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동김씨 대종회 홈페이지
https://blog.naver.com/jydecor/222192674589
andongkimc.kr/htmls/ansa/ankim04-23-0.h..
http://andongkimc.kr/php7/board.php?board=ankim71
~~~~~~~~~~
~~~~~~~~~~
안동김씨대종회 - 안동김씨인터넷족보
안동김씨대종회,안동김씨,안사연,
인터넷족보, 구안동
~~~~~~~~~~
▣구 안동 김씨(舊 安東 金氏)
계파(系派)
안동 김씨(安東 金氏)에는 본관(本貫)이 같으면서
시조(始祖)를 달리하는 두 계통(系統)이 있다.
김숙승(金叔承)을 시조(始祖)로 하는
구 안동 김씨(舊 安東 金氏) 계통(系統)과
김선평(金宣平)을 시조(始祖)로 하는
신 안동 김씨(新 安東 金氏) 계통(系統)으로
구분하고 있다.
~~~
밀직사사공파(密直司事公派-칠우)
개성윤공파(開城尹公派-칠림)
군사공파(郡事公派-칠양)
전서공파(典書公派-성목)
부사공파(府使公派-천순)
문온공파(文溫公派-구용)
안정공파(安靖公派-구덕)
도평의공파(都評議公派-구정)
대호군공파(大護軍公派-유)
제학공파(提學公派-익달)
판삼사공파(判三司公派-장)
안렴사공파(按廉使公派-사렴)
익원공파(翼元公派-사형)
서운관정공파(書雲觀正公派-수)
정의공파(正儀公派-철)
출처:안동김씨 대종회 홈페이지
~~~
▣대한민국 구 안동김씨 집성촌
<경기도>
경기 고양시 일산구 풍동
경기 광주군 초월면 신월리 ◀서운
경기 포천군 창수면 주원리
경기 양평군 지제면 옥현리
경기 여주군 홍천면 귀백리 ◀안렴
경기 이천군 율 면 본죽리 ◀안렴
경기 용인군 수지면 이의리
경기 화성군 정남면 제기리
경기 화성군 동탄면 중 리
경기 시흥군 남 면 부곡리
경기 김포군 김포면 운양리
경기 김포군 대관면 대릉리 ◀안렴
경기 강화군 길상면 초지리
경기 강화군 하점면 망월리
~~~
<강원도>
강원 춘성군 사북면 고성리
강원 양양군 양양면 포월리
강원 명주군 강동면 운산리
강원 삼척군 근덕면 교가리 ◀안렴
강원 김화군 원남면 주파리
강원 철원군 동송면 양지리 ◀부사
~~~
<충북>
충북 청원군 강서면 현암리 ◀익원
충북 청원군 오창면 일대 ◀안렴
충북 진천군 진천읍 사석리 ◀안렴
충북 괴산군 문광면 신기리 ◀안렴
충북 괴산군 장연면 방곡리
충북 괴산군 증평읍 일대 ◀안렴
충북 괴산군 소수면 수 리 ◀제학
충북 괴산군 불정면 탑촌리
충북 음성군 음성읍 사정리 ◀군사
충북 음성군 원남면 마송리 ◀안렴
충북 음성군 감곡면 상평리◀문온
~~~
<충남>
충남 연기군 동 면 내판리 ◀안렴, 익원
충남 연기군 전동면 달전리 ◀익원
충남 연기군 전동면 양곡리 ◀전서
충남 논산시 상월면 산성리 ◀익원
충남 부여군 부여읍 일대 ◀익원
충남 당진군 송산면 삼월리
충남 천원군 일 대 ◀제학, 안렴, 전서
~~~
<전북>
전북 완주군 봉동읍 낙평리
전북 순창군 풍산면 반월리
전북 고창군 공음면 일대 ◀익원
전북 익산군 성당면 대선리
~~~
<전남>
전남 곡성군 고달면 고달리
전남 고흥군 도양읍 도덕리
~~~
<경북>
경북 달성군 상서면 장기동
경북 의성군 일 대 ◀도평
경북 안동시 일 대 ◀익원
경북 안동시 와룡면 주계리 ◀익원
경북 안동시 풍산읍 현애리
경북 청송군 파천면 어천동
경북 청송군 진보면 신촌동
경북 양양군 영양면 동부동
경북 영양군 영양면 상원동
경북 영양군 입암면 신사동
경북 상주군 공검면 화동리
경북 문경군 산북면 서중리
경북 문경군 가은면 원장리
경북 예천군 예천읍 일대
경북 예천군 예천면 갈구동
경북 예천군 예천읍 지내동
경북 예천군 감천면 일 대
경북 예천군 지보면 신풍리
경북 영주군 평은면 금광리
경북 봉화군 명호면 도천리
~~~
<경남>
경남 진양군 진성면 온수리
경남 의령군 당림면 대곡리
경남 함안군 칠서면 태곡리
경남 창녕군 대합면 소야리
경남 창녕군 영산면 봉암리
경남 창녕군 부곡면 거문리
경남 함양군 안의면 초동리 ◀익원
경남 거창군 신원면 덕산리
~~~
<황해>
황해 연백군 송봉면 대용리
황해도 수안군 대성면 일대
황해 수안군 대성면 내덕리
황해 수안군 대성면 제동리
황해 수안군 대성면 좌도리
황해 수안군 대성면 내덕리
황해 수안군 대성면 제동리
~~~
<평북>
평북 구성군 동산면 양지동
평북 구성군 이현면 진조동
평북 박천군 동남면 동하동
평북 박천군 용계면 삼광동
평북 박천군 양가면 심대동
평북 박천군 서 면 와봉동
평북 박천군 서 면 금계동
평북 용천군 용암포읍 일대
평북 용천군 용암포 용암동
평북 용천군 용암포 운흥동
평북 용천군 용암포 소의동
평북 용천군 용암포 용암동
평북 용천군 용암포 신흥동
평북 용천군 부라면 일대
평북 용천군 부라면 택현동
평북 용천군 부라면 백송봉
평북 용천군 부라면 덕천동
평북 용천군 부라면 덕암동
평북 용천군 북중면 매장동
~~~
*1930년대의 구 안동김씨
집성촌 및 세대수
<경기도>
경기도 포천군 창수면 주원리 19
경기도 여주군 흥천면 귀백리 26 ◀안렴
경기도 이천군 율면 본죽리 21 ◀안렴
경기도 용인군 수지면 이의리 25
경기도 화성군 정남면 제기리 26
경기도 김포군 대관면 대능리 18 ◀안렴
경기도 강화군 길상면 초지리.
