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도 불교 철학, 독서기록
Jungi 2024. 12. 15. 19:11
https://jungi1220.tistory.com/93
인도 불교 철학 책 표지
얀 웨스터호프 지음, 강병화, 유경 옮김
독서 기간 : 24.12.1 ~ 12.15
나의 한 줄 리뷰 : 이해하기는 많이 어려우나 특정 시기의 인도 불교에 대한 종합적인 논고가 있는 종교 철학 책.
하이라이트
1. 이 세상과 이 세상을 초월한 영역에서,
반야바라밀을 넘어,
완벽한 열 가지 모습으로 빛나는
지혜의 여신, 당신께 찬탄을!
(반야 찬가에서, Pandey 1994: 125)
2. 굴절적응이란 어떤 특징이 한 가지 목적(체온 조절을 위한 새의 깃털)을 위해 진화적으로 개발되었지만, 이후 다른 목적(이 경우는 비행)을 위해 사용하게 된 경우를 말한다.
마찬가지로 특정 개념이 특정 교리적 입장, 논증, 명상 경험에서 비롯되었을 수 있지만, 나중에 다른 텍스트 구절을 해명하거나, 전혀 다른 논증을 뒷받침하거나, 더 많은 형태의 명상을 개념화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불교철학의 발전에서 특히 성공적이었던 개념은 가장 높은 수준의 굴절적응적 기능성을 보여준 개념, 다시 말해 특정 교리적·변증법적·명상적 맥락에서 비롯되었지만, 상당히 다른 맥락에서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는 개념이었다고 말해도 무리가 아니다.
3. 모든 불교철학이 기원한 주요 원천은 당연히 붓다의 가르침이다. 서력기원 원년부터 천 년 동안 인도 불교사의 맥락에서 볼 때, ‘붓다의 가르침’이란 초기 불교의 교설뿐만 아니라, 대승 경전은 물론이고 딴뜨라 같은 다양한 다른 텍스트도 포함하는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전통적으로 이 모든 텍스트는 붓다에 의해 쓰인 것으로 간주된다.
그 붓다가 고대 인도에 살았던 육신을 가진 석가모니 붓다인지, 아니면 전혀 다른 시공간에 존재했던 또 다른 현신인지에 상관없이 말이다.
4. 붓다의 깨달음은 불교 경전의 첫 번째 꾸러미, 즉 경장(經藏)을 구성하는 일련의 교설 또는 경전을 생산하는 스승으로서의 삶의 시작점에 해당한다. 두 번째 꾸러미인 율장(律藏)은 붓다가 세운 승단의 규칙과 규정, 그리고 각 규칙을 도입하게 된 구체적인 상황에 대한 자세한 설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율장은 특히 비구 및 비구니 승단의 생활 조건에 대한, 또 더욱 일반적으로는 붓다 당시 인도 사회에 대한 역사적 정보가 풍부한 광산과도 같다.
인도의 불교 사상이 어떻게 발전했는지에 대한 설명은 세 번째이자 마지막 꾸러미인 아비달마장(對法藏), 즉 논장(論藏)으로 시작한다. 아비달마 텍스트는 근본적으로 붓다의 가르침을 그가 남긴 교설에 기록된 대로 체계화하고 논리정연하게 확장하려는 시도다.
5. 아비달마의 목적은 경전을 구성하는, 대중에 맞춘 일련의 설명에서 붓다의 가르침에 대한 포괄적이고 체계적인 설명으로 나아가는 데 있었다.
이렇게 하는 과정에서 논증을 신중하게 검토하고, 교리적 입장을 체계화하고, 모호한 구절에 대한 주석을 제공하고, 가상 및 실제 반론에 대응하는 과정이 시작되었다.
이는 이후 인도의 모든 불교철학 활동을 특징짓는 계기가 되었다.
6. 논모를 (그리고 보다 일반적으로 말해 목록에 대한 인도철학의 애정을) 무엇보다도 구전 문화의 특징으로 간주하는 편이 합리적이다.
논모를 통해 서로 다른 곳에서 논의되는 주제를 구조화하고 긴 텍스트의 간결한 버전을 제공함으로써, 문자로 기록하는 것에 의지하지 않더라도 자료를 유지하는 일이 쉬워졌다.
그러므로 논모는 아비달마 전통을 탄생시킨 하나의 핵심적 요소가 아니라, 아비달마 전통의 일반적인 배경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7. 불교도들은 붓다가 깨달음을 통해 보편적인 지식을, 즉 개별적인 사실 각각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모든 사물의 본성에 대한 종합적인 통찰을 얻었다고 가정한다.
