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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행 55
베트남의 수도 하노이, 관광지 하롱베이
*베트남 가는 길
베트남으로 여행하기 위해서 인천공항을 떠난 것은 2008년 11월 20일, 오후 7시 30분 비행기였다. 인천에서 하노이 국제공항까지의 비행시간은 4시간 30분. 하노이 공항에 내린 것은 현지시간으로 오후 10시 30분이었다.(한국 시간은 밤 12시가 된다.) 우리와 일행이 된 여행객은 모두 6명, 남자 2명 여자 4명이다. 환율의 급등으로 여행이 쉽지 않아서 여행객이 급감한데다가 2명이 공항에서 출국하지 못했다. 여자 1명은 여권이 손상되어서였고, 남자 1명은 구여권을 잘못 소지해서였다고 한다.
마중 나온 가이드는 두 딸의 아버지인 45세, 현지 가이드는 28세의 젊은이였다. 비행장에서 하노이 시내까지는 45분 정도. 그동안 가이드는 간략하게 베트남에 대해서 설명한다. 베트남은 인구의 65%가 30대 미만이며, 석유 매장량이 50만 배럴로 풍부하고, 커피는 세계 2위의 생산지. 쌀도 북부는 2모작, 남부는 3모작으로 세계 2위의 수출국이란다. 농산물의 품질도 우수하고 한치, 고등어 등의 해산물도 품질이 매우 우수하다고 설명한다.
차는 하노이 시가를 가로지르는 홍강의 다리를 건너고 있다. 다리의 교각마다에 ‘LG’의 로고가 찍힌 깃발이 걸려 있다. 관광객의 시선이 그 로고에 머물자 가이드는 LG 기업이 베트남에서 가장 우수한 기업으로 각광받고 있다고 설명한다. 해마다 베트남 국가에서 수여되는 기업상을 휩쓸 만큼 인식이 좋다고 한다. LG 외에도 한국의 삼성, 현대의 진출이 두드러지는데 특히 자동차의 경우는 버스의 90%가 현대차라고 한다. 우리가 탄 12인승 봉고차도 현대 상표가 부착되어 있었다. 승용차의 경우 소형은 대부분 한국의 마티스라고 한다. 중형은 일본제. 대형은 미국제가 인기를 누린다.
차가 달리는 가로에는 아파트를 비롯한 각종 고층건물이 새로 들어서고 있는데 하노이는 이제 한참 신도시 건설에 열중하고 있다고 한다. 행정복합도시로 건설되고 있는 이 신도시는 공항에서 하노이 시내로 들어가는 길목이다. 우리의 눈에 제일 우뚝 치솟은 건물이 세계에서 5번째로 큰 건물이라는데 한국의 ‘경남건설’이 맡아서 짓고 있는 중이라고 한다.
베트남은 우리에게는 ‘베트남 전쟁’으로 각인되어 있는 나라다. 우리나라의 맹호, 청룡 부대가 파견되어 월남을 위해서 싸운 곳이다. 미국의 요청으로 구원군의 명목으로 전투에 참여하여 치욕적인 패배를 당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런 점에서 현재의 베트남 공산당 정권은 우리와는 적대 관계이지만 세월과 더불어 그런 것은 먼 기억으로 사라지고 지금은 경제적 동반자일 뿐이다. 수많은 피를 흘린 전쟁의 희생을 떠올리고 보면 과거의 이념이란 얼마나 허망한 일인가? 아니 과거의 모든 전쟁이 허망 그 자체란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 베트남의 지형과 메콩 삼각주
베트남은 인도차이나 반도의 동단에 남북으로 약 1,600㎞에 걸쳐 길게 뻗어 있다. 남중국해에 연해 있으며 최대 너비는 약 650㎞로 이 길이는 라오스와 맞닿은 북부 국경에서 통킹만에 이르는 거리이다. 국토는 크게 북부 고원지대, 홍강과 통킹 삼각주, 안남 산맥, 해안저지대, 메콩강 삼각주의 다섯 지역으로 이루어진다. 베트남의 행정 구역은 수도인 하노이를 포함하여 껀터, 다낭, 하이퐁, 호치민은 직할시가 되고 그 밖의 지방은 8개의 지역으로 구분하여 59개의 성(省)으로 구분된다.