// 하점면 망월리40 ◀전서, 익원
~~~
<강원도>
강원도 삼척군 근덕면 교가리 24 ◀안렴
강원도 철원군 동송면 양지리 31 ◀부사
~~~
<충북>
충북 청원군 오창면 주성리.
// 양지리.
// 양청리 200 ◀안렴
충북 괴산군 문광면 신기리.
// 장연면 방곡리 52 ◀안렴
충북 괴산군 증평읍 미암리.
// 남하리 98 ◀안렴
충북 괴산군 증평읍 죽리.
// 덕상리 65 ◀안렴
충북 괴산군 소수면 수리 24 ◀제학
충북 괴산군 불정면 탑촌리 35
충북 음성군 음성읍 사정리.
// 원남면 마송리.
// 감곡면 쌍평리 168
◀군사, 안렴, 문온
~~~
<충남>
충남 연기군 전동면 달전리.
// 양곡리 133 ◀전서
충남 부여군 부여읍 송간리.
// 저석리 84 ◀익원
충남 천원군 병천면 가전리.
// 복다회리 120
◀제학, 안렴
~~~
<전북>
전북 순창군 풍산면 반월리 52
전북 고창군 공음면 칠암리.
// 선동리 76 ◀익원
~~~
<경북>
경북 의성군 점곡면 사촌동 200 ◀도평
경북 안동군 와룡면 주계동.
// 풍산읍 수동 85◀익원, 정의
경북 안동군 남후면 개곡동 43
경북 청송군 파천면 송강동 30
~~~
<황해>
황해도 수안군 대성면 내덕리 81
황해도 수안군 대성면 제동리 72
황해도 수안군 대성면 좌도리 43
황해도 수안군 대성면 대평리 20
황해도 수안군 천곡면 평원리 27
~~~
<평북>
평북 구성군 동산면 양지동 35
평북 구성군 이현면 진조동 20
평북 박천군 용계면 삼광동 38
평북 박천군 동남면 동하동 30
평북 박천군 양가면 심대동 46
평북 박천군 서면 와현동 24
평북 박천군 서면 금계동 20
평북 박천군 용계면 오룡동 28
평북 박천군 가산면 대성동 20
평북 박천군 청룡면 호전동 180
평북 박천군 박천읍 송덕동 45
출처:네이버 지식인
~~~
▣구 안동 김씨(舊 安東 金氏)
족보(族譜) 발행(發行)
- 경진보 : 1580년(조선 선조 13년)
- 기미보 : 1739년(조선 영조 15년)
- 무술보 : 1778년(조선 정조 2년)
- 을유보 : 1825년(조선 순조 25년)
- 임인보 : 1902년(조선 고종 6년)
- 을해보 : 1935년
- 기미보 : 1979년
출처:네이버 지식인
~~~
▣구 안동 김씨(舊 安東 金氏)
인구수(人口數)
통계청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구 안동김씨는
1985년에는 총 95,736가구 398,245명,
2000년에는 총 132,645가구 425,264명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출처:네이버 지식인
***************
(안렴사공:사렴)~ '주요 조상님 소개'中 일부 발췌(拔萃) /
(익원공:사형)~'인물사'中 일부 발췌(拔萃)
https://blog.naver.com/jydecor/222194784814
~~~~~~~~~~
7."(안렴사공:사렴)"
~ '주요 조상님 소개'中 일부 발췌(拔萃)
1) 정간공(貞簡公) 김영후(金永煦)
--- 안렴사공의 祖父
♠ 안렴사공 동생 익원공 김사형(金士衡)
--- 익원공파의 파조
○1341∼1407(태종7).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평보(平甫), 호는 낙포(洛圃).
고조는 방경(方慶), 할아버지는 영후(永煦),
아버지는 부지밀직사사 천이다.
○영삼사사공(김천)과 삼한국대부인 현풍곽씨 사이의
4남(사겸,사렴,사안,사형) 1녀(허강에 출가)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
○金士廉(안렴사), 金士衡(좌정승) 형제는
고려의 멸망-조선의 개국으로 이어지는
역사의 무대에서 정반대의 길을 걸었다.
