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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정도론 2권
12.3. 열 가지 신통의 주석[2]
1. 하나인 상태에서 여러 몸을 나투는 신통
48. 이제 그것의 여러 종류를 보이기 위해 하나인 상태에서 여럿이 되기도 하고라고 설했다.
여기서 하나인 상태에서라는 것은 신통을 나투기 전에는 본래 한 사람이었다는 뜻이다.
여럿이 되기도 하고라는 것은 여러 사람들의 곁에서 경행하고 싶어 하거나 독송을 하고 싶어 하거나 질문을 하고 싶어 하여 백 사람이나 천 사람이 된다는 뜻이다.
그러면 어떻게 이와 같이 신통을 얻는가?
신통의
① 네 가지 토대
② 네 가지 기초
③ 여덟 가지 다리(韻脚)
④ 열여섯 가지 근본을 성취한 뒤
⑤ 지혜로 결의하기 때문이다.
(1) 네 가지 토대
49. 여기서
(1) 네 가지 토대란 네 가지 禪이라고 알아야 한다.
법의 사령관인 [사리뿟따 존자가] 이와 같이 설하셨기 때문이다.
“무엇이 신통의 네 가지 토대인가?
초선은 떨쳐버림에서 생긴 토대이고,
제2선은 희열과 행복의 토대이고,
제3선은 평온과 행복의 토대이고,
제4선은 괴롭지도 행복하지도 않은 것의 토대다.
이들 네 가지 신통의 토대는 신통을 얻도록, 신통을 거듭 얻도록, 신통으로 여러 모습으로 변환함(vikubbanatā)을 얻도록, 신통의 위엄(visavitā)을 얻도록, 신통의 자유자재(vasitā)를 얻도록, 신통의 담대함(vesārajja)을 얻도록 인도한다.(Ps.ii.205)”
이 가운데서 처음의 세 가지 禪은 희열이 충만함과 행복이 충만함을 통해서 행복의 인식과 가벼움의 인식에 들어가서 그의 몸을 가볍고 부드럽고 일에 적합하게 하여 신통을 얻도록 한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처음 세 가지 禪은] 신통을 얻도록 인도하기 때문에 보조적인 토대라고 알아야 하고,
제4선은 신통을 얻는 기본토대라고 알아야 한다.
(2) 네 가지 기초
50.
(2) 네 가지 기초는 네 가지 성취수단(iddhi-pāda, 신통의 기초, 如意足)이라고 알아야 한다.
이와 같이 설하셨기 때문이다.
“무엇이 신통의 네 가지 기초인가?
여기 비구가 열의를 [주로 한] 삼매와 정근의 의도적 행위(saṅkhāra, 行)를 갖춘 성취수단을 닦는다.
정진을 [주로 한] 삼매와 정근의 의도적 행위를 갖춘 성취수단을 닦는다.
마음을 [주로 한] 삼매와 정근의 의도적 행위를 갖춘 성취수단을 닦는다.
이 네 가지 신통의 기초는 신통을 얻도록 … 신통의 담대함을 얻도록 인도한다.(Ps.ii.205)”
51. 여기서 열의가 그 원인인, 혹은 열의가 우선인 삼매가 열의를 [주도한] 삼매(chanda-samādhi)이다. 이것은 하고 싶어 하는 열의를 우선으로 하여 얻은 삼매의 동의어이다.
정근인(padhānabhūtā) 의도적 행위(saṅkhārā, 行)가 정근의 의도적 행위(padhāna-saṅkhārā)이다. 이것은 네 가지 기능을 성취하는 바른 노력인 정진의 동의어이다.
갖춘이란 열의를 우선으로 한 삼매와 정근의 의도적 행위를 구족한다는 뜻이다.
52.
‘성취수단’(iddhipāda, 신통의 기초, 如意足):
완성한다는 뜻에서, 성취한다는 뜻에서, 이것을 통해 중생들이 성공하고, 증진하기 때문에 이러한 방법으로 초월지의 마음과 관련된 열의를 [주로 한] 삼매와 정근의 의도적 행위는 신통(성취,iddhi)이라는 용어를 얻는다.
그런 열의를 [주로 한] 삼매와 정근의 의도적 행위의 토대(adhiṭṭhāna)라는 의미에서 기초(pāda, 수단)인 나머지 마음과 마음부수의 더미라는 뜻이다.
이처럼 설하셨기 때문이다.
“성취수단(신통의 기초, 如意足)이란 그렇게 된 자의 느낌의 무더기(受蘊)이다 … 알음알이의 무더기(識蘊)이다.(Vbh.217)”
53. 혹은 이것으로써 도달하기 때문에 pāda(기초, 수단)이다. 도달한다는 뜻이다.
iddhipāda(성취수단, 신통의 기초)라는 합성어는 신통을 위한(iddhiyā) 기초(pāda)로 해석된다. 이것은 열의 등과 동의어이다.
이처럼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만약 비구가 열의를 의지하여 삼매를 얻고, 마음의 하나됨을 얻는다면 이것은 열의를 [주로한] 삼매(chanda-samādhi)라 한다.
그는 아직 일어나지않은 사악한 해로운 법들을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부지런히 노력한다. 이것을 정근의 의도적 행위(padhāna-saṅkhāra)라 한다.
이와 같이 비구들이여 이 열의와, 이 열의를 [주로한] 삼매와, 이정근의 의도적 행위들을 일러
‘열의를 [주로한] 삼매와 정근의 의도적 행위를 갖춘 성취수단’이라 한다(S.v.268)”
이와 같이 나머지 성취수단들에 대해서도 그 뜻을 알아야 한다.
(3) 여덟 가지 다리
54.
(3) 여덟 가지 다리(韻脚)란 열의 등 여덟 가지라고 알아야 한다.
이처럼 설하셨기 때문이다.
“무엇이 여덟 가지 신통의 다리인가?
만약 비구가 열의를 의지하여 삼매를 얻고, 마음의 하나됨을 얻으면 열의는 삼매가 아니고, 삼매도 열의가 아니다.
열의와 삼매는 서로 다른 것이다.
만약 비구가 정진을 … 마음을 … 검증을 의지하여 삼매를 얻고, 마음의 하나됨을 얻으면 검증은 삼매가 아니고, 삼매도 검증이 아니다.
검증과 삼매는 서로 다른 것이다.
이 여덟 가지 신통의 다리는 신통을 얻도록 … 신통의 담대함을 얻도록 인도한다.(Ps.ii.205-6).”
여기서 신통을 일으키기를 원하는 열의가 삼매와 결합하여 신통을 얻도록 인도한다.
정진 등도 그와 같다.
그러므로 이 여덟 가지 다리를 설했다고 알아야 한다.
(4) 열여섯 가지 근본
55.
(4) 열여섯 가지 근본: 열여섯 가지로써 마음의 확고부동 함을 알아야 한다.
이처럼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신통에는몇가지근본이있는가? 열여섯가지가있다.
활기찬 마음은 게으름으로인해 흔들리지 않으므로 확고부동하다.
우쭐대지 않은 마음은 들뜸으로 인해 흔흔들리지 않으므로 확고부동하다.
유혹에 이끌리지 않은 마음은 탐욕으로 인해 흔들리지 않으므로 확고부동하다.
퇴짜 맞지 않은 마음은 악의로 인해 흔들리지 않으므로 확고부동하다.
의존하지 않은 마음은 사견으로 인해 흔들리지 않으므로 확고부동하다.
묶이지 않은 마음은 욕탐으로 인해 흔들리지 않으므로 확고부동하다.
벗어난 마음은 감각적 욕망으로 인해 흔들리지 않으므로 확고부동하다.
교제하지 않은 마음은 오염원으로 인해 흔들리지 않으므로 확고부동하다.
한계를 벗어 버린 마음은 오염원의 한계로 인해 흔들리지 않으므로 확고부동하다.
하나된 마음은 여러 가지 오염원으로 인해 흔들리지 않으므로 확고부동하다.
믿음으로 강화된 마음은 불신으로 인해 흔들리지 않으므로 확고부동하다.
정진으로 강화된 마음은 게으름으로 인해 흔들리지 않으므로 확고부동하다.
마음챙김으로 강화된 마음은 부주의로 인해 흔들리지 않으므로 확고부동하다.
삼매로 강화된 마음은 들뜸으로 인해 흔들리지 않으므로 확고부동하다.
통찰지로 강화된 마음은 무명으로 인해 흔들리지 않으므로 확고부동하다.
광명과 함께한 마음은 무명의 어두움으로 인해 흔들리지 않으므로 확고부동하다.
이 열 여섯 가지 신통의 근본은 신통을 얻도록…신통의 담대함을 얻도록 인도한다.(Ps.ii.206)”
56. 물론 이 뜻은 이와 같이 그의 마음이 삼매에 들고로 시작하는 문장에서(§2)이미 성취되었다.
그러나 초선 등이 신통의 토대와 기초와 다리와 근본이 됨을 보이기 위해 다시 설하셨다.
