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아비달마순정리론 제42권
4. 변업품 ⑩
5.7. 업도의 성취조건
1) 살생업도의 성취조건
여기서 마땅히 업도를 성취하는 상(相)에 대해 사택(思擇)해 보아야 할 것이다. 어떠한 근거[量]에 부합하여야 ‘살생’이라 이름하는 것이며, 내지는 어떠한 근거에 부합하여야 ‘사견’이라고 이름하는 것인가?
바야흐로 먼저 살생의 상에 대해 분별하리라.
게송으로 말하겠다.
살생은 고의적인 의지[故思]와 다른 유정과,
다른 유정이라는 생각과 착오 없이 죽임에 의해 성취된다.
논하여 말하겠다.
[살생의 업도는] 요컨대 먼저 죽이려고 하는 고의적인 의지[故思]를 일으키고, 다른 유정에 대해 다른 유정이라는 생각을 갖고, 살생의 가행을 짓고, 그리고 착오 없이 죽이는 것―이를테면 오로지 그만을 죽이고 부질없이 다른 사람을 죽이지 않는 것―에 의해 [성취되는 것으로], 이에 부합하는 업도를 일컬어 살생의 업도라고 한다.
혹은 [죽이려고 하는 저것이] 나무 그루터기인지, 사람인지, 만약 사람이라면 바로 [죽이려고 하는] 그 사람인지, 그 사람이 아닌지 의심[猶豫]을 품고서 ‘만약 바로 그 사람이든 그 사람이 아니든 나는 결정코 죽이리라’라고 결의하고는 되돌아보는 마음 없이 그 유정을 죽인다면, 이 역시 살생의 업도를 성취하게 된다.1) 이처럼 결정적으로 행하거나 혹은 의심하면서 행하거나 간에 다만 살생의 인연만 갖추었다면, 그것은 모두 살생의 업도를 성취하게 되는 것이다.
찰나멸[의 온(蘊)]에 대해 어떻게 살생의 업도를 성취할 수 있는 것인가?2)
어찌하여 성취할 수 없다는 것인가?
살생의 뜻[義]이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중생의 목숨으로서 과거의 것은 이미 소멸하였고, 현재의 것은 스스로 소멸하고 있으며, 미래의 것은 아직 생겨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필시 살아있는 것의 목숨을 죽인다는 이치는 이루어질 수 없거늘 어떻게 그것을 소멸시킨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바람이나 손이] 등불이나 요령소리[를 소멸시키듯이] 그것에 준하여 역시 마땅히 살생의 뜻도 회통될 수 있으니,3) 이를테면 당래의 목숨을 장애하여 마땅히 생겨나야 할 것을 생겨나지 않게 한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즉 악심을 일으켜 살생의 가행을 행함으로써 죽임을 당하는 자의 현재의 목숨이 끊어질 때 능히 [그것(현재의 목숨)을] 원인으로 하여 [더이상] 동류의 목숨을 인기하지 않게 하고, 마땅히 생겨나야 할 목숨을 장애하여 영원토록 생겨나지 않게 하기 때문에 ‘살생’이라 이름한 것으로, 이로 말미암아 [살생의] 죄를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끊어지는 명근 즉 목숨은 누구에게 소속된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이를테면 명근이 만약 존재하지 않으면 그는 바로 죽은 자라고 해야 할 것이다. 즉 [계경에서는] 이러한 명근이 근거하고 있는 소의신을 제6전(轉,소유격)의 말로 설하여 서로에 계속(繫屬)된다는 뜻을 나타내었으니, 가타(伽他)에서 ‘목숨과 체온’ 등으로 말하여 설한 바와 같다.4) “목숨과 체온, 그리고 의식
이 세 가지 법이 몸을 버리게 될 때
그것이 버려진 몸은 나자빠지니
어떠한 생각도 없는 나무둥치와도 같다.”
를 말하는 것으로(『구사론』 제16권, 고려장27,p.575중; 대정장29,p.86하; 권오민 역,p.750), 본론 제13권 ‘명근’에서도 인용되고 있다. 즉 여기서의 논의는 목숨을 갖는 주체 즉 자아에 관한 것으로, 이러한 가타로 볼 때 목숨은 자아가 아니라 소의신에 소속된다.
따라서 실유의 자아가 아니라 유근신(有根身)이 목숨을 갖는 것이라고 해야 하니,5) 그 이치는 결정코 그러한 것이다.
2) 불여취의 성취조건
이미 살생에 대해 분별하였으니, 이제 마땅히 불여취(不與取)에 대해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불여취(주지 않은 것을 취하는 것)란 다른 이의 물건을
강제로, 혹은 슬며시 절취하여 자신에 소속시키는 것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앞(살생)에서 설한 ‘착오 없이’라고 하는 말 등은 그것이 상응하는 바대로 뒤(즉 욕사행)에까지 적용되기 때문에 [본송에서는 되풀이하여 설하지 않은 것이다]. 즉 요컨대 먼저 훔치려고 하는 고의적인 의지[故思]를 일으키고, 다른 이의 물건에 대해, 다른 이의 물건이라는 생각을 일으키고, 혹은 강제로, 혹은 슬며시 훔치려는 도둑질의 가행을 일으키고 착오 없이 취하여 자신에게 소속시킬 때, 이에 부합하는 업도를 일컬어 ‘불여취의 죄’라고 한다.
그런데 만약 졸도파(窣堵波, stūpa, 탑)의 물건을 훔쳐 취할 경우, 부처님에 대한 죄를 획득하게 되니, 그것들은 모두 부처님께서 장차 열반에 들고자 하였을 때 세간이 시여한 것을 받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어떤 이는 설하기를, “이러한 불여취의 죄(솔도파의 물건을 훔치는 죄)는 그것을 수호하는 자에 대한 것이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럴 경우 그가 그것을 제멋대로 하더라도 아무런 죄가 없다고 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앞의 설이 이치상 뛰어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망승(亡僧) 즉 죽은 스님의 물건을 훔쳤을 경우, [죽은 스님이] 만약 이미 갈마(羯磨)를 지은 자라면 결계(結界) 내의 스님들에 대해 투도의 죄를 획득하게 되지만, 갈마를 아직 마치지 않은 자라고 한다면 일체의 모든 스님들에 대해 투도의 죄를 획득하게 된다.6)
나아가 만약 다른 이의 사람이나 코끼리, 말 등을 훔쳤다면, 그것이 머물고 있던 처소에서 나올 때 비로소 [투도의] 업도를 성취하게 된다.
3) 욕사행의 성취조건
불여취에 대해 이미 분별하였으니, 이제 마땅히 욕사행(欲邪行, 사음)에 대해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욕사행에는 네 가지 종류가 있는데
마땅히 행해서는 안 될 것을 행하는 것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마땅히 행해서는 안 될 것[不應行]을 행하는 것에는 모두 네 가지의 종류가 있으니, 이것들을 모두 ‘욕사행의 죄’라고 말할 수 있다.
첫째는 행해야 할 대상이 아닌 이[非境]에 대해 행하는 것이니, 이를테면 다른 이에 의해 수호되고 있거나 혹은 어미, 혹은 아비, 혹은 부모의 친척이나 나아가 지아비에 의해 수호되는 자에 대해 행하는 것을 말한다.
둘째는 행해야 할 곳이 아닌 곳[非道]으로 행하는 것이니, 이를테면 설사 자신의 처라고 할지라도 입이나 그 밖의 다른 곳으로 행하는 것을 말한다.7)
셋째는 행해야 할 처소가 아닌 곳[非處]에서 행하는 것이니, 이를테면 제다(制多)나 사원 안, 혹은 형처(逈處)에서 행하는 것을 말한다.8)
넷째는 행해야 할 때가 아닌 때[非時]에 행하는 것이니, 이를테면 임신하고 있을 때나 아기에게 젖을 먹이고 있을 때, 재계(齋戒)를 받고 있는 동안에 행하는 것을 말한다.9)
그런데 어떤 이는 설하기를 “만약 지아비가 재계를 받는 것을 허락하여 놓고도 범하였을 경우에 비로소 ‘때가 아닌 때 행하는 것’이라고 한다”고 하였다.10)
또한 앞에서 이미 언급한 ‘착오 없이’라고 하는 말은 여기에도 역시 적용된다. 따라서 만약 다른 이의 부인을 바로 자신의 처인 줄 알았거나 혹은 자신의 처를 다른 이의 부인으로 여겨 행해야 할 곳이나 행해야 할 곳이 아닌 곳 따위로 행하였을지라도, 다만 착오로 행하였을 경우에는 업도가 아니다.
만약 다른 이의 부인에 대해 또 다른 어떤 이의 부인이라고 생각하고서 비범행을 행하였을 경우에는 [어떠한가?]
이에 대해 어떤 이는 설하기를 “역시 [욕사행의 죄를] 성취하니, 가행과 [업도를] 수용할 때 그것이 다 같이 다른 대상(다른 이의 부인)에 대한 것이었기 때문이다”고 하였다.11) 또한 어떤 이는 설하기를 “살생의 업도처럼 성취하지 않으니, 가행과 [업도가] 구경에 이를 때 현전하는 경계가 각기 다르기 때문이다.12)
그리고 필추니(苾芻尼) 등의 경우, 계(戒)를 지닌 처와 같아서 만약 침범한다면 역시 업도를 성취하는데, 이에 대해 어떤 이는 설하기를 “이러한 욕사행의 죄는 그녀가 머물고 있는 곳의 왕에 대한 것이니, 그가 능히 호지(護持)하였을 뿐더러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그러나 국왕 자신이 범한 경우에도 역시 업도를 성취하기 때문에 앞에서 설한 바가 이치상 뛰어난 것이라 할 수 있다.13)
4) 허광어의 성취조건
욕사행에 대해 이미 분별하였으니, 이제 마땅히 허광어(虛誑語, 거짓말)에 대해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염오심에서, 달리 생각하여 발언하고,
그 뜻을 이해할 때 허광어가 [성취된다].
논하여 말하겠다.
말하고 듣는 힘으로 말미암아 허광어가 성취되니, 이를테면 말해야 할 것에 대해 달리 생각하여 발언하고,14) 아울러 속아 넘어 가는 자는 그렇게 설해진 말의 뜻을 [착오 없이] 이해하여 [말한 자의] 염오심과 어긋남이 없을 때 비로소 허광어의 업도를 성취하게 된다. 그러나 만약 속아 넘어 가는 자가 아직 이해하지 못하였다면, 그것은 꾸며낸 말, 즉 잡예어(혹은 綺語)에 포섭될 뿐이다.
말은 다수의 글자로 이루어져 있기에 요컨대 최후 찰나의 [글자와 구생하는] 표업과 무표업이 바야흐로 [이러한 허광어의] 업도를 성취한다.15) 혹은 때에 따라 속아 넘어 가는 자가 그 뜻을 이해할 때 바로 이러한 업도를 성취한다. 그리고 앞의 글자와 함께 작용하는 [표ㆍ무표업]은 모두 이것의 가행이다.
여기서 ‘뜻을 이해하였다’고 함은 속아 넘어 간 이가 ‘능히 이해한 것[能解]’에 근거하여 ‘이해하였다’고 말한 것이지 그 뜻을 ‘올바로 이해한 것[正解]’에 근거하여 말한 것이 아니다.16)
‘능히 이해하였다’고 함과 ‘올바로 이해하였다’고 함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전자는 이를테면 이해하는 것이 이식(耳識)에 머물 때(다시 말해 이식에 의해 이해할 때)를 말하며, 후자는 이를테면 능히 그 뜻을 올바로 분별하는 때를 말한다. 그리고 만약 그 뜻을 올바로 이해하였다면, 이는 바로 의식(意識)에 의해 알려졌다는 뜻이니, 어표업(語表業)은 이식과 동시에 소멸해 버렸기 때문으로, 이러한 업도는 오로지 무표업이라고 해야 하는 것이다.17) 그렇기 때문에 이치상 마땅히 뛰어난 뜻을 말하자면, ‘이식의 상태에 머물 때(다시 말해 속아 넘어 가는 자가 이식에 의해 이해할 때) [허광어의] 업도가 성취된다’는 것이니, 능히 속이는 자는 [이 때] 표업과 무표업을 모두 갖추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떤 이는 말하기를 “속아 넘어 가는 이가 이해하였든 이해하지 못하였든 다만 [말해야 할 것에 대해] 달리 생각하여 말하면 [허광어의] 업도는 성취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는 그렇지 않으니, 그럴 경우 이간어의 경우도 동일하다고 해야 하기 때문으로, [이간어의 업도 역시] 인정[忍]하든 인정하지 않든 요컨대 이해할 때 비로소 성취한다고 해야 하는 것이다.