金士廉은 고려가 망하자 청주 도산에 은거
두문불출했으며 한양쪽을 향하여 앉은 일조차
없었다는 節臣. 이성계가 여러차례 불러 佐司諫에
임명했으나 끝까지 거절했다.
그러나 그의 아우 金士衡은 달랐다.
고려말 삼사우사를 지냈던 그는 1392년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 개국공신 1등에 서훈됐으며,
태종때는 좌정승에까지 올랐다.
<성씨의 고향, 중앙일보>
---
○안렴사공파는 충렬공 김방경의 4대손인
士廉(1335∼1405)의 계열로서, 사렴은 안렴사를
지냈고, 호를 梧隱(오은)이라 하였다. 그는 고려말의
학자이자 충절신인 목은 이색과 포은 정몽주와도
도의로써 교유하였고, 조선건국후 태조가 등극하자
두문불출하였고 이태조가 수차 높은 벼슬에 불렀으나
사양하고 청주 오근으로 낙향하여 자취를 감추었다.
특히 그의 아우인 익원공 士衡이 조선의 건국에
동참하여 공신호를 받았고, 그를 통하여 형인 안렴사공을
등용의 뜻을 전하였는데 당시의 유명한 일화가 집안에
전해진다.
아우인 익원공이 오은에 이르자 가마에서 미쳐 나오기 전에
휘장 틈으로 손을 디밀어 "손이나 만져 보자"고 하면서
이르기를 "가는 길이 갈리고 뜻이 다르지만 형제간의
정이야 어찌 다르겠느냐" 하면서 그대로 돌려 보내고
이내 도산으로 은둔하여 그는 이후 한양쪽을 향하여
앉지도 않았다고 전해진다. <연기지역의 충렬공 후예들,
1997, 안동김씨연기군종친회>
***위 내용은 여말선초 혁명시절의 갈림길에 선
안렴사공과 익원공 관련 기록임. 익원공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익원공파 소개란 참조***
♠ 허강의 처 ---안렴사공 자매
신돈은 영산(靈山) 사람이요, 그의 모친은 계성현(桂城縣)
옥천사(玉川寺) 여종이다. 신돈은 어려서 중이 되었다.
이름은 신변조(遍照)요, 자는 요공(耀空)이다. 신돈은
그 어미가 천하여서 중들 사이에서도 한축에 들지 못하고
항상 산방(山房)에 거처하고 있었다.
밀직 허강(許綱)의 처 김씨(金氏)는 상락군(上洛君)
김영후(金永煦)의 손녀인데 허강이 죽으니 신돈이 문벌을
탐내어 그 과부에게 장가 들고자 했다. 김씨가 이 소문을
듣고 말하기를 “우리 주인이 평생에 남의 여자라고는
쳐다보지도 않았는데 내가 어찌 차마 그분을 배반할 수
있겠는가! 정히 나를 욕보이려고 한다면 나는 자결하고
말겠다”라고 하고 드디어 머리를 깎고 여승이 되었다.
신돈이 이 말을 듣고 단념하였다. <고려사>
3)안렴사공(按廉使公) 김사렴(金士廉)
---안렴사공파 파조
1335년(고려 충숙왕 복위 4년)∼1405년(조선 태종 5년)
고려의 충신. 명장 방경(方慶)의 현손(玄孫). 문장에 능하며
공민왕 초엽 문과(文科)에 급제, 정몽주(鄭夢周)·이색(李穡)과
함께 직간(直諫)으로 이름을 떨쳤다. 1365년(공민왕 14) 왕이
신돈(辛旽)을 총애하여 벽상삼한삼중대광·집현전 대학사
(壁上三韓三重大匡集 賢殿大學士)를 더하고 공신호를 내리자
신돈이 위험 인물임을 상소했다. 1392년 고려가 망하자
청주(淸州)에 은퇴, 태조에 의해 수차에 걸쳐 좌사간(左司諫)에
기용되었으나 거절한 후 도산(陶山)에 가서 살았다.
14) 안원군 김공량(金公亮, 1472∼1544)
(주회(안), 2007. 9. 19. 은회(익) 제공)
城의 아들로 안원군파의 파조가 되는 公亮(1472∼1544)은
안렴사공의 7세손으로 자를 필지(弼之) 호를 양곡(楊谷)이라
하였으며 증직으로 이조판서와 양관 대제학을 받았고 보조공신
(補祚功臣)에 올라 안원군(安原君)의 군호를 받았다.
공은 묵재(默齋 李深源, 1454∼1504)의 문하에서 글을 배워
학문과 덕행이 순결(純潔)하고 아름다웠는데, 연산조때
절제과로 등제하였으나 스승과 뭇 선비들이 화를 당하는
것을 보고 드디어 전시(殿試)에 나가지 않고 세사(世事)에
뜻을 버리고 고향에서 고요히 지내셨다.
묘는 경기 여주군 흥천면 귀백리 백양동에 있고, 묘갈은
호음(湖陰)정사룡(鄭士龍, 1491∼1570)이 짓고 동고(東皐)
김로(金魯, 1498∼1548)가 썼다. 정사룡의 문집 [호음잡고]
(湖陰雜稿)에 <유명조선국김군공량묘갈명>(有明朝鮮國金君
[公亮]墓碣銘)이 실려 있고, 남계(南溪) 박세채(朴世采,
1631∼1695)가 [동유사우록](東儒師友錄)에 실었다.
