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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도론 제32권
49. 초품 중 사연(四緣)의 뜻을 풀이함
【經】 보살마하살이 모든 법의 인연(因緣)ㆍ차제연(次第緣)ㆍ연연(緣緣)ㆍ증상연(增上緣)을 알고자 한다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하느니라.
【論】 온갖 유위의 법[有爲法]은 모두가 4연(緣)에서 생기나니, 이른바 인연과 차제연과 연연과 증상연이다.
인연(因緣)이라 함은 상응인(相應因)과 공생인(共生因)과 자종인(自種因)과 변인(遍因)과 보인(報因)이니, 이 다섯 가지 인을 인연이라 한다. 또 온갖 유위의 법을 역시 인연이라 한다.
차제연(次第緣)이라 함은 아라한(阿羅漢)의 과거ㆍ현재ㆍ미래[末後]의 마음[心]과 마음에 속한 법[心數法]을 제외한 그 밖의 과거ㆍ현재의 마음과 마음에 속한 법은 차례[次第]를 따르므로 이것을 차제연이라 한다.
인연(緣緣)과 증상연(增上緣)이라 함은 온갖 법이다.
또 보살은 4연(緣)의 자체의 모양[自相]과 공통의 모양[共相]을 알고자 한다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한다.
【문】 반야바라밀 안에서의 4연은 모두 얻을 수 없다. 그것은 왜냐하면, 만일 원인[因] 가운데에 먼저 결과[果]가 있다면 이 일은 옳지 못하고, 원인 가운데 먼저 없다면 역시 옳지 못하기 때문이다. 만일 먼저 있다면 원인이 없는 것이니, 만일 먼저 없다면 무엇으로 원인을 삼겠는가? 만일 없는데도 있다면 역시 원인이 없는 것에서도 생겨야 한다.
또 결과가 원인에서 생기는 것을 보기 때문에 그것을 원인이라 하리니, 만일 먼저 결과가 없다면 어떻게 원인이라 하겠는가?
또 만일 결과가 원인에서 생긴다면 결과는 곧 원인에 속한 것이요 원인이 스스로 존재하지 않고 다시 그 밖의 다른 원인에 속하게 된다. 만일 원인이 스스로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결과를 말하겠는가? 다만 이 원인에서 생길 뿐이다. 이렇게 여러 가지를 보면 곧 인연은 없음을 알 수 있다.
또 과거의 마음과 마음에 속한 법은 모두 소멸되어 능히 지을 바가 없는데 어떻게 차제연(次第緣)이 될 수 있겠는가? 현재에 마음이 있으면 차례는 없고, 만일 미래의 생겨나려는 마음에 차례를 부여한다면 미래는 곧 아직 있지 않은데 어떻게 차례를 따르겠는가? 이와 같이 해서 곧 차제연은 없다.
이와 같이 온갖 법은 모양[相]도 없고 대상[緣]도 없거늘 어떻게 연연(緣緣)을 말하는가?
만일 온갖 법이 딸린 데가 없고 의지할 바가 없어서 모두가 평등하다면 어떻게 증상연(增上緣)을 말하는가?
이와 같이 네 가지의 연(緣)은 얻을 수 없거늘 어떻게 “4연을 알고자 한다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한다”고 말씀하는가?
【답】 그대는 반야바라밀의 모양을 모르고 있다. 그 때문에 반야바라밀 가운데에서 네 가지의 연을 모두 얻을 수 없다고 말한다. 반야바라밀은 온갖 법에 대해 버리거나 무너뜨리는 바가 없으며 필경 청정하여서 모든 희론의 여지가 없다.
마치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다.
“네 가지의 연이 있되 다만 지혜가 적은 사람들은 네 가지의 연에 집착하면서 삿된 이론을 내나니, 그 집착을 파괴하기 위하여 짐짓 ‘모든 법은 진실로 공하여 무너뜨릴 바가 없다’고 말한 것이다.”
마치 마음의 법[心法]은 내외처(內外處)58)의 인연이 화합함으로부터 생기는 것과 같으니, 이 마음은 환[幻]과 같고 꿈과 같고 거짓이어서 일정한 성품이 없다. 마음에 속한 법[心數法]도 역시 그와 같다. 이 마음은 마음에 속한 법을 낳으니, 이른바 수(受)ㆍ상(想)ㆍ사(思) 등이 그것이다.
이 마음에 속한 법은 모양[相]을 같이하고 대상[緣]을 같이하기 때문에 상응(相應)한다. 마음은 마음에 속한 법과 상응함을 인(因)으로 삼고 마음에 속한 법은 마음과 상응함을 인으로 삼으니, 이것을 상응인(相應因)이라 한다. 상응인은 마치 친한 벗이나 아는 이가 서로 어울려서 일을 이루는 것과 같다.
공생인(共生因)이라 함은 온갖 유위법은 저마다 같이 나는 인[共生因]이 있음을 말한다. 같이 나기 때문에 다시 서로가 돕게 된다. 비유하건대 마치 형제는 같이 부모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에 서로 돕는 것과 같다.
자종인(自種因)이라 함은 과거의 착한 종자는 현재와 미래의 착한 법의 인(因)이요 과거ㆍ현재의 착한 종자는 미래의 착한 법의 인이 됨을 말한다. 불선(不善)과 무기(無記)도 역시 그와 같다. 이와 같이 온갖 법은 저마다 자종인이 있다.
변인(遍因)이라 함은 고제(苦諦)와 집제(集諦)에서 끊어야 할 번뇌[結使]이니, 온갖 때가 낀[垢] 법의 인이므로 이것을 변인이라 한다.
보인(報因)이라 함은 업을 짓는 인연 때문에 선악의 과보를 얻나니, 이것이 보인이다.
이 다섯 가지의 인[五因]을 인연(因緣)이라 한다.
마음과 마음에 속한 법이 차례로 상속하면서 간단이 없기 때문에 차제연(次第緣)이라 하고, 마음과 마음에 속한 법이 대경[塵]을 반연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이것을 연연(緣緣)이라 하며, 모든 법이 생길 때 서로가 장애하지 않는 이것을 무장(無障)이라 한다.
또 마음과 마음에 속한 법은 네 가지의 연에서 생기되 무상정(無想定)과 멸진정(滅盡定)은 세 가지의 연에서 생기고 연연은 제외되며, 그 밖의 마음과 상응하지 않은[心不相應] 모든 행과 물질[色]은 두 가지의 연에서 생겨난다. 차제연과 연연이 제외되나니, 유위의 법은 성품이 미약하기 때문에 하나의 연에서 생기는 일이 없다.
보생(報生)의 마음과 마음에 속한 법은 다섯 가지의 연에서 생기며, 불은몰무기(不隱沒無記)는 때가 낀 법이 아니므로 변인이 제외된다. 모든 번뇌도 역시 다섯 가지의 인에서 생기지만 보인은 제외된다. 왜냐하면 모든 번뇌는 바로 은몰(隱沒)이며 과보는 곧 불은몰이므로 보인이 제거되는 것이다.
보생의 물질 및 마음과 상응하지 않은 모든 행은 네 가지의 인에서 생겨난다. 물질은 마음과 마음에 속한 법이 아니기 때문에 상응인이 제외되고, 불은몰무기의 법이기 때문에 변인이 제외된다.
염오(染汚)의 물질 및 마음과 상응하지 않은 모든 행도 역시 네 가지의 인에서 생기나니, 마음과 마음에 속한 법이 아니기 때문에 상응인이 제외되고 때가 낀 법이기 때문에 보인이 제외된다. 모든 그 밖의 마음과 마음에 속한 법은 처음의 무루의 마음[無漏心]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네 가지의 인에서 생기고 보인과 변인이 제외된다. 왜냐하면 무기(無記)가 아니기 때문에 보인이 제외되고 때가 낀 법이 아니기 때문에 변인이 제외된다.
모든 그 밖의 상응하지 않은 법[不相應法], 이른바 물질과 마음과 상응하지 않는 모든 행은 만일 자종인(自種因)이 있다면 세 가지의 인에서 생기면서 상응인과 보인과 변인이 제외된다. 만일 자종인이 없다면 두 가지의 인에서 생겨나니, 공생인과 무장인(無障因)이 그것이다.
처음의 무루의 마음과 마음에 속한 법은 세 가지의 인에서 생기나니, 상응인과 공생인과 무장인이다. 이 처음의 무루의 마음속에서 물질 및 마음과 상응하지 않은 모든 행은 두 가지 인에서 생기나니, 공생인과 무장인이다. 어떠한 법도 하나의 인에서 생기는 일은 없으니, 만일 여섯 가지 인으로 생긴다면 이것을 네 가지의 연[四緣]이라 한다.
보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이와 같이 네 가지의 연을 관찰하여 마음에 집착한 바가 없고, 비록 이 법을 분별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공이요 모두가 마치 허깨비와 같은 줄을 안다. 허깨비 가운데서 비록 갖가지의 다름이 있다 하더라도 지혜로운 이는 그것을 관찰하면서 진실한 것은 없고 다만 눈을 속여서 분별하게 되는 줄을 안다. 범부의 법은 모두가 그것은 뒤바뀌고 거짓이면서 진실이 없는 것을 알기 때문이니, 네 가지의 연이 있어도 그와 같은데 어떻게 진실한 것이 되겠는가. 성현의 법의 인(因)은 범부의 법에서 생기기 때문에 역시 그것은 진실하지 않나니, 마치 먼저의 18공(空) 중에서의 설명과 같다.