4-1) 방론-견(見)ㆍ문(聞)ㆍ각(覺)ㆍ지(知)에 대하여
그런데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온갖 말에는 간략히 열여섯 가지가 있다. 이를테면 보지 않고[不見], 듣지 않고[不聞], 알지 못하고[不覺], 인식하지 못한 것[不知]에 대해 실로 ‘보았다’는 등으로 말하고, 본 것 등에 대해 ‘보지 않았다’는 등으로 말하는 이와 같은 여덟 가지 종류의 말을 일컬어 성자가 아닌 이의 말[非聖言]이라고 한다. 그리고 보지 않은 것 등에 대해 ‘보지 않았다’는 등으로 말하고, 본 것 등에 대해 실로 ‘보았다’는 등으로 말하는 이와 같은 여덟 가지 종류의 말을 일컬어 성자의 말[聖言]이라고 한다.”18)
그 무엇을 일컬어 ‘보여진 것’ 등이라고 하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안식ㆍ이식ㆍ의식과 아울러
다른 세 가지 식에 의해 증득된 것을
그 순서대로 일컬어
보여지고 들려지고 인식되고, 알려진 것이라고 한다.
논하여 말하겠다.
만약 어떤 경계대상이 안식(眼識)ㆍ이식(耳識)ㆍ의식(意識)과 그 밖의 식(鼻ㆍ舌ㆍ身識)에 의해 증득된 것이면, 그것을 순서대로 ‘보여진 것[所見]’ 등이라고 이름한다.19) 즉 비(鼻)ㆍ설(舌)ㆍ신근(身根)은 직접 접촉한 대상[至境]을 취하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아는 것[覺]’이라고 이름하였으니,20) 다른 경에서도 결정코 그러한 세 근에 의해 파악된 것을 ‘알려진 것’이라고 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부처님께서 대모(大母)에게 말하였다.
그대의 생각은 어떠한가? 존재하는 모든 색으로서 그대가 지금 눈으로써 보는 것도 아니며, 그대가 일찍이 본 것도 아니며, 그대가 앞으로 볼 것도 아니며, 보려고 희구한 것도 아니라면, 그대는 이것으로 말미암아 욕(欲)을 일으키고, 탐(貪)을 일으키고, 친(親)를 일으키고, 애(愛)를 일으키고, 아뢰야(阿賴耶)를 일으키고, 니연저(尼延底)를 일으키고, 탐착을 일으킨다고 할 것인가, 그렇지 않다고 할 것인가?21)
그렇지 않습니다, 대덕이시여.
그렇다면 존재하는 모든 소리로서 그대가 지금 귀로써 들은 것도 아니며……(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나아가 존재하는 모든 법(法, 즉 비감각적 대상)으로서 그대가 지금 마음[意]으로써 인식한 것도 아니며……(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그렇지 않습니다, 대덕이시여.
[부처님께서는] 다시 대모에게 고하기를 ‘그대는 여기서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보여지는 것[所見]에는 오로지 보여진 것만이 존재할 뿐이다. 또한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들려지는 것[所聞]ㆍ알려지는 것[所覺]ㆍ인식되는 것[所知]에는 오로지 들려진 것ㆍ알려진 것ㆍ인식된 것만이 존재할 뿐이다’고 하였다.”22)
즉 이 경에서 이미 색(色)ㆍ성(聲)ㆍ법(法)의 경계대상에 대해 보여지는 것ㆍ들려지는 것ㆍ인식되는 것이라고 설하고 있으니, 이에 준하여 그 밖의 경계대상(향ㆍ미ㆍ촉)에 대해서는 결정코 ‘알려지는 것’이라고 해야 하는 것이다. 만약 이 같은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알려지는 것’은 무엇을 의미한다고 하겠는가? 또한 향 등의 세 가지 경계대상은 ‘보여지는 것’ 등이 아니므로, 그러한 세 가지 경계대상에 대해서는 마땅히 언급하지 않았어야 하는 것이다.23)
(1) 견(見)ㆍ문(聞)ㆍ각(覺)ㆍ지(知)에 대한 경주의 이설 비판
그런데 경주(經主)는 이 같은 사실을 부정하고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러한 논증은 이루어질 수 없으니, 경의 [앞뒤의] 뜻이 다르기 때문이다. 즉 부처님께서는 이 경 중에서 앞서 언급한 [견(見)ㆍ문(聞)ㆍ각(覺)ㆍ지(知)라는] 네 가지 상(相)을 결택 판별하려고 하였던 것이 아니다. 이 경에서 설하고자 하였던 뜻을 살펴보건대, 부처님께서는 그(대모)에게 6경과, 아울러 ‘견’ 등 앞서 언급한 네 가지 사실에 대해 그러한 것들은 다만 ‘보여지고 [들려지고 알려지고 인식된] 것’만이 존재함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고 말하여 [보여지지 않은 것 등에 대해] 애착하거나 애착하지 않는 등의 상(相)을 증익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권고한 것이다.”24)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어떠한 것을 ‘보여진 것’ 등이라고 말한 것인가?
이에 대해 유여사(有餘師)는 이같이 설하였다. “만약 이러한 5근이 직접 지각[現證]한 경계대상이면 그것을 일컬어 ‘보여진 것[所見]’이라 하며, 만약 다른 이가 전하여 설한 것이면 그것을 일컬어 ‘들려진 것[所聞]’이라 하며, 만약 스스로의 마음을 움직여 여러 가지의 이치로써 헤아려 인허한 것이면 그것을 일컬어 ‘알려진 것[所覺]’이라고 하며, 만약 의근에 의해 직접 지각된 것이면 그것을 일컬어 ‘인식된 것[所識]’이라고 하였다. 즉 5경에 대해 모두 [견ㆍ문ㆍ각ㆍ지라는] 네 가지를 일으킬 수 있으며, 여섯 번째 경계대상(즉 법경)에 대해서는 ‘견’을 제외한 세 가지를 일으킬 수 있다. 이 같은 사실로 볼 때 ‘안다[覺]’고 하는 말에도 보여진 바가 없지 않으며, 향 등의 세 경계에 대해서도 [‘보여진 것’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 아니다.”25)
그리고 [경주는] 다시 고사(古師)의 설을 인용하여 이 네 가지에 대해 달리 해석하고 있다.26)
말하자면 경주는 오로지 자신의 주장만을 펼쳤을 뿐으로, 나는 이 같은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니, 경에서는 [앞에서] 말한 [네 가지] 상에 대해 분별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나는] 다만 경(經)을 언급하여 세 근에 의해 파악되는 것[所取]을 ‘알려진 것[所覺]’이라고 논증하였을 뿐으로, [경에서] ‘알려진 것’이라는 말을 설하였기 때문이다.27) 우리의 스승과 종의에서는 이 경에 따라 ‘보여진 것’ 등의 상을 설정한 것으로, 이치상 어긋남이 없다.
비록 “그(대모)가 [‘보여지지 않은 것’ 등에 대해] 애착하거나 애착하지 않는 등의 상(相)을 증익하는 것을 막기 위해 [이 경을] 설하였다”고 하는 사실이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은 아닐지라도, [그러기 위해] 여섯 가지 경계대상과 [견ㆍ문ㆍ각ㆍ지라는] 네 가지 상을 차별하여 말하였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으니, 앞의 경과 뒤의 경은 그 뜻이 서로 유사하기 때문이다.
내가 이 경을 살펴 보건대, 여기서 대모에게 가르쳐 설한 뜻은 [이러하다]. 이를테면 삼시(三時, 과거ㆍ현재ㆍ미래)의 색 등의 경계대상 중에서 만약 보지 않은 것 등에 대해서는 희구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욕(欲) 등이 생겨나지 않는 것처럼, 이와 마찬가지로 만약 보여지는 것 등의 경계대상에는 오로지 ‘보여진 것’만이 존재할 뿐이라는 사실을 안다면, ‘욕’ 등도 역시 생겨나지 않을 것이니, ‘욕’ 등은 다만 스스로의 분별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경에서 설한 뜻에 따라 이 경문을 해석하였으니, 이는 경주가 자신의 뜻에 따라 분별한 것과 같은 것이 아니다. 그래서 뒤에 대모는 부처님의 말씀을 받아드리면서 말하기를 “저는 세존께서 설하신 뜻을 이해합니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은 가타를 설하였던 것이다].
색을 보고 나서 실념(失念)하여
망령되게 애착의 상(相)을 증익시키는 자는
마음이 바로 애염(愛染)으로 물들며
아울러 탐착에 머물게 됩니다.
그가 이러한 애염에 물듦에 따라
여러 가지 다수의 상이 현전하니
그래서 그의 마음은 항상
온갖 탐욕으로 인해 해손 뇌란[害惱]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많은 괴로움을 일으키면
이는 곧 열반에서 멀어지게 되는 것으로
애착이 멸진하여 열반에 든다고 하는 것은
일친(日親)께서 설하신 바입니다.
색을 보고 나서도 정념(正念)하여
애착의 상(相)을 증익시키지 않는 자는
마음은 애염(愛染)으로 물들지 않으며
아울러 탐착에 머물지 않게 됩니다.
그가 애염에 물들지 않음에 따라
여러 가지 다수의 상이 현전하니
그래서 그의 마음은 항상
온갖 탐욕의 해손과 뇌란에서 멀어지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많은 괴로움을 멸진하면
이는 곧 열반에 가까워지게 되는 것으로
애착이 멸진하여 열반에 든다고 하는 것은
일친(日親)께서 설하신 바입니다.28)
이와 마찬가지로 성ㆍ향ㆍ미ㆍ촉ㆍ법 각각에 대해서도 널리 설하였으며, 세존께서도 역시 이와 같은 이해를 찬탄하여 “참으로 잘 이해하였도다[善哉, 善哉]”고 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경주는 “경의 [앞뒤의] 뜻이 다르다”고 말하였지만, 진실로 설한 바와 같으니, 경의 뜻으로써 분별해 보건대 경주는 이에 대해 다르게 분별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어떠한 의취(意趣, 취지)에서 정리와 성교에 위배되게 해석하는 저 두 논사(유여사와 古師)의 해석을 가까이하고 정리와 성교를 쫓아 말한 비바사사(毘婆沙師)만을 미워하여 등지려고 하는 것인가? 바야흐로 저 두 논사의 해석은 성교에 위배된다. 즉 부처님께서는 경 중에서 ‘보여진 것[所見]’ 등의 상을 색 등의 경계대상에 대한 것이라고 분명하게 분별하여 설하였음에도 저들은 이 같은 사실을 파기하고서 다르게 건립(분별)하였기 때문이다.29)
역시 또한 성교에 따른 정리에도 위배된다. 즉 “5경 중에 각기 네 가지가 갖추어져 있으며, 여섯 번째 경계대상(즉 법경) 상에는 오로지 세 가지가 존재한다”는 등으로 설하였지만,30) 그러나 [도리어] 법경에 대해서는 ‘보여진 것’이라는 명칭을 설정할 수 있을지라도 소리 등에 대해서는 ‘보여진 것’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으로, “부처님께서는 과거ㆍ미래세의 법을 보았다(관찰하였다)”는 등으로 말하는 것과 같다. 즉 이러한 [소리 등은] 모두 의식과 함께 하지 않는 경계대상이기 때문이다. 일찍이 어떠한 성교에서도 ‘귀가 소리를 본다’거나 ‘코가 향을 본다’ 등으로 말한 일이 없는데, 어떻게 5경이 모두 ‘보여지는 것’이라 하고 오로지 여섯 번째 경계대상만은 ‘보여지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인가?