이러한 전지성은 아비달마가 답하려고 애쓰는 실재의 근본적인 본성과 관련된 모든 질문에 대해 답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8. 분별설부의 교리를 살펴보면, 이들은 ‘공성’(śūnyatā)이 지혜로운 이든 어리석은 이든 모든 인간의 기원이라고 설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부류의 인간은 모두 동일한 ‘공성’에서 생겨났기 때문이다.
이 ‘공성’은 붓다의 본성(buddha-svabhāva)이며, 이 붓다의 본성이 대열반(mahānirvāṇa)이다.
대중부의 주장으로 보이는 이 구절은, 공성(śūnyatā)이 모든 존재의 보편적 속성이라는, 또 이러한 공성은 해탈과 동일한 것으로 모든 존재에서 발견되는 깨달은 본성에 해당한다는 아이디어를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견해에서 보면, 모든 존재가 이미 붓다와 동일하다는 견해까지는 단 한 걸음만 내딛으면 될 뿐이다.
이는 모든 존재에게 해탈을 성취할 잠재력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비록 지금은 무지에 가려져 있지만 붓다의 깨달은 마음이 이미 그 모든 존재 안에 현전해 있기 때문이다.
9. 붓다의 무아설에 대한 아비달마 주류의 해석은 인격체를 환원주의적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인격체 또는 자아는 궁극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겨지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격체나 자아에 대한 모든 언급이 거짓이라거나 무용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은 그 밖의 것, 즉 다섯 가지 신체적-심리적 구성요소들(蘊, skandha)에 대해 말하는 잘못된 방식이다. 이러한 구성요소들은 근본적인 실재 수준에서 존재하는 것이고, 인격체나 자아라는 개념은 여기에 거짓으로 덧붙여져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말해, 아비달마는 전체에 대한 환원주의적 입장을 지지하는데, 인격체에 대한 환원주의는 그 특수한 사례다.
10. 뿌드갈라론(‘인격체론’)이라는 용어는 장로부에서 발전한 일련의 학파들을 가리키는데, 이들은 인격체(個我, pudgala)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 특징이다.
두 개의 주요 학파는 기원전 280년경에 생겨난 독자부(犢子部, Vātsīputrīya | 창시자 Vatsīputra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는데, 일부 설명에 따르면 그는 사리불의 제자였다)와 기원전 100년경에 등장한 정량부(正量部, Sāmmitīya | 창시자 Saṃmata의 이름을 따서 명명된 것 같다)이다.
이들은 인격체가 존재한다고 믿었기에, 자아의 존재를 부정하는 붓다의 무아(anātman) 교리와 긴장 관계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1. 만약 인과적 연결의 구조 측면에서 인격체가 무엇인지 적절하게 설명할 수 없다면, 한 인격체-찰나를 그 후속 인격체-찰나와 연결하는 인과적 연결과 그 인격체-찰나들 서로를 연결하는 인과적 연결이 어떤 식으로든 특별하다고 상정해야 한다.
나의 물리적 상태가 나의 정신적 상태의 원인이 되는 것과 나의 물리적 상태가 너의 정신적 상태의 원인이 되는 것 사이에 중요한 차이가 있는 이유는 하나의 인과적 연결은 특별하고 또 나에게 연결되어 있지만, 다른 인과적 연결은 나와 너 사이에 작동하는 것이고 또 여타의 인과적 상호작용과 구분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뿌드갈라론자가, 인격체가 궁극적으로 실재한다고 주장할 때 말하고자 하는 바는 한 인격체를 단일화하는 특수한 종류의 인과적 연결은 다른 것으로 환원될 수 없다는 점이다. 특히 단지 특수한 패턴으로 배열되어 있는 보통의 인과적 관계가 아니라는 것이다.
12. 설일체유부 아비달마는 남방 상좌부 아비달마와 마찬가지로, 일곱 개의 개별 텍스트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렇지만 개별적인 텍스트들은 동일하지 않다. 이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가다연니자(迦多衍尼子, Kātyāyanīputra)의 저작으로, 붓다 입멸 후 1-3세기 사이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발지론(發智論, Jñānaprasthāna)』이다.
설일체유부 아비달마는 ‘여섯 개의 발을 가진 아비달마’(『육족론(六足論, ṣaṭpādābhidharma)』)라고도 불리는데, 여기서 『발지론』은 몸으로, 나머지 여섯 개의 텍스트는 그 발로 여겨진다는 사실을 보면 『발지론』의 중요성을 알 수 있다. 이 텍스트는 궁극적인 것에 대한 앎(승의지(勝義智, paramārthajñāna))의 토대 또는 출발점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앎의 기초’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 텍스트는 설일체유부 가운데 정통파로 간주되는 카슈미르(迦濕彌羅) 설일체유부의 관점을 대변한다는 점에서 중요하게 여겨진다.
