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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달마장현종론 제24권
5. 변업품⑦
5.10. 시류(施類)ㆍ계류(戒類)ㆍ수류(修類)의 세 가지 복업사(福業事)[2]
3) 계류(戒類)의 복업사
이상 시류(施類)복업사에 대해 이미 분별하였다.
이제 마땅히 계류(戒類)의 복업사에 대해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범계(犯戒)와 차죄(遮罪)에서 떠나는 것을
‘계(戒)’라고 하는데, 여기에는 각기 두 가지가 있다.
그리고 범계와 그 원인에 의해 파괴되지 않으며
대치와 멸(滅)에 의지한 것 등을 ‘청정계’라고 한다.
논하여 말하겠다.
범계(犯戒)라고 하는 말은, 이를테면 온갖 불선업의 색으로서, 여기(본송)서는 살생으로부터 잡예어에 이르는 성죄(性罪)를 ‘범계’라고 말하였다.
차죄(遮罪)란 이를테면 부처님께서 하지 못하도록 한 업으로서, 때 아닌 때에 먹는 것[非時食] 따위이니, 이것은 비록 그 자체가 죄는 아닐지라도 부처님께서 정법과 유정을 지키기 위해 별도의 뜻에서 하지 못하게 한 것이다.39) 그리고 수계(受戒)한 자가 이를 범하게 되면 이 역시 ‘범계’라고 하지만, [여기서는] 다만 성죄와 구별하기 위해 ‘차죄’라는 명칭을 설정하였을 뿐이다.
바로 이 같은 성죄와 차죄를 떠나는 것을 다같이 ‘계(戒)’라고 이름한다. 그리고 여기에는 각기 두 가지가 있으니, 말하자면 표업과 무표업이 바로 그것으로, [계는] 신ㆍ어업을 자성으로 삼기 때문이다.
계(戒)가 네 가지 덕을 갖출 경우 청정계(淸淨戒)라고 일컬을 수 있지만, 그 중 어느 하나라도 결여할 경우 청정계라고 이름하지 않는다.
여기서 네 가지 덕이란,
첫 번째로는 범계로 인해 파괴되지 않은 것이니, 여기서 범계라고 하는 것은 [우연히 혹은 무심코 범한 것이 아니라] 살펴 헤아려 범하는 것[審思犯]을 말한다.
두 번째로는 그 같은 [범계의] 원인으로 인해 파괴되지 않은 것이니, 여기서 그 같은 [범계의] 원인이란 탐 등의 번뇌와 수번뇌를 말한다.
세 번째로는 대치(對治)에 의지하는 것이니, 이를테면 염주(念住) 등에 의지한 것을 말한다. 즉 이것은 범계와 그 원인을 능히 대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네 번째로는 멸(滅)에 의지하는 것이니, 이를테면 열반에 의지한 것을 말한다. 즉 [계는] 열반으로 회향하기 위한 것이지 재물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40)
그리고 [본송에서] ‘등’이라고 말한 것은 이밖에 다시 이설(異說)이 있음을 나타내기 위해서였다.
즉 어떤 이는 설하기를,
“계의 청정은 다섯 가지 원인에 의해 [성취되니],
첫째는 근본업도가 청정한 것[根本淨]이고,
둘째는 권속 즉 가행과 후기가 청정한 것[眷屬淨]이고,
셋째는 욕심(欲尋) 등에 의해 침해되지 않는 것[非尋害]이고,
넷째는 염주(念住)에 섭수되는 것[念攝受]이고,
다섯째는 적정(寂靜)으로 회향하는 것[廻向寂]이 바로 그것이다”라고 하였다.41)
4) 수류(修類)의 복업사
계류(戒類)의 복업사에 대해 이미 분별하였다.