앞의 것은 경들에서 전승되어 온 방법이고, 이것은 『무애해도』에서 [설한 방법이다].
이와 같이 두 곳 모두 혼돈을 없애기 위해 다시 설하셨다.
(5) 지혜로 결의한다
57.
(5) 지혜로 결의한다:
그는 신통의 경지와 기초와 다리와 근본이 되는 법들을 성취하여 초월지의 기초가 되는 禪(제4선)에 들었다가 출정한다.
만약 백 사람이 되기를 원하면,
‘백 사람이 되리라, 백 사람이 되리라’고 준비를 한 다음,
다시 초월지의 기초가 되는 禪에 들었다가 출정하여 결의한다.
결의하는 마음과 함께 동시에 백 사람이된다.
천 사람이 되는 등에서도 같은 방법이다.
만약 이와 같이 하여 성취하지 못할 때는 다시 준비를 짓고 두 번째로 입정하였다가 출정하여 결의해야 한다.
『상응부 주석서』에서 한 번이나 두 번 입정해야 한다고 설했디 때문이다.
58. 여기서 기초가 되는 禪(제4선)의 마음은 [닮은] 표상을 그 대상으로 가지지만,
준비의 마음(앞의 세 가지 禪)은 백 사람을 그 대상으로 가지거나 천 사람을 그 대상으로 가진다.
이런 백 천의 사람들은 개념으로 설한 것이 아니라 형상을 가진 것으로 설한 것이다.
이천 사람을 그 대상으로 가진자. 그 [결의하는 마음]은 앞서 설한 본삼매처럼 고뜨라부(gotrabhu, 種姓)바로 다음에 오직 한 번 일어나는데 그것은 색계의 제4선에 속한다.
59. 『무애해도』에서도 다음과 같이 설했기 때문이다.
“본래 한 사람이 여럿으로 전향한다. 백 사람이나 천 사람이나 백 천 사람으로 전향하여
‘여러 사람이 되리라’고 지혜로 결의한다. 그는 여러 사람이 된다.
마치 쭐라빤타까(Cūla-Panthaka) 존자처럼.(Ps.ii.207)”
여기서도 전향한다는 것은 준비의 삼매로 설한 것이다.
전향하여 지혜로 결의한다는 것은 초월지로 설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여러 사람으로 전향한다.
그 다음에 그는 준비의 마음을 끝에 입정한다. 그것으로부터 출정하여 다시
‘여러 사람이 되리라’고 전향하고,
그 다음에 단 한 순간의 초월지로 결의한다.
이 초월지는 세 번 혹은 네 번 일어나는 이전의 [준비의] 마음 다음에 일어나며, 결정을 내리기(sanniṭṭhāpana) 때문에 결의라는 이름을 얻는다.
이와 같이 이 뜻을 알아야 한다.
60. 그러나 마치 쭐라빤타까 존자처럼이라고 설한 것은 여러 사람이 되는 것의 직접적인 증거(kāya-sakkhi)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이것은 일화를 통해서 설명해야 한다.
두 형제가 길에서(panthe) 태어났기 때문에(jātattā) 빤타까(Pantha-ka)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그 중에서 형은 마하빤타까(Mahā-panthaka)였다. 그는 출가하여 무애해를 겸비한 아라한이 되었다.
아라한이 되어 동생 쭐라빤타까를 출가시키고 다음 게송을 주었다.
“마치 향기로운 꼬까나다의 연꽃이 아침에 향내음을 풍기면서 피듯이 멀리 빛을 드리우신 부처님을 보라. 마치 허공에서 빛나는 태양과 같구나.(A.iii.239)”
그는 넉 달이 가도록 이것을 외울 수가 없었다.
그때 형인 장로가 그에게
‘너는 이 교단에 있을 자격이 없다’고 하면서 절 밖으로 쫒아버렸다.
61. 그때 장로는 공양의 초청과 관련된 소임을 보고 있었다.
지와까(Jīvaka)가 장로를 찾아와서
‘존자시여, 내일 아침에 세존과 함께 500명의 비구들이 저희 집에 와서 공양을 드십시오.’라고 했다.
장로는 ‘쭐라빤타까를 제외한 나머지 대중들을 위해서 그것을 받아들이겠습니다.’라고 승낙했다.
쭐라빤타까는 문에 서서 울고 있었다.
세존께서 천안으로 보시고 그를 찾아가셔서
‘무슨 이유로 울고 있는가?’라고 물으셨다.
그는 세존께 그 동안에 있었던 일을 말씀드렸다.
62. 세존께서는
‘외우는 것을 못한다고 해서 나의 교단에 있을 자격이 없는 것은 아니다.
비구여, 슬퍼하지 말라’라고 하시고는,
팔을 잡아 절 안으로 들어가게 하여 신통으로 [아주 깨끗한] 천 조각을 만들어 주셨다.
‘비구여, 이것을 문지르면서 ‘먼지 닦기(rajo-haraṇa), 먼지 닦기’라고 반복해서 외워야 한다.’고 하셨다.
이와 같이 하자 천은 더러워졌다.
그는 ‘천은 깨끗하다. 여기에는 허물이 없다. 허물은 이 몸에 있다’라고,
[부정의] 인식(不淨想)을 얻고서는 무더기들(五蘊)에 지혜를 돌려 위빳사나를 증장시켜 수순과 고뜨라부의 근처에 이르렀다.
63. 그때 세존께서 그를 위해 광명의 게송을 읊으셨다.
“탐욕이 때일 뿐 먼지를 때라 하지 않네
때는 탐욕의 동의어
현자는 이러한 때를 버리고
때 없는 자의 교단에 머문다.
성냄이 때일 뿐 먼지를 때라 하지 않네
때는 성냄의 동의어
현자는 이러한 때를 버리고
때 없는 자의 교단에 머문다.
어리석음이 때일 뿐 먼지를 때라 하지 않네
때는 어리석음의 동의어
현자는 이러한 때를 버리고
때 없는 자의 교단에 머문다(Nd1. 506)”
그 게송이 끝나자 그는 네 가지 무애해와 여섯 가지 초월지(육신통)를 수반한 아홉 가지 출세간법을 손에 쥐게 되었다.
64. 천인사께서는 그 다음날 비구 대중과 함께 지와까의 집에 가셨다. 보시를 위해 물로 씻는 절차를 마치고 죽을 올리려할 때 세존께서는 손으로 자신의 발우를 가렸다.
지와까는 ‘세존이시여, 무슨 일로 그러십니까?’라고 여쭈었다.
‘절에 한 비구가 남아있구나. 가서 그를 데리고 빨리 오라’하면서 세존께서는 사람을 보내었다.
65. 한편 세존께서 절 밖으로 나가시자,
“빤타까는 자신을 천 명으로 만들어
초청을 알리는 순간까지
아름다운 망고 숲에 앉아있었다.(Th1. 563)”
66. 그때 그 사람이 가서 가사로 인해 숲이 온통 빛나는 것을 보고 돌아와서는
‘세존이시여, 비구들이 가득 차있습니다. 그 가운데 누가 그 분인지 모르겠습니다.’라고 했다.
세존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가서 처음 보는 사람의 가사 자락을 잡고서 스승님께서 당신을 부르십니다라고 말하고 데려오너라.’
그는 가서 장로의 가사 자락을 잡았다. 그 순간에 사람들은 모두 사라졌다.
장로는 ‘자네는 가게’라고 그를 돌려보내고 세수 등 몸에 관한 일을 한 다음 그 사람보다 먼저 가서 정해진 자리에 앉았다.
이것을 두고 마치 쭐라빤타까 존자처럼이라고 설했다.
67. 여기서 창조되었던 많은 사람들은 특정한 구분을 만들지 않고 창조했기 대문에 신통을 가진 사람과 닮는다.
서거나 앉을 때나, 이야기하거나 조용히 있을 때 등에도 신통을 가진 자가 하는 그대로 그들도 한다.
만약 그가 여러 가지 모습이 되기를 원한다면, 일부는 유년기에 있고, 일부는 중년기에 있고, 일부는 노년기에 있고, 그와 마찬가지로 긴 머리털을 가진 자, 반쯤 삭발한 자, 완전히 삭발한 자, 백발이 섞인 머리털을 가진 자, 옅은 붉은 가사를 수한자, 황색 가사를 수한 자가 되기도 한다.
싯구를 외거나 설법을 하거나 영창을 하거나 질문을 하거나 질문에 답하거나 옷에 물을 들이거나 옷을 꿰매거나 세탁하거나, 더 나아가 다른 모습들을 만들기를 원한다면,
기초가 되는 禪에서 출정하여,
‘이 만큼의 비구들은 유년의 모습이 되기를’하는 방법으로 준비를 짓고 다시 입정하였다가 출정하여 결의해야 한다.
결의하는 마음과 함께 동시에 각각 원하던 모습으로 된다.
이 방법은 여럿이 되었다가 하나가 된다는 등에도 적용된다.
2. 여러 몸이 되었다가 하나의 몸을 나투는 신통
68. 그러나 이것이 다른 점이다.
