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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경요집 제11권
19.4. 복행연(福行緣)
[自述] 이것은 복행(福行)을 밝힌 것으로서 앞의 죄행(罪行)에 대하여 이 복행을 말하는 것이다.
먼저 범부(凡夫)로서 욕계의 선(善)을 닦는 사람은 단지 어지러운 마음으로 온갖 일의 복을 닦게 하면 하계에 태어나게 되는데 그것을 욕계의 업이라고 말하며,
다섯 갈래 세계 중에서 모두 다 일으킬 수 있는 것이다.
먼저 지옥에 대하여 서술하겠다.
『아비담(阿毘曇)』에 의거해 말하겠다.
“지옥의 사람들도 역시 세 가지 착한 업이 있다. 그것은 곧 의지(意地)의 세 가지 선근(善根)이다.
이것은 오직 성취하기만 할 뿐 현행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난처(難處)한 것으로서 법을 많이 듣지 않으면 생각으로 헤아려서 그 세계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행이 없다.
만약 생득(生得)의 선근을 논하면 그런 것은 지옥에도 있는 일이다. 저 선예국왕(仙譽國王)이 오백 명의 바라문(婆羅門)을 죽이고 지옥에 태어났다가 믿는 마음을 내어 감로국(甘露國)에 태어난 것과 같나니, 그러므로 현행(現行)임을 알 수 있다.”
만약 『성실론(成實論)』에 의하면 또한 지옥에도 착한 현행이 있다고 말한다.
비록 힘써 노력하는 일은 없으나 방편으로 선을 일으켜 닦아서 성인의 도를 획득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생득적인 선근이 있어야 선을 일으키나니, 이른바 모든 중생들은 시작도 없는 과거로부터 여태까지 일찍이 세간의 믿음[信]ㆍ정진[進]ㆍ생각[念] 따위를 닦아 왔다.
그러므로 삿된 견해를 일으켜 원인과 결과는 없는 것이라고 비방하기 전에는 이 선행이 사라지지 않는다.
태어나자마자 곧바로 얻는 것을 생득선(生得善)이라고 말하나니, 이 선근에 의지하여 착한 마음을 일으킬 수 있다.
만약 전생의 업이 있어서 인연을 느끼는 것이 강한 사람은 큰 성인이 나타나서 교화하고 그 괴로움을 멈추게 하기 위하여 도에 대한 법을 설해 방편을 닦도록 하는 것이다.
첫 번째는 축생이나 용(龍) 등에게도 선을 닦는 일이 있으니, 그것은 『열반경(涅槃經)』에서 말한 것과 같다.
“부처님께서 이치[義 : 교리]를 설명하실 때에 한량없이 많은 새와 짐승들이 보리심(菩提心)을 내어 천상(天上)에 태어났다.”
또 『비담론(毘曇論)』에 의하면 이러하다.
“귀신과 축생의 열 가지 선행은 율의(律儀)에 소속된 것이 아니다.
그 몸과 입의 일곱 가지 착한 율의는 온갖 중생들이 태어나 사는 곳에 두루함으로써 귀신은 능히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살바다론(薩婆多論)』에서 말하였다.
“축생들은 어리석고 둔하기 때문에 율의를 일으키지 못한다.”
또 『성실론』에 의하면
“귀신이나 축생 등도 계율을 얻는 일이 있다”고도 하였다.
만약 인간에 대하여 말한다면 북쪽의 울단월(鬱單越) 사람들은 오직 의지(意地)의 세 가지 착한 업도(業道)만을 성취하지만 현행하지는 않는다.
선을 끓지 않기 때문에 겁(劫)이 다할 때에 이르면 사람들은 다 선정을 닦는데, 그들만은 유독 분수에 넘치는 욕심을 능히 여의지 못한다.
그 밖에 세 방위의 사람들은 다 열 가지 착한 것이 있지만 전부 갖추지 못한 이들도 있다.
만약 욕계 여섯 하늘에 대하여 논한다면 여기에는 곧 출가(出家)나 별해탈계(別解脫戒)가 없고, 다만 열 가지 선과 재가(在家) 계율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성론(成論 : 成實論)』에서 말하였다.
“천제석(天帝釋)은 대부분 여덟 가지 계를 받고 용(龍)들도 그것을 받으므로 사람에게만 국한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 색계(色界)의 여러 하늘들에 대하여 논한다면 『비담(毘曇)』에서 논한 것과 같다.