이제 마땅히 수류(修類)의 복업사에 대해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등인(等引)의 선법을 ‘수(修)’라고 이름하니
마음에 매우 잘 훈습되어 스며들기 때문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등인(等引)의 선법(善法)이란 이를테면 선정 중에 나타나는 등지(等持,즉 心一境性의 三摩地) 자체와 그것의 구유법(俱有法)을 말하는 것으로, 이를 ‘수’라고 이름한 것은 매우 잘 마음에 스며들기 때문이다. 즉 ‘수’란 바로 훈습의 뜻이다. 마치 호마(胡摩,참깨)의 꽃향기가 호마에 훈습되듯이, 온갖 선정에서의 선법은 마음의 상속에 매우 잘 훈습되어 온갖 덕의 종류[德類]를 성취하게 하지만, 선정에 들지 않고 획득되는 선법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선정의 선법만을 독립적으로 ‘수’라고 이름한 것이다.
5) 계류ㆍ수류복업사의 과보
앞에서 보시의 복은 능히 크나큰 부를 초래한다는 사실에 대해 분별하였다. 그렇다면 계류와 수류의 두 가지 복업사에 의해 초래되는 과보는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계류와 수류는 뛰어나니, 순서대로
생천(生天)과 해탈의 과보를 초래한다.
논하여 말하겠다.
계류의 복업사는 생천, 즉 하늘에 태어나는 과보를 초래하고, 수류의 복업사는 해탈의 과보를 초래한다.
그리고 [본송에서] ‘뛰어나다’고 말한 것은, 뛰어난 것에 대해 말하자면 그렇다고 하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해서였다. 즉 보시도 역시 능히 생천의 과보를 초래하지만 [생천의 과보를 초래하는] 뛰어난 것으로서 ‘계’를 설한 것이며, 지계(持戒)도 역시 능히 이계(離繫)의 과보를 초래하지만 [이계의 과보를 초래하는] 뛰어난 것으로서 ‘수(즉 修定)’를 설한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계’와 ‘수’도 역시 크나큰 부를 초래하지만 [크나큰 부를 초래하는] 뛰어난 것으로 보시를 설한 것이니, 예(例)에 준하여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6) 범복(梵福)의 양과 그 과보
경에서 설하기를,
“네 사람은 능히 범복(梵福)을 낳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42)
여기서 네 사람이란
첫째는 여래의 타도(馱都)에 공양하기 위해 솔도파(窣堵波)가 아직 세워지지 않은 곳에 그것을 세우는 자이며,43)
둘째는 사방승가(四方僧伽)에 공양하기 위해 절을 짓고 원림(園林)을 보시하며, 네 가지 물건을 공급하는 자이며,44) 셋째는 화합이 깨어진 불제자들을 능히 화합시키는 자이며, 넷째는 유정에 대해 널리 자정(慈定) 등을 닦는 자이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이의 범복의 양은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1겁 동안 하늘에 태어나는 복 따위를
1범복(梵福)의 양이라고 한다.
논하여 말하겠다.
유여사(有餘師)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45)
“복업에 따라 능히 1겁 동안 하늘에 태어나 온갖 쾌락을 향수하니, 이것을 1범복의 양이라고 한다. 즉 그에게 초래된 쾌락을 향수하는 시간이 범보천(梵輔天)의 1겁의 수명과 동일하기 때문이니,46)
다른 부파의 어떤 가타(伽他)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믿음과 정견을 가진 이로서
열 가지 뛰어난 행[勝行]을 닦은 자는
바로 범복(梵福)을 낳게 될 것이니47)
1겁 동안 하늘의 쾌락을 얻기 때문이다.”
이미 욕탐을 떠난 자로서 4무량심을 닦은 이는 상계의 하늘에 태어나 1겁의 수명동안 쾌락을 향수한다. 그러나 만약 아직 욕탐을 떠나지 않은 자로서 솔도파를 건립하고, 절을 짓고 승가를 화합시키며, 능히 자(慈) 등의 가행을 부지런히 수습한 이라면, 그들도 역시 4무량의 근본을 닦은 자와 마찬가지로 1겁 동안 하늘의 쾌락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유여사는 설하기를,
“이(1범복)는 [앞서] 보살의 묘상업(妙相業)을 분별하면서 언급한 1복의 양과 같다”라고 하였다.48)
7) 법시(法施)
계경에서 설하기를,
“보시에는 간략히 두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재시(財施)이며, 둘째는 법시(法施)이다”라고 하였다.