또한 저들은 스스로 설하기를 “[5경으로서] 만약 의근에 의해 직접 지각[現證]된 것이면 그것을 일컬어 ‘이해된 것[所知]’이라고 한다”고 하였는데, 법경도 이미 ‘이해된 것’이라고 하였으므로 마땅히 ‘보여진 것’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니, 색 등의 경우처럼 [의근에 의해] 직접 지각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여기에 어떠한 이치가 있어 오로지 5경으로서 [의근에 의해 직접] 지각된 것에 대해서만 ‘보여진 것’이라는 말을 설정한 것인가?
또한 뒤의 논사는 “스스로 내적으로 감수한 바와 아울러 스스로 증득한 바를 일컬어 ‘인식된 것[所知]’이라고 한다”고 해석하고 있는데,31)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보여진 것’은 어떠한 이유에서 스스로 내적으로 감수된 것이 아니라는 것인가? 그런 즉 ‘보여진 것’도 마땅히 ‘인식된 것’이라고 해야 하는 것이다. 또한 [그럴 경우] ‘알려진 것[所覺]’과 ‘인식된 것[所知]’은 마땅히 어떠한 차별도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니, 다 같이 의식이 스스로 증득한 바이기 때문이다.
또한 모든 비량(比量, 추리)에는 현량(現量, 지각)이 선행해야 하는 것으로, 이는 정리(正理)에 달통한 이들이 모두 인정한 바이다. 그런데 만약 비량의 경계대상을 바야흐로 ‘알려진 것’이라고 한다면, ‘알려진 것’은 ‘인식된 것’에 선행하는 것이라고 해서는 안 된다.32) 따라서 저 두 논사의 뜻에는 [이치에 부합하는] 단서(端緖)가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경주는 치우친 주장을 마음에 간직한 채 이 같은 올바른 종의(즉 유부의 종의)를 등지고 그러한 사설(邪說)과 함께 붕당을 짓게 된 것이다.
5) 허광어의 성취조건(續)
혹 몸으로 생각과는 다른 뜻을 나타냄으로써 망어(妄語, 즉 허광어)를 성취하는 경우가 있다고 해야 할 것인가, 그런 일은 없다고 해야 할 것인가?33)
[그러한 경우가] 있다. 그래서 논(論)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 것이다.
“혹 몸을 움직이지 않고 살생죄에 저촉되는 경우가 있는가?
그런 경우가 있으니, 이를테면 말을 발하여 [살생한 경우이다].
혹 말을 발하지 않고 망어 죄에 저촉되는 경우가 있는가?
그런 경우가 있으니, 이를테면 몸을 움직여 [거짓말하는 경우이다].
혹 몸을 움직이지도 않고 말을 발하지도 않고서 이 같은 두 죄에 저촉되는 경우가 있는가?
그런 경우가 있으니, 이를테면 선인(仙人)이 마음으로 분(憤)을 품고 있거나 업을 장양(長養)할 때가 그러하다.”34)
그런데 경주(經主)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힐난하여 말하였다.
“만약 몸을 움직이지도 않고 또한 역시 말을 발하지도 않았다고 한다면, 욕계의 무표업으로서 표업을 떠난 것은 존재하지 않는데, 이러한 두 가지의 경우가 어떻게 업도를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인가? 이와 같은 난문에 대해 마땅히 힘써 설해 보아야 할 것이다.”35)
그는 ‘실로 [이러한 두 가지 경우에는] 표업도 무표업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였지만, 어찌 이러한 두 가지 경우를 업도로 설정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 그 역시 마땅히 두 가지 죄(살생죄와 망어죄)에 저촉되는 이유에 대해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니, 단지 악한 의지[惡思]를 일으키는 것만으로는 크나큰 과실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36)
즉 만약 반드시 신(身)ㆍ어(語)의 두 갈래에 근거하여 [악한] 의지[思]를 일으키고, 죽이고 속이려는 마음을 일으켜야 [업도가 성취되는 것이라고] 한다면, 마땅히 그 역(逆)도 성립되어야 할 것이며,37) 그것이 성립되지 않을 경우 선인 등도 마땅히 동일하게 [업도를 성취한다고] 해야 하겠지만, 이미 몸을 움직이지도 않고 말을 발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업도가 성취된다는 것인가? 아울러 [선인 역시] 신(身)ㆍ어(語)의 갈래에 근거하여 [악한 의지를 일으키고, 죽이고 속이려는 마음을 일으켜야 업도가 성취된다고 해야 할 것이니], 마땅히 이와 같은 힐난에 대해 힘써 해석해 보아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나는 먼저 포쇄타(布灑他, 포살)를 행할 때의 경우에 대해 해석하리라. 몸을 움직이는 것(즉 신체적인 동작)에 의해서도 능히 말의 뜻(언어적 의미)을 나타낼 수 있고, 어(語) 업도를 낳을 수 있듯이, 만약 몸을 움직이지 않고서도 능히 말의 뜻을 나타낼 수 있다면, 업도는 역시 생겨날 수 있다. 즉 [포살을 행하는 날] 계(戒)를 설할 때, 그가 범계(犯戒)한 사실이 있으면서도 침묵함으로써 청정함을 나타내어 대중들로 하여금 모두 그러함을 알게 하였다면, 그것이 어떻게 망어의 업도를 낳지 않을 것인가?38)
[또한] 선인이 마음으로 분(憤)함을 품는 것은 다른 이에게 교사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즉 그가 유정에 대해 [성내어] 돌아보는 마음이 없으면, 비인(非人, 예컨대 귀신)이 그를 공경하여 그가 악한 마음을 지닌 것을 알고서 몸을 움직여 [유정을] 죽일 경우, 그에게는 [신(身)] 업도가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선인은 무엇을 나타내어 귀신으로 하여금 그의 마음을 알게 한 것인가?
그가 마음에 분함을 품음으로 말미암아 그의 몸과 말[투]는 필시 변화한다. 혹은 저주로 말미암아 필시 몸을 움직이고 말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유여사는 [몸을 움직이지도 않고 말을 발하지도 않고서 살생이나 망어의 죄를 범하는 것에 대해 이같이] 말하였다. “욕계에서의 일체의 무표가 모두 다 표업에 근거하여 생겨나는 것은 아니니, 예컨대 득과(得果)할 때 다섯 필추 등이 별해탈계을 획득하는 것이 그러한 경우로서,39) 불선의 경우도 역시 그렇다고 해야 한다.”
그렇지만 그(다섯 필추)는 일찍이 결정코 표업을 지녔으며, 그 밖의 경우도 역시 마땅히 그렇다고 해야 한다. 즉 선인의 경우는 앞에서 설한 바와 같으며,40) 포쇄타를 행할 때 [몸을 움직이지도 않고 말을 발하지도 않았음에도] 망어[의 업도]를 획득하게 되는 것은, 이를테면 청정하지 않으면서도 이를 속이고서 승(僧) 중에 들어앉아 위의(威儀)를 나타낼 때이니, 혹 어떤 이는 이것을 선행된 표업이라고 하였다. 그 밖의 다른 예(例)에 대해서도 마땅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6) 이간어ㆍ추악어ㆍ잡예어의 성취조건
허광어에 대해 이미 분별하였다.
이제 마땅히 그 밖의 세 가지 어업도에 대해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염오심에서 남을 허물어뜨리려는
말을 설하여 이간어라 이름하며
좋지 않은 말이 추악어이며
온갖 더러운 말은 잡예어이다.
그러나 유여사는 세 가지 말과는 다른 염오한 말로서
아첨이나 노래, 사론(邪論) 등이 잡예어라고 설하였다.
논하여 말하겠다.
만약 염오심에서 다른 이를 허물어뜨리는 말을 발할 경우, 타인을 허물어뜨리든 허물어뜨리지 않든 다 같이 이간어(離間語)를 성취한다. 그리고 [앞에서 언급한] 상대방이 ‘그 말의 뜻을 이해하고’, ‘착오 없이’라고 하는 조건도 여기에 적용된다.41)
만약 염오심에서 좋지 못한 말[非愛語]을 발하여 다른 이를 헐뜯고 욕할 경우, 이를 일컬어 추악어(麤惡語)라고 하는데, [본송에서] 앞의 [이간어를 설명하면서] 언급한 ‘염오심’이라고 하는 말이 여기에도 적용되기 때문에 [‘염오심에서……’라고 해석한 것이다]. 그리고 상대방이 ‘그 말의 뜻을 이해하고’, ‘착오 없이’라고 하는 조건도 역시 앞의 경우와 같다.42)
일체의 염오심에 의해 낳아진 온갖 말을 잡예어(雜穢語)라고 이름하니, 그것들은 모두 ‘더러움으로 뒤섞인 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오로지 앞에서 언급한 ‘말[語]’라고 하는 글자만이 여기에 적용되어야 한다.43)
그런데 어떤 이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이는] 앞의 세 가지의 말(허광어ㆍ이간어ㆍ추악어)과는 다른 것으로서, 그 밖의 다른 염오심에 의해 낳아진 아첨[佞]이나 노래[歌]나 삿된 논의[邪論] 등이 바야흐로 잡예어에 포섭된다. 여기서 ‘아첨’이란 어떤 필추가 그릇되게 명리(名利)를 추구하여 알랑거리며 아첨의 말[諂愛語]을 발하는 것을 말하고, ‘노래’란 창기들이 다른 이를 기쁘게 하기 위해 염오심으로써 온갖 가사와 곡조를 짓거나 염오한 마음을 가진 이들이 이를 읊조리며[諷吟] 서로 조화[相調]시키는 것을 말하며, ‘삿된 논의’란 승론(勝論, 바이세시카학파)이나 수론(數論, 상캬학파), 명론(明論, 문법학파) 등의 악견(惡見)을 진술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등’이란 이를테면 염오심에 의해 낳아진 비탄이나 희론(戱論, 쓸데없는 말장난)의 언사를 말한다. 그렇지만 전륜왕이 출현할 때에 읊는 노래 등은 출리(出離)에 수순할 뿐더러 염오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말이기 때문에 그것은 모두 잡예어에 포섭되지 않는다.”
그러나 어떤 이는 설하기를 “그 때(전륜왕이 출현할 때)에도 역시 시집가고 장가드는 등에 관한 말이 있어 이는 잡예어에 포섭되지만 업도에는 포섭되지 않으니, 번뇌가 적은 것[薄塵]이어서 무표를 인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무표가 존재하지 않으면 업도에 포섭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고 하였다.
7) 탐ㆍ진ㆍ사견의 성취조건
세 가지 말(이간ㆍ추악ㆍ잡예어)에 대해 이미 분별하였다.
이제 마땅히 의(意)의 세 업도(탐ㆍ진ㆍ사견)에 대해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남의 재물에 대한 사악한 욕심이 탐이며
유정을 미워하는 것이 진에(瞋恚)이며
선ㆍ악업 등을 부정하는 견해를
일컬어 사견(邪見)의 업도라고 한다.
논하여 말하겠다.
남의 재물을 비리(非理)로 탐착하고 희구하여 그것을 자신에게 소속시키려기 위해 강제로, 혹은 슬그머니 취하려는 이와 같은 사악한 욕심[惡欲]을 일컬어 ‘탐의 업도’라고 한다.
어찌 욕계의 애(愛)도 모두 탐[의 업도]라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를테면 『오개경(五蓋經)』에서 부처님께서는 “탐욕개(貪欲蓋)에 근거하여 이 세간의 탐을 마땅히 끊어야 한다”고 설하고 있는 것이다.44)
[욕계의 ‘애’를] 비록 모두 ‘탐’이라 이름할 수 있을지라도 그 모두가 업도는 아니니, 앞에서 이미 “온갖 악행 중 거친 품류[麤品]만을 포섭하여 10업도라고 한다”고 설하였기 때문이다.45) 그래서 오로지 다른 이의 재물에 대해 사악한 욕탐을 일으키는 것만을 ‘탐의 업도’라고 말한 것으로,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자신의 재물에 대해 탐착할 때에도 업도가 성취된다고 해야 할 것이다. 전륜왕과 북구로주의 경우를 힐난하더라도 역시 그러하다.46)
유정류에 대해 증오하고 성내는 마음을 일으켜 핍박하려고 하는 것을 일컬어 ‘진에의 업도’라고 한다.