이 비구는 이와 같이 여러 형태를 창조한 후에
‘다시 혼자가 된 채 경행하고, 독송하고, 질문을 하리라’고 생각하거나
‘이 절에는 스님들이 많이 살지 않는다.
만약 어떤 자들이 와서
<어디서 이만큼의 닮은 스님들이 왔는가.
틀림없이 장로의 위력일 것이다>라고 나를 알아버릴 것이다.’라는 겸손한 생각으로,
‘혼자가 되리라’고 바라면,
기초가 되는 禪(제4선)에 들었다가 출정하여,
‘혼자가 되리라’고 결의해야 한다.
결의하는 마음과 함께 동시에 혼자가 된다.
이와 같이 하지 않을 때는 미리 결심했던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자동적으로 혼자가 된다.
69.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고’:
나타나게 하고 사라지게 한다는 뜻이다.
이것과 관련하여 『무애해도』 에서 설하셨다.
“나타남이란 다른 것에 의해 가려지지 않고 숨겨지지 않고, 드러나고, 분명해진다는 뜻이다.
사라짐이란 다른 것에 의해 가려지고, 숨겨지고, 닫히고, 둘러싸여진다는 뜻이다.(PS.II.207)”
3. 나타내는 신변
이제 이런 신통을 가진 자가 나타나게 하고 싶으면 어두움을 광명으로 만들고, 덮인 것을 드러나게 하고, 이야에 나타나지 않은 것을 시야에 나타나게 한다.
70. 어떻게?
이 [신통을 가진 자]는 자기가 다른 사람이 가려져 있거나 멀리 있더라도 눈에 보이도록 하고 싶으면 기초가 되는 禪에서 출정하여
‘이 어두운 장소가 환하게 밝아지기를’ 혹은
‘이 가려진 것이 드러나기를’ 혹은
‘시아에 나타나지 않은 이것이 시야에 나타나기를’라고 전향한다.
다음에 준비를 짓고서는 앞서 설한 방법대로 결의한다.
다음에 준비를 짓고서는 앞서 설한 방법대로 결의한다.
결의와 함께 결의한 대로 된다.
멀리 있는 다른 사람들이 볼 수 있고, 자기 스스로도 보기를 원하면 볼 수 있다.
71. 그러면 이전에 누가 이 신통을 나투셨던가?
세존께서는 행하셨다. 세존께서 쭐라수밧다(Cūla-Subhaddā)의 초대를 받으시고 윗사깜마(Vissakamma)가 창조한 500대의 가마와 함께(DhpA.iii.470) 사왓티로부터 7유순이 떨어진 사께따(Sāketa)로 가실 때,
사께따의 주민들은 사왓티의 주민들을 볼 수 있고, 사왓티의 주민들은 사께따의 주민들을 볼 수 있도록 결의를 하셨다.
도시의 중간에 내려 땅을 두 쪽으로 쪼개어 지옥을 보여주셨고, 하늘을 두 쪽으로 갈라서 범천의 세상을 보여주셨다.
72. 그리고 천상으로부터 하강하신 것을 통해서도 이 뜻을 알아야 한다.
세존께서 쌍신변(雙身變)을 나투시고 팔만 사천 중생들을 속박에서 해탈케 하신 뒤
‘과거 부처님들은 쌍신변을 나투신 후 어디로 가셨나?’라고 전향하셨다.
삼십삼천에 이르렀음을 아시고 한 발로 땅의 표면에 서고 나머지 한 발은 유간다라 산에 놓으시고는 다시 첫 번째 발을 들어 수미산 정상을 밟은 대리석 위에서 안거를 지내셨다.
그곳에 모인 1만 우주의 신들에게 아비담마의 해설을 처음부터 시작하셨다.
걸식하러 가실 때에는 한 분의 부처님을 만들어내셨고 그 분이 법을 설하셨다.
73. 세존께서는 나갈라따 치목을 씹어 아노땃따(Anotatta) 호수에서 입안을 가시고 북 꾸루(Uttarakuru)지방에서 걸식하신 후 아노땃따 호숫가에서 공양을 드셨다.
사리뿟따 장로가 그곳에 가서 세존께 인사드렸다.
세존께서는 ‘오늘도 이만큼 법을 설했노라’고 하시면서 장로에게 그 방법을 설해주셨다.
이와 같이 석 달 동안 끊임없이 아비담마를 설하셨다.
그것을 듣고서 8억의 신들이 법을 관통하였다.
74. 세존께서 쌍신변을 나투실 때 군중들이 12유순이나 모여들었다. 세존을 꼭 뵙고 돌아가리라고 야영을 하며 기다렷다. 쭐라아나타삔디까(Cūla-Anāthapiṇḍoka. 작은 급고독) 장자가 그들에게 모든 필수품을 조달했다.
인간들은 세존께서 어디에 계시는지 알기 위해 아누룻다(Anuruddha) 장로께 여쭈었다.
장로는 광명을 확장하여 천안으로 세존께서 삼십삼천에서 안거 중에 게신 것을 보았다. 보자마자 알렸다.
75. 그들은 세존께 인사드리기 위해 마하목갈라나 장로께 청했다.
장로는 대중 가운데서 대지 속으로 잠입하여 수미산을 쪼개어 세존의 발아래 나타나서 세존의 발에 절을 올리고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잠부디빠(염부제)의 사람들이 세존의 발에 절을 올리고 세존을 꼭 친견하고 돌아가겠다고 말합니다’라고,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목갈라나여, 지금 법의 사령관인 큰 형 [사리뿟따]는 어디에 있는가?’
‘스승님이시여, 상까사(Saṅkassa)의 도시에 있습니다.’
‘목갈라나여, 나를 보기를 원하는 자는 내일 아침 상까사로 오도록 하라. 내일이 보름인 포살일이니 대자자(大自恣)를 위해 상까사로 내려갈 것이다.’
76.
‘감사합니다, 세존이시여’라고,
장로는 십력(十力)을 가진 분께 절을 올리고 온 길로 내려가서 사람들의 곁에 이르렀다.
오고 가는 길에 사람들이 그 [수미산]을 볼 수 있도록 결의했다.
이것이 여기서 마하목갈라나 장로가 행하신 나타내보임의 신변이다.
그가 이와 같이 와서 그 소식을 알렸다.
‘[상까사를] 멀다고 생각하지 말고 내일 아침 공양 후에 출발합시다’라고 말했다.
77, 세존께서 제석천왕(Sakka=인드라)에게 말씁하셨다.
‘대왕이여, 내일 아침 인간 세상으로 가오’라고.
천왕은 윗사깜마(Vissa-kamma)에게 명령하였다.
‘여보게, 내일 아침 세존께서 인간계에 가시려고 한다네.
세 개의 계단을 만들게. 하나는 금으로 만들고, 하나는 은으로 만들고, 하나는 수정으로 만들게.’
그는 그렇게 만들었다.
78. 그 다음날 세존께서는 수미산 정상에 서서 동방의 세계를 내려다보셨다.
여러 천들의 우주가 열려서 하나의 평원처럼 선명했다. 동방처럼 서방과 북방과 남방도 내려다보셨고 모두 열려있음을 보셨다. 아래로는 무간지옥에 이르기까지 위로는 색구경천까지 내려다보셨다. 사람들은 그 날을 세상이 열린 날이라고 한다. 사람들도 신들도 보고, 신들도 사람들을 보았다. 사람들은 위로 올려다보지 않았고, 신들은 아래로 내려다보지 않았다. 모두 서로서로 정면에서 보았다.
79. 세존께서는 중간인 수정으로 만든 계단으로 내려오셨다.
여섯 욕계의 신들은 왼쪽의 금으로 만든 계단으로, 정거천(淨居天)과 대범천(大梵天)들은 오른 쪽의 은으로 만든 계단으로 내려왔다.
천왕(제석천)은 의발을 들었고,
[사함빠띠] 대범천은 3유순의 넓이나 되는 하얀 일산을 들었고,
수야마(Suyāma)는 야크의 고리로 만든 불자(佛子)를 들었고,
간다르와의 아들인 빤짜시카(Pañcasikha)는 4분의 3유순의 크기나 되는 흰 빌바 나무로 만든 류트를 들고서 세존께 예배하면서 내려왔다.
그 날 세존을 뵙고서 성불(Buddha-bhāva)하기를 발원(piha) 하지 않고 서있었던 중생은 한 명도 없었다.
이것이 세존께서 행하신 나타내보임의 신통이다.
80. 땀바빤니 섬의 딸랑가라(Talaṅgara)에 머물던 담마딘나(Dhamadinna)장로가 띳사 대사원의탑전에 앉아서
“비구들이여, 세 가지 법을 갖춘 비구는 순수한 도닦음을 행하는 자이다.(A.i.113)”라고,
「아빤나까 경」(Apaṇṇaka Sutta, 純眞經)을 설하면서 아래 방향으로 부채를 펴자 지옥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평원이 되었다.
그 다음에 위를 향해 펴자 범천까지 하나의 평원이 되었다. 장로는 지옥의 두려움으로써 두려움을 일으키고 천상의 행복으로써 열망하게하고는 법을 설했다.