보살은 반야바라밀 가운데서는 하나의 법도 일정한 성품[定性]으로써 취할 만한 것이 없기 때문에 파괴할 수 없으며 중생은 인연이 공한 법을 집착하기 때문에 파괴할 수 있다고 한다. 비유하건대 마치 어린아이가 물속에 있는 달을 보고는 마음에 애착을 내어 가지려고 하나 얻을 수가 없게 되자 마음에 근심하고 괴로워하므로 지혜로운 이가 “비록 눈으로는 볼 수 있을지라도 손으로 잡을 수는 없다”고 가르쳐 주는 것과 같다. 다만 취할 수 있는 것을 부술 뿐이요 볼 수 있는 것을 부수지는 않는다.
보살은 모든 법이 네 가지의 연에서 생겨남을 관찰하여 아나니, 네 가지의 연 안의 정해진 모양(定相)을 취하지 않는다. 곧 네 가지의 연이 화합하여 생김은 마치 물속의 달과 같아서 비록 거짓이요 아무것도 없다 하더라도 반드시 물과 달의 인(因)과 연(緣)에서 생기는 것이요 그 밖의 다른 인연으로 생기지는 않는 것이다. 모든 법이 있는 것도 역시 이와 같아서 저마다 스스로의 인연에서 생기되 역시 정해진 진실은 없다.
이 때문에 “보살은 인연과 차제연과 연연과 증상연을 여실히 알고자 한다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한다”고 말씀하는 것이다.
【문】 만일 널리 네 가지 연[四緣]의 이치를 알고자 한다면 마땅히 아비담(阿毘曇)을 배워야 하는데, 어찌하여 여기서는 네 가지의 연의 이치를 알고자 한다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한다고 말하는가?
【답】 아비담에서의 네 가지 연의 이치는 처음에 배우는 이면 그 진실을 얻는 것도 같지만 그것을 구하면 구할수록 삿된 소견에 깊이 빠져드나니, 마치 위에서 네 가지 연의 이치를 파하는 가운데서의 설명과 같다.
또 모든 법의 인할 바[所因]는 네 가지의 연에 인하는 것인데 네 가지의 연에서 다시 인할 바가 무엇이겠는가. 만일 인(因)이 있다면 끝이 없게 된다. 끝이 없다면 비롯됨이 없으며 비롯됨이 없다면 인이 없는 것이니, 만일 그렇게 되면 온갖 법은 모두가 인이 없어야 하리라. 만일 비롯됨이 있다면 그 시초는 인할 바가 없을 것이요 만일 인할 바가 없는데도 있다면 인연을 기다리지 않는 것이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온갖 법들도 역시 인연을 기다리지 않으면서 있게 될 것이다.
또 모든 법은 인연에서 생기되 두 가지가 있다. 만일 인연 가운데 먼저 있다면 인연을 기다리지 않으면서 생기는 것이므로 곧 인연이 아니다. 만일 인연 가운데에 먼저 없다면 저마다의 인연은 없는 것이다. 네 가지의 연에 대하여 부질없는 의론[戱論]을 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허물들이 있게 된다.
반야바라밀 안에서의 불가득공(不可得空) 같은 것은 이러한 허물들이 없다. 마치 세간 사람이 귀와 눈으로 보게 되는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것과 같으니, 이것은 곧 유(有)가 되지만 미세하게 그의 모양을 구하면 얻을 수가 없다.
이 때문에 반야바라밀 안에서는 삿된 소견만을 제거시킬 뿐 네 가지의 연은 파하지 않나니, 그러므로 “네 가지 연의 모양을 알고자 한다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한다”고 말씀하는 것이다.
【經】 다시 사리불아, 보살마하살이 온갖 법들의 여(如)ㆍ법성(法性)ㆍ실제(實際)를 알고자 한다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하느니라.
사리불아, 보살마하살은 이와 같이 반야바라밀에 머물러야 하느니라.
【論】 모든 법의 여(如)에는 두 가지가 있나니, 첫째는 저마다의 모양[自相]이고, 둘째는 실상(實相)이다. 저마다의 모양이라 함은 마치 땅은 단단한 모양이고, 물은 축축한 모양이며, 불은 더운 모양이고, 바람은 움직이는 모양인 것과 같나니, 이와 같이 모든 법을 분별하건대 저마다 스스로 모양이 있는 것이다.
실상이라 함은 저마다의 모양 가운데서 분별하면서 진실을 구하여도 얻을 수도 없고 파할 수도 없고 모든 허물이 없는 것이니, 마치 자상공(自相空) 안에서의 설명과 같다.
땅이 만일 진실로 단단한 모양[堅相]이라면 무엇 때문에 아교[膠]나 밀[蠟] 등이 불을 만날 때에는 그 자성(自性)을 버리며, 신통이 있는 사람은 땅에 들어가기를 마치 물과 같이 하겠는가? 또 나무와 돌을 분산시키면 단단한 모양을 잃게 되고, 또 땅을 부수어 작은 티끌을 만들어서 어느 방향을 향해 먼지로 보내면 마침내 허공으로 돌아가 역시 단단한 모양을 잃게 된다.
이와 같이 땅의 모양을 추구(推求)하건대 얻을 수가 없다. 만일 얻을 수 없다면 그것은 진실로 모두가 공이요 공이면 곧 그것이 땅의 실상이다. 온갖 개별적인 모양(別相)도 역시 그와 같나니, 이것을 여(如)라 한다.
법성(法性)이라 함은 앞에서의 설명과 같아서 저마다 법은 공하다. 공과 존재[有]의 차품(差品), 이것이 여(如)가 되며 동일하게 하나의 공이 되면 이것이 법성이 된다.
이 법성에도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집착이 없는 마음으로써 모든 법을 분별함이니, 저마다 스스로 성품이 있기 때문이다. 둘째는 한량없는 법[無量法]이라 하나니, 이른바 모든 법의 실상이다.
마치 『지심경(持心經)』59)에서 말씀하시기를 “법성은 한량없다. 성문(聲聞)의 사람은 비록 법성을 얻는다 하더라도 지혜에 한량이 있기 때문에 한량없다고 말할 수 없다. 비록 사람이 큰 바다에 이른다 하더라도 그릇이 작기 때문에 한량없는 물을 취할 수 없는 것과 같다”고 한 것과 같다. 이것이 법성이다.
실제(實際)60)라 함은 법성으로써 확실한 증득[實證]을 삼기 때문에 제(際)가 되나니, 마치 아라한을 일컬어 실제에 머무른다고 하는 것과 같다.
【문】 여와 법성과 실제의 이 세 가지 일은 동일한 것인가, 다른 것인가? 만일 동일한 것이면 어찌하여 세 가지로 말하는가? 만일 세 가지라면 이제 분별하여 설명해야 하리라.
【답】 이 세 가지는 모두 모든 법의 실상을 다르게 부른 이름이다. 그것은 왜냐하면, 범부는 지혜가 없어서 온갖 법에 대하여 삿된 관[邪觀]을 짓기 때문이니, 이른바 항상하고, 즐겁고, 깨끗하고, 실제의 나[實我]라고 하는 등이다.
부처님의 제자는 법의 본래 모양 그대로를 관찰하면서 이때에 항상하다고 보지 않으니 이것을 무상(無常)하다고 한다. 즐겁다고 보지 않으니 이것을 괴롭다[苦]고 하며, 깨끗하다고 보지 않으니 이것을 부정하다[不淨]고 하며, 진실하다고 보지 않으니 이것을 공(空)하다 하며, 나라고 보지 않으니 이것을 나 없다[無我]고 한다. 만일 항상함을 보지 않으면서 무상하다고 본다면 이것은 곧 망령된 소견[妄見]이니, 괴롭고 공하고 나 없고 깨끗하지 않다고 보는 것도 역시 그와 같다. 이것을 일컬어 여(如)라고 한다.
여라 함은 본래 그대로요 부수거나 파괴할 수도 없는 것이다. 이 때문에 부처님은 세 가지 법을 말씀하시어 법인(法印)으로 삼으셨으니, 이른바 온갖 유위의 법은 무상하다는 법인[無常印]과 온갖 법은 나 없다는 법인[無我印]과 열반은 고요하다는 법인[寂滅印]이 그것이다.
【문】 이 세 가지의 법인은 반야바라밀 가운데서 모두 무너진다. 마치 부처님께서 수보리(須菩提)에게 말씀하시되 “만일 보살마하살이 물질[色]을 항상하다[常]고 관하면 반야바라밀을 행하지 않는 것이고, 물질을 무상하다고 관해도 반야바라밀을 행하지 않은 것이다. 괴로움ㆍ즐거움ㆍ나 있음ㆍ나 없음ㆍ고요히 사라짐ㆍ고요히 사라진 것이 아님 역시 그와 같다”고 하셨다. 이와 같거늘 어떻게 법인이라 하는가?