안원군의 묘갈을 書한 로(魯)는 우리 가문의 서운관정공파
희수(希壽)의 아들이며 당대의 명필로서,이외에도 승지공
김공예(金公藝, 1485∼1537) 묘갈,아버지 김희수(金希壽,
1475∼1527) 묘비를 書하였다.
1520년(3자 주 8세) 기묘년 주계군 성광 이심원 공의 문인으로서
장차 사문(師門)에 앙화가 일어나리라는 것을 알고 일찍이 과거에
응시하여 합격하였으나 전시(殿試)를 보지 않았다. 내구(內舅)인
충정공 허종(許琮) 상공께서 벼슬에 나아가도록 권하였으나
응하지 않았다. 이때에 이르러 남곤과 심정 등이 권력을 휘둘러
여러 현인들을 무고하여 죽였다.
매서이신 문강공 박세희(朴世熹)도 역시 화를 입었다. 이에 마침내
세간사에 뜻을 끊어버리고 문을 닫아걸고 궤안(机案)을 청소하고
학문을 하였다. 자제나 조카 및 학자 가운데 배움을 청하여 오는
자들이 있으면, 자질에 따라서 가르침을 베풀어서 종일토록
강독하고 풀이하여 추위나 더위라고 해서 그만두지를 않았다.
1544년 5월 27일 판서공(공량)의 상을 당하였다. 세자가 송별하고
부의하는 뜻을 내리셨다. 9월 17일 모친 정부인 이씨의 상을
당하였다.세자가 또 부의를 보내었다. 10월 20일에 고와 비를
여주 백양동 선영 안 정좌 벌에 합장하였다.
1546년 8월 15일에 선고비의 묘도에 비갈을 세웠다. 호음 정사룡
판서가 명을 짓고, 동종의 동고 김로 교리가 글씨를 썼다.
12월에 상기를 마쳤다.
○바로 이 안원군 公亮의 직계 사손들이 세거해 온 곳이
바로 소정면 운당리이다. 안원군파가 처음으로 연기땅에
연고를 맺은 것은 바로 안원군의 아들인 진천현감 완(浣)때
였다고 전해진다.
구전되는 바로는 안원군이 전의현 덕평면 운당리·원덕리
(현 소정면 운당리) 일원의 토지와 임야를 사패지(賜牌地)로
하사받아 아들인 진천현감 浣에게 관리토록 함에 이때부터
안원군계의 가문이 이곳을 중심으로 번성하게 되었다고 한다.
또 운당리에 영장댁(호준) 맞은 편에 있는 하마(下馬)터로
불리우는 곳이 있는데 이곳 역시 사손파 안동김씨의 위세를
말해주는 부분이 아닐까 생각된다.
현재 17대손까지 거주하고 있으며, 사손인 龍植(1936생)의
주관으로 1995년 운당리에 진천현감공 이하 모두 15대 34위의
장자·장손의 묘소를 이장하여 모시고 있다.
묘소입구에는 해방이후 이전한 안원군파 재실이 있다.
15) 김완(金浣)
안원군 公亮에게는 모두 3子(완,척,주)가 있었는데,
장자인 진천현감 浣은 자를 정숙(靜叔)이라 하였고 진천현감을
지냈으며 증직으로 좌승지를 추증받았다. 부인은 안동강씨이고
묘소는 율목동에 있던 것을 이장하였는데 이장시 명기
(明器 : 조선시대 士族들의 묘소에 함께 묻는 부장품)가 출토되어
사손이 보관하고 있으며 목관과 복식도 그대로 출토되었다고 한다.
목관은 7자×8자반의 겹관으로 복식은 누비이불등의 고급 복식이
400년 넘게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고 관끈도 그대로 보존되어
그 끈을 잡고 운구하여 이장하였다 한다.
차자인 척(滌)의 후손들은 전라도 광산으로 이거하였고, 3자인 주
(澍, 1512∼1563)의 후손들은 경기도 여주일대에 거주하고 있다.
16) 김충남(金忠男, 1530∼1618)
浣의 아들인 충남(忠男, 1530∼1618)은 자를 서경(恕卿)이라 하였고
퇴계 이황의 문인으로 1564년(명종19) 생원시에 합격하여 학행으로
천거를 받아 교관에 올라 토산현감을 역임하였다. 89세로 장수하여
수직(壽職)으로 통정대부에 올랐으며 호조참판을 증직받았다.
퇴계 이황의 문인록인 [도산급문제현록](陶山及門諸賢錄)에 실려
있다.忠男은 아들이 없어 壽男(공량弟 公奭의 후손)의 子인 엽(曄)을
양자로 받아들였는데, 군위현감과 壽職으로 동지중추부사에 올랐다.
