 코카마사오는 작곡가 전수린과 일찍부터 돈독한 교우(交友) 관계였고, 코카마사오가 술은 눈물일까 탄식일까를 내놓아 엔카가 출발 될 즈음인 1930년대 초기, 우리나라는 벌써 전수린(全壽麟)을 비롯하여 김교성(金敎聲), 김준영(金駿泳), 문호월(文湖月), 김용환(金龍煥), 손목인(孫牧人) 등 쟁쟁한 작곡가들이 있었기에 우리 가요가 엔카(れんか)의 영향으로 출발한 것이라고 볼 수 없고, 처음부터 엔카는 엔카대로, 우리 가요는 우리 가요대로 독자적으로 출발하여 상호보완 관계로 발전했다고 봐야 옳을 것이다.
전수린(全壽麟)은 7남매를 거느린 가장으로서 경제적으로 어렵게 생활하다가 1946년경 서울 충무로 4가에서 중고 악기를 파는 악기점을 경영하기도 하였으나 결국 폐점하고 연주 생활로 생계를 유지하였다고 한다. 1963년에는 이서구(李瑞求)작 방송 드라마의 주제가 강화도령을 작곡하여 좋은 반응을 얻어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도 했다. 전수린은 1970년, 한국가요 반세기동지회 초대 회장을 지냈고 1984년 12월 28일, 78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황성 옛터(荒城의 跡)를 불러 유명해진 가수 이애리수(1910~2010)는 개성 출신으로 본명은 이보전(李普全)인데 이애리수라는 예명(藝名)은 서양 이름 엘리스(Ellis)를 음차(音叉)한 것이라고 한다.
이애리수는 신파극단의 희극배우인 외삼촌 전경희(全景希)를 따라 1920년, 9세(歲) 때 김도산(金陶山)이 이끌던 가극좌(歌劇座)에 아역(兒役) 배우로 잠시 활동한 후 고향인 개성 호수돈여학교를 다니다가 1929년에 흥행연극단체인 취성좌(聚星座/곧이어 朝鮮演劇舍<조선연극사>로 바뀜)에 입단하여 천한수(千漢洙)가 각색한 눈먼 동생으로 데뷔한다.
이애리수는 그 후, 톨스토이의 부활(復活)에서 여주인공인 카츄사 역을 맡으며 서울 단성서 호텔에서 신의주(新義州), 청진(靑鎭) 등 전국 순회공연을 다녔고, 그의 미모에 조선의 청춘남녀는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카츄샤로 인기를 끌던 이애리수의 노래 막간(幕間) 노래가 열기를 불러일으키자 자연히 레코드를 취입(取入)하게 되어 1931년에 콜롬비아 레코드에서 메리의 노래, 라인강, 부활 등 해외 번안곡(飜案曲)도 취입(吹入)하였다. 1932년에는 이기세(李基世)의 주선으로 빅터 레코드로 옮기면서 일본 도쿄(東京)로 가서 취입한 황성의 적(跡)<황성 옛터>과 버리지 마세요를 취입(吹入)했는데 황성의 적(跡)은 5만 매의 음반이 판매될 정도로 크게 히트하게 된다.
그 뒤, 토월회(土月會) 후신인 태양극장에 입단하여 주연배우로도 활동하였고, 우리 선생님, 첫 출근 등 작품에 안인표(安仁杓), 최명화(崔明華) 등과 출연하였다.
1930년대 초, 폭발적인 인기선상(人氣線上)에 있던 이애리수는 1932년, 1932년 연희전문학교 학생 배동필(裵東必)과 사랑을 나누게 된다. 시골에 본처가 있던 배동필은 부모가 반대로 결혼이 불가능(不可能)하자 이애리수는 음독자살(飮毒自殺)을 꾀하였으나 소생하였다. 부모님의 허락으로 결국 결혼하고 가정을 꾸몄으나 이듬해(1933년) 두 번째 음독자살을 꾀하게 되고....
결국, 젊은 나이 자살로 일생을 마감.... 1933년 5월 21일 조선일보 기사에 인기 유행 가수 이애리수가 또 음독자살이라는 제하(題下)에 자살 이유를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1933년 5월, 김억(金億) 작사, 전수린(全壽麟) 작곡 포구(浦口)의 밤을 발표하였고, 1934년 4월에는 꽃 각시 설움이라는 음반이 이애리수(李Ellis)가 낸 마지막 작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