“상계에 태어나면 하계는 잃어버리므로 상계에서는 하계의 착한 법을 일으키지 않나니
그 세계의 인과(因果)가 끊어지기 때문이며,
몸이 상계에 태어나면 하계의 법이 끊어지기 때문이다.”
이것은 유루(有漏)에 의거한 것으로서 하계에 있으면 상계를 이룰 수 있지만 상계에서는 하계를 잃게 되므로 곧 닦아 일으키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성론』에 의하면
“상계에서는 하계를 성취하고 또한 상계의 선한 업까지도 일으킬 수 있다. 그것은 마치 여러 범천(梵天)들이 부처님을 뵙고 예배하고 찬탄하는 말을 하는 것은 곧 선행을 흩어지게 하는 것으로서 이것은 바로 욕계의 선업(善業)을 일으키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또 『비담론』과 『비바사론(毘婆沙論)』 의하면
“범천이 예배하고 찬탄하는 것은 욕계의 선행이 아니다”라고 하였으나,
이것은 그 초선천(初禪天)에서 위의(威儀)와 마음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이 소의(所依)에 의하면 무기(無記)는 선이 아니요, 밖의 몸과 입에 의거하면 이것은 상계의 색업(色業)인 것이다.
이제까지 욕계 난선(亂善)의 복업(福業)은 몸에 의지해 일어난다는 이치에 대해 밝힌 것을 마친다.
두 번째는 색계 사선천(四禪天) 선정의 업이 몸을 의지하여 일어나는 이치를 밝히기로 한다.
만일 귀신이나 축생들 중에서도 성인의 강한 인연을 만나면 도를 깨달을 수 있나니, 그들 또한 닦아서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무루(無漏)는 선정에 의하여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비록 근본은 없지만 깊은 선정의 정체(正體)에는 반드시 거칠고 얕은 미래 선정의 마음이 있으니, 이 미래의 선정은 바로 색계의 업이다.
이 미래에 의해 욕결(欲結)을 끊을 때에는 이 업은 초선천인 범천(梵天)의 과보를 초래하게 된다.
만약 인간과 천상에 대하여 논하자면 이들은 다 색계천의 업을 닦는다.
즉, 선정을 닦지 않는 북방 울단월을 제외하고 나머지 세 방위와 욕계천은 다 색계의 열 가지 선업을 닦아 일으킬 수 있는 것이다.
이른바 선정을 얻은 사람의 의지(意地)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탐욕이 없는 것과 성냄이 없는 것과 바른 견해를 말한다.
만약 몸과 입의 일곱 가지 선한 업을 논하면 선정의 마음에 의하여 선정과 계율을 얻는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선정과 계율은 바로 몸과 입의 일곱 가지 선행이다. 그러므로 선정을 얻었을 때에는 색계의 열 가지 선(善)이 있다.
만일 무색계(無色界)의 모든 하늘들에 의거해 논하자면
『비담론(毘曇論)』에 이르기를
“무색계천은 색계 선정의 업을 닦아서는 일으킬 수가 없으니, 상계(上界)에 태어나면 하계(下界)를 버리게 되므로 계지(界地)가 끊어지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그랴나 『성론(成論 : 成實論)』에 의하면
“무릇 무색계에 태어나더라도 하계인 색계의 업을 일으킬 수 있다”고 했으니,
이것은 색계 선정의 복업(福業)인 열 가지 선한 업도가 몸에 의하여 일어나는 것임을 밝힌 것이다.
만일 무색계의 사공정(四空定 : 四無色定)의 업이 몸에 의지해 일어나는 이치로써 논하자면 삼계의 사람과 하늘은 모두 닦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다.
이상 여기까지 모든 복행은 몸에 의해 일어난다는 이치에 대하여 밝힌 것으로 여기에서 마친다.
만약 성인의 복을 일으키는 것에 대하여 논한다면, 이것은 범부들과 관계되는 것이 아니요, 바람[希]일 뿐이기 때문에 기술하지 않는다.
19.5. 잡업연(雜業緣)
[自述] 이 업행의 이름에 대해서는 성인의 말씀이 일정하지 않다.
이른바 죄행(罪行)에 대해서는 여러 경전에서 흑흑업(黑黑業) 또는 불선업(不善業)이라고 말하였고,
범부(凡夫)들의 복행에 대해서는 여러 경전에서 흑백업(黑白業) 또는 선업(善業)이라고 말했다.