어떤 자들은 에류자가 되었고, 어떤 자들은 일래자, 불환자, 아라한이 되었다.
4. 숨기는 신변
81. 그러나 사라지게 하기를 원하는 자는 광명을 암흑으로 만든다. 덮이지 않은 것을 덮게 하고, 시야에 나타난 것을 시야에서 사라지게 한다.
어떻게?
가려져있지 않거나 곁에 서있더라도 자기나 다른 사람을 눈에 보이지 않도록 하고 싶으면 기초가 되는 禪에서 출정하여
‘이 밝은 장소가 어두워지기를’ 혹은
‘이 드러난 것이 가려지기를’ 혹은
‘시야에 나타난 이것이 시야에서 사라지기를’라고 전향한다.
그 다음에 준비를 짓고서 앞서 설한 방법대로 결의한다.
결의의 마음과 함께 동시에 그대로 된다.
다른 사람들이 비록 가까이 있더라도 볼 수 없고, 자기도 보기를 원하지 않으면 볼 수 없다.
82. 그러면 이전에 누가 이 신통을 나투셨는가?
세존께서 나투셨다.
비록 명문가의 아들 야사(Yasa0가 세존의 곁에 앉아 있었지만 세존께서는 그의 아버지가 그를 보지 못하도록 신통을 나투셨다.(Vin.i.16)
그와 마찬가지로 마하깝삐나(Mahā-Kappina) 왕을 만나러 120유순을 가서 그를 불환과에 이르도록 하고 그의 대신들 천 명은 예류과에 이르게 하셨다.
왕을 따라 아노자(Anojā) 왕비가 천 명의 시녀들과 함께 와서 곁에 앉아있었지만 왕과 그의 대신들을 보지 못하도록 신통을 나투시었다.
‘세존이시여, 왕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라고 그녀가 여쭈었을 때
‘왕을 찾는 것이 더 낫겠는가, 아니면 자기 자신을 찾는 것이 더 낫겠는가?’라고 하셨다.(cf. Vin.i.23))
‘세존이시여, 자기 자신을 찾는 것이 더 낫겠습니다’라고 말하면서,
그녀가 앉아있을 때 천 명의 시녀들과 함께 그녀가 예류과에 이르도록 법을 설하셨다.
그러자 대신들은 불환과에 이르렀고, 왕은 아라한이 되었다.(AA.i.322; DhpA.II.124 참조)
83. 그리고 마힌다(Mahinda) 장로도 이 신통을 나투었으니, 땀바빤니 섬에 도착한 날 자기와 함께 온 다른 사람들을 [데와남삐야] 왕이 보지 못하도록 하였다.(Mv.i.103)
84.
나아가 분명하게 드러내 보이는 모든 나타내보임(āvibhāva)이라 하고,
숨기는 신통은 사라지게 함(tirobhāva) 이라 한다.
이 중에서 분명하게 드러내 보이는 신통에서는 신통도 드러내고 신통을 나투는 자도 드러낸다. 그것은 쌍신변으로 설명해야 한다. 그곳에는 둘 모두 나타내기 때문이다.
“여기 여래께서 쌍신변을 나투신다. 제자들은 그것을 갖추지 못하였다. 상체에서는 불더미를 생기게 하고, 하체에서는 물이 흐르는 것을 생기게 하셨다.(Ps.i.125)”
숨기는 신통에는 오직 신통만 나타내고, 신통을 나투는 자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것은 「마하까 경」(Mahaka Sutta.S.iv.200)과 「브라흐마니만따니까 경」(Brahmanimantanika Sutta, 梵天待經, M49/i.330)으로 설명해야 한다.
그곳에 각각 마하까(Mahaka) 존자와 세존의 신통만 나타나고, 신통을 나투는 자는 나타나지 않는다.
85. 이처럼 말씀하셨다.
“찟따(Citta) 장자가 한 곁에 앉아서 마하까 존자께 이와 같이 말씀드렸다.
‘존자시여, 존자께서 인간을 능가하는 법인 신통변화를 보여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장자여, 그렇다면 마당에 그대의 상의를 펼치고 그 위에 풀 무더기를 흩어놓게.’
‘알겠습니다, 존자시여’라고,
찟따 장자는 마하까 존자께 대답하고 마당에 상의를 펼치고는 그 위에 풀 무더기를 흩어놓았다.
그때 마하까 존자는 절에 들어와서 열쇠구멍과 빗장 사이에서 불길이 나와 풀 무더기만을 태우고 상의는 태우지 않은 그런 신통을 나투었다.(S.iv.290)”
86.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그때 나는 이런 신통을 나투었다.
‘범천과 범천의 측근들과 범천의 무리들이 나의 소리는 듣지만 나를 보지는 못할 것이다’라고 생각하면서 사라져서는 이 게송을 읊었다.
나는 존재에 두려움을 보노라
존재하지 않음을 구하는 자들에서 존재를 보노라.
어떤 존재도 나는 환영하지 않고
즐김을 움켜쥐지도 않는다.(M.i.330)”
5. 장애가 없는 신통
87.
‘벽이나 담이나 산을 아무런 장애 없이 통과하기를 마치 허공에서처럼 한다’(§2주해):
여기서 벽을 통과한다란 벽을 넘어, 벽의 저쪽이란 뜻이다. 이 방법은 나머지 경우에도 적용된다. 벽이란 집의 벽과 동의어이다. 담이란 집과 절과 마을 등을 둘러싼 담이다. 산은 흙으로 된 산이거나 돌로 된 산이다. 아무런 장애 없이란 걸림 없다는 말이다.
‘마치 허공에서처럼’: 허공에 있는 것처럼.
88. 이와 같이 가고자하는 자는 허공의 까시나를 대상으로 입정하였다가 출정하여 벽이나 수미산이나 우주 등에서 어느 하나의 산으로 전향한다.
그 다음에 준비를 짓고는 ‘허공이 되라고 결의해야 한다. 그것은 허공이 된다.
그가 아래로 내려가고자 하거나 위로 올라가고자 하면 그것은 구멍이 되고 꿰뚫으면서 가고자하면 그것은 틈이 된다.
그는 그곳에서 장에 없이 간다.
89. 삼장법사 쭐라아바야 장로는 여기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도반이여, 무엇 때문에 굳이 허공의 까시나를 대상으로 입정하는가?
코끼리, 말 등을 창조하고자하는 자는 코끼리, 말 등의 까시나를 대상으로 입정하는가?
어느 까시나든지 그곳에서 준비를 지은 뒤 여덟 가지 증득에 대한 자유자재가 기준이라네. 그가 원하는 대로 된다네.’
비구들은 말했다.
‘존자시여, 성전에 허공의 까시나만이 전승되어 오기 때문에 반드시 이것을 말해야 합니다.
90. 여기서 이것이 성전이다.
“본래 허공의 까시나의 증득을 얻은 이가 벽을 지나고, 담을 지나고, 산을 지나는 것으로 전향한다.
전향한 뒤 ‘허공이 되라’고 지혜로 결의한다. 허공이 된다.
그는 벽을 지나고, 담을 지나고, 산을 지나 장애 없이 간다.
마치 본래 신통을 갖지 못한 사람들이 벽의 장애물이 없는 곳을 걸림 없이 지나가듯이,
마음이 자유자재를 얻은 신통을 가진 자도 벽을 가로질러 지나고, 담을 지나고, 산을 지나 장애 없이 간다.
마치 허공에 있는 것처럼.(Ps.ii.208)”
91. 만약 이 비구가 결의를 하고 가다가 그 중간에 산이나 나무가 서있다면 다시 입정한 뒤 결의해야 하는가?
나쁠 것은 없다. 그러나 다시 입정한 뒤 결의하는 것은 은사의 곁에 있으면서 의지할 자를 취하는 것과 같은 격이다.
이 비구가 허공이 되라고 결의했기 때문에 허공이 된다.
첫 번째 결의의 힘이 있기 때문에 그가 가는 도중에 온도에서 생긴 다른 산이나 나무가 생겨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다른 신통을 가진 자가 먼저 창조했을 때는 먼저 만들어 낸 것이 우세하다.
그러므로 나중 사람은 그 위나 아래로 가야 한다.
6. 땅 속으로부터 출몰하는 신통
92.
‘땅에서도 떠올랐다. 잠겼다 한다’: 떠올랐다는 것은 위로 나타난다는 뜻이다. 잠겼다는 것은 가라앉는다는 뜻이다. ‘떠올랐다 잠겼다(ummujjanimmujjaṁ)”라는 합성어는 ‘떠오름과 내려감(ummujjañ ca nummujjañ ca)’ 으로 풀이된다.
이와 같이 하고자하는 자는 물의 까시나를 대상으로 입정하였다가 출정한 후
‘이곳의 땅이 물이되라’고 한계를 정한 뒤 준비를짓는다.
그후에 앞서 설한 방법대로 결의 해야한다.
결의와 함께 장소를 한정한 부분 만큼의 땅이 물이된다.