【답】 두 가지의 경은 모두가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반야바라밀경』 안에서는 똑똑이 모든 법의 실상을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은 항상하다는 뒤바뀐 생각에 집착하는 까닭에 항상하다는 소견[常見]도 버리고 무상하다는 모양에도 집착하지 않으니, 이것을 법인이라 하는 것이다. 항상함을 버리고 무상에 집착함이 법인이라는 것은 아니니, 나에서 고요히 사라짐[寂滅]에 이르기까지도 역시 그와 같다.
반야바라밀 가운데서는 무상 등의 견해에 집착함을 파하나니, 받아들이지도 않고 집착하지도 않는 것을 깨뜨린다는 말이 아니다. 이 모든 법의 여(如)를 얻은 뒤에는 곧 법성 안에 들어가서 모든 관(觀)이 소멸되고 다른 믿음이 생기지 않나니, 성품 스스로 그러하기 때문이다.
비유하건대 마치 어린아이가 물속에 있는 달을 보고 물에 들어가서 그것을 구해도 얻지 못하면 이내 근심하기에 지혜 있는 이가 말해주기를 “성품은 스스로 그런 것이니 근심하거나 괴로워하지 말라”고 하는 것과 같다. 법성에 잘 들어가게 되는 이것이 실제이다.
【문】 성문의 법 안에서는 무엇 때문에 이 여(如)와 법성(法性)과 실제(實際)를 말하지 않으면서 마하연의 법 안에서는 곳곳에서 설명하는가?
【답】 성문의 법 안에서도 역시 설명하는 곳이 있는데 다만 적을 뿐이다. 마치 잡아함(雜阿含) 가운데에서 말씀하신 것과 같으니, 어느 한 비구가 부처님께 여쭈기를 “12인연(因緣)의 법은 부처님께서 지은 것이옵니까? 아니면, 이것은 다른 사람이 지은 것이옵니까?”고 하자, 부처님은 비구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12인연을 짓지도 않았고, 다른 사람이 지은 것도 아니다. 부처님이 계시거나 부처님이 계시지 않거나 간에 모든 법은 그와 같아서[如] 법의 모양과 법의 지위는 항상 있는 것이니, 이른바 이 일이 있기 때문에 이 일이 있고 이 일이 생기기 때문에 이 일이 생기는 것이다.
마치 무명(無明)의 인연 때문에 모든 지어감[行]이 있고, 모든 지어감의 인연 때문에 의식[識]이 있으며, 또한 늙어 죽음[老死]의 인연 때문에 근심하고 슬퍼하고 괴로워함[憂悲苦惱]이 있는 것과 같다. 그리고 이 일이 없기 때문에 이 일이 없고, 이 일이 소멸하기 때문에 이 일이 소멸하나니, 마치 무명이 소멸하기 때문에 모든 지어감이 소멸하고, 모든 지어감이 소멸하기 때문에 의식이 소멸하며, 나아가 늙어 죽음이 소멸하기 때문에 근심하고 슬퍼하고 괴로워함이 소멸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나고 멸하는 법은 부처님이 계시거나 계시지 않거나 간에 항상 그러하다.”
이 경우에는 여(如)를 말씀한 것이다.
마치 잡아함의 『사리불사자후경(舍利佛師子吼經)』61) 안에서 말씀하신 것과 같다. 부처님께서는 사리불에게 한 글귀의 이치를 물으면서 세 번이나 거듭하셨으나, 세 번 다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 사리불에게 조금 열어 보이신[開示] 뒤에 조용한 방으로 들어가셨다. 그러자 사리불은 비구들을 모아 놓아 그 비구들에게 말하기를 “부처님께서는 나에게 일의 실마리[事端]를 아직 보이지 않으셨기에 아직 즉석에서 대답하지 못했지만 이제 나는 이 법에 대하여 밤낮 이레 동안 그 일을 연설한다 해도 다하지 못할 것이다”고 하였다.
그때 다시 어느 한 비구가 부처님께 아뢰기를 “부처님께서 조용한 방으로 들어가신 뒤에 사리불은 사자후를 외치면서 스스로를 찬탄하였나이다”고 하자, 부처님께서는 비구에게 말씀하시되 “사리불의 말은 진실이요 거짓이 아니다. 그것은 왜냐하면, 사리불은 법성에 잘 통달했기 때문이다”고 하셨다.
성문의 법 중에서는 모든 법이 나고 멸하는 모양을 관찰함을 여(如)로 삼아 온갖 관(觀)을 멸하고 모든 법의 실상(實相)을 얻는다.
이 경우에는 법성(法性)을 말씀하신 것이다.
【문】 여기에서는 다만 여와 법성을 설명했을 뿐이다. 어느 곳에서 다시 실제(實際)를 설명하는가?
【답】 이 두 가지 일은 인연이 있었기 때문에 설명한 것이요 실제는 인연이 없기 때문에 설명하지 않았다.
【문】 실제는 곧 그것이 열반이다. 열반을 위하여 부처님께서는 12부경(部經)을 말씀하셨는데 어떻게 인연이 없다고 말하는가?
【답】 열반은 갖가지의 이름으로 설명한다. 혹은 여읜다[離] 하기도 하고 혹은 묘하다[妙] 하기도 하며 혹은 벗어난다[出]고 하기도 한다. 이와 같은 것으로 실제를 말하게 되지만 다만 이름을 설명하지 않았기 때문에 “인연이 없다”고 말할 뿐이다.
또 모든 법의 여(如)라 함은 마치 모든 법이 아직 생기지 않았을 때와 같아서 생길 때에도 역시 그와 같고 생긴 뒤의 과거와 현재도 역시 그와 같다. 모든 법은 3세에 평등하므로 이것을 여라 한다.
【문】 만일 아직 법이 생기지 않았으면 아직 생긴 법이 없다고 한다. 현재에는 곧 법이 있어 사용할 수가 있다. 현재의 법으로 인하여 일과 작용의 특징이 있는 까닭에 지나간 일을 기억하면서 이것을 과거라 한다. 3세는 저마다 다르므로 사실대로 하면 동일한 것이 아니어야 하거늘 어떻게 3세 평등한 이것을 여(如)로 삼는다 하는가?
【답】 모든 법의 실상(實相) 안에는 3세가 평등하고 동일하여 다름이 없다. 마치 반야바라밀의 여품(如品) 중에서 “과거의 여(如)와 미래의 여와 현재의 여와 여래(如來)의 여는 동일한 여(如)이어서 다름이 없다”고 말한 것과 같다.
또 먼저 논의(論義)한 가운데서 이미 생기는 법[生法]을 파했다. 만일 생기는 법이 없다면 미래나 현재에도 역시 생기는 것이 없는데 어떻게 평등하지 않겠는가. 또 다시 과거의 세상은 비롯됨이 없고, 미래의 세상은 나중이 없으며, 현재의 세상은 머무르지 않나니, 이 때문에 3세의 평등을 여라 하며, 이 여를 행하고 나면 한량없는 법의 성품 안에 드는 것이다.
법성이라 했는데, 법은 열반을 말하며 무너뜨릴 수 없고 희론할 수도 없다. 법성은 본분의 종자[本分種]가 됨을 말하니, 마치 황색의 돌 속에는 금의 성품이 있고 백색의 돌 속에는 은의 성품이 있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온갖 세간의 법 속에는 모두가 열반의 성품이 있나니, 모든 부처님과 성현은 지혜(智慧)와 방편(方便)과 지계(持戒)와 선정(禪定)으로써 교화하고 인도해 이 열반의 법성을 얻게 한다.
근기가 영리한 이면 곧 이 모든 법은 모두가 바로 법성임을 아나니, 마치 신통있는 사람이 기와와 돌을 변화시켜 모두 금이 되게 하는 것과 같다. 근기가 둔한 이면 방편으로 분별하고 구해 비로소 법성을 얻으니, 마치 큰 대장장이가 돌을 두드려 부순 연후에야 금을 얻는 것과 같다.
또 마치 물의 성품은 아래로 흘러가기 때문에 마침내는 바다로 돌아가 합쳐서 하나의 맛이 되는 것처럼 모든 법도 역시 그와 같아서 온갖 전체의 모양(總相)과 각각의 모양[別相]은 모두가 법성으로 돌아가서 다 같이 하나의 모양이 되나니, 이것을 법성이라 한다.
마치 금강(金剛)이 산꼭대기에 있다가 점차로 아래로 뚫고 내려가 금강의 땅 끝에 이르러 자성에 도달해야 비로소 그치는 것처럼 모든 법도 역시 그와 같아서 지혜로 분별하며 추구하다가 여(如) 가운데에 이르고, 여를 쫓아 자성에 들어가서 본말(本末)이 생긴 그대로 되어 모든 희론이 소멸되면 이것을 법성이라 한다.
또 마치 송아지가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울어대다가도 어미소를 만나게 되어야 비로소 그치는 것처럼, 모든 법도 역시 그와 같아서 갖가지로 다르며 취하고 버릴 것이 같지 않으면서도 자성에 도달하게 되면 비로소 그치게 되어 다시는 지나는 곳이 없나니, 이것을 법성이라 한다.
실제(實際)라 함은 마치 앞에서 설명했듯이 법성을 실(實)이라 하고 들어가는 곳을 제(際)라 한다.