그 이름은 비록 여러 가지이지만 그 행의 본제는 다를 것이 없다.
행의 본체란 어떤 것인가?
『지론(智論 : 智度論)』에서 말한 것과 같다.
“살해(殺害) 등은 비로 불선업이요 보시(布施) 등은 곧 선업이다.”
이것은 바로 죄와 복의 두 가지 행업을 말한 것이다.
살해 등이라고 말한 것은 열 가지 악행을 골고루 취한 것이니 이것을 다 죄의 행업이라 말한 것이요,
보시 등이라고 말한 것은 일[事] 중에서 계율과 선정 등의 업을 골고루 취한 것이니 이를 다 함께 세간의 선이라 했고 갖추어서는 복의 행업이라고 한 것이다.
이 세간의 선업 중에 여덟 가지 선정(禪定)이란 욕계의 난선(亂善)에 대립시 킨 것이나 이것을 부동행(不動行)이라고 말하며,
만약 출세간의 이관지혜(理觀智慧)에 대립시키면 이것은 일을 반연하여 머무르는 것이니 이것을 곧 복행이라고 말한다.
저 『육도경(六度經)』의 말처럼 앞의 다섯 바라밀[度] 가운데 존재하는 선정도 통틀어 복행이라고 말한다.
다만 모든 죄와 복에 대하여 사람이 행하는 것이 같지 않을 뿐이니, 혹은 오로지 복만을 닦고 더러는 오직 죄만 지으며, 혹 어떤 사람은 죄와 복을 함께 행한다.
오로지 복만을 닦는다는 것은 이른바 깨끗한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이롭게 하기 위하여 보시와 계율 등을 행하는 것을 말하고
오직 죄만을 짓는다는 것은 사랑으로 윤택하게 하는 것은 없고, 몸과 입과 뜻을 움직여 남을 다 해롭게 하는 것을 말하며,
죄와 복을 함께 행한다는 것은 복을 닦을 때에 속 마음이 깨끗하지 못해서 혹은 모든 사물을 해롭게 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곧 욕계의 잡업(雜業)으로서 순수하고 깨끗하지 못하기 때문에 또한 부정(不淨)이라고 말한 것이다.
만일 죄의 행업을 논하면 추현(麁顯)을 알 수 있고,
만약 잡업을 논하면 깨끗한 복행(福行)과 같은 것도 있고 다른 것도 있으니
조금 은밀한 부분이 있어서 알기 어렵다.
이른바 모든 복을 닦음에 있어 그 바깥 모습에 의거하면 일 가운데 믿고 즐거움이 생겨 하는 것이 다 같으며,
만약 속 마음에 의거하면 자신을 위하고 남을 위하여 구하는 것이 각기 다르고 정밀하고 거칠기가 같지 않다는 것이다.
복을 닦는 모든 것은 겉은 같으나 속이 다르기 때문에 순수한 업[純業]과 잡된 업[雜業], 이 두 가지 업이 같지 않다.
만약 마음을 잘 길들이고 자비로 만물을 불쌍하게 여기면 보시한 바를 따라 다 큰 선업이 되겠지만,
만약 생각을 지키지 않고 모습만 보고 복을 닦으면 안은 거칠고 밖은 미세하여 오직 잡된 업만 성취할 것이다.
저 어리석은 뜻에 맞으면 비록 세상을 벗어났다 하더라도 실로 도에 어긋나는 것이니 그 또한 깨끗한 복행이 아니다.
복을 닦을 때에 생(生)이 공(空)한 것임을 관찰하지 못하고 나[我]라는 착각이 항상 현행하여 세 가지 성품[三性]에 두루 통함으로써 지은 바 업행(業行)과 착각이 서로 호응하기 때문에, 이것이 임시로 성(性)을 취하는 것이니 그런 까닭에 도를 잃게 되는 것이다.
집착하지 않는 마음으로써 세간의 과보를 많이 구하고 또는 명예를 많이 구하기 때문에 깨끗한 복이 아니다.
이 순업과 잡업으로 세속 사람들이 많이 미혹해지기 때문에 이제 간략하게 그 일부분만 논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깨달이 실천하게 하려고 한다.
먼저 잡된 업에 대하여 논하고 뒤에 깨끗한 복을 밝히겠다.
다만 모든 잡된 업에는 자체에 거침[麁]과 미세함[細]만 있을 뿐이다.