○안원군파에서는 文科급제 1명(환), 生員進士급제 6명
(충남, 원후, 인, 철, 정운, 정신), 武科에 21명(숙, 근후, 구, 언국,
명구,숙, 현국, 명악, 명혁, 정삼, 중국, 명익, 영수, 주영, 좌국,명준,
영택,정서, 정덕, 사묵)이 급제하였다. 조선조 사마방목을 보면
忠男의 부친 완(浣)은 봉렬대부 行진천현감을, 元厚의 부친
엽(曄)은 통훈대부 行활인서별제를, 철( +喆)의 부친 명준(命峻)은
통정대부 行장연현감 해주진관명마절제도위를 지냈음을 알수 있고,
이외에도 안렴사공파 세보를 보면 구(石+求)는 구례현감을,
명혁(命赫)은 여산도호부사를, 정상(鼎相)은 경흥부사를,
좌국(佐國)은 다대첨사를, 정덕(鼎德)은 정평부사를 지내고
분무원종훈에 책훈되었음을 알 수 있다.
○안원군파 후손으로 在完은 1950년대에 지방의회의원과
교육위원회위원을 역임하였고, 在元은 근 30여년간을 오직
종사에 헌신하였으며, 현재 태원, 재은, 호식은 사손 용식과
함께 종사일이면 남다른 정성을 보여주어 종인들의 모범이 되고 있다.
또한 在龍(1956생)은 안렴사공 인터넷 홈페이지
(http://hgdryj.hihome.com)를 개설하여 운영하고 있다.
○참고로 운당리에는 안원군파 외에도 안렴사공 후손이 많이
세거하고 있는데, 공석(公奭)후손 엽(曄)이 공량(公亮)후손 忠男의
양자로 들어올 때, 형 엽(曄)을 따라 이거해 온 담(曇)의 후손이
세거하고 있으며, 1980년대초 청와대 경제수석을 지낸
在益(1938∼1983)은 그의 후손이다. 또한 공언(公彦)후손 일파가
이거하여 세거하고 있으며,漢植(1962생)은 현재 연기군의회의원
(2002년 당선)으로 활동하고 있다.
***위 내용은 <안렴사공파 세보>와 <연기지역의 충렬공 후예들,
1997, 안동김씨 연기군종친회> 책자를 저본으로 하여 몇가지
자료를 추가하여 편집하였음***
30) 김재익(金在益, 1938-1983)
경제학자·행정가. 서울 출생. 1960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을
졸업하고 1962년 서울대학교 대학원을 수료한 다음 1960년까지
미국 하와이대학 대학원에서 경제학을 전공하였고, 다시 미국
스탠포드대학 대학원에 입학하여 1973년 경제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1974년까지 한국은행 조사역,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강사 등을
거친 뒤 경제기획원 비서실장을 시작으로 한국경제의 근간을
다루는 경제기획원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 1975년 경제기획원
경제기획관, 1976년 경제기획원 기획국장, 1980년 경제기획원
경제협력차관보 등을 역임하였다.
제5공화국이 출범하면서 대통령비서실 경제수석비서관으로
발탁되어, 한국경제의 성장과 안정은 저금리·저물가정책을
기초로 하여야 한다는 평소 그의 경제관을 경제정책에
반영하였으며, 그의 경제정책은 이후 계속 한국경제계획의
기저가 되었다.전두환(全斗煥) 대통령의 버마(지금의 미안마)
예방을 수행하였다가 1983년 10월 9일 아웅산사태로 순직하였다.
◇ 김재익의 프로필 <시대의 선각자 김재익 (이순자, 1998)>
1938년 11월 26일 서울에서 부친 金應默과 모친 姜炳周 사이에서
9남매의 막내로 출생.그는 충남 연기군 전의읍 소정리 소지주의
집안에서 태어난다. 그러나 6.25는 그의 가정에 치명타를 입힌다.
아버지를 잃게 되고 형제들은 풍지박산된다.서울대에서 강의를 하던
형과 당시에 대학에 다녔던 두 형들 모두 행방불명이 된다. 6.25는
모든 국민에게 고통을 주었지만 김재익의 가정에 유달리 가혹한
시련을 안겨 주었다.
---김재익은 1938년 11월 26일 충남 연기군 전의면에서 부친
안동김씨 金應默과 모친 姜炳周와의 사이에 6남 3녀중 막내로
출생한다. 부친은 김재익의 어린 시절에 인민군에 의해 학살당했다.
서울로 이사온 김재익 형제들은 홀어머니의 양육을 받으며 어렵게
살았다. 가난 속에서도 김재익은 구김살 없이 밝은 웃음을 잃지
않으며 성장했다. 서울 삼청국민학교와 경기중고를 다닐 때 늘상
모범생이었다.
---서울로 이사와 홀어머니 밑에서 어렵게 산다. 그래도 그는 밝고
명랑하고 구김살 없이 소년시절을 보낸다.
종교적으로는 독실한 가톨릭 가정이었다. 그의 누님 두 분이
수녀였다. 큰 누님 김재순은 수녀로서 성심여대 총장을 지냈고,
둘째 누님 김재숙은 성심수녀원 원장을 지냈다.
독실한 천주교인어어서 그랬는지 그는 성직자의 인상을 강하게
풍겼다.
김재익은 대학을 졸업하던 해인 1960년 봄 당시 취직시험으론
가장 어렵다던 한국은행 공채시험에 당당 수석합격한다.
김재익은 한국은행에 재직중인 62년 봄 혜화동 성당에서
李淳子씨와 결혼, 그뒤 韓會(63년생), 承會(71년생) 등 두 아들을
두었다.