그는 그곳에서 내려가고 올라온다.
93. 여기서 이것이 성전이다.
“본래 물의 까시나의 증득을 얻은이가 땅으로 전향한다. 전향한 뒤 ‘물이 되라’고 지혜로 결의한다.
그것은 물이 된다. 그는 땅속으로 내려가고 올라온다.
마치 본래 신통을 갖지 못한 사람들이 물에서 내려가고 올아오듯이,
마음이 자유자재를 얻은 신통을 가진 자도 땅속으로 내려가고 올라온다.
마치 물 속에 있은 것처럼.(Ps. Ii. 208)”
94. 내려가고 올라오는 것만 할 뿐 아니라 목욕하고, 마시고, 입을 씻고, 소지품을 씻는 등의 가운데서 원하는 것은 모두 할 수 있다.
단지 물로 만들뿐만 아니라 버터, 기름, 꿀, 당밀, 불 등 그가 원하는 것을
‘이것은 이만큼, 저것은 저만큼 되라’고 전향한 뒤 준비를 짓는다.
그 후에 결의한다. 결의한 만큼 그것이 된다.
그것을 가져 그릇에 담을 때 버터기름은 오직 버터기름이고, 식용유 등은 오직 식용유 등이고, 물은 오직 물일뿐이다.
그가 그것에 젖고 싶으면 젖고, 젖고 싶지 않으면 젖지 않는다. 그 땅은 신통을 나툰 그 사람에게 만물이다. 나머지 사람들에겐땅일 뿐이다. 그곳에 사람들이 걸어가기도하고 탈것 등에 타고가기도한다. 경작등도 한다.
만약 그가 ‘그들에게도 물이되라’고원하면 물이된다.
미리 한정한 시간이 경과하면 본래부터 항아리, 호수등에 있던 물을 제외한 나머지 한정한 곳은 모두 땅이된다.
7. 물 위에서 침몰하지 않는 신통
95. ‘물위에서 빠지지 않고’:여기서 물을 밟았을 때 밑으로 가라앉는 것을 빠짐(bhijjamāna)이라 하고, 그와 반대되는 것을 빠지지 않음(abhijjamāna)이라 한다.
이와 같이 가고자하는 자는 땅의 까시나를 대상으로 입정하여 출정한 뒤
‘이곳의 물이 땅이되라’고한계를 정하고는 준비를 짓는다.
그후 앞서 설한 방법대로 결의해야 한다.
결의와 함께 장소를 한정한 부분만큼 그곳에 있는 물이 땅이된다. 그는 그위로 간다.
96. 여기서 이것이 성전이다.
“본래 땅의 까시나의 증득을 얻은 자가 물로 전향한다.
전향한 뒤 ‘땅이 되라’고 지혜로 결의한다. 그것은 땅이 된다.
그는 물 위에서 빠지지 않고 간다.
마치 본래 신통을 갖지 못한 사람들이 갈라지지 않은 땅위에서 가듯이,
마음이 자유자재를 얻은 신통을 가진 자도 물 위에서 빠지지 않고 간다.
마치 땅 위에 있는 것처럼.(Ps.ii.208)”
97. 가는 것뿐만이 아니라 그가 원하는 자세를 취한다.
단지 땅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보석, 금, 산, 나무 등 가운데서 그가 원하는 것을 앞서 설한 방법대로 전향한 뒤 결의한다.
결의한 대로 된다. 그 물은 그 사람에게만 땅이 된다.
다른 사람들에겐 물일뿐이다. 물고기와 거북이와 물새 등은 그곳에서 그들이 원하는 대로 돌아다닌다.
만약 그가 다른 사람에게도 땅이 되기를 바란다면 그는 그렇게 한다. 그러나 미리 한정한 시간이 경과하면 물로 된다.
8. 날아가는 신통
98.
‘가부좌한 채 날아간다’: 가부좌를 한 채 간다.
‘날개 달린 새’: 날개를 가진 새.
이와 같이 하기를 원하는 자는 땅의 까시나를 대상으로 입정하였다가 출정하여 만약 앉은 채 가고 싶으면 가부좌를 할 만큼의장소를 한정하여 준비를 짓는다.
그후 앞서 설한 방법대로 결의 해야 한다.
만약 누워서가고 싶으면 침상 크기만큼,
만약 걸어서가고 싶으면 길의 크기 만큼,
이와 같이 적절한 장소를 한정하고서는 앞서 설한 방법대로 땅이되라고 결의해야 한다.
결의와함께 땅이 된다.
99. 여기서 이것이 성전이다.
“그는 가부좌를 한 상태에서 허공을 날아간다. 마치 날개 달린 새처럼.
본래 땅의 까시나의 증득을 얻은 자가 허공으로 전향한다.
전향한 뒤 ‘땅이 되라’고 지혜로 결의 한다. 그것은 땅이 된다.
그는 허공 가운데서 걷기도 하고, 서기도 하고, 앉기도 하고, 눕기도 한다.
마치 본래 신통을 갖지 못한 사람들이 갈라지지 않은 땅위에서 걷기도 하고 … 눕기도 하듯이,
마음이 자유자재를 얻은 신통을 가진 자도 허공가운데서 걷기도 하고 … 눕기도 한다.”
100. 허공을 날아가고자 하는 비구는 천안을 얻은 자라야 한다.
무슨 이유인가?
가는 도중에 온도로 인해 생긴 산과 나무 등이 있기도 하고 질투를 하는 용과 금시조가 그런 것들을 창조해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을 보기 위해서이다.
이런 것들을 보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기초가 되는 禪에 입정하였다가 출정한 뒤
‘허공이 되라’고 준비를 지은 뒤 결의해야 한다.
101. [삼장법사 쭐라아바야] 장로가 말하였다.
‘도반이여, 무슨 목적으로 다시 증득에 입정하는가?
그의 마음이 이미 삼매에 들어 있지 않은가?
그러므로 어느 곳이든지 허공이 되라고 결의하면 허공이 된다네.’
비록 그분이 이와 같이 말했지만 벽을 장애 없이 지나가는 신통에서 설한 방법대로 해야 한다.
그리고 한적한 곳으로 내려앉기 위해서도 천안을 얻은 자라야 한다.
만약 목욕하는 장소나 마을의 입구 같은 공공장 소에 내리면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된다.
그러므로 천안으로 보고서 적당하지 않은 장소를 피하고 적당한 에 내린다.
9. 손으로 해와 달을 만지는 신통
102.
‘저 막강하고 위력적 태양과 달을 손으로 만져 쓰다듬기도 하며’:
여기서 태양과 달은 4만2천의 유순이나 되는 고도의 운행을 함으로써 그들의 막강함을 알아야 하고, 세 개의 섬을 동시에 비춤으로써 그들의 위력을 알아야 한다.
혹은 이와 같이 고도로 운행하고 빛을 비추기 때문에 그들의 막강함을 알아야 하고, 그 막강함으로써 그들의 위력을 알아야 한다. 만진다는 것은 잡는다,
한 부분에 닿는다는 뜻이다. 쓰다듬는다는 것은 마치 거울의 표면처럼 두루 문지른다는 말이다.
103. 이 신통은 초월지의 기초가 되는 禪을 통해 성취된다.
여기서는 까시나를 대상으로 입정하는 법칙이 없다.
왜냐하면 『무애해도』에 이와 같이 설하셨기 때문이다.
“그는 손으로 저 막강하고 위력적인 태양과 달을 만지고 쓰다듬는다.
여기서 마음이 자유자재에 달한 신통을 가진 자는 … 태양과 달로 전향한다.
전향한 뒤 ‘손의 근처에 있기를 ‘하고 지혜로 결의한다. 그것은 손의 근처에 있게 된다.
그는 앉거나 누워서 손으로 달과 해에 닿고, 만지고, 쓰다듬는다.
마치 본래 신통을 갖지 못한 사람들이 손 가까이에 있는 어떤 물건에 닿고 만지고 쓰다듬듯이,
마음이 자유자재를 얻은 신통을 가진 자도 … 만지고 쓰다듬는다.(Ps.ii.208-9)”
104. 만약 그가 가서 만지기를 원하면 가서 만진다.
그러나 만약 여기 앉거나 누워서 만지기를 원하면 ‘손의 근처에 있기를’이라고 결의한다.
결의한 힘으로 마치 야자열매가 그 줄기로부터 떨어지듯이 손의 근처에 와서 있을 때 그들을 만지거나 손을 늘려서 만진다.
그가 손을 늘릴 때 업에서 생긴 [본래의 손을] 늘리는가 아니면 업에서 생기지 않은 [창조한] 것을 늘리는가?
업에서 생긴 것을 의지하여 업에서 생기지 않은 것을 늘린다.
105. 여기서 삼장법사 쭐라아바야 장로가 말하였다.
‘도반이여, 무엇 때문에 업에서 생긴 것은 커지지도 않고 작아지지도 않는다고 하는가?