악견(惡見)으로써 선ㆍ악업 등을 부정하는 이러한 견해를 일컬어 ‘사견의 업도’라고 한다. 그리고 [본송에서는] 처음의 것(즉 선ㆍ악업을 부정하는 사견)을 언급함으로써 뒤의 것(업의 과보와 현성 등을 부정하는 사견)을 포섭하려고 하였기 때문에 ‘등’이라는 말을 설한 것으로, 그러한 모든 사견은 계경에서 설한 바와 같다. 즉 원인을 비방하고 결과를 비방하는 두 가지 사견으로써 세존께서는 모두 열한 가지 종류의 서로 다른 사견을 모두 취하였으니, 이를테면 ‘시여도 없고……(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라고 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47)
5.8. 업도의 명의(名義)
이와 같이 10업도의 상에 대해 이미 분별하였다.
그렇다면 어떠한 뜻에 근거하여 업도라고 이름하게 된 것인지 이에 대해 해석해 보아야 할 것이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이 중의 세 가지는 오로지 [업의] 도(道)이며
일곱 가지는 업이고, 도이기 때문[에 업도]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10업도 중의 뒤의 세 가지(탐ㆍ진ㆍ사견)는 오로지 도(道)로서, 업의 길[道]이 되기 때문에 ‘업도(karma-patha)’라는 명칭으로 설정하였다.48) 즉 그것과 상응하는 사(思)를 설하여 ‘업’이라고 이름하는 것으로, [사업은] 그것(탐 등의 의악행)이 일어나기[轉] 때문에 일어나며, 그것이 작용[行]하기 때문에 작용하니, 그것의 세력대로 조작(造作)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앞의 일곱 가지는 바로 업이니, 신업과 어업이기 때문이다. 또한 역시 업의 길이 되기도 하니, 그것들은 바로 ‘사’가 노니는 곳이기 때문이다.49) 다시 말해 능히 신ㆍ어업을 등기(等起)시키는 ‘사’는 신ㆍ어업에 의탁하고 그것을 경계로 삼아 일어나기 때문에 [뒤의 일곱 가지 업도는] 업이면서 업의 길로서 업도라는 명칭으로 설정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여기(10업도)서의 ‘업도’라고 하는 말은 ‘업의 길’이라는 뜻과 ‘업이면서 업의 길’이라는 뜻을 모두 나타내니,50) 비록 동일한 종류[의 업]은 아닐지라도 한 가지를 다른 명칭으로 삼을 수 있는 것으로, 세간의 『기론(記論)』 중에서도 다 같이 잘 성립되고 있기 때문이다.51) 혹은 업의 길이 되기 때문에 ‘업도’라고 이름한 것(뒤의 세 가지)이고, 역시 업이면서 역시 길이 되기 때문에 ‘업도’라고 이름한 것(앞의 일곱 가지)이어서 갖추어 말하자면 ‘업의 길[業道]’이며, ‘업이면서 길[業道]’이라고 해야 하지만, 한 가지를 다른 명칭으로 삼아 다만 업도라고 말한 것일 뿐이다.52)
그리고 선업도의 뜻에 대해서도 이에 준하여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53)
[이것(근본업도)의] 가행과 후기도 마땅히 업도라고 이름해야 할 것이니, 사(思)는 그것을 소연의 경계로 삼아서도 역시 일어나기 때문이다.
이치상으로는 [가행과 후기도] 역시 마땅히 업도라고 말해야 하지만, 그렇게 말하지 않는 것은 [가행은] 근본을 위해, [후기는] 근본에 의해 비로소 일어나기 때문이며, 앞에서 ‘거친 품류[麤品]를 업도라고 한다’고 설하였기 때문이다.54) 또한 근본이 감소하고 증가함으로 말미암아 내외의 현상[物]도 감소하게 되고 증가하게 되지만,55) 두 가지의 상태(가행과 후기)에서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업도로 설정하지 않은 것이다.
5.9. 단선근(斷善根)과 업도
일체의 악업도는 모두 선법이 현기(現起)하는 것과는 상위한다. 그렇다면 온갖 선근은 어떠한 업도에 의해 끊어지는 것인가? 선근이 끊어지고[斷善根] 선근이 이어지는 것[續善根]의 차별은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오로지 사견만이 선근을 끊으니
끊어지는 것은 욕계의 생득선(生得善)으로
인과를 부정하고 일체의 혹을 연으로 하는 사견에 의해
점진적으로 끊어지며, 두 가지(선근과 율의)는 함께 버려진다.
[선근이 끊어지는 곳은] 인취의 세 주로서, 남ㆍ여와
견행자(見行者)이고, 끊어짐의 본질은 비득(非得)이다.
선근이 이어지는 것은 의심과 ‘존재한다’는 견해 때문으로
단박에 현기하는데, 역죄(逆罪)를 지은 이는 제외된다.
논하여 말하겠다.
악업도 가운데 오로지 상품(上品)의 원만한 사견(즉 極上의 惡邪見) 만이 능히 선근을 끊을 수 있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어떠한 이유에서 본론(本論) 중에서 “무엇을 일컬어 온갖 상품의 불선근이라고 하는가? 이를테면 온갖 불선근으로서 능히 선근을 끊는 것이다. 혹은 이욕(離欲)할 때 최초로 제거되는 것이다”고 설하고 있는 것인가?56)
불선근이 능히 사견을 인기하였기 때문이다. 즉 사견의 원인[事]이 그 같은 불선근에 있다고 헤아렸기 때문으로,57) 이를테면 불이 마을을 태웠을지라도 그 불은 도적들에 의해 일어났기 때문에 세간에서는 ‘도적들이 마을을 태웠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58)
그렇다면 이것(상품의 사견)에 의해 어떠한 선근이 끊어지는 것인가?
이를테면 오로지 [태어나면서부터 획득된] 욕계의 생득(生得)의 선근이 끊어지니, 색ㆍ무색계의 선근은 일찍이 성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럴 경우 『시설족론』은 어떻게 회통할 수 있을 것인가? 이를테면 그 논에서는 “오로지 이 같은 근거[量, 즉 사견]에 의해서만 이러한 사람들은 3계의 선근을 끊게 된다”고 설하고 있는 것이다.59)
[이는] 상계의 선근을 획득하는 일에서 더욱 멀어지게 된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설한 것으로,60) 이 같은 [욕계의] 상속신은 더 이상 그것(상계의 선근)의 그릇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떠한 이유에서 [상품의 사견은] 오로지 [태어나면서부터 획득된] 생득의 선근만을 끊는 것인가?
가행의 선근에서는 이전에 이미 물러났기 때문으로,61) [계경에서] “이와 같은 보특가라는 선법을 성취하고……(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라고 설한 바와 같다. 즉 여기서 말한 ‘선법을 성취하는 자’란 가행선과 생득선을 성취한 이를 모두 설한 것이며, 다시 ‘선법이 은몰(隱沒)한 자’를 말하였는데, 이 말은 오로지 가행선만을 [성취한 이를] 설한 것이니, [사견에 의해] 장차 선근을 끊을 때 최초로 사기(捨棄)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수구행(隨俱行)의 선근이 아직 끊어지지 않은 자가 있다’고 말한 것은 여전히 생득의 선근을 지니고 있는 이를 나타낸 것으로, 그가 후시에 일체의 선근을 모두 끊을 때 이러한 선근이 끊어지기 때문에 단선근(斷善根) 즉 ‘선근을 끊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같이 선근을 끊게 되는 것은 어떠한 원인, 어떠한 상태에서인가?
이를테면 어떤 한 생류가 먼저 지극히 포악한 의요(意樂, 목적의식)의 수면(隨眠)을 성취한 후 간악한 친구의 도움을 받아 그것이 더욱 증가하여 왕성해짐에 따라 선근이 감소하고 불선근이 증가하게 되었다. 그런 후 그가 원인을 부정하고 결과를 부정하는 사견을 일으킬 때 일체의 선근이 모두 은몰(隱沒)하게 되며, 이로 말미암아 상속신이 선근을 떠나 머물게 되니, 이러한 원인과 이러한 상태에서 모든 선근을 끊게 되는 것이다.
원인을 부정하고 결과를 부정하는 사견이라 함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묘행과 악행을 비방하는 것을 일컬어 ‘원인을 부정하는 사견’이라 하며, 그것의 이숙과를 비방하는 것을 일컬어 ‘결과를 부정하는 사견’이라 하였다.
사견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자계연(自界緣)과 타계연(他界緣)이 바로 그것이다. 혹은 유루연(有漏緣)과 무루연(無漏緣)이 바로 그것이다.62) 이 중의 무엇이 능히 선근을 끊는 것인가?
마땅히 그 모두가 능히 선근을 끊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63)
마치 견도(見道)가 견소단(見所斷)의 번뇌를 끊듯이, 9품의 선근도 [일 찰나의 사견에 의해] 단박에 끊어질 수 있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어떠한가?
말하자면 점진적으로 끊어진다. 즉 9품의 사견과 9품의 선근은 순(順)ㆍ역(逆)으로 서로 마주하며 점차적으로 끊어지기 때문으로,64) 마치 수도(修道)가 수소단(修所斷)의 번뇌를 끊는 것과 같다. 즉 하하품의 사견은 능히 상상품의 선근을 끊으며, 나아가 하하품의 선근은 상상품의 사견에 의해 끊어진다. 그래서 본론(本論)에서 설하기를 “무엇을 일컬어 미구행(微俱行)의 선근이라고 하는가? 이를테면 [사견이] 선근을 끊을 때 최후로 사기(捨棄)되는 것으로서, 그것을 버림에 따라 단선근 즉 ‘선근을 끊었다’고 말한다”고 하였던 것이다.65)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그 같은 [본론의] 글에서는 어떠한 이치에서 “무엇을 일컬어 상품의 온갖 불선근이라고 하는가? 이를테면 온갖 불선근으로서 능히 선근을 끊는 것이다”고 다시 설하고 있는 것인가?66)
[그 말은] 여기에 맞지 않으니, 앞서의 말에 편승하여 그러한 이치를 따져 물은 것이라고 해야 하는 것으로, 그 이치는 이미 성립하였다. 즉 이는 앞서 끊은 미세한 선근에 편승하여 [그것을] 능히 끊을 수 있는 상품의 불선근에 대해 물은 것으로, 앞서 [말한] 미세한 선근은 이미 하품에 포섭된다고 하였으니, 뒤에 [말한] ‘능히 [선근을] 끊는 것’은 이치상 상품[의 사견]에 포섭되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에 대해 수고스럽게 따져 힐난해서는 안 된다. 이미 ‘수도가 수소단의 번뇌를 끊는 것과 같다’고 하였으니, 이치상 [9품의 선근을 점진적으로 끊는] 중간에 [그 같은 끊어짐이 계속적으로] 일어나거나 [중단하여] 일어나지 않는 경우가 있다고 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온갖 율의의 과보는 가행의 선심으로부터 생겨나기도 하고, [태어나면서 획득된] 생득의 선심으로부터 생겨나기도 한다. [따라서] 만약 가행의 선심으로부터 생겨난 것이라면, 율의가 먼저 사기(捨棄)된 이후에 선근을 끊게 된다. 그렇지만 선근을 끊는 가행과 근본을 모두 단선근 즉 ‘선근을 끊은 것’이라고 이름하니, 이 같은 사실에 따라 ‘선근을 끊은 상태에서는 온갖 율의도 버리게 된다’고 말한 것이다. 그러나 만약 생득의 선심으로부터 생겨난 것이라면, 그것을 능히 낳은 선근 중 어떤 품류가 끊어지는가? 에 따라 그것에 의해 낳아진 율의도 그 때 사기(捨棄)되니, 능히 등기(等起)시킨 것을 버리면 그것도 따라 사기되기 때문이다.67)
어떠한 처소에 있어야 능히 선근을 끊을 수 있는 것인가?