13. ‘일체가 존재한다는 이론’인 설일체유부는 그 이름에서 이미 자신의 핵심 가정을 말하고 있다. 설일체유부는 다소 직관적이지 않은 찰나성 이론을 설명했다. 이를테면 모든 법은 존재의 스크린에서 아주 잠깐 점멸할 뿐이지만, 그 점멸하는 속도로 인해, 실재가 시간적으로 확장되는 것처럼 보이는 일종의 영화 같은 현실에 우리가 살고 있다고 보는 견해인데, 이는 과거·현재·미래가 모두 존재한다는 더 직관적이지 않은 이론에 의해 뒷받침된다.
14. 인과성은 설일체유부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데, 사실 이 학파는 설인부(說因部, hetuvāda), 즉 ‘원인 이론’이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다.
궁극적으로 존재하는 법의 내재적 본성(自性, svabhāva)은 인과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기에, 설일체유부에서는 이를 인과적으로 효과를 낳을 수 있는 능력이 존재한다는 표식으로 여긴다. 인과적 효과성은 현재의 표식인 작용(karitrā)보다 더 포괄적인 개념이다.
과거와 미래의 존재자는 작용이 없지만 여전히 존재하는데, 왜냐하면 과거와 미래라는 정신적 인지의 대상(所緣, ālambana)으로 기능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인과적으로 효과를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과성과 효과를 낳을 수 있는 능력은 설일체유부 존재론의 중심에 놓여 있다. 즉, 어떤 것이 인과적으로 효력이 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없다면, 그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전혀 증명할 수 없다.
15. 경량부(經量部, Sautrāntika)가 설일체유부로부터 발전했으며, 또한 이 학파가 인도-티베트불교철학의 다양한 학파를 설명하는 후대의 학설강요서에서 (설일체유부 또는 비바사사(毘婆沙師, Vaibhāsika)와 함께) ‘하승’(下乘)의 두 학파 중 하나로서 상당히 중요하게 다루어졌다는 점은 일반적으로 인정된다.
이 학파의 이름을 보면, 경전이 이 학파의 추종자들에게 특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 세친의 『아비달마구사론』에 대한 주석가인 야쇼미뜨라는 경전은 권위가 있다고 여기지만, 주석서(論, śāstra)는 그렇지 않다고 간주하는 사람들로 경량부를 정의한다.
16. 만약 경량부의 주장대로 설일체유부의 설명을 받아들일 수 없다면, 과거와 미래의 존재자는 어떤 상태일까?
세친의 『아비달마구사론』에 나오는 경량부의 설명에 따르면, 모든 것은 한 찰나 동안만 지속된다. 과거와 미래의 존재자는 어떤 실질적인 방식으로도 존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현재 또한 시간적 두께를 가지고 있지 않다.
매 찰나는 존재하게 된 즉시 사라진다. 따라서 찰나성 이론은 세상의 모든 구성요소, 즉 정신적이든 물질적이든 모든 법은 한 찰나(kṣaṇa) 동안만 지속되며, 발생 후 즉시 소멸한다고 주장한다.
영속한다고 보이는 것은 매우 유사한 찰나들이 빠르게 연이어 생겨났다 사라지는 사실로 인해 발생하는 겉보기 현상일 뿐이다.
생기와 소멸이 서로 빠르게 연속하며 이어지기 때문에 우리는 대개 이러한 찰나를 찰나라고 지각할 수 없고, 다만 시간을 관통해 존속하는 대상이 그 밑에서 떠받치고 있는 변화라고만 할 뿐이다.
이러한 독특한 영화적 개념은 세상을 삼차원적 투사로 여긴다. 개별적인 법들은 영화의 프레임들처럼 서로 잇달아 이어진다. 하지만 우리의 지각은 이 법들 각각을 구별하는 데 필요한 순간적인 판별력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각각의 법들을 구별하지 못하고 모호하게 이어지는 것으로 인식한다.
17. 용수(龍樹)로 한역된 ‘나가르주나’(Nāgārjuna)라는 이름은 ‘나가’(龍, nāga)와 ‘아르주나’(樹, arjuna)라는 두 명사의 합성어다.
나가는 신화 속에 나오는 뱀 같은 생명체로, ‘보가바띠’(Bhogavatī, longs spyod can)라고 불리는 수중 도시에, 혹은 지하에, 혹은 산속 동굴에 자리한 궁전 같은 수중 거처에 살고 있다.