또 낱낱의 법에는 아홉 가지가 있다. 첫째는 몸[體]이 있다. 둘째는 저마다 법(法)이 있나니, 마치 눈과 귀는 같은 4대(大)로 만들어졌다 하더라도 눈만이 볼 수 있고 귀에는 보는 공(功)이 없는 것과 같으며, 또 불은 더운[熱] 것으로 법을 삼으면서 촉촉이 적시지는 못하는 것과 같다. 셋째는 모든 법은 저마다 힘[力]이 있나니, 마치 불은 태우는 것으로 힘을 삼고 물은 적시는 것으로 힘을 삼는 것과 같다.
넷째는 모든 법은 저마다 스스로 인(因)이 있고, 다섯째는 모든 법은 저마다 스스로 연(緣)이 있으며, 여섯째는 모든 법은 저마다 스스로 결과[果]가 있다.
일곱째는 모든 법은 저마다 스스로 성품[性]이 있고, 여덟째는 모든 법은 저마다 한계[限礙]가 있으며, 아홉째는 모든 법은 저마다 열리고 통하는 방편이 있나니, 모든 법이 생할 때는 몸과 그 밖의 법에 이르기까지 무릇 아홉 가지의 일이 있는 것이다.
이 법에 저마다 몸의 법[體法]이 두루 갖추어진 것을 알면 이것을 세간에서의 하(下)의 여(如)라 하고, 이 아홉 가지의 법은 마침내 변하여 달라지고 다하여 소멸한다는 것을 알면 이것을 중(中)의 여(如)라 하나니, 마치 이 몸이 태어날 때는 청정하지 않는 데서부터 나왔으며 비록 또 몸을 씻고 장식한다 하더라도 마침내는 도로 청정하지 않은 데로 돌아가는 것과 같다. 이 법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며, 생기는 것도 아니고 소멸하는 것도 아니어서 모든 관법(觀法)이 소멸하여 마침내는 청정해지니, 이것을 상(上)의 여(如)라 한다.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 아홉 가지 일 안에서 법이 있다[有法]는 것이 바로 여(如)이다. 비유하건대 마치 땅의 법은 굳고 무거우며, 물의 법은 차고 습하며, 불의 법은 덥고 비추며, 바람의 법은 가볍고 움직이며, 마음의 법은 식별하고 이해하는 것과 같다”고 한다. 이와 같은 법을 여라 한다.
마치 경 가운데서 “부처님께서 계시거나 부처님께서 계시지 않거나 간에 그대로의[如] 법의 모양과 지위는 항상 세간에 머무르나니, 이른바 무명(無明)의 인연과 모든 지어감[行]은 언제나 본래의 법 그대로다”라고 한 것과 같다.
법성이라 함은 이 아홉 가지의 법 중에서 성품[性]이며, 실제라 함은 아홉 가지 법 중에서 과증(果證)을 얻는 것이다.
또 모든 법의 실상(實相)은 항상 머무르면서 동요하지 않건만, 중생이 무명 등의 모든 번뇌 때문에 실상 가운데 바뀌고 달라지고 삿되고 굽게 된다. 모든 부처님과 성현은 갖가지 방편으로 설법하면서 무명 등의 모든 번뇌를 파괴하여, 중생들로 하여금 도로 진실한 성품을 얻어서 본래대로 다르지 않게 하나니, 이것을 여(如)라 한다.
진실한 성품이 무명과 합하기 때문에 변하고 달라져 곧 청정하지 않게 된다. 만일 무명 등을 물리쳐 없애면 그 진실한 성품을 얻는데, 이것을 법성이 청정한 실제(實際)라 하고 법성 안으로 들어간다고 한다.
법성이 한량없고 그지없음을 아는 일은 가장 미묘하다. 나아가 어떠한 법도 법성보다 뛰어나나 법성보다 뛰어난 것이 없다 함을 알면 마음이 만족해져서 다시는 그 밖의 것을 구하지 않고 곧 증과를 짓게 된다.
비유하건대 마치 길을 갈 때 날마다 가면서 쉬지 않다가 목적지에 도달하면 다시는 더 가려는 마음이 없는 것처럼, 수행하는 이가 실제(實際)에 머무르는 것도 역시 그와 같다. 마치 아라한과 벽지불이 실제에 머무르게 되면 비록 항하의 모래수같이 많은 모든 부처님이 그를 위하여 설법한다 해도 역시 다시는 더 나아가려고 하지 않으며 다시는 삼계(三界)에 태어나지 않는 것과 같다.
만일 보살이 이 법성 가운데에 들어가면 멀리 떨어져서 실제를 알게 된다. 설령 아직 6바라밀을 두루 갖추지 못했다 해도 중생을 교화하게 되며, 이때 만일 증득하면 중생이 성불하는 도에 방해가 되므로 보살은 대비(大悲)와 정진하는 힘으로 다시 모든 행을 닦는다.
또 모든 법의 실상 안에는 항상하는 법[常法]이 없고 즐거운 법[樂法]이 없으며, 나의 법[我法]이 없고 진실한 법[實法]이 없음을 알면서 역시 이 관법[觀法]을 버린다면 이 같은 온갖 관법이 모두 소멸된다. 이것이 곧 모든 법은 실로 열반과 같고 불생불멸(不生不滅)이어서 본말(本末)의 생긴 그대로가 되는 것이다. 마치 물은 찬 모양이지만 불을 빌리기 때문에 더워지다가 만일 불이 꺼지고 열이 다하면 다시 차게 되어 본래대로 되는 것과 같다.
모든 관법(觀法)을 쓰는 것은 마치 물이 불을 만나는 것과 같고, 모든 관법이 소멸되는 것은 마치 불이 꺼지면서 물이 차게 되는 것과 같나니, 이것을 일컬어 그렇듯[如] 실답게 항상 머무른다고 한다. 왜냐하면 모든 법의 성품은 저절로 그러하기 때문이다. 비유하건대 마치 온갖 형상 있는 법[色法]에는 모두 공의 몫이 있는 것과 같다.
모든 법 안에는 모두가 열반의 성품이 있어서 이것을 법성이라 한다. 열반을 얻는 갖가지의 방편의 법 안에는 모두가 열반의 성품이 있는데 만일 증과를 얻는 때에 법성과 같이 되면 이것이 실제(實際)이다.
또 법성은 한량없고 그지없어서 마음과 마음에 속한 법으로는 헤아릴 바 아니다. 이것을 법성이라 하고, 미묘하게 이 극치에 이르는 이것을 진제(眞際)라 한다.
【經】 다시 사리불아, 보살마하살이 삼천대천세계 안의 대지(大地)와 모든 산과 작은 티끌을 헤아려 알고자 한다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하느니라. 보살마하살이 하나의 털을 백 개로 쪼개고 그 쪼개진 한 개의 털로써 삼천대천세계 안의 큰 바다와 강물과 못과 샘의 모든 물을 모조리 들어 올리면서도 그 물의 성품이 흔들리지 않게 하고자 한다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하느니라.
삼천대천세계 안의 모든 불이 모두 한꺼번에 일어나서 마치 겁(劫)이 다하듯 타오를 때 보살마하살이 한 번 입으로 불어서 꺼지게 하고자 한다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하느니라. 삼천대천세계 안의 모든 큰 바람이 일어나서 삼천대천세계와 모든 수미산을 마치 썩은 풀을 꺾듯이 불어 무너뜨리고자 할 때 보살마하살이 한 손가락으로 그 바람의 힘을 막아 일어나지 않게 하고자 한다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하느니라.
【論】 【문】 부처님께서는 무엇 때문에 모든 보살의 6바라밀[六度] 등의 모든 공덕은 찬탄하지 않으면서 이 큰 힘을 찬탄하시는가?
【답】 중생에게는 두 가지가 있나니, 첫째는 착한 법을 좋아하는 이이고, 둘째는 착한 법의 과보를 좋아하는 이이다. 착한 법을 좋아하는 이를 위해서는 모든 공덕을 찬탄하고, 착한 법의 과보를 좋아하는 이를 위해서는 큰 신력(神力)을 찬탄하게 된다.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4대(大)라는 이름은 실제로는 끝이 없고 다함이 없고 항상 세간에 있다. 때문에 능히 모두 움직여 그 다소를 헤아릴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비록 성곽(城廓)과 대전(臺殿)을 짓는다 하더라도 사용되는 바는 매우 적고 땅은 광대하여 만물을 싣고 양육하므로 가장 견고한 것이다”고 한다.
이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삼천대천세계 안의 대지와 수미산 등 모든 산의 작은 티끌의 수효를 모조리 알고자 하며, 나아가 낱낱의 작은 티끌 안에 있는 중생의 업의 인연은 저마다 분한(分限)이 있어 그 많고 적음을 알고자 한다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문】 하나의 돌과 흙의 작은 티끌조차 오히려 그 수효를 알기 어려운데 하물며 삼천대천세계의 땅 및 모든 산의 작은 티끌의 수효이겠는가? 이것은 믿을 수조차 없는 일이다.
【답】 성문과 벽지불의 지혜로도 오히려 알지 못하는데 하물며 범부이겠는가. 이 일은 모든 부처님과 큰 보살만이 아시는 바이다.
마치 『법화경(法華經)』에서 설하는 바와 같다.