북서부는 산악지대로 중국과 라오스 영토 안까지 뻗어 있다. 이 지역의 산들은 대부분 숲이나 밀림으로 덮여 있어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다. 베트남에서 가장 높은 산인 판사판 산(3,143m)도 이 지역에 있다. 홍강 삼각주는 북부 고원지대에서 통킹만까지 뻗어 있으며 거의 전역이 해발 3m 이하의 저지대이다. 통킹 삼각주는 베트남 북부에서 주요한 농경지대로 예부터 베트남 민족의 활동 무대이다. 안남산맥은 북부 고원지대에서 서부지역을 가로질러 호치민시에서 북쪽으로 약 80㎞ 떨어진 지점까지 뻗어 있다.
중부는 대부분이 안남산맥으로 이루어지며, 평야는 해안에 접해서 띠처럼 좁게 이어진다. 게다가 산맥이 해안으로 바싹 다가서 있으므로 좋은 항만이 없다. 이 산맥의 고지에는 타이족 이외에 먀오족·모이족·몬타냐족 등 많은 소수민 부족이 살고 있다. 해안저지대는 베트남의 중동부지역을 차지하고 있다. 산지에서 남중국해 쪽으로 비스듬히 비탈져 있고, 송코이강 삼각주에서 메콩강 삼각주까지 펼쳐져 있다. 거의 전역에서 쌀을 생산한다. 해안에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어업에 종사한다. 베트남의 남부지역을 모두 차지하고 있는 메콩강 삼각주는 해발 3m 이하의 저지대이다. 베트남 주민의 절반 이상이 이곳에 살고 있다.
메콩강 삼각주는 베트남의 곡창지대다. 메콩이란 말은 ‘메’는 한자로 ‘어미 모(母)’이고, ‘콩’은 한자로 ‘강(江)’을 발음한 것이니, ‘메콩’은 곧 ‘어머니 강(母江)’이다. 강물은 흙탕물이지만 이 나라의 젖줄이다. 이 강은 중국의 티벳 고원에서 발원하여, 라오스, 태국, 캄보디아를 거쳐 베트남까지 장장 1,500km를 흐른다. 그리고 약 220km의 베트남 내륙을 가로지른 다음 베트남 동해로 들어간다.
메콩 강에는 지류가 많고 강변에는 야자나무가 많이 서 있다. 강의 폭이 4.5km나 된다고 한다. 수심은 썰물 때 10m, 밀물 때 13m 정도이고, 수로가 잘 발달되어 농사짓기에 아주 좋다. 건기에도 밀물 때가 되면 수로로 물이 넘친다. 삼각주가 발달하여 이루어진 커다란 4개의 섬이 있는데, 주민들 대부분이 주로 농업에 종사한다. 현재 베트남 쌀의 4분의 3이 이곳에서 생산된다.
강의 가장자리에 서 있는 야자나무는 이곳 사람들에게 효도나무라고 불린다. 야자나무는 육지에서 자라는 육지 야자와 물에서 자라는 물 야자의 두 종류로 크게 나눌 수 있는데, 이곳에는 물 야자가 대부분이다. 야자열매의 딱딱한 껍질 속에는 물이 차 있는데 음료수로 사용하고, 껍질에 붙은 과육은 코코넛 캔디를 만드는 데 사용하고, 껍질은 땔감으로 사용한다. 기둥은 물에서도 잘 썩지 않기 때문에 수상 가옥을 짓는데 사용하고, 잎은 지붕을 엮는데 사용되는데 버릴 것이 하나도 없는 나무인 셈이다.
*맑고 아름다운 호수가 있는 닌빈
호텔에서 8시에 아침 식사를 끝내고 닌빈으로 향했다. 약 2시간 걸리는 거리였다. 닌빈은 육지의 하롱베이라 불리는 곳으로 논과 강을 배경으로 겹겹이 보여지는 석회암과 카르스트지형이 매력적인 곳이다. 삼판이라는 나룻배를 타고 도시를 둘러싸고 있는 운하를 따라가며 관광을 할 수 있다. 배는 좁은 오동강 수로를 따라 천천히 나아가는데, 푸른 벼가 자라는 논밭과 드문드문 보이는 인가, 그리고 한가로이 농사를 짓는 농부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평화로운 시골 풍경이 정겹게 느껴진다.