나가는 종종 인간의 몸통과 뱀이 감겨진 형태의 하체를 한, 반은 뱀이고 반은 인간인 존재로 묘사되며, 빼어나게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나가는 엄청난 부의 수호자이며(때론 머리에 보석이 박혀 있다고 한다), 현명하고 강력하다.
18. 반야경류는 인도 (및 그 너머에서) 불교철학이 발전해 온 양상을 추적할 수 있게 해주는 실마리가 된다. 인도의 모든 대승불교 학파는 어떤 식으로든 반야계 텍스트들을 설명하려고 노력했는데, 이는 각각의 학파들이 자신의 특정한 철학적 입장이야말로 반야계 텍스트들의 공성 이론에 대한 가장 좋은 설명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애쓴 것이라고 해도 지나친 일반화는 아닐 것이다.
유가행파의 모든 위대한 스승들은 반야계 텍스트에 대한 주석을 작성했다. 미륵의 『현관장엄론』 외에도, 무착은 『금강경』에 대한 주석을, 세친은 (적어도 티베트 전통에 따르면) 『십만송반야경』에 대한 주석을, 디그나가는 『팔천송반야경』에서 논의된 주요 주제를 요약한 『반야바라밀다원집요의론(般若波羅蜜多圓集要義論, Prajñāpāramitāpiṇḍārthasaṃgraha)』을 저술했다.
특정 철학 학파들 내에서만 중요하게 취급되었던 여타의 대승 경전과는 달리, 인도의 모든 아비달마 학파 이후로 반야계 텍스트들은 불교 사상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 보편적으로 중요했다.
19. 반야계 텍스트는 또한 아비달마의 형이상학적 교리, 특히 근본적으로 존재하는 법 개념을 거부하기 시작했다.
그 간결한 예시로는 『반야심경』을 들 수 있는데, 여기서는 이 문제들을 다음처럼 설명한다.
오, 사리불이여, 심오한 반야에서 수행하고자 하는 고귀한 가문의 아들이나 딸은 다음처럼 관해야 한다. 그는 오온을 올바르게 보고는 오온의 내재적 본성(svabhāva)이 공하다고 본다 …
그러므로 사리불이여, 공에는 물질도 없고, 느낌도 없고, 개념도 없고, 형성력도 없고, 의식도 없다.
시각도 없고, 청각도 없고, 후각도 없고, 촉각도 없고, 지각도 없으며,
형상도 없고,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고, 맛도 없고, 감촉도 없고, 법도 없다.
시각의 영역부터 마음의 영역까지도 없고, 법의 영역도 없고, 정신적 의식의 영역도 없으며,
앎도 없고, 무지도 없고, 파괴도 없고, 늙음과 죽음의 파괴까지도 없고,
괴로움도 없고, 발생도 없고, 소멸도 없고,
길도 없으며, 인지도 없고, 얻음도 없고, 얻지 못함도 없다.
이 구절은 아비달마의 존재론적 기획의 핵심을 이루는 모든 범주를 부정하고 있다.
20. 환영주의가 함의하는 바 중 하나는 비대승 불교 학파들의 구제론적 목표가 실체가 없다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윤회하는 존재와 해탈이 근본적으로 동등하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 함의 모두 실재의 본성은 환영에 불과하다는 통찰을 획득한 수행자에게 열반을 얻으려면 윤회를 떠나야 한다는 생각은 터무니없어 보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수반한다.
이러한 견해는 모든 존재에 대한 자비로 모든 존재를 해탈시키는 데 성공할 때까지 윤회하는 존재로 머무르는 수행자, 즉 보살의 이상을 강력하게 지지하는 데로 이어진다.
궁극적인 수준에서 윤회와 열반의 구별이 없다면, 보살이 해탈을 얻기 위해 벗어나야 할 대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보살은 대자비심으로 통찰력을 기르면서 중생을 돕기 위해 윤회에 머물 수 있다. 그러다가 마침내 모든 중생이 해탈하면, 그때 보살은 윤회를 열반으로, 보살을 붓다로 변환시키는 인지적 전환을 할 수 있다.
21. 중관학파로 인해 공의 영역은 확장되어 비인격적인 모든 것을 포함하게 되었으며, 인격체의 무아성뿐만 아니라, 모든 법의 무아성(法無我, dharmanairātmya) 또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법이 공하다는 발상은 전혀 간단하지 않다. 인격체는 실체적인 영혼이나 아뜨만을 소유하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지만, 다른 존재들은 명백한 의미에서는 그렇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공한 존재, 즉 인격체와 비인격체가 모두 무엇을 결여하고 있는지에 대한 보다 일반적인 개념이 필요한데, 이것이 바로 자성이라는 개념이다.