인취(人趣)의 세 주(洲)로서, 악취에 있을 때에는 끊어지지 않으며, 천취에서도 역시 끊어지지 않는다.
그 까닭이 무엇인가?
악취 중에서는 염오혜(慧)와 불염오 혜가 견고하지 않기 때문이며, 천취 중에서는 선악의 온갖 업의 과보가 바로 나타나기 때문이다.68) 그리고 인취의 세 주라는 말은 북구로주를 제외한 세 곳으로, 그곳(북구로주)에는 극악한 아세야(阿世耶,즉 意樂)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여사(有餘師)는 설하기를 “[선근이 끊어지는 곳은] 오로지 남섬부주 뿐이다”고 하였다.69)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본론(本論)에서 설한 바에 어긋나게 될 것이니, 이를테면 본론에서는 “남섬부주의 사람은 최소한 여덟 가지 근(根)을 성취하며, 동주(東洲)와 서주(西洲)도 역시 그러하다”고 설하고 있는 것이다.70)
이와 같이 선근을 끊게 되는 것은 어떠한 종류의 몸에 근거하여서인가?
오로지 남자와 여자의 몸에 근거하여서만 [선근을 끊게 되니], 의지가 결정적이기 때문이다.
유여사는 설하기를 “여자의 몸에 근거하여서도 역시 선근은 끊어지지 않으니, 욕(欲)과 근(勤)과 혜(慧) 등이 모두 어둡고 둔중하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본론(本論)에서 설한 바에 어긋나게 될 것이니, 이를테면 본론에서는 “만약 여근을 성취하면 결정코 여덟 가지 근(根)을 성취하며, 남근의 경우도 역시 그러하다”고 설하고 있는 것이다.71)
어떠한 행자(行者)가 능히 선근을 끊는 것인가?
오로지 견행자(見行者) 만이 선근을 끊으며, 애행자(愛行者)는 끊지 않으니,72) 모든 견행자는 악한 아세야가 지극히 견고하며 깊기[堅深] 때문이다. 즉 그들은 악한 의요(意樂)를 추구(推求)하며 상속하기 때문에 ‘지극히 견고하다’고 말할 것이며, 견(見)으로 인해 멀리까지 따라 들어가기 때문에 ‘지극히 깊다’고 말한 것으로, [의요와 견이] 지극히 견고하기 깊기 때문에 능히 선근을 끊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애행자는 악한 아세야가 지극히 가벼이 움직이기[躁動] 때문에 [능히 선근을 끊을 수 없다]. 이 같은 이치에 따라 선체(扇搋) 등이 [선근을 끊는 것을] 부정하였던 것이다. 또한 이러한 유형(애행자와 선체 등)의 인간은 악취의 경우와 동일하기 때문[에 능히 선근을 끊지 못하는 것]이다.73)
이같이 ‘선근이 끊어졌다’고 하는 사실의 본질[體]은 무엇인가?
‘선근이 끊어졌다’는 것은 비득(非得)을 본질로 하는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즉 극중한 사견이 현전할 때 능히 선근을 성취하게 하는 득(得)이 멸하고, 불성취의 득이 상속하여 생겨나는 것으로, 이러한 상태를 일컬어 ‘선근이 이미 끊어졌다’고 하기 때문이다. ‘선근이 끊어진 것’의 본질은 바로 비득으로서, 비득의 실유성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미 성립시켰었다.74)
1) 속선근(續善根)에 대하여
선근이 이미 끊어져 버렸다면, 무엇에 의해 다시 이어지게 되는 것인가?
의심과 ‘존재한다’는 견해에 의해 이어진다.75) 즉 선근을 잇게 되는 것은 원인의 힘(동류인의 힘, 즉 과거세에 익힌 내적 因力)에 의해서나, 혹은 선우(善友)에 의한 것으로, 어떤 이는 ‘[선ㆍ악행에 의해] 초래되는 후세는 과연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야 할 것인가, 존재한다고 해야 할 것인가?’라고 하여 인과에 대해 홀연히 다시 의심을 낳기도 하며, 어떤 이는 ‘후세는 결정코 존재한다. 이전의 주장은 바로 사견이다’고 하여 인과에 대해 홀연히 정견을 낳기도 한다. 바로 이때 선근을 성취하는 득(得)이 다시 생기하고, 불성취의 득이 멸하니, 이를 일컬어 속선근(續善根), 즉 ‘선근을 잇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9품의 선근은 단박에 이어지지만[頓續] [후시에] 점차로 생기[漸起]하니, 마치 병을 단박에 제거하고서 기력이 점차로 증대되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현재의 몸[現身] 중에서 능히 선근을 이을 수 있는 것인가, 이을 수 없는 것인가?
역시 능히 이을 수 있지만, 역죄(逆罪)를 지은 이는 제외된다.76) 그런데 유여사는 “단견(斷見)이 증가한 자 역시 능히 현세에 선근을 이을 수가 없다”고 하였다. 이 같은 두 부류의 인간(역죄를 지은 이와 단견이 증가한 이)에 대해 경에서는 이와 같이 설하고 있다.
“그들은 결정코 현법에서 능히 선근을 이을 수가 없으니, 그 같은 이들은 결정코 장차 지옥으로부터 몰(沒)하려고 하거나, 혹은 그곳에서 장차 생을 받으려고 할 때 능히 선근을 이을 수 있고, 그 밖의 상태에서는 이을 수 없기 때문이다.”77)
여기서 ‘장차 지옥에 태어나려고 할 때’란 이를테면 중유를 말하며, ‘몰하려고 하는 때’란 이를테면 그가 장차 지옥에서 죽으려고 하는 때를 말한다. 따라서 만약 그가 인력(因力, 내적 원인의 힘)에 의해 선근을 끊었다면 장차 [지옥에서] 죽으려고 할 때에 선근을 이을 것이며, 만약 그가 연력(緣力, 외적 조건의 힘)에 의해 선근을 끊었다면 장차 지옥에 태어나려고 할 때에 선근을 이을 것으로,78) 자신의 힘과 타인의 힘에 의해 선근을 끊었을 경우에도 역시 그러함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또한 의요(意樂)는 허물어졌지만 가행이 허물어지지 않은 단선근자라면, 이러한 이는 능히 현세에 선근을 이을 수 있다. 그러나 의요도 허물어지고 가행도 역시 허물어진 단선근자라면, 요컨대 소의신이 허물어진 뒤에 비로소 선근을 잇게 된다. 즉 세간의 어떤 사람들로서 후세를 부정하여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이를 ‘의요가 허물어진 [단선근자]’고 말하였으며, 그러면서 그 같은 의요에 따르지 않고 [가행을] 행하는 이를 ‘가행이 허물어지지 않은 [단선근자]’라고 하였다.79)
그리고 견(見)이 허물어졌을지라도 계(戒)가 허물어지지 않은 단선근자와, 그리고 ‘견’도 허물어지고 ‘계’도 역시 허물어진 단선근자의 경우도 역시 그러함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80) 그러나 겁(劫)이 장차 허물어지려고 할 때와 겁이 처음으로 이루어지려고 할 때에는 단선근자가 존재하지 않으니, [괴겁(壞劫) 시에는] 기세간을 파괴하는 증상력 때문이며, [성겁(成劫) 시에는] 상속이 윤택하기 때문이다. 또한 묘행(妙行)을 행하는 자도 선근을 끊지 않으니, 마음이 견고할뿐더러 그것을 즐거워하기 때문이다.
선근을 끊은 자와 사정취(邪定趣)에 떨어지는 자의 관계에 대해 4구(句)의 차별이 있으니, 포랄나(布剌拏)와 미생원왕(未生怨王)과 제바달다(提婆達多)와 그 밖의 사람들이 순서대로 그러한 차별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81) 즉 선근을 끊고 사견을 지니고 승가를 파괴하고 망어를 행하는 것은 결정코 무간의 이숙을 초래한다는 사실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그 밖의 무간업은 무간의 이숙을 초래하거나 혹은 그 밖의 지옥의 이숙을 초래한다.
5.10. 업도와 사(思)심소의 구전(俱轉)관계
뜻에 따라 선근을 끊는 것에 대해 이미 분별하였다.
이제 마땅히 다시 근본업도에 대해 밝혀 보아야 할 것이다. 앞에서 설한 선ㆍ악의 두 가지 업도 중에서 몇 가지가 함께 생겨나 사(思)와 더불어 구전(俱轉, 즉 찰나등기)하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사(思)와 구전하는 업도의 수는
불선의 경우 한 가지에서 여덟 가지이며
선의 경우 전체적으로 설하면 열 가지에 이르지만
개별적으로 설하면 한 가지ㆍ여덟 가지ㆍ다섯 가지는 제외된다.
1) 불선업도와 ‘사’의 구전관계
논하여 말하겠다.
사(思)와 구전(俱轉)하는 온갖 업도 중에서, 바야흐로 불선업도는 한가지로부터 오로지 여덟 가지에 이르기까지 ‘사’와 구전한다.
한 가지가 구전한다고 함은, 이를테면 그 밖의 다른 악업도를 떠나 탐 등의 세 가지 중 어느 하나가 현기(現起)할 때와, 혹은 이전에 가행에 의해 지어진 악업 중 어느 하나가 탐 등과는 다른 그 밖의 염오심이나 불염오심이 현재전할 때 구경에 이르는 경우를 말한다.82)
그런데 경주(經主)는 오로지 “불염오심이 [현전할 때]”라고만 설하였지만,83) 이 말은 지나치게 감소시킨 것이니, 만(慢)이나 의(疑) 등의 염오심이 현기할 때에도 역시 이전에 가행에 의해 일어난 업도가 성취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가행으로서 악한 색업을 짓고”라고 설하였지만,84) ‘색’이라는 말은 지나치게 증대(확대)시킨 것이니, 무색업의 경우 “일찍이 가행으로 [그것을] 짓고 불염오심이 현기하였을 때 업도가 바야흐로 성취된다”고 반드시 분별할 필요가 없기 때문으로, 뒤에서 이와 같은 유형의 예(例)에 대해 마땅히 탄핵하여 배척하게 될 것이다.
유여사(有餘師)는 [‘사’와 구전하는 한 가지 업도에 대해] “신(身)의 세 업도는 각기 ‘사’와 구전하니, 이를테면 살생ㆍ투도ㆍ사음이 바로 그것이다”고 설하였다. 그러나 이치상 마땅히 그렇다고 해서는 안 될 것이니, 사음은 필시 두 가지가 구전하는 경우로서, 다른 이를 보내어 짓게 하는 일이 없기 때문이며, 반드시 탐의 구경이기 때문이며, 살생과 투도도 스스로 행할 때에는 역시 반드시 두 가지가 구전하는 경우이기 때문이다. 만약 다른 이를 보내어 짓게 한 [살생이나 투도에] 근거하여 말한 것이라면, 마땅히 ‘그것이 구경에 이르렀지만 탐 등이 일어나지 않았을 때’라고 분별하여 말하였어야 한다.85)
또한 [유여사는] 설하기를 “잡예어와, 탐ㆍ진 등의 세 가지 중 어느 하나가 현전할 때를 한 가지가 구전하는 경우라고 말한다”고 하였지만, 이 역시 올바른 이치가 아니니, ‘오로지’라는 말을 결여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가 앞에서 설한 바와 같은 것을 선설이라고 해야 하는 것이다.
두 가지가 구전한다고 함은, 이를테면 욕사행을 행하거나, 혹은 스스로 살생ㆍ투도ㆍ잡예어를 행하거나, 혹은 다른 사람을 보내어 그(살생ㆍ투도ㆍ잡예어) 중의 한 가지를 성취하는 상태에서 탐ㆍ진ㆍ사견 중의 하나가 현전할 때, 혹은 이전에 가행에 의해 지어진 악업 중의 두 가지가 탐 등과는 다른 그 밖의 염오심이나 불염오심이 현재전할 때 구경에 이르는 경우를 말한다.