재시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법시란 무엇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법시란 염오하지 않은 마음으로
참답게 계경 등을 분별하는 것을 말한다.
논하여 말하겠다.
만약 온갖 유정들을 위해 염오하지 않은 마음으로써 능히 참답게 계경 등을 분별하고, 올바른 이해를 낳게 하였다면, 이것을 일컬어 ‘법시’라고 한다.
[본송에서] ‘참답게[如實]’라고 하는 말을 설한 것은 법시를 베푸는 이가 계경 등을 이해함에 있어 전도됨이 없어야 한다는 사실을 나타내며, ‘염오하지 않은 마음’이라고 하는 말을 설한 것은 법시를 베푸는 이는 [자신의] 이양(利養)이나 공경, 명예를 희구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다시 말해 시주가 자신의 이양 등을 희구하여 계경을 분별하였다면), 자신이나 타인 모두의 복이 모두 줄어들게 될 것이다.
그리고 ‘계경 등’이란 그 밖의 열한 가지를 함께 [취한다는] 말로서, 바로 계경 내지는 논의(論議)를 나타낸다.
① 방론―12분교(分敎)와 3장(藏)
계경(契經)이라 함은, 이를테면 세속(世俗)과 승의(勝義)의 견실한 이치의 말씀을 순서에 따라 전체적으로 포섭하고 용납(容納)한 것을 말하니, 이와 같은 계경은 바로 부처님께서 설한 것이다. 혹은 부처님의 허락 하에 불제자들이 설한 것이다.49)
응송(應頌)이라 함은, 이를테면 뛰어나고 미묘한 문구와 언사를 모아 앞의 계경에서 설한 바에 따라 기술하고 찬탄한 것을 말한다.
그런데 어떤 이는 설하기를,
“이 역시 불요의경(不了義經)이다”라고 하였다.50)
기별(記別)이라 함은, 이를테면 다른 이의 물음에 따라 대답하고 분별 분석한 것[辯柝]을 말하니, 예컨대 파라연나(波羅衍拏) 따위 중에서 분별한 바와 같다.
혹은 과거[曾]ㆍ미래[當]ㆍ현재에 존재하는 온갖 진실된 뜻을 분별하는 말을 모두 기별이라고 이름하기도 한다.51)
그런데 어떤 이는 설하기를,
“이는 바로 불설(佛說)로서 요의경이다”라고 하였다.52)
풍송(諷頌)이라 함은, 이를테면 뛰어나고 미묘한 문구와 언사를 모아, 앞의 계경에서 설한 바에 따라 기술하는 것이 아니면서 찬탄하고 노래한 것을 말하니, 경우에 따라 2구(句)ㆍ3구ㆍ4구ㆍ5구ㆍ6구 등으로 이루어진다.53)
자설(自說)이라 함은, 이를테면 어떤 이의 요청에 의해 설해진 것이 아니라 세존께서 정법을 오래 머물게 하기 위해 희유하고 기특한 일들을 보시고 기쁜 마음에서 스스로 설하신 미묘한 분별의 등류(等流)를 말하니,
예컨대 ‘이 나가(那伽,용)는 저 나가에 의한 것이다’ 라는 등으로 설한 바와 같다.54)
연기(緣起)라 함은, 이를테면 일체의 교설이 일어나게 된 연유를 설한 것으로, 대개는 조복(調伏,비나야, 계율을 말함)과 상응하는 논도(論道)를 말하니, 그것은 연기(사정)에 의해 나타난 것이기 때문이다.55)
비유(譬喩)라고 함은, 이를테면 설해진 종의를 깨닫게 하기 위해 여러 갈래의 비유와 사례[比例]를 널리 인용하여 나타낸 것으로, 예컨대 『장유계경(長喩契經)』 등에서 설해진 것과 같다.