용수는 자성을 두 가지 중요한 속성을 통해 규정한다. 바로 우연적이지 않음(無作, akṛtrimaḥ)과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음(不待異法成, nirapekṣaḥ paratra)이다.
22. 중관학파는 허무주의적 입장과 거리를 두기 위해 세심한 주의를 기울인다. ‘중도의 추종자’라는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이들은 실체적으로 존재하는 존재자를 상정하는 극단뿐만 아니라 허무주의라는 극단도 아울러 거부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23. 모순되는 듯 보이는 이러한 진술들이 도대체 무엇인지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또 다른 해석학적 장치가 있다.
이 장치는 역사적 지위가 명확히 입증된 두 가지 진리(二諦) 이론이다.
이 교리는 대부분의 불교철학 체계 내에서 어떤 형태로든 나타나긴 하지만, 아마도 중관학파가 이를 가장 잘 활용했을 것이다.
이 교리는 두 가지 종류의 진리(또는 두 가지 종류의 실재. 범어 satya(諦)는 둘 다 지칭할 수 있다)가 구별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일상적 현실의 세속적 진리(俗諦, saṃvṛtisatya)와 궁극적 진리(眞諦, paramārthasatya)가 그것이다.
여기서 진리와 거짓이 아니라, 두 가지 종류의 진리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세속적 진리와 궁극적 진리는 모두 고유한 용도가 있지만, 이 둘의 구제론적 효과성은 다르다.
세속적 진리는 내적인 속세의 목표(비행기를 만들고, 원주율의 값을 계산하는 등)를 달성할 수 있게 해주는 반면,
궁극적 진리는 윤회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깨달아야 하는 것, 즉 실재의 궁극적인 본성을 설명하는 진리다.
24. 청변은 대론자의 주장에서 어떻게 모순을 도출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것으로 용수의 논증을 단순히 설명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오류가 있는 견해를 제거해서 기반을 닦는 것이라고 할 때 가장 잘 이해될 수 있는 이러한 파괴적인 작업 이외에도, 중관학파 논사라면 자신만의 입장을 구축하고는 이에 대한 완전한 삼단논법적 증명을 제공해야 한다는 것이다.
25. 청변은 중관학파에게 옹호할 테제가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고대 인도의 지적 논쟁의 장에서 용수의 사상을 통해 쟁론을 벌이면서 응답을 요구하고 상대의 입장을 반박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중관학파에게 테제를 부여하는 일은 내부에서 볼 때 불교적 설명에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모든 부정 가운데 잘못된 긍정적 진술이 실수로 포함되지 않도록 보장), 외부의 관점에서도 중관학파의 철학이 불교 및 비불교 대론자들과 효과적으로 논쟁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것처럼 보였다.
26. 중관학파를 더욱 발전시킨 두 명의 핵심 사상가는 적호(寂護, Śāntarakṣita | 725–88)와 그 제자 연화계(蓮華戒, Kamalaśīla | 740–795년경)였다.
이들이 중요한 이유는 체계적 차원과 역사적 차원으로 나눌 수 있다. 이들은 중관학파와 유가행파를 종합하는 흥미로운 일을 했으며, 8세기에 인도불교(특히 중관학파의 사상)가 티베트에 전승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두 명의 인도 스승이었다.
이러한 전승 덕분에, 본토에서 쇠퇴한 후에도 분명 인도적 모습을 지닌 불교철학이 오늘날까지 계속 티베트에서 발전할 수 있었다.
27. 유가행파(瑜伽行派, Yogācāra)는 대승 철학의 두 번째 주요 학파로, 중관학파와 함께 인도에서 가장 성공적인 지적 수출품 중 하나다. 중관학파가 티베트에서 자리를 잡고 번성하는 동안, 유가행파는 인도에서 불교 문화가 쇠퇴한 뒤에도 중국과 일본에서 철학적 발전을 이어가며 동아시아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28. 『능가경』의 주요 부분은 붓다와 대혜(大慧, Mahāmati) 보살 간의 대화로 구성되어 있다. 그 내용도 다양한데다가, 구조도 평이하지 않다.
채식의 공덕에 대한 장이 있고, 붓다가 대혜에게 여러 다라니를 전수하는 장이 있으며, 800게송 이상으로 이루어진 마지막 장이 있는데, 이 중 약 1/4은 이미 이 텍스트의 다른 부분에 등장한다.