그런데 경주(經主)는 이에 대해 이와 같이 말하였다. “[두 가지가 구전한다고 함은,] 이를테면 진에의 마음이 현전하여 살생의 업이 구경에 이르거나, 혹은 탐을 일으킨 상태에서 불여취 혹은 욕사행 혹은 잡예어를 성취하는 경우를 말한다.”86)
그러나 이 역시 올바른 이치가 아니다. 만약 [지은 업이] 스스로 구경에 이른 경우라면 마땅히 살생에 대해 수고스럽게 진에를 설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니, 이것(살생)이 더 이상 다른 것에 의해 구경에 이른다고 하는 것은 허용될 수 없기 때문이다. 투도(즉 불여취)나 욕사행에 대해 탐을 설한 것도 역시 그렇다고 해야 할 것이니, ‘탐을 일으킬 때 잡예어를 성취한다’고 설할 경우, 이러한 말은 아무리 빠트리고 감소[闕減]하더라도 세 가지 업도가 성취되는 경우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87) 만약 이전의 가행이 구경에 이른 때라면, 각각은 마땅히 탐[ㆍ진] 중의 어느 하나가 [현전할 때 구경에 이른 것이라고] 말해야 하는 것이다.
유여사는 [‘사’와 구전하는 두 가지 업도에 대해 이와 같이] 설하였다. “다른 이의 목숨과 재물에 대해 죽이고 훔치려는 마음을 일으켜 그가 죽게 되었을 때 바로 [그의 재물을] 취하거나, 혹은 다른 이의 여종 등과 배[船] 등에 머물며 욕사행을 범할 때 훔치는 것―즉 본래의 처소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을 말한다.”88) 그러나 이는 오로지 두 가지의 업도가 아니니, 그것과 상응하는 바에 따라 탐ㆍ진 중의 한 가지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또한 설하기를 “[아울러] 허광어와 이간어와 추악어 중의 한 가지를 일으킬 때에도 역시 두 가지 업도가 구전한다”고 하였지만, 이 역시 올바른 이치가 아니니, 그것과 상응하는 바에 따라 탐ㆍ진 등 세 가지 중의 한 가지도 [함께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사실로 볼 때 앞에서 설한 바가 이치상 뛰어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세 가지가 구전한다고 함은, 이를테면 일찍이 가행에 의해 지어진 악업 중의 두 가지가 탐 등이 일어날 때 구경에 이르는 경우와, 혹은 한 명의 사자를 보내어 살생 등의 한 가지 악업도를 짓게 하고, 스스로는 사음 등을 행하여 동시에 구경에 이르는 경우와, 혹은 스스로 두 가지 [악업]을 짓는 경우를 말하니,89) [이에 대해] 마땅히 참답게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혹은 일찍이 가행에 의해 지어진 악업 중의 세 가지가 탐 등과는 다른 그 밖의 염오심이나 불염오심이 현재전할 때 구경에 이르거나, 혹은 탐 등과는 다른 그 밖의 염오심을 일으킬 때 스스로는 이간어와 허광어를 포섭하는 어업 등을 성취하면서 다른 이로 하여금 한가지의 업 등을 짓게 하는 경우를 말하니, [이에 대해서도] 마땅히 참답게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유여사는 말하기를 “두 명의 사자를 보내어 [살생 등 두 가지 악업도를 짓게 하고] 스스로는 욕사행 등을 행하여 동시에 구경에 이를 때와, 아울러 어업의 앞의 세 가지(잡예어를 제외한 세 가지) 중 두 가지를 동시에 일으킬 때 [세 가지 업도가 ‘사’와 구전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 역시 올바른 이치가 아니니, 사음이 구경에 이를 때에는 결정코 탐이 존재하기 때문이며(그럴 경우 4구전임), 어업도를 일으킬 때 탐 등의 세 가지 중에 어느 한 가지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며, 설혹 그 밖의 다른 마음을 일으킨 경우라도 마땅히 [이같이] 차별하여 [말해야] 하기 때문이다.
네 가지가 구전한다고 함은, 이를테면 다른 이를 괴멸시키고자하여 허광어 혹은 추악어를 설할 때를 말하니, 이때 한가지의 의(意)업도와 세 가지의 어(語)업도가 함께 일어난다.90) 혹은 두 명의 사자를 보내어 [살생 등의 두 가지 악업도를 짓게 하고] 스스로는 사음 등을 행하거나, 혹은 일찍이 가행에 의해 지어진 악업 중의 세 가지가 탐 등이 현기할 때 구경에 이르는 경우를 말하니, 이와 같은 등의 종류를 예(例)에 의거하여 마땅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유여사는 설하기를 “[네 가지가 구전한다고 함은,] 네 가지 어악업을 함께 설할 때를 말한다”고 하였지만, 이러한 설은 올바른 이치가 아니니, 마땅히 분별해야 하기 때문이다.91)
이와 마찬가지로 다섯 가지ㆍ여섯 가지ㆍ일곱 가지의 업도가 구전하는 경우에 대해서도 마땅히 참답게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92)
여덟 가지가 구전한다고 함은, 이를테면 일찍이 가행으로서 여섯 가지 악업(욕사행을 제외한 신ㆍ어업)을 짓고(다시 말해 일찍이 여섯 명의 사자를 보내 여섯 가지 악업을 짓게 하고), 스스로는 욕사행을 행하여 동시에 구경에 이르는 경우를 말하니,93) 그 밖의 다른 예로써도 마땅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뒤의 세 가지 업도는 함께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아홉 가지 업도 내지 열 가지 업도가 구전(俱轉)하는 일은 없다.94)
2) 욕사행은 견타업(遣他業)이 되지 않는 이유
어떠한 이유에서 욕사행은 요컨대 스스로 구경에 이르러야 하는 것(다시 말해 스스로 성취해야 하는 것)으로, 다른 이를 보내 [행하게] 하더라도 역시 [악업도를] 성취하는 살생 등의 경우와 같지 않는 것인가?
살생 등은 다른 이를 보내는 것만으로도 염오심이 결정적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만약 사자를 보내어 살생 등을 행하게 하여도 결정코 염오심이 존재하는 것이지만, 다른 이를 보내어 사음을 행하게 하였을 경우에는 마음에 염오함이 없을 수도 있으니, 여인 등을 시집보내는 일 등이 그러하다.
또한 이러한 [살생 등을 낳게 하는] 종류의 번뇌[惑]는 반드시 현전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이러한 [살생 등을 낳게 하는] 종류의 번뇌가 현기함에 따라 스스로 살생 등을 행하거나 다른 이로 하여금 역시 그렇게 하도록 하지만, 다른 이를 보내어 사음을 행하게 하는 번뇌는 필시 자신이 스스로 [사음을 행하는 번뇌와] 같지 않은 것이다.
또한 자기 자신은 그러한 행(行)에서 멀리 떠나 마땅히 행하지 않았다면, [설혹] 다른 이를 보내어 행하게 하였을지라도 자신이 범한 것이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어떤 이가 스스로는 그러한 행에서 멀리 떠나 마땅히 행하지 않았다면, [설혹] 여인을 [남자에게] 주고 지아비(남편)를 [여인에게] 주었을지라도 스스로는 [사음의 행을] 범한 것이 아니지만, 만약 이러한 경계(여인이나 지아비)에 대해 스스로는 살생을 떠났을지라도 다른 이를 보내어 죽였을 때에는 그 자신도 살인자로 불려진다. 일찍이 듣건대, 보살(菩薩, 불타의 전신)께서 여인을 다른 이에게 베품에 따라 바로 애호할만한 과보를 획득하였다고 하였던 것이다.
그렇지만 비범행(非梵行)의 경우는 불선업에 포섭된다.95) 만약 다른 사람을 보내어 [사음을] 범하게 한 것과 자신이 지은 것이 동일하다면, 어찌 악업의 가행(즉 다른 사람을 보낸 것)이 능히 복과(福果)를 초래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인가? 혹은 모든 보살도 마땅히 욕사행을 범하였다고 해야 하는 것이다.
또한 살생 등에서 떠나는 것은 [외적] 경계를 막음으로써 성취되지만, 사음을 행하는 것에서 떠나는 것은 자신의 몸을 막음으로써 [성취되기] 때문이다. 이 같은 사실에 따라 일체의 유정을 [스스로] 죽이지 않을지라도 다 타승죄(他勝罪, 바라이죄)를 성취하지만, 일체 유정에 대해 다만 [스스로] 사음을 행하는 경우에만 다 중죄를 범한 자라고 말하는 것이다.
또한 이치상으로도 필시 그러하다고 해야 하니, 모든 필추는 다만 [다른 이를] 보내어 사람을 죽었을 경우에도 반드시 타승죄를 성취하지만, 비록 중매[媒嫁]를 들었다고 하여 중죄를 범하는 것은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어떠한 이유에서 [다른 이를] 보내어 살생에서 떠나게 하는 것은 이살생계[離殺戒, 불살생계]를 획득하는 것이 아니면서 다만 다른 이를 보내 살생하게 하는 것은 바로 살생죄를 획득한다는 것인가?
이러한 예(例)는 동일한 것이 아니다. 즉 살생하려는 뜻[思]을 갖지 않았다면 다른 이를 보내어 죽이게 하는 일이 없지만, ‘살생에서 떠나겠다’는 뜻을 갖지 않았더라도 다른 이를 보내어 살생에서 떠나게 하는 일은 있어 두 경우가 동일하지 않기 때문이다.96) 또한 계를 수지하는 것은 이러한 처소(자신)에 대해 강력한 것이고, 시라를 버리고 범하는 것은 다른 처소(다른 이)에 대해 수승한 것이기 때문에, 범계(犯戒)의 경우 다른 이를 보내어 범하게 한 것도 자신이 범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지계(持戒)의 경우 다른 이를 보내어 수지하게 한 것을 자신이 수지한 것이라고 말하는 일은 없는 것이다.
또한 앞에서 이미 논설하였다.
앞에서 어떻게 논설하였던 것인가?
이를테면 “욕계 중에서는 악이 수승하고 선이 저열하다”고 하였다.97)
또한 연기의 법에는 여러 가지 차별이 있어 잡란될 수 없기 때문이다. 바야흐로 안식과 같은 것은 색 중에 머물지 않을 뿐더러 안근 중에도 역시 머물지 않는 것으로, 안근에 따라서는 증익 감손되지만,98) 색에 따라서는 [증익 감손되지] 않는다. 또한 예컨대 마음으로부터 생겨난 대종의 현색(顯色) 등은 마음의 [선ㆍ악의] 힘에 따라 선 등의 성질을 성취하지 않지만, 형색(形色)에 존재하는 선 등의 차별은 마음에 따른 것이다.99) 또한 어업(語業)으로서의 소리는 마음에 따라 일어나는 것이지만, 손가락을 퉁기는 소리 등은 마음에 따라 일어난 것이 아니다. 또한 다른 이의 목숨이 끊어질 때 비로소 살생의 업도를 성취하지만, 다른 이가 괴멸되든 괴멸되지 않든 이간어 등의 업도를 성취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계(戒)의 경우 다른 이를 보내어 [그로 하여금] 수지하게 하였다면 자신이 수지한 것이 아니지만, 범계의 경우 다른 이를 보내어 훼손시키고 범하게 하였다면 자신이 훼손시키고 범한 것이 된다.100)
이와 같은 이유에서 다른 이를 보내어 살생하게 하였을 경우에는 ‘능히 살생한 자’가 되지만, 다른 이를 보내어 사음을 행하게 하였을 경우에는 ‘[능히] 사음한 자’가 되지 않는 것이다.