“비유하건대 마치 삼천대천세계의 땅 및 모든 산을 가루 내어 티끌로 만들어서 동방으로 천의 세계를 지나가서 티끌 한 개를 떨어뜨리고, 마찬가지로 천의 세계를 지나가서 다시 티끌 한 개를 떨어뜨리며, 이렇게 하면서 삼천세계의 모든 티끌을 모두 다 떨어뜨리는 것과 같다. 부처님께서는 비구들에게 말씀하시되 ‘이 작은 티끌 수의 세계를 산수(算數)로 헤아려서 알 수 있겠느냐?’고 하시자, 모든 비구들은 말하기를 ‘알 수 없나이다’고 했다. 이어 부처님은 말씀하시되 ‘작은 티끌이 나타날 수 있거나 작은 티끌이 나타나지 않는 모든 나라를 모조리 다 갈아서 티끌을 만든다 하면 대통혜부처님[大通慧佛]62)께서 세간에 출현하신 이후의 겁수(劫數)가 그만 하느니라.”
이와 같은 한량없는 항하의 모래수같이 많은 세계의 작은 티끌도 부처님과 큰 보살은 모두 다 알 수 있거늘 하물며 하나의 항하의 모래수같이 많은 세계이겠는가.
또 한량없다[無量] 함은 사람의 마음을 따라 말하는 것이다. 마치 큰 바다의 물을 일컬어 한량없다 하고, 깊이가 8만 유순이라 해도 큰 몸을 가진 라후(羅睺) 아수라왕(阿修羅王) 같은 이는 그 많고 적음을 헤아리기 어렵다고 여기지 않는 것과도 같다.
【문】 어떻게 반야바라밀을 행하면 이런 지혜를 얻는가?
【답】 어떤 사람이 반야바라밀을 행하여 모든 번뇌 및 삿된 소견과 희론을 없애고 보살의 매우 깊은 선정에 들면 염지(念智)가 청정하면서 더욱 늘어나기 때문에 온갖 모든 물질의 작은 티끌을 분별하면서 그 수량을 알 수 있게 된다.
또 모든 부처님과 큰 보살은 장애 없는 해탈[無礙解脫]을 얻기 때문에 이 일보다 더한 것조차도 오히려 어렵다고 여기지 않는데 하물며 이것쯤이랴.
또 어떤 사람은 “땅은 단단한 것이요 마음은 형질이 없지만 모두 이것은 허망하다”고 한다. 이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마음의 힘[心力]이 크다”고 말씀하나니, 반야바라밀을 행하기 때문에 이 대지(大地)를 부수어 작은 티끌로 만드는 것이다.
땅에는 빛깔[色]ㆍ냄새[香]ㆍ맛[味]ㆍ닿임[觸]이 있어 무겁기 때문에 스스로 짓는 바가 없다. 물은 냄새가 적기 때문에 움직이고 짓는 일이 땅보다는 낫고, 불은 냄새와 맛이 적기 때문에 세력이 물보다는 나으며, 바람은 빛깔ㆍ냄새ㆍ맛이 적기 때문에 움직이고 짓는 일이 불보다는 낫지만, 마음은 이 네 가지의 일이 없기 때문에 하는 바의 힘이 크다.
또 마음은 번뇌의 결사(結使)가 많아 얽매이기 때문에 마음의 힘이 미약하고 적게 되고, 유루(有漏)의 착한 마음은 비록 번뇌는 없다 하더라도 마음이 모든 법의 모양을 취하기 때문에 그 힘은 역시 적다. 2승(乘)의 무루(無漏)의 마음은 비록 모양을 취하지 않더라도 지혜에 한량이 있으며, 무루의 도(道)에서 벗어날 때는 6정(情)으로써 세속을 따라 분별하면서 모든 법의 모양을 취하기 때문에 마음의 힘을 다하지 못한다.
모든 부처님과 큰 보살은 지혜가 한량없고 그지없으며 항상 선정에 머물면서 세간과 열반에 대하여 분별하는 바가 없다.
모든 법의 실상(實相)은 그것이 실로 다르지 않고 다만 지혜에 우열(優劣)이 있을 뿐이다.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이는 마침내 청정하여 걸림이 없으며 한 생각 동안에 시방의 온갖 항하의 모래수같이 많은 삼천대천세계의 대지와 모든 산의 작은 티끌을 셀 수 있다. 그러니 하물며 시방으로 각각 하나의 항하의 모래수같이 많은 세계이겠는가.
또 만일 반야바라밀을 여의면 비록 신통을 얻는다 하더라도 위에서와 같이 알 수가 없나니, 이 때문에 “이 큰 신력을 얻고자 한다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온갖 모든 물질 안에서는 물이 가장 크다. 그것은 왜냐하면, 대지의 위와 아래는 4면으로 물이 있지 않는 데가 없고, 만일 호세천주(護世天主)가 하늘의 용이 내리는 비의 양을 조절하지 않거나 또는 물을 소멸시키는 구슬이 없다면, 하늘과 땅은 물에 빠져버리며, 또는 물의 인연으로 세간의 중생이나 중생 아닌 범주에 속하는 것들이 나고 자라게 되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물이 가장 큰 것임을 알 수 있다”고 한다.
이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보살이 물방울의 많고 적음을 알면서 방울마다 분산하여 힘을 없애고자 하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불이 가장 크다. 그것은 왜냐하면, 냄새와 맛을 제거하기 때문이다. 또한 물이 나오는 곳은 매우 많은데도 불은 그것을 소멸할 수 있으며, 큰 불의 힘은 만물을 태울 수 있고 모든 어둠을 비출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불이 가장 큰 것임을 알 수 있다”고 한다. 이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보살이 입으로 불어서 큰 불을 끄고자 한다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문】 불은 바람에 의해 더욱 왕성하게 타게 되거늘 어떻게 끈다는 것인가?
【답】 비록 그렇기는 하나 바람이 지나치면 꺼지게 된다.
【문】 만일 그렇다면 불은 많아서 한량없고 입의 바람은 심히 적은데 어찌 끌 수 있겠는가?
【답】 보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선정으로 인하여 신통을 얻는지라 몸을 변화시켜 크게 할 수 있으니, 입의 바람도 역시 커지기 때문에 끌 수가 있다. 또 신력으로서 비록 작은 바람으로도 끌 수 있나니, 마치 조그마한 금강(金剛)이 큰 산을 꺾어 부수는 것과 같다. 이 때문에 모든 하늘과 세간 사람들은 이 신력을 보고 모두가 다 숭앙하고 굴복하는 것이다.
또 보살은 불이 해치는 것이 큰지라 중생을 가엾이 여기는 까닭에 신력으로써 끄는 것이다. 또 삼천세계가 성립하는 것은 매우 어려우나, 보살은 복덕과 지혜 때문에 그 힘으로 능히 제어할 수 있다.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4대(大) 가운데서 바람이 가장 크다. 빛깔과 냄새와 맛이 없기 때문에 움직이는 모양도 가장 크다. 그 까닭이 무엇이냐, 하면 마치 허공이 끝이 없듯이 바람도 역시 끝이 없기 때문이다. 온갖 것이 나고 길러지고 이루어지고 무너짐은 모두가 바람으로 말미암는다. 큰 바람의 세력은 삼천대천세계의 모든 산을 꺾어 부순다”고 한다.
이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한 손가락으로 그 바람의 힘을 막고자 한다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것은 왜냐하면, 반야바라밀의 실상(實相)은 한량없고 끝이 없는지라 손가락의 힘으로도 이렇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經】 보살마하살이 한번 결가부좌하여 삼천대천세계 안의 허공에 두루 차고자 한다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하느니라.
【論】
【문】 보살은 어떤 인연 때문에 이처럼 결가부좌하는 것인가?
【답】 범천왕(梵天王)은 삼천세계의 주인인지라 삿된 소견의 마음을 내면서 스스로 대단한 체하다가 보살이 가부하고 앉아 허공에 두루 찬 것을 보면 교만하던 마음이 이내 쉬게 된다.
또 신통의 힘 안에서는 공교한 방편 때문에 하나를 여럿으로 만들 수 있고 여럿을 하나로 만들 수도 있으며 작은 것을 큰 것으로 만들 수도 있고 큰 것을 작은 것으로 만들 수도 있나니, 역시 희유하고 하기 어려운 일을 나타내기 위하여 허공에 두루 차게 앉는 것이다.
또한 모든 귀신과 용왕이 중생들을 괴롭히거나 어지럽히는 것을 막기 위하여 허공을 가득 채워 앉아서 중생을 안온하게 하는 것이다. 마치 난타(難陀)와 바난타(婆難陀)용왕 형제가 사바제성(舍婆提城)을 부수고자 모든 무기와 독사 따위를 비처럼 내렸는데 이때 목련이 단정히 앉아 허공에 두루 차 있으면서 모든 해치는 물건을 모두 꽃과 향과 영락으로 변화시켜 버린 것과 같다.
이 때문에 “보살마하살이 한번 가부하고 앉아서 삼천대천세계의 허공에 두루 차고자 한다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經】 다시 보살마하살이 한 개의 털로써 삼천대천세계 안의 모든 수미산왕을 들어서 다른 방향의 한량없는 아승기의 모든 부처님의 세계에 던지면서도 중생이 흔들리지 않게 하고자 한다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하느니라.