비구가 열쇠 구멍 등을 통해 나올 때 업에서 생긴 것이 작아지고, 자기 몸을 크게 만들 때 커지는 것이 아닌가 마하목갈라나 장로처럼.’
난도빠난다 용왕을 길들인 이야기
106. 어느 때 아나타삔디까(Anāthapiṇḍika, 급고독) 장자가 세존의 설법을 들을 후
‘세존이시여, 내일 아침 5백 명의 비구들과 함께 저희 집에서 공양을 드십시오’라고 초대를 하고는 돌아갔다.
세존께서는 승낙하셨다. 낮의 남은 기간과 밤의 일부분이 지난 뒤 이른 새벽에 일만 세계를 둘러보셨다.
그때 난도빠난다(Nandopananda)라는 용왕이 세존의 지혜의 영역에 와있었다.
107.
세존께서
‘이 용왕이 나의 지혜의 영역에 와있구나. 그에게 [삼보를 신뢰함에] 강하게 의지하는 조건이 있는가?’라고 전향하시고는
‘이 용왕은 사견을 가졌고, 삼보에 청정한 믿음이 없다.’고 보셨다.
‘누가 이 용왕을 사견으로부터 벗어나게 할 것인가’라고 전향하시면서 마하목갈라나 장로를 보셨다.
날이 밝아지자 몸에 관한 일을 보시고는 아난다 존자를 부르셨다.
‘아난다여, 여래가 천상으로 간다고 5백 명의 비구에게 알려라.’
108. 그날 용들은 난도빠난다 용왕을 위해 연회장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는 천상의 보석으로 만든 의자에 앉아 천상의 하얀 일산을 쓰고 세 무리의 무희들과 용왕의 권속들에 둘러싸여 천상의 그릇에 담겨진 음식과 마실 것을 쳐다보면서 앉아있었다.
그때 세존께서는 500명의 비구들과 함께 궁전 위를 지나 삼십삼천을 향해 가는 것을 용왕이 볼 수 있도록 하면서 지나가셨다.
109. 그때 난도빠난다 용왕에게 이와 같이 사악한 견해가 일어났다.
‘이들 까까머리 사문들이 우리 궁전 위를 바로 지나 삼십삼천의 세계를 들락날락하는구나.
지금 이후부터 내 머리 위에 발먼지를 뿌리면서 가는 것을 결코 허락하지 않겠다.’
그는 일어나 수미산 기슭에 가서 그의 본래의 몸을 버리고 그의 사리로 수미산을 일곱번 감고 그의 목을 위로 펴서 삼십삼천을 그의 목으로 덮어서 보이지 않게 만들었다.
110. 그때 랏타빨라(Raṭṭhapāla)존자가 세존께 이와 같이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전에는 이 장소에 서서 수비산을 볼 수 있었고, 수미산의 성벽을 볼 수 있었고, 삼십삼천을 볼 수 있었고, 웨자얀따(Vejayanta) 궁전을 볼 수 있었고, 웨자얀따 궁전 위의 깃발을 볼 수 있었습니다.
세존이시여, 그런데 무엇 때문에 지금은 수미산도 보이지 않고 … 웨자얀따 궁전 위의 깃발도 보이지 않습니까?’
‘랏타빨라여, 난도빠난다라는 용왕이 우리에게 화가 나서 수미산을 그의 사리로 일곱 번 감고 목을 위로 펴서 그것을 막아 어둡게 만들고 서있다.’
‘세존이시여, 제가 그 자를 길들이겠습니다.’
세존께서는 승낙치 않으셨다.
그때 밧디야(Bhaddiya) 존자와 라훌라(Rāhula) 존자와 모든 비구들이 차례대로 일어나서 청을 드렸다.
그러나 세존께서는 승낙하지 않으셨다.
111. 마지막으로 마하목갈라나 장로가
‘세존이시여, 제가 길들이겠습니다’라고 말씀드렸다.
‘목갈라나여, 그대가 길들이게’라고 세존께서 승낙하셨다.
장로는 본래의 몸을 버리고 큰 용왕의 모습을 창조하여 난도빠난다를 자기의 사리로 14번 감고 난도빠난다의 몸 위에 자기의 목을 편 뒤 수미산에 대고 압착했다.
용왕은 연기를 뿜었다.
장로도 ‘네 몸에만 연기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몸에도 있다’고 말하면서 연기를 내뿜었다.
용왕의 연기는 장로를 괴롭히지 못했지만 장로의 연기는 용왕을 괴롭혔다.
그 다음에 용왕은 불꽃을 내뿜었다.
장로도 ‘너의 몸에만 불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몸에도 역시 불이 있다’고 말하면서 불꽃을 내뿜었다.
용왕의 불은 장로를 괴롭히지 못했지만 장로의 불은 용왕을 괴롭혔다.
112.
용왕은 ‘이 자가 나를 수미산에다 대고 압착한 뒤 연기와 불꽃을 내뿜는구나’라고 생각하며,
‘당신은 누구십니까?’라고 물었다.
‘난다여, 나는 목갈라나다.’
‘존자시여, 당신의 비구의 모습을 되찾으십시오.’
장로는 그 용의 몸을 버리고 용왕의 오른쪽 귓구멍으로 들어가서 왼쪽 귓구멍으로 나오고, 왼쪽 귓구멍으로 들어가서 오른쪽 귓구멍으로 나왔다.
그와 마찬가지로 오른쪽 콧구멍으로 들어가서 왼쪽 콧구멍으로 나오고, 왼쪽 콧구멍으로 들어가서 오른쪽 콧구멍으로 나왔다.
그 다음에 용왕이 입을 열었다. 장로는 입으로 들어가서 뱃속에서 동쪽으로 서쪽으로 경행핬다.
113.
세존께서는 ‘목갈라나여, 목갈라나여, 조심하라. 이 용왕은 큰 신통을 가졌다’라고 하셨다.
장로는 ‘세존이시여, 저는 네 가지 성취수단(如意足)을 닦고, 많이 [공부]짓고, 수레로 삼고, 기초로 삼고, 확립하고, 굳건히 하고, 부지런히 닦았습니다.
세존이시여, 난도빠난다 뿐만 아니라 난도빠난다 같은 용왕 백, 천, 백 천도 길들일 수 있습니다’라고 말씀드렸다.
114. 용왕은 생각했다.
‘들어갈 때는 보지를 못했다. 이제 나올 때에는 그를 이빨 사이에 넣고 씹어 물어야지’라고 생각하고,
‘스님이시여, 밖으로 나오세요. 배 안에서 위 아래로 경행하면서 저를 괴롭히지 마세요’라고 했다.
장로는 나와서 밖에 서있었다.
용왕은 ‘이사람이구나’라고 보자마자 코로 질풍을 날렸다.
장로는 제4선에 들었다.
그 바람은 장로의 몸 털 하나도 움직이지 못했다.
나머지 비구들도 [그때 장로가 나투었던] 신통을 처음부터 모두 나툴 수 있었지만 이[코로 질풍을 날리는] 곳에 이르러서는 이처럼 빨리 알아차린 뒤 입정할 수 없다고 아시고 세존께서 그들에게 용왕을 길들이는 것을 승낙치 않으셨다고 한다.
115. 용왕은 ‘내가 콧속의 질풍으로 이 사문의 몸털 하나도 움직일 수 없구나. 이 사문은 큰 신통을 가진 자로구나’라고 생각했다.
장로는 그 몸을 버리고 금시조로 변하여 금시조의 질풍을 보이면서 용왕을 쫓아갔다.
용왕은 그 몸을 버리고 동자의 모습으로 변하여
‘존자시여, 당신께 귀의합니다’라고 말하면서 장로의 발에 절을 올렸다.
장로는 ‘난다여, 스승님이 오셨다. 이리 오너라. 가서 뵙자’하면서,
용왕을 항복시키고 독이 없게 만든 뒤 세존의 곁으로 데리고 갔다.
116. 용왕은 세존께 절을 올리고
‘세존이시여, 당신께 귀의합니다’라고 했다.
세존께서는 ‘용왕이여, 행복하라’고 말씀하시고는, 비구 대중에 싸여 아나타삔디까의 집으로 가셨다.
아나타삔디까는 ‘세존이시여, 무슨 일로 늦게 오셨습니까?’라고 여쭈었다.
‘목갈라나와 난도빠난다 사이에 전쟁이 있었다네.
‘세존이시여, 누가 이기고, 누가 졌습니까?’
‘목갈라나가 이기고 난도빠난다가 졌다네.’
아나타삔디까는 ‘세존이시여, 세존께서 7일 동안 빠짐없이 제가 공양을 올리는 것과, 7일 동안 장로를 공경하는 것을 허락해주십시오’라고 말씀드린 뒤,
7일 동안 부처님을 위시한 500명의 비구들에게 큰 경의를 표했다.
117. 이와 같이 난도빠난다를 항복할 때 만든 큰 몸과 관련하여 이렇게 말했다.
‘자기 몸을 크게 만들 때는 그 몸이 커지는 것이 아닌가?
