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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에 제주 동서종주를 한 적이 있다. 제주도 동쪽 끝 성산 일출봉에서 출발해 한라산을 넘어 서쪽 끝 수월봉에서 마무리한 3박4일에 걸친 길고 험한 여정이었다. 지리산 태극종주나 설악산 서북-공룡능선 종주보다 더 힘들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100km가 훨씬 넘는 긴 코스로 인해 그저 걷기에만 급급했다. 그래 이번은 그중에서 짧은 구간을 택해 제주의 중산간 지대를 제대로 느껴보고 싶어서 다시 제주로 향했다.
이번에 잡은 코스는 영실 입구에서 출발해 서광다원이 있는 오설록까지다. 유난히 많이 나타나던 갈림길과 울창한 숲, 가시덤불로 인해 동서종주 때 고생이 심했던 구간이다. 그런데도 이 코스를 택했던 것은 한라산국립공원의 오희삼씨가 적극 추천한 코스였고, 관광객들에게 잘 알려진 한라산 동쪽의 오름들에 비해 명성이 덜한 서쪽 오름들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정상부에 돌이 많아 돌오름
이순열씨가 신기한 모양의 풀을 발견하고 살펴보자 오명필씨가 급히 말린다.
“이 풀은 사약을 만들 때 재료로 썼던 천남성입니다. 이파리에도 독성이 있어요. 조심해야 하는 독초입니다.”
그러고 보니 천남성이 고사리보다 더 많이 보인다. 뱀을 연상시키는 섬뜩한 빛깔의 뾰족한 순을 이제 막 밀어 올리거나 꽃을 피운 것도 더러 있다. 커다란 이파리의 섬천남성과 꽃대가 가느다란 두루미천남성에 넓은잎천남성까지 다양한 종류가 뒤섞였다
1.4km 들어선 지점에서 한라산둘레길이 합류해 돌오름까지 동행한다. 주변으로 표고버섯재배지가 유난히 많이 보인다. 대규모다. 일대가 표고버섯재배로 유명한 곳이란다.
곧 개울을 만난다. 평소엔 건천이라는데, 바닥에 물이 보인다. 그저께 내린 비 때문이란다. 폭이 10m쯤 되어 보이는 개울은 온통 화산암으로 가득하다. 신기하게도 전체가 하나의 바위다. 모양도 기이해 멋진 산수화를 보는 듯, 그 조화들이 신비롭다.
“이런 거친 바위로 된 개울은 생긴 지 얼마 안 된 것입니다. 그래서 바위 모양이 다 살아 있죠.”
그 많은 오름을 어찌 다 기억할까?
바람이 심해 잠을 설친 후 맞은 다음날 아침, 비가 내리지 않았고, 이슬도 없어 쾌적하다. 아침식사 후 야영지를 정리하고 다시 오른 영아리오름 정상. 트인 서쪽 풍광으로 오름들이 포도송이처럼 한가득이다. 남송악, 원물오름, 감낭오름, 조근대비악, 도너리오름, 당오름, 정물오름, 금오름, 동박이, 고수치, 왕이메오름, 새별오름, 북도라진오름, 폭낭오름…. 비슷비슷해 보이는 저 많은 오름을 그는 어찌 다 기억하고 구분할까? 하나하나 짚어가며 설명해 나가는 오명필씨가 기인(奇人) 같다.
김기조씨가 오설록에 와 있는 이순열씨를 픽업해서 중간의 광평동에서 만나기로 하고 나와 오명필씨는 영아리오름을 출발한다. 나인브릿지골프장 쪽으로 내려선 후 다시 너른 임도를 따른다. 임도 주변으로 사람이 들어와 살았던 흔적이 역력하다. 묵밭과 건물 잔해들, 그리고 제주의 돌로 쌓은 담장이 아직 그대로다.
제주 서부지역의 중심지였던 노형리에 속했던 광평마을은 제주에서 가장 높은 지대에 형성된 마을로, 4·3사건에 휘말려 초토화되었다가 다시 세워진 아픈 과거를 간직하고 있다. 더 높은 지대에 마을이 형성되지 못한 것은 물 때문이란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비가 내리는 제주지만 섬 전체가 화산지형이어서 대부분 땅속으로 스며들어 물이 귀하다고. 그래서 마을은 저지대의 물이 나는 곳에서만 형성된다. 제주의 물은 두 종류로 나뉘는데, 고인 물인 ‘봉천수’와 솟아나는 물인 ‘용천수’로, 이를 중심으로 마을이 섰단다.
코스가이드
영실-남송악 경량 야영산행
영실에서 출발해 남송악 아래 오설록 티뮤지엄까지는 전체 26km쯤의 거리로, 돌오름과 영아리오름, 조근대비악, 감낭오름, 원물오름, 남송악 6곳의 오름을 거친다. 대부분 중산간 임도를 따라 길이 이어지지만 조근대비악에서 평화로까지는 밭을 가로지르고, 원물오름에서 오설록 앞을 지나는 신화역사로를 만나기까지는 가시덤불 사이에서 길을 찾아야 한다.
그러나 이 구간들이야말로 가장 제주스러운 풍광을 만끽할 수 있다.
최근 오름을 찾는 이들이 많아지며 오름마다 길이 뚜렷하다. 그러나 들머리를 놓치면 아무리 작은 오름이라도 호되게 고생해야 하니 길을 찾아 오르도록 한다. 조망이 빼어나고, 풀밭으로 된 평지가 많은 오름 정상부는 비박지로 최고다. 그러나 바람이 심할 경우 애를 먹기도 한다. 이도 즐길 수 있다면 오름 정상부를 적극 추천한다.