이에 따라 김재익은 스탠포드로 옮겨가 본격적인 학구생활에
들어갔다. 부인 이순자도 하와이대에서 취득한 도서관학
석사학위를 인정받아 스탠포드대 도서관에 취직했다.
전 대통령은 김재익의 사람됨이나 경제이론 면에서 나라의
보배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의 문상차 미망인 李淳子 여사를
만났을 때 국보적 존재를 잃었다고 하면서 애도의 정을
표시하였다.그가 얼마나 뛰어났으면 스탠포드대학에서 후에
그를 기리기 위해 세미나 룸 하나를 김재익 룸으로
명명하였겠는가.
◇<경제는 당신이 대통령이야>
(1992 5판, 이장규, 중앙일보사)
---1980년대 초반 청와대 경제수석 시절의 활동이 많이
게제되어 있다.
◇<시대의 선각자 김재익>
---전 청와대 경제수석 추모문집
(1998.09.02)
83년 버마 아웅산 사태 때 비운의 생을 마친
김재익(1938∼1983)
당시 청와대 경제수석 추모 문집. 엘리트 경제관료 김재익을
회고하는 경제관련 인사들의 글 5편, 낙천적인 선비로서 그를
기억하는 친 구들의 글 15편, 가족들의 글 6편 등을 부인 이순자
(숙명여대 문헌정 보학과)교수가 엮었다.
***
㊟안동김씨 대종회 홈페이지에서
"근대 인물"게시판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32) 김재익(金在益,翼元公派) :
전 대통령경제수석비서관(卒)
***
♠ 성심여대총장 김재순 ---김재익의 큰 누님
가톨릭대 성심교정(경기도 부천시 역곡동) 김재순부총장(수녀)
고령자 전형제도 고안 (1996.04.23). 수녀 신분의 김재순
가톨릭대부총장(68·전성심여대총장)이 환경운동 연합
(사무총장 최열)의 공동대표로 선출 (1996.02.07).
아웅산 사건때 숨진 김재익 경제수석의 누님인 김재순부총장은
51년 화학과를 졸업한 이후 미국 위스콘신대(밀워키)를 나와
58년부터 성직생활에 몸담아 왔다. 64년 이후 줄곧 성심여대
(94년 10월 가톨릭대로 통합)에서 근무해왔다. 성심여대 교수로
생활하면서 93년 총장직까지 올랐던 김부총장은 성심여대가
가톨릭신학대 및 가톨릭의대와 합쳐 가톨릭대로 통합되면서
부총장직을 맡아왔다.
■ 전 국회부의장/김재광씨 별세 (1993.01.04)
13대 국회에서 국회부의장을 지낸 김재광씨(70)가 3일 오후
4시 30분쯤 연세대 세브란스 병원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김씨는 서울시 의원으로 정계에 입문, 6대 총선때 서울
서대문구에서 국회에 진출한 뒤, 정치 활동 규제에 묶인 11대를
제외하고는 이곳 한곳에서 연속 7 선을 기록했다. 초선인 6대때는
한-일 국교정상화에 반대해 의원직을 사퇴하는 결단성을
보였고,구 신민당에서 당3역, 최고위원 등을 지냈다. 80년대
중반에는 김대중씨의 동교동계로 분류됐으나, 87년 대선때
양 김씨의 후보 단일화 실패이후 김영삼씨와 손잡고 김 후보의
선거대책본부 장을 맡기도 했다. 아호는 서강. 부인 오학순여사
(68)와 4남3녀.가족들은 유해를 서울대병원 영안실
(764-6099,6299)에 안치 했다. 장지는 고인의 희망대로 충북
청원군 오창읍 양지리 선산이 될 것으로 보인다.
☞당초에는 고인의 희망대로 충북 청원군 오창면 양지리
선산으로 정하였으나 당시 김영삼 대통령이 국립묘지로
안장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현재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
국가유공자묘역에 안장되었다.
▲조중연 고 김재광선생 기념사업회 회장은 1997.01.03일 오전
국립묘지 애국 지사 묘역에서 제5주기 기념식을 가졌다.
60) 김사달 (金思達, 1928-1984)
思達(1928-)은 의학박사, 국회문공위원, 서예가로 묘는 청천
도원리 방축산에 있고, 아들 在燦(1951-)은 의학박사,
在善(1957-)은 의학석사,딸 在京(1957-)의 부군 신영관은
의학박사이다.
■ 서봉 김사달 박사 일대기
<영광은 햇빛처럼, 1990, 박형규 저, 범우사 간)
머리말
서봉 김사달 박사는 당대 우리나라의 才士로 가위 입지전적
인물이다.그는 일찍이 국민학교만 수학한 후 獨苦學으로
입신하여 여러 분야의 정상을 쟁취한 인간승리의 한 표본이다.
그는 애석하게도 57세를 일기로 타계했으나 그가 이룩한 업적은
실로 우리들 凡人의 상상을 초월한다. 그는 스스로 이르기를
'나는 50평생으로 생을 마치지만 150년은 산 것만큼 일을
했다'고 했다. 이것은 결코 자만도 아니요 과장도 아니다.