그런데 어떤 이는 설하기를,
“이는 바로 모든 보살을 제외한 그 밖의 다른 이들의 본생의 수행[本行]에서 능히 깨달은 바가 있었음을 설하여, 교화될 이들에게 나타낸 말이다”라고 하였다.56)
본사(本事)라고 함은, 이를테면 옛날부터 전해내려 오는 이야기를 설한 것이니, 설한 사람을 나타내지 않고 설해진 내용만을 이야기한 것이다.57)
본생(本生)이라 함은, 이를테면 보살(석가보살을 말함)이 일찍이 실천[本行]하였던 수행을 설한 것이다. 혹은 과거세의 일에 근거하여 온갖 언어적 논의[言論]를 제기하여 과거세의 일에 의해 언어적 논의가 구경에 이르게 되는 것은 ‘본사’라고 이름할 뿐으로, 『만타다경(曼馱多經)』과 같은 것이 그러하다. 그러나 만약 현재세의 일에 근거하여 온갖 언어적 논의를 제기할지라도 요컨대 과거세의 일에 의해 그 같은 언어적 논의가 구경에 이를 경우, ‘본생’이라고 이름하니, 『나찰리사경(邏刹利私經)』과 같은 것이 그러하다.58)
방광(方廣)이라 함은, 이를테면 정리(正理)로써 제법을 널리 분별한 것을 말하니, 일체법의 성상(性相)은 다양하기 때문에 광박(廣博)한 언사가 아니고서는 능히 분별할 수 없기 때문이다.59) [방광은] 또한 ‘광파(廣破)’라고도 이름하는데, 이 같은 광박한 언사에 의해 지극히 견고한 무지의 어두움을 능히 깨트릴 수 있기 때문이다. 혹은 ‘무비(無比)’라고도 이름하는데, 이 같은 광박한 언사로 말미암아 이취(理趣)가 깊고도 넓어 이에 비견할 만한 것이 달리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떤 이는 설하기를,
“이는 대보리(大菩提)의 자량을 널리 분별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희법(希法)이라 함은, 여기에서는 오로지 희유하고 기특한 출세간의 법을 설한 것을 말하니, 이에 따라 능히 3승(乘)의 희유함을 바로 나타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여사는 설하기를,
“삼보에 대해 분별하는 말은 세간에서 좀처럼 듣기 어렵기 때문에 ‘희법’이라고 이름한다”라고 하였다.60)
논의(論議)라고 함은, 이를테면 앞에서 논설한 온갖 분교(分敎)의 뜻에 대해 그 난점을 전도됨이 없이 해석하고 결택(決擇)하여 나타낸 것을 말한다.61)
그런데 어떤 이는 설하기를,
“이미 진리를 본 자나 혹은 그 밖의 지혜로운 이가 이치에 따라 경에서 설한 심오한 뜻을 분별하고 해석한 것을 역시 ‘논의’라고 이름한다”고 하였다.
이것은 또한 ‘마달리가(摩怛理迦)’라고도 이름하는데, 그 밖의 다른 경의 뜻을 해석할 때 이를 본모(本母)로 삼기 때문이다. 이것은 또한 아비달마(阿毘達磨)라고도 이름하는데, 능히 모든 제법의 상(相)과 직접 대향하기 때문이며, 전도됨이 없이 제법의 상을 현시하기 때문이다.
이상에서 설한 12분교를 간략히 설하면 3장(藏)에 포섭되는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여기서 3장이라 함은,
첫째는 소달람장(素怛纜藏,sūtra piṭaka), 즉 경장(經藏)이며,
둘째는 비나야장(毘奈耶藏,vinaya piṭaka), 즉 율장(律藏)이며,
셋째는 아비달마장(阿毘達磨藏,abhidharma piṭaka), 즉 논장(論藏)이다.