닌빈 시내에서 남서쪽으로 9km 지점에 땀꼽이 나온다. 땀꼽은 ‘세 개의 동굴’이라는 뜻으로 항까, 항그어, 항꾸오이라는 동굴이 있다. 선착장에서 1시간 정도 쪽배를 타고 올라가면 형태와 색깔이 다른 다양한 종유석과 석순으로 이루어진 동굴을 만나게 된다. 그 중 항까이 동굴 길이는 130미터로 가장 길고 주변 경관 또한 아름답다. 기암괴석과 수직 절벽, 3개의 지하수 동굴 등이 볼만 했다. 삼판은 2인승의 대나무 배인데 나는 아내와 한 조가 되었다. 노를 젓는 월남 아가씨가 매우 명랑해 보였다. 말이 통하지 않지만 손짓, 발짓으로 의견을 교환하는 재미도 크다. 호수의 물이 맑아서 수초의 뿌리까지 모두 보일 정도였다. 노를 젓는 월남 아가씨가 안쓰러워 노를 넘겨받아 직접 저어 보았지만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하롱베이(Halong Bay)의 절경
닌빈 관광을 마치고 바로 하롱베이를 향해서 떠났다. 가는 도중 베트남의 자연 풍광들이 차창으로 스친다. 넓은 들판의 논들. 풍요로운 자연환경이다. 무논에서 자라는 벼농사의 익숙함 때문인가? 우리의 농촌과 너무나 닮아 보인다. 가이드는 베트남 사람들의 어른 공경 풍속이나 대가족 제도에서의 형제애 등이 한국과 유사하다고 설명한다. 그런 설명을 들으며 저녁때가 되어서야 하롱베이에 도착했다.
바다와 면한 항구에 시가지가 형성되어 있었다. 관광객들은 가이드의 안내에 따라 전통시장을 구경했다. 마른 생선을 포함하여 다양한 물건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우리의 어촌 시장을 연상케 했다. 부두에 바짝 붙여지은 한국인 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했다. 이곳에서 제일 좋은 위치라고 한다. 좌석이 수백 개가 되는 대형 식당이었다. 세계 어디서나 체험하게 되는 한국의 위상이다.
호텔에서 아침 식사를 마치고 우리 일행은 선착장으로 나갔다. 선착장에는 형형색색의 깃발로 치장을 한 유람선들이 빼곡하다. 그 광경만으로도 별천지에 온 느낌이 들 정도였다. 우리는 가이드가 지정해 준 유람선에 올랐다.
하롱베이는 베트남 북부에 위치한 만(灣)인데, 수많은 크고 작은 섬과 석회암 기둥이 에메랄드 빛 바다 위로 솟아 있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과 환상적인 동굴이 있는 섬들이 절경을 이룬다. 험준한 지형이어서 사람이 살지 못하다 보니 자연 그대로를 보존할 수 있었는데 그래서 유네스코에서 자연공원 세계유산으로 지정했다. 이곳엔 오래 세월 살아온 많은 종류의 포유동물과 파충류, 조류가 서식하고 다양한 종류의 식물도 많다고 한다.
'하롱(下龍)'이란 하늘에서 용이 내려온 곳이라는 뜻이다. 하롱베이의 전설에 의하면 바다 건너 외적들이 이곳을 침략하였을 때 하늘에서 용이 내려와 폭풍우와 격랑을 일으켜 외적을 격퇴했는데 그때 내뿜은 천둥과 번개들이 바다로 떨어지면서 갖가지 모양의 기암(奇巖)이 되었고 그것이 지금처럼 수천 개나 되는 섬으로 변했다는 것이다. 많은 섬들 때문인지 이곳은 호수처럼 잔잔하다. 병풍처럼 둘러쳐진 수 천 개의 섬들이 서로 방패막 역할을 해서 파도가 거의 일지 않는다. 호수같이 잔잔한 해면 위로 코끼리섬, 낙타섬, 원숭이섬, 거북이섬 등을 포함해서 여러 이름의 무수한 섬들이 솟아 있다.
선착장을 떠나서 1시간 정도 지나자 호수처럼 잔잔한 바닷물 위에 떠 있는 섬과 기암이 관광객들을 마중한다. 멀리서 보면 산들의 능선이 하나로 이어진 것처럼 보이는데 가까이 다가가면 제각기 떨어진 봉우리다. 크고 작은 동굴들도 50여 개를 헤아린다고 한다. 그 중에서 가장 알려진 것이 '놀라운 동굴'이란 이름이다. 하롱베이에서 가장 크고 넓은 동굴이다. 이 동굴의 내부는 크게 세 개의 공간으로 구분되는데 갈수록 입을 벌리며 놀라게 된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남녀가 포옹하며 입을 맞추는 모습, 닭이 목을 빼고 우는 모습의 종유석이며 석순의 형태가 놀랍다. 천장의 선명한 물결무늬와 거대한 용의 모습에도 눈을 뗄 수 없다.