거친 것은 다른 사람을 손상하게 하는 것이요,
미세한 것은 자산만을 위하여 오직 세간의 과보만을 구하는 것이다.
먼저 거친 잡업을 논한다.
만약 보시에 대하여 논하자면 혹 어떤 이는 법답지 못한 방법으로 재물을 취하여 보시하나니, 마치 남의 재물을 훔쳐 보시에 사용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로써 얻은 과보는 도리어 항상 쉽게 없어지며 보시하고 난 뒤에 후회하면서 얻은 과보도 또한 그러하다.
그러므로 『우바새계경(優婆塞戒經)』에서 말하였다.
“만약 어떤 사람이 보시하고 난 뒤에 후회하는 마음을 내거나 만약 남의 재물을 빼앗아 그것을 가지고 보시하면 이 사람은 미래에 비록 재물을 얻는다 하더라도 항상 소모되어 쌓이지 않을 것이다.”
흑 어떤 사람은 보시를 행하고서도 아울러 다른 사람을 손해되게 하나니, 이른바 만약 보시할 때에 착한 것은 생각하지 않고 혹은 성을 내거나 혹은 교만한 마음을 일으키면 마땅히 악한 세계에 떨어지고, 비록 복의 과보를 얻더라도 축생이 되어 별도로 받으며 사람이나 천상의 과보는 감득(感得)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분별업보경(分別業報經)』의 게송에서 말하였다.
큰 보시를 닦고 실행하더라도
성질이 조급하고 성을 잘 내며
바른 기억과 생각을 의지하지 않으면
나중에는 큰 용의 몸이 될 것이다.
큰 보시를 잘 닦더라도
교만한 마음으로 남을 업신여기면
이라한 업을 행함으로 말미암아 다시 태어나더라도
큰 힘을 지난 금시조(金翅鳥)가 되리라.
만약 복을 닦되 세간의 과보를 구한다고 한 것은 재물을 희사할 때에 스스로 미래의 과보를 구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어떤 이가 자신의 재물이 덧없는 것이기 때문에 버리거나 혹은 명예만을 바라서이거나 오로지 자신의 이익만을 구하면 이것은 자비(慈悲)로써 빈곤한 고통에서 구제하기 위한 것이 아니니,
마치 시장의 장사꾼과 같아서 순수하고 깨끗한 업이 아니다.
그런 까닭에 경전에서 깨끗하지 못한 보시라고 말한 것이다.
마치 『백론(百論)』에서 말한 것과 같다.
“과보를 위한 보시는 이것을 깨끗하지 못한 보시라고 한다. 그것은 마치 시장의 장사꾼과 같기 때문이다.
과보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현보(現報)라는 것은 명예와 남에게 공경받고 사랑받는 것이요,
후보(後報)라는 것은 후세에 부귀하게 되는 것이니 이것을 깨끗하지 못한 보시라고 말하는 것이다.
비유하면 장사꾼이 멀리 다른 지방에 이르러서 비록 잡된 물건을 가지고 많은 이익을 남겼다 해도 그것은 중생들을 가련하고 불쌍하게 여겨서가 아니라 자신의 이익만을 구한 것이기 때문에 이 업이 깨끗하지 못한 것처럼
보시를 하고 과보를 바라는 것도 또한 이와 같은 것이다.”
이것으로써 증명하여 알 수 있다. 즉, 진실한 사랑과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 없이 자신의 명예만을 바라거나 혹은 미래의 과보만을 위하면,
비록 아무리 널리 보시한다 하더라도 모두가 깨끗한 업이 아니요,
그 업이 깨끗하지 않기 때문에 얻는 과보도 정밀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분별업보경(分別業報經)』에서 말하였다.
“만약 천상에 태어나가 위하여 보시하거나 혹 다시 명예를 구해서거나 은혜를 갚기 위한 것이나 과보를 바라서거나 두렵고 무섭기 때문에 보시를 행하면 그 얻는 과보가 청정하지 못하고 받는 것도 대부분 추하게 되느니라.”
보시의 실행이 이미 그러하므로 지계(持戒) 등 모든 선업이 깨끗하지 못한 것도 다 이와 같다.
그러므로 『백론』에서 말하였다.
“깨끗하지 못한 지계라는 것은 자신이 즐거운 과보를 구하는 것이다.”
만약 계율을 지켜 천상에 태어나서 천상의 여인들과 즐겁게 놀기를 갈구하거나 또는 인간 세계에서 부유하고 귀하게 되어 오욕(五欲)의 즐거움을 누리고자 하면, 이것은 음욕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어떤 모양을 덮어버리는 것과 같다.