이 경은 광범위한 소재를 다루고 있으며, 대승의 거의 모든 핵심 교리 개념을 언급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9. 유가행파의 대표적인 교리라고 할 만한 것이 있다면, 이는 바로 ‘오직 의식일 뿐’(cittamātra)이라는 생각, 즉 모든 것이 단지 마음일 뿐이라는 견해다.
30. 유가행파의 논증들은 외부 대상이 존재하는 이유에 대해 우리가 제시할 수 있는 다양한 근거, 그리고 이러한 대상의 존재에 대해 발전시킨 이론들을 검토하고는, 그 근거가 우리의 믿음을 정당화하지 않는다는 점, 그리고 그 이론들에 내재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는 우리가 외부 대상에 대해 그 어떤 지식을 갖고 있다는 주장을 바로 반박하고, 그런 이상은 그 실재하는 본성에 대한 판단을 중지해야 한다는 회의론적 입장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대신 유가행파는 실재에 대한 오류적 개념이 제거되면, 명상수행이 진정한 본성을 깨달을 수 있는 길을 제시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31. 유가행파는 의식(識, vijñāna)을 여덟 가지(다른 불교 학파들보다 두 가지가 더 많음)로 나누는데,
시각적 의식(眼識, cakṣur-vijñāna)·청각적 의식(耳識, śrotra-vijñāna)·후각적 의식(鼻識, ghrāṇa-vijñāna)·미각적 의식(舌識, jiḥva-vijñāna)·촉각적 의식(身識, kaya-vijñāna)의 다섯 가지는 감각 능력과 관련이 있고,
정신적 의식(第六識, mano-vijñāna)은 사고와 관련이 있다.
이에 더해 오염된 마음(染汚意·末那識, kliṣṭamanas)과 근본의식(阿賴耶識, ālayavijñāna)이 있다.
이 여덟 가지 의식은 더 높은 수준의 명상적 몰입(禪定)이 실현됨에 따라 점차 사라진다는 점에서 명상 상태와 상관관계가 있다.
처음 다섯 가지 의식은 대상을 구성하는 다양한 종류의 감각 데이터에 분명 의존한다. 깊은 잠(極重睡眠), 혼수상태(極重悶絕), 지각이 없는 상태의 명상적 몰입(無想定, asaṃjñisamāpatti) 등의 특별한 정신적 상태를 제외하고는 정신적 의식(第六識)은 계속 일어난다.
지각이 없는 상태의 명상적 몰입(無想定) 그 이상의 상태(滅盡定, nirodhasamāpatti)에, 즉 명상 수행자가 불에 타거나 위험한 동물이 접근해도 동요되지 않는, 생기가 정지된 듯한 채로 유지된다고 하는 상태에 도달한 후에야 오염된 마음도 사라진다. 근본의식은 이러한 모든 상태를 관통하며 지속된다.
32. 유가행파 텍스트는 붓다의 가르침의 범위를 세 가지 교설, 즉 ‘교리의 수레바퀴를 굴림’(轉法輪, dharma-cakra-pravartana)이라는 용어로 개념화한다. 『해심밀경』에 따르면,
그 첫 번째(有敎)는 네 가지 고귀한 진리(四聖諦, catuḥsatya)의 교리를 담고 있으며, 비대승 경전에서 볼 수 있는 가르침으로 구성되어 있다.
두 번째(空敎), ‘기호 없음(無相, alakṣaṇa)의 수레바퀴’는 대승의 기초가 되는 반야계 텍스트들의 공성 가르침을 포함하고 있다.
세 번째(中道敎), ‘잘 분별된(善分別, suvibhakta) 수레바퀴’ 또는 ‘궁극적인 것의 확정(勝義決擇, paramārtha-viniścaya)을 위한 가르침’은 유가행파의 특징인 세 가지 본성(三性, trisvabhāva)의 교리를 가르치는 것이다.
33. 여래장이란 ‘그렇게 가신 이’(如去·如來, tathāgata), 즉 붓다의 ‘본질’ 또는 ‘자궁’ 또는 ‘용기’를 뜻한다. 모든 유정에게 붓다가 될 잠재력이 있다는 발상은 오히려 여러 학파에 걸친 불교 철학자들이 채택한 범대승주의적 개념이다.
34. 그러나 붓다의 가르침이 무엇인지에 대한 이해가 매우 다르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일관성을 회복할 수 있는 어떤 방법을 찾아야 한다.
한 가지 분명한 방법은 문제의 텍스트가 잘못되었고, 또 불교적이지 않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이러한 전략은 비교적 드물었다.