가이드가 특별히 주선해서 보트를 세내어 찾아간 곳은 자연 요새와 같은 모양의 호수다. 기암의 좁은 입구를 통해 들어가니 감추어진 항구같은 넓은 호수가 나온다. 영화의 촬영지로도 유명하다고 하는데 마치 지상에 비밀리에 건립한 우주기지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한다.
수천 개가 넘는 섬 가운데서도 두 발로 직접 체험할 수 있는 섬은 10여개 밖에 되지 않는다. 그 중에서 해발 30미터의 티톱섬은 하롱만을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전망대가 있다. 관광객들은 모두 그 섬의 전망대로 올라갔다. 그리 높지는 않지만 여름의 무더위에 오르기가 만만치 않다. 정상에 있는 전망대에 이르니 끝없이 펼쳐진 하롱베이의 또 다른 전모를 조감하게 된다. 망망대해에 떠 있는 수천 개의 섬들, 기암과 괴석, 마치 한 폭의 산수화 속에 들어가 있는 느낌이다.
하롱베이의 혼가이섬에는 호아빈 문화로 알려진 1만 년 전 인류의 유적이 발견되기도 했다고 한다. 수상마을도 있다. 하롱베이 일대에는 20~30가구가 모여 있는 수상마을 5곳이 있는데 봉비엔이 가장 아름다운 수상마을로 꼽힌다. 깊은 산속의 오지처럼, 섬으로 빙 둘러쳐진 바다 한쪽에 조용히 자리한 마을이다. 육지의 작은 어촌을 연상케 한다. 바지선 비슷한 것을 연결해 '땅'을 만들고 그 위에 집을 지었다. 마을 사람들은 과일이며 생선을 배에 싣고 팔러 가기도 하고, 시간을 내 은행에서 일을 보기도 한다. 진주양식장도 있다.
관광객을 태운 유람선 선장들은 이들 수상가옥에서 운영하는 양어장에서 생선을 골라 관광객을 대접한다. 우리도 선장이 만들어준 싱싱한 다금바리 회에다 소주 한잔을 걸치는 기회를 즐길 수 있었다. 점심식사는 유람선 안에서 해결한다. 회뿐 아니라 밥, 스프, 야채볶음 등의 음식도 있다. 배를 타고 관광하는 시간은 약 5시간.
*베트남의 수도 하노이
하롱베이 호텔에서 일박하고 이른 아침을 먹은 후에 바로 하노이로 이동했다. 하노이는 입국할 때 이미 들른 곳이지만 호치민묘의 개관이 요일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그 일정에 맞추느라 하롱베이를 먼저 구경했던 것이다. 그래서 하노이 관광은 마지막 날 출국하기 진전의 일정으로 잡혀 있었다.
베트남의 수도 하노이에는 크고 작은 호수 300여 개가 있다. 그 중 호안끼엠은 특히 많은 이에게 사랑받고 있는 호수다. 규모는 그리 크지 않지만, 녹음이 우거진 풍경이 싱그럽고 상쾌하다. 주변에 카페도 줄지어 있다. 호수 가운데에는 녹손사원이 자리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사원안으로 들어가 행운을 빌며 향을 피운다. 호안끼엠 호수 남쪽으로 구시가지가 나온다. 좁고 복잡한 골목길이 이어진다. 거리에 넘치는 사람과 자동차, 자전거의 행렬. 베트남이 왕성한 기운으로 성장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베트남 명물인 자전거 택시 '시클로'를 타고 시내를 잠시 둘러보는 것도 관광 코스다.