안으로 남의 여인을 탐욕하면서 겉으로 친근하고 선한 척하면 이것을 깨끗하지 못한 것이라고 말한다.
이 밖에 미세한 마음으로 깨끗하지 못하게 계율을 지키는 것은 아난(阿難)이 난타(難陀)에게 말하고 나서 게송으로 설한 내용과 같다.
마치 숫양이 서로 뿔을 맞부딪치면서 싸울 때
앞으로 나가려고 다시 물러서는 것처럼
그대가 욕망을 위하여 계율을 지킨다면
그 일도 또한 이와 같다네.
마음을 열어 오로지 다른 사람의 이익만을 위하면 얻는 복이 많다.
또 보시의 대상으로 가난한 이도 있고 병든 이도 있다.
혹 어떤 이는 법은 알지만 생활 필수품이 모자라는 경우도 있으나,
만일 그런 이들에게 보시하여 이익되게 하고 오래도록 착하게 하면 그 보시는 마땅히 얻는 복이 많을 것이다.
그러므로 『현우경(賢愚經)』에서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다섯 가지 보시에 대해 찬탄하시며 얻는 복이 한량없이 많다고 하셨다.
이른바 멀리서 온 사람과, 멀리가는 사람, 병들고 수척한 사람에게 보시하는 것, 배고프고 굶주렸을 때 그런 사람들에게 음식을 보시하는 것, 법을 아는 사람에게 보시하는 것이니, 이와 같은 다섯 가지 보시는 현재 세상에서 복을 얻는다.”
이 보시는 당연한 것이어서 현재 세상에서 많은 복을 얻나니 이것은 명예를 구하는 보시와 같지 않으며,
요긴하지 않은 곳에 보시하는 것은 아무리 많은 재물을 할애하여 보시한다 하더라도 깨끗한 과보를 얻지 못한다.
또 남을 따라 즐거운 마음으로 보시한다는 것은,
만약 온갖 것을 바라서 지극히 거칠고 착하지 못한 짓을 하면 이것은 곧 미세한 죄가 되지만 또한 선(善)이라는 이름을 얻을 수도 있으며,
만약 욕심 여의기틀 바라며 또 오로지 다른 사람만을 위하면 이것은 잡업(雜業)이니 바로 죄가 된다.
그러므로 『지도론(智度論)』에서 말하였다.
“거친 사람에게는 거친 죄가 있고 미세한 사람에게는 미세한 죄가 있다.”
그런 까닭에 이런 잡업은 죄와 복을 함께 행하는 것이니, 바라는 마음이 순수하지 않으면 이것은 깨끗한 업이 아니다.
이상 여기까지는 죄와 복을 함께 행하는 것을 밝힌 것이다. 이것으로 욕계의 깨끗하지 못한 잡업에 대한 설명을 마친다.
만약 깨끗한 업에 대하여 논하려면 앞의 잡업을 뒤집어서 생각하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백론』에서 말하였다.
“깨끗한 보시란 만일 어떤 사람이든지 사랑하고 공경하며 이익이 되게 하면 얻는 복도 또한 많을 것이다.”
그러므로 『인과경(因果經)』의 게송에서 말하였다.
만약 어느 누구든 가난하고 궁색한 사람으로서
보시할 만한 재물이 없으면
다른 사람이 보시를 행하는 것을 볼 때에
따라서 기뻐하는 마음을 내어라.
따라서 기뻐하는 복의 과보는
직접 보시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또 『대장부론(大丈夫論)』의 게송에서 말하였다.
자비한 마음으로 한 사람에게 보시하면
공덕의 크기가 대지(大地)와 같지만
자신만을 위하여 모든 사람에게 보시하면
얻는 과보는 겨자만큼 작다.
액난에 처해 있는 한 사람을 구제하면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한 보시보다 낫다.
숱한 별에 아무리 빛이 있다 해도
하나의 밝은 달의 광명만은 못하다.
만일 모든 범부가 그 죄와 복을 지으면서 인과(因果)와 선악(善惡)에 아무런 성질이 없음을 알지 못하면, 이것은 일을 잃어버리고 그 성품에 집착함으로써 항상 삼유(三有 : 三界)에 얽매이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도론』에서 말하였다.