마치 마하목갈라나 장로처럼’(§105)
이와 같이 설했지만 비구들은 업에서 생긴 것을 의지해서 업에서 생기지 않은 것을 늘린다고 대답했다.
여기서 이것이 옳다.
[”즉 업에서 생긴 물질을 의지하여 업에서 생기지 않은 물질을 증대시킨다는 뜻이다. 업에서 생긴 것은 마음과 온도에서 생기지 않기 때문이다.
혹은 업에서 생긴 것은 항상 감각기능과 연결되어있는 것을 의미한다. 하여 그 업에서 생긴 것을 그와 같이 늘리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러므로 설한 대로 늘리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나의 상속에서 업에서 생긴 물질과 업에서 생기지 않은 물질이 마티 혼합된 것처럼 일어난다해도 실제로는 혼합된 것이 아니다.
마치 한 파인트 분량의 우유를 여러 파인트 분량의 물에 부었을 때 비록 우유가 완전히 섞여 모든 곳에 분명히 있지만 그 우유가 많아진 것이 아니다. 오직 물이 많아진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업에서 생긴 것과 업에서 생기지 않은 것이 아니다. 신통의 힘으로 마음에서 생긴 것과 그것의 영향으로 온도에서 생긴 것이 늘어난다고 알아야 한다.]
118. 그가 이와 같이 했을 때 태양과 달을 만질 뿐만 아니라,
만약 그가 원한다면 발 올려놓는 바침을 만들어 발을 올려놓을 수도 있고, 의자를 만들어 앉을 수도 있고, 침상을 만들어 누울 수도 있고, 덧베개를 만들어 기댈 수도 있다.
한 사람이 이와 같이 하듯이 다른 사람도 그와 같이 할 수 있다.
수백 수천의 비구들이 이와 같이 할 때 그들 각각이 그와 같이 성취한다.
태양과 달의 운행과 빛을 발하는 것도 전과 같이 한다.
마치 천 개의 접시에 물을 가득 담아 놓으면 그 각각의 접시에 동시에 월륜이 나타나지만 달의 운행과 빛을 발함은 본래와 같듯이 이 신통도 그와 같다.
10. 몸이 자유자재한 신통
119.
‘범천의 세계에 이르기까지’: 범천의 세계까지 한정을 지은 뒤,
‘몸의 자유자재함을 발휘한다’:
범천의 세계에서 그는 몸으로 자기의 자유자재를 얻는다.
이 뜻은 성전에 따라 알아야 한다.
여기서 이것이 성전이다.
“범천의 세계에 이르기까지 그는 몸의 자유자재함을 발휘한다.
만약 마음의 자유자재를 얻은 신통을 가진 자가 범천의 세계를 가고자하면 비록 멀지만 ‘가까이에 있기를’라고 가까이 있기를 결의한다. 그것은 가까이 있게 된다.
가깝지만 ‘멀리 있기를’하고 멀리 있기를 결의한다. 그것은 멀리 있게 된다.
많은 것이 적어지도록 ‘적게 있기를’라고 결의한다. 그것은 적어진다.
적은 것이 많아지도록 ‘많이 있기를’하고 결의한다. 그것은 많아진다.
신성한 눈(天眼)으로 범천의 형상을 본다. 신성한 귀의 요소(天耳界, 天耳通)로 범천의 소리를 듣는다. 남의 마음을 아는 지혜(他心通)로 범천의 마음을 안다.
만약 마음의 자유자재를 얻은 신통을 가진 자가 몸을 볼 수 있게 하여 범천의 세계를 범천의 세계를 가고자 하면 몸으로 마음을 변화시켜야 하고, 몸으로 마음을 결의해야 한다.
몸으로 마음을 변화시키고 몸으로 마음을 결의하고는 행복의 인식과 가벼움의 인식에 든다.
그는 볼 수 잇는 몸으로 범천의 세계에 간다.
만약 마음의 자유자재를 얻은 신통을 가진 자가 몸을 볼 수 없게 하여 범천의 세계를 가고자 하면 마음으로 몸을 변화시켜야 하고, 마음으로 몸을 결의해야 한다.
마음으로 몸을 변화시키고 마음으로 몸을 결의하고는 행복의 인식과 가벼움의 인식에 든다.
그는 볼 수 없는 몸으로 범천의 세계에 간다.
그는 그 범천의 면전에서 마음으로 이루어졌고, 사지를 모두 갖추었고, 감각기능(根)이 구족한 형상을 창조한다.
만약 신통을 가진 자가 경행하면 그 창조된 몸도 그곳에서 경행한다.
만약 그 신통을 가진 자가 서있으면 … 앉아있으면 … 누워있으면 그 창조된 몸도 그곳에서 누워있다.
만약 그 신통을 가진 자가 연기를 뿜으면 … 불꽃을 내뿜으면 … 법을 설하면 … 질문을 하면 … 질문을 받아 답한다.
만약 그 신통을 가진 자가 그 범천과 함께 서있거나, 이야기를 하거나, 토론을 하면 그 창조된 몸도 그곳에서 그 범천과 함께 서있고, 이야기하고, 토론을 한다.
신통을 가진 자가 하는 대로 그 창조된 몸도 그와 같이 한다.(Ps.ii.209-10)”
120.
‘멀지만 가까이 있기를 결의한다’:
기초가 되는 禪에서 출정하여 멀리 있는 하늘 세계와 범천의 세계로 전향한다.
‘가까이 있기를’하고, 전향한 뒤 준비를 짓고,
다시 입정하여 ‘가까이 있기를’하고 지혜로 결의한다.
그것은 가까이 있게 된다.
이 방법은 나머지 구절에도 적용된다.
121. 누가 멀리 있는 것을 잡아서 가까이 있게 했냐? 세존이시다. 세존께서는 쌍신변을 나투시고 천상 세계로 가실 때 유간다라와 수미산을 가까이 있게 하고는 땅의 표면으로부터 한 발은 유간다라에 놓고 다른 발은 수미산의 정상에 두셨다.
122. 다른 자는 누가 했는가?
마하목갈라나 장로이다. 장로가 사왓티에서 공양을 드시고 그곳을 떠나실 때 12유순의 길이나 되는 대중에게 30유순의 상까사 도시로 가는 길을 축소한 뒤 그 순간에 도착하게 했다.
123. 나아가 땀바빤니 섬의 쭐라사뭇다(Clūla-Samudda) 장로도 행했다.
흉년이 들었을 때 아침에 장로의 곁에 700명의 비구들이 왔다.
장로는 ‘이 큰 비구대중이 어디로 탁발을 가야할까’라고 생각할 때,
땀바빤니 섬의 전역에서는 갈만한 곳을 보지 못하고 바다 건너 빠딸라뿟따가 가능할 것이라고 보았다.
장로는 비구들에게 의발을 수하게 하고는
‘도반들이여, 여기 탁발을 가세’라고 말하고
땅을 축소하여 빠딸리뿟따로 갔다.
그들은 ‘존자시여, 여기가 어느 도시입니까?’라고 여쭈었다.
‘도반들이여, 빠딸라라뿟따일세.’
‘존자시여, 빠딸라뿟따는 아주 멀리 있습니다.’
‘노련한 장로들은 먼 것을 가깝게도 만든다네.’
‘존자시여, 큰 바다가 어디 있습니까?’
‘도반들이여, 그대들은 도중에 푸른 물이 흐르는 개천 하나를 건너오지 않았는가?’
‘존자시여, 그렇습니다. 그러나 바다는 크지 않습니까?’
‘도반들이여, 노련한 장로들은 큰 것도 작게 만든다네.’
124. 그 장로처럼, 띳사닷따(Tissadatta) 장로도 저녁애 목욕을 한 뒤 상의를 입고 ‘보리수에 예배하리라’는 생각이 일어났을 때 이와 같이 했다.
125. 누가 가까운 것을 멀게 만들었는가?
세존이시다. 세존께서는 그분 가까이 있던 앙굴리말라를 멀리 있도록 만드셨다.(M.ii.99참조)
126. 누가 많은 것을 적게 만들었는가?
마하깟사빠(Mahā-Kassapa, 대가섭) 장로이다. 왕사성의 축제일에 500명의 소녀들이 달떡을 가지고 축제를 즐기기 위해 가는 도중에 세존을 뵙고 아무것도 도리지 않았다.
그러나 뒤에 오는 장로를 뵙고는
‘우리 장로께서 오신다. 떡을 드려야지’하면서,
모두 떡을 가지고 장로께 다가갔다.
장로는 발우를 꺼내어 모든 것이 오직 발우 하나에 가득 담기도록 만들었다.
세존께서는 장로를 기다리시며 앞에 앉아 계셨다. 장로는 가져와서 세존께 올렸다고 한다.
127. 일리사(ⅠIIīsa)장자의 일화에 의하면(Jā.i.348; DhpA.i.372) 마하 목갈라나 장로는 적은 것을 많게 만들었다.
까까왈리야(Kākavaliya)의 일화에 의하면 세존께서도 그렇게 하셨다.
