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가아발다라보경 제4권
49. 과거의 부처님이 항하의 모래 수만큼 많다는 것
이때 대혜보살이 다시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 말씀하신 구(句)에서는 과거의 부처님이 항하(恒河)의 모래 수만큼 많다고 하셨고, 미래와 현재도 이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세존이시여, 어떻습니까? 말씀대로 받아들여야 합니까, 아니면 다른 뜻이 있습니까?
여래께서는 저희를 불쌍히 여겨 해설해 주십시오.”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말한 대로 받아들이지 말라. 3세(世)의 모든 부처의 수가 항하의 모래 수와 같다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는 세상의 생각을 뛰어넘는 것으로서 비유로써 말할 바가 아니기 때문이다.
어리석은 범부는 상(常)에 계착하고 외도는 망상으로 악견(惡見)을 증장시켜 생사가 끝이 없다. 생사를 싫어하여 벗어나게 하고, 돌이켜 열심히 정진하여 훌륭한 곳으로 나아가게 하려고 그들을 위해 모든 부처를 쉽게 볼 수 있다고 말한 것이다.
우담발화(優曇鉢華)처럼 보기 어렵다고 하여 방편을 구하는 것을 그만두게 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때는 또 교화할 사람을 보고 말하기를
‘부처는 우담발화처럼 만나기 어려우니, 우담발화는 과거에 본 사람도 없었고 현재에 보는 사람도 없으며 미래에 볼 사람도 없을 것이다’라고 한다.
여래란 세상에서 모두 볼 수 있으나 저절로 통달한다는 인식을 세우지 않게 하기 위해서 여래가 세상에 출현하는 것이 우담발화와 같다고 한 것이다.
대혜야, 저절로 통달한다는 것을 스스로 건립하는 것은 세상의 생각을 초월하므로, 저 모든 어리석은 범부들이 믿을 수 없는 것이며, 자각성지(自覺聖智)의 경계여서 비유할 길이 없다.
진실로 여래는 심(心)ㆍ의(意)ㆍ의식(意識)으로 볼 수 있는 모습을 뛰어넘는 것이어서 비유할 수가 없다.
대혜야, 그러나 내가 비유하여
‘부처는 항하의 모래 수와 같다’고 말한 것에는 잘못이 없다.
대혜야, 이는 마치 항하의 모래를 모든 물고기나 자라나 악어나 사자나 코끼리나 말이나 사람이나 짐승이 밟는다고 하여도
모래는 ‘저들이 나를 괴롭힌다’고 생각하지 않아 망상을 일으키지 않는 것처럼,
자성도 청정하여 모든 더러움이 없다.
여래ㆍ응공ㆍ등정각의 자각성지(自覺聖智)는 항하의 모래와 같이 큰 신통력이 있어 자재하다. 모든 외도나 모든 사람이나 짐승들이 괴롭혀도 여래는 생각을 일으켜 망상을 일으키지 않으니, 여래는 고요하여 기억도 생각도 없기 때문이다.
여래의 본원(本願)이 삼매락(三昧樂)으로 중생을 안락하게 하려는 것이기 때문에 괴롭힘을 받는 것이 없으니,
이는 마치 항하의 모래 등과 같아서 다름이 없다.
또 탐욕과 성냄을 끊은 까닭이다.
비유하면 항하의 모래는 땅의 자성이어서, 겁이 다해서 불탈 때 모든 땅[地]을 다 태워도 저 지대(地大)는 자성을 버리지 않으니, 화대(火大)와 함께 생기기 때문인 것과 같다.
그 밖의 어리석은 범부가 땅이 탄다는 생각을 하나 땅은 타지 않으니, 불의 인(因)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대혜야, 여래의 법신(法身)은 항하의 모래와 같아 무너지지 않는다.
대혜야, 이는 마치 항하의 모래가 한량없는 것처럼 여래의 광명 또한 이와 같이 한량이 없으니, 중생을 성숙시키기 위해 모든 부처와 대중을 두루 비추는 것이다.
대혜야, 이는 마치 항하의 모래 이외에 따로 다른 모래를 구한다면 영원히 얻을 수 없는 것처럼,
이와 같이 대혜야, 여래ㆍ응공ㆍ등정각도 생사(生死)와 생멸(生滅)이 없으니, 이는 인연을 끊었기 때문이다.
대혜야, 이는 마치 항하의 모래가 늘고 줄어드는 것을 알 수 없는 것처럼,
이와 같이 대혜야, 여래가 지혜로 중생을 성숙시키는 것도 더함도 없고 덜함도 없으니, 신법(身法)이 아니기 때문이다.
신법이란 무너짐이 있으니, 여래의 법신은 이 신법이 아니다.
마치 항하의 모래를 눌러 짜도 기름을 얻을 수 없는 것처럼,
이와 같이 심하게 고통 받는 모든 중생들이 여래를 핍박하고 나아가 중생들이 열반을 얻지 못한다고 해도 법계(法界)와 자삼매(自三昧)와 원락(願樂)을 버리지 않으니, 중생을 크게 가엾이 여기기 때문이다.
대혜야, 이는 마치 항하의 모래가 물을 따라 흐르지 물이 없는 곳에서는 흐르지 않는 것처럼,
이와 같이 대혜야, 여래가 말한 모든 법도 열반을 따라 흐른다.
그러므로 ‘항하의 모래와 같다’고 말한다.
여래는 모든 가는 것[去]을 따라 유전(流轉)하지 않으니, 가는 것은 곧 무너진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대혜야, 생사의 근본 진리는 알 수 없으니, 까닭을 알지 못하고서야 어떻게 가는 것을 말하겠느냐?
대혜야, 가는 것이란 단절의 뜻이니, 어리석은 범부가 알지 못한다.”
대혜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만일 중생이 생사의 근본 진리를 알 수 없다면, 어떻게 해탈을 알 수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끝없는 옛날부터의 거짓된 허물과 악(惡)과 망상과 습기의 인(因)이 없어지면, 자기 마음이 현전(現前)에 바깥 경계의 이치를 알아 망상의 몸이 바뀌고 해탈이 없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무변한데 그렇다고 전혀 소유(所有)가 없는 것은 아니니, 저 망상이 무변 등의 다른 이름을 짓기 때문이다.
안팎으로 관찰하여 망상을 벗어나면 달리 중생이 없을 것이니, 지혜나 이염(爾炎)과 같은 모든 법이 다 적정(寂靜)하리라. 자기 마음이 나타낸 망상임을 알지 못하는 까닭에 망상이 생기니, 알면 곧 없어진다.”
이때 세존께서 거듭 이 뜻을 펴시고자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모든 도사(導師)를 관찰하면
마치 항하의 모래 같아
무너지지도 않고 가지도 않으며
또한 구경(究竟)도 아니니
이는 바로 평등한 것이다.
모든 여래를 관찰하면
마치 항하의 모래와 같아서
모든 허물을 다 벗어나고
따라서 흐르나 본성(本性)은 늘 있으니
이것이 바로 부처의 정각(正覺)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