“비유하면 파리는 어느 곳에나 달라붙지 않는 데가 없지만 오직 불꽃에만은 달라붙지 않는 것처럼
중생들의 애착도 또한 이와 같아서 착한 법이나 착하지 않은 법에 모두 집착하고 나아가 생각이 없는 데까지도 애착한다.
그러나 오직 성품이 공(空)한 반야바라말(般若波羅蜜)의 큰 불에만은 집착하지 않는다.
이것으로써 증명하여 알 수 있나니,
선하고 악한 성질이 없는데도 항상 다섯 갈래의 세계를 윤회한다면 그것은 곧 불성(佛性)이 없는 중생에 해당된다.”
여기에서는 범부의 죄와 복, 두 가지 행업이 일에 미혹하여 그 성품에 집착하는 것을 대략 밝힌 것이다. 이상으로 소의(所依)의 경론(經論)을 마친다.
또 『잡보장경(雜寶藏經)』에서 말하였다.
“옛날 부처님께서 세상에 계셨을 때 바사닉왕(波斯匿王)에게 딸 하나가 있었으니, 그녀의 이름은 선광(善光)이었다. 그 딸은 총명하고 단정하여 부모가 매우 애지중지하였고 온 궁중에서도 모두 사랑하고 공경하였다.
아버지가 그 딸에게 말하였다.
‘너는 나의 힘으로 인하여 온 궁중의 사땅과 공경을 받는 것이다.’
딸이 아버지에게 대답하였다.
‘저에게 스스로의 업이 있어서이지 부왕(父王) 때문이 아닙니다.’
왕은 그 말을 듣고 생을 내며 그녀에게 말하였다.
‘지금 당장 너에게 스스로의 업력이 있는지를 시험해 보겠다.’
그리고는 곧 측근 신하들을 보내 가장 하천하고 빈궁(貧窮)한 거지 한 사람을 물색하여 그에게 딸을 주었다.
그리고는 왕이 딸에게 말하였다.
‘네가 스스로 업력이 있어서 내 힘을 벨지 않아도 되는지 지금부터 시험해 볼 것이다.’
딸은 여전히 대답하였다.
‘저에게는 업력이 있습니다.’
그리고는 곧 그 가난한 사람과 함께 집을 나갔다.
부인[婦 : 딸]이 남편[夫: 거지]에게 물었다.
‘부모님은 계십니까?’
남편이 아내에게 대답하였다.
‘나의 부모님은 전에 이 사위성(舍衞城)에서 제일가는 장자(長者)였으나 부모님은 돌아가시고 살고 있던 집까지 다 없어져서 지금은 의지하고 믿을 곳이 없소.
그런 까닭에 이렇게 빌어먹으며 살고 있다오.’
부인이 다시 물었다.
‘당신은 지금 그 옛날에 살았던 집을 알고 있습니까?’
대답하였다.
‘그곳은 알 수 있소. 다만 집이 다 헐리고 빈 터만 남아 있을 뿐이오.’
부부는 서로 함께 옛집터에 이르러 두루 돌아다니면서 살펴 보았다.
그런데 그녀가 다니는 곳마다 숨겨져 있던 보배가 저절로 드러났다. 그래서 그 진귀한 보배를 가지고 사람을 사서 집을 짓게 하였다. 그리하여 한 달이 채 못 되어 집이 완성되자 궁인(宮人)ㆍ기녀(伎女)ㆍ노비(奴婢)ㆍ복사(僕使) 등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게 되었다.
왕은 문득 생각하였다.
내 딸 선광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어떤 사람이 왕에게 대납하였다.
‘선광 내외분은 지금 궁실(宮室)과 재물과 돈이 대왕 못지 않게 많습니다.’
왕의 딸은 그날로 그 남편을 보내 왕을 초청하게 하였다. 왕이 곧 청을 받고 그 집으로 가서 집안의 장엄함을 보고 일찍이 없었던 일이라고 감탄하였다.
왕은 부처님께 가서 여쭈었다.
‘이 딸은 과거 세상에 무슨 복업(福業)을 지었기에 왕의 집안에 태어났으며 그 몸에 광명이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왕에게 대답하셨다.
‘파거 아흔한 겁 전에 비바시(毘婆尸) 부처님께서 열반(涅槃)에 드신 뒤에 반두(槃頭)라고 하는 왕이 그 부처님의 사리를 거두어 칠보탑(七寶塔)을 세웠었습니다.