3) 선업도와 ‘사’의 구전관계
‘사’와 구전하는 불선업도의 수가 동일하지 않음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나아가 ‘사(思)’와 구전하는 선업도의 수는 전체적으로 모두 열거하면 열 가지에 이르지만, 개별적으로 드러난 것[顯相]에 근거할 경우 한가지ㆍ여덟 가지ㆍ다섯 가지가 구전하는 것은 제외된다.101)
두 가지가 구전한다고 함은, 이를테면 선한 5식(識)과, 아울러 무색정에 근거하여 진지(盡智)와 무생지(無生智)가 현재전할 때를 말하는데, 이때 산심(散心)의 일곱 가지 선업도(세 가지 신업과 네 가지 어업)는 존재하지 않는다. 즉 이 같은 5식과 상응하는 혜는 ‘견(見)의 성질이 아니기 때문이며, 무색정에는 다 같이 율의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102)
세 가지가 구전한다고 함은, 이를테면 정견과 상응하는 의식이 현재전하는 때로서, 일곱 가지의 선한 색업도가 존재하지 않는 경우를 말한다.103)
네 가지가 구전한다고 함은, 이를테면 악ㆍ무기심이 현전하는 상태에서 근주ㆍ근사ㆍ근책율의를 획득하는 경우를 말한다.104)
여섯 가지가 구전한다고 함은, 이를테면 선한 5식이 현재전할 때 앞에서 언급한 세 가지 계(戒,근주ㆍ근사ㆍ근책율의)를 획득하는 경우를 말한다.105)
일곱 가지가 구전한다고 함은, 이를테면 수심전의 색이 존재하지 않는 상태에서 선한 의식이 정견과 상응하여 현재전할 때 앞에서 언급한 세 가지 계(戒)를 획득하는 경우, 혹은 악ㆍ무기심이 현전할 때 필추 계(戒)를 획득하는 경우를 말한다.106)
아홉 가지가 구전한다고 함은, 이를테면 선한 5식이 [현재전할 때]와, 무색정에 근거하여 진지와 무생지가 현재전할 때 필추 계를 획득하는 경우를 말한다. 혹은 정려율의에 포섭되는 진지ㆍ무생지와 상응하는 의식이 현재전할 때를 말한다.
열 가지가 구전한다고 함은, 이를테면 수심전의 색이 존재하지 않는 상태에서 선한 의식이 정견과 상응하여 현재전할 때 필추 계를 획득하는 경우를 말한다. 혹은 그 밖의 다른 일체의 수심전의 색이 존재하고, 또한 정견과 상응하는 마음이 바로 일어나는 상태를 말한다.107)
개별적으로 드러난 상[顯相], 즉 율의에 근거하여 논의할 경우 제외되는 것은 이와 같지만, 감추어진 상[隱相, 비율의비불율의]과 드러난 상 모두에 의거하여 논의할 경우 제외되는 것이 없다. 이를테면 율의만이 아니라면 한가지ㆍ여덟 가지ㆍ다섯 가지의 [선]업도(이는 율의업도가 아니라 처중의 선업도)도 함께 일어나기도 하는 것이다.
여기서 한가지가 구전한다고 함은, 이를테면 악ㆍ무기심이 현재전할 때 한가지 [악업도] 갈래[支]의 원리(遠離)를 획득하는 경우를 말한다. 다섯 가지가 구전한다고 함은, 이를테면 수심전의 색이 없이 선한 의식이 정견과 상응하여 현재전할 때 두 가지 [악업도] 갈래의 원리를 획득하는 등의 경우를 말한다. 여덟 가지가 구전한다고 함은, 이를테면 바로 그와 같은 의식이 현재전할 때 다섯 가지 [악업도] 갈래의 원리를 획득하는 등의 경우를 말한다.108)
5.11. 3계 5취에서의 업도의 성취와 현행
선ㆍ악의 업도는 어떠한 계(界)ㆍ취(趣)의 처소에서 오로지 몇 가지가 성취되며, 또한 역시 몇 가지가 두루 현행하는 것인가?109)
게송으로 말하겠다.
불선의 경우, 지옥 중의
추악ㆍ잡예ㆍ진에는 두 가지 모두와 통하고
탐과 사견은 성취될 뿐이며
북구로주에서는 뒤의 세 가지를 성취하고
잡예어는 현행과 성취에 통하며
그 밖의 욕계에서의 열 가지는 두 가지 모두와 통한다.
선의 경우, 모든 처소에 존재하는
뒤의 세 가지는 현행과 성취에 통하고
무색계와 무상천에서의
앞의 일곱 가지 업도는 오로지 성취될 뿐이고
그 밖의 처소의 그것은 성취와 현행에 통하지만
지옥과 북구로주는 제외된다.
논하여 말하겠다.
바야흐로 불선의 10업도 가운데, 나락가(那落迦,지옥)에서의 세 가지 업도는 두 종류와 모두 통하니, 이를테면 추악어와 잡예어와 진에의 세 종류는 모두 다 현행할 수 있고 성취될 수 있다. 즉 거기에는 괴로움이 핍박하여 서로를 꾸짖기 때문에 추악어가 존재하는 것이며, 원한에 사무쳐 비탄하고 절규하기 때문에 잡예어가 존재하는 것이며, 몸과 마음이 거칠게 강하고 사나워 조화되지 않아 서로가 서로를 미워하기 때문에 진에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탐과 사견은 성취될 뿐 현행하지 않으니, 거기에는 애착할 만한 경계가 없기 때문이며, 업의 과보를 바로 관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곳에서는 서로를 해치는 법이 없기 때문에, 다시 말해 다만 업이 다함으로 말미암아 죽기 때문에 살생의 업도도 존재하지 않으며, 재물이나 여인을 갖는 일도 없기 때문에 불여취와 욕사행도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별도로 추구할 것이 없어 속이는 것 자체가] 쓸모없는 일이기 때문에 허광어도 존재하지 않는다. 혹은 허광어는 다른 이의 생각을 전도시키는 것인데, 그곳에서의 생각은 항상 전도되어 있기 때문에 허광어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곳의 마음은 항상 서로에게서 떠나 있기 때문에, 혹은 [별도로 추구할 것이 없어 이간질하는 것 자체가] 쓸모없는 일이기 때문에 이간어도 존재하지 않는다.
북구로주(北俱盧洲)에서 탐ㆍ진ㆍ사견은 모두 결정코 성취되지만 현행하지 않으니, 그곳에서는 나의 것[我所]을 소유하지 않기 때문이며, 몸과 마음이 유연하여 다른 이를 괴롭히고 해치는 일이 없기 때문이며, 악의 의요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곳에서는 오로지 잡예어만이 현행하고 성취될 뿐이니, 그곳의 유정은 때에 따라 염오심에서 노래하는 일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곳에서는 수명의 양(길이)이 결정되어 있기 때문에 살생이 존재하지 않으며,110) 재물이나 여인을 소유하는 일도 없기 때문에 불여취와 욕사행도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별도로 추구할 것이 없어 다른 이를] 속이려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 혹은 [속이는 것 자체가] 쓸모없는 일이기 때문에 허광어가 존재하지 않을 뿐더러 항상 화목하기 때문에 이간어도 없고, 말이 깨끗하고 아름답기 때문에 추악어도 없다.
그렇다면 그러한 주(洲)의 사람은 어떻게 비범행을 행하는 것인가?111)
이를테면 그 주의 남녀가 서로에 대해 염오심을 일으킬 때, 손을 잡고 서로를 이끌어 나무 아래로 가 나무 가지가 드리워서 덮어주면 마땅히 행해야 하는 줄 알지만, 나무 가지가 드리우지 않으면 두 사람은 부끄러워하며 헤어지는 것이다.
나아가 앞에서 언급한 지옥과 북구로주를 제외한 그 밖의 욕계 중에서의 10악업도는 두 가지와 모두 통하니, 이를테면 욕계 천취와 아귀와 방생, 그리고 인취의 세 주에서는 10악업도가 모두 현행하고 성취된다. 그렇지만 여기에는 차별이 있으니, 이를테면 천취와 아귀와 방생에는 앞의 일곱 가지 업도(세 가지 신업과 네 가지 어업) 중 오로지 처중(處中)에 포섭되는 업도만이 존재할 뿐이며, 불율의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인취의 세 주 중에는 두 가지 종류가 모두 갖추어져 있다. 그리고 온갖 천중(天衆)은 비록 천을 살해하는 일은 없을지라도 혹 어느 때 다른 취(趣)를 살해하기도 한다.112)
그러나 유여사는 설하기를 “천취도 역시 천을 죽인다. 비록 천의 몸과 사지는 잘려도 다시 생겨난다고 할지라도 머리를 자르고 허리를 자르면 다시는 생겨나지 않기 때문에 욕계 천취 중에도 살생의 업도가 존재한다”고 하였다.113)
불선업도에 대해 이미 다 논설하였다.
선업도 중에서 무탐 등의 세 가지 업도는 3계 5취 중에서 두 가지 종류와 모두 통하니, 말하자면 성취되고 현행한다. 그러나 신ㆍ어업의 일곱 가지 업도는, 무색계와 무상천에서는 다만 성취될 수 있을 뿐 필시 현행하는 것이 아니다. 즉 성자의 유정으로서 무색계에 태어난 자는 과거ㆍ미래의 무루율의를 성취하며, 무상천의 유정은 반드시 과거ㆍ미래의 제4정려의 정려율의를 성취한다.114) 그런데 성자는 어떤 정려지에 근거하여 무루의 시라(尸羅)를 일찍이 일으키고 일찍이 소멸하였더라도 무색계에 태어날 때에는 과거의 그것을 성취하며, 만약 미래세의 경우라면 6지(地)의 [소의신에 근거한 무루율의를] 모두 성취하게 된다.115)
그리고 [본송에서] ‘두 처소(무색계와 무상천)에서는 [신ㆍ어업의 일곱 가지 업도가] 현기(現起, 현행)하는 일이 없다’고 한 것은,116) 무색계에는 오로지 [색온을 제외한] 4온만이 존재하기 때문이며, 무상천의 유정에게는 선정의 마음[定心]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율의는 반드시 대종과 선정의 마음에 근거하여야 하는데, 두 처소에는 그것들이 서로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117) [신ㆍ어업의 일곱 가지 업도가] 현기하지 않는 것이다.
그 밖의 계(界)ㆍ취(趣)의 처소 중 지옥과 북구로주를 제외한 곳에서는 7선업도가 모두 현행하고 성취될 수 있다. 그렇지만 여기에도 약간의 차별이 있으니, 이를테면 아귀와 방생에는 율의를 떠나 처중(處中)의 업도만이 존재하고, 만약 색계의 경우라면 오로지 율의만이 존재하며, 인취의 세 주와 욕계천에는 두 가지 종류가 모두 갖추어져 있다.
5.12. 업도에 의해 획득되는 과보
선ㆍ악업도에 의해 획득되는 결과는 어떠한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그 모두는 능히 이숙과와
등류과와 증상과를 초래하니
이는 다른 이를 괴롭게 하고
목숨을 끊고 위엄을 허물었기 때문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바야흐로 먼저 10악업도가 각기 세 가지의 결과를 초래하는 것에 대해 분별하리라.
그 세 가지란 무엇인가?
이숙과(異熟果)와 등류과(等流果)와 증상과(增上果)의 차별을 말한다. 즉 열 가지 종류의 악업도를 혹은 익히고, 혹은 닦고, 혹은 많이 짓게 되면,118) 그 같은 힘으로 말미암아 날락가에 태어나니, 이것은 바로 이숙과이다.
또한 거기로부터 나온 다음 이 세간으로 와서 태어날지라도 인간의 동분 중에서 등류과를 받게 되는데, 이를테면 살생을 행한 자는 수명의 길이가 단축되고, 불여취를 행한 자는 자재와 물자가 모자라 궁핍해지고, 욕사행을 행한 자는 아내가 정숙하지 않게 되고, 허광어를 행한 자는 많은 비방에 시달리게 되고, 이간어를 행한 자는 친구와의 화목함이 깨어지게 되고, 추악어를 행한 자는 항상 좋지 못한 소리[惡聲]를 듣게 되고, 잡예어를 행한 자는 말에 위엄이 있거나 엄숙하지 않게 되고, 탐욕자는 탐욕이 치성하고, 진에자는 미워함이 증가하고, 사견자는 어리석음[癡]이 두드러지게 된다.