하노이에는 호치민 주석이 냉동되어 있는 호치민묘, 호치민 생가, 호치민 박물관, 한기둥 사원 등이 있다. 베트남 국회와 공산당 본부 건물 건너편 넓은 바딘 광장에 짙은 갈색의 대리석으로 된 사각형의 웅장한 건물이 호치민의 묘다. 1975년에 세워진 이 묘는 검은 대리석으로 밑단을 깔고 다시 20개의 주홍색 대리석 기둥을 세운 뒤 그 가운데에 호치민의 시신이 안치되어있다. 방부처리 된 이 시신은 자는 듯한 호치민의 생전의 모습 그대로다. 손바닥보다 작은 얼굴, 빈약한 수염. 그러나 그는 월남통일의 위대한 지도자였다. 묘 주변에는 네 명의 군인이 호위하고 있다. 유해를 모신 방을 빠져 나오면 전쟁당시 호치민이 기거했던 집무실과 집기들이 전시된 곳을 돌아볼 수 있다. 호치민은 베트남의 통일에 평생을 바친 분이다. 지금까지 국부로서 존경을 받고 있어 방문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호치민은 프랑스 배의 요리사로 취직해서 프랑스로 건너가 프랑스 공산당 창당에 참여하고, 귀국해 그 경험으로 인도차이나 공산당을 창립한다. 그 후 베트남 독립동맹회(베트민)를 조직, 완조 왕조로부터 정권을 탈취하고 베트남 민주공화국을 선언한다. 이들은 비엔 디엔 푸에서 월남을 지배하던 프랑스군을 대파한다. 프랑스는 월남 땅에 17도선을 그어 월남, 월맹으로 분할하고 손을 뗀다. 그는 월남의 저항세력인 베트콩(인민해방전선)을 충동질하고, 월맹정규군을 내려 보내 월남을 돕던 미국조차 축출하고 통일된 베트남 인민공화국을 건설한 인물이다.
호치민박물관은 1985년 8월 31일 착공하여 유네스코가 호치민을 ‘민족해방의 영웅이자 위대한 문화 인물“로 공인한 1990년 5월 19일 호치민 주석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개관되었다. 박물관 외관은 하얀 연꽃을 상징한다. 호치민 박물관 전시 내용은 3개 층에서 3부분으로 구분하여 전시된다. 호치민의 생애와 혁명사업, 베트남 국민의 호치민 유언 실현 전시관, 베트남과 호치민 시대의 베트남 국민의 투쟁과 승리 전시관. 베트남 혁명과 호치민 주석의 혁명사업에 영향을 준 세계 역사적인 사건의 주제별 전시관 등이다. 이곳에서는 호치민이 주고받던 서신과 사진, 영상물 등을 볼 수 있다. 호치민 박물관은 호치민 주석의 위대한 업적, 호치민의 사상 도덕성, 생활습관 등이 기록되어 있다. 베트남의 독립과 평화, 통일과 번영, 부강한 국가 건설의 염원과 의지를 담은 것이라고 하겠다.
공원 안에는 한 기둥사원이 있다. 일주사라고 불리기도 하는 불교 사찰로 1049년 연꽃을 본 따 1개의 기둥 위에 불당을 얹어 지었다. 불당은 작지만 고찰로서 정방형 연못 위에 떠 있는 자태는 매우 우아하다. 그리고 기둥이 하나뿐이라는 독특함 때문에 국보적 건축으로 보존되고 있다고 한다.
하노이 관광에서 빼놓을 없는 것이 수상인형극 관람이다. 수상인형극은 그 기원을 10세기 로 잡고 있다. 홍강이 만든 델타의 농촌지역의 농부들은 주변 자연환경에서 찾을 수 있는 자연재료를 이용해 인형극놀이를 즐겼다. 옛날에는 수확을 끝낸 후의 연못과 논둑이 중심무대였다. 수상인형극은 물이 고인 무대에서 행하여진다. 인형을 조정하는 배우들은 무대 뒤에서 긴 대나무 막대와 수면 아래 숨겨진 끈으로 인형을 조종한다. 꼭두각시 인형은 나무로 조각되고, 전통 베트남 오케스트라가 배경음악을 연주한다. 전통오페라 체오(Cheo) 가수가 꼭두각시의 얘기를 노래로 들려준다. 그 이야기에 맞추어 인형이 공연을 한다. 인형극의 주제는 베트남인들의 시골생활이다. 시골의 일상생활과 조부모가 손자에게 들려주는 베트남의 민화들. 작물을 수확하는 얘기. 고기를 잡는 얘기. 온갖 축제에 대한 얘기들이 나온다. 전설과 역사도 등장한다. 우리나라의 탈춤처럼 일상생활의 풍자와 위트가 넘치기도 한다. 이러한 예술형태는 북부베트남의 고유한 것으로서,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베트남에서만 찾아볼 수 있다고 한다.