【論】
【문】 보살은 무엇 때문에 수미산과 모든 산을 들어서 다른 뱡향의 한량없는 세계에 던진다는 것인가?
【답】 반드시 드는 일이 있다는 것은 아니니, 이것은 보살의 힘으로 능히 들 수 있다는 것을 밝힌 것뿐이다.
또 모든 보살은 부처님께서 장차 설법하시려는 까닭에 먼저 삼천대천세계를 장엄하면서 모든 산을 없애고 땅을 편편하게 정돈한다. 마치 『법화경(法華經)』에서 “부처님께서는 모든 변화로 된 부처님을 모으려 하시는 까닭에 먼저 땅을 편편하게 다스리셨다”고 설한 것과 같다.
또한 희유한 일을 나타내면서 중생들로 하여금 보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것은 왜냐하면, 하나의 수미산 높이는 8만 4천 유순이기 때문이다. 만일 이 하나의 산을 들면 벌써 희유한 일이 되는데 하물며 삼천대천세계에 있는 백억의 수미산이겠는가.
만일 한 개의 털로써 삼천대천세계의 백억의 수미산을 드는 것조차도 오히려 어려운 일인데 하물며 하나의 털끝으로써 백억의 수미산을 던지며 한량없는 아승기 세계를 지나가게 함이겠는가.
중생은 보살의 그러한 희유한 일을 보고 모두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일으키면서 생각하기를 ‘이 보살은 아직 부처님의 도를 이루지 못했는데도 그 신력이 곧 이러하다. 그런데 하물며 부처님이 되신 분이겠는가”고 하리니, 그 때문에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經】 한 그릇 밥으로 시방으로 각각 항하의 모래수같이 많은 모든 부처님과 승가[僧]에게 공양하고자 한다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하며, 한 벌의 옷과 꽃ㆍ향ㆍ영락ㆍ가루 향ㆍ바르는 향ㆍ사르는 향ㆍ등촉ㆍ당기ㆍ번기 및 꽃일산 등으로 모든 부처님과 승가에게 공양하고자 한다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하느니라.
【論】
【문】 보살이 만일 한 그릇의 밥으로 한 부처님과 승가에게 공양한다면 이것조차도 오히려 어려운 일인데 하물며 시방의 항하의 모래수같이 많은 모든 부처님과 승가이겠는가?
【답】 공양하는 공덕은 마음에 있는 것이요 일에 있지 않다. 만일 보살이 한 그릇의 밥으로 큰 마음을 내어 시방의 모든 부처님과 승가에게 공양한다면 역시 멀고 가까움에 구애받지 않으리니, 이 때문에 모든 부처님들이 보시고 모두 받으신다.
【문】 모든 부처님은 일체지(一切智)가 있기 때문에 모두 보시고 모두 받으시겠지만 스님들은 일체지가 없는데 어떻게 볼 수 있고 어떻게 받을 수 있는가?
【답】 스님들은 비록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나 그 공양을 보시하는 이는 복을 받는다. 비유하건대 마치 어떤 사람이 심부름을 보내어 그 사람에게 공양하게 할 때 그 사람은 비록 얻지 못한다 하더라도 이 사람은 벌써 보시한 복을 얻게 된 것과 같다. 마치 자삼매(慈三昧)와 같아서 중생에게는 비록 베푸는 바가 없다 하더라도 수행한 이는 그 공덕이 한량없다.
또 모든 보살은 한량없고 그지없는 공덕을 성취하게 되나니, 한 그릇의 밥으로 시방의 모든 부처님과 승가에게 공양한다 해도 모두 다 충족시켜 다하지 않는다. 비유하건대 마치 샘에서 물이 솟아나와 다하지 않는 것과 같으며, 마치 문수시리(文殊尸利)가 한 발우의 환희환(歡喜丸)을 8만 4천의 스님에게 공양할 때 모두 다 충족시키고도 다함이 없는 것과 같다.
또 이 경우에 보살이 이 한 발우의 밥을 시방의 모든 부처님께 공양하지만 시방의 부처님 앞에는 온 음식거리가 갖추어져서 나오게 된다. 비유하건대 마치 귀신은 사람의 한 입밖에 되지 않는 밥을 얻어 천 배ㆍ만 배를 내놓는 것과 같다.
또 보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하여 한량없는 선정의 문을 얻으며 한량없는 지혜와 방편의 문을 얻나니, 이 때문에 하지 못하는 일이 없다. 반야바라밀은 장애가 없기 때문에 이 보살이 마음으로 짓는 바도 역시 장애가 없다.
이 보살은 시방의 천만억 항하의 모래수 만큼 많은 모든 부처님과 스님들에게 공양할 수 있거늘 하물며 각각 하나의 항하의 모래수 만큼이겠는가. 옷ㆍ꽃ㆍ향ㆍ영락ㆍ가루 향ㆍ바르는 향ㆍ사르는 향ㆍ등촉ㆍ당기ㆍ번기 및 꽃 일산 등도 역시 그와 같다.
【經】 다시 사리불아, 보살마하살이 시방으로 각각 항하의 모래수같이 많은 세계 안의 중생으로 하여금 모두가 계율[戒]ㆍ삼매(三昧)ㆍ지혜(智慧)ㆍ해탈(解脫)ㆍ해탈지견(解脫知見)을 갖추게 하고, 수다원의 과위[須陀洹果]‧사다함의 과위[斯陀含果]‧아나함의 과위[阿那含果]‧아라한의 과위[阿羅漢果]에서 무여열반(無餘涅槃)에 이르기까지를 얻게 하고자 한다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하느니라.
【論】 5중(衆)의 이치는 먼저의 설명과 같다. 수다원의 과위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부처님께서 “3결(結)을 끊어 무위의 과위[無爲果]를 얻는다”고 말씀하셨으며, 또한 아비담(阿毘曇)에서는 “88결(結)을 끊어 무위의 수다원 과위를 얻는다”고 설명한 것과 같다. 둘째는 신행(信行)과 법행(法行)의 사람이 도비지(道比智) 안에 머무르면서 수다원의 증과(證果)를 얻는 것이 그것이다.
또 수다(須陀)를 유(流)라 부르니, 곧 그것은 8성도분(聖道分)이다. 반나(般那)는 입(入)이라 하며 이 8성도분에 들어가 열반으로 흘러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비로소 모든 법의 실상(實相)을 관하여 한량없는 법성(法性)의 갈래에 들게 되면서 성인의 범주 가운데 든다고 한다.
식기(息忌)63)는 일(一)이라 하고 가미(伽彌)64)는 내(來)라 하나니, 이 사람은 여기서 죽어서 천상에 가 나고 천상에서 다시 한 번 와서[一來]는 뭇 괴로움을 다하게 된다.
아나(阿那)65)는 불(不)이라 하고 가미(伽彌)는 내(來)라 하나니, 이것은 오지 않는 모양[不來相]이라 한다. 이 사람은 욕계(欲界) 안에서 죽어서 색계(色界)나 무색계(無色界) 안에 가 나서는 그곳에서 번뇌를 다해 다시는 와 나지 않는다.
【문】 금세에서 죽는 아나가미(阿那伽彌)와 중음(中陰)에서 죽는 아나가미, 이들도 역시 색계나 무색계에 태어나지 않는데 무엇 때문에 아나가미라 하는가?
【답】 아나가미는 대부분 색계와 무색계 안에 가 나며, 현재에 죽는 이는 적다. 곧 적은 것이 많은 것을 따르기 때문이니, 중간에 죽는 이도 역시 색계에 가 나려고 하면서 후생의 몸이 근심거리임을 보고 이내 열반을 취하게 된다. 이 때문에 많이 있는 것으로 이름이 붙여졌다.
아라한은 온갖 번뇌를 다하기 때문에 온갖 하늘과 용과 귀신의 공양을 받을 만하다. 이 아라한에는 아홉 가지가 있으니, 즉 퇴법(退法)ㆍ불퇴법(不退法)ㆍ사법(死法)ㆍ호법(護法)ㆍ주법(住法)ㆍ승진법(勝進法)ㆍ불괴법(不壞法)ㆍ혜해탈(慧解脫)ㆍ공해탈(共解脫)이다. 이 아홉 가지의 뜻은 앞에서의 설명과 같다. 나아가 8배사(背捨)와 8승처(勝處)와 10일체처(一切處)와 멸진정(滅盡定)과 무쟁삼매(無諍三昧)와 원지(願智) 등의 아라한의 모든 묘한 공덕 및 무여열반(無餘涅槃)을 얻게 된다.
무여열반을 아라한이라 하나니, 이 5중(衆)을 버리고 다시는 상속하면서 후생의 5중(衆)을 받는 일이 없으며, 몸과 마음의 괴로움은 모두 다 영원히 소멸된다. 뒤의 세 가지 도의 과위[三道果]는 처음의 도[初道]에서의 설명과 같다.