더 일반적인 전략은 이 텍스트가 진짜이긴 하지만, 많이 생략되어 이해하기 어렵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제대로 이해되려면 특정한 한정어들이 삽입되어야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일관성이 없어 보이는 부분은 해석 가능한(neyārtha) 가르침과 확정적(nītārtha) 가르침 간의 구분을 언급함으로써 해소된다. 즉, 모순된 입장 중 하나는 잠정적으로만 유효하며, 특정하게 설명할 필요에 따라 별도의 대중에게만 독점적으로 설해진 반면, 다른 하나는 무조건적인 궁극적 방식으로 유효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 후자의 두 가지 해석학적 전략은 불교철학에 놀라운 유연성을 부여하는 동시에, 스스로 불교적이라고 자처하는 가르침을 진짜가 아니라고 분류할 필요성을 최소화했다. A입장을 붓다의 가르침의 최종 의도로 간주한 주석가는 A아님을 말하는 입장도 해석 가능한 수준에서는 받아들일 수 있다.
다만, 해탈을 달성하기 위해 실현되어야 할 견해가 A라고 하더라도, 버려야 할 가르침인 A아님 입장보다 해탈에 덜 도움이 되는 어떤 입장이 존재한다고 주장할 수 있는 한 말이다.
35. 유가행파(Yogācāra)와 명상수행 사이의 연관성은 요가(yoga)와 아짜라(ācāra)로 구성된 복합명사인 이 명칭에서 이미 분명히 드러나는데, 이는 ‘요가 수행’ 학파라는 의미다. 학파 이름이 만들어졌을 당시 요가가 정확히 무엇을 의미했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논란의 여지가 없는 방식은 정신 수련이나 수양과 관련된 기법이라고 가정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기법에는 특정 대상에 주의를 집중하는 것이 포함되는데, 이는 (애착과 싸우기 위해 사용되는 불결한 것에 대한 명상(不淨觀, aśubhabhāvanā)의 일부처럼) 썩어가는 시체와 같은 외부 대상일 수도 있고, 사마타(止) 및 위빠사나(觀) 명상처럼 호흡이나 정신 현상의 흐름과 같은 내적 대상일 수도 있다.
36. 이러한 맥락을 고려하면, 디그나가 및 다르마끼르띠 이론의 일부 특징이 덜 특이해 보일 것이다.
첫째, 인식론과 논리학에 대한 논의가 매우 강조된다. 논쟁에서 대론자에게 이의를 제기할 때는 무엇보다도 어떤 앎의 출처를 받아들일 수 있는지에 대한 명확한 개념이 서 있어야 하며, 이상적으로는 양측이 어떤 출처에 호소할 수 있는지에 대해 서로 합의에 도달하는 것이 중요하다. 양측이 각자의 학파의 경전을 권위 있는 것으로 인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대론자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니 논쟁조차 시작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쟁론을 해결하려면, 양측이 합법적으로 호소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공통의 근거를 마련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둘째, 디그나가와 다르마끼르띠를 따르는 전통에서 권위의 원천으로서의 붓다, 붓다의 전지성, 업의 법칙, 재생 등과 같은 핵심적인 불교 주장을 입증하기 위한 논증들이 전례 없이 많이 등장하는 이유가 더욱 명확해진다.
이러한 주제는 불교 대중을 대상으로 설할 때는 꼭 뒷받침될 필요가 없지만, 불교 스승이 종교적 신념을 거의 공유하지 않는 비불교 스승과 논쟁을 벌이는 상황에서는 아직 회심하지 않은 사람들을 설득할 기회가 될 수 있도록 불교의 주제를 변호하는 능력은 매우 바람직한 자질이었다.
37. 디그나가가 지각이라는 개념 아래에 포함시키는 다양한 인지 과정이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는 다섯 가지 외부 감각을 통한 감각적 지각만을 언급했지만, 인도적 맥락에서 볼 때 지각에는 외부 대상에 대한 감각적 지각만큼 직접적이고 비매개적인 방식을 거치는 정신적 사건에 대한 인지도 항상 포함된다. 외부 대상 및 정신적 대상에 대한 지각 외에도 디그나가는 세 번째 종류의 지각으로 요가 수행자의 지각(yogipratyakṣa)을 포함시킨다.
이는 경전의 권위(āgama)에 기반해 개념적으로 구성하는 일 없이 사물 그 자체(arthamātra)를 파악하는 지각의 한 형태다.