*베트남 전쟁과 라이따한
베트남은 겉으로는 사회국가를 표방하지만 사유재산이 인정되고, 배급이 없고, 직업 선택의 자유가 있어 내용면에서는 자본주의 체제다. 국민의 70%가 종전 후에 태어난 30대 초반의 젊은이들이다. 국민소득이 아직 700불에 머물러 있지만 매년 8퍼센트의 고도성장을 하고 있다. 베트남의 현재는 참으로 활기에 넘친다. 그러나 그런 활기의 배경에는 오랜 고통의 시간이 있었다. 우리는 ‘베트남’ 하면 우리의 군대들이 파견되기까지 한 ‘베트남 전쟁’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베트남의 독립 전쟁은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다. 오래 전부터 중국과의 전쟁을 겪어 왔고 근세기에 들어서는 프랑스와 미국과의 전쟁을 치러야 했다. ‘베트남 전쟁’은 프랑스가 베트남을 남북으로 분할하고 손을 뗀 후에 미국이 이어받음으로써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1964년부터 1975년까지 베트남은 미국에 맞서서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이라고 불린 전쟁을 치러야 했다. 한국은 미국을 도와서 맹호, 청용부대를 파견했다. 치열한 전투를 치르며 많은 희생자를 내기도 했다. 이 전쟁은 1973년 1월 미국이 ‘파리평화회담’에 조인함으로써 월맹의 승리로 막을 내린다. 이 전투에서 사망자가 150만, 부상자가 300만이나 되었고 도시와 산업시설은 초토화 되었다.
이 전투의 마지막 장면은 탱크부대의 한 지휘관에 의해 연출된다. 1975년 4월 30일. 11시 30분. 해방군 탱크 2대가 대통령궁 정문을 무너뜨리며 밀고 들어갔다. 2층 발코니에서 베트남기가 끌려 내려와 땅바닥에 내던져지고 인민해방전선기가 오른다. 베트남전은 인민해방전선의 승리로 끝난다. 당시 월남의 대통령궁에서 대통령을 포박하고 월남기를 끌어내리고 월맹기를 올린 탄 중위는 전쟁영웅으로 칭송받았다. 그는 탱크부대 여단장인 대령으로 예편했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였던지 그는 공산당에 의해 추방되고 직장에서도 해고되었다. 그는 베트남을 떠났다. 그는 교전국이던 미국을 거쳐 프랑스 파리에 정착했다. 그는 파리에서 기억을 더듬으며 <간부요원의 망명>이라는 책을 집필했다.
베트남이 공산국가가 되자 공산당의 박해를 피해 목숨을 걸고 탈출한 사람들이 많았다. 이른 바 보트피풀이다. 그들은 무작정 보트를 타고 바다로 나갔다. 베트남이 아닌 어떤 곳으로 가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들을 환영하는 나라는 어디에도 없었다. 바다에서 정처 없이 표류하다가 배에서 죽게 되면 시체에 돌을 매달아 바다 속으로 던져진다. 그렇게 수장된 숫자가 25만 명. 이때에 국외로 탈출한 월남인이 90만 명이 넘는다고 한다. 전쟁의 비극이 남신 상처다.
월남전에 참전했던 미국 병사나 한국 병사들에게도 큰 마음의 상처를 남겼다. 그리고 종전 후에 한국 군인들과 월남 여자들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 한국인’의 처리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기도 했다. ‘라이 따한’이라고 불린 이들 혼혈 한국인은 종전 후에 신고 된 사람이 1500명 정도라고 한다. 그리고 신고하지 않은 사람까지 포함하면 약 5000명 정도로 추정된다고 한다. (일부 3만이니 5만이니 하는 추정은 과장된 것으로 보인다.)
우리가 처음 하노이 공항에 내렸을 때 많은 베트남 가족들이 꽃다발을 들고 아름다운 신부를 맞이하는 장면이 있었다. 처음엔 결혼한 신부가 신혼여행을 떠나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사실은 한국으로 시집간 딸이 남편과 더불어 귀국하는 것을 환영하기 위해서 나온 가족들이라는 것이다. 대가족제도에서 형제애가 남다른 이들이 돌아오는 딸을 대대적으로 환영하는 모양새였다. 앞으로 한국에서는 또 다른 형태의 ‘라이 따한’이 대거 출생할 것이고 이들은 모두 당당한 한국인이 될 것이다.
사람은 싸우면서 친해진다고 한다. 국가간에도 그런 모양이다. 동남아 국가중에 베트남은 우리에게 각별히 관심이 가는 나라다. 한 때 베트남의 한 쪽을 도와서 목숨을 걸고 싸우기도 했지만 지금은 두 나라간의 교역이 빠르게 증대하고 있고 매우 친근한 이웃 나라로 변해가고 있다. 더구나 국제결혼으로 한 가족이 되어 가는 두 나라의 미래는 또 새로운 어떤 모양이 될 것이다. 이렇게 변하는 것이 세상사인 모양이다.(*)