【經】 다시 사리불아,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보시할 때에는 “이와 같이 보시는 큰 과보를 얻는다. 이와 같이 보시에 의해 찰리(刹利)의 큰 성바지와 바라문(婆羅門)의 큰 성바지와 거사(居士)의 큰 집안에 태어나게 된다. 이와 같이 보시에 의해 사천왕천처(四天王天處)ㆍ삼십삼천(三十三天)ㆍ야마천(夜摩天)ㆍ도솔타천(兜率陀天)ㆍ화락천(化樂天)ㆍ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에 나게 된다.
이 보시로 인하여 초선(初禪)ㆍ2선(禪)ㆍ3선(禪)ㆍ4선(禪)ㆍ무변공처(無邊空處)ㆍ무변식처(無邊識處)ㆍ무소유처(無所有處)ㆍ비유상비무상처(非有想非無想處)에 들게 되고, 이 보시로 인하여 능히 8성도분(聖道分)을 내며, 이 보시로 인하여 능히 수다원의 도에서부터 부처님의 도에 이르기까지를 얻는다. 그러니 반야바라밀을 배워야만 한다”고 이처럼 분별해야 하느니라.
【論】 보살마하살은 모든 법의 실상을 알면서 취하는 것도 없고 버리는 것도 없고 무너뜨리는 바도 없으며, 얻을 수 없는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대비(大悲)의 마음으로써 다시 복행(福行)을 닦는다. 복행의 첫 문은 먼저 보시를 행하는 것이니, 보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지혜로 밝고 날카롭게 보시의 복을 분별하게 된다.
보시하는 물건은 비록 같다 하더라도 복덕의 많고 적음은 마음의 우열(優劣)에 따른다. 마치 사리불이 한 발우의 밥을 부처님께 올리자 부처님께서는 이내 그 밥을 개에게 돌려 베풀면서 사리불에게 물으시되 “너는 밥을 나에게 보시하였고 나는 밥을 개에게 보시하였으니, 누가 복을 얻는 것이 많겠느냐?”고 하자, 사리불이 대답하기를 “제가 부처님 법의 이치를 이해하기로는 부처님께서 개에게 보시하여 얻는 복이 더 많습니다”라고 한 것과 같다.
사리불은 온갖 사람 가운데서 지혜가 맨 위이지만 부처님의 복밭[福田]은 가장 으뜸이 되시기에 부처님께서 개라는 열악한 밭[惡田]에 보시하여 극히 많은 복을 얻으신 것보다는 못하다. 이 때문에 큰 복은 마음을 따를 뿐 밭[田]에 있지 않은 것인 줄 알 수 있다. 마치 사리불이 천 배ㆍ만 배ㆍ억 배를 베푼다 해도 부처님의 마음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과 같다.
【문】 그대의 설명과 같이 복밭은 묘하기 때문에 복을 얻는 것이 많다. 그러나 사리불이 부처님께 보시한 것이 어찌 큰 복을 얻지 못하는가?
【답】 좋은 밭[良田]은 비록 복을 얻는 것이 많다 하더라도 마음보다는 못하다. 그것은 왜냐하면, 마음은 안의 주인이 되고 밭은 바깥의 일이기 때문이다. 혹 때로는 보시의 복이 복밭에 있기도 하나니, 마치 억이(億耳) 아라한이 옛적에 한 송이의 꽃을 불탑에 베풀고는 91겁 동안 인간과 천상 가운데에서 즐거움을 누리고 그 나머지의 복덕의 힘으로 아라한이 된 것과 같다.
또 아수가왕(阿輸迦王)66)이 어릴 적에 흙을 부처님께 보시하여 염부제(閻浮提)의 왕이 되어 8만의 탑을 일으키고 최후에는 도를 얻은 것과 같다. 보시한 물건은 지극히 미천하고 어린아이 마음은 박(薄)했지만, 다만 복밭이 묘한 까닭에 큰 과보를 얻은 것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큰 복은 좋은 밭에서 생기는 줄 알 것이다.
만일 대(大) 가운데서도 상(上)이라 하면 세 가지의 일이 모두 갖추어지니, 마음[心]과 물건[物]과 복밭[福田]의 세 가지의 일이 모두 묘하다. 마치 반야바라밀의 초품(初品) 중에서 “부처님께서는 좋은 꽃으로 시방의 부처님께 뿌리셨다”고 말한 것과 같다.
또 마치 반야바라밀의 마음으로 보시함은 집착하는 바가 없기 때문에 큰 과보를 얻는 것과 같다.
또 열반을 위하여 보시하는 것도 역시 큰 과보를 얻으며, 대비(大悲)의 마음으로 온갖 중생들을 제도하기 위하여 보시하는 것도 역시 큰 과보를 얻는다.
또 큰 과보라 함은 마치 여기에서 설명하듯이 찰리의 집안에 태어나고, 나아가 부처님이 되는 그것이다.
【문】 어떻게 보시하면 찰리의 집안에 태어나게 되고, 나아가 부처님이 되는가?
【답】 만일 어떤 사람이 보시하고 계율을 지니면 그 때문에 인간과 천상 안의 부귀를 얻고, 마치 어떤 사람이 지극한 마음으로 보시하고 계율을 지니기 때문에 찰리의 집안에 태어나는 것과 같다. 찰리란 왕과 대신이다.
만일 지혜의 경서(經書)67)에 집착하면서도 중생을 괴롭히지 않고 보시하면서 계율을 지니면 그 때문에 바라문의 집에서 태어난다. 만일 보시하고 계율을 지님이 적으면서 세간의 쾌락에 집착하기 좋아하면 거사의 대갓집에 태어나니, 거사라 함은 소인(小人)이면서도 큰 부자이다.
만일 보시하고 계율을 지니면서 청정함이 조금은 뛰어나고 집안의 일에 싫증을 내며 법을 듣기 좋아하고 착한 사람에게 공양하면 사천왕의 처소에 태어난다. 그것은 왜냐하면, 그곳에 있으면서 필요한 것에 욕망이 생긴다 해도 모두가 항상 이 세간의 성현과 착한 사람을 만나게 되므로 공양하려는 마음이 생기면서 복을 닦는 곳을 가까이하기 때문이다.
만일 보시하고 계율을 지님이 청정하면서 부모 및 그 존중할 이에게 공양하고 마음이 뛰어난 데를 구하려 하면 삼십삼천에 태어난다. 만일 보시하고 계율을 지님이 청정하면서 학문을 좋아하고 그 마음이 부드럽고 온화하면 야마천에 태어난다.
만일 보시하고 계율을 지님이 청정하면서 두 일을 갈수록 뛰어나게 하며, 많이 듣기를 좋아하고 아름다움과 추함을 분별하며 열반을 좋아해 마음이 공덕에 집착하면 도솔천에 태어난다.
만일 보시하고 깊은 마음으로 계율을 지니며, 많이 듣고 학문을 즐기며 자기 힘으로 살아간다면 화락천에 태어난다.
만일 보시할 때 청정하고 계율을 지님이 더욱 깊으며, 많이 듣기를 좋아하고 스스로 귀히 여기는 심정이 많아서 스스로 고생을 하지 않고서도 남으로부터 쾌락을 구할 수 있으면 타화자재천에 태어난다.
다른 이가 사유하고 부지런히 마음의 방편을 부려 여색(女色)과 5욕(欲)으로 변화시켜 지어내는 바, 그것의 즐거움을 빼앗아서 자재하나니, 마치 서민(庶民)들이 자신의 괴로운 몸을 자기업의 강한 힘 때문에 빼앗겨 버리는 것과 같다.
또 보시할 때는 원(願)의 인연 때문에 천상에 태어나는데, 마치 경의 말씀과 같다.
“어떤 사람이 조그마한 보시와 지계(持戒)를 행하면서 선정도 알지 못하나, 이 사람은 사천왕천이 있다는 말을 듣고 마음에 항상 뜻하면서 원하므로 부처님께서는 ‘이 사람은 목숨을 마치면 사천왕천에 태어나리니, 이것은 틀림이 없느니라’고 말씀하셨다.”
타화자재천도 역시 그와 같다.
또 어떤 사람이 보시하고 계율을 지니면서 보시를 닦을 때에는 그의 마음에 즐거움을 얻고 만일 보시함이 많으면 많을수록 즐거움도 많게 된다.
이와 같이 사유해 5욕(欲)을 버리고 5개(蓋)를 제거해 초선(初禪)에 들게 되니, 비유상비무상천에 이르기까지도 역시 그와 같다. 4선(禪)과 4무색정(無色定)의 뜻은 이미 앞에서 설명했다.
또 어떤 사람이 부처님과 부처님의 제자에게 보시하고 그로부터 도법(道法)의 해설을 듣게 되면 이 사람은 이 보시로 인하여 마음이 부드러워지고 지혜가 총명하고 영리해지면서 곧 8성도분(聖道分)이 생기며 3결(結)을 끊고 수다원의 과위를 얻게 된다. 나아가 부처님의 도에 이르기까지도 역시 그와 같아서 이 보시로 인하여 그 설법을 듣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또 아직 욕망을 여의지 않은 채 보시하면 인간 안의 부귀와 6욕천(欲天) 안에 태어나고, 만일 욕망을 여의고 보시하면 범세천상(梵世天上)68) 내지는 광과천(廣果天)에 태어난다. 만일 색심(色心)을 여의고 보시하면 무색천(無色天)에 태어난다.