마하깟사빠 장로가 7일 동안 멸진정에 들었다가 출정하여 가난한 자를 복되게 하고자 까까왈리야라는 가난한 사람의 대문에 서있었다.
그의 부인이 장로를 보고는 자기 남편을 위해 준비해 놓은 소금기 없는 시큼한 죽을 발우에 떠드렸다.
장로는 그것을 가지고 세존의 손에 드렸다.
세존께서는 그것이 많은 비구대중에게 충분하도록 결의하셨다.
하나의 발우에 가져온 것이 온 대중에게 충분하였다.
까까월리야는 7일째 되는 날 장자가 되었다고 한다.
128. 적은 것을 많게 만들뿐만 아니라 단 것을 달지 않게. 달지 않은 것을 달게 하는 등에서 무엇이든 그가 원하는 것을 신통을 가진 자는 모두 성취한다.
마하아눌라(Mahā-Anuāḷa) 장로는 많은 비구들이 탁발을 가서 반찬도 없이 오직 밥만 얻어서 강가의 강둑에 앉아서 공양하는 것을 보고
‘강가의 물이 버터기름이 되라’고 결의한 뒤,
사미들에게 기미를 알아차리게 했다.
그들은 그릇에다 가져와서 비구 대중에게 올렸다. 모두 맛있는 버터기름과 함께 먹었다고 한다.
129.
‘신성한 눈’(天眼)으로:
여기 [인간세계에] 남아있으면서 빛을 확장하여 그 범천의 형상을 본다. 여기 남아있으면서 범천이 말하는 소리를 듣고, 마음을 안다.
130.
‘몸으로 마음을 변화시키고’:
물질로 된 몸으로 마음을 변화시킨다.
기초가 되는 禪의 마음을 취하여 몸에다 둔다. 마음이 몸을 따르도록 한다. 그것은 천천히 간다. 왜냐하면 몸의 움직임은 [마음보다] 느리기 때문이다.
131.
‘행복의 인식과 가벼움의 인식에 든다’:
신통의 마음과 함께 생긴 행복의 인식과 가벼움의 인식에 이르고, 들고, 닿고, 얻는다.
신통의 마음이란 [신통의] 기초가 되는 禪을 대상으로 가진다. 행복의 인식이란 평온과 관련된 인식이다.
왜냐하면 평온은 고요하기 때문에 행복이라고 한다. 그와 동일한 인식이 가벼움의 인식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장애들(五蓋)과 일으킨 생각(尋) 등 반대되는 것으로부터 벗어나기 때문이다.
그가 그것에 이를 때 그의 몸도 솜털처럼 가볍다. 그는 이와 같이 가볍다. 그는 이와 같이 바람에 둥둥 떠다니는 솜털과 같이 가벼운, 볼 수 있는 몸으로 범천의 세계에 간다.
132. 이와 같이 갈 때 만약 원하면 땅의 까시나로 허공에 길을 만들어 걸어서 가기도 하고, 만약 원하면 바람의 까시나로 바람이 되라고 결의하여 솜털처럼 바람을 통해서 간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가고자하는 욕구(gantu-kāmatā)이다. 가고자하는 욕구가 있을 때 이처럼 마음을 결의한 자는 힘에 의해 들려서 마치 궁수가 쏜 화살처럼 볼 수 있는 몸으로 간다.
133.
‘마음으로 몸을 변화시키고’:
몸을 취하여 마음에다 놓는다. 몸이 마음을 따르도록 한다. 빨리 간다. 왜냐하면 마음의 움직임은 [몸보다] 빠르기 때문이다.
‘행복의 인식과 가벼움의 인식에 든다’:
신통의 마음과 함께 생긴 행복의 인식과 가벼움의 인식에 든다. 이 신통의 마음은 물질적인 몸을 대상으로 가진다. 나머지는 앞서 설한 방법대로 알아야 한다. 그러나 마음이 가는 것이다.
134.
‘그런데 그가 이처럼 볼 수 없는 몸으로 갈 때, 결의하는 마음이 일어나는 순간에 가는가, 그것이 머무는 순간에 가는가, 아니면 그것이 무너지는 순간에 가는가?’라는 질문에,
‘세 순간에 [모두] 간다’고 장로가 말했다.
자기가 직접 가는가, 아니면 창조한 것을 보내는가?
원하는 대로 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자기가 직접 가는 것이 전승되어 온다.
135.
‘마음으로 이루어졌고’: 결의하는 마음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마음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감각기능(根)이 구족한’: 이것은 눈, 귀 등의 형상으로 설했다. 참조된 형상에는 감성(感性)이 없다.
‘만약 신통을 가진 자가 경행하면, 그 창조된 몸도 그곳에서 경행한다’:
여기서 언급한 이런 것들 것 모두 제자들이 창조한 몸에 대해서 설한 것이다.
부처님께서 창조하신 몸은 세존께서 하는 대로도 하고, 또한 세존이 원하는 것에 따른 다른 것도 한다.
136. 그 신통을 가진 자가 여기 [인간세계에] 있으면서 천안으로 그 범천의 형상을 보고, 천이통으로 소리를 듣고, 타심통으로 마음을 알 때 그는 몸의 자유자재를 얻지 못한다.
그 신통을 가진 자가 여기 [인간세계에] 있으면서 그 범천과 함께 서있거나, 이야기를 하거나, 토론을 할 때도 그는 몸의 자유자재를 얻지 못한다.
그가 멀리 있는 것을 가까이 있으라고 결의하는 등의 결의를 할 때도 그는 몸의 자유자재를 얻지 못한다.
볼 수 있는 몸이나 볼 수 없는 몸으로 범천의 세계에 갈 때도 그는 몸의 자유자재를 얻지 못한다.
그는 ‘그 범천의 면전에서 형상을 창조한다’(§119)라는 등의 방법으로 설한 것을 행할 때에 몸의 자유자재를 얻었다고 한다.
나머지는 여기서 몸의 자유자재를 얻기 전의 단계를 보여주기 위해 설했다.
이것이 결의에 의한 신통(§45)이다.
137. 그러나 변형의 신통과 마음으로 [다른 몸을] 만드는 신통(§§22; §§45-6)의 차이점은 다음과 같다.
먼저 변환을 나투고자하는 자는 [다음 인용문의] 동자의 모습 등에서 그가 원하는 것을 결의해야 한다.
“그는 본래의 모습을 버리고 동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혹은 용의 모습, 금시조의 모습, 아수라의 모습, 제석의 모습, 신의 모습, 범천의 모습, 바다의 모습, 산의 모습, 사자의 모습, 호랑이의 모습, 표범의 모습, 코끼리, 말, 차, 보병을 보여준다. 갖가지의 군대를 보여준다.(Ps.ii.210)”
138. 결의할 때 땅의 까시나 등 가운데서 어떤 하나를 대상으로 가지고, 초월지의 기초인 제4선에서 출정하여 자기의 모습을 동자로 전향해야 한다.
전향한 후 준비를 짓고 다시 입정하였다가 출정하여
‘이러한 모습의 동자가 되리라’라고 결의해야 한다.
결의의 마음과 함께 동자가 된다.
마치 데와닷따(Devadatta)가 한 것처럼. 이 방법은 모든 곳에 적용된다.
코끼리를 보여준다는 등에서는 외부의 코끼리 등을 보여주는 것으로 설했다.
여기서는 ‘내가 코끼리가 되리라’고 결의하지 않고 ‘코끼리가 있어라’라고 결의해야 한다.
말 등에서도 이 방법이 적용된다.
이것이 변형의 신통이다.
139. 마음으로 [다른 몸을] 만드는 신통을 나투고자하는 자는 기초가 되는 禪에서 출정하여 먼저,
앞서 설한 방법대로 몸으로 전향하고는 ‘구멍이 있기를’이라고 결의한다. 그러면 구멍이 있게 된다.
그때 자기 몸속에서 다른 몸으로 전향하고 준비를 짓는다.
그 후 앞서 설한 방법대로 결의한다. 그의 속에 다른 몸이 생긴다. 그는 그것을 끌어낸다. 마치 문지풀에서 새순을, 칼집에서 칼을, 허물에서 뱀을 끌어내듯이.
그러므로 이와 같이 설하셨다.
“여기 비구는 이 몸에서, 마음으로 이루어졌고, 사지를 모두 갖추었고, 감각기능이 구족한 다른 형상의 몸을 창조한다.
예를 들면, 사람이 문자 풀에서 새순을 뽑아내면서 이렇게 생각하는 것과 같다.
‘이것은 문자이고, 이것은 새순이다. 문자와 새순은 서로 다르다. 문자로부터 새순을 뽑아내었다.’라고.(Ps.ii.210-11)”
여기서 마치 새순 등이 문자 풀 등과 비슷하듯이, 마음으로 만들어진 형상도 신통을 가진 자와 닮았다.
그러므로 이것을 보여주기 위해 이 비유를 설했다.
이것이 마음으로 [다른 몸을] 만드는 신통이다.
어진 이를 기쁘게 하기 위해 지은 청정도론에서
신통변화(神足通)에 관한 해설이라 불리는
제12장이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