이와 같은 3장에는 어떠한 차별이 있는 것인가?
아직 선근이 심어지지 않았고, 아직 승의에 대해 기뻐하지 않는 자에게 선근을 심고, 승의에 대해 기뻐하게 하기 위해 계경(契經,즉 수트라)을 설하였으며,62) 이미 선근이 심어지고 이미 승의에 대해 기뻐하는 자에게는 그 상속을 성숙시켜 행해야 할 것을 행하게 하기 위해 조복(調伏,즉 비나야)을 설하였다.
그리고 상속이 이미 성숙하고 행해야 할 것을 이미 행한 자에게는 올바른 방편을 깨달아 해탈하게 하기 위해 대법(對法, 즉 아비달마)을 설하였다.
혹은 복잡하거나 간략한 청정 미묘한 문사(文詞)로써 잡염과 청정의 법을 편집하여 알기 쉽도록 설한 것을 ‘계경’이라 이름하고, 수행과 시라(尸羅)와 궤칙(軌則)과 청정한 생활[淨命]의 방편을 널리 설한 것을 ‘조복’이라고 이름하며, 온갖 계경 중의 심오한 이취(理趣)의 말을 능히 잘 나타낸 것을 일컬어 ‘대법’이라고 한다. 혹은 증상의 마음과 증상의 계(戒)와 증상의 혜(慧)에 의해 일어난 논도(論道)를 순서대로 계경ㆍ조복ㆍ대법이라고 이름하였다.
혹은 소달람장(경장)은 바로 힘[力]의 등류이니, 온갖 경 중에 설해진 이치는 필경 능히 굴복시키는 자가 없기 때문이다. 비나야장(율장)은 바로 대비(大悲)의 등류이니, 시라는 악취로부터의 구제를 분별하여 설한 것이기 때문이다. 아비달마(논장)는 바로 무외(無畏)의 등류이니, 능히 진실의 법상을 확고히 건립하여 문답의 결택에 대해 두려워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이상과 같은 등의 이유에서 3장은 동일하지 않으니, 이에 대해서는 이미 『대비바사론』 중에서 널리 분별하였다.63)
8) 순복분(順福分)ㆍ순해탈분ㆍ순결택분의 선업
앞에서 세 가지 복업사에 대해 이미 개별적으로 해석하였다.
이제 경에서 설하고 있는 순삼분(順三分)의 선업에 대해 해석해 보아야 할 것이다.64)
게송으로 말하겠다.
순복(順福)과 순해탈(順解脫)과
순결택분(順決擇分)의 세 가지는
순서대로 애호할 만한 과보와
열반과 성도(聖道)를 초래하는 선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순복분(順福分)의 선업이란 이를테면 인(人)ㆍ천(天) 등의 세간 중에서 참으로 애호할 만한 과보를 초래하는 종자를 말하니, 이 같은 선업의 힘에 의해 능히 세간의 고귀하고 위대한 종족, 큰 부자, 묘색(妙色), 전륜왕, 제석, 마왕, 범왕 등과 같은 참으로 애호할 만한 온갖 종류의 과보를 초래하게 되는 것이다.
순해탈분(順解脫分)의 선업이란, 이를테면 해탈의 선한 아세야(阿世耶)를 확고히 건립하여 어떠한 경동(傾動)도 없게 하는 것을 말하니, 이러한 선업에 의해 결정코 당래 반열반을 증득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선근의 자성 등에 대한 분별은,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현성(賢聖)에 대해 분별하는 곳에서 설한 바와 같다.65)
그리고 순결택분(順決擇分)의 선업이란, 이를테면 난법(煖法) 등의 네 가지 선근을 말하니, 이 역시 뒤에 현성에 대해 분별하는 곳에서 설하는 바와 같다.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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