삼계(三界)를 여의고 보시하면 열반을 위하기 때문에 성문의 도를 얻는다. 보시할 때 시끄러운 데를 싫어하고 고요한 곳을 좋아하면서 깊은 지혜를 기뻐하면 벽지불을 얻으며, 보시할 때 크게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일으켜 온갖 중생을 제도하려 하면서 으뜸가게 깊고 필경 청정한 지혜를 위한다면 부처님의 도를 이루게 된다.
【經】 다시 사리불아,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며 보시할 때 지혜의 방편[慧方便]의 힘 때문에 능히 단(檀)바라밀ㆍ시라(尸羅)바라밀ㆍ찬제(羼提)바라밀ㆍ비리야(毘梨耶)바라밀ㆍ선(禪)바라밀ㆍ반야(般若)바라밀을 구족하게 되느니라.
사리불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보살마하살이 보시할 때 어떻게 해야 지혜의 방편의 힘 때문에 단바라밀에서 반야바라밀까지를 구족하는지요?”
부처님께서 사리불에게 말씀하셨다.
“베푸는 이[施人]와 받는 이[受人]와 재물(財物)은 얻을 수 없기 때문에 능히 단바라밀을 구족하느니라. 죄가 됨과 죄가 되지 않음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시라바라밀을 구족하게 되고, 마음이 동요하지 않기 때문에 찬제바라밀을 구족하게 되며, 몸과 마음이 정진하면서 게으르거나 쉬지 않기 때문에 비리야바라밀을 구족하게 되고, 어지럽지도 않고 어둡지도 않기 때문에 선바라밀을 구족하게 되며, 온갖 법은 얻을 수 없음을 알기 때문에 반야바라밀을 구족하게 되느니라.”
【論】 구족(具足)한다는 뜻은 먼저 이미 자세히 설명했다. 지혜의 방편[慧方便]은 이제 이 가운데에서 설명하리니, 이른바 세 가지 일[三事]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문】 지혜의 방편이라 함은 그 일을 성취하고도 파괴하는 바가 없으며 다시는 더 지을 바도 없는 것이다. 이제 이 세 가지의 일을 파한다면 응당 단멸(斷滅)에 떨어져야 하거늘 어떻게 지혜의 방편이라 하는가?
【답】 두 가지의 얻을 수 없는 것[不可得]이 있다. 첫째는 얻으면서 얻을 수 없는 것이고, 둘째는 얻을 수 없는 것을 얻을 수 없는 것이 그것이다. 얻으면서 얻을 수 없다면 단멸에 떨어지겠지만, 만일 얻을 수 없는 것을 얻을 수 없다면 이것은 지혜의 방편이 되며 단멸에 떨어지지 않는다.
만일 지혜의 방편이 없이 보시하면 세 가지 일의 모양[三事相]을 취하게 된다. 만일 세 가지 일의 공으로써 한다면 곧 없는 모양[無相]을 취하는 것이다. 지혜의 방편이 있는 이라면 본래부터 세 가지 일의 모양을 보지 않나니, 이 때문에 지혜의 방편이라 하면 있다 없다 하는 가운데에 떨어지지 않는다.
또 보시할 때는 모든 번뇌를 깨뜨리니, 이것을 지혜의 방편이라 한다. 또 온갖 중생에 대하여 크게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일으키면서 보시하니, 이것을 지혜의 방편이라 한다.
또 과거와 미래의 한량없는 세상 동안에 닦은 복덕과 보시를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회향하는 것도 역시 지혜의 방편이라 한다.
또 온갖 시방 3세(世)의 모든 부처님과 제자들이 지닌 공덕에 대해 억념하고 더불어 기뻐하면서 베풀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회향한다면 이것도 지혜의 방편이다. 이와 같은 갖가지의 힘, 이것이 지혜방편의 뜻이 된다. 반야바라밀까지의 지혜의 방편도 역시 그와 같다.
【經】 다시 사리불아, 보살마하살이 과거ㆍ미래ㆍ현재의 모든 부처님의 공덕을 얻고자 한다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하느니라.
【論】 【문】 과거의 부처님의 공덕은 이미 없어졌고, 미래의 부처님의 공덕은 아직 있지 않으며, 현재의 부처님의 공덕은 얻을 수 없다. 또 3세 동안의 부처님의 공덕은 모두가 얻을 수 없거늘 어떻게 “3세의 부처님의 공덕을 얻고자 한다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한다”고 말하는가?
【답】 3세(世)의 부처님의 공덕을 얻으려 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가 3세의 부처님의 공덕과 같은 줄어지거나 적어지는 바가 없는 공덕을 얻고자 할 뿐이다. 그것은 왜냐하면, 온갖 부처님의 공덕은 모두가 평등하여 많은 것도 없고 적은 것도 없기 때문이다.
【문】 만일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아미타불(阿彌陀佛)의 수명은 한량없고 광명은 천만억 유순이며 한량없는 겁 동안 중생을 제도한다”고 하는가?
【답】 모든 부처님의 세계는 갖가지여서 청정한 곳과 청정하지 않은 곳이 있고 같이 뒤섞인 데도 있다. 마치 『삼십삼천품경(三十三天品經)』69)에서와 같다. 곧 부처님께서는 삼십삼천(三十三天)에 계시면서 안거(安居)하고 자자(自恣)하셨는데, 4중(衆)들은 오랫동안 부처님을 뵙지 못하자 근심하면서 좋아하지 않다가 목련(目連)을 보냈다.
목련은 가서 부처님께 아뢰기를 “세존이시여, 어떻게 이 중생들을 버리고 저 천상에서만 머무르시나이까?” 하니, 부처님께서는 목련에게 말씀하시되 “너는 3천의 세계를 자세히 살펴보아라”고 하셨다. 목련은 부처님의 신력으로 자세히 살펴보자, 부처님들께서 대중들을 위하여 설법하시는 것이 보이기도 하고, 혹은 좌선하시는 것이 보이기도 하며 혹 걸식하시는 것이 보이기도 했다.
이와 같이 갖가지 불사(佛事)를 베풀어 지으신 것을 보고 목련은 즉시 오체투지(五體投地) 했는데 이때 수미산이 기우뚱거리면서 크게 움직였으므로 모든 하늘들이 크게 놀라고 두려워했다. 목련은 슬피 울면서 머리를 조아리고 부처님께 아뢰기를 “부처님께서는 대비(大悲)가 있으시어 온갖 중생을 버리지 않으시니, 이처럼 갖가지로 중생을 교화하고 제도하시옵니다”고 하였다.
부처님께서는 목련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본 것은 매우 적은 것이니라. 네가 본 곳을 지나면 동방에 나라가 있는데 순전히 황금으로 땅이 되었고 그 부처님의 제자들은 모두가 아라한으로 6신통을 갖추어 걸림이 없느니라. 다시 그 동방을 지나서 나라가 있는데 순전히 백은(白銀)으로 땅이 되었고 그 부처님의 제자는 모두가 벽지불의 도를 배우고 있느니라.
다시 그 동방을 지나서 나라가 있는데 순전히 7보(寶)로써 땅이 되었고 그 땅에는 항상 한량없는 광명이 있으며 그 부처님의 교화를 받은 제자들은 순전히 보살들이며 모두가 다라니(陀羅尼)와 모든 삼매(三昧)의 문을 얻어서 아비발치(阿鞞跋致)의 지위에 머무르고 있느니라.
목련아, 그 모든 부처님이란 모두가 나의 몸인 줄 알아야 하느니라. 이와 같은 동방의 항하의 모래수같이 많은 한량없는 세계에는 장엄한 곳도 있고 장엄하지 않은 곳도 있나니, 이는 모두 나의 몸으로 짓는 불사이니라. 마치 동방에서처럼 남방ㆍ서방ㆍ북방과 네 간방과 위와 아래도 역시 그와 같으니라.”
그러므로 석가모니부처님께도 다시 청정한 세계가 있음은 마치 아미타부처님의 나라와 같고 아미타부처님께도 역시 엄정(嚴淨)한 세계와 엄정하지 않은 세계가 있음은 마치 석가모니부처님의 나라와 같은 줄 알아야 한다.
모든 부처님의 대비는 골수까지 사무치며 세계의 아름답고 추함을 가리지 않고 제도해야 할 이를 좇아서 그들을 교화하신다. 마치 인자한 어머니가 아들을 사랑하기에 아들이 비록 뒷간에 빠져 있다 하더라도 애써 건져 구하면서 밉게 여기지 않는 것과 같다.
58)
6근ㆍ6경의 12처(處)를 말한다.
59)
범어로는 Viśeṣacintisūtra.
60)
범어로는 bhūta-koṭi. 진리의 경계를 의미한다.
61)
범어로는 Śāriputrasiṃhanādasūtra.
62)
범어로는 Mahābhijñānabhibhū.
63)
범어 sakṛd의 음역어.
64)
범어 āgāmi의 음역어.
65)
범어 ana에 해당한다.
66)
범어로는 Aśoka. 아육왕(阿育王)을 말한다.
67)
여기에서는 바라문의 16대경(大經)을 말한다.
68)
범어로는 Brahmalokadeva.
69)
범어로는 Trāyatrṃśa-devaparivarta-sūtra.
ⓒ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 구마라집(鳩摩羅什, Kumārajīva) (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