그는 초중등학교 교원으로부터 출발하여 의학박사, 전문의,
대학교수,보건행정가, 문교정책가, 국회 전문위원, 정치인,
저술가, 서화가, 문필가,체육인, 도안사 겸 畵工, 필경사,
편집기술자, 심지어 태권도 명예 5단에 기합술과 최면술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다양한 발자취를 남긴 奇人스러운 경력과
행적의 주인공이다.
그는 40여 권의 저서, 200여 편의 논문과 평론, 수백 편의 수필,
100여 개의 碑文과 懸板書, 수백 점의 서화 등을 남기고 체육상,
저작상, 수필문학상,서예대상(국무총리상 및 문공부장관상)을
수상하였으며, 특히 서예는 국전 심사위원까지 역임한 당대 명필의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人間勝利譜는 실로 그의 처절한 인간투쟁을
통해 기록된 것이다. 그러기에 그의 일생은 우리에게 한 없는
감동과 경외의 念을 자아내게 하며, 더없이 값진 교훈과 분발심을
안겨준다.
그의 생애는 그대로 삶의 지혜이며 성공의 비결이다.
이에 나는 굽힐 줄 모르는 그의 인간투쟁의 역정과 빛나는 생애를
그려 후진들의 귀감으로 제공하기 위하여 감히 무딘 붓을 들었다.
그러나 필자의 둔필로 과연 얼마만큼 그의 진면목을 제대로 독자
여러분에게 전할 수 있을는지 두려움이 앞선다. 오직 江湖諸賢의
질정과 성원을 기대할 따름이다.끝으로 이 책의 출판을 위해
애써주신 범우사의 윤형두 사장을 비롯한 관계인사 여러분에게
깊은 감사를 드리는 바이다. 1990년 5월 박형규
■ 김사달 연보
서봉 김사달 . 西峰 金思達 (1928-1984)
1928 충북 괴산生
1943-52 청주사범대강사 및 세광고등학교교사
1961-67 수도의대교수
1968 국회전문위원
1984 대한민국예술대전심사위원
1975 국전 국무총리상
1976 국전 문공부장관상
1977-78 국전 추천작가
1968 서화개인전 신문회관
1971 서화개인전(7.8-13) 중앙공보관
1971 서화개인전(7.15-20) 청주문화원
1971 서예개인전(7.23-30) 괴산문화원
1974 도서화개인전(7.9-15) 신문회관
1975 한.중서법전 대만 국부기념관
1976 한.일친선서도전 일본 동경,오사카
1977 한.중.일서예교류전 중국,일본등
1982-84 '82,'84현대미술초대전 국립현대미술관
西峰 金思達은 의학박사로 서예가(書藝家)로서도 당대
이름을 떨쳤으며 그림도 잘 하였다. 국전서예부 문공부장관상,
국무총리상,심사위원 역임하였다.
***************
10.(익원공:사형)
~'인물사'中 일부 발췌(拔萃)
29)백범 김구 선생(白凡 金九先生)
(1876년 고종13년∼1949년. 74세)
김구선생은 초명이 창수(昌洙)(會), 호는 백범이고
익원공 김사형의 21세손이며, 참의공 김황의 18세손으로
전 교통부장관과 국회의원을 지낸 김신(金信)의 선친이다.
선생은 황해도 해주 백운방 텃골에서 아버지 김순영
(보명재하, 在夏)과 어머니 현풍곽씨 곽낙원(郭樂園)의
사이에서 외아들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학문을 배웠고,
17세에 과거보러 갔다가 풍기가 문란하여 분개하여 돌아와
18세에 동학에 들어가 접주가 되어 교도 700명을 끌고서
탐관오리들과 싸우다가, 안중근의사의 부친인 안태훈 공에게
가서 고능선 선생의 지도를 받으니 그의 나이 20세였다.
그해 8월 명성황후가 일본인의 손에 시해되자 울분한 생각을
참지 못하고, 표연히 길을 떠나 압록강을 건너 만주 각처를
유랑하다가 국내에서 의병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돌아와,
그 이듬해 2월 안악군 치하포에서 일본군사간첩 육군중위
토전양란이란 자를 죽임으로서 지난해 국모를 시해한 원한을
풀기는 하였으나, 그로 인해 내부의 명령으로 체포되었다.
인천감옥에 옥살이를 하는동안 어머니가 식모살이를 해가며
옥바라지를 한 것은 특기할 일이거니와 선생은 사형결정 혹은
집행 보류 등 앞날이 확정되지 않은 채로 23세인 해 3월 7일밤에
탈옥을 감행하여 방랑하다가 공주마곡사에서 스님이 된 것도
또한 기구한 운명이다.
몇 년 후에 속세로 돌아와 아버지를 여의고, 예수를 믿고 해주
최준례와 결혼하니 29세였다. 30세에 을사 매국조약이 체결되자
서울로 올라와 이준 등과 함께 조약 철회를 상소했으나,
여의치않자 이동영, 안창호 등과 신민회를 조직하여 구국운동을
일으켰다.
36세때 사내총독 암살사건에 앞서 안명근 사건에 연루되어
또 다시 체포되어 17년 징역 판결을 받고 옥에 있을 때, 왜경은
선생을 새로 산 밭의 돌맹이 같은 자라 했으나, 어머님이 찾아와
네가 경기 감사가 된것 보다 더 기쁘다고 했으며, 선생은 항상
눈물로 구국 기도를 하되 우리나라가 독립되어 우리 정부청사를
쓸고 닦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게 해주소서 하고 기원하였으며,
차츰 형기가 줄어 39세 7월에 가석방되어 몇해동안 교육에
전념하였다.