그러자 왕의 대부인(大夫人)은 그것을 보고 곧 천관(天冠)을 털고 장식을 달아 불상의 정수리 위에 씌우고, 그 천관 가운데 있는 여의보주(如意寶珠)를 탑 머리에 얹고는 이렇게 발원했습니다.
〈저로 하여금 장래에 몸에 광명이 있게 하고 자마금(紫磨金) 빛이 나게 하며 존귀하고 영화로우며 권세 있고 부귀한 가문에 태어나게 하고 세 갈래 악한 세계와 여덟 가지 어려움이 있는 곳에 떨어지지 않게 하소서.〉
옛날의 그 부인은 바로 지금의 선광(善光)입니다. 그 뒤 과거 가섭(迦葉) 부처님 때에 다시 맛있는 음식을 가져다가 부처님과 스님들께 공양하려 하였는데, 그의 남편이 못하게 막았습니다.
그러자 아내는 곧 남편에게 권유하고 간청하였습니다.
〈제가 지금 이미 초청하였으나, 저의 간청을 충족시켜 주십시오.〉
남편은 마음을 돌려 부인의 청을 들어주었습니다. 그 때 그 부인은 바로 지금의 선광이고, 그때 그 남편은 바로 지금 선광의 남편입니다.
남편은 그 때 그 아내의 일을 막았었기 때문에 항상 가난하고 천하게 살았으나, 나중에는 부인의 청을 들어주었기 때문에 그 부인으로 인하여 큰 부귀를 얻었다가, 그 부인이 없어지고 나면 다시 가난하고 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연 때문에 선과 악의 업은 몸을 따라다니므로 꼭 과보를 받게 되고 일찍이 한 번도 어긋나거나 잃어버린 적이 없습니다.’
또 『잡보장경(雜寶藏經)』에서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였다. 바사닉왕이 어느 땐가 잠을 자다가 두 내관(內官)이 서로 도리(道理)에 대하여 다투는 소리를 들었다.
한 사람이 말하였다.
‘나는 대왕에 의지하여 살아간다.’
다른 한 사람이 대답하였다.
‘나는 내 스스로의 업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것이지 왕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왕은 그 말을 듣고 저 왕에 의지하여 살아간다고 한 사람을 옳게 여겨 상을 주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곧 당직하던 사람을 보내 그 부인에게 말하였다.
‘내가 지금 내관 한 사람을 보낼 터이니, 그 사람이 가거든 많은 재물을 주시오.’
조금 후에 곧 왕에 의지하여 살아간다는 그 내관에게 술을 들려 그 부인에게 보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문을 나서자 코에서 피가 흘러 더 이상 앞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잠시 후에 저 업에 의지하여 살아간다고 한 내관을 대신 보냈다. 부인은 그를 보자 돈ㆍ재물ㆍ의복ㆍ영락 등을 많이 주었다.
그가 왕의 앞으로 돌아오자 왕은 그를 보고 매우 괴상하게 여겨 곧 사람을 보내 왕에 의지하여 살아간다는 그 내관을 불러 물었다.
‘내가 너를 시켜 가라고 했는데 어째서 가지 않았느냐?’
그는 곧 왕에게 일의 사정을 자세히 말하였다.
왕은 그 말을 듣고 감탄하며 말하였다.
‘부처님의 말씀은 진실하구나. 스스로 그 업을 지어 도로 그 과보를 제 자신이 받는 것은 어길 수 없는 일이구나.’”
이로 말미암아 관찰해 보면 선하고 악한 과보는 스스로 지은 업에 의해 끌어들이는 것으로서 하늘도 아나요 왕이 주는 것도 아니며, 중요한 것은 반드시 자신이 지어 자선이 받는다는 사실이다.
바른 견해를 일으켜 업의 과보를 말하면 가까이는 인간이나 하늘이 될 것이요 멀리는 부처님의 과보(果報)를 증득할 것이지만,
만약 성인의 가르침을 어기게 되면 앞에서와 같은 괴로움을 빠짐없이 받게 될 것이다.
게송을 말한다.
원인[因]을 찾아보면 길이 곧 다른데
버리고 나아가는 데 미쳐서는 그래도 오히려 합해진다.
고통이 극심하면 생각이 즐거움으로 쏠리고
즐거움이 지극하면 고통이 다시 생긴다.
어찌 죄와 복의 분별이
다 감정에 집착하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만일 유루(有漏)의 업을 끊으면
언제나 법신(法身)의 편안한 모습을 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