38. 논리-인식론 학파의 견해는, 그저 불교의 길로 들어가기 위해, 증거가 없는 믿음을 받아들이라는 것이 아니다. 이는 오히려 수행자가 되려면, 다른 존재들이 어떤 결과를 얻었고, 어떤 수행을 통해 그런 결과를 얻었으며, 자신도 같은 결과를 얻고자 한다면 같은 수행법을 따라야 한다는 발상을 담고 있다.
39. 만약 요가 수행자의 지각이 우리를 세계의 기본 구조에 연결시켜서가 아니라, 해탈을 성취하는 데 효과적이라서 그 권위를 획득한다면, 수행자는 자신이 올바른 종류의 요가 수행자의 지각에, 즉 올바른 종류의 대상(다르마끼르띠가 주로 언급하는 예는 사성제)을 향하고 있는 요가 수행자의 지각에 종사하고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
요가 수행자의 지각이 올바르게 향해 있어야 할 대상에 대한 이러한 지침은 이전 권위자들의 가르침에서 나와야 하고, 따라서 궁극적으로는 붓다의 권위에서 나와야 한다. 그러므로 요가 수행자의 지각은 그 자체만으로는 해탈을 가져다주는 통찰(解脫智)을 일으키는 데 충분하다고 간주될 수 없다. 이러한 효과를 얻기 위해서는 경전적 귄위와 결합되어야 한다.
40. 이러한 직관은 최근 다르마끼르띠에게 일련의 ‘차등적 분석 척도’를 부여하면서 더 상세히 설명되었다. 이 기법을 통해 어떻게 철학자가 전반적인 비일관성에 빠지지 않으면서 서로 모순되는 일련의 다양한 입장을 동시에 취할 수 있는지를 설명할 수 있다.
이것의 핵심 아이디어는 불교 철학자들에게 복수의 이론들은 철학적 정확성과 구제론적 효용성 측면에서 각기 다를 수 있고, 실제로도 종종 다르다는 것이다. 비록 서로 부합하지 않는 두 이론 중 하나가 철학적으로는 더 정확하더라도, 다른 하나가 특정 대중을 해탈에 더 가깝게 이끄는 데는 더 성공적일 수 있다. 예를 들자면, 첫 번째 이론이 사용하는 개념적 자원이 대중의 이해력의 범위를 넘어서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모순을 방지하기 위해 두 이론을 동시에 같은 대중에게는 결코 가르치지 않겠지만, 한 철학자의 전반적인 설명에는 포함될 수 있다.
41. 그러나 디그나가와 다르마끼르띠가 보기에, 이렇게 해석하는 데 따른 난관은 관념론적 단계 이후의 모든 단계는 비이원적이고 언표할 수 없으며(anabhilāpya), 이는 바로 중관학파가 앞뒤가 맞는지 의심스러워하는 궁극적 진리에 대한 규정이라는 것이다(이는 결국 아무것도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무언가를 말하는 입장인 것이다).
디그나가와 다르마끼르띠의 설명에 따르면, 언표 불가능성이 그 이상의 모든 철학적 주장을 배제하기 전에 우리가 실재에 대해 말할 수 있는 마지막 것은 ‘오직 마음일 뿐’이라는 것이므로, 이 둘의 입장을 관념론으로 규정하는 것은 가능한 모든 선택 중 최선인 것으로 보일 수 있다.
42. 서력기원 초 위대한 아비달마 논서의 편찬과 함께 시작된 인도불교의 오랜 학술적 전통이 1200년경 날란다(Nālandā)와 비끄라마쉴라(Vikramaśilā)라는 사원 대학이 파괴됨과 동시에 종식되었다고 보는 데에는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
이는 다르마끼르띠 시대부터 인도 땅에서 불교철학의 활동이 적어도 5세기 이상 더 지속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43. ‘후기 전파’ 시기에는 티베트에 불교학이 확고히 자리 잡았는데, 이때는 인도의 불교철학 발전에서 가장 중요한 몇 세기에 대한 논의를 마무리하기에 좋은 지점으로 보인다.
티베트인들은 인도의 철학적 문화를 대대적으로 받아들였고, 뿌리 텍스트와 주석서로 이루어지는 정전 전체를 번역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티베트인들은 인도불교의 방대한 문헌들을 지금까지 보존해 왔다.
이제 와서 돌이켜 생각해 보면, 이렇게 보존된 문헌들이 없었더라면 인도 불교철학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훨씬 더 단편적이었을 것임을 깨닫게 된다.
44. 살아가고 있는 이 한순간, 호흡의 중심을 잡고, 마음의 중심은 또 어떻게 되어 있는지 안부를 묻고, 조고각하(照顧脚下) 하면서 발걸음까지 중심을 잡고, 그렇게 한 걸음 내딛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