44세때 3.1만세 운동이 일어나 분연히 결심하고서 조국을 떠나
상해로 건너가 임시정부의 경무국장에 취임하면서부터
조국 광복을 위한 해외 활동이 시작되었다. 51세에 임시정부
국무령이 되니 국내에서 민족단일전선으로 신간회가 결성된
해이다. 그 이듬해 한국독립당을 조직하니 광주 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난 해이기도 하다. 독립의 목적을 달성키 위하여 파괴의
방법을 쓸 수밖에 없어 56세 되던 해 겨울 이봉창 의사를 일본에
보내어 일본천황 히로히토를 저격하는데 쓸 자금과 수류탄을 주어
동경으로 보내어 이듬해 1932년 1월 8일 왜왕을 저격케 하였으나
불행이도 적중하지 못하고, 이봉창 의사는 체포되어 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그해 10월 10일에 32세로 순국하였다.
선생은 계속하여 다시 윤봉길 의사로 하여금 같은해 4월 29일
상해 홍구공원에서 만주침략의 괴수 시라카와 대장을 폭살케하여
우리민족의 애국투쟁 정신을 크게 떨쳤으나, 윤봉길 의사는
왜놈의 형장에서 12월 19일 25세 나이로 순국하였다.
선생으로 인하여 국제적인 신임을 얻게 되어 중국 장개석 총통과
서로 만나 낙양군관학교에 독립군 특별반을 두어 한중합작으로
항일투쟁에 대처할 것을 합의했으며, 63세때 임시정부 주석이 되고
그해 5월 일본 특무기관의 꼭두각시가 된 반역자의 총탄에 맞아
중태에 빠졌다가 소생하니 줄기찬 뜻은 꺾일 수가 없었다.
다음해에 임시정부를 중경으로 옮기고, 각 정당을 통합하여
한국독립당 집행위원장에 취임 한국광복군을 조직하고 일본에
선전포고를 했으며, 이집트 카이로 회담에서도 독립보장을
받았으나 70세되던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함으로서
역사는 하루아침에 바뀌어졌다. 그러나 세상을 여윈 동지들,
어머니, 그리고 부인과 맏아들 인(仁)이 광복의 기쁨을 같이
누리지 못한 것이 슬펐다.
임시정부 국무위원들과 함께 11월 23일, 망명생활 27년만에
조국땅을 밟으니 감개가 무량하였다.
고국으로 돌아온 직후 모스코바 삼상 회의에서 발표한 한국
신탁 통치안에 대대적인 반대 운동을 전개하였으며, 이듬해
71세에는 민주의원 총리가 되고 다음해에는 국민의회 부주석에
선임되었다. 남한만의 선거를 실시하게 되자 조국의 분단이
영구화 될 것을 걱정하여 적극적으로 반대하였고, 73세 되던해
4월 19일에는 통일을 위하여 남북협상을 시도하기에 이르렀다.
비록 뜻을 이루지는 못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민족적 의무였던
것이다.
그로부터 통일은 차츰 멀어만 갔건마는 선생은 변함도 굽힘도 없이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이오 하고 말과 글로
외치며, 무릇 역사 행진이란 그 방향을 출발점으로부터 바로잡지
않으면 안됨을 애타게 부르짖다가, 그 이듬해 1949년 6월 26일 정오
경교장에서 흉한 안두희의 저격을 받아 숨을 거두시니,국민은
큰 지도자를 잃었고 통일과업은 역사의 숙제로 남게 되었고,드디어는
6.25 같은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는 등 날이 갈수록 앞길이 어두어져만
갔다.
그러나 우리 가슴속에 새긴 선생의 뜻과 정신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며, 더욱 남북한이 동시에 유엔에 가입한 현시점에서
감회가 깊지 않을 수 없다.
매년 양력 6월 26일 효창공원 묘소에서 추모제
(신미보 1권 78쪽, 기미대보 8권 48쪽).
백범 김구 선생 기념관은 효창운동장 옆에 대지면적 5,552평,
건물 연건평 2,929평, 지하층 지하1층 주차장, 사무실, 자료실,
전기기계실 등 지상층 1,844평, 지상 2층 전시실, 전시홀,
다목적실, 회의실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공사기간은 2001.5.12∼2002.10.5(17개월),
총 사업비는 180억원(국고보조금 160억, 모금 20억)이
소요되었다.
출처:[안동김씨 대종회]
***************
7."(안렴사공:사렴)"
~ '주요 조상님 소개'中 일부 발췌(拔萃)
http://www.andongkimc.kr/htmls/pa/ankim04-pa13.htm?
10.(익원공:사형)
~'인물사'中 일부 발췌(拔萃)
http://www.andongkimc.kr/htmls/pa/ankim04-pa14.htm?
***************
구[선]안동 김씨와 신[후]안동 김씨
-유래,계파,대표적 인물,항렬
https://cafe.daum.net/kimhub/HYM0/29
***************
한국의 성씨-안동 김씨의 분파와 인구,안동 김씨 주요 인물들
https://blog.naver.com/gdlsg/22231014148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