몇 곳의 계곡과 습지, 마을을 지나지만 제주의 지형적인 특성상 충분한 양의 물을 미리 챙겨가는 게 좋다.
영실~오설록 구간은 아침에 출발할 경우 해가 지기 전에 완주할 수 있는 거리다. 그러나 제주 오름에서의 하룻밤 비박을 만끽하려면 영실에서 오전에 출발할 경우 조근대비악이나 원수악에서 비박하면 좋고, 점심때쯤 출발한다면 영아리름이나 조근대비악이 적당하다.
전체적으로 길이 비교적 잘 이어지지만 정해진 코스가 있는 것은 아니니 헛갈리면 중간 중간 거치는 오름을 기준으로 방향을 정하면 된다. 그러나 잘못 들어선다면 가시덤불 사이에서 옴짝달싹 못하고 갇힐 수도 있어서 지도를 수시로 확인하고 GPS의 도움을 받는 게 좋다.
교통
출발지인 영실 입구의 삼거리로 가려면 제주시와 서귀포시 중문동을 잇는 1139번 도로(1100도로)를 이용하면 된다. 제주시에서 50분쯤, 중문에서 30분쯤 걸린다. 제주시 시외버스터미널(2번 홈)에서 어리목과 영실을 지나 서귀포시 중문까지 오가는 버스가 영실 입구에 선다. 1일(06:30~15:00) 한 시간에 한 대꼴로 다닌다. 요금은 터미널에서 출발하면 2,000원, 중문에서는 1,000원. 제주 시외버스터미널(10번 홈)에서 영어교육도시를 지나 모슬포항까지 1일(06:00~19:40) 12회 오가는 버스가 남송악 오설록 앞에 선다. 47분쯤 걸리며, 요금은 2,500원.
숙식
옛날 궁중에서 즐겼다는 각종 꿩고기 요리를 맛볼 수 있고 그에 더해 직접 꿩을 사냥할 수도 있는 대유랜드(064-738-0500). 100만 평이 넘는 넓은 들판에서 즐기는 수렵과 클레이· 권총·라이플 사격과 ATV, 제주 전통의 꿩요리와 흑돼지샤브샤브·흑돼지구이를 만끽할 수 있는 종합레포츠타운이다. 꿩은 대유랜드 측에서 사육해서 풀어 놓는 것과 야생의 꿩이 날아와 돌아다니는 것이 섞여 있단다.
꿩요리는 코스로 즐기기도 하는데, 꿩사시미· 꿩다리구이·꿩튀김·꿩샤브샤브나 전골· 꿩만두·메밀면·후식이 나오는 A코스(5만 원)와 여기서 꿩사시미가 빠진 B코스(4만 원), 꿩튀김까지 뺀 C코스(3만 원)가 있다.
단품요리로는 일본인의 경우 꿩샤브샤브(1만5,000원)와 꿩사시미(2만 원)를, 우리나라 사람들은 꿩전골(1만5 000원)을 많이 주문한단다. 중문관광단지에서 멀지 않은 서귀포시 상예동에 있다.
저렴한 게스트하우스부터 특급호텔까지 제주에는 모든 종류의 숙박시설이 갖춰져 있다. 최근 배낭여행객들 사이엔 게스트하우스 이용이 붐을 이루고 있다. 현재 제주에는 올레로 인해 400곳이 넘는 게스트하우스가 성업 중이다. 서귀포시 법환동에 ‘가름 게스트하우스(010-9411-4490)’가 있다.
주변명소
오설록 티뮤지엄 평화로를 타고 중문 방향으로 달리다가 제2산록도로를 지나 동광리 부근에서 우회전하면 국내 최대의 차 종합전시관인 ‘오설록 티뮤지엄(064-794-5312)’을 만난다. 화장품 회사 ‘태평양’이 제주도에서 운영하고 있는 세 개의 다원 중 가장 큰 서광다원이 이곳 오설록 티뮤지엄 앞에 펼쳐져 있다. 녹차 밭이라면 흔히들 영화나 드라마의 단골 무대로 등장했던 보성을 떠올리지만, 화산토의 배수력이 뛰어난 유기질 토양에 온화한 기온, 강수량 많은 제주야말로 중국 황산, 일본 후지산과 함께 세계 8대 녹차산지로 꼽힐 만큼 최적지다.
다원의 중심지역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차 박물관인 ‘오설록 티뮤지엄’이 자리하고 있다. ‘태평양’이 명맥이 끊긴 우리 전통 차 문화를 계승하고, 더욱 많은 이들이 차 문화를 체험토록 추사 김정희가 차를 가꿨던 유서 깊은 차 유적지 제주에 국대 최대규모의 차 종합 전시관을 개관한 것이다. 입장료는 따로 없으며, 옛날 선조들이 차 문화를 즐겼던 다기와 관련 유물들을 살펴볼 수 있다. 전망대도 마련되어 있는데, 한라산과 주변 오름들 사이에 펼쳐진 너른 다원 풍광을 시원스레 살펴볼 수 있다.
녹차 밭 사이를 산책삼아 걸어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늘이 없기 때문에 모자를 쓰거나 사전에 자외선차단제를 바르는 것은 필수. 제주올레 14-1코스인 ‘저지-무릉올레’가 오설록 티뮤지엄을 감싸며 지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