어떠한 이유에서 사견이 어리석음을 더욱 두드러지게 한다는 것인가? 다른 것(사견?)을 익혔으니 마땅히 다른 것(어리석음?)을 증장시킨다고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119)
[이에 대해] 경주(經主)는 “그러한 품류(즉 사견)는 어리석음이 증성한 것이기 때문이다”고 해석하였다.120)
어찌 사견을 무명과 상응하는 것이라고 하지 않겠는가? [어리석음의] 상(相)과 작용이 증장하는 것은 사견에 근거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 이러한 뜻을 관찰하건대, 사견이 일어날 때 유사(有事)에 대해 행상(行相)을 갖지 않고 일어나 현견(現見)되는 것을 파괴한다. 이는 탐ㆍ진과 상응하는 무명이니, 그러한 어리석음[癡]이 증장하여 무거워지면 탐ㆍ진은 유경(有境)에 대해 행상을 갖고 일어나기 때문이다. 혹은 견행자(見行者)는 사견의 힘으로 말미암아 능히 진지(眞智)에서 멀어지게 되고 다시 멀어지게 되니, 어리석음이 증가한 자는 사견이 증대될뿐더러 어리석음이 일어남으로 말미암아 전도된 것을 추구(推求)하게 되기 때문이며, 사견이 증가한 자는 다시 어리석음이 더욱 증대될 뿐더러 [사]견이 일어남으로 말미암아 진지를 장애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 같은 사실에 따라 “사지(邪智)는 바로 정지(正智)의 직접적인 원수[近怨]이다”고 설하였으니, 무명과 한 패거리[朋黨]이기 때문이다.
이상이 바로 악업도의 등류과의 차별이다.
비록 짧은 목숨[壽]일지라도 인간 중에 [태어나는 것]은 역시 선업의 결과일 것인데, 어떻게 이것을 살생업도의 등류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경주(經主)는 이에 대해 이와 같이 해석하였다. “인간의 목숨이 바로 살생업도의 등류과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다만 살생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목숨의 길이가 단축되었다는 것을 말하였을 뿐으로, 살생업도는 인간의 명근(命根)을 장애하는 원인이 되어 오래 머물지 못하게 하는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121)
이러한 말의 뜻은 지극히 알기 어렵다. 만약 살생을 원인으로 하여 능히 ‘목숨의 단축’을 초래하게 되었다면, ‘단축’이라는 말은 어떠한 법에 근거한 것인가? 이는 바로 살생의 과보이지만, 목숨은 [살생의 과보가] 아니라고 한다면, 예컨대 금으로 만들어진 화살이 짧아도 금인 것처럼 목숨 역시 마땅히 그러하다고 해야 하니, 짧다고 어찌 목숨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어떻게 목숨을 살생의 과보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만약 “살생의 업도는 능히 명근 즉 수명의 재앙[命災]을 초래하는 것이기 때문에, 살생이 목숨을 초래하는 원인은 아니다”고 한다면, 무엇을 명근의 재앙이라 한 것인지 여기서 마땅히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이를테면 칼이나 독 등을 바로 그러한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니, 칼 등은 다만 재앙의 조건[緣]이 될 뿐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칼 등)을 살생의 등류과라고 말해서도 안될 것이니, 그것은 바로 유정의 증상과이기 때문이다.
[만약] “명근의 재앙과 명근의 장애[命障]는 그 뜻이 동일한 것으로, 이미 ‘살생업도는 명근을 장애하는 원인이 된다’고 말하였다”고 한다면, 명근의 장애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여기서 마땅히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다. 만약 “명근의 장애는 바로 목숨의 불생(不生)이다”고 한다면, 이에 대해 마땅히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니, 그것(목숨의 불생)은 존재하는 것[有]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존재하지 않는 것[非有]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만약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면, 결과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말이니, 정신이 있는 자[住本心人]라면 비존재[無]를 존재하는 것의 결과라고는 말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존재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는 목숨과 다른 것이 아니며, 그럴 경우 앞에서 설한 ‘목숨은 살생의 과보가 아니다’는 사실에 위배되는 것이다.
이치상 마땅히 “사람의 목숨은 살생의 이숙과라고 말해서는 안 되며, 다만 살생업도의 증상과와 가까운 것[近]이라고 말해야 한다.”고 해석해야 한다. 이를테면 비록 사람의 목숨이 바로 선업에 의해 초래되는 것일지라도 살생의 증상력으로 말미암아 그의 상속[신]은 오로지 적은 시간동안만을 거치게 되니, 욕계에서는 불선이 선보다 수승하여 [불선의] 증상력이 능히 선[의 증상력]을 조복시키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어떠한 까닭에서 [수명의 단축을 살생업도의] 등류과라고 설한 것인가?
증상과 중에서 [살생업도와] 가장 가까운 것(다시 말해 가장 직접적으로 초래되는 증상과)임을 나타내기 위해서였다. 만약 두 가지를 모두 증상과라고 하는 말로 설정한다면, 결과에 멀고 가까운 차별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나타낼 수 없는 것이다.122)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어떻게 불선업(즉 살생)이 수소단(修所斷)인 무부무기(짧은 목숨)를 등류과로 삼는다고 할 수 있을 것인가? 이는 이치에 어긋남이 없는 것으로, 그렇기 때문에 사람의 짧은 목숨은 바로 살생업에 의해 인기된 등류과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 같은 열 가지 악업도에 의해 초래되는 증상과란, 이를테면 외적 소유물로서 생활에 필요한 온갖 도구는 살생으로 말미암아 그 윤택함이 감소되고, 불여취로 말미암아 많은 서리와 우박을 만나게 되어 농사가 황폐하고 과실이 희소해지며, 욕사행으로 말미암아 온갖 진애(塵埃)가 많아진다. 허광어로 말미암아 온갖 악취(惡臭)의 더러움이 많아지고, 이간어로 말미암아 사는 곳이 험난해지며,123) 추악어로 말미암아 만지기 싫은 것[惡觸]이 많아질 뿐더러 밭에는 가시나 자갈과 염분이 많아지며, 잡예어로 말미암아 시절ㆍ기후에 이변이 생겨난다. 그리고 탐욕으로 말미암아 과실이 작아지며, 진에로 말미암아 과실이 몹시 맵게 되며, 사견으로 말미암아 과실이 적게 달리거나 혹은 달리지 않게 되니, 이것이 바로 악업도의 증상과의 차별이다.
한번의 살생업도가 지옥의 과보(즉 이숙과)를 초래하고 나서, 다시 [인취(人趣)에서의] 수명의 단축(즉 등류과)과 외적으로 나쁜 과보(즉 생활자구에 윤택함이 감소하는 증상과)를 초래한다고 해야 할 것인가?124)
유여사는 말하기를 “바로 한 번의 살생업도에 의해 먼저 [지옥의] 이숙과를 받고, 다음으로 [살생업도와] 가까운 증상과(즉 등류과)를, 마지막으로 [살생업도와] 먼 증상과를 받기 때문에 세 가지 과보가 존재한다”고 하였다.
이치상 실로 살생할 때, 죽임을 당하는 이로 하여금 괴로움을 받게 하고, 목숨이 끊어지게 하며, 위광(威光)을 상실하게 한다.125) 즉 다른 이로 하여금 괴로움을 받게 하였기 때문에 지옥에 태어나고, 다른 이의 목숨을 끊었기 때문에 인취 중에서 수명이 단축되는 것으로, 전자는 가행의 과보이며, 후자는 바로 근본의 과보이지만, 근본과 근분(近分)을 다 같이 살생이라 이름하였다. 그리고 다른 이의 위광을 허물어뜨림으로 말미암아 좋지 못한 외적 자구(資具)를 초래하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한번의] 살생업도에 의해 세 종류의 과보를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그 밖의 악업도에 대해서도 마땅히 이치대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이상의 사실에 따라 선업도가 초래하는 세 가지 결과에 대해서도 마땅히 이에 준하여 알아야 할 것이니, 이를테면 살생을 떠나는 것을 혹은 익히고, 혹은 닦고, 혹은 많이 짓게 되면, 이 같은 힘으로 말미암아 하늘 가운데 태어나는 이숙의 과보를 받게 된다. 또한 거기로부터 몰하고서 인취 중에 태어나 지극히 긴 목숨이라는 [이살생계(離殺生戒)와] 가까운 증상과를 받으며, 다시 이것(많이 짓게 되는 것, 즉 후기)에 의해 대위광(大威光)이라는 [이살생계와] 먼 증상과가 존재하여 외적인 온갖 자구를 초래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밖의 선업도의 세 가지 과보에 대해서도 악업도의 경우와 반대로 설해 보아야 할 것이다.
5.13. 방론-사명(邪命)을 사어(邪語)ㆍ사업(邪業)과는 별도로 설한 이유
또한 계경에서 설하기를, “8사지(邪支) 중의 색업은 세 가지로 분별되니, 이를테면 사어(邪語)ㆍ사업(邪業)ㆍ사명(邪命)이 바로 그것이다.”고 하였다.126)
사어와 사업을 떠나 사명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을] 것인가?
비록 그것을 떠나 사명은 존재하지 않을지라도 별도로 설하게 된 이유에 대해 게송으로 말하겠다.
탐으로부터 생겨난 신ㆍ어업을
‘사명’이라 하니, 제거하기 어렵기 때문으로,
생활자구에 대한 탐에서 생겨났는 주장은
경설과 모순되기 때문에 올바른 이치가 아니다.
논하여 말하겠다.
진에와 우치에 의해 생겨난 어(語)와 신(身)의 두 가지 업은 순서대로 오로지 사어(邪語)와 사업(邪業)이라고 이름할 뿐이지만, 탐으로부터 생겨난 신ㆍ어의 두 가지 업은 사어ㆍ사업이라고 이름할 뿐더러 또한 역시 사명(邪命)이라고 이름하기도 한다. 즉 그것은 제거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두 가지 업과는 다른 별도의 명칭을 설정한 것으로, 탐은 미세하여 능히 온갖 유정의 마음을 앗아갈 뿐더러 지극히 총명하고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으로부터 생겨난 업을] 금하고 방호하기란 매우 어렵다. 그래서 이것을 [앞의] 두 가지에 비해 제거하기가 지극히 어렵다고 한 것으로, 재가자들은 수많은 길상(吉祥) 등에 대해 그릇되게 집착하기 때문에 사견(즉 우치)을 끊기 어렵지만, 출가자들은 사명을 제거하기가 어려우니, [세간에] 존재하는 생활의 방편[命緣]은 모두 다른 이들에게 소속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정명(正命)을 은근하고 엄중히 닦게 하기 위해 앞의 것(즉 사어ㆍ사업)을 떠나 별도의 한가지로 설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유여사는 주장하기를 “생활[命]의 자구를 대상으로 하는 탐욕에 의해 생겨난 신ㆍ어의 두 업만을 바야흐로 사명(邪命)이라고 이름할 뿐, 그 밖의 탐에 의해 생겨난 업은 사명이라 이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스스로의 희락(戱樂)을 위해 노래하고 춤추는 등의 일은 생활을 자조(資助)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는 경설에 위배되는 것으로, 이치는 결정코 그렇지가 않다. 즉 『계온경(戒蘊經)』 중에서 코끼리 싸움을 구경하는 일 따위에 대해서도 세존께서는 역시 사명의 하나로 규정하고 있으니, 그것은 외적 대상[外塵]을 그릇되게 향수하여 부질없이 목숨을 이어가는 것이기 때문이다.127) 이 같은 사실에 따라 생활의 자량이 되지 않을지라도 탐에 의해 일어난 신ㆍ어업을 바야흐로 ‘사명’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그리고 정어(正語)ㆍ정업(正業)ㆍ정명(正命)은 이와 반대되는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어떠한 이유에서 [10]업도 중에서는 신업을 먼저 설하고 어업을 나중에 설하였는데, 8도지(道支) 중에서는 어업을 먼저 설하고 신업을 나중에 설한 것인가?
업도 중에서는 거칠고 미세함에 따라 설한 것이지만, 도지의 차례는 서로를 낳게 되는 순서에 의거하여 설하였기 때문으로, 계경 중에서도 “찾아 살피고[尋伺] 나서 말을 발하게 된다”고